아직도 거기, 머물다 - 공경희 북 에세이
공경희 지음, 김수지 그림 / 멜론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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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유나라는 딸아이가 있다. 그 아이가 모리 교수처럼 강하고 고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며 엄마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아니, 그보다 내 자신이 그처럼 강하고 고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될 각오로 번역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책은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해준 글이었다. (p.113) 

 

대학 입학 면접시험 때 면접관은 내게 "왜 어문학 계열에 진학하려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다른 문화권과 우리 문화 사이의 다리가 되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미리 마음 먹었던 것도, 면접시험용으로 생각해둔 그럴듯한 대답도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떠오른 일종의 '재치'였는데 영문과 졸업 후 전혀 뜻하지 않게 번역 작업을 시작해서 십오 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요즘, 그 대답이 '재치'를 넘어 나도 모르게 운명을 말해버린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p.153)  

 

정신분열증을 끌어안고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던 고흐 덕분에 우리는 그의 강렬한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또 로트렉이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며 물랭루주의 무희들을 그림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낮은 존재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화가의 마음에 다가설 수 있다. 결국 예술가의 고통을 딛고 예술을 즐기는구나 싶어서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p.235) 

 

이 작품(달팽이는 왜 길을 떠났을까)을 번역하면서 나는 줄곧 '떠남'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일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매일 떠나는 여행은 아닐까 묻기 시작했다. 번역을 하면서 대하는 글, 거기 담긴 글쓴이의 생각과 그 글을 읽는 나의 느낌, 그것을 나의 이해력과 문화적 경험에 실어 우리말로 담아내는 일. 읽고 옮기는 글의 내용과 작가의 생각이 늘 바뀌고, 나의 표현도 늘 바뀐다. 혹시 그런 게 떠남이고 여행이고,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이 아닐까. (pp.345-6)



읽는 책이 대부분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번역가에게까지 관심을 가진 건 최근의 일이다. 아마도 일본어 번역가 권남희 님이 쓰신 에세이집 <번역에 살고죽고>를 읽고나서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특히 저자가 역자후기마다 딸 정하에게 보내는 문장을 남긴다는 부분이 인상에 남아 그 때부터 권남희 님이 쓰신 책을 읽을 때면 본문이 아닌 역자후기부터 살피는 특이한 버릇까지 생겨버렸다.



앞으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등을 번역한 영미 번역의 대가 공경희 님이 번역한 책을 읽을 때는 역자 후기에 혹시나 딸 유나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는지 찾아보는 버릇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25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공경희 님의 역자 후기를 모은 에세이집 <아직도 거기, 머물다>를 읽으면서 나는 번역가로서의 저자보다도 번역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아이의 엄마, 한 여자의 아내,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도 열심히 살고 끊임없이 성장한 저자의 모습에 더 많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딸 유나와 얽힌 에피소드들이 인상적이었는데, 십여 년 전만 해도 어린 딸에게 읽히고 싶은 동화책을 번역하던 저자가 이제는 숙녀가 된 딸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인물들을 소개하는 대목들을 보면서, 이렇게 어머니의 마음으로 책을 대하고 글을 쓰는 저자라면 독자로서 믿고 따를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번역한 책 중에 내가 읽은 것을 꼽아보니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파이 이야기>, <우리는 사랑일까>, <행복의 추구> 등등 제법 많았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이라는 것. 특히 <파이 이야기>와 <행복의 추구>는 페이지가 넘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는데 두 권 다 저자가 번역한 책들이라니 반갑고 고마웠다. 나도 언젠가 좋은 책을 번역해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소개해보고픈 꿈이 있는데 언제쯤 이루어질지...... 데뷔 이래 하루도 쉬지 않고 번역을 했다는 저자의 노고를 생각하니 꿈만 꾸고 노력을 안 해서는 택도 없는 일이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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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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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왜 이혼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다만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 그러나 텅 비어 막히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이어지는 골목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제중원 뜰에는 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박지원의 집앞에 있었던 나무, 홍영식의 집앞에 있었던 나무,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다녔던 그 골목길들, 그 가운데 서 있던 나무. 그 나무 한그루 말이다. 그녀와 내가 헤어진 지금, 이 모든 일이 과연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p.21)

  

역사학이란 내게 진실을 다가가는 도구였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거짓말이 들통나는 게 아니라 들통난 것들이 거짓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p.43)

  

그런 역사책은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거짓말이라고 내 얼굴에 침을 뱉지. 고작 일백년도 지나지 않아 휴짓조각으로 버려진 믿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내게 마구 발길질을 하지. 그게 바로 자신이 사내라고 믿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하는 일이지. 왜냐하면 내 손이 바로 진실을 말해주니까. 역사책에 나와 있지 않은 진실을 말해주니까. (p.76)

 

 

불면의 밤. 새벽 세 시가 되어도 잠이 안 와 할 수 없이 책을 꺼내들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김연수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였다. 김연수 작가를 무척 좋아해서 신간이 나오는 대로 구입은 하고 있지만 읽은 책은 사실 얼마 안 된다. 이 책도 사놓고 읽지 않은 채로 놔둔 지 꽤 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죄책감 비슷한 것을 안고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이 손에 잡혔고 밤은 길고 잠이 안 오니 읽을 수밖에(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도 잠이 안 와서 밤을 꼴딱 새웠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은 주로 최근작들만 읽어서일까. 2005년작에 나온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만 해도 왠지 거칠고 투박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기는 좋았는데, 그건 김연수 하면 떠오르는 특징들, 그만의 작품 세계가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내가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계관이 아주 넓다는 것이다. 시대적으로는 근현대부터 조선시대를 넘나들고, 공간적으로는 외국을 무대로 하는 것도 많고 아예 외국인이 주인공인 경우도 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실린 작품들을 보면, 맨처음에 실린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에는 전철에서 우연히 전처를(말장난?) 만난 남성이 안국동과 가회동 주변을 걷다가 박지원을 떠올리고,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는 한 청년이 자살한 여자친구가 죽기 직전에 <왕오천축국전>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서울 시내, 특히 경복궁 근처의 북촌 주변을 걸을 때마다 불과 백 여 년 전만 해도 갓 쓰고 도포 입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걸어다녔다는 생각을 하며 설레고, <왕오천축국전>처럼 몇백 년도 전에 쓰인 글을 보며 감격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각이 아닌가 싶다. 



이국의 정서가 녹아있는 것도 김연수 소설의 특징 중 하나다.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의 주인공은 일본인, <뿌넝숴>의 주인공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 노인, <거짓된 마음의 역사>의 주인공은 19세기 말 조선에 파견된 미국인 탐정이다. 주인공이 한국인이고 한국이 배경이어야 한국소설로 분류될 수 있다면 이 소설들은 한국소설로 분류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타자를 인식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 소설들을 읽고 있노라면 외국과 다른 한국만의 정서와 문화, 전통이 더욱 뚜렷하게 보여 오히려 한국소설임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비슷한 원리로 오로지 자기 안에만 침잠하지 않고 외부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오히려 자아를 드러내는 것도 김연수 소설의 특징 중 하나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대부분이 역사나 세계 같은 거창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막상 읽어보면 역사 속의 개인, 세계 속의 개인이 보이고 궁극적으로는 사람, 그리고 내가 보인다. 시공간뿐 아니라 자아와 타자,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경계까지 자유로이 누비는 김연수의 작품 세계가 나는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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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힘 - 반복되는 행동이 만드는 극적인 변화
찰스 두히그 지음, 강주헌 옮김 / 갤리온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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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습관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면, 하다못해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운동을 시작하게 되면, 운동과 관계없는 삶의 다른 부분들까지 부지불식간에 바뀌기 시작한다. 운동을 시작하면 식습관이 좋아지고, 생산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담배도 덜 피우고, 동료들과 가족들에 대한 인내심도 깊어진다. 신용 카드도 한층 절제해서 사용하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에게 운동이 다른 변화를 광범위하게 끌어내는 핵심 습관인 게 분명한 듯하다. (pp.162-3)


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습관을 지닌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숙제 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성적도 좋으며, 감정 조절도 잘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매일 아침 자신의 손으로 침대를 정리하는 습관은 생산성, 행복 지수, 예산을 통제하는 절제력 등과 상관관계가 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나 깔끔한 침대가 좋은 성적이나 절제된 삶의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변화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다른 좋은 습관이 몸에 배도록 자극한 것만은 확실하다. (p.163)


그들(연구진)은 1600명의 비만자를 모집해서 일주일에 최소한 하루만이라도 먹은 것을 빠짐없이 기록해 보라고 요구했다. ... 대부분의 참가자가 음식 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 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참가자들이 일기를 들여다보며 자신들의 식습관에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항상 아침 10시에 간식을 먹는다는 걸 알아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간에 먹을 사과와 바나나를 책상 위에 미리 준비해 놓았다. ... 6개월 후의 결과에 따르면, 음식 일기를 꾸준히 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체중이 2배나 더 줄었다. (p.177-8)



<습관의 힘> 서문에는 리자 앨런이라는 여성의 사례가 나온다. 이 여성은 16세부터 술과 담배를 시작해 거의 평생을 비만과 싸웠으며, 천만원이 넘는 빚이 있었고 어떤 직장에도 1년 넘게 다니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이혼을 계기로 4년 만에 술과 담배를 끊고, 27킬로그램을 뺐으며, 열심히 일해 빚을 완전히 청산하고 집까지 장만, 석사 학위에 도전하게 된 비결은 다름아닌 습관이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고 절망에 빠진 그녀는 죽기 전에 이집트 사막을 횡단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담배를 끊었고, 운동을 시작했으며, 사막 횡단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금연이라는 가장 작은 습관의 변화가 연쇄작용을 일으켜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 채 바꾼 것이다.



저자는 습관이야말로 나와 세상을 바꾸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거창하고 대단한 습관을 가질 필요는 없다. 리자 앨런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금연처럼 아주 작은 습관의 변화만으로도 인생을 바꿀 수 있다. 평범한 직장인이 하다 못해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운동을 하면 업무 생산성이 높아지고, 가족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성적과 행복 지수가 높아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나는 그날 먹은 음식을 기록하는 '음식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다이어트 효과가 2배나 올라간다는 사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이전의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으로 돌아가기 때문인데(그만큼 습관의 힘은 강력하다!), 음식 일기는 습관을 바꾸는 대신 기존의 습관에 맞추어 다이어트에 도움되는 음식을 먹거나 운동을 하도록 도와준다. 음식 일기뿐만이 아니라 평소 일기나 스케줄러를 쓰는 습관을 가지면 하루 일과를 보다 충실히 수행할 수 있고 목표도 더 많이, 빨리, 쉽게 이룰 수 있다. 나는 독서 일기를 쓰고 서평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벌써 5년째 꾸준히 독서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습관의 힘. 가히 천하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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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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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는 줄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에 빠지게 하는 일, 나는 예술이 이것을 성취시키는 데 큰 몫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p.73) 

 

나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들,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날려먹기'와 '다시 쓰기'의 아픈 경험과 관련이 있다. 글이 술술 풀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술술 풀린 글, 글쓰기의 고된 노동을 거의 면제받은 듯한 글로써 나는 호평을 받아본 적이 없다. (p.87)

  

번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가 '단순한 물리적 변화'여서는 안 된다. 그런 번역은 컴퓨터도 해낸다. 문제는 '화학적 변화'다. 텍스트의 문장이 우리말로 변하게 하되 화학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p.103) 

 

나는 이제 베레모를 쓰지 않는다. 등산할 때 아니면 쓰지 않는다. 나는 이제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는다. 이제 나는 예술가인 양 보이고 싶지 않다. 필경은 천박한 삼류일 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pp.260-1)  

 

 

블로그에 서평을 쓴 지 올해로 5년째. 서평 쓰기라는 취미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고 빼앗아가기도 했다. 준 것은 우선 블로그를 가득 채운 800여 편 이상의 서평, 5년 동안 각종 서평단, 서포터즈 등의 활동을 하면서 거의 매달 1,2권은 받아 보았던 책들, 우수 리뷰로 당선되어 받은 적립금과 상품권, 이웃 서평 블로거들과의 만남, 희망사항에 불과했던 글쓰기에의 동기 부여 등등이고, 빼앗아간 것은 책 읽고 글 쓰는 시간과 바꾼 사람들과의 만남과 술자리, 영화나 여행 등 20대 여성들이라면 으레 하는 취미와 여가 생활, 책 사느라 쓴 돈과 책 때문에 줄어든 내 방의 빈 공간들...... 빼앗긴 것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 간, 그리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서평을 쓰고 있는 것은 그 어떤 물질적 보상이나 유흥보다도 값지고 즐거운 것들을 책 읽기와 글 쓰는 활동을 통해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 읽기에 이토록 푹 빠진 게 언제부터였을까?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성인이 된 후 책 읽기의 재미에 다시금 빠지게 된 건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에 진 빚이 크다. 대학 시절, 그 어떤 동아리나 학회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떠돌던 내가 2학년 말이 되어서야 겨우 안착한 곳이 대학교 내 생활도서관이라는 학생모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다빈치 코드>, <내 이름은 빨강>, <파이 이야기> 등의 책을 읽으며 수험생활의 긴장과 신입생 시절의 달콤한 자유에 취해 잊고 지냈던 책의 세계와 조우했다. 그 때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역사, 언어, 문학, 기호학, 심지어는 이언 플레밍의 007까지 공부하고 연구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방대한 지식이 고스란히 소설로 구현된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앞으로 배우고 싶은 학문과 살고 싶은 삶의 방향을 생각했다.

 

 

<장미의 이름> 번역자로 유명한 이윤기 선생님의 산문집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으며 그 시절을 다시 떠올렸다. 수많은 외서들을 국내에서 편안히 읽을 수 있는 건 1차로 책을 쓴 작가의 공이고, 2차로는 책을 국내에 들여온 출판사의 공이지만, 이들의 공이 있어도 외국어로 된 책을 우리말로 번역할 번역가가 없으면 말짱 헛수고다. 이들이 있기에 독자들은 어려운 외국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비싼 외서를 사지 않아도 수월하게 외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쉽게 잊는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이름은 확인해도 역자의 이름까지 확인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윤기 선생님은 그런 내게 처음으로 외서를 읽을 때 역자의 이름과 약력까지 읽어보며 감사하게 만든 첫번째 번역가였다.

 

 

책을 읽으며 번역가란 그저 외국어만 잘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도 새삼 느꼈다. 이윤기 선생님만 해도 등단까지 한 소설가이자 문학과 역사, 종교, 신화학 등 각종 학문에 조예가 깊은 분이셨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까지 꿰뚫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우리말로 적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번역가의 역할은 언어와 언어 간의 해석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 자신이 창작자이며 독자이고 번역가이기까지 하셨던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 이윤기.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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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 대한민국 30대를 위한 심리치유 카페 서른 살 심리학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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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정말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일단 선택하면 그에 최선을 다하고,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을 과감히 엎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앤드리아처럼 말이다. 괜히 시대를 탓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탓하고, 애매한 사람에게 그 선택의 책임을 전가할 일이 아닌 것이다. (p.46)

  

완벽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만족의 기쁨을 누릴 줄 알게 되면, 당신은 분명 그 전보다 훨씬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면 성공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니까. (p.167)

  

권태의 시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당신이 권태로워하고 있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많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제까지 쌓아 온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분석하고 통합하며 소화해 내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권태로운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시간을 즐겨라. 너무 오래가지만 않는다면 나중에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당신이 있음을 말이다. (p.181)

 

  

내 나이 스물아홉. 솔직히 암담하다. 밥벌이는 마음에 안 드는데 그렇다고 달리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 결혼은커녕 연애도 잘 되지 않고, 심리적으로도 요동을 친다. 이십대 동안 수십 권의 심리학 책을 독파하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결국 과거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라는 사실. 과거에 받지 못한 사랑, 하지 못한 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이 내 발목을 붙잡지, 과거의 성공이나 불확실한 미래가 나를 움직이지는 못한다. 어쩌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콤플렉스, 트라우마, 결핍 같은 용어들이 내가 얻은 결론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는 것은, 암담한 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도 과거에 대한 정리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더듬어보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음... 이게 또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읽게 된 (수십권에 이어 또 한 권 더 읽게 된) 심리학 책이 바로 정신건강전문의 김혜남 박사가 쓴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이다. 책 소개를 보니 무려 159쇄나 찍었다고 한다. 출판계의 오랜 불황 속에서 이렇게 많은 부수를 찍었다는 건 우선 이 책이 그만큼 내용이 좋고 잘 만들어졌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서른 즈음에' 있는 사람들 중에 심리학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낄 만큼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 혹은 미칠 것 같은 -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싶다(물론 나도 그 중 하나...).

 

 

이 책의 특징은 <상실의 시대>, <키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유명한 영화나 소설을 예로 든다는 것이다. 심리학 책을 여러 권 읽다보면 내용이 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 책은 그 '뻔함'을 문학과 영화 등 예술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해소했다. 예술이 무엇인가? 작가가 자신의 심리적인 상태를 작품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 작품을 통해 공감과 위로 등 현실에서 애써 처리하지 못한 감정들을 처리하며 기쁨과 슬픔, 감동 등을 느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히 서른 살이 겪을 법한 심리적인 혼란과 그 원인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결책까지 제시해준다는 점이 좋다.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야말로 직장동료와 애인, 친구, 가족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닌가. 코 앞으로 다가온 삼십대에도 지난 이십대처럼 좋은 책들과의 만남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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