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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에 빠지는 줄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에 빠지게 하는 일, 나는 예술이 이것을 성취시키는 데 큰 몫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p.73)
나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들,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날려먹기'와 '다시 쓰기'의 아픈 경험과 관련이 있다. 글이 술술 풀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술술 풀린 글, 글쓰기의 고된 노동을 거의 면제받은 듯한 글로써 나는 호평을 받아본 적이 없다. (p.87)
번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가 '단순한 물리적 변화'여서는 안 된다. 그런 번역은 컴퓨터도 해낸다. 문제는 '화학적 변화'다. 텍스트의 문장이 우리말로 변하게 하되 화학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p.103)
나는 이제 베레모를 쓰지 않는다. 등산할 때 아니면 쓰지 않는다. 나는 이제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는다. 이제 나는 예술가인 양 보이고 싶지 않다. 필경은 천박한 삼류일 내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pp.260-1)
블로그에 서평을 쓴 지 올해로 5년째. 서평 쓰기라는 취미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고 빼앗아가기도 했다. 준 것은 우선 블로그를 가득 채운 800여 편 이상의 서평, 5년 동안 각종 서평단, 서포터즈 등의 활동을 하면서 거의 매달 1,2권은 받아 보았던 책들, 우수 리뷰로 당선되어 받은 적립금과 상품권, 이웃 서평 블로거들과의 만남, 희망사항에 불과했던 글쓰기에의 동기 부여 등등이고, 빼앗아간 것은 책 읽고 글 쓰는 시간과 바꾼 사람들과의 만남과 술자리, 영화나 여행 등 20대 여성들이라면 으레 하는 취미와 여가 생활, 책 사느라 쓴 돈과 책 때문에 줄어든 내 방의 빈 공간들...... 빼앗긴 것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 간, 그리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서평을 쓰고 있는 것은 그 어떤 물질적 보상이나 유흥보다도 값지고 즐거운 것들을 책 읽기와 글 쓰는 활동을 통해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 읽기에 이토록 푹 빠진 게 언제부터였을까?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성인이 된 후 책 읽기의 재미에 다시금 빠지게 된 건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에 진 빚이 크다. 대학 시절, 그 어떤 동아리나 학회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 떠돌던 내가 2학년 말이 되어서야 겨우 안착한 곳이 대학교 내 생활도서관이라는 학생모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다빈치 코드>, <내 이름은 빨강>, <파이 이야기> 등의 책을 읽으며 수험생활의 긴장과 신입생 시절의 달콤한 자유에 취해 잊고 지냈던 책의 세계와 조우했다. 그 때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역사, 언어, 문학, 기호학, 심지어는 이언 플레밍의 007까지 공부하고 연구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방대한 지식이 고스란히 소설로 구현된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앞으로 배우고 싶은 학문과 살고 싶은 삶의 방향을 생각했다.
<장미의 이름> 번역자로 유명한 이윤기 선생님의 산문집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으며 그 시절을 다시 떠올렸다. 수많은 외서들을 국내에서 편안히 읽을 수 있는 건 1차로 책을 쓴 작가의 공이고, 2차로는 책을 국내에 들여온 출판사의 공이지만, 이들의 공이 있어도 외국어로 된 책을 우리말로 번역할 번역가가 없으면 말짱 헛수고다. 이들이 있기에 독자들은 어려운 외국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비싼 외서를 사지 않아도 수월하게 외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쉽게 잊는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이름은 확인해도 역자의 이름까지 확인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윤기 선생님은 그런 내게 처음으로 외서를 읽을 때 역자의 이름과 약력까지 읽어보며 감사하게 만든 첫번째 번역가였다.
책을 읽으며 번역가란 그저 외국어만 잘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도 새삼 느꼈다. 이윤기 선생님만 해도 등단까지 한 소설가이자 문학과 역사, 종교, 신화학 등 각종 학문에 조예가 깊은 분이셨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까지 꿰뚫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우리말로 적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번역가의 역할은 언어와 언어 간의 해석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 자신이 창작자이며 독자이고 번역가이기까지 하셨던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 이윤기. 그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