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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진중권이 독서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추천 도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진중권이 책을 읽는 이유는 감동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자기만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이런 상상의 도서관 놀이를 통해서 그는 그런 책 한 권 쓰고 나면 '죽어도 좋아'라고 말할 만한 책을 몇 권 찾아냈는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 같은 책이다. (p.30, 진중권 인터뷰 중에서)
"20대 후반에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잘 안 되었어요. 대학원 논문도 좌절되고 지도 교수는 돌아가셨지요. '이대로 삼성 다니는 애 하나 잡아서 결혼이나 해야 할까?' 생각하며 답답해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나온 고등학교가 있던 남산순환도로를 지나가는데 뭉클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서울예대 신입생 모집 공고였어요. 그때 문득 '저거 한번 해볼까?' 생각한 거죠. 한 학기 다닐 등록금 정도는 있으니까 만약 된다면 열심히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때 시가 쓰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합격하니까 정말로 너무 좋아서 눈을 반짝이며 죽을힘을 다해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p.52, 정이현 인터뷰 중에서)
"당시 소련이 궁핍하진 않았어도 물자 공급은 제한된 사회였는데 책 공급은 좋았다는 거였어요. 원하는 도서는 다 살 수 있었고 웬만한 세계 고전은 다 번역되어 있었어요. (중략) 나중에 북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북한 사정은 소련에 비해 어려웠어요. 북한은 70년대 이후 세계 고전 문학을 새로 찍어내지 않았어요. 일부 지식인들만이 60년대까지 인쇄된 서양 고전을 갖고 있었죠. 북한의 보통 사람들은 디킨스나 또 다른 작가들을 전혀 모르고 삶을 마감하는 거죠." (pp.259-60, 박노자 인터뷰 중에서)
나의 책읽기는 <데굴데굴 세계여행>이라는 책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 아직 삼십대였던 젊은 아버지는 월급날이 오면 어머니가 읽을 여성 잡지와 나와 동생이 읽을 만화책이나 책을 선물해주셨다. 그 중에 <데굴데굴 세계여행> 1권이 있었다. 젊은 남자 선생님 두 명과 초등학생 남자아이 두 명, 도합 네 명이(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어떤 젊은 남자 선생님이 제자들을 데리곡 여행을 가며, 어떤 아이들의 부모님이 이런 여행을 허락하시나 싶다)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전역을 누비며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가는 내용의 이 책은, 아마도 <먼나라 이웃나라>의 유사품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먼나라 이웃나라>보다도 초등학생 수준에 더 맞는 이 책이 무척 좋았다. 얼마나 좋아했느냐면 하도 많이 읽어서 나중에 책이 걸레처럼 변했을 정도.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나의 꿈은 역사학자, 국제 전문 PD, 외교관 등등 주로 역사와 정치, 외국에 관련된 것이었고,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지금까지도 그 언저리에서 일하며 꿈을 키우고 있는 게 다 이 책 덕분이 아닌가 싶다.
CBS라디오 PD 정혜윤이 쓴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에는 나처럼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이 바뀐 11명의 명사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진중권, 정이현, 공지영, 김탁환, 임순례, 은희경, 이진경, 변영주, 신경숙, 문소리, 박노자 등 인터뷰에 참여한 명사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이들 모두 나같은 범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읽었는데, 신기하게도 책에 얽힌 경험은 비슷비슷했다. 대부분이 어린 시절 친구보다는 책을 좋아했으며, 운동장에서 뛰놀기보다는 학교 도서관이나 마을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 읽는 것을 즐겼고, 좋은 책을 소개해주는 선생님이나 선배 또는 친구, 글쓰기를 장려해주는 멘토를 만나 독서 수준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다른 점은 나처럼 책을 닥치는 대로 읽지 않고 일정한 기준을 정해 가려가며 읽었다는 것. 미학자 진중권은 남이 만들어준 독서 목록을 따라 읽지 않고 자신만의 독서목록을 만들어가며 읽었고, 소설가 신경숙은 작가 지망생 시절 도서관에서 관심 작가의 책을 모두 빌려 일정 기간 동안 그 책들만 읽었다고 한다. 그저 좋아서, 흥미 위주로 읽는 것도 좋지만, 작가가 된다든가, 책을 쓴다든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든가 하는 목적 의식을 가지고 그 목적에 맞게 책 읽기를 하는 게 앞으로 내가 책을 읽어나가야 할 방향인 것 같다.
끝으로 정혜윤에 대해서. 나는 정혜윤의 책을 읽을 때마다 반한다. 책을 대하는 태도, 문장을 읽어내리는 감성의 예민함, 이성의 영민함, 풍부한 상상력, 글의 재기발랄함 등이 너무나 멋지고 닮고 싶다. 게다가 책은 또 얼마나 많이 읽은 것인지. 11명의 명사들이 각자 활동하는 분야도 다르고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 관심사가 다른데도 어떤 화제가 나오든 막힘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저자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대체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으며 지금도 읽고 있는 걸까. 얼마나 읽어야 이런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데굴데굴 세계여행>이 세계에 대한 관심을 내게 처음 심어주었다면, 정혜윤의 책은 성인이 된 후 내게 글쟁이로 살고 싶은 꿈과 전문적인 독서가가 되고싶은 열망을 가지게 한 씨앗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아직 그녀의 책 중에는 읽은 책보다 사놓고 다 읽지 못한 책이 더 많다. 부지런히, 그러나 쉼없이 읽고 배우고 닮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