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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희생양. 그녀는 희생양이었다 - 해리엇, 가정의 파괴자. 그러나 또다른 생각과 감정의 층이 저변에 깔렸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하였다. "우린 벌받는 거야. 그뿐이야." "무엇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중략)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 (pp.158-9)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가정을 꾸리는 일. 어릴 때는 그게 동화에서처럼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는데, 한살 한살 나이를 먹을 수록 같은 미래를 그리는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가 기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20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의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어땠을까. 아무래도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사는 일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둘, 셋만 되어도 키우기에 벅찬 아이를 다섯이나 낳은 것만 봐도 말이다. 그런데 만약 그 다섯째 아이가 그동안 이룬 모든 것을 망친다면 어떨까? 소설의 비극은 이 불행한 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웬만한 호러 소설 못지 않은 공포를 느꼈다. 공포의 원인은 단연 '다섯째 아이' 벤의 존재다. 벤은 위의 네 아이와 전혀 다른 외모와 성품을 지닌 아이다. 아니, '아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할 만큼 아이답지도, 심지어는 사람 같지도 않다. 작가는 소설에서 벤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장애를 가진 것도, 다른 민족의 특성을 가진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아 '격세유전'이라는 단어를 힌트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격세유전은 글자 그대로 진화의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소설의 맥락을 보면 인간이 아무리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도 뿌리뽑을 수 없는 인류의 원초적인 본성, 야만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태곳적 존재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본 적 없는 귀신이나 외계인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데도 그런 존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존재라니. 심지어는 그 존재가 인간의 뱃속에서 자라고 난 존재라니. 무섭지 않을 수 없다.
공포와 함께 긴장감도 느꼈다. 이는 주로 해리엇으로 대표되는 기혼 여성의 삶의 모습 때문이다. 불안정한 결혼생활을 했던 어머니를 보며 자신은 다른 삶을 살리라 결심했던 그녀는 데이비드를 만나 토끼같은 자식 넷을 낳았을 때만 해도 결심을 현실로 이루는 듯 했다. 하지만 벤을 임신하고부터 그녀는 임신과 출산, 양육의 부담이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된다는 사실에 분노하기 시작했고, 벤의 기이한 행동이 모두 그녀의 책임이 되고부터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벤을 지키기로 결심함으로써 세상을 향해 결투를 신청한다. 하지만 결국 해리엇은 벤을 자신의 아들로 만들지 못했고, 남편과 다른 자식들,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했다. 혹자는 해리엇이 벤을 구하기로 한 선택이 모성이나 휴머니즘의 발로였다고 보지만, 나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벤을 구했든 구하지 않았든 그녀는 불행해졌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 불행했기에. 행복이 미래에 있다고 믿었으니까.
전체적인 줄거리는 해리엇과 데이비드 부부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이지만, 궁극적으로 이 작품은 인간의 발전과 행복에 대한 사회적 함의를 담고 있다. 작가는 벤의 존재를 통해 인간이 아무리 진화하고 발전을 거듭해도 인간의 야만적인 본성과 원초적인 특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나아가 사회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믿는 보수층과 상류 계급의 믿음이 그들의 눈엔 새롭고 낯설기만 한 진보적인 사람들과 비주류 계층에 의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또한 오로지 개인의 노력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도 부정했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벌받았다는 해리엇의 말처럼, 행복은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감정의 상태다. 인간은 사회를, 개인은 삶을 저 스스로의 노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가. 그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다섯째 아이'의 진짜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