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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평의 행복, 연꽃 빌라 ㅣ 스토리 살롱 Story Salon 1
무레 요코 지음, 김영주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이쪽 자리가 괜찮으시겠습니까? 와인은 마음에 드시는 걸로 골라 주세요." "지난번 이벤트 건 말씀입니다만,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감사합니다. 그럼 곧바로 수배해서 제가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대사라도 외듯, 이제까지 광고주를 상대로 몇백 번이나 읊었던 말들이 입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머릿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던 동료와 후배들의 험담이 연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십삼 년간 재직하면서 몸에 잔뜩 인이 배어 버린 것 같다.
"아아 싫다, 싫어. 빨리 몸속에서 빼내고 싶어." 교코는 몸을 흔들었다. 연꽃 빌라에서 나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접대용 웃음, 그리고 화장과 유행 패션이라는 강철 갑옷으로 단단히 싸여 있던 자신은 여기 있어서는 안 된다. (p.33)
평범한 여성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린 소설 <카모메 식당>,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 등으로 국내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무레 요코의 신작이다. 지난해 말 뒤늦게 영화 <카모메 식당>과 드라마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을 보고 감명을 받아 원작 소설로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마침 신작이 국내에 출간되어 있길래 구입해 읽어보았다.
주인공은 대형 광고 회사에 다니는 45세 독신 여성 교코. 집에선 시집가라는 잔소리, 회사에선 억지 미소와 아부에 치이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비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한 달에 10만 엔씩 삼십여 년을 지낼 수 있는 저금이 모이면 조기 퇴직을 하리라는 것. 인생의 즐거움을 모른 채 일만 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며 직장 생활의 허무함을 체감한 그녀는 새 옷, 새 가방이 나와도 사지 않고 돈을 모아 45세가 되는 해에 마침내 조기 퇴직과 독립을 실행한다. 그녀가 새 보금자리로 택한 곳이 바로 연꽃 빌라. 지진이라도 나면 바로 무너질 듯 낡았지만, 깨끗하고 경관 좋고, 무엇보다 월세 3만 엔(우리나라 돈으로 약 30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
머리카락 컬이 어떻다느니, 암반욕이 어떻다느니, 히알루론산 주사가 어떻다느니 하는 것들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화제가 되는 것들을 사 보고 해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입장은 이제 졸업했다. 거품 경제를 경험한 회사의 여자 동료가 "그때가 재미있었지." 하고 애절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교코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었기에 "엥?" 하고 생각했다.
흐르는 강물에 제 몸을 맡긴 사람은 기분 좋게 흘러가지만, 도중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강물을 거슬러 오르려는 사람에게 현실은 고달프다. 아무 생각 않고 매 순간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사람은 흘러가는 데 능숙해져 오히려 그쪽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교코는 이 나이가 되어 뒤늦게나마 간신히 결단을 내린 것이다. "잘한 걸까, 잘못한 걸까." (p.55)
교코는 어머니의 반대와 집주인의 걱정을 무릅쓰고 연꽃 빌라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도심 한복판에 사는데도 여름엔 벌레의 습격을 견디고 겨울엔 추위와 사투를 벌여야 하지 않나, 옆방에서 나는 음악 소리가 다 들리지 않나,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월 10만 엔의 생활비로 살다보니 반찬 재료 하나를 살 때도 몇 번을 망설이고, 도서관에선 할아버지들의 추파를 받고, 일도 안하고 집에만 있는 게 수상하다는 이웃들의 눈총도 받는다. 교코 자신도 괴로웠다. 십여 년 전 계획을 세워 열심히 저축해 호기롭게 조기 퇴사와 독립을 실행했건만, 그동안 직장생활이 몸에 밴 교코는 출퇴근 지옥을 겪지 않고, 업무 스트레스와 직장 내 인간관계에 치이지 않는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기는커녕 불안해하는, 일종의 '금단 현상'을 겪는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될까, 괜찮을까, 끊임없이 자문하는 교코를 보니 동물원 우리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동물이 자유를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왜 (자기가 선택한) 자유을 그대로 즐기고 누리지 못할까.
어떤 의미에선 판타지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대도시에서 월 30만 원에 살 집을 구하는 것도 그렇고, 퇴사 후 삼십여 년 간 월 100만 원을 생활비로 쓸 만큼 저금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대한민국의 88만 원 세대인 내게는 그저 꿈 같은 이야기이다. 아니, 먹을 것 아끼고 입을 것 줄여가며 또래 여성들이 누리는 삶을 포기하고 사는 건 똑같은데 생존 조건은 뒤처지니 교코보다도 내가 앞날이 불안하고 위태롭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안타깝거나 화가 나지 않았던 건 교코의 삶이 퍽 마음에 들어서다. 머리카락 컬이 어떻다느니, 히알루론산 주사가 어떻다느니 하는 이야기만 평생 하다가 죽는 대신 자기만의 삶을 찾을 자유, 자기만의 이야기거리를 만들 자유를 찾은 교코가 멋지다. 그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녀의 앞날은 어떤 모습일까. 이어지는 이야기는 속편 <일하지 않습니다>에서 확인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