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게 (반양장)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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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철모르는 어릴 때는 설날에 떡국 먹고 생일에 케이크 먹는 게 좋아서 한 살 두 살 나이 드는 걸 좋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떡국도 케이크도 됐고, 더 이상 나이 들지 않게 해주는 약이 있으면 그거나 구해서 먹고 싶은 심정이다. 나처럼 나이 드는 걸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한국에서만 15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는 어떤 조언을 들려줄까. 


기시미 이치로의 신간 <마흔에게>에 따르면, 사람들이 나이 듦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노화를 퇴화 또는 약화로 인식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인생의 목표를 성공으로 보기 때문이다. 노화는 퇴화나 약화가 아니라 변화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 가을, 겨울로 바뀌는 것처럼, 사람의 인생도 탄생으로 시작해 노화를 거쳐 죽음으로 끝맺는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 중에 우열이 없듯이, 젊음과 늙음, 탄생과 죽음에도 우열이 없다.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보는 사람들에게 노화는 성공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저자는 이룬 것 없이 늙고만 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열여덟 살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습니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안다면 모를까, 지금 지닌 지식과 경험을 깡그리 잊고 몸만 젊어진다면 지금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것처럼 보이는 인생도 나름의 지식과 경험을 축적한 가치 있는 인생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자신의 인생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도 말고, 나이 듦을 거부하려고 하지도 말라고 저자는 충고한다. 


저자는 오십 세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큰 수술을 받았고,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혼자서 간병한 경험이 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노화와 병환, 부모의 간병을 겪으며 스스로 깨닫고 터득한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병으로 쓰러졌을 때 이렇게 아픈 몸으로 가족들을 고생시키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후 지인이 큰 병으로 쓰러졌을 때 걱정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비록 중태에 빠져 의식이 없을지라도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 듦이 덧없고 허무하게 느껴진다면, 어렸을 때 힘들었던 일을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쉰다섯 살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번역하기 시작해 쉰아홉 살에 완성했다. 젊을 때는 먹고사는 게 바빠서, 그리스어 실력이 짧아서, 인생 경험이 부족해서 끝까지 번역하지 못하고 도중에 포기했는데, 오십이 넘은 지금은 연구 실적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리스어를 공부할 시간도 넉넉하고, 인생 경험도 풍부해서 아주 즐겁고 여유롭게 번역에 매진할 수 있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입원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저자의 낭독으로) 읽었다. 나이 듦을 걱정할 시간에 살아있음을 만끽하라는 저자의 메시지가, 아직 마흔이 되지 않은 나에게도 간절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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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두려운 사랑 - 연애 불능 시대, 더 나은 사랑을 위한 젠더와 섹슈얼리티 공부
김신현경 지음, 줌마네 기획 / 반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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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동안 좋은 책을 많이 만났지만 이 책만큼 좋은 책을 만나지는 못했다. 내 깜냥으로는 감히 평가할 수도 없고 마땅한 찬사의 말을 찾을 수도 없어서 여러 번 글을 썼다가 지웠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시청하면서,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을 보면서, 아이유의 노래 <좋은 날>을 들으면서 즐기면서도 어딘가 불쾌하고 불편했던 이유에 대해 이 책만큼 속 시원한 해설을 만나지 못했다. 그것들이 왜 불쾌하고 무엇이 불편한지, 한국 페미니즘의 역사라는 차원으로 설명하는 책을 읽은 것도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을 쓴 김신현경은 이화여대에서 여성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동아시아대학원에서 박사후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여성학자다. 여성학이 다루는 이슈 중에서도 연애와 사랑, 젠더와 대중문화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대중문화 분석을 통해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있기는 한지) 모색한다. 


1997년에 개봉한 영화 <접속>은 남녀 간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가족 관계에 주목하지 않고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서 끝나지도 않은, 당시로서는 참신하고 획기적인 작품이다. 반면 2012년부터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여자 주인공의 가족 관계가 시종일관 높은 비중으로 다뤄지며, 여자 주인공이 누구와 연애를 하고 누구와 결혼을 하는지가 곧 드라마의 줄거리이자 결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퇴보'가 외환위기 이후 가속화된 한국 페미니즘의 위기 및 한국 여성의 지위 하락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대학생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 <논스톱>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2010년부터 연재된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을 보고 놀랄 것이다. 대학이 몇 안 되는 취업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전쟁터로 바뀐 요즘 같은 시대에 연애나 사랑은 언감생심일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 하면 경력과 평판을 망칠 수 있는 리스크 요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하지만 도움이 되는' 남자 주인공 유정과 사귀는 여자 주인공 홍설의 심정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생존과 욕망 간의 딜레마(남자 없이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하지만 남자 없이 살고 싶지 않다)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아이유의 <좋은 날>은 '삼촌팬'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기념비적인(?) 노래다. 저자에 따르면 삼촌팬은 "걸그룹에 대해 '오빠'이고 싶어 하는, 즉 걸그룹을 성적 대상으로 욕망하는 데 대한 사회적 비난을 잠재우려는 시도를 반영"하는 용어다. 이들은 스스로를 이전 세대와 달리 기성세대가 되어도 새로운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할 줄 아는 개방적인 가치관의 소유자로 여기지만, 이들이 삼촌팬으로서 걸그룹을 대하는 방식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고 소유물 취급하는 (그토록 이들이 구별되고 싶어 하는) 이전 세대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열광한 영화, 드라마, 웹툰, 소설 등을 통해 저자는 1987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페미니즘이 어떻게 변화하고 한국인의 연애와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조리 있게 서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드라마 <밀회>를 예로 드는데 그 설명 또한 무척이나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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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즈
J. G. 밸러드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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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히들스턴,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영화 <하이 라이즈>는 영국을 대표하는 SF 작가 J.G. 발라드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원래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소설을 읽게 되었다. 구성과 내용이 워낙 독특한 작품이라서 원작 소설이 영화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른 구석이 많아서 놀랐다. 


영화는 로버트 랭(톰 히들스턴)이 화자인 데 반해, 소설은 로버트 랭, 리처드 와일더(루크 에반스), 앤서니 로열(제레미 아이언스)이 거의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는 화자다. 호화로운 초현대식 고층 아파트 건물에서 일어나는 계층 간 갈등과 폭행, 살인, 치정 등을 그린 이 작품에서 앤서니 로열, 로버트 랭, 리처드 와일더는 각각 상층부, 중층부, 하층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목도하며, 각각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의 입장을 대변한다. 각각 다른 계층인 사람들이 한 건물 안에서 얽히고설키면서 발생하는 지옥도 내지는 수라도는 영화나 소설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영화에서 로버트 랭은 리처드 와일더의 아내인 헬렌, 앤서니 로열의 정부인 샬롯과 정을 통하는 데 그친 반면, 소설에서 로버트 랭은 친누나 앨리스와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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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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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세대(beat generation)'란 1920년대 대공황 시기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체험한 세대로서, 전후 50년대와 60년대에 삶에 안주하지 못하고 반정부, 반체제적인 성향을 보였던 일군의 무리를 일컫는다.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1935년 미국 워싱턴 주에서 태어나 1957년 비트 작가들의 본거지인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가, 그들과 함께 미국의 반문화 운동을 주도했다. 브라우티건의 대표작 <미국의 송어낚시>를 당시 대학생들이 마치 성서처럼 늘 들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빅서에서 온 남부 장군>은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1964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빅서(Big Sur)'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예술가들의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화자인 '제시'는 자신이 남북 전쟁 당시 남부연합군을 이끌었던 오거스터스 멜론 장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리 멜론'이라는 괴짜 남자와 함께 생활한다. 리 멜론은 남북 전쟁 당시 남부연합군이 승리했다면 자신의 삶은 지금과 180도 달랐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여자를 탐하고,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고 남을 속이거나 남의 돈을 빼앗아 생활하는 리가 탐탁지 않지만, 리와 어울리는 생활이 마냥 싫지만은 않다.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뭘 전하고 싶었던 건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리 멜론의 허랑방탕한 생활을 비판하고 싶었던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리 멜론의 삶을 유유자적하다고 여기는 것 같지도 않고 본받을 만하다고 예찬하는 것 같지도 않다. 다만 저자는 "이런 삶도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부와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 삶. 물질문명에 휩쓸리지 않는 삶.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삶. 그런 삶을 동경할 만큼 당시 미국 사회가 혼란스럽고 각박했던 것만은 분명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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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엮고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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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기를 바랐건만 내 기대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믿고 읽는 김명남 번역가가 우리말로 옮기고 신형철 평론가가 드물게 칭찬한 책인데도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책보다는 저자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생애에 눈길이 갔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1962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1987년 소설가로 데뷔해 1996년 장편소설 <무한한 재미>로 큰 주목을 받았다. <타임>은 이 소설을 '20세기 100대 걸작 영어 소설' 중 하나로 선정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명성을 얻었는데도 월리스 자신은 행복하지 않았다. 월리스는 십 대 때부터 우울증을 앓았고, 술, 마리화나, 텔레비전, 섹스, 설탕 중독에 시달렸다. 스무 살 이후부터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으며 끝내 2008년 4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작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가 남긴 책은 2.5편의 장편소설과 3권의 소설집, 3권의 산문집이 전부다. 월리스와 더불어 현대 미국 문학을 견인하는 순문학 작가로 추앙받는 조너선 프랜즌이 여전히 활발하게 집필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월리스가 남긴 3권의 산문집에 실린 총 32편의 글 중 9편을 골라 엮은 것이다. 표제작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저자가 <하퍼스>의 의뢰를 받아 호화 크루즈 여행을 한 경험을 담고 있다. 저자 특유의 냉소 어린 장광설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며 전체 길이가 150쪽을 넘는다(거의 책 한 권 분량이다). 이어서 카프카, 미국 영어 어법, 랍스터, 도스토옙스키, 페더러 등에 대해 쓴 길거나 짧은 글이 나온다. 문학에 조예가 깊고 영어를 몹시 잘하면 모를까, 이도 저도 아닌 나로서는 글에서 재미를 느끼기가 퍽 힘들었다. 다만 이만한 필력을 지닌 작가가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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