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임팩트 맨 - 뉴욕 한복판에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살아남기 1년 프로젝트
콜린 베번 지음, 이은선 옮김 / 북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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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아이폰이나 평면 텔레비전이나 버뮤다 행 여행티켓이나 기타 오락거리를 손에 넣을 방법을 연구하는 것보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게 더 힘들다. 예를 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는 것들 말이다. 인생의 목적이 좋은 직장, 두둑한 연봉, 들어가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자, 타고 다니기에 부족함이 없는 또 다른 상자라고 생각하고 그런 상자들만 있으면 무엇이든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쉽다. 심지어 앞에서 말한 고민들까지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하지만 가끔은 눅눅한 날 습기처럼 그런 고민들이 차오를 때가 있다. 피할 곳이 없을 때가 있다. 한국 조계종에 이런 선사가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내가 명상할 때 즐겨 찾는 선종이라는 종파를 미국에 전파한 분이다. 제자들은 그분을 대선사님이라고 불렀는데, 한국말로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스승이라는 뜻이었다.

아무튼 그 대선사님은 "모두들 나는 이걸 가지고 싶다, 저걸 가지고 싶다 하는데, 이 '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종종 말했다. 세상 모든 걸 가지고 싶어하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갈까? 사는 이유가 뭘까? 죽는 이유가 뭘까? 이런 고민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욕구를 충족시켜야 행복해진다고 믿으면서 살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욕구는 끝이 없고, 경제는 이 끝없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고 한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이 별의 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이다. (pp.158-9)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이 문장이 가슴을 푹 찌른다. 감정에 솔직한 삶. 나 자신과 충분히 대화하고, 내 욕구를 정확히 아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돌이켜보면 스무살 이후의 내 삶은 나 자신을 찾는 시간이었다. 학교, 내신, 수능, 수행평가... 지긋지긋한 굴레는 다 버리고, 모범생인척, 우등생인척 하며 스스로를 감췄던 가면은 다 벗고,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내가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지독하게 찾아다녔다. 결국 시도했던 모든 것이 내 길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얄궂게도 가장 처음에 품었던 꿈이 정답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남은 것은 흘려보낸 시간과 백수라는 타이틀 아닌 타이틀 뿐이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적어도 나는 비겁하게 내 고민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받아들였다. 많이도 망가지고 깨졌다. 통장 잔고는 언제나 비어있고, 내 이름 석자밖에 날 보여줄 것이 없지만, 그 경험만으로도 지난 6년 동안 영혼이 반 뼘은 자라지 않았나 싶다.

 

가장 최근에 내 영혼을 파고든 화두가 있으니, 바로 eco-friendly. 친환경적인 생활을 한다는 게 말이 쉽지 실천하기는 참 어렵다. 처음에는 에코백 들고 다니고, 씻을 때 물 받아서 쓰고, 가까운 거리는 차 타는 대신 걸어다니는 정도만 지켜도 뿌듯하지만,
달인 레벨(!)로 갈수록 주변 사람들로부터 '유난 떤다'는 눈총을 받는 일이 다반사에, 그것도 모자라 내가 아무리 아껴 쓰고 노력해도 남들이 펑펑 쓰면 도로 아미타불 아닌가 싶은 생각에 허무한 마음만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일 년 동안 뉴욕 한복판에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살아보겠다고 선언한 남자가 있다. 모든 문명을 거부하고 환경에 자극을 주지 않고 살아보겠다니. 일찍이 헨리 데이빗 소로가 1세기도 더 전에 시도했던 일이기는 하지만(<월든>) 콜린 베번의 도전은 차원이 다르다.  소로는 컴퓨터도 없고 휴대폰도 없었던 18세기 중엽에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산골 구석에서 지내기라도 했지, 온갖 유혹이 산재한,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도시 뉴욕에서, 그것도 쇼핑 중독 아내와 기저귀도 안 뗀 딸이 있는 남자가 엘리베이터, 자동차, 비행기, 종이신문, 커피, 패스트푸드, 텔레비전, 심지어는 종이기저귀까지 다 포기하고 산다는 건 뉴욕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현대인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무모한 도전이었던지, 도전을 선언한 후에도 콜린은 한참동안 고민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피자 한 조각을 사먹고 싶어도 딸려 나오는 종이 포장(=쓰레기) 때문에 사먹을 수가 없지, 아내와는 싸우기 일쑤, 딸이 쓰는 종이 기저귀를 천 기저귀로 바꿨다가 집안 바닥을 아이 오줌으로 온통 적신 적도 있다. 언젠가 파리에서 본 근사한 그물 장바구니 하나를 살까 했더니 이것도 쓸데 없는 소비를 하는 것 같아 그만뒀다. 슈퍼마켓에서 비닐봉투 대신 (그것도 콜린이 직접 가져온!)유리병에 담아달라고 부탁해도 점원은 유난 떤다며 흉을 봤고, 살이 쪽쪽 빠지도록 걸어서 통근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으로 다녀도 매연 뿡뿡 뿜는 대형 자동차는 그를 비웃는 양 잘만 달렸다. 남들은 혀빠지게 아껴 써도 나 혼자만 '노 임팩트'여서는 '딥 임팩트'같은 위기가 전지구에 닥치는 건 시간 문제ㅡ 그런데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 거지?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내가 보기에도 이건 답이 없다.

   

   
  바라던 걸 손에 넣으면 욕구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음 대상으로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이걸 가지고 싶다"거나 "저걸 가지고 싶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아프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냥 "가지고 싶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다. 나는 그물 장바구니가 생기면 또 다른 게 가지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의 경험 밑바탕에 욕구가 자리잡고 있고 하루의 변덕스러운 욕망을 충족시켜도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p.101)  
   

 

그래도 콜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환경문제를 먼저 인식하고 고민한 사람들의 책을 구해 읽고, 동양철학에서 답을 구했다. (특히 한국 불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가 한국에 와서 한국의 '중생'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환경을 넘어 소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로 생각을 확장시켰다. 그의 접근법대로 환경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나에 대한 고민이고, 소비에 대한 생각도 결국 나에 대한 생각이다. 환경이 무엇인가. 내가 살고 먹고 배출하고 순환시키는 장(場)이다. 환경을 더럽히는 건 나를 더럽히는 것이고, 환경에 무관심한 건 곧 자신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소비는 또 무엇인가. 내가 살고 먹고 입고 즐길 것을 구입하는 행위다. 내가 구입한 것이 나를 규정하고 표현한다. 아무거나 '사는(buy)' 것은 아무렇게나 '사는(live)' 것이고, 쓸데 없이 '사는' 것은 쓸데 없이 '사는(live)' 것이다.

 

콜린은 현대인들이 근본적으로 '나'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욕구를 알지 못하고 주관 없이 소비한다고 지적한다. 만약 나에 대해 잘 알고, 내가 뭘 원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답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꼭 필요한 것만 구입하고 더 구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야 진작에 명품족, 된장녀는 (시도해 본 적도 없고 능력도 안 되지만) 내 팔자에 없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는 비록 반쪽자리가 되더라도 eco-friendly consumer로 살아볼까 싶다. 그나마도 과소비하는 건 책과 음식뿐이지만(^^;;;), 잘만 하면 '노 임팩트'까지는 못 돼도 '딥 임팩트'는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콜린의 노 임팩트 맨 '프로젝트'는 끝이 났지만,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생활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와 그의 프로젝트를 유명하게 만든 블로그(http://noimpactman.typepad.com/)도 여전히 업데이트 중이다. (메일링 서비스를 구독하려고 했는데 이미 구독자 한도가 다 차서 안 되는 모양이다. 번거롭더라도 홈페이지에서 직접 그의 소식을 들어야겠다.) 

 

  

실천은 그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이니라.
그대는 실천의 결과를 목적으로 삼지 말 것이며, 나태에 심취하지도 말라.   

- 인도의 대서사시 바가다드 기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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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구하기 - 개정판
조나단 B. 와이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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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5 

 

아마도 사회과학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수업 시간이었을 것이다. 경제학과 교수님께서 경제학이 낯설거나 어렵게 느껴진다면 읽어보라시며 책 제목 몇 개를 칠판에 적어주셨다. 그 책들은 대부분 '경제팩션(faction)' 이었다. 당시 나는 [북& 월드] 에서 나온 [소설로 읽는 경제학] 시리즈를 찾아서 읽었는데, 이 책들이 나의 경제학 성적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경제학적 사고방식에 적응할 수 있게끔 도와줬다고 생각한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 역시 그 목록에 있었으리라고 짐작되는데, 당시에는 읽어보지 못하고 이제서야 읽어보았다.  

 

2003년 1쇄 발행되고, 올해 12쇄 발행된 [애덤 스미스 구하기] 는 세계 유명대학이 교재로 택하고 있으며, 여러 신문과 잡지, 단체에서 선정한 책이기도 하다. 그만큼 인기도 있고 명성도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에이~ 경제학 책이 재밌어봤자 얼마나 재밌겠어?' 하는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경제학 책이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구나' 싶은 책이었다.

 

이 책의 매력은 첫째, 애덤 스미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와 자유무역 경제의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경제학이나 애덤 스미스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이나 푸줏간 주인의 일화 등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실은 도덕성과 정의를 중시한 인물이었다는 주장은 매우 낯설다.  

 

   
  이기심은 인성의 본성이지만 그 이기심을 조절하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안정감을 얻으면서도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분별력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 그게 바로 자기애야. 이기심이란 자신의 욕구가 타인의 합법적인 권리와 상충될 때 자기 본위대로 자기 욕구에만 집착하는 것을 뜻하니까. (p.197)  
   



[애덤 스미스 구하기] 는 경제학 서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철학 서적에 가깝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경제학자가 아닌 도덕 철학자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경제학 공부에 보탬이 되거나 지식을 얻기 위한 '참고서'로서 이 책을 읽는다면 곤란하다. 오히려 이 책은 이제까지의 경제학적 개념을 뒤흔드는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 초보나 학부 신입생이 읽는다면 미리 경제학적 배경을 다진다는 점에서 좋을 것이고, 경제학을 오래 배운 사람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될 것이다. 적어도 말로만 들었던(!) 애덤 스미스의 책들을 한 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둘째, 여행기 혹은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과 대학원생인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로 애덤 스미스를 만나서 자동차 여행을 하게 된다. 여행을 하는 틈틈이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 대한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편안한 기분으로 읽을 수 있다. 또한 두 사람은 여행 도중에 애덤 스미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괴한에게 연달아 습격을 당하는데,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나가는 후반의 즐거리는 흡사 추리소설을 읽는 듯하다. 

 

이 책은 본문 외에도 애덤 스미스 연보, 자료 노트, 참고문헌 가이드, 교사를 위한 가이드 등 알찬 부록이 실려 있는 것도 특징이다. 특히 나는 초록색 표지와 가로 폭이 좁은 디자인, 그림과 사진 등 이미지가 거의 없고 활자가 위주인 편집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이런 '책 다운 책'이 많아졌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양장본에, 활자는 별로 없고 이미지만 잔뜩 들어있는 책이 많이 나와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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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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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리뷰를 다시 정리해서 올리고 있는데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이 새로운 버전으로 나온 줄은 처음 알았다. 표지도 예쁘고, 상하권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새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솔솔 든다ㅎㅎ 


2009-05-06

민음사에 세계문학전집이 있다면, 열린책들에는 [Mr.know 세계문학] 시리즈가 있었다. (지금도 있나?) 세계문학전집에 비해 책의 폭이 좁고 두께가 두툼한 ㅡ 페이퍼북 같은 디자인이 참 마음에 들었다. 또한 [Mr.know] 시리즈는 비교적 현대 작가의 작품들이 많았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도 [Mr.know] 시리즈로 읽었는데(그러고보니 제임스 미치너와 알렉스 헤일리 모두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들이다) 논픽션스러운 픽션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두 소설 모두 '완소'다. 
 

이 '소설'에는 책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 여럿이 등장한다. 독일계 미국인 작가인 루카스 요더는 자신의 여덟번째 소설을 막 탈고했다. 탈고한 책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는 편집자 이본 마멜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본은 어릴적 책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하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편집자가 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추억이 있다. 그리고 비평가 스트라이버트는 요더의 책에 대하여 안 좋은 평을 쓴다. 자신이 더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믿으면서. 독자인 제인 갈런드는 요더의 책을 읽으며 손자인 티모시가 이런 작가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이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만나고 얽혀서 어떤 책을 만들게 되는지ㅡ 에 대한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소설] 의 가장 큰 형식상 특징은 네 사람의 시각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소설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등 책을 둘러싼 네 인물의 이야기가 차례로 나온다.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이어지거나 혹은 겹쳐지기 때문에, 한 이야기를 네 사람의 시각해서 해석한다고 볼 수도 있다. 내용상으로는 대립하는 개념들이 여러번 등장하는 점이 특징이다. 전통과 현대, (예술적 의미의) 창작과 (산업적 의미의) 생산, 대중소설과 순수소설, 독일인과 유태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대립적인 개념들이 종국적으로는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궁극적으로는 소설 자체의 새로운 발전과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책 읽기는 책과 나만이 교감하는 1인의 경험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참 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경험을 여러 사람이 공유한다면 온전한 자신의 감상은 집단의 공통 양식이 될 수 있고 문화가 될 수도 있다. 책을 읽는 사람뿐 아니라 쓰고 만들고 평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녹아있는 소설ㅡ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은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가장 궁금하고도 흥미를 느끼는 부분을 재미있게 건드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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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의 메커니즘 - 경제학의 '오래된 미래' 케인스주의를 다시 읽는다
오노 요시야스 지음, 김경원 옮김, 박종현 감수 / 지형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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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6  

요즘 나는 미국 드라마 [grey's anatomy] 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드라마 속의 의사들은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어떻게 치료할지 답을 구하는 'Consult(컨설트)' 라는 것을 한다. 경제 문제를 접할 때마다 나는 이 문제들이 의학, 넓게는 과학 문제처럼 쉽고 간단하게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안타깝게도 경제학은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 라는 문제를 풀기가 녹록치 않다. 의사들이 '병을, 최적의 방법으로, 환자를 위하여' 치료하겠다는 하나의 답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게 말이다. 어쩌면 이는 경제학이 정치학, 나아가서는 철학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경제학의 아버지인 아담 스미스가 도덕철학자였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마르크스의 '주의'는 원래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경제학은 정치학 문제와 마찬가지로 다수와 소수의 싸움이며, 철학 문제처럼 답이 없고 골치 아프다.  

  

[불황의 메커니즘] 은 일반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일본의 경제학자인 오노 요시야스가 해석한 책이다. 일반이론은 몇 가지 점에서 '불운한 명저' 라고 할 수 있다. '불운' 한 것은 케인즈가 이 책에서 완벽한 논증을 펼치지 못했으며, 이후 정치적으로 오남용 되면서 책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신고전파의 주류 경제학에 이의를 제기하고 다른 주장을 제시했으며, 현대 경제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명저' 라고 이를만 하다.

 

책은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케인즈 경제학의 기본 구조] 를 설명하고, 2장과 3장에서는 케인즈의 일반이론을 해석한다. 그리고 4장과 5장은 경제정책 및 불황이론에 주는 시사점을 정리한다. 각 장마다 경제학적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거시경제학과 화폐금융론 등 경제학 이론서와 병행하여 공부한다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케인즈의 주장에서 정치적 해석의 여지를 제하고, 이론의 적부에만 집중하여 서술했다는 점에서 읽어볼만 하다. 대부분의 경제학 이론서나 서적에서 케인즈는 유효수요의 중요성을 알리고, 정부의 공공지출을 늘릴 것을 주장하여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을 뿐, 실제로는 관련이 없다고 한다 - 위키백과)고 알려져있다. 주류 경제학적 사고에 젖어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귀에는 언뜻 분배를 중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는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일 뿐, 케인즈 자신은 철저히 효율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인력 감축은 불황 타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노동수요를 줄이면 임금이 낮아지고, 소비가 줄면 총수요가 줄어서 불황이 더 심각해질 분이다. 하지만 잉여노동력을 활용해서 임금을 주고, 소비가 늘어서 총수요가 늘어나면 공급이 다시 늘어난다. 이런 메커니즘이 어떤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지를 생각하지 말고, 메커니즘의 옳고 그름 여부에만 집중해보자. 예비 실업자나 다름 없는 취업 준비생의 입장에서 나는 왠지 케인즈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 책은 일본 학자가 쓴 만큼 일본의 상황이 주로 등장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상황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고이즈미의 親기업적 경제정책이라든가 민영화, 잡 셰어링(Job-sharing) 등의 문제는 한국인의 눈에도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저자는 일본의 높은 저축열(?)을 굉장히 비판한다. 한국도 저축율이 높은 나라였지만, 요즘은 저축보다는 투자(혹은 투기)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저축이든 수익 자산의 보유든 똑같이 소비와 대비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간과하기 어렵다. 

 

다만 예시가 많지 않고, 서술 방식이 딱딱해서 경제학적 지식이 아예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벅찰 것 같다. 학부생 이상이 읽어야 대충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나는 '게으른' 복수전공생이라서 그런지 술술 읽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케인즈 경제학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을 자주 만나기 어려운 만큼 한번쯤 읽어볼 만은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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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 18세기 조선경제학자들의 부국론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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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대학시절, 언젠가 한 교수님이 “서양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제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경제학은 서양의 학문이라고 여겼던 관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개념과 수식을 외우며 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했건만, 정작 우리나라의 경제학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엄두도 못 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얼마전 다산초당에서 나온 한정주의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세웠으며, 후기로 갈수록 성리학이 득세했던 조선에서 경제학이라는 실용적인 학문이 발붙일 틈이나 있었을까? 목차를 살펴보니 박제가, 이익, 정약용, 박규수 등 18세기를 전후로 등장한 실학자들의 이름이 보인다. 이지함, 이중환, 채제공 등 언뜻 실학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들도 있다. 빙허각 이씨라는 여성 경제학자의 존재는 아예 새롭다. 이들을 왜 경제학자라고 부르며, 이들이 어떻게 조선을 구한 것일까? 의문을 품고 책을 펼쳤다.  

 

책머리에는 ‘조선을 구한 경제학자 13인의 가상 좌담’이 펼쳐진다. 좌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물들의 관계, 사상의 연결점과 차이점 등을 제시하여 앞으로 이어질 내용에 대해 대략적인 예상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중상주의와 중농주의 간의 논쟁을 자유무역협정(FTA)과 결부시켜, 이러한 논의가 현실에서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 생각해보게끔 한 점도 좋았다. 

 

학자들의 사상과 현대의 문제를 연결하는 시도는 좌담 후에 이어지는 인물들에 대한 설명 중에도 자주 엿보인다. 가령 채제공이 ‘시전 상인은 생활필수품을 개인 상인으로부터 싼값에 매점한 후 비싼 독점 가격을 매겨 백성에게 팔아 큰 이익을 남기려고 했다(p.81)’고 지적한 부분은 현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독점의 문제, 그 중에서도 대형 유통업체의 폐단을 이르는 듯했다. 박제가가 ‘소비를 촉진하면 생산 역시 활기를 띠고 상업은 나날이 발전해 나라와 백성의 삶은 풍요로워진다(p.137)’고 말한 대목에서는 케인즈의 유효수요설의 원조가 조선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질 정도다. 조선의 사상이라고 하면 왠지 고루하게 느껴지는데, 오히려 그 당시에 이미 이렇게 파격적이고 신선한 주장을 했다니 신기하다.

 

이 책의 제목은 언뜻 부적절하게 보인다. 18세기 이후 외세의 침략으로 급속히 몰락한 조선의 향방을 보면, 그들의 사상이 ‘조선을 구한’ 것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나라를 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조선의 방대한 학문적 성과와 치열한 지적 환경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는 조선을 구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우리 역사에도 이런 훌륭한 경제학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은 ‘조선의 경제학자’라는 주제 외에는 서술방식과 구성 면에서 다른 책들과의 차별점이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책머리의 ‘가상좌담’처럼 새로운 서술방식을 계속 시도했다든가,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나오는 대로 중농학파와 중상학파 순으로 인물들의 순서를 개연성 있게 배치했더라면 더욱 읽기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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