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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트 -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한 수학천재들 이야기
스캇 패터슨 지음, 구본혁 옮김 / 다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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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이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한 책이다. 꽤 두껍지만, 논픽션이면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되어있을테니 쉽게 읽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어려웠다. 금융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읽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주식 투자 한 번 해본 적 없는 위험회피 성향의 인간인 나한테는 어려웠다. 

아니, 그보다도 ........무서웠다.   

이 책의 시작은 이렇다. 

... 때는 2006년 3월 8일, 월스트리트 포커의 밤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낮에는 우수한 트레이더이자 빈틈없는 증권브로커들이지만, 밤이 되면 도박에 열광하는 호주머니가 넉넉한 '꾼'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이 비밀스런 행사는 명석한 두뇌와 배짱으로 월가의 새로운 거물들로 부상하고 있는 선택된 인재들의 모임이었다. 금융계의 상류사회는 너무도 은밀해서, 이 방에 있지 않은 외부인들은 아마 그들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대 뒤에서 일상적으로 내리는 결정들은 세계 금융시스템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자금 흐름을 좌우했다. (pp.11-2) 

이 책에는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활약한, 명석한 두뇌와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 금융시장을 좌우해온 수학천재들이 여러명 등장한다. '퀀트'는 바로 이들을 일컫는 용어다. 이들 모두 명문대 출신에 거대 금융사에 소속되어 있거나 일찍이 자기 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이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바로 도박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금융이나 도박이나 일정한 판돈을 누가 많이 가져가냐를 두고 벌어지는 두뇌 싸움이다. 그러니 금융계의 수학천재들이 도박에 관심이 많은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도박은 판이 벌어진 곳에서 끝나지만, 금융은 가계와 기업, 국가 재정에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천재들이 금융 거래를 마치 도박처럼 여긴다면 이들에게 돈을 맡긴 사람들, 그리고 이들과 같은 경제에 속한 이들은 어떻게 될까? 판돈을 전부 따겠다는 욕심은 가진 돈을 모두 잃는 실패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사회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예가 바로 2008년 미국발(發) 금융 위기다. 아무리 천재들이 뛰어난 두뇌와 방대한 통계 자료에 기반하여 완벽에 가까운 투자 공식을 만든다 해도, 시장에는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로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나심 탈레브는 이를 '블랙 스완'이라고 불렀다. (이 책에도 나심 탈레브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즉, 백조는 모두 흴 것이라는 '관념'은 단 한 마리의 검은 백조를 발견한 것만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금융시장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공식은 단 한 번의 오류나 예상치 못한 변수만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낼 수 있다. 

천재들에게 돈을 맡긴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돈을 잃었다면, 이 천재들은 과연 돈을 벌었을까? 흔히 투자를 하면 투자자는 돈을 잃고 투자를 돕는 중개인만 부자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들 역시 금융가로서 엄청난 부를 얻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투자 실패나 업무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안좋은 모습으로 업계를 떠났다. 

돈을 맡긴 사람도, 돈을 관리한 사람도 졌다면, 대체 누가 이 '게임'에서 이긴 것일까? 윈윈도, 제로섬도 아닌, 승자가 없는 이 게임을 과연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게다가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일. 

읽는내내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이해하기 어렵고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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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유랑 - 서른 살 여자, 깡 하나 달랑 들고 꿈을 찾아 나서다
윤오순 지음 / 해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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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읽느라 뒷부분은 대강 읽어서 아쉽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좀 더 찬찬히 읽어봐야지. 
그래도 앞부분은 꼼꼼히 읽었으니 리뷰를 남긴다.   

<공부 유랑>. 이 책의 저자는 상고 졸업 후 증권사에 취업하여 10년을 근무한 후 뒤늦게 배움의 뜻을 품고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전공했다. 늦게 이룬 배움의 재미가 더 컸는지, 저자는 졸업하자마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원에서 예술경영 공부를 하고, 다시 일본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다니며, 그야말로 '공부유랑' 인생을 살았다.  

저자의 '유랑기'를 읽으며 새삼 '공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공부란 무엇일까?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고 잘 하지도 못해서 이렇다 하는 대답은 못 하만, 적어도 조상들의 공부와 현대인들의 공부가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도 있듯이, 옛사람들은 공부를 스스로를 수양하고 주변을 다스리고 나라에 보탬이 되는 길, 즉 '도(道)'의 차원으로 생각했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 고등고시나 다름없는 과거시험도 급제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도를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보았을 것이다. 반면, 이제는 '사'자 붙는 직업으로 추앙(?)받는 학문인 의학, 법률, 통역 등은 공부가 아닌 기술이라고 보아 중인들이나 배우게 하였다.  

반면 현대인들이 하는 공부는 입시, 취업, 자격증 취득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은 학과 존폐 위기에 놓였다. 옛날 사람들처럼 휴일도 없이 밭을 일구고 소를 키울 필요는 없어졌지만, 그만큼 남는 시간에 더 공부를 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밥벌이도 안 하고 공부만 하는 사람을 오히려 '한량'이라고 부르며 놀린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공부철학은 요즘 세상과 참 안 어울려 보인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늦게 공부를 시작한 것도 특이하지만, 전공도 철학, 지리학, 예술경영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고보니 전공도 죄다 돈 안 되어 보이는 것들이다.) 게다가 돈도 없고 인맥도 없이, 마치 옛날사람처럼 발품을 팔아 교수를 찾아다니고 모르는 것은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학위 과정을 밟았다. 순전히 '공부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움직였다.  

물론 공부가 열정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다른 리뷰를 읽다가 저자가 이렇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평을 보았다. 확실히 좋은 지도교수를 만난다거나 기숙사장이 된다거나 장학금, 유학생 지원 프로그램 등에 선발되는 것은 실력뿐 아니라 운도 작용할 것이다. 저자도 책 곳곳에서 '운명', '우연' 같은 단어를 썼다.  

하지만 운보다도, 그 운을 만들어주는 열정이 없이 공부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참 많다. 그래서 진심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보기가 더 쉬울지 모른다. 오랫동안 공부한 교수들의 눈에 저자가 더 특별하게 보였던 것이고,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던 것처럼 말이다. 만약 '공부의 신'이 있다면 그 신마저도 그녀를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책 여기저기에 저자가 성실하게 살아온 모습이 느껴져서 좋았고, 저자의 공부 철학에 깊이 공감했다. 다만 공부법이든 유학생활이든 학문적 성취에 관한 것이든 무엇 하나 포인트를 잡아서 촘촘히 내용을 연결했더라면 저자의 열정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져서 더 멋진 책이 되지 않았을까. 공부만큼이나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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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다고 생각할 때 해야 할 42가지
밈 아이클러 리바스.크리스 가드너 지음, 이다희 옮김 / 흐름출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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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스물 여섯.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면 경력이 제법 쌓였을 것이고, 대학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진학했더라면 석사일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 들은 충격적인 사실. 아는 언니가 나보다 고작 한두살 많은데 애가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 외숙모가 결혼은 될수록 일찍 해야 좋다고 했는데, 작은엄마가 경력은 어릴 때부터 쌓는 게 좋다고 했는데, 어영부영 하다 보니 이제 전부 늦었구나 싶다. 

우울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차에 내 눈에 뜨인 책이 바로 <늦었다고 생각할 때 해야 할 42가지>였다. '늦었다'는 말이 어찌나 내 가슴을 후벼파든지... 게다가 저자 크리스 가드너는 바로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행복을 찾아서>의 원작이 된 실화의 주인공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행복을 찾아서>의 후속편 격인 것인데, 그렇다면 영화를 먼저 봐야겠지 싶어 지난 주말에 보았다. 영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 분)는 어렸을 때는 명석하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지금은 오늘 실적을 못 내면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세일즈맨이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았으나 그의 뜻과 달리 형편이 점점 안 좋아져 아내마저 그를 떠났고, 셋집에서도 쫓겨나 홀로 하나뿐인 아들 크리스토퍼를 키우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샌프란시스코 주식거래소 앞을 지나가다가 그는 이 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우여곡절 끝에 딘 워터 사의 인턴 자리를 따냈다. 하지만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6개월 간의 수습 기간을 거친다 해도 정직원으로 뽑히는 것은 고작 단 한 명. 고졸 학력에 아들 딸린 노숙자 신세인 그가 명문대 출신들을 따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무료 구호소에서 밤잠을 청하고 그마저도 안 되면 지하철 화장실에서 자고, 당장 1달러가 급해서 피까지 팔아가면서 말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란 언제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크리스처럼 아내가 자신을 떠났을 때, 집에서 쫓겨났을 때, 세일즈맨으로서 실패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늦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행복해지겠다는 신념, 아들과 결코 헤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만 생각했다. 늦었다는 것은 남들의 판단일뿐, 한번뿐인 내 인생에 늦은 때라는 건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 할 수 있는 방법이 마흔두 가지나 소개되어 있지만, 영화를 보고 그의 인생 여정을 떠올리며 읽었더니 마치 에세이나 후일담을 읽는 것처럼 편안하게 읽혔다. 무엇보다도 그의 굴곡 많은 인생이 남들에게 힘이 되는 뜻 깊은 경험으로, 성공의 모델로 보여진다는 것이 멋있었다. 그의 삶을 보면, 정말이지 단 하나도 나보다 나은 것이 없었는데 오로지 끈기와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을 이루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안 된다, 늦었다고 말하는 것은 사치이고 오만이 아닐까. 

그러고보니 몇 년 전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묻기에 대답했더니 '네 까짓게 되겠냐'며 비웃음 당한 일이 있다.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게다가 물어보니 대답을 했을 뿐인데 비웃어서 기분이 팍 상했다. 덕분에 보란듯이 성공해주겠다고 굳게 마음먹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기는 하지만, 아직 꿈을 이룬 것은 아니라서 그 일은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그 때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 가드너의 말대로 '내 꿈은 나만의 것이고 내가 지켜야' 하는 것(p.124), 영화에 나온 대사까지 인용하면 '누구도 내 꿈을 남이 할 수 없다고 말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Don't ever let somebody tell you "You can't do something".)  

누구에게나 살면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 포기할 것인가, 끝까지 계속 할 것인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크리스 가드너는 이 책을 통해, 그리고 그의 전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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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30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 같은 거 꾸어도 잘 이뤄지지 않고, 회한으로 남는다..고 느끼는 게 보통 많은 사람들의 경우일 거예요. 그치만 진짜 꿈을 꾸었다면 그런 얘긴 안 할지도 모르겠어요. 꿈은 꾸는 순간 벌써 이루어진다고 하던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이만교, 그린비) 1장 내용에 설득당해 버렸기 때문이죠. (이 책, 1장만이라도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이 1장은, 누구라도 읽어보면 좋을 장이죠.)
여튼 저도 '모든 것을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을 요즘 의식, 무의식 통틀어 줄곧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좀 생각을 바꾸자고 반성해 봅니다.

키치 2011-08-31 00:21   좋아요 0 | URL
와, 저 그 책 읽었어요. 지금 어딨는지 몰라서 살짝 민망합니다만, 글쓰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해준 책이었어요. 반갑습니다 ^^ 좋은 꿈 꾸시고 꼭 이루세요.
 
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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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백 번 달군 금침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언젠가 인터넷인가 책에서 <나를 알아주는 벗>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짧은데도 묘사가 어찌나 강렬한지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게다가 조선 시대에, 임금도 아니요 공자님도 아닌 '고작' 벗에게 이런 정성을 쏟은 학자가 있었다니, 당시로서는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글쓴이가 누군지 궁금하여 이름을 찾아보니 이덕무라고 했다. 같은 시대 사람인 정약용이나 박지원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조대왕 시절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마침 그의 글을 모은 <책에 미친 바보>라는 책이 있다고 하여 서둘러 읽어보았다. 이덕무가 쓴 글과 서간문 등을 모아 만든 산문집인데, 책 제목은 생전에 그가 책 읽기를 마치 미친 사람처럼 좋아했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 '간서치'에서 따왔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많이 보았는데 이런 뜻이었구나. 

고전이나 유학에 대해 잘 몰라서 간혹 읽기에 어려운 글도 있었지만, 친구나 가족에 대한 글은 읽기 쉬웠다. 무엇보다도 글 한편 한편 이덕무라는 인물의 사람됨이 드러나 재미있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열광한 글은 바로 이 글. 이서구에게 쓴 편지다.

이서구에게 2

내가 단것에 대해서는 마치 성성이(오랑우탄)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만큼 좋아한다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단것을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것이 생기면 내게 주곤 했는데, 오직 박제가만은 그리 하지 않았소. 박제가는 세 번이나 단것을 먹으면서도 나를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주지도 않았소. 어떤 때에는 남이 내게 준 것까지 빼앗아 먹곤 했다오. 친구의 의리상 허물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는 것이 당연하니, 그대가 내 대신 박제가를 깊이 나무라 주기 바라오. (p.157) 

이 글에 등장하는 이서구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고 박제가는 알다시피 '북학의'의 저자다. 두 분 다 국사 시간에 책에 밑줄 죽죽 그어가며 배운 위인들 맞다.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위인으로서의 품위는커녕, 이덕무가 좋아하다못해 환장하는 단 음식을 빼앗아 먹는 얄궂은 벗(박제가)과 그런 이덕무의 투정을 받아주는 너그러운 벗(이서구)만 보인다. 게다가 이덕무는 어떠한가. 박제가에게 불만을 바로 말하지 않고 이서구에게 이른바 '뒷담화'를 늘어놓다못해 대신 혼내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이쯤되면 사람 냄새 나다 못해 시트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래, 그들에게도 이렇게 시트콤처럼 즐거운 시절이 있었겠지, 암... 

하지만 이 글만으로 그들의 우정을 전부 판단해서는 안 된다. 뒷부분에 훗날 이덕무가 소중한 벗인 박제가가 북학만 좋아한 나머지 행여 임금의 노여움을 살까 걱정하여 임종을 앞두고도 박제가에게 '임금의 노여움을 사지 말고 부디 몸조심하라'는 글을 남기는 부분이 나온다. 죽음이 코 앞까지 다가왔는데도 행여 존경하는 임금과 사랑하는 벗 사이가 멀어질까 염려하는 이덕무의 마음이 애처로웠다.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하면, 역사라는 단어의 무게 때문인지 근엄하고 무게 있는 어르신의 모습만 떠올랐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를 흉보면서도 걱정하는 모습도 그렇고, 박지원이 새로 펴낸 글이 멋지다며 찬사를 보내고, 넉넉잖은 살림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은 지금 내가 작가와 예술가를 좋아하면서도 가벼운 지갑 사정을 걱정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일까. <책에 미친 바보>를 읽으며, 책만큼이나 벗과 인생에 미쳐있었던 조선 후기의 선비 이덕무의 모습에서 오늘을 사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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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30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오늘 저도 읽기 시작했어요.^^ 아까 커피숍에서 '문장과 학풍에 대하여'까지 읽었는데.. 반갑네요.

키치 2011-08-31 01:33   좋아요 0 | URL
제가 모르는 게 많아서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벗에게 쓴 편지와 가족에 대한 얘기가 좋았어요. 섬 님 마음에도 좋은 느낌으로 남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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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이 vegan diet 중이라고 한다. vegetarian diet 이 육류 섭취만 안 하는 것이라면 vegan diet는 생선, 우유, 치즈, 계란 등도 먹지 않는 '초강력' 채식주의라고. 채식주의자가 전보다 늘었는데 뭐 별난 일인가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빅맥을 즐겨먹는 모습이 여러번 찍혔을만큼 패스트푸드와 육식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2004년 심장 수술을 받은 뒤 섭식 조절을 시작했고, 작년에 있었던 딸 첼시의 결혼식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슬림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옛날 같으면 먹을 것도 없는데 식단을 조절한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은 소리로 들렸겠지만, 이제는 몸에 필요한 영양소만 집중적으로 섭취할 수도 있고 식습관을 바꿀 수도 있으며, 먹고 찐 살까지 의학의 도움으로 쉽게 뺄 수 있다. 빌 클린턴처럼 일찍부터 몸을, 건강을, 그리고 수명까지도 조절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건강을 관리할 수 있고 수명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자연히 따라오는 문제는 고령화다. <회색 쇼크>는 국가를 넘어 국제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이 고령화 문제에 관한 책이다. 도서관에서 보고 일본의 사례가 재밌기에 훌훌 읽다가 잘 알아두면 좋을 내용인 것 같아서 아예 통독했다.  

고령화. 사실 아직 젊은 나이라서 몸으로 느껴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당장 부모님 정년이 가까워오고, 집안의 최고 고령자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닌 외증조모(즉 나의 어머니의 외할머니)인 것을 생각하면 먼 일도 아니다. 외증조모님 연세가 100세 가까우시다고 들었는데 나도 그 때까지 살게 될지 모른다. 

고령화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에서 보니까 전세계에 100세 이상의 인구가 현재 45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100세 이상 인구수는 1,800명 이상. 일본이나 유럽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고.) 무려 100세 이상의 인구만 45만명이니, 80세 이상, 60세 이상의 인구는 오죽 많을까. 

일본,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유명 대학을 중심으로 '장수학', '노인학' 같은 강좌가 개설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고령화는 또한 산업과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산업은 고령화로 인해 노동자 평균연령과 분포가 바뀌니 생산성이 달라지고 경제가 개편된다는 것은 알 수 있겠는데, 문화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읽어봤더니 내가 요즘 궁금해하던 문제가 딱 나왔다. 바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범람! 

수전 보일의 에피소드는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것일 수도 있다. 텔레비전 제작자들은 옛날부터 18~35세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돈을 어떻게 지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력이 여전히 베이비부머와 그 부모에게 있는 고령화사회에서, 영국의 <브리튼스갓탤런트>, 미국의 <아메리칸아이돌>,<댄싱위드더스타즈> 같은 리얼리티쇼는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나이 든 시청자들을 끌어당기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미국에서는 베이비부머가 일주일에 39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본다고 알려져 있다. 인터넷과 핸드폰에 더 많은 시간을 뺏기는, 대학교를 갓 졸업한 세대에 비해 12시간 더 많이 본다. (p.380)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라지만 내가 TV를 많이 안 봐서 실감이 안 났는데, 이제보니 우리 부모님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광팬이셨다. '청강이, 청강이' 하시기에 누군가 했더니 '위대한 탄생'인가 하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친구라고. 요즘은 슈퍼스타K 3를 열심히 보시고, 댄싱위드더스타도 보신다고. 나가수는 재방송까지 보신다. 남자의 자격에서 하는 청춘합창단도 굉장히 좋아하시던데, 오디션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일반인이 TV출연해서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맥락은 비슷하다. 

젊은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우리 부모님처럼 나이 드신 분들까지 TV 앞에 붙들어매는 것을 보면 이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매력이 대단한가보다. 자식으로서는 밖에 나가서 친구분들도 만나고 취미 생활도 하셨으면 하는데, 막상 부모님 말씀을 들어보면 몸도 예전같지 않고 친구분들 만나기도 쉽지 않아서 TV로라도 대신하는 것이라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아무리 미디어가 '마사지'라고 해도 언제까지나 대리만족만 주어서는 한계가 있을텐데... 

비단 TV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여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개인으로서도 라이프 플랜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바꾸고, 노동과 여가에 대한 관점도 바꿔야 할 것 같다. 더 오래 살면 평생 먹고 살 걱정도 늘어나고, 뭐 하고 놀지, 누구와 살지에 관한 고민도 더 늘어나는 게 아닌가.  

참, 사는 게 걱정인데 오래 사는 걱정도 하는 시대가 왔구나.  

빌 클린턴처럼 나도 채식을 시작해볼까? 그 걱정도 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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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인분들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니, 왠지 의외군요. 저희 어머니는 드라마 팬이시라.. 근데 다른 걸 할 수 없기에 TV를 더 시청한다는 건 슬픈 현실이에요. 저희 어머니도 아프시게 되면서 티비를 더 많이 보시거든요.

키치 2011-08-31 01:34   좋아요 0 | URL
저희 부모님은 tv 잘 안 보시는 편이었는데 점점 드라마에 빠지시더니 요즘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그렇게 좋아하세요. 자식으로서 걱정될 정도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