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논리 - 세상의 헛소리를 간파하는 77가지 방법
줄리언 바지니 지음, 강수정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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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에 이어 <가짜 논리>라는 책을 읽었다. <촘스키> 리뷰에 썼듯이 요즘 내 화두가 논리, 비판적 사고라서 이런 책에 자꾸 손이 간다.  

이 책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작가, 칼럼니스트인 줄리언 바지니가 인간이 사고를 할 때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를 총 77가지의 유형으로 정리한 책이다. 오류의 유형이 자그마치 77가지나 된다니...!!! 읽는 데 부담스러운 숫자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인간의 언어활동에 있어 엄청난 양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한 것 같다.  

이 책의 장점은 이라크 전쟁 같은 중대한 사건과 조지 부시, 토니 블레어 등 정치인을 비롯한 저명한 인사들의 발언 등 실제 사례를 풍부히 활용했다는 점이다. 논리에 관한 대부분의 책이 단순히 논리의 구성이나 오류의 의미, 예시를 설명하는 데 그치는 반면, 이 책은 실제 생활에서 어떤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점이 좋았다.    


동의를 했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은 몇 가지 이유에서 오류가 있다. 

첫째, 사람들이 가끔 끔찍한 선택을 하는 이유는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매춘이 좋은 예다. 궁지에 몰려서 발을 들인 게 아니라 직업으로 그 일을 선택한 여성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많은 경우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뛰어든다. 물리적으로 강압하지만 않는다면 매춘이 착취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은 이만저만 착각이 아니다.

둘째,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해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괜찮아지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개도국의 공장에서는 노동자에게 화장실을 다녀올 시간조차 넉넉히 허락하지 않고, 마실 물도 제공하지 않으며, 그 나라의 보건 및 안전 법규를 준수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그 지역의 노동자들에겐 이런 공장이나마 다닐 수 있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해서 그런 상황을 외면해도 되는 걸까? (p.178) 

책에서 인상깊게 읽은 대목이다. 경제학을 공부하다보면 모든 것이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대가가 좋든 나쁘든 간에 자발적으로 한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박힌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이제까지 7년 가까이 배운 게 그것이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부족한 것이 많다고 느꼈는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최적의 선택'이라는 것을 경제학에서 하듯 피상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맥락과 배경을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보면 논리학이라는 것이 그저 사고를 잘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니, 나만 몰랐나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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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 말과 글을 단련하고 숫자, 언어, 미디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기술
노르망 바야르종 지음, 강주헌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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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버젓이 '촘스키'라는 이름이 들어 있지만, 이 책은 촘스키가 쓴 책도 아니요, 촘스키에 대한 책도 아니다. 원제는 'A short course in intellectual self-defense'로 역시 촘스키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제목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기 쉽게' 바뀐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때문에 '제목에 낚였다'는 리뷰도 종종 보았다) 

이 책에서 저자 노르망 바야르종은 인간의 사고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크게 언어, 숫자, 경험, 과학, 미디어 등으로 보고, 이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왜곡과 거짓으로부터 이성적인 사고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전쟁에 쓰이는 완곡한 표현 

완곡한 표현(직설적 표현)

부수적 피해(민간인 사망) 
화해를 위한 시설(강제수용소) 
국방부(외국 침략부?) 
방어를 위한 공격(폭격) 
전략적 후퇴(아군의 후퇴) 
전술적 재배치(적군의 후퇴) 
특별한 폭발물(네이팜탄)  ...

p.26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바로 언어. 저자가 제시하는 언어적 오류의 예를 하나하나 읽고 있자니 대체 제대로 된 말과 글은 어디에 있나 싶다. 수없이 듣는 말과 읽는 글에서도 수십 가지의 오류를 찾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내가 직접 하는 말과 쓰는 글에는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을까? 생각만해도 오싹하다. 그냥 입 다물고, 절필하고 사는 게 낫겠다 싶다. (작가도 아니고, 게다가 인터넷에 글을 쓰는 정도이니 '절필'까지도 못되지만...)

홍보는 민주적인 삶과 정보 제공이란 개념에서 잉태됐지만, 현실에서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쓰인다. ... 현재의 미디어는 홍보회사와 역사적 배경이 유사하다. 오늘날 미디어는 거대기업으로 변해, 그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고 이해하려면 주도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이런 조사를 꼼꼼하게 하면, 미디어의 프로파간다 모델은 무엇이고, 미디어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며, 이상적이고 선언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에서 그들이 여론을 어떻게 형성해가는지 등을 밝혀낼 수 있다. (pp.277-8) 

이밖에도 숫자, 경험, 과학에서 비롯될 수 있는 오류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요소가 바로 미디어다. (이 부분 때문에 한국어판 제목이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이 되지 않았나 싶다.) 미디어가 괜히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 아닌 게, 이제까지 설명한 언어, 숫자, 경험, 과학 등 오류를 야기할 수 있는 요소들이 전부 미디어를 구성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광고는 관련 제품의 결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광고는 이성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방법보다는 다양한 심리적 기법을 동원한다. 
광고는 종종 기만적인 수법을 사용한다. 
과대 광고가 많다. 
광고는 전문용어나 기만적인 유머를 사용한다. 
광고는 소비자가 엉뚱하게 추론하도록 유도한다. 권위자를 내세워 소비자의 합리적인 추론을 방해한다. 
광고는 우리의 가치관에 영향을 끼쳐, 관련 제품으로 쉽게 채울 수 있는 가치관으로 바꾸도록 유혹한다.  (p.292) 

그 중에서도 문제가 되기 쉬운 것이 바로 광고다. 광고 자체가 특정 기업이나 단체의 이익을 대변해주기 위한 것인만큼 논리의 비약이나 왜곡이 있기 쉽다. 그런만큼 소비자는 최대한 냉철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구매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하다못해 여기 알라딘 서점만 해도 '유명 작가 00이 추천한 책', '00에서 필독서로 선정한 책', '가장 많이 읽힌 책' 등 사고를 왜곡시키는 문구들을 다수 활용하여 구매자들을 유혹한다. 이해는 하지만 '낚이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겠다. 

광고라고 하니, 외국 방송을 많이 보는 사람으로서 방송 광고를 볼 때 우리나라 방송 광고와 비교를 많이 하게 된다. 두드러지는 차이점 중 하나는 우리나라 방송 광고 중에는 구체적으로 무슨 제품을 파는지는 등장하지 않고 00, XX, @@ 등등 기업명만 등장하는 광고가 많은 반면, 외국 방송 광고는 전적으로 제품이 메인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제품을 구매할 때 제품명이나 기능은 무시하고 무조건 광고에 나온, 이름이 잘 알려진 대기업 제품만 구매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나의 막연한 추측이고,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다 써놓고 보니 이 책 제목이 참 역설적이다. 언어로 인한 거짓을 구분하는 방법에 관한 책 제목이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이라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촘스키가 아니므로) 촘스키처럼 생각하기도 어렵고,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이라는 말 자체도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애매모호한 말이다. 이걸 이제야 알았으니, 나는 역시 아직도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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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본심 - 스탠퍼드 교수들이 27가지 실험으로 밝혀낸
클리포드 나스.코리나 옌 지음, 방영호 옮김 / 푸른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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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슷한 사람끼리 더 잘 맞고 잘 어울린다. 성격이 반대일수록 끌리고 더 잘 맞는다는 설도 있지만, 실제로는 반대인 성격끼리 서로 닮아가는 과정에서 호감을 가지게 되고, 이성인 경우에는 사랑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관계의 본심>은 사람의 성격 유형과 관계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친구든 이성이든 동료든, 곰곰이 생각해보면 유독 나와 잘 맞고 호감이 가는 성격 유형이라는 것이 있다. 가령 나는 적극적이고 활발한 사람보다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이 좋고, 상식적인 사람보다는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사람에게 끌린다. 저자의 결론대로라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서, 또는 그렇게 되고 싶기 때문인 모양이다.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얻고 싶고, 자신이 얼마나 지적으로 보이는가에 관심이 없다면 스스로를 비판하고 타인을 칭찬하면 된다. ... 우리가 호감을 얻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지적이라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칭찬하지 않거나 우리의 능력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누군가를 비판할 때 자신과 의견을 주고받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p.90) 

인간의 유형을 나누는 방법으로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책에는 크게 지배형과 순응형, 냉정형과 다정형이 제시되어 있다. (지배형+냉정형=비판형, 지배형+다정형=외향형, 순응형+냉정형=내향형, 순응형+다정형=수용형. 자세한 사항은 책 참조) 

그 중에서도 지배형과 순응형에 대한 분석이 재미있었다. 지배형은 다른 사람을 통제하기를 좋아하는 유형으로, 보통 이런 문구에 호감을 느낀다. "반드시 B 말고 A를 선택해야 합니다. A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여섯 가지가 넘습니다. 이번 평가를 90퍼센트 확신합니다." 반면 순응형은 남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꺼리는 유형으로 이런 문구를 좋아한다. "혹시 B 말고 A를 선택해야 할까요? A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평가를 40퍼센트 확신합니다." 

지배형인 저자는 과연 순응형의 문구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표현이 모호하고(선택해야 할까요?, ~있는 것 같습니다), 문구가 자신감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40퍼센트만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의 순응형인 제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배형의 문구는) 막무가내로 횡포를 부리는 것 같네요. 거만한 사람 같아요.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닐까요? 별로 눈여겨볼 게 못 되는 것 같네요." "(순응형의 문구는) 이것들이 사려 깊게 보여요. 이 문구를 쓴 사람은 불확실한 일을 단정적으로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아는 듯 해요. 이 사람의 생각에 믿음이 가네요." (pp.106-7) 

이 부분을 읽으면서 대부분의 광고나 매체가 지극히 '지배형 위주'라는 생각을 했다. '00을 강력추천합니다', '00을 자신있게 권합니다' 이런 멘트에 지배형 인간들은 호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순응형의 인간들은 '웃기네, '그래서 뭐?'라는 반응을 할 것이다. (내가 그렇다.) 오히려 비판적이다 싶을만큼 치밀하고 객관적인 문장이나 글에 믿음을 주고 호감을 보일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서평. 대가를 받고 쓰든, 비판이 두렵든 간에 무조건 칭찬 일색인 서평에는 마음이 덜 간다. 아주 작은 흠이라도 적혀있을 때 '과연 그럴까?' 하는 호기심에 읽어볼 마음이 들고, 직접 읽고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많다. 서평을 쓰고 책을 읽는 사람 중에는 (대개 외향적인) 지배형보다는 (내향적인) 순응형이 많을테니, 서평 쓰는 사람들은(그리고 서평단을 운영하시는 분들도) 칭찬하는 서평만 고집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사람들은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알아채기 힘든 성격의 사람에게는 반감을 보인다고 한다. (p.114)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ㅡ 비슷한 사람끼리 더 잘 맞고 좋아한다고 해서 자신을 감추고 반대 타입의 사람에게 무리하게 맞출 필요는 없다. 오히려 외향형인지 내향형인지, 지배형인지 순응형인지 알아채기 힘든 사람에게는 호감도, 무관심도 아닌 반감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성격에 대한 힌트는 주로 외모나 옷차림, 목소리 등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성격에 맞추어 이미지를 연출할 필요가 있다. 외향적인 성격의 사람이 침착해 보이는 모노톤의 의상을 고집하고 낮고 점잖은 목소리로 말하면 상대가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반대로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이 화려한 옷을 입고 높은 톤의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상대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의외로 생활 속에서 실천(내지는 연출?) 하기는 힘든 것 같다. 자신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것은 며칠로 끝낼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기대한 책은 아니었는데 재미있게 읽었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의 분야로 여겨지기 쉬운 인간심리와 관계에 대해 이렇게 과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도 괜찮은 시도인 것 같다. (심리학도 사회과학의 일종이니 크게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한동안 이런 책을 즐겨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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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코리안 델리 - 백인 사위와 한국인 장모의 좌충우돌 편의점 운영기
벤 라이더 하우 지음, 이수영 옮김 / 정은문고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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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국인 이민자 부모 밑에서 자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미국인 남성이다. 원래 직업은 '파리 리뷰'라는 문예지 편집자로, 청교도 전통을 지닌 백인 중산층 가정 출신이다. 그런 그가 엉겁결에 장모와 함께 델리를 경영하게 된다. 델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동네마다 한두개쯤 있는 슈퍼마켓(그나마도 요즘은 편의점과 대형마트, 대기업 체인 마트에 밀려나 보기가 힘들다) 비슷한 것인데, 생필품, 식료품은 물론 간단한 요깃거리나 커피 같은 음료도 판다. 초기자본이 얼마 들지 않고 기술도 필요 없다보니 외국인 이민자가 주로 운영하고, 그 중에서도 생활력 강하고 성실하기로 유명한 한인들이 많이 운영한다고 한다.  

 

몇 달 전에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예상한 반응은 "안 돼, 벤! 그동안 받은 교육과 자란 환경을 생각해야지. 제발 부탁이다!" 같은 거였는데, 막상 부모님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야. 도시 하층계급의 삶에 대한 민속지랄까, 참여연구가 되는 거지. 조지 오웰도 접시닦이로 일한 적이 있잖니. 조지프 콘래드 역시 젊은 시절 배를 타고 해외를 떠돌았고." (pp.61-2)

저자는 그때까지 백인 중산층 가정 출신답게 변화를 싫어하고 다른 인종이나 민족, 계급과 어울려 살아본 경험도 별로 없었다. 정신적인 가치만을 숭배하며, 맹목적으로 돈만 추구하는 것은 속물스럽다고 생각했다. 델리에서 일하는 것을 '재미있는 경험'으로 치부하는 그의 아버지의 말만 보아도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지 상상이 된다. (반면 한국인 장모는 딸이 취직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은 많이 준대니?") 그러니 책 읽고 생각하는 일이 천직인 '글쟁이' 저자에게 델리 일은 고통 그 자체였다. 육체노동은 처음인데다가, 갑자기 다양한 배경을 가진 낯선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당연하다. 게다가 투잡을 뛴다는 것이 알려져 본업인 편집자 일도 간당간당하게 되었다. 처음해보는 장사도 신통치 않은데, 델리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나면 어쩌나 하는 고민에 시달리는 날도 있었다.     

거기에 한국인 가정에서 생활하는 고통까지 더해졌다. 델리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재정적인 문제로 아내와 처가에 얹혀살게 되는데, 일찍이 청소년기부터 독립해서 살았던 그에게 이는 엄청난 변화였다. 한국 가정이 대개 그렇듯이 가족들이 노크 없이 벌컥벌컥 문 열고, 옷은 물론 속옷까지 같이 입고, 친척들이 자주 드나들고...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프라이버시'라는 것을 도무지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특히 저자를 괴롭히 것은 바로 한국음식. 한국인들이 '매 끼니를 방금 단식이라도 끝낸 것처럼 먹는'다는 문장을 읽고, 금방 과식에 가까운 식사를 끝낸 스스로를 반성했다. 하지만 한국인인 내 눈에는 미국인들이 머핀 한 개, 샌드위치 한 개로 식사를 때우는 게 신기해 보인다는 걸 알까? (내 눈에 그것들은 그저 '간식'일 뿐인데 ㅎㅎ)     

  

도서전 같은 일을 통해 조지는 편집자들이 '문학'처럼 천성적으로 고귀한 것은 내버려두어도 성공하리라는 당위만 품고 관성적으로 일하는 대신, 판매 일도 해보도록 구슬렸다. 도서전으로 내몰아 판매를 구걸하도록 만들어, 자아를 파는 것 같은 행위에도 굴욕감보다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pp.258-9)  

하지만 델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이면서 그에게 점점 변화가 찾아온다. 그 변화가 극적으로 보여진 부분이 바로 회사 업무차 가게 된 도서전. 예전같으면 팔짱 끼고 부스를 지키고 있었을 그가 목청 높여 구독자를 유치하며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델리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어떻게 팔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죽어있는 문예지를 사람들 손에서 살아나게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 것이다. 

생각해보면 소비 행위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판매 행위도 그럴 것이다. 우리말로 '물건을 사다'라고 할 때 '사다(buy)'라는 말과 '삶을 살다'라고 할 때 '살다(live)'라는 말이 비슷한 것은 우연일까? '사는' 행위가 '살아있는' 기쁨을 준다면, 파는 행위도 그만큼 즐겁고 보람된 일일 것이다. 남에게 살아있다는 경험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무엇을 팔 때 받는 것은 동전 몇 푼, 지폐 몇 장뿐만이 아니라, 누군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기쁨, 보람, 그 짜릿함도 있다. 그러니 맥주를 팔고 담배를 파는 것처럼, 편집자로서 좋다고 생각하는 글을 남들에게 파는 것은 결코 속물적인 일이 아니라고 저자는 확신하게 되었다.    

처음 이 책 소개를 읽었을 때에는 미국인 사위가 한국인 이민자 가정에서 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한 남자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 개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가족과 지역사회로 시각을 넓히는, 제법 깊이  있는 성장기(저자 나이가 서른이 넘었으니 성숙기라고 해야 하나?) 였다.  

나에게는 언제 어떤 곳이 귀중한 삶의 체험의 장소ㅡ 즉, '마이 코리안 델리'였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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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향 Vocabulary 22000 - 2nd Edition
Harold Levine 지음, 임해영 편저 / (주)YBM(와이비엠)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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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단어, 숙어를 외우게 하는 시중의 단어책과 달리 

이 책은 접두사, 접미사, 어원 등을 활용하여 체계적으로 어휘를 암기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점이 좋았다. 

처음에는 22000단어라는 방대한 양에 겁이 나기도 했는데 

꾸준히 공부하다보니 '정말 22000개의 단어가 실려 있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쉽게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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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키치 2011-11-01 15:00   좋아요 0 | URL
어휘가 딸리는 것 같아서 예전에 사놓고 10월 한 달 동안 바짝 공부했네요 ㅎㅎ 영어 어휘책은 많이 안 봐서 모르겠는데 이 책은 괜찮은 것 같아요. 덧글 고맙습니다~

나는 사과다 2017-09-16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2000단어가 실려있어서 22000이 아니랍니다.
22000,33000은 수준을 의미합니다.

키치 2017-09-16 06:39   좋아요 0 | URL
와... 그랬군요! 서른 넘도록 몰랐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