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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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다가 이 책 <분노하라>가 눈에 띄었다. 저자 인터뷰에 추천사, 역자 후기, 주석을 합쳐도 채 백 쪽이 안 되는, 소책자마냥 얇은 이 책을 지난 여름에 한창 화제가 되었을 때 바로 구입해서 읽고(그것도 콩국수 집에서 콩국수 나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에 ㅎㅎ) 감상 쓰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이 글은 계절이 두번 바뀐 뒤에야 쓰는, 아주 뒤늦은 감상문이다.

 

저자 스테판 에셀은 1917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1917년생이면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에 태어나신 셈이니 저자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더욱 묵직하게 느껴진다. 7세 때 프랑스로 이주하여 20세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저자는 선배인 사르트르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는 통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레지스탕스의 일원이 되었다. 연합군 상륙작전을 돕는 중에 체포 되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여 외교관이 되었다. 종전 후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인권과 환경 문제에 굵직한 종적을 남겼다.

 

이 책의 머리말에는 제일 먼저 저자가 몸담았던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구축한 개혁안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이 개혁안에는 사회보장제도 구축, 언론 독립, 평등한 교육 등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새롭고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종전 후 프랑스는 이 개혁안에 기초하여 사회제도를 만들었고, 그 결과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자는 2008년 무렵부터 프랑스 사회의 근간이기도 한 개혁안의 의지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 묵인되고, 사회보장제도가 제 구실을 못하고, 언론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장악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며 저자는 분노했다. 나치로부터, 전쟁의 참화로부터, 종전 후 혼란으로부터 지키고자 했던 사회의 모습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p.15)

 

저자는 사람들이 좀더 자신처럼 사회에 대고 분노하기를 바란다. 분노는 레지스탕스가 들고 일어섰던 기본동기로서, 미약한 개인을 사회에 참여하게 만들고, 투사로 만들며, 이 투사들이 역사를 만들고 자유를 쟁취한다는 것이 저자의 논리다.

 

분노와 상반되는 최악의 태도로 저자는 무관심을 지적했다. 분노는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하는 것이니 결과 또한 부정적이지 않겠냐는 의구심이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분노는 지금 처한 상황을 극복해서 긍정적인 미래를 맞이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는 반면, 무관심은 상황에 승복하여 아무런 희망도, 보람도 없이 살겠다는, 지극히 수동적인 감정이다. 부정에 일일이 분노하는 사회가 조금은 피곤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회보다는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저자가 전하고자 한 바가 아닌가 싶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p.22)

 

 

나이를 먹을수록 역사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더욱 경건해진다. 어릴 때부터 만화책보다 역사책을 좋아하고, 사극을 좋아했을만큼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런 내 눈에도 그 때는 역사가 그저 왕들이 나오고 신하들이 나오는 옛날 이야기에 불과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생활인으로서 살며 밥과 돈이라는 아주 근원적인 욕구에 나란 사람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가 깨달을 때마다, 그런 욕구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정의, 민족의 독립 등 대의를 위해 싸운 인물들에 대해 더욱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저자 스테반 에셀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2차대전, 나치, 레지스탕스, 드골, 세계인권선언 ㅡ 이런 흘러간 역사가 이 분에게는 삶이었고, 아직도 꼬리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 현실일 터. 그런 저자의 눈에는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수많은 이들이 피땀흘려 얻어낸 정의와 자유가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고 답답함을 느끼실까? 부끄러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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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재구성]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위기의 재구성 - 글로벌 경제위기 제2막의 도래
김광수경제연구소 지음 / 더팩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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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신간평가단을 통해서든 개인적으로든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과 전개과정에 관한 책을 여러권 읽었다. 그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위기의 재구성>이다. 금융위기의 원인부터 제로금리정책, 달러 기축통화제, 금융자유화 등 기존 이론과 정책에 대한 반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까지도 여파가 남아있는 유럽경제와 세계경제의 위기, 그 중에서도 공적채무와 인플레 문제에 대한 분석까지 조목조목 정리되어 있어서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해 콤팩트하게 알아보기 좋다.

 

그러나 내용면으로 보면 비슷한 주제의 책을 여러권 읽어온 사람으로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거나 놀랍다고 느낀 부분은 별로 없었다. 경제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신문을 들여다보고 뉴스를 보고 책을 읽어왔던 사람이라면 식상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무래도 연구보고서에 기초한 글이라서 그런지 문체나 글의 구성이 매우 객관적이라서 읽는 맛은 좀 떨어졌다. 과연 이 책을 읽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보고서는 그만큼 관심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읽는 자료이기에 수준이 높아도 무관하겠지만, 책으로 출간된 이상 폭넓은 수준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게끔 문체나 구성면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게다가 주제에 대한 분석 시각도 화폐 부문에 너무 치우쳐 있는 감이 있다. 이 책의 분석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을 과도한 금융자유화와 달러기축 변동환율제의 위기, 재정 위기 등 주로 화폐 부문에 돌리고 있는데, 경제를 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 실물과 화폐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오로지 화폐 부문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힘들다. 화폐 부문에 대해 강조하다보니 무역 불균형, 에너지 수급, 고령화 사회로의 진전, 신기술 부재 등 실물 부문에서 야기된,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간과하게 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금융위기가 실물 부문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었더라면 이 책이 보다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몇년 전엔가 김광수 경제연구소에서 나온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위기의 재구성>이 그 책보다는 발전된 점이 많이 엿보여서 앞으로 출간될 책에도 기대를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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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 자음과모음 인문경영 총서 2
베서니 맥린 & 조 노세라 지음, 윤태경.이종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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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어느 책을 읽다가 집권층과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의 괴리, 즉 소통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 부분에 깊이 공감했다. 전문 지식을 소유하고 집행 능력을 가진 측과 그저 말없이 그들의 논리를 따라야 하는 측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요근래 경제 전문서를 읽으면서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저자들은 대부분 경제학을 전공하고 정부, 금융계, 학계 등에서 다년간 종사해온 전문가이고, 독자들은 그들의 전문적인 통찰과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하지만 경제에 결코 정통하지 않아도 대학에서 다른 학문 대신 경제학을 전공으로 선택했을 만큼 관심은 있는 내가 읽기에도 요즘 나오는 경제학들은 지나치게 말이 어렵고 논리가 복잡하다. 정말 이 책들의 내용을 대중히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이렇게 되면 독자가 경제 전문서를 읽으면서 얻게 되는 것은 단 두 가지로 귀결된다. '잘 모르겠다'는 체념, 그리고 '내 일이 아니라'는 방관.

 

지난밤 <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를 읽었다. 2008년 미국에서 벌어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의 원인에 대해 규명한 이 책은 뉴욕 타임스의 경제 경영 칼럼니스트인 조 노세라와 포춘지 기자인 베서니 맥린이라는 두 언론인이 쓴 책 답게 - 다행히도 -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되어 있어서 좋았다. 제법 두껍고(약 500여 페이지), 등장 인물과 회사수도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협지를 연상케 할만큼 많지만 읽기에 무리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언어의 문제는 책보다도 미국의 경제 현실 속에 있었다. 당시 미국 금융정책의 선봉장이었던 그린스펀은 시장의 순기능을 맹신했고, 그를 믿고 월가는 전문가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파생금융상품을 양산했다. 여기에 부동산 업체는 부실한 모기지 상품을 만들어 인간의 '집'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처럼 가장했고, 이에 질세라 대출 업체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렇게 사회 전반이 열광하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괜찮다'고 말하는 데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파생상품이니 모기지니 하는, 어렵지만 똑똑하게 들리는 말을 할수록 대중은 '나는 모르지만, 저들이 잘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체념하고 따르거나 방관했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모르는 자를 속이고, 대중은 모르는 채로 아는 이들의 말을 듣고 따른 잘못은 결국 헤어나오기 힘든 수준의 위기로 이어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 알아듣지 못한 -  대중의 몫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을 들춰보고 언론의 보도를 들으면 알아듣기 힘든 얘기들이 넘쳐 난다. 

 

여전히 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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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김중혁의 <뭐라도 되겠지>를 읽다가 공감 가는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는 대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로장학금을 받았다. 그 시절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들이 돌아보니 삶에 더할 나위 없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나도 학교 때 근로장학금을 받았다. 1학년 때는 신청 자격이 안되어서 못하고, 졸업학기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안 한 걸 빼면 꼬박 5학기, 2년 반을 받은 셈. (근로장학금은 웬만한 아르바이트보다 시급이 높고, 공강 시간을 활용하여 학교 안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제도이므로 대학생들에게 강추한다.) 2학년 겨울 방학 때 일했던 곳이 중앙도서관이었다. 우리학교 도서관은 관내에 가방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도서관 입구에 가방을 맡기도록 되어 있었는데, 내가 일했던 곳이 바로 그곳 가방 보관소였다. 그 해 겨울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교직원 선생님들,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보냈던 시간이 떠오른다. 귤도 까먹고, 교직원 선생님이 가을에 학교 교정에서 모아두신 은행도 구워먹고 그랬는데... 지금은 다들 어떻게 지내려는지...

 

 

혼자 일할 때는 시간이 나는 틈틈이 책을 볼 수도 있었다. 그 때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고르라면 바로 이 책,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다. 표지에 나온 흑인 소년의 긴박한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내용이 정말 손이 오들오들 떨릴 정도로 긴장되고 절박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전까지는 인종차별을 직접 겪어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어서 이것이 미국 내에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아니 어떤 문제인지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많이 반성했고, 그 후로는 인종문제에 관한 책을 틈틈이 들여다보려고 했다.

 

 

 

캐서린 스토킷의 소설 <헬프>도 바로 인종문제, 구체적으로 말하면 흑인 인권 문제에 관한 소설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 기존의 책들과 달리, 이 책은 흑인이 아닌 백인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이 독특하다. 저자 캐서린 스토킷은 실제로 흑인 인권 운동이 정점에 다다랐던 1960년대에 미국 남부 미시시피의 백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느 남부 백인 가정 자녀들이 그러했듯이 저자 역시 어머니가 아닌 흑인 보모의 손에 자랐고, 부모님이 일찍 이혼하시는 바람에 흑인 보모를 어머니처럼 따르며 자랐다.

 

<헬프>의 주인공 스키터는 저자의 분신 같은 인물이다.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의 손에 자란 백인 여성으로, 대학 졸업 직후 고향집에 도착하자마자 보모이자 가정부였던 콘스탄틴이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딸처럼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콘스탄틴이 왜 아무 말없이 떠났는지 스키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 콘스탄틴이 어디로 떠났는지, 왜 떠난 건지 이유를 물어도 가족들, 마을 사람들 모두 대답을 피했다.

 

이 때, 스키터의 오랜 친구 미스 힐리는 스키터가 시름에 빠졌든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흑인은 더럽고 병균을 옮기는 인종이니 흑인 가정부들이 백인 주인들과 같은 화장실을 쓰면 안되고, 흑인 가정부가 쓰는 화장실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을에서 흑인 소년이 어이 없는 이유로 린치를 당하고, 흑인들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스키터는 콘스탄틴이 떠난 이유가 이 말도 안 되는 현실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녀는 이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마음먹는다. 흑인인데다가 여자라는 이유로 가장 심한 차별을 받고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 남의 자식을 온 정성을 다해 키우고도 작별의 인사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떠나야했던 콘스탄틴 같은 흑인 가정부들의 삶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백인 여성인 스키터가 흑인 가정부들의 삶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흑인들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고, 백인은 흑인과 같은 자리에서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 글 쓰는 데 필요한 인터뷰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때 그녀를 돕게된 또다른 흑인 가정부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에이빌린이다. 에이빌린의 도움으로 스키터는 여러 흑인 가정부들을 소개 받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에이빌린의 집에서 비밀스럽게 인터뷰를 진행한다. 인터뷰를 통해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들도 자신처럼 똑같은 감정과 꿈을 가진 여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스키터가 포기해야 한 것도 많다.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한 인종이라고 굳게 믿는 가족들, 친구들이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고,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그녀의 비밀스런 작업에 대해 고백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미스 힐리의 악행이 도를 지나칠 정도로 심해져 각종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 그때마다 미스 힐리와, 그녀만큼이나 악독한 백인 사회와 질긴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 스키터는 많이도 울었다. 하지만 책을 완성해야한다는 집념과, 책을 써서 그렇게라도 흑인 가정부들에게, 콘스탄틴에게 속죄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끝까지 맞섰다.

 

 

분명 교과서나 책에서 1968년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었다든가, 70년대까지도 흑인 인권운동이 활발했다든가 하는 내용을 배웠지만, 이렇게 소설로 접할 때에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뿌리>만 해도 흑인들이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의 이야기라서 먼 옛날 얘기처럼 들렸지만, <헬프>는 불과 몇십년 전인 1960년대가 배경이라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60년대라면 비틀즈가 미국에 진출하고, 케네디가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공언했던 시대가 아닌가.

 

주제는 진지하지만 등장인물 한명 한명이 개성있고, 스토리 전개가 스릴있으며, 따뜻함과 유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서 미국 내에서는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고, 엠마 톰슨 주연으로 영화화까지 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흑인 인권 문제에 있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측에 속하는 백인 여성이 이런 주제의 책을 쓴 것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저자도 이런 비판이 있을 것을 가장 우려했다고 한다. 그저 백인 여성과 그녀를 키운 흑인 보모 사이의 사랑과 추억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보기엔 흑인 인권 문제가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다루어지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흑인 인권 문제를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고전인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는 흑인을 비하하는 'nigger'라는 말이 300번 가까이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보수적인 지역이나 흑인 학교에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거나 'nigger'를 'slave'로 고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여 원문 그대로 가르칠 것인지, 아니면 흑인들의 의사를 인정하여 이 책을 가르치지 않거나 수정할 것인지를 두고 미국에서는 여전히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헬프>에도 여러번 이 표현이 등장한다. 캐서린 스토킷 역시 마크 트웨인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고, 마크 트웨인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 여전히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소설은 소설일뿐이지만 현실과 떨어질 수 없고, 이야기를 통해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한편에서는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돌이켜보니 올 한해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감명 깊었고 재미있게 읽은 책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번역본은 책이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비싼 반면, 한 권짜리 페이퍼백인 원서는 번역본 한 권 값도 안 되어서 원서로 구입해서 읽었다. (많이 어렵지 않으니 도전해보시길!)

 

우리나라에서는 흑인 인권 문제가 큰 이슈가 아니다보니 이 소설이 미국에서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한 것 같지만, '인권'이라는 큰 차원으로 보면 어느 나라에서든 의미가 있는 문제이니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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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애니멀 - 사랑과 성공, 성격을 결정짓는 관계의 비밀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이경식 옮김 / 흐름출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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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는 이런 루트를 따르면 성공한다는, 이른바 고정된 '성공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과거에는 소위 'KS라인(경기고-서울대)'이라고 불리는 학벌에 의한 성공 공식이 있었고(이들은 대개 관료, 판검사, 변호사, 의사 등의 직업을 '독식'했다), 최근에는 특목고와 SKY를 거쳐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런 고정된 패러다임을 흔드는 사례도 쉽게 볼 수 있다. '딴따라'로 불리며 천대받던 연예인들이 지금은 주식시장을 좌우할 정도로 큰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사장이나 임원이 되기도 하고, IT, 패션, 서비스업 등 과거에는 없었거나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분야가 성장하면서 새로운 성공 가능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고정된 성공 패러다임에만 매달리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전처럼 좋은 학벌로 남들이 좋다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만이 성공이 아니고, 심지어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신작 <소셜 애니멀>은 바로 이런 성공의 패러다임에 관한 책이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보보스'라는 용어를 만든 장본인이다. 칼럼니스트가 쓴 책 답게 배경지식이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경영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들고, 글도 재밌다. 이 책은 특이하게 해럴드와 에리카라는 가상의 인물의 일생을, 무려 태아 이전의 시기 -부모님이 만나서 데이트하고 결혼하는 과정- 부터 죽음의 순간까지를 소설처럼 그리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배경지식이 담겨 있지만 전혀 어렵거나 지겹지 않다.

 

해럴드와 에리카를 통해 저자는 '성공하는 인간의 비결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구한다. 인간을 형성하는 요인으로 크게 유전이라는 선천적인 요인과 교육, 가정환경, 또래집단 등 후천적인 요인을 들 수 있는데, 해럴드는 안정적이고 부유한 가정에서 좋은 양육과 교육을 받으며 자란 인간을 대표하고, 에리카는 불안정하고 결핍요소가 많은 가정에서 잡초처럼 자란 인간을 대표한다.

 

그 결과 해럴드는 안정적인 정서를 가졌으며 사회적 관계를 잘 형성하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에리카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극복해내는 도전적이고 강인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두 사람은 직업도 다르고, 인간관계도 다르고, 결혼생활에 대한 태도도 다르고, 노년을 보내는 방법도 달랐다.

 

나는 전반적으로 에리카보다는 해럴드에 가까운 인생을 살았지만, 여성으로서 겪는 어려움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 대학에 입학했을 때 받은 문화적인 충격 등 에리카에게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다. 사회적, 경제적인 위치에서 보면 에리카가 해럴드보다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학문적으로나 개인의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해럴드가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꿈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남탓, 환경탓 하기 좋아한다. 집안이 별로라서, 학벌이 떨어져서, 직업이 별볼일 없어서, 사회가 안 도와줘서 등등 핑계도 많다. 하지만 <소셜 애니멀>을 읽으면서 성공이라는 것이 하나의 요인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요인의 조합이며,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의 의지로 충분히 개선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공에 시크릿(secret)은 없다. 패러다임도 없다. 다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끝없는 꿈을 꾸고, 줄기차게 도전하는 것ㅡ 그것이 인류를 관통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간결한 성공 패러다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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