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11회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단편 수상작품집
김민경 외 지음 / 북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마다 발간되는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단편작품집입니다. 비록 "스토리대상"이라고는 하지만 작품들은 단편소설로서 다들 완성도를 갖추었으며 책 뒤에 나오는 심사위원평들도 이 작품들이 장르물로서 이미 완성된 수준임을 전제로 하고 논평을 전개합니다. 우리 독자들은 재미있게 이들 작품들을 읽고 스토리의 경쾌한 진행과 플롯의 기발함이 주는 쾌감을 마음껏 맛보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편의점 같은 데를 갔을 때 언제나 점원들이 빠릿빠릿하게 응대하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p30(<그 많던 마법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김민경 作)에서처럼 좀 버벅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진상짓을 떨 것 같던 남성에 대해, 송하나는 그의 기를 팍 누르고 궁지에 몰릴 뻔하던 점원을 돕습니다. 음... 학교 후배였던 마법소녀 소희를 겨우 따라간 하나는 마법에 대해 몇 가지를 다 알게 됩니다. 남을 돕는 게 핵심이며, "정화(淨化)"라는 과정이 또 중요합니다. 알고 보니 그랬던 겁니다. 세상 이치에는 역시 공짜라는 게 없으며, 착한 일은 대개는 그 보상이 따릅니다. 이 대목에서 예전에, 경기가 잘 풀리면 쓰레기를 잘 주운 덕이겠다고 너스레를 떨던 어느 야구 감독도 생각이 나더군요. 

대개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면 목소리가 밝고 경쾌한 여성들이 전화를 받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그 일에 종사하거나 인접 직역 근무 경험이 없어도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주인공 송하나의 직업을 상담사로 설정하고 그에 마법을 연관시킨 작가의 마음씀씀이 같은 게 느껴지는 단편이었습니다. 상담사가 아니라 마법사가 되어버린 송하나의 마지막 대사에서 뭔가 불꽃이 터지는 느낌도 저는 받았습니다. 마음이 다 후련해졌다고나 할까요. 

지방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요즘입니다. "영롱농장도 폐업 신고했고...(p48)" 그런데 이 작품 <내림마단조 좀비(김호야 作)>에서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 무슨 드론 폭격을 당하고, 일꾼들이 곤죽이 되어 할멈의 연구소로 끌려오고, 좀비 액화 비료가 생산성 향상에 극적인 효과를 내는 등 초현실의 배경입니다. 농업은 수천 년 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나 그에 상응하여, 아니 그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인구가 증가하는 바람에 역사의 상당 기간 인간은 굶주림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던 게 질소비료의 발명으로 수확량이 개선되어 기아선상의 공포는 면했으나, 대신 화학물질의 섭취에서 비롯한 부작용을 걱정하게 되는데... 이제 이 소설에서는 좀비액비라는 혁신이 등장했으니... 

다크투어라는 게 있습니다. 바람직하고 자랑스럽거나 밝은 기억, 추억이 담긴 명소를 방문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의 의의를 가진 곳을 찾아 색다른 기분을 맛보는 건데... 이 작품에서는 사람들이 "치유 대상이 아닌 처리 대상인" 좀비가 비참한 상태에 처한 농장을 구경하며 묘한 쾌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JFK라는 약칭은 들어 봤어도 ZFK는 처음 듣는데, 이게 좀비 해방 단체의 두문자라고 합니다. 인간은 참 복잡한 동물입니다. 어느 하나로 태도가 수렴하여 의견이 일치할 것 같은 문제에서도 누군가는 반드시 반대 스탠스를 취해서 기어이 분란을 빚고야 말죠. 변함없는 것은 높이 떠 누리를 환히 비추는 보름달(p75)입니다. 

어느날 자고일어나 보니 일개 벌레로 추락해있던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지만, <슬롯파더(이리애 作)>에서 아빠는 처량하게도 건조대 신세로 떨어집니다. 슬롯은 슬롯머신이라고 할 때의 그 슬롯인데, p91 같은 데에서 슬롯이 팽팽 돌다 7에서 멈춘다는 서술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게 뭐라고 기계인 채로 있어요.(p98)" 너무도 슬픈 대사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에서 수행하는 직분이나 지위, 재산에 불구하고 가족으로부터, 혹은 누구한테라도 고유의 인격을 존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소중한 가족 앞에서 한갖 건조대 취급을 받는 처지라니...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나 이쁠 때지 조금민 지나면..." 결국 플러그가 뽑혀 봐야 우리는 진짜 자신과 알몸으로 대면할 수 있습니다. 

<수호전>에서 인육으로 만두를 빚어파는 무서운 부부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p122(<인형 철거>, 임규리 作)에서는 등산객들을 죽이고 금품을 가로채온 무서운 부부가 운영해 온 식당 이야기가 있습니다. 봉제인형이라는 것도 보기에 따라서는 으스스한 effigy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데 모든 게 다 결국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인간만 인형에게 애착을 갖는 게 아닙니다. 인형도 마찬가지이죠(p132)." 우리는 간혹, 누군가로부터 내가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만 불리고 싶을 때가 있고, 그럴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느낍니다. "날 수호라고 불러 주세요." 제대로 이름이 불렸을 때 우리는 비로소 무섭고 오래된 숨바꼭질이 끝났음을 확인하고 안도합니다. 

사람이란 때때로 먹지 않아도 배고픔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죽는 건 또 아닙니다. 사람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몸 곳곳에 지방을 저장해 놓는지도 모르는데, 만약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뚱보들은 미래에대한 준비성이 철저하다며 칭찬을 들어야 마땅합니다. "그래도 제가 생각보다 날렵하다는 걸 알았죠(p191)." 엄마 품은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그립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할 항구와도 같습니다. 유류품, 유류품... 세상에는 망자가 있고 그 망자의 소유물은 어떻게든 처분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끝내 누군가에게도 귀속되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되는 우리의 미소와 기도, 눈빛... 이단에게 수현은 이제 어디도 갈 수 있다며 자신하지만 과연 그럴까요.(<문을 나서며, 이단에게>)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렌즈 하노이 - 최고의 하노이 여행을 위한 한국인 맞춤형 해외여행 가이드북, ’24~’25 프렌즈 Friends 38
안진헌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이며 인도차이나 반도 동쪽에 오래 터잡고 살아 온 이들이 꾸준히 남진하며 자신들의 영향권을 넓혀갈 때 그 중심으로 기능하던 심장부였습니다. 하노이를 기반으로 삼았던 정치세력은 20세기 후반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현대 베트남 영토 일대를 석권했습니다. 이후 대외개방정책을 단행하여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일정 부분 이루고 오늘에 이릅니다. 한국과 베트남은 현재 밀접하게 경제적 협력을 맺은 관계이므로 하노이에도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며 교류도 매우 빈번합니다. 따라서 관광 목적이건 비즈니스 트립으로건 이 도시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필요한데, 언제나 믿고 보는 여행가 안진헌씨의 솜씨라서 특히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가이드북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하노이는 오랜 동안 북부의 중심지 노릇을 하던 유서 깊은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구시가(舊市街)"로 불리는 구역이 아직도 고유의 개성을 갖고 번영해 있습니다. 저자는 p73에서 매우 낭만적인 표현을 쓰며 이 지구(地區)의 매력을 요약합니다. 롱비엔 대교는 한자로 橋龍編(교룡편)이라 쓰는데, 베트남어는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오는 구조라서 이런 독특한(우리 입장에서) 이름이 되었습니다. 구태여 우리식으로 고쳐 읽으면 룡편교가 되겠습니다. 

아무튼 이 롱비엔 브리지에 대한 설명이 p82에 나오는데, 프랑스 식민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으며 전쟁 기간 중에는 미군의 폭격에 시달려야 했다고 나옵니다. 북위 17도선 위로는 미군이 공격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미군이 북베트남의 수도 소재, 홍강(瀧紅. 농홍)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폭격할 수 있었나 싶지만, 남베트남 영역의 반군 베트콩을 돕는 보급로에는 공중 폭격이 가능했습니다. 이 부근에는 하노이 고유의 멋이 물씬 풍기는 야시장도 열리는데, "흥정이 기본임을 잊지 말고" 관광객들이 꼭 들러 즐겨 볼 만한 어트랙션이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베트남 현지에서, 혹은 미국 영화에서 베트남타운 같은 곳이 묘사될 때 자주 들리는 단어가 "비아 허이(p110)"입니다. 이때 "비아"는 프랑스어 비에르("맥주". 영어의 beer와 어원이 같습니다)에서 왔으며, 허이는 기체라고 할 때의 氣를 베트남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기포가 녹아 뽀글뽀글 피어오르는 맥주잔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베트남 고유의 도수 약한 맥주이며 책에서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약간 무거운 생맥주는 "비아 뜨어이"라고 다르게 부른다고 가르쳐 줍니다. 뜨어이는 신선하다는 鮮을 역시 베트남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책에서는 또한 "네 칵테일 바" 같은 명소를 독자에게 소개합니다. 

베트남인들이 천년고도라며 자랑스러워하는 하노이라서인지 도시 곳곳에 사연이 가득 서린 명소가 많습니다. p128에는 호안끼엠 호수가 소개되는데 "규모는 아담하다"는 게 책의 묘사입니다. 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실제로 아담합니다. 어느 정도냐면 잠실 석촌호수의 절반에 못 미칠 정도죠. 그러나 명소의 가치를 그저 크기로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호안끼엠이라는 말은 "검을 돌려주다"인데 앞의 "호"는 한자로 湖입니다. 안끼엠이 還劍(환검)으로서 검을 돌려준다는 뜻이며, 베트남어는 앞서 말했듯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오기 때문에 환검호가 아니라 호환검이 되는 것입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베트남은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p169에서 보듯 하노이에는 그래서 문묘(文廟)도 있으며, 대성문을 지나 공구, 안회, 증자, 자사, 맹자 등을 모시는 사당이 나오는 구조까지 우리네 서울의 그 구조물과 무척 닮았습니다. 고려에서 국립중앙교육기관을 국자감이라 불렀는데 하노이에도 옛 문화재로 비슷한 기능을 하던 국자감(p170)이 있습니다.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과 대결하여 승전했다는 자부심이 무척 큰 나라인데 군사역사박물관은 그런 그들의 행적을 압축하여 전시한 뜻깊은 공간이겠습니다. 바딘 광장의 역사적 의의 역시 책에 자세하게 나오는데, 바딘이라는 이름은 하노이 내 구 행정구역이었던 巴亭(파정)에서 유래했습니다. 

p198을 보면 유명한 퍼꾸온 식당이 소개됩니다. 한국에서도 퍼꾸온을 즐겨먹는 이들이 많은데 퍼라고 하면 보통 국수지만, 퍼꾸온에서의 퍼는 만두피와 비슷하며 자르기 전의 국수 상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꾸온은 한자로 卷(권), 돌돌 말았다는 뜻이며 그래서 영어로는 보통 roll로 옮겨집니다. 확실히 안진헌 저자의 여행서는 식당, 맛집 파트가 강점입니다. 가 볼만한 식당은 웬만해서는 다 언급이 됩니다. 한국은 웬만해서는 그 단일민족성을 부인하기 힘든데, 베트남은 정말 다양한 민족들의 집합체라고 해도 됩니다. p212에는 민속학 박물관이 소개되는데 여기서 외국인들은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인접 하룽베이까지 해서 하노이 일대의 명소가 빠짐없이 소개된, 완벽한 여행서입니다. 이때 베이는 영어로 만(灣)을 뜻하는 bay이며, 유명한 통킹만 사건의 배경이 된 그 인접의 베이이기도 하죠. 책 말미에는 간략한 베트남 역사까지 실은, 여행서를 넘어 미니 인문서 구실까지 하는 정말 멋진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낭떠러지 끝에 있는 상담소 - 우리 모두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지연 지음 / 보아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의 몸은 기껏해야 2m, 120kg을 넘기 힘든 자그마한 입체입니다만 그 안에 깃든 마음, 영혼은 전 우주를 품고도 남을 만큼 복잡하고 다단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고 무난하게 성장하면 본래의 착한 심성을 지키지만, 그렇지 않고 어떤 심각한 상처라도 받는다면 그 다친 마음 때문에 큰 사고를 저지르거나 아까운 인생을 낭비하며 방황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인생이 파멸하기 직전,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양 위태위태하게 타락과 일탈에의 경계를 넘나듭니다. 타인의 고민을 들어 주고 괜찮은 대안을 제시하는 이들은 그래서 정말 뜻깊은 직분을 행사한다고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나쁜 심성을 타고 태어난 아이는 없습니다. 좋지 못한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나쁜 영향을 받은 끝에 마음이 망가지고 말았을 가능성이 큰데, p6에 잠깐 언급되는 정윤주(가명)라는 아이의 사례는 아마도 얼마 전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정xx을 염두에 둔 캐릭터겠습니다. 이 첫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현수인데 다니던 학교에서도 포기하고 만 문제아로 아주 낙인이 찍히고 만 처지였습니다. "마음서고"의 소장이자 심리상담사인 이유경은 이 현수라는 애한테 관심을 갖고 친절히 대하며 바른 길로 이끌려고 합니다. 

문제아가 문제아가 되고 마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그 가정에 있습니다. 어느날 상담소장 이유경은 현수가 그 부친과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현수는 이른바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편인데,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에 감정을 잘 다스리는 건 사실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알고 보니 현수 아버지도 속마음으로는 아들을 몹시 걱정하며, 이유경 소장이 진정성을 갖고 설득하자 금세 협조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상담은 성공적이었고 김해인 상담사는 이 소장과 현수의 사례를 사후 분석하며 어떤 교훈을 끌어냅니다. 

내담자들도 다 같은 접근, 해답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감정적으로 감싸고 옹호해 주길 원할 것 같아도 의외로 이들은 "논리적(p75)"인 어프로치를 선호할 때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그들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가 대단히 부당하고 비논리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대해 주길 바랐던 것입니다. 이유경 소장도 세훈의 "스마트함"을 알아 보고 그의 자존을 효과적으로 달랩니다. 김지수 임상심리전문가는 세훈처럼 영리한 내담자도 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투사적 검사(p79)"의 결과를 이 소장에게 보여 주며, 세훈이 어려서부터 어머니와의 애착 관계에 문제가 생겼으며 그 결과 성 정체성에 문제가 생겼을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요즘은 알코올중독자라는 용어보다, 의존증이라는 말을 더 자주 쓰는 듯합니다.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성격이 내향적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상처를 자주 받고, 부당한 대우에 욱하고 분노하는데 이 화를 다스릴 길이 따로 없어 술에 의존한다는 거죠. 술은 어떤 경우에도 현실 탈출구가 될 수 없고, 술에 의존한다는 건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서서히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유경 소장은 내담자 이미희씨가 그 모친과의 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음을 알게 됩니다. 남편인 정철씨는 아주 자상하고 아내를 최대한 이해해 주려는 선한 인물이었습니다. 많은 여성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이 남편과 원만치 못한 관계 때문에 고생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p150을 보면 이미희씨의 상담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는 등 여유를 크게 찾은 모습이 나오네요. 

김희진은 본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성장과정에서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은 듯합니다. 그녀는 가난을 견딜 수 없었고 따라서 반드시 부유한 집안에 시집을 가야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댁에서 지독한 냉대를 받았고, 이 과정에서 경제적 풍요가 반드시 당사자에게 행복을 필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게 아님을 깨닫습니다. 새로운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희진을 사랑해 줄 줄 아는 도량을 갖춘 사람들이며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돕습니다. 이 소장은 그녀의 나이가 아직 젊음을 상기시키며 창창하게 남은 인생을 힘차게 가꿔 나가라고 격려합니다. 

TV의 돌싱 예능에 나오는 김희준은 한때 이 소장이 대했던 내담자였습니다. 희준은 순탄치 못했던 젊은 시절을 보냈고, 영업직 일을 하면서 배우자가 될 여성의 "스펙"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잘 골라 인생역전을 노린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남자가 여자 잘 만나 팔자를 고치려 든다는 사연은 흔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희준은 다른 스펙이 좀 부족해도 영업 능력 하나는 봐 줄 만했고 이는 그만의 뛰어난 능력이 맞았습니다. 희준은 참된 자존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책의 대미는 바로 이유경 소장 본인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아픈 사연이 있고, 이를 잘 다스리려는 과정에서 남들의 인생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은 아깝게 흘러가버린 자신의 소중한 시간입니다. 이 책에 실린 어떤 내담자들보다, 아니 어쩌면 다섯 명의 사연을 한 인생에 합쳐 놓은 듯 힘들게 살아 온 게 이 소장 본인이었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옛 대중가요의 가사도 생각났으며, 상처가 깊은 만큼 그로부터 피어나는 꽃도 한층 아름다울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왕자 (스페셜 에디션 홀로그램 은장 양장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김수영 옮김, 변광배 해설 / 코너스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 왕자>는 20세기 전반 프랑스의 요절한 문학가, 저널리스트, 비행사였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남긴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새삼 어떤 소개가 필요없는 명작입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지만 특히 한국에서도 세대를 초월하여 사랑 받고 널리 읽힙니다. 웬만한 큰 도시의 적당한 장소에서 이 <어린 왕자>의 어느 한 구절(번역)이 새겨진 걸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 코너스톤에서 나온 이 책은 예쁘게 홀로그램이 입혀졌으며 겉표지에 한글 인쇄 부분 없이 Le Petit Prince, Antoine de Saint-Exupery라고 작품명과 저자명이 불어로 적혔을 뿐이라서 마치 외국 책 같은 인상을 줍니다. 혹은, 책이 아니라 고급 팬시 상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생텍스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가 배경으로 입혀져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양은 보이는 거면 무엇이든 먹어버려. 가시가 있는 꽃도 먹지." "그럼 가시가 대체 무슨 소용이지?(p36)" 마치 동양 고사에서 모순(矛盾)의 고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순간순간을 비연속적으로 잘라놓고 보자면 아킬레우스도 거북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아마 양은 가시가 돋힌 꽃을 먹을 수 없다가, 어느 순간부터 가시에도 대응할 수 있었을 겁니다. 거꾸로, 지금 이 순간에도 꽃은 양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기만 한 게 아니라, 양이 자신을 먹을 수 없는 방법을 연구하는 중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먼 훗날, 어느 특이점이 지나면, 양은 이제 그 꽃을 먹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나, 저 꽃, 양 모두, 개체로서는 너무 짧은 삶을 살기에 그 결과를 볼 수 없습니다. 왕자에게 "나'는 이미 무언으로 그 답을 전했으며, 왕자도 답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가시가 소용이 없겠습니까. 지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존재 이유(raison d'etre)가 있습니다. 

꽃은 호랑이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지만 바람만은 두려워합니다. 어린왕자는 꽃을 사랑하면서도, 그 말과 행동에 괴리가 생기는 걸 보고 당혹했으며, 마침내 꽃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에로스는 자신을 의심한 프쉬케에게 "의심이 깃든 곳에 사랑도 더 이상 자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사랑하던 두 연인도, 여전히 사랑하지만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서로에게 더 머물 수 없을 때가 있으니 이런 모순(p46)이 또 없습니다. 자신이 꽃을 올바로 사랑하기에는 너무 어렸다며 왕자는 꽃의 말이 아니라 그 행동을 보고 선택했어야 했다고 자책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꽃은 거짓말쟁이는 아니지만 너무 약했고 그러면서도 허세가 강했습니다. 차라리 왕자에게 자신은 바람도 호랑이도 심지어 왕자도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왕자는 아마 그런 꽃을 바르게 파악하고 더 알맞은 방법으로 보살펴 주었을 것입니다. 

왕은 권위와 군림을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더 이상 그의 명령을 받을 신민(subject)이 없어도 그는 끊임없이 명령을 내립니다. 왕자(물론 자신의 아들은 아닙니다)에게도 그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리는데, 사실 법무부장관은 누구를 심판하는 직위가 아닙니다. 어린 왕자가 이 점을 지적하자 그는 엉뚱하게도 "그럼 너 자신을 심판하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p56)"라고 합니다. 말이야 맞는 말입니다만 그게 이 왕자가 직분을 수행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하니 말입니다. "이치에 맞는 명령을 내리시면 바로 이행이 됩니다." 그래도 왕은 이치에 맞길 좇기보다, 자신의 명령 권위를 세우기 위해 애써 이치를 맞춥니다. 선후가 거꾸로 되었습니다. 

"작은 종이에 별들의 수를 적고, 그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근다는 뜻이지.(p68)" 사업가가 자신의 직분을 정의하는 방식입니다. 어린왕자는 그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듣고 잠시 술꾼의 논리(이 사람의 말도 상호순환모순이었죠)와 같다고 생각하더니, 이내 "매우 시적(詩的)"이라며 애써 좋은 방향으로 정리합니다. 부처님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무엇이 중요한 일인가. 어린왕자는 내가 하는 일이 상대한테 유익한지 아닌지가 "중요성"의 기준이라고 하는데, 여기 대해 사업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뻔뻔스럽게 상대의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왕자의 말에 답할 논리가 생각이 안 나 당황해서인 듯합니다.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위인입니다. 

예쁜 외관과 달리 생텍스의 <어린왕자>는 어른들을 위해 만들어진 동화인지 그 묵직한 메시지가 독서를 마친 후에도 내내 독자의 가슴을 지긋이 누릅니다. 사람의 양심은, 초심은 그만큼이나 소중하며 우리가 먼 곳 먼 시간에 안타깝게 분실하고 온 소중한 자산이라서인기 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70가지 방법 - 어제의 불행이 오늘의 행복이 되는 쇼펜하우어의 지혜
이동용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쇼펜하우어가 사거한지 근 180년이 가까워오는데도 여전히 그의 철학, 그의 지혜는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힐 뿐더러 한국에서는 꾸준히 베스트셀러의 반열에까지 오릅니다. 이 책은 독일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한 이동용 저자의 책인데, 우리의 기존 상식과 신조에 넉넉하게 호소도 하면서 동시에 미처 살피지 못했던 삶의 여러 국면에서 숨겨진 진실을 들춰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의 문이 닫히면 삶은 또하나의 문을 열어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고, 이제 죽음에 임하면 모든 문들이 닫힌 듯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감동적인 일화를 인용하는데, 문호 괴테는 조금 다른 말을 했다고 합니다. "두번째 창도 열어라. 더 많은 빛이 들어올 수 있게" 여기서 저자는 두번째 창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새기지 말라고 합니다. 생이 끝나도 우리가 몰랐던 그 무엇이 있어 다른 문을 열어 줄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 원래 괴테의 유언은 아주 짧은 "Licht, mehr Licht!"일 뿐이지만 친우 실러에게 임종 자리에서 빛이 더 들어오게끔 두번째 창을 열어 달라는 부탁을 한 게(den zweiten Fensterladen zu öffnen, damit mehr Licht in's Zimmer komme) 이렇게 윤색되어 전합니다. 물론 저자의 주장대로, 괴테 역시 그런 두번째 뜻을 담아 한 말이겠습니다. 

동물은 그저 동물적 직관에만 의존하지만(물론 단기적으로 그 정확도가 매우 높긴 합니다) 인간은 직관도 직관대로 가지면서 이성의 통제를 받습니다. 물론 비교 불가의 장점이 있어서 이렇게 진화했습니다만 때로 이 통제 때문에 "버젓이 두 눈을 뜨고서도 보지 못하는" 일이 간혹 발생합니다. 이 역시도 이성이 아주 정밀하게 작동하는 사람이라면 안 빠질 함정입니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쇼펜하우어의 가르침을 다시 새겨서 이렇게 말합니다. "눈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만 보지 말고, 나 자신에게도 향할 때 비로소 바로 볼 수 있다(p150)." 이 말은 사실 쇼펜하우어 시대 천 수백 년 전에 고대 라틴 속담도 하던 말이며, 더 멀게는 소크라테스가 비슷한 취지의 가르침을 남겼었습니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카타르시스라는 말을 감정의 정화라고 배웠습니다만 사실 이는 그 개념(체험)의 결과, 효과에 가까우며 그 원래 뜻은 "배설"입니다(p175). 무엇을 배설하느냐, 공포라는 감정입니다. 공포는 인간의 생존에 아무 도움도 안 되면서 의지와 희망을 갉아먹기만 하는 해로운 녀석입니다. 그래서 FDR도 "가장 두려워해야 할 건 두려움 자체"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쇼펜하우어는 그래서 삶이 본래 지옥이니 회피한다고 부정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으며 그저 훈련, 단련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 저자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했다는 아스케제라는 개념을 인용하여 이 "훈련"의 의의를 강조합니다. 독일어의 Askese는 고대 그리스어 ἀσκέω(딴짓않고 운동에 전념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영어의 ascetic(금욕적인) 같은 형용사도 어원이 같습니다. 

p222에도 또 "연습'이란 개념이 나옵니다. "연습, 오로지 연습만이, 정신을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게 도와 줄 것이다." 불행마저도 의미를 따로 품게 하는 것이 연습의 바람직한 결과 중 하나라고도 강조합니다. 확실히 이 책은 여태 독자가 알지 못했던 쇼펜하우어 철학의 많은 이면을 조명합니다. 삶은 본디 많은 모순, 부조리에 가득합니다. 정의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삶을 그대로 수용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동물은 삷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잔인하게 사자에 잡아먹히는 어린 사슴, 물소 등도 "대체 왜 이렇게 약하게 태어났지?"라며 신세를 한탄하지 않습니다. 물론 맹수에 의해 숨통이 끊어질 때 극한의 고통을 느끼겠지만 그때조차 염세적 태도를 새삼 드러내지 않습니다. 시니컬하게나마 진지한 답을 제시하는 쇼펜하우어더러 염세주의라 규정하는 건 피상적이고 부당합니다. 

"순간을 알고 있기에 인간은 (그와 반대되는) 영원도 상정할 수 있다(p278)." 고통이 없다면 쾌락이 뭔지도 인간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저자는 이런 말도 합니다. "희망은 신이 인간에게 준 고통이지만 그 희망을 거머쥔 건 인간이다." 세상에 마구 던져졌을 뿐 의지대로 태어난 게 아니지만 여튼 태어난 후 대부분의 결정은 우리 자신이 하며 그 책임은 우리 스스로가 져야 합니다. 책임을 지고 기꺼이 고통스러운 길도 걸어갈 수 있기에 인간은 존엄하며 참된 자존에서 일어나는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