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 담덕 1 - 순풍과 역풍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광개토대왕, 혹은 광개토태왕(太王)은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걸출한 역량을 보여 준 정복 군주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때로부터 천 년 후에 등장한 명 3대 황제 영락제도 그를 흠모하여 연호를 그리 지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광개토태왕이 활짝 열어젖힌 위대한 역사는 이후 이백여년 동안 주변의 강호들이 감히 고구려와 한반도를 넘볼 수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이 대하소설 1권은 아직 광개토대왕의 시대와 거리가 먼, 고국원왕이 다스리던 고구려와 이제 막 국위를 떨치기 시작하던 근초고왕 구가 통치하던 백제의 시대를 다룹니다. 5호 16국의 난립으로 혼란스럽던 중국은 요하 서부를 채 경영할 능력이 되지 못했기에, 이 힘의 공백을 백제의 명군주 구가 파고들어 큰 이익을 취하고 동시에 국격을 선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요동을 예전부터 다스려 온 고구려에 위협이 되고, 또한 당시에 북중국을 통일했던 저족 출신 영웅 부견이 황제로 있던 전진(前秦)의 위신에도 누가 됩니다. 따라서 고구려와 전진은 손을 맞잡고 각각의 방해물인 백제와 동진을 제압하려 듭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국제 정세는 이렇지만, 특히 고구려 국내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 또한 간단치가 않습니다. 우선 현재 고구려를 다스리는 군주는 사유라는 인물인데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워 아는 고국원왕입니다. 고국원왕을 지지하는 신료나 귀족도 많지만,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 거상(巨商)인 하대곤 같은 사람은 그의 군주적 자질을 대단히 낮게 평가합니다. 한마디로 금상(今上) 사유는 우유부단하여, 대외적으로 후연(後燕)의 모용씨에게 겪은 국치를 씻기는커녕 나라를 단결시켜 이끌어갈 능력조차도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죠.

그럼, 이 웅대한 포부를 품고 우국충정에 가득한 하대곤이 염두에 둔 왕재는 누구인가? 모용씨와의 담판을 통해 왕후와 태후를 귀환시키고 자신은 초야에 묻혀 버린, 왕제(王第) 무야말로 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주변 오랑캐를 진무하며 남쪽의 백잔(백제의 멸칭)을 굴복시킬 왕재라고 그는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는 시운을 잘못 만나 세상으로부터 잊혀졌으며, 그의 아들(즉, 현재 왕의 조카) 해평이 언젠가는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여겨 양자로 들여 지금껏 비밀리에 키웠습니다. 해평이 그토록 고귀한 혈통과 운명의 소유자임은 심지어 본인도 모르고 있었으나, 이 1권 중반부에서 하대곤이 드디어 고백합니다. 그러나 과연 해평은 대단한 포부와 국량을 지닌 청년이라서, 이 사실을 드러내기보다 둘 다 은인자중하기로 결정하며 하대곤 역시 그에 수긍합니다.

이 1권은 젊은이들의 애정사도 제법 복잡하게 얽힙니다. 우선 아름다운 용모에 빼어난 무술 솜씨까지 갖춘 연화라는 여인이 있는데 하대곤의 종제(從第. 즉 사촌동생) 하대용의 딸입니다. 해평은 이 연화를 좋아하지만 연화는 거부하는데 대외적으로는 둘 사이가 6촌간이라서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아무 혈연 관계도 아님을 해평만은 알고 있으나 이 사실을 발설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연화는 이련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국원왕의 둘째왕자를 좋아하는데 이련은 해평에게 사촌형제가 또한 되는 셈입니다. 자신보다 자질도 떨어져 보이는 사촌에게 왕좌와 여인 모두를 빼앗길 판이니 젊은 혈기를 도무지 억누를 수 없으나, 하대곤은 사세가 불리하다며, 자신은 고국원왕에 비해 힘이 부족하고 해평은 이련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 그저 참는 게 상책이라며 해평을 다독입니다.

하대곤은 대사자 우신과 일단 손을 잡고 우신의 딸을 (연화 대신) 왕자 이련과 맺게 하려는 책략을 시도합니다만 순탄치는 않습니다. 이무렵 고국원왕은 대군을 일으켜 평양까지 진군하고 백제를 치려 드는데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백제 장군 막고해의 기막힌 전술을 채용한 근초고왕 구의 지혜로운 대처 앞에 패퇴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하대곤의 가신 두충은 백제의 세작 사기(이름이...)에게 속아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는데 아마 2권에서 상인 조환으로 거듭난 후 복수를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편 고국원왕에게 직언을 하다 투옥된 괴승 석정은 뒤늦게 그의 가치를 알아본 고국원왕에게 격식을 갖춰 모셔지며 나라를 위한 큰 계략을 설파할 기회를 얻습니다. 이 외에도 혜안을 갖춘 을두미와 그의 제자 추수(말갈족 츨신)도 앞으로 많은 활약을 할 듯한데 이처럼 이 소설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의 흥미를 더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쥬울 베르느", 요즘 표기로 쓰면 쥘 베른이 지은 멋진 SF 고전입니다. 확실히, SF라는 말을 "공상과학"이라 옮기는 건 문제가 있는 게, 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보면 드러납니다. 이 작품은 유쾌하고 기발한 상상을 담은 데다, 자연지리적으로 치밀한 조사와 지식에 기반하여 창작되었지만, "공상"의 요소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필리어스 포그라는 매우 개성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 공적만으로도 문학사에 길이 남아 마땅합니다. 1960년대에 영국 배우 데이비드 니븐이 이 역을 맡은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지금 봐도 재미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집으로 배달되는 조간신문이 구겨진 채 배달되자 하인더러 다시 새 걸로 한 부 사오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원작 소설에는 없고, 요즘 일부 불량 제책본에서 보듯, 페이지가 아직 잘려지지 않은 채 배달된(물론 19세기 런던 타임즈에서는 의도적으로 그리한 것입니다) 신문을 포그 선생이 편지 봉투 자르는 칼로 능숙하게 자르는 그 대목이 오리지널입니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은 다소 장광설이 늘어지는 게 하나의 공통점인데, 이 작품 초반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하인 파스파르투는 캐릭터 자체보다 더 수다스러운 전지적 화자에 의해 요란하게 소개되는데 작품의 프로타고니스트가 영국인이요, 고작 산초 판사 격의 사이드킥이 프랑스인으로 설정된 건 의외의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작가가 프랑스 사람인데). 개인적으로 저는 영미식 군대에서 사병이나 하급자에게 징계를 내릴 때 체벌을 가하지 않고(물론 야만적인 수단이지만), 쫀쫀하게(?) 벌금이나 감봉 처분을 내리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가스 잠그는 걸 잊고 집을 나온 파스파르투에게 "가스 요금은 자네가 내!"라고 하는 포그의 말이 우스웠습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마치 현대 헐리우드물처럼, 이중삼중의 흥미 요소를 진행 전반에 깔아 놓은 점도 놀랍습니다. 필리어스 포그 나리께서 클럽 동료들에게 순전히 자신의 지식과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그 큰 돈을 걸고 무려 세계일주에 즉석에서 나선 것도 놀랍지만(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여장을 챙김), 공교롭게도 하필 은행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여 범인의 행방이 핫이슈였던 시점 그런 결정을 내린 통에 주변인물들은 물론 독자들마저도 필리어스 포그를 의심하게 되니 말입니다.

여기서 또 주목해 볼 것은, 프랑스 작가인 쥘 베른이 당시 영국 금융기관 내의 질서에 대해, 그야말로 도불습유, 즉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안 주워가는 놀라운 사회적 신뢰가 지배하는 분위기였음을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필리어스 포그가 혁신 클럽(원어는 Reform Club입니다)에 가입할 수 있게 추천해 준 이들이 베어링 형제라고 나오는데, 1995년 닉 리슨이라는 신출내기 금융인의 실수로 232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파산해 버린 베어링스 은행이 생각나기도 하죠. 작중에서 필리어스 포그가 과연 모험에 성공할지를 두고 내기가 벌어지며 아마도 성공 시 상금을 딸 수 있는 권리가 증서화하여 시장에서 거래까지되는 모습이 또한 놀랍습니다. 심지어 현물 말고 선물(future) 상품까지 등장합니다. 런던은 이처럼 19세기에조차 파생금융시스템이 고도화했던 것입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아니 구태여 세계를 한 바퀴 다 돌게 아니라 적당히 카이로 같은 데서 놀다가, 지중해를 통해 대서양으로 빠져 유유히 귀항하면 알 게 뭐겠습니까? 그러나 거액의 판돈이 걸린 내기에서 깐깐한 영국 신사들이 그리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 리 없고, 이 작품을 보면 일일이 영사관에 들러 사증(査證)을 받는 걸로 나옵니다. 이 사증 발급 여부는 작중에도 나오듯 전신(電信)상으로 런던에 타전되어 필리어스 포그가 지금 지구상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까지와 함께 당사자들에게 공유되는 식입니다.  

이 작품에는 영국인의 특징적인 행태가 다채롭게 묘사되는데 p126에는 인도 갠지스 강의 아름다운 계곡을 앞에 두고서도 보려고 들지 않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 앞 p61을 보면 "영국인이란 관광조차 하인을 시켜 대리하는 족속"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게 뭘 개탄한다거나 경멸하는 의도가 아님은 물론 독자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p71에서는 또 이집트 홍해에 도달한 포그가 "태초의 추억을 품에 안은 이곳"을 구경하려 들지도 않았다고 서술합니다. 그런가하면 p81에서는 고양이조차도 한 명의 "여행자"로 융숭히 대접할 것을 지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실 이 대목은 현대 PC 관점에서라면 인종차별로 단정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또하나 흥미로운 캐릭터는 픽스 헝사인데, 마치 장발장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자베르 경감처럼 주인공을 쫓아다니지만 물론 일종의 강박증 환자인 자베르와는 달리 유쾌하고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상식의 세계에 철저히 머무는 그가, 훨훨 상상의 세계를 날아다니는 포그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가 그토록 약이 올라 포그를 망치려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상식으로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완성될 수 없는 과업이어야 하며, 이를 증명하는 게 범죄자로서 포그를 법정에 세우는 것보다 사실은 더 중요한 동기였던 거죠.

p163을 보면 쥘 베른의 놀라운 과학 상식, 또 항해공학적 지식이 잘 드러납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참조해서 소설에 끼워넣었을지 경이롭기만 합니다. 이런 대목들 때문에 이 소설은 그저 픽션이 아니라 독자들을 상대로 "80일간의 세계일주" 정말로 가능하다, 운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바로 작가 자신의 웅변을 매뉴얼처럼 증명하는 하나의 시방서가 되기도 하는 셈입니다. p367의 루주3에 보면 바이런 경을 설명하며 "장애자"였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김석희씨가 연로한 분이라서 별 생각 없이 이런 단어를 쓴 듯합니다만 편집측에서라도 교정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작품은 또한 마지막의 반전으로도 유명한데 그 반전장치 또한 자연지리적 원리에 의한 것이라서 독자는 전율마저 느끼게 됩니다. 다른 하나의 반전이 있다면 정말 재수없는 이지적, 이기적 신사인 필리어스 포그가 드디어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는 여성과 잘된다는 로맨틱한 결말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인의 목격자
E. V. 애덤슨 지음, 신혜연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한국에서도 데이트 폭력이다, 혹은 가스라이팅이다 해서 여러 말들이 많습니다. 서로 사귀는 이성 간에는 부모, 친구보다도 훨씬 내밀한 사정까지 공유되는 게 보통인데, 나는 상대를 그토록 믿고 의지했건만 상대는 전혀 그렇지 않고 나를 이용할 생각만 품었다면 그 배신감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입니다. 하물며 그 과정에 폭력까지 따른다면...



이런 "나쁜 남자"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간 그런 사이코패스들을 소재로 삼고 또 악질적인 범죄자로 묘사한 스릴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 작품에도 처음에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대니얼, 또 주인공의 전 남친이었던 로렌스 같은 잘생긴 남자들이 등장해서 여성 독자들의 분노 그 초점을 이룹니다. 대니얼은 저처럼 대놓고 살인자이니 말할 것도 없고, 로렌스 이놈도 되어가는 꼴을 보니 분명 끝에 가서 가장 흉악한 스토커, 바람둥이, 배신자로 등장할 것만 같습니다. 



이런 나쁜 남자(들)는 일단 잠시 잊고, 이 소설은 두 명의 여성이 번갈아가며 1인칭 화자로 등장합니다. 벡스와 젠이 그들인데, 우리 독자들에게 비치기로는 벡스가 더 성숙하고 감정이 안정적이며 모르긴 해도 더 넉넉한,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습니다. 물론 그런 말은 없지만 다른 한 명의 화자인 젠이 너무도 불안정하고 상처가 많은 데가 자기 일도 제대로 처리 못하는 타입이라서 독자는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혹시 벡스와 젠이 단순한 친구를 넘어 더 내밀한 사이인가 생각도 들었고, 젠이 벡스의 좁은 집을 떠나 부유한 은퇴 저널리스트 페넬로페와 함께 산다고 했을 때 벡스가 뭔지 모르게 불편해하는 걸 보고 더 그런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습니다. 이 정도는 리뷰에서 밝혀도 될 것 같은데 결론적으로는 전혀 아닙니다. 소설 맨앞에 제이미와 알렉스라는 커플도 나오기 때문에(이들은 끔찍한 살인 현장의 목격자이기도 합니다) 더욱 그런 착각으로 기울었는데 작가가 교묘하게 이런 장치를 만든 듯도 합니다. 



제이미는, 그런 이들에 대해 쏟아지는 사회적 편견과는 아주 달리, 살인의 그 끔찍한 현장에서 비극을 막으려고 매우 영웅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제가 다소 이상하게 본 건 알렉스의 반응이었는데, 애인의 그런 행동에 대해 다소 서운해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마치 그럴 열정과 과감함을 자신에게 더 쏟아 주었으면 어땠을까 여기는 것처럼.... 이 반응은 소설 초반에 잠시 나오고 마는 정도인데, 이후 p348에서 사실임이 결국 드러나긴 하더군요. 물론 이 점이 미스테리의 진상이라든가 결말과 큰 관계는 없습니다(관계가 있으면 리뷰에 이렇게 쓸 수가 없죠). 



이 소설은 아무래도 진상을 끝까지 숨겨야 하다 보니 이런저런 다른 주변 인물들에게 비중을 골고루 주는 편입니다. 독자도 장르의 관습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 보니 읽으면서 아 이 사람은 절대 범인이 아니겠지, 따라서 지금 이 대목에서 이런 대사를 하거나 이런 반응을 드러내는 건 다 페이크겠지 일일이 정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결말에서 보이는 행동은 진짜 반전이었습니다. 이런 멋진 포인트가 있으니 혹 중후반부에 범인이 누군지 드러나더라도 끝까지, 진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집중해서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사실 범인이 누군지를 알아내는 게 독서의 포인트가 아니며 특히 이 작품 같은 경우는 그렇습니다. 사실 서두부터 자꾸 시선을 OOO에게 돌리려고 애 쓸 때부터 아 얘는 범인이 (오히려) 아니겠구나 누구나 눈치를 챌 수가 있습니다. 그럼 남은 사람이 ㅎㅎ 사실 몇 안 됩니다. 



살면서 상처를 많이 받고 큰 사람은, 주변의 누구한테 자꾸 의지하려고 듭니다. 그럼 그런 사정을 다 받아 주고 친하게 지내 주면 또 이런 사람은 의외의 까탈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 마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라도 주장하는 양 또 이상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사실 이런 유형하고는 안 엮이는 게 나은데... 소설에서 젠은 우리 독자들에게 많은 짜증을 안깁니다. 그녀가 매체에 연재하는 칼럼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일종의 관종짓입니다. 그래서 사려 깊은 OOO은 p196 같은 곳에서 "고백적 칼럼니스트"라는 표현에 회의를 드러내며 젠에게 정직한 충고를 합니다. 그러나 젠 같은 미숙한 인격의 소유자가 그런 충고를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p139에서 OOO는 젠에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네가 젤 쓰레기"라며 극단적인 말을 합니다. 물론 독자가 당황해하겠으므로 OOO는 아 이 단계에서 (정상이 아닌) 젠에게 극약처방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합리화를 합니다.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p63에서 OOO는 젠의 행동이 자신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나가자 크루아상 상자를 쓰레기통에 바로 버리는 등 정상이 아닌 행동을 이미 이 단계에서 합니다. 그러니 독자가 눈치가 빠르다면 이 사태의 진상 그 큰 줄기를 벌써 감 잡을 것입니다. 



범인이 벌써 이렇게 이른 단계에 드러나 버린다면 읽는 재미가 없지 않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진상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추리하는 재미가 여전히 남았고, 또 소설 맨처음을 장식한 살인 사건 역시 그 실체 전부가 안 드러났기 때문에 독자는 진짜 숙제를 아직 처리해야 합니다. 사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기존 장르물과 스스로를 차별화합니다. 



젠은 소설 전반부에서 독자를 참 짜증나게 합니다. 이 사람 하나만 행동을 똑바로 하면 많은 주변 사람들이 편해질 텐데... 하지만 소설이 결말로 치달으면서 오히려 젠은 우리 독자들과 많은 아픔, 단점, 그녀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었음이 드러나는 여러 과거를 오히려 공유하는 듯 보입니다. 진짜 악당이 실체를 드러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찌질이의 최고봉 같았던 젠을 서서히 우리 친구로 만들어가는 것도 작가의 능력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결말이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아마 이 결말을 예상한 독자는 제가 장담하건대 지구상에 없지 싶습니다. 다 읽고 나서 한 방 맞은 느낌이니, 제발 범인의 정체를 알았다고 소설 읽기를 도중에 멈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너무 쉽게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는, 대개 진짜 문제가 더 숨어 있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복제 인간
김준성 지음 / 홍영사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준성은 경성고상, 즉 이후의 서울 상대 전신이었던 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경제고위관료(부총리 포함), 한은 총재, 삼성전자 회장, 이수그룹 회장 등을 역임한 분이고 2007년 타계헸습니다. 지금 이 책은 이분이 쓴 소설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스타일이 매우 특이하고 소재가 기발합니다. 군데군데 엿보이는, 당시로서는 제법 높은 소양 수준이었을 과학 지식도 눈에 띕니다. 


빛이 들릴 수도 있을까? 지상의 다양한 생명체는 우리 인간이 보지 못하는 빛깔(어차피 인간 편의로 구분한것이므로 의미 없습니다만), 들리지 않는 소리를 감지합니다. 그래서 이런 소음을 내어 벌레를 퇴치하는 기계도 있고, 인간이 보지 못하는 적외선, 자외선을 알아 보려면 특수한 장비를 써야 합니다. 


1988년작 영화 <프레데터>를 보면 가공할 만한 전투 능력을 지닌 생명체가 지구에 훈련을 위해 잠시 방문하는데, 쓰는 장비도 뛰어나고 타고난 생체 능력도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시각 능력이 매우 원시적입니다. 우리 눈에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자연의 형태와 색을 있는 그대로(어폐가 있지만) 보지를 못한 채 그저 형체만 감지하는 식입니다. 반사신경과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나니 어차피 그들에게는 필요가 없지만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처럼이나 섬세하게 형체와 색을 분별하게 진화한 건 그만큼 아름다운 걸 좋아해서가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아름다운 걸 보고 기뻐하는 능력을, 험한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과 얼마간 바꿔치기 했다는 뜻이니 더 놀랍습니다. 


주인공은 빛이 들린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배울 만큼 배운 분이고 자신이 느낌이 그저 착각이 아니라고 여길 만한 근거도 있습니다. 말도안되는 헛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어느 의사 역시 이 환자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 집중 상담을 합니다. 확률이 낮긴 하나 잘만하면 학계를 근본에서 뒤집을 엄청난 발견을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은 소리와 비교가 안 될 만큼 빠르므로 정말로 (일부를 향해서라도) 이런 능력을 가진 이가 있다면 편익보다는 엄청난 착란 때문에 차라리 생존과 일상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환자와 의사는 결국에 이 환자의 지나간 과거 중 어떤 사건, 기억이 이런 현상을 초래했음을 알게 됩니다. 책프 25기 16주차에 리뷰한 유재용 작가의 <어제 울린 총소리>와도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커스 리딩 스마트 Hackers Reading Smart Level 1 - 최신경향의 흥미롭고 유익한 지문 l 최신 중학교육과정이 철저히 반영된 문제 제공 해커스 리딩 스마트
해커스어학연구소 지음 / 해커스어학연구소(Hackers)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커스 리딩 스마트 시리즈 레벨 1, 즉 가장 낮은 단계의 리더(=읽을거리)입니다. 어제 올린 레벨 2의 리뷰에서 시리즈의 특성이라든가 체제에 대해 설명을 다 했으니 관심 있는 분은 참조 바랍니다. 이 리뷰에서는 시리즈 전체 말고 이 책만의 특징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가장 낮은 레벨이기 때문에 단어와 문장구조가 너무도 쉽고 그 담은 내용도 상식선에서 다 알던 이야기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면(학생 아니라 지도하는 어른 입장에서), 그렇지는 않다고 하고 싶습니다. 이 책도 총 10개의 유닛, 그 유닛마다 네 개의 지문, 지문마다 4개의 문제, 유닛 끝에 리뷰 테스트가 실렸습니다. 예를 들어  p46, 유닛 04-2의 지문을 보면 주제는 울버린이라는 동물의 습성과 외양, 혹시 마주칠 경우 주의할 점(북미가 아닌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가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등입니다. 주제가 이런 것이니 한국의 학부형 평균이 잘 알 만한(적어도 지루해할 만한) 내용은 아니고 어차피 영어가 세계인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니 이런 주제는 영어 공부를 떠나 상식으로 알아놓아도 유익합니다. 또 "울버린"이란 동물 이름에 귀에 익다면 아마 2000년도의 헐리웃 화제작 <엑스맨> 덕분일 가능성이 큰데 아니나다를까 이 지문도 그 얘기부터 대뜸 시작합니다. 


이 독해 시리즈는 지문 오른쪽 페이지 하단에, 지문과 문제 중에 사용된 어휘를 설명하고 있는데 단어만 있는 게 아니라 be based on 같은 어구도 설명합니다. 이것이 관용어나 숙어는 아니므로, 아마 수동태 표현에 대해 낯설어할 학생들을 배려한 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만약 수동태를 배운 학생에게라면, 이걸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대체로 수동태는 중 2때 배우므로 이 교재가 그보다 앞선(=낮은) 단계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reindeer는 고 1 정도, predator는 중 3 정도이므로 확실히 단어 수준은 조금 높은 편이긴 합니다만 요즘은 선행학습이란 것도 있으니. 또 사실 단어는 너무 학년별 권장 수준에만 꽁꽁 묶어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어떤 지문을 주고 그 제목을 고르게 하는 문제가 누구에게나 어려운 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에서, 본문과 전혀 관계가 없는 문항은 나오지 않습니다. p47을 보면 ①은 "야생 울버린을 사냥하는 것을 멈춰라"인데, 만약 이 글이 제시 부분에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진다면 충분히 이것이 주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②③④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목이 될 수 있는 정답군과, 다른 선지가 아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답은 정상적인 교훈을 받은 누구의 눈에도 ⑤입니다. 이견이 있기 힘듭니다. 덧붙이면, 저는 이 시리즈에 나온 거의 모든 "제목 고르기" 문제들이 매우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아이들은, "내 생각에는 이런 오답도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안 되나요?"라고 묻다가 선생에게 혼이 납니다. 그럼 아이는 "아 혼이 안 나려면 이걸 답으로 그냥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이것 역시 바람직한 반응이 아니지만), 그 답에 대해 일종의 원한을 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이유 없이" 무엇을 강요한 선생, 나아가 자신을 거부한, 알 수없는 내용으로 가득한 지식 체계에까지 적대감을 지닙니다. 이런 아이가 커서 반사회적 성향을 띠는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고, 이런 아이들을 어떤 불순한 세력이 이용하여 수족처럼 부리는 것도 놀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다양한 선지가 답이 될 가능성이 있는 문제라면, 지도교사나 학부모는 대체 왜 그게 답이 안 되는지, "제목이나 주제를 고르라"는 지시사항이 무엇을 뜻하는지 납득을 잘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성인들이 모여 이런저런 잡답을 나누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자주 올라오는 사진(이른바 "짤")이, 바로 화장실에 걸린 두루마리 휴지입니다. 이것을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국룰(!)인가로 싸움 아닌 싸움이 나기도 합니다. 뭐 누구나, 이것이 논쟁거리가 될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재미로 이러고 놀곤 하죠. 그런데 이 책 p68에도 toilet paper를 어떻게 걸어야 하느냐를 놓고 양쪽의 의견이 갈린다면서 참으로 재미있는 논쟁거리를 짓궂게 꺼내고 있습니다. loose end가 slight하게 hidden되는 편이 좋지 않냐는 쪽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걸어야 휴지를 끊을 때 따로 벽(더러울 수 있으므로)에 손을 댈 필요가 없다는 쪽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 쪽인데 벽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바로 잘라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공공장소에 저런 게 있다면 그나마 위생에 유리한 편이 낫다고 볼 수도 있죠. 이 지문에서는 결론을 "논쟁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고 내고 있습니다. 이 지문은 131년 전 이 휴지가 처음 발명되어 걸렸을 때는 후자쪽이었다고 상식 하나를 알려 줍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과학 소재 지문이 많았던 점이었습니다. 과학 이야기는 역사나 사회문화 과목처럼 어떤 사항을 그저 암기해야 하거나, 혹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적 사항만을 강조하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화학적 사실들을 이치적으로 이해하게 도움을 줍니다. 또 오늘날의 한국을 이처럼 잘살게 해 준 반도체 기업의 엔지니어들도,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좋아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각별히 뛰어난 사고를 하는 훈련을 쌓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심지어 영어 공부를 할 때에도 과학적 사고를 할 기회가 생기면 얼마나 더 유익하겠습니까. 


에티오피아는 우리가 그저 기아선상에 시달리고 내전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나라로만 알지만, 사실 인류 문명이 가장 일찍 싹튼 지역 중 하나며 고대에 크게 번영했고 20세기 중반에는 한국에 지원군을 보내 주기도 한 나라입니다. 황제가 다스리던 위엄 가득한 나라였으나 현재는 분열주의자들의 무책임한 선동 때문에 나라가 사분오열되고 엉망진창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와카 타워는 마치 우리나라의 첨성대처럼도 생겼는데, 벽 표면에 물이 맺히는 걸 보고 온도를 측정하던 기능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책에는 이를 가리켜 "응결"이라 하여 한국어 해설에서 잘 가르쳐 주는데, 중 1 지구과학이 원래 엄청 어렵습니다. "응결"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혹 이 영어 교재를 통해 쉽게 이해할 학생들도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힙합을 발레에 접목한 게 "힙렛(hiplet)"이라고 한답니다. 힙합 댄서들이 발레 동작을 그대로 혹은 상당히 참고하여 따와 힙합음악에 붙인 것입니다. 발레 역시 철자는 ballet이라 쓰니 저 단어의 고안 배경이 뭔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지문은 다소 열광적인 어조로 "힙렛은 두 장르의 완벽한 믹스"라며 이 새로운 크로스오버 장르를 찬양합니다. 이 지문에도 문제 넷이 딸렸는데, 역시 제목 고르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①은 "힙렛: 음악의 또다른 형태"이고 ②는 "두 가지 춤 장르의 독특한 조합"인데, 사실 이 지문은 음악보다는 댄스에 대한 서술이므로 답이 ②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책 중간중간에는 아재력 테스트라든가, 독일에서 크리스마스를 어떻게들 보내는지에 대한 한국어 읽을거리도 실렸는데 아마 아이들 지도하는 중간중간 학부형들 지루하지 말라고 심어 놓은 아티클 같습니다. 미니암기장과 워크북(익힘책)은 책에서 따로 떼어낼 수 있게 별책 분리가 가능한 편집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