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장자의 거리 - 세계에서 가장 비싼 부동산, 뉴욕 억만장자 거리에 숨겨진 이야기
캐서린 클라크 지음, 이윤정 옮김 / 잇담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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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곳곳에 높이 솟은 마천루들은 이 세계의 경제적 수도가 이곳 뉴욕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하나하나의 상징입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33년 영화 <킹콩>의 배경으로도 등장했는데, 이 책 p31에서 "약 15년 전 준공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이라고 한 건 2008년에 있었던 레노베이션 준공을 가리킵니다(캐서린 클라크의 이 책 원서가 2023년에 출간됨). 밴 앨런과 세버런스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만들어간 당시의 마천루들은, 욱일승천하는 신생국 미국의 기세를 세계를 향해 과시했습니다.

(*북카페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책 p43의 화보를 보면 해리 매클로우(Harry Macklowe)가 발주한 432 파크애버뉴 빌딩에 대한 사진이 있습니다. 해리 매클로우 본인이 홍보를 위해 킹콩 분장을 한 것도 우습습니다. 해리 매클로우는 도널드 트럼프처럼 뉴욕에서 부동산 개발업으로 큰 돈을 번 사람이고 트럼프보다 몇 살이 많죠. 높은 건물을 짓는다는 건 부(富)와 성취의 표상이며,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아오르는 욕망을 대유하기도 합니다. 20세기 초 마천루의 아버지 중 하나인 H 크레이그 세버런스의 이름이 severance(절제)인 건 묘한 역설입니다.

p91에는 브래드 잭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의 부친 프레드 트럼프의 법률고문도 지낸 사람이라고 합니다. 잭슨 역시 부동산 개발에 일가견이 있던 사람으로, <풋루스>에 케빈 베이컨과 함께 나왔던, 키가 178cm 정도 되는 장신의 미녀배우 로리 싱어하고도 한때 사귀었다고 책에 나옵니다. 이 페이지에는 그의 친구 중 하나로 마리오 쿠오모라는 정치인이 언급되는데, 이 사람의 아들 중 하나가 앤드류 쿠오모이며, 부친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내내 거론되었지만 그 선을 넘지는 못했으며 이번에는 33세의 조란 맘다니라는 신인에게 패배하여 큰 망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능력이 뛰어난 비즈니스맨들 중에는 혼자서만 일을 진행하려는 묘한 습벽을 가진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p132를 보면 해리 매클로우 역시 그런 사람이었고, 이런 부자들은 증시에 자신의 회사를 공개하여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얻는 데에도 조심스럽더군요. 이 책에서 아주 자주 나오는, 예를 들면 p125 같은 곳의, CIM group(샤울 쿠바 등이 만든)에서 CIM은 대체로 Community, Infrastructure, and Mixed-use의 약자로 통하곤 합니다. CIM 입장에서는 저런 매클로우 부자(父子)의 태도가 대단히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p182 같은 곳을 봐도, CIM과 매클로우 측은 여전히 대립합니다(이 책에서는 "맥클로우"라고 일관되게 표기합니다).

크라이슬러라고 하면 이제 브랜드의 미국 내 인지도가 일본의 토요타나 혼다보다도 못할 지경입니다만 한때는 GM, 포드와 함께 미국의 살아숨쉬는 엔진으로 여겨졌습니다. p218을 보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크라이슬러 빌딩 모두 대공황기(1929~)에 지어졌는데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미국 산업의 집요하고 부지런한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다만 마천루가 이처럼 곳곳에 들어서면, 일단 많은 이들의 조망권과 일조권이 침해받는데 책 곳곳에 나오는 MAS라는 단체는 Municipal Art Society of New York의 약자입니다. 엘리자베스 골드스타인(p218)이 이 단체의 회장(president)였는데 그녀가 보고서에 쓴 우려의 성명은 일방적 도시개발의 문제점을 압축하여 나타냅니다.

건축은 예술의 일종입니다. 이 책에는 부동산 재벌들과 사업가들뿐 아니라 예술가들도 여기저기서 등장하는데, 티에리 데스퐁(프랑스 디자이너), 히로시 스기모토(책에는 이렇게 표기되지만, 일본어로는 杉本博司[삼본박사]로 쓰므로 스기모토 히로시가 맞겠습니다. 물론 세계적인 인물이므로 surname이 뒤에 오는 관행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등의 이름들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p303 이하에 나오는 이른바 스타인웨이 프로젝트에서 마이클 스턴과 케빈 멀로니 두 자본가가 내내 대립하는 모습은, 이런 대규모 건축 사업이 단순히 이권 다툼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 예술의 프레임에 대한 근본적 입장 차이가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 책의 원제는 Billionaires' Row입니다. 보통 Avenue는 동서(가로), Street는 남북(세로) 방향의 길을 가리킨다고 하죠. row라고 하면 대개는 avenue와 동의어입니다만, 그 간단한 단어 안에는 세상 속에서 이권과 권력을 거머쥐려는 숱한 군상의 다툼과 이합집산, 네편네편 가르기 등이 압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의 경제 수도에서 벌어지는 돈의 전쟁이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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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튀르키예(터키) - 최고의 튀르키예 여행을 위한 가장 완벽한 가이드북, 2025~2026년 개정판 프렌즈 Friends 7
주종원.채미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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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중앙북스 프렌즈 터키 편이 이렇게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에로도안 대통령이 국명을 저렇게 endonym으로 바꾼 후에, 주종원 채미정 두 분 저자의 이 책도 튀르키예 편으로 개명하여 책이 나오기 시작한 게 2023년이었고 올해가 3년차입니다. 여튼 매번 책이 말쑥하게, 업데이트 사항도 반영하여 이렇게 출간되니 독자 입장에서는 매우 반가울 뿐입니다. 저도 3년 연속으로 이 책을 리뷰 중입니다.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스탄불은 정말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계획 도시를 새로 만들어 그 먼 로마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지중해 세계의 중심으로 만든 게, 예언자 마호멧의 성천(聖遷)보다 근 삼백년이 앞섭니다. p65 이하에 자세한 소개가 나오는데, 이 도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초를 놓은 지 거의 천년 하고도 백년이 지나 오스만 제국의 젊은 황제 메메드 2세에게 함락되어 기독교의 간판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1453년이면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이 나오기 거의 60년 전입니다. 천 년을 기독교 동부 수도로, 다시 5백년을 이슬람의 수도로 지냈으니 문화 유산이 얼마나 쌓였겠습니까.

이 책은 한국인 여행자들을 위해 자세한 실용 정보가 제시되는 점도 매년 좋습니다. 이스탄불이라고 하면 막연하게 뭔가 치안이 불안하지 않냐는 선입견이 있는데, p66에 경찰 호출 등 여러 긴급 전화번호들이 나옵니다. 한국 총영사관은 (책에 잘 설명되듯) 이곳 이스탄불(유럽 대륙의 끝자락)에 있고 대사관은 공식 수도(아나톨리아 반도 한복판의) 앙카라에 소재합니다. p71에는 튀르키예판 카카오 택시라고 할 BiTaksi에 대한 자세한 어플 설명이 나옵니다.

p116에는 한때 지중해 세계 최강자로 위엄을 떨친 오스만 제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군사 박물관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여기는 1933년에 개관했다고 책에 나오는데, 케말 파샤 아타튀르크라는, 현대 튀르키예의 국부(國父), 혹은 중시조(重始祖)라고 부를 만한 장군이 설립한 시설입니다. 매일 오후 3시에 키크고 잘생긴 군악대 청년들이 보여 주는 메흐테르 공연도 있다고 하니 특히 여성 관광객들이 참고할 만한 정보입니다. 아타튀르크 같은 이가 세속주의, 근대 지향의 바른 방향을 잡았는데 현재의 영도자인 에르도안은 나라를 정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니 이만저만 큰일이 아닙니다. 

p250 이하에는 에페스에 대한 정보가 자세합니다. 에페스라고 하면 잘 모를 분들도, 에페소스 또는 에베소라고 하면 모를 사람이 없습니다. 이곳은 교부 시대 기독교 5대 교구 중 하나의 중심지였으며 사도 바울이 그곳의 초기 교인들에게 보낸 서간이 신약 27권 중 하나일 정도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이 이슬람세력권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쇠퇴한 건 아니고, 어느 문명권의 대도시도 그러하듯 자연 재해라든가 산업 구조의 개편 등의 이유로 쪼그라들기도 합니다. 터키는 남쪽으로 시리아와 바싹 붙어 있는데, 이 에페스는 바로 그 시리아와의 접경 근처에 자리합니다. 에페소스 자체가 그 극성스럽고 바지런했던 시리아인들의 무역으로 번성했던 곳입니다.

올림포스 산은 그리스 열두 주신이 모여 살았다고 하여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들의 거주지로 유명하니 그 산은 그리스에 있는 게 맞고, p360에 소개된 관광지는 튀르키예에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 신화도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진 컨텐츠였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헬레니즘 시대를 열며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만들었듯 이 올림포스라는 산 이름이 지중해 여기저기에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습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여기도 꽤 유명한 곳입니다.

아무리 메이저 종교라고 해도 신비주의 종파가 꼭 발호하게 마련인데 황홀경에 들어 현세를 초월한 비전을 얻는 게 종교의 오랜 기능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단 도가 지나치면 사이비가 되고, 주류 교단으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합니다. 시아파도 원래 수니파가 보기에 이단이었고 페르시아라는 큰 규모의 정치적, 종족적 단위로부터 지지를 받기 전에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p556을 보면 이슬람 소수 교단 중 하나인 메블라나의 발생지인 콘야라는 도시가 소개됩니다. 교통 인프라가 잘 발달되었는데 세계 각지로부터 성지 순례를 오는 신도들을 맞으려면 그런 준비가 필요했겠지요.

튀르키예는 영토가 우리 생각보다 넓고, 일차대전 패배 후 아무리 제국이 박살났다고 하나 케말 파샤 영도 하에 그럭저럭 추스린 땅이 꽤 넓습니다. 아나톨리아 반도가 넓다 보니 기후대도 상당히 다양하고, p604 이하에는 에르주룸이라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추운 도시"가 소개됩니다. 쾨펜의 기후 구분에 의한면 냉대(D)소우(s) 지역에 속합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의 국교를 기독교로 정했는데, 그 테오도시우스가 요새화한 곳이 바로 여기 에르주룸입니다. 고대 로마의 중추 도시 중 하나였고 옴미아드 왕조(우마이야 왕조)도 이곳을 중시하며 다스렸습니다. 에르주룸에서 "룸"이 바로 로마를 아랍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이번년도판도 알찬 정보가 많고 컬러풀한 편집에 눈이 호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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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부트캠프 - MBA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비즈니스 인사이트
이상기 지음 / 리브레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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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커뮤니케이션으로 통한다(p60)." 아무리 뜻깊고 심대한 파장을 부르는 과업이라고 해도 대체 그 프로젝트에 대해 성원 간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게 쉽게 진척이 될 리가 없습니다.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커뮤니케이션의 달인이라고도 했는데, 그는 젊었을 때 아나운서나 기업 대변인 역도 했었고, 배우이기도 했던 만큼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the simpler, the better." 저자가 p61에서 모든 소통의 기본이라며 강조하는 말입니다.

(*북뉴스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저자는 RT출신인데, p108을 보면 각 병과마다 그 핵심의 가치, 특히 리더십에서 강조하는 정수가 그 짧은 모토 안에 다 들어 있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군 장교야말로 전장에서 부대원이 죽고사는 문제를 맨앞에서 통솔하며 책임지는, 진정한 리더 중의 리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전시라면). 나를 따르라, 알아야 한다, 내 생명 전차와 함께, 시작과 끝은 우리가, 통하라! 등이 각 병과의 슬로건인데, 저자는 본인의 군 경험을 잘 살려 이 (일견 예사롭게 보이는) 구호들의 깊은 뜻을 설명합니다. 일반 병(兵. private)과 장교(將敎. officer)는 물론 군 생활의 밀도에 있어 큰 차이가 있으나 많은 남성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깊이 공감할 듯합니다.

"리더의 언어는 조직을 움직이는 힘이다(p137)." 이 말에 앞서 저자는 어느 임원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회의 동안 근 두 시간을 이분 혼자 떠들었으나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불통의 아이콘마냥 마이크를 독점하고 타 성원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도 큰 문제지만, 지시를 하려면 아랫사람들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명확히 지시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은 문제를 파악하고 가시화할 능력도 없고, 나중에 탈이 날 때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럴 가능성이 큽니다. 큰 일을 절대 맡겨서는 안 되는 유형입니다.

p158을 보면 영어 약자로 VUCA라는 게 나옵니다. VUCA가 무엇인가. Volatility, Uncertainty, Complexity, Ambiguity라고 해서, 미 육군참모대학(우리 나라에도 이 비슷한 조직이 있습니다)에서 1987년에 이론화한 개념입니다. 그만큼 현대 사회는 종래의 이론적 틀로 이해하지 못할 많은 구조적 특징들이 있다는 건데, 저자는 "시너지 창출, 혁신을 위해 협업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는 결론을 끄집어냅니다. 전에는 아주 특출한 개인의 힘으로 난국을 돌파할 수 있었으나 현대는 그런 개인 여럿이 힘을 모아야 과업의 달성이 가능하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p167에는 고객 유형 분류가 나옵니다. 토머스 존스, 얼 새스 주니어 두 분 학자의 업적으로 나오는데, 인질, 충신, 도망자, 용병의 네 유형입니다. 충성도를 y축에, 만족도를 x축에 두면 이 네 분류가 나온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용병(mercenary) 유형은 만족도가 높은 대신 충성도가 낮은 고객이라, 지금 내 상품 내 서비스에 만족은 하지만 언제 이탈할지 모르는 유형입니다. 도망자는 만, 충 모두 낮아서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나를 떠나주는 게 좋은 유형입니다. 책의 설명이 재미있어서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p192에는 참 좋는 설명이 나옵니다. 대체 왜 장군을 general이라 부를까요? 앞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지만, 장교는 전문 병과가 있어서 포병, 통신병, 전차병 등을 확실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단 대령에서 별을 달고 장군(brigadier)이 된다면? 그때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매몰되지 않고 모든 병사들, 장교들을 두루두루 살피고 통솔하는 만능인이 되어야 합니다. 역시 저자의 군 경험이 바탕이 된 서술이라서 문장에 힘이 있고 독자가 잘 설득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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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자의 상속녀 캐드펠 수사 시리즈 16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손성경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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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드펠 시리즈에는 이처럼 중세의 치열한 신앙, 교리 논쟁이 들어가서 더 흥미롭습니다. 에코의 <장미의...>에도 거의 생사를 걸다시피한 논쟁이 종파 사이에 이뤄지는데, 중세인들은 이처럼 죽음을 초월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인간 존엄의 무게를 결정한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질병, 기아, 전쟁 등으로 워낙 사람 목숨이 파리같이 사라지기도 하다 보니 피안(彼岸)에의 응시가 그만큼 큰 비중이었다는 소리인데, 현대인들은 위생 상태의 개선, 식량난의 해소 등으로 현생 자체를 즐기다 보니 저런 논쟁이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조선 시대의 예송(禮訟)을 구경하는 분위기라 할까요. 하지만 중세의 구조에 관심 가진 이들에게는 이런 살벌한 말싸움이 너무도 재미있습니다. 여기에 미스테리까지 들어갔으니...

(*문충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책 p124에 나오듯이, 악마조차도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보편 구원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죄의 개념을 이렇게 구성하니 원죄에 대해서도 오늘날 정통파 기독교의 입장과는 매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p132)는 오리게네스보다 한참 뒤의 사람이며, 원죄론을 정초한 교부 중의 교부인데 그런 아우구스티누스조차 오리게네스의 주장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이론을 만들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캐드펠의 시대(물론 가상의 인물이지만)에 오리게네스의 주장을 함부로 인용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이단시할 수만도 없는 게, 어쨌든 그 역시 교부(敎父) 중 한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레이브와 거버트 의원 사이의 대립은 이단이라는 민감한 이슈가 개입하여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또, "여차하면 웨일즈로 넘어가요!(p141)"라고 포추너터가 일레이브에게 충고하는 것도, 이 캐드펠 시리즈가 영리하게 북서 잉글랜드로 배경을 잡은 이유를 잘 설명하는 하나의 예입니다. 

여기서 캐드펠이 일레이브를 치료하고 돌보는 방식도 마치 <장미의...>에서 배스커빌의 윌리엄이 아드소를 잘 살피는 장면들과 닮았습니다. 물론 나이가 지긋한 주인공이 아직 미숙한 젊은이를 이리저리 케어하는 건 어느 문예에서나 나올 수 있는 설정이며, 그만큼 주인공 캐드펠이 능력 있고 원숙한, 매력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런 장면들이 더욱 인상적으로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워낙 단단한 머리를 가졌으니 오래 남는 후유증은 없을걸세.(p159)"라고 캐드펠이 일레이브에게 말하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단단해야 내용물이 더 잘 보호되나 봅니다. 그럼요.

그리고 저기서 캐드펠이 "이제 몸에 자신만의 흔적이 남은 셈이네."라고 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합니다. 역전(歷戰)의 용사들에게는 몸 여기저기에 흉터가 남는데, 물론 보기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흉터는 다른 누구의 몸에도 없는, 자신이 그만큼 세상을 치열하게 산 흔적과 증명이 되기 때문에 영광의 흔적이요 chronicle입니다. p198에 묘사된 제번의 꼼꼼한 습관, 일처리 스타일, 그리고 말끔히 면도된 얼굴 등은 이와는 대조를 이루며, 물론 그 또한 앞으로 제번이 어떤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과업의 달성에 이바지할지를 암시합니다.

중세에는 또한 장인(匠人)들이 대접을 받던 시대입니다. 꼼꼼하게 만들어진 각종 가구, 장치 등은 사람의 노고를 덜어 주며, 치밀한 기능성으로 인해 지적인 노동의 효율성을 크게 올려 주기도 했습니다. p288을 보면 제번과 조카 포추너터의 협업으로 전에 없던 멀쩡한 책궤가 제 기능을 하는 걸 보며 독자의 마음이 다 뿌듯해집니다. p31를 보면 여전히 흐트러진 게 없어 보이지만, 모두를 뒤흔들어 놓은 그 끔찍한 교란상은 이제 캐드펠의 노련한 손길 끝에 마무리됩니다. 질서의 회복만큼 확실한, 이단에의 단죄는 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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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루인 수사의 고백 캐드펠 수사 시리즈 15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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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사(修士. 로마 가톨릭 수도사) 시리즈 첫 권이 나온 게 1979년입니다. 이게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건 1990년대 중반이고 그때도 북하우스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비슷한 점을 떠올릴 텐데, 이 시리즈 첫 권이 <장미의...>보다 더 빠릅니다. 다만 한국에서의 번역 출간은 열린책들의 <장미의 이름>이 더 빨랐고, 1990년대 중반 북하우스가 캐드펠 전권을 출판하기로 결단 내린 건 <장미의.. >의 성공을 보고 자극받은 바 있지 않았을까 하고 제 마음대로 추측해 봅니다. 캐드펠은 주인공이나 배경이나 모두 잉글랜드(웨일즈와 바짝 붙은 서부)이지만 <장미의...>에서는 주인공 배스커빌의 윌리엄만 잉글랜드인일 뿐, 배경은 이탈리아 북부입니다.

(*문충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빈사의 할루인 수사 곁에서 에드먼드 수사는 조용히 말합니다. "정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육신이라는 집이 깨끗하게 치워지기를 기다리는...(p49)" 후... 막상 아픈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보고 곁에서 공감하는 이가, 그렇게라도 대신 위안을 삼아야, 이 필멸의 인간이 그럴 만한 악행을 저질렀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필히 치르게 되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무기력하게 마음을 달랠 뿐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는 곳에 구원도 함께하기 마련이니(적어도, 현대의 신구교 주류 교리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구태여 성지(聖地)를 순례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p62에서 라둘푸스 수도원장에게 할루인은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이 성지로 떠나게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라둘푸스 수도원장 아니라 우리 독자들도, 사람 상태가 이런데 대체 무슨 여행이 가능하겠냐며 만류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일 것입니다. "의지와 용기는 충분하나, 그럴 기력이 있는지가 문제겠습니다." 캐드펠다운, 온당하고 신중한 말입니다. 

애들레이즈 드 클리어리 부인(p92)... 고대나 중세에는 교통과 통신 인프라가 대단히 불완전했고, 따라서 나그네의 안전을 보장하고 적절한 환대를 베푸는 게 미덕이자 의무로까지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천벌을 받은 것도, 나그네를 푸대접한 죄목이 크다고도 하죠. BBC에서 만든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보면, 펠리시아 백작부인과 매카시 아주머니가 등장하여 브라운 신부의 보조 노릇도 하고 교구의 크고작은 일을 처리합니다. 항상 평신도 중에는 이런 역이 꼭 있어야 하는데 저는 이 작에서 저 드 클리어리 부인을 보고 그 생각이 났더랬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혼인이라는 성스러운 예를 거치려면 목사건 신부건 랍비이건 뭔가 특별한 식견을 지니고 성스러운 자격을 갖춘 이가 절차를 주례해야 합니다. p150을 보면 센러드가 두 사람, 즉 두 성직자에게 누가 사제 서품을 받았는지 묻습니다. 사제가 혼배성사를 주재해야 하기 때문이죠. 카를 4세가 1356년에 반포한 금인칙서에 의해서야 비로소 천주교 사제는 교회가 독점적으로 서품할 수 있게 되지만, 그때로부터 근 백 년 전인 소설 속의 이 시대에도 민중은 이미 왕보다는 보편 교회의 권위를, 적어도 영적인 일에서는 더 높이 샀던 것입니다.

영어에 maraud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의 패잔병, 혹은 혼란스러운 세상에 혼란을 틈타 약자, 여성을 기습하여 재산과 목숨, 명예를 뺏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기어이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여, 캐드펠과 센러드는 p186에서 에지타의 시신을, 차가운 눈밭에서 발견합니다. 미스테리 소설의 모범적 발걸음에 따라, 이 시신의 발견은 가뜩이나 꼬여 있던 상황의 긴장을 최고조에 달하게 이끕니다.

I have seen that face before. 캐드펠 시리즈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유독 이런 모습을 자주 보이지 않습니까? 균형잡힌 머리, 가느다란 허리... 아, 저 여인을 대체 어디서 보았더라?(p233) 캐드펠의 관록과 지혜가 폭발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그 미궁에 빠진 사연도 드디어 실마리를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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