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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무기 - 나를 자극하는 수만 가지 감정을 내 것으로 만드는 심리 솔루션
수전 데이비드 지음, 이경식 옮김 / 북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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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쓰여진 여러 고전 문학이나 에세이 들을 읽어 보면, 필자나 등장인물들이 그리 "감정"이라는 팩터를 중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감정은 낭만주의의 대흥성 이후뿐 아니라 그 이전부터도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자 소재였으며,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건 자신의 신조나 신앙보다도 차라리 감정에 가까웠습니다. 일개 미물인 동물에 대해서도 학대 등을 해서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로 "그들도 생명과 감정이 있다" 같은 것을 들기도 합니다. 지식과 이념 때문에 살인 등의 폭거를 일으키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도, 감정을 상한 경우 거의 누구라도 뒷일을 생각지 않는 무리수를 둡니다. <사기>에 보면 "필부라도 모욕을 당하면 반드시 칼을 뺀다" 같은 말이 있을 정도죠.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들만큼, 의지나 신조, 인격의 수양 같은 덕목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 안 받기, 내 마음을 잘 챙기고 평안해지기 같은, 감정의 다스림에 신경 썼던 인류는 아마 지상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세계화가 진척 되어서인지(?) 동양과 서양이 전혀 그 양상이 다르질 않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개인 차원을 벗어난 어떤 추상적인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이 되고 난 여파가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직장에서 트러블을 일으키고, 이직이나 사직을 하는 이유 대부분은, 일이 힘들거나 능력이 감당 안 되는 이유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사람들은 대개 적응을 해 냅니다. 그러나 직근 상사, 동료 들과 감정적으로 심하게 맞부딪힌 후에는, 많은 이들이 가차없이 사표를 던져 버립니다. 이후의 일은 채 대비나 생각도 않고 말입니다. 물론 감정을 잘 챙기지 못해서 억지로 환경을 참아 내다 병을 얻거나 몸을 망치는 것보다는 그런 결단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 자신의 감정을 현명히 관리하여, 애 써 얻은 직장에 충실하는 편이 전 인생 설계의 관점에서 더 유리한 선택임을 감안하면, 감정의 작동 원리에 대해 잘 파악하고 평소에 (향후 큰일이 터지기 않게) 대비하는 게 중요합니다. 또, 사람의 감정이 상처를 입는 건 혼자만의 세계에서 벌어지진 않습니다. 보통은 타인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감정을 잘 파악하는 건 그 타인을 배려한다기보다, 그 타인과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해야 할 나 자신(의 감정)을 위해 중요한 선택입니다.

여태 많은 자계서를 읽으며 그간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이 밝혀 낸 성과를 바탕으로, 여러 몰랐던 지식이나 팁 등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이를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걸 많이 봐 왔습니다. 아마 책을 자주 골라 정성껏 읽는 많은 다른 독자들도 사정이 같을 것입니다. 개중에는 공감이 가는 내용도 있고, 나에게 너무 무리한 주문을 한다 싶은 것도 있었겠으며, 다 맞는 말이고 수긍하지만 실천에는 가능하면 옮기고 싶지 않다,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다른 방법은 없는지 알아 보고 싶다, 같은 생각이 들게 한 것도 있었겠습니다.

만약, 소개하는 정보가 비교적 정확하고 근거 있으며, 여러 상황을 전제로 한 제언(충고)도 귀에 거슬리지 않고 무난히 다가오는 책이라면, 그런 책은 일생을 두고 곁에 가까이하며 좌우명처럼 활용해도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새롭다기보다는 깔끔하고 센스 있게, 여러 독자에게 잘 어필할 만한 사항을 잘 정리한 책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저자께서는 현직 하버드 의대 심리학 교수이므로, 학문적 권위까지 충분히 갖춘 분이기도 합니다. 또, 그녀만의 임상례와 상담 사례를 친절하고 시의적절하게 여럿 소개하기에, 여태 여러 책에서 엿봤던 듯한 익숙함 내지 식상함도 가능한 한 최소로 줄이고 있습니다.

책의 목표는 저자 스스로 말씀하시길, "감정의 민첩성"을 기르는 일이라고 합니다. 서평 처음에도 말했지만, 우리 이전의 사람들은 감정을 억누르고,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여 행동과 결단을 머뭇거리기보다는 "고지를 향해 전진(물론 그리 말하는 사람 본인부터가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면서)!"을 외쳤습니다. 그 시대에 나온 자계서(많지는 않으나 있었고, 또 인생 독본 등으로 이름 붙여졌을 뿐 자계서라고 부르진 않았죠)는 감정이란 중요 팩터를 대개는 무시했습니다. 허나, 아이디어의 질(퀄리티), 의지의 지속도, 종합적인 삶의 만족도, 구체적인 개인의 삶에서 후회 없음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잘 보듬고, 좋지 않은 감정을 재빨리 유리한 것으로 바꿔 주는 요령이, 그 어떤 다른 목표나 이상보다 중요합니다. 매일, 덜 늙고 덜 피곤해하며 더 행복해할 수 있는 나를 위해서 말이죠.

감정의 민첩성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 저자는 크게 네 가지 과정(혹은 세부 목표)을 제시합니다. 1) 마주하기, 2) 비켜나기, 3) 자기 목적대로 걸어가기 4) 전진하기. 일단 예전 사람들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무시할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녀석과 눈을 마주치며 응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책에서 가장 중시하는 최상위 전제이자, 이 책이 담고 있는 모든 주장의 발판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감정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거나 노예가 될 게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길을 들여야 한다는 거죠. 1)도 중요하지만 저는 그 다음 2)가 의미 깊다고 봤습니다.

1) 관련해서는 대개 의지력 충만하고 뭔가 비범한 이들이 종종 저지르는 오류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런 유형이 아니고,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없기에 큰 신경은 안 쓰지만, 그래도 그들과 비슷한 오류를 잘 저지르죠. 예전에는 거꾸로 그런 사람들을 높이 평가했으니까요. 대개 가부장적 유형이기도 한데, 요즘 일부 독서 트렌드에서 "남자 역할의 종말"을 거론할 때는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무작정 무시하는 일부 남성"을 특히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 2)와 관련해서는, 제 개인적 생각으로 나르시시스트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입니다. 이들은 전근대적 가부장들과는 정반대 지점에 위치하지만, 그들 나름의 이유에서 역시 불행합니다. 그들에게는 감정이 곧 자기 자신의 주인입니다. 왜 나의 부모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할까(사실은 그들 부모는 자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평균보다 훨씬 자주, 그 정제되지 않은 욕구를 풀어 주었습니다). "왜 사회는 내 감정, 내 욕구,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발상을 바로 수용하지 않을까? 내 생각엔 내가 맞는 것 같은데." 반응하거나 생각하는 품이 그저 아이들과도 같습니다.

어쩌면 그 부모가 단단히 버릇을 잘못 들여 놓은 건데, 물론 나이 들어 그 책임은 본인 자신이 지겠지만, 이들은 여튼 팍 싫어지고, 비위에 거슬리고, 당장 기분을 망치는 모든 요소를 "악"과 동일시합니다. 매사에 합리화를 하려 들고, 희한한 데서 이유를 찾아내어 자기가 맞는 것 아니냐고 우기고, 상황을 거칠고 어이없는 방식으로 정리하곤 자신의 세계에 팍 파묻힙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책 전체를 통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게, 자기 감정을 어떤 초자연적 명령이나 일생을 걸고 완수해야 할 사명으로 보지 않고, 그저 길들여야 할(물론 존중은 해야 합니다만) 대상으로,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들어가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나에게 혹 그런 요소가 있으면 고치고, 타인이 그리한다면 (여튼 그의 인생이므로 중뿔나게 주제넘게 개입할 것까지는 없지만) 저 사람은 그런 동기로 움직이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이해, 정리"를 하면 됩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에 휩쓸리지 않은 채 거리를 두었다면, 이제는 이미 대상화해 버린(따라서 "내"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처리하고 다루고 처분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으며, 이미 과업이 불가능합니다. 아니면 정신병에 걸리거나 말이죠), 이 감정이란 녀석을, 어떻게 잘 달래느냐의 과제가 남았습니다. 이 책 70% 정도는, 다양한 상황에서 감정을 어떻게 핸들링하는지, 저자께서 참으로 정성껏 정리해 둔, 환자나 저자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중한 가르침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네 가지 패러다임을 잘 몰라도, 그 본문에 나온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만, 패러다임을 먼저 머리에 넣고 그 개별 팁과 교훈, 처방을 접한다면 훨씬 내면화가 쉽고 오래갈 뿐 아니라, 사람이 기계가 아니고 창의적인 정신 작용이 가능한 이상 그 "응용"과 "발전"이 가능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개별 방법론의 상세함, 진정성에 못지 않게, 저자의 프레이밍이 매우 유익했던 책 중 한 권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세번째 단계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또하나의 중요 과제는, "감정은 나의 감정이지, 어떤 일반화하고 추상적인, 혹은 공통적인 무슨 별개의 감정 이데아 같은 게 있지 않다"는 겁니다. 자기 감정에 휘둘리는 이들 대부분은, 자기 자신의 감정만을 최우선으로 배려, 고립화하면서도(즉 타인을 고려 안 함), 동시에 감정을 절대시하는데 이게 자가당착입니다. "그건 너의 개인 감정일 뿐이야"라는 말 중에는, 다른 사람이 자기 감정을 위해 희생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 들어 있죠. 그런데도 이런 사람들은 "너(혹은 그)는 내 감정을 이해 못 해"를 두고, "너(그)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 못 해"로 일반화, 혹은 격상시킵니다. 내 감정이 내 감정이 아니라 인류 일반이 존중해야 할 위대한 가치로 바꾸어 버리는 거죠. 이런 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그럼 이해라도 하고 저런 요구를 하느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목전의 이익을 얻기 위해 알랑거리기는 합니다. 그조차도 대단히 피상적이죠.

네번째 단계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전진하기"는, 퇴행과 현실 도피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생을 살며 순간 맞이하는 모든 도전에 대해 정면으로 응전하고, 사소한 작은 나쁜 습관을 교정해 가며 큰 변화의 동력으로 삼으라는, 어찌 보면 공자나 맹자, 주자의 가르침처럼 대단히 윤리적이고 지행합일의 경지를 바라보는 성격입니다. 일일이 실천에 옮기다 보면, "감정(옛 사람들이 무작정 억누를 것을 주문했던)"에서 토픽이 시작되었으나, 결국 수신제가와 덕업정진으로 마무리되는 느낌도 듭니다.

책은 또한 유머 감각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처음에 읽다가 "카드신용을 휴지통에 버린다"는 대목에서, 오타는 오타인데 참 이상한 오타다, 귀엽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었는데, 한 장 뒤로 넘어가니 "마음챙김, 마음흘림"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고의적인 미스프린트였더군요. 저자는 관심사가 참으로 넓으신지, 시대별로 서양이 동양과 접촉하며 소중한 교훈이나 수련 방법으로 얻어내고 발전시킨, 예컨대 요가라든가 다양한 노하우를 망라적으로 정리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효험을 본다 싶은 모든 바람직한 트렌드는, 우리의 현재에는 특히 다 "감정 수련"과 직결되어 있음을 재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앞서도 말했습니다만 감정이 다스려지면 결국 의지, 도덕성, 추구해야 할 목표 까지 덩달아 해결되기도 합니다. 심리학이 결국 감정 트리트먼트를 위한 학문이었던가 싶기도 하게, 이 석학의 자상하고 위트 넘치는 충고가 어느새 인생 전체를 관조하는 계기까지를 만들어 주더군요. "감정은 곧 당신 일상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결코 노예가 되지는 말라. 마주하고, 다루고, 친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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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첫인상 - 나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이미지 메이킹의 모든 것
김경호 지음 / 팬덤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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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와 이미지는 서로 다르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어떤 이는 그럴싸한 외모를 가졌으면서도 이 좋은 조건을 남들에게 어필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이런 분들이 놀라운데) 어디 내놓을 만한 조건이 아니다(안타깝지만) 싶은 이들이, 뜻밖에 이미지 메이킹을 잘해서(대단한 능력이죠) 남들 눈에 선망의 대상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외모/이미지의 차이점이란 이런 것입니다. (저자의 다른 책 <타고난 외모는 어쩔수 없다>를 참조하십시오)

제가 눈여겨 본 건, 저자께서 "진정한 이미지 메이킹"의 조건 중 하나로 "타인과의 원활한 소통 능력"을 든 것입니다. 이 "소통"은 물론 눈치가 빠르다거나, 말을 잘한다 같은 요소 외에도, 상대가 이 점을 내게 원하겠거니 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잘 짚어서, 지금 마주하는 상대에게 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분명히 전달시킬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취지에서, 저자는 "이미지메이킹이야말로 진정한 소통 능력"이란 말까지 합니다. 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은 순간순간의 무수한 선택들로 채워집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연"이라든가, "불운"이라든가, 기타 외부의 변수로 남 탓을 할 여지는 없습니다. 사람이 예컨대 감옥(의 독방) 같은 데에서 철저히 외부와 고립되어 살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아무리 작은 몸짓이나 말을 통해서도 자신의 환경(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타인들)과 소통을 하면서 삽니다. 어떤 이가 뜻하지 않은 성과를 올려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해도, 그 사람은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동안 부지기수의 건전한 축적을 통해 이미 발판을 쌓고 있었던 셈입니다. 일본 속언에 "운도 사나이의 실력이다" 같은 말이 있는 건 이 때문입니다.

이미지 메이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고난 외모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사람이 심지어 길에서 스쳐지나가는 전혀 안면 없는 타인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주었다면, 그 사람은 평소에 자신의 시간을 성실히 가꾸었다든가, 뭔가 작은 일상 속에서 기쁨을 찾은 흔적이 몸에 배어 있기에, (말하자면) 그 전혀 안면 없던 이에게까지 호감을 준 것이죠. 그런데 사실 이런 예외적인 현상, 실례라면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겠고, 역시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랄까 노력을 통해, 자신의 단점은 최대한 극복하고, 장점을 극도로 부각하는 어떤 세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책도 대중 앞에 출판되는 것이겠고 말입니다. 위장 같은 게 아니라, 이 역시 타인을 향해 "당신과 소통을 하고 싶다"는 진정성 있는 외침이고 노력입니다. 또한 이는 개인의 성실성과도 통합니다.

특히 많은 여성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지만, 내가 이 정도로 꾸미고 밖에 나서면 일단 "정체감에 변화가 생긴다"고들 하는데, 이 책 저자도 정확히 같은 표현으로 그 말씀을 하시는군요. 사회 생활이란 나 자신의 민낯,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안타깝게도 사회는 개인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부여하며 전체가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나쁘게 말하면 집단 연극 같은 것입니다. "어? 나는 우리집에서 이런 역할이었는데요?" 안 통하죠. 사회가 주는 대로 대체로는 역을 승인해야 하며, 마음에 안 들면 피나는 노력을 통해 지위를 향상시키고 역량과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거리에 나서거나 직장에서 어떠어떠한 직을 맡을 때, 대체로는 가면을 쓰고 훌륭히 연기들을 하는 게 우리들입니다. 이게 매치가 안 될 때, 즉 "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같은 아찔함이 들 때, 잘 극복 못하면 공황장애가 오기도 하는 거죠. 근데 어쩔 수 없어요. 그게 사회가 우리한테 부여한 미션이니 말입니다. 이게 싫은 사람은 시골로 가야 합니다.

저자는 "내적 이미지의 변화를 체험하면서 참자아를 발견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사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 어느 순간 오는 각성이 있습니다. "아, 이래야 나도 편하고 내 주변의 나와 협력하는 성원(상사, 동료, 부하), 나에게 월급을 주는 조직 전체가 편하구나." 그럴 때 외면의 이미지 메이킹도, 내가 거울을 보며 뭘 어떻게 세팅해야할지 각성이 옵니다. 이게 안 되는 사람은, 예컨대 이런 책이라든가 코칭을 받기라도 해야겠지요. 여튼 저자께서 강조하는 건, 그냥 겉모습을 위장, 변장하라는 게 아닙니다. "내적 참자아의 발견"이 그렇게나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 단계를 거쳐 외적 이미지까지 변화되면, 그 다음부터는 타인과의 관계가 원활해집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 부분을 너무 어려워해서 주저앉는 이들도 간혹 보이는데, 이건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본인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대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까짓것 다른 사람 놀이 한 번 해 본다, 이렇게 여기고 대범하게 상황을 즐기는 거죠. 그래서 타인의 인정을 받고 수중에 예산도 넉넉해지면, 부처님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제법무아라고요 ㅎㅎ. 이제 바뀐 자아가, 종전의 어린 나를 보면서 흐뭇해할 겁니다. "이봐, 이렇게도 할 수 있었잖아."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픔과 두려움이, 결코 무엇인가를 영원히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이 이미지메이킹에 대한 편견을 깰 목적"이라고도 말합니다. 아니, 아무리 설령 겉모습만 가꾸는 이미지메이킹이라 한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스킬이 그쪽인데 그저 수용을 하고 본인이 그 룰에 맞춰 신나게 남들보다 앞서 달려나가야지, 달리 뭘 어쩌겠습니까? 이미지를 바꾸면 직장과 거리에서 활동 반경이 달라지며, 저자의 말씀대로 내적인 이미지까지 바꾸면 이미 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진짜 자신"이 됩니다. 사회 생활에 위기를 맞은 이라면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입니다. 나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중노년일수록 더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게 이미지죠. 개선의 여지도 더 많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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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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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전반에 만들어진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데몰리션 맨>이란 SF 영화를 보면, 가상의 한 미래에 사람들(스스로를 예전보다 훨씬 문명화했다며 자긍심이 대단하죠)이 어떤 방식으로 성욕을 충족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잠시 나옵니다. 상대가 있긴 하고, 실물의 이성이긴 합니다. 다만 헤드셋을 쓰고 뇌파를 교환하다 한순간 만족을 느끼고 종료하는 방식인데, 과거에서 온 주인공 스파르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동시에 이를 지켜 보는 우리가 지닌 관념대로) 설명을 해 줍니다. 상대인 젊은 여성은 "불결한 체액 교환 방식의 예전식 성교"에 대해 기겁하며, 그저 역사적 지식으로만 전해 들어 알고 있다고 답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몸으로 저지르고 동물적 쾌감을 느끼냐며 핀잔도 주죠.

<편의점 인간>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으며, 한국에서도 많은 호응을 얻어낸 무라타 사야카 씨의 이 신작은, 가족관계와 전통적 성 역할이 완전히 전복된, 우리의 상식으로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한 평행우주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평행우주에서도, 예컨대 "혹시 평행우주라는 게 있다면, 그 중 어느 한 곳에서는 여전히 남녀가 동물처럼 옷을 벗고 뒹굴다 일정 시점에서 체액을 사출하고 행위가 종료되는 방식으로 성을 즐기지 않을까?" 같은 말을 주고받습니다(그러므로, 작가는 이 세팅이 미래가 아닌 우리 시점의 어느 한 패럴렐임을 분명히 밝히는 태도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부부는 어디까지나 가족의 일원으로서 애정을 나누고 속 깊은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일 뿐입니다. 혹 성욕이 생기면 전혀 모르는 다른 이성을 찾아 해결하는데, 이 역시 "짐승과도 같은 교미" 자체가 불온시, 금기시되는 세상에서 아주 정상은 아닙니다. 여기서 정상인 방식은 "캐릭터와의 사랑"인데, 소설 속에서도 언급되지만 이는 성행위라기보다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에 가깝죠(우리의 관념대로라면 말입니다).

소설은 "근친상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사람들 사이에 확고히 자리잡은 세태를 보여 주며 독자에게 놀라움을 안깁니다. 아마네는 엄마, 아빠 사이의 육적 사랑의 결실(우리들 중 누가 그렇지 않겠습니까만)로 태어난 게 결정적 흉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행위가 이뤄질 수 있으며, 그 와중에 애까지 낳았대니?"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고전에 보면, 가정에 대한 정의를 "독점적으로 성을 향유하는 공동체(그리고 사회 성원의 재생산)"란 정의가 분명히 내려져 있습니다. 사실 저 역시 그 고전을 사회학 시간에 처음 접했을 때, "가정이란 꼭 그런 기능만 행하는 단위가 아니지 않나?"하며 뭔가 좀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마네는 가뜩이나 자신의 이름이 성의 없이 지어졌다며 불만이 많은데, 자신의 출생부터가 심상찮은 절차를 거쳤다는 사실에 더 상처를 받습니다(물론 그녀의 이름이 꽤 운치 있다며 [한자로 쓰면 雨音. 즉 "빗소리"지요. 두 자 다 훈독인 셈] 좋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작품 속 이 세계에서 부부란 어디까지나 동년배 이성 간의 정신적 결합으로서, 짐승 같은 욕구를 발동시키지 않고 서로를 다독이며 보살필 것을 순결한 의무로 삼는 관계입니다. 그런 명시적, 암묵적 서약을 깨고 어느날 남편이 성관계를 요구하며 아내에게 달려들기라도 한다? 사회적으로 맹렬한 지탄의 대상일 뿐 아니라, 아내는 엄청난 배신감과 분농를 정당히 표현하며 이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마네에게 그 모친은 자근자근 타이릅니다. "지금 남편이란 사람보다, 난 예전에 너한테 달려들었던 그 남자가 사윗감으로 더 마음에 들었다. 남편이 아내가 좋다며 안아 보자는 게 뭐 어때서 그러니? 예전에는 외간의 남정네, 혹은 여인과 정을 나누는 짓이 더 큰 비난과 흉을 입곤 했어."

서평 저 앞에서, 작가는 아마 의도적으로, 근미래 등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구태여 평행세계 하나를 골라 우리 앞에 제시했으리란 제 개인적 추측을 적었더랬습니다. 명백히 "피곤하고 암울하며 내키지 않는 현재"를 주제이자 배경으로 다룬 <편의점 인간>에서도 작가는 그런 경향을 뚜렷이 드러냈지만, 이 장편에서도 일견 독자에게 큰 놀라움과 위화감을 던지는 가치관과 시스템의 전면 전복상이 드러나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 독자가 불편해지는 진짜 이유라면, 소설 속의 각종 설정들이 사실은 우리가 실제로 머무는 "현재, 지금 여기"의 미묘한 풍자라는 점 때문이 아닐까요?

일본 사회에서 남성들은 "초식남"으로 변해 간다는 미디어의 "보도"가 오래 전부터 있었고, 이를 우려하거나 풍자하는 여러 문예도 발표되어 대중의 호응을 얻곤 했습니다. 여성은 그것이 타고난 본성이건, 사회적으로 학습 혹은 강요된 행위 산물이건, 대개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바로 다가가선 호감을 표현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뭐 요즘은 그런 분들도 간혹 만나곤 합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겠지만). 즉 대개는 초식녀들이란 뜻이죠. 반면 남성은 호르몬 분비 양태의 차이 때문에라도 일단은 적극적인 양상을 보이는 게 보통입니다. 이러던 게 남녀 역할이 점차 같은 지점으로 수렴하니, 이례적이고 걱정스럽다는 반응을 일각에서 자아낸 게 또한 당연하기도 합니다(뭐 잘됐다며 그 반대로 안심하는 태도 역시 얼마든지 발견되죠).

이 작중 세계에서는 그저 정적인 캐릭터와의 사랑(현재에는 낙오자, 부적응자들만의 행태로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정신병의 일종으로 진단되기까지 합니다만)이 누구에게나 권장될 뿐입니다. 다만 작중 등장인물들은, 여성에게도 남자와 같은 정도로 적극적인 구애 표현, 실천의 권리가 당연히 인정되었다는 태도입니다. 즉, 이 허구의 세계에서 야만, 폐습으로 지양되어야 할 풍습, 본능(으로조차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중에, "남녀 차별"은 비교적 색채가 옅은 편인 듯합니다. 순전히 제 생각인데, 일본에서는 정말로 전근대 사회에서조차 여성에게만 차별적으로 억압 발동된 시스템의 폐해가 (우리 한국이나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덜 심해서가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여성이 평등한 대접을 받았다는 게 아니라, 최소한 성적 측면에서 욕구의 발현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훨씬 엄혹한 감시의 대상은, 반도나 대륙의 형편에 비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아마네는 이런 사회의 규정과 제재 중, 일부는 그 규범의 정당성에 동의하면서도(예컨대 남편이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로서 정직히 느끼는 본능의 충족과 추구에 대해 왜 죄책감을 느껴가며 억눌러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또래 친구(남성)와 함께 책을 찾아가며, 성기의 결합을 어떤 식으로 이뤄야 최상의 기쁨이 찾아진다는 건지, 학문 연구나 이어가는품으로 열심히 "발견"하는 과정은 그래서 우습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그처럼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관행과 개념이, 언제나, 어느 환경에서나 그리 당연하게만 여길 건 아니었다는 새삼스러운 반성도 갖게 돕더군요.

특히 광고업계 종사자들이나 증권맨들이 룸이나 단란 갈 때 농담(아주 저속하지만)으로 하곤 하는 소리가, "야, 어떻게 가족하고 성관계를 하니?(저는 이런 농담을 아주 혐오하곤 했는데, 지금 읽은 이 책 내용과 직통으로 관련성을 띤 코드라서 도저히 인용 안 할 수 없는...)"라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그래서 여성들과 바람 피운단 소립니다). 근데 그런 저속한 농담을,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과 동기를 지닌 타국 작가의 작품 속에서, 다른 함의의 같은 워딩으로 만나게 될 줄은 전혀몰랐네요. 사실 우리 주변엔 이미 "관계 없는 부부"도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노년의 불화 때문에 "졸혼 상태"에 빠진 이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성관계 자체에 혐오감을 느껴 플라토닉한 상태로 가고 싶은 이들(젊은 커플들)의 현상을 주로 가리키는 거죠. 또, 그 원인이 사회적 부적응이든 뭐든 간에, 자신만의 세상에서 "캐릭터 성애"에만 빠져드는 고립형 인간도, 최소한 일본에서는 무시 못 할 표본집단을 이뤄가는 게 현실입니다.

성과 육욕이 사라져가는 세상, 또한 이를 자발적으로 불결하다며 멀리하는 대중의 동의를 얻어 관습과 본능이 바뀐 세상은, 아마 전작 <편의점 인간>과는 달리 우리 한국 독자들 사이에 큰 공감을 얻지는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제가 느끼기로, 우리 주변의 일부(솔직히 대다수)는, 여전히, 자신 개인의 여건이 허락하건 말건, 열렬히 바라고 추구하고 틈만 노리다 범죄적 실행에까지 옮기는 한심한 행진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까짓것 깨끗이 포기하고 나니, 뭐하러 그 한심한 원시적 충동에 그리 끌려다녔는지 모르겠다"며 쿨하게 말들을 쏟아내는 이 픽션 중의 풍속도가, 아주 생경하게 들리지만은 또 않습니다. 그 역시 가능한 경우의 수 중 하나로, 인간 진화의 경로가 택할 수 있는 방식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저는, 전통적 방식(그러나 우리에게는 존재의 불가결 양상이자 모두스 비벤디)을 두고 "비위생적"이라며 경멸하는 그들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체액 교환은 어느 관점에서 봐도 비위생적인 게 맞으며, 생존에 미세하게나마 불리하다는 이유에서 진화와 친하지 않은 행태입니다.

성욕과 성행위라는 큰 쾌락을 포기한 후, 인류는 그럼 어디서 그 대체품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쾌감의 강도가, 생산되는 정자의 경쟁력과 품질에 모종의 영향을 준다고는 생각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인공 수정은 새 성원 충원을 위한 능률적인 방식이긴 하나, 어쩌면 그런 식으로 인간이란 종은 생존을 위한 활력을 잃어가고, 품위 있고 고상한 도태 과정을 완수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작품 중에 언급되는 "최후의 아담과 이브"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상실하는 비극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가장 인간다워지는 순간에 사멸해버리는 인간 고유의 개성. 이는 결말에 이르러 현실화하는 "남성 임신(똑같이 10개월을 채웁니다)"의 등장으로, 전복을 통해 맹렬히 희구되는 동물적 본능과 번식욕을 우리 독자 앞에 내세움으로써, 과연 본능이 무엇이고 그에 대한 우리의 합의나 확신은 얼마나 단단한지 근본의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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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박스 - 컨테이너는 어떻게 세계 경제를 바꾸었는가
마크 레빈슨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당연한 듯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두꺼운 책 <더 박스>는 재미있고 생생한 묘사와 설명, 그리고 경제와 경제학 상의 중요 이슈와 의문을 규명한 재치와 통찰로, 세계적 화제를 모은 경영 논픽션입니다. 개정완역본의 한국어판에만 실린 저자 서문에는, 어느 외국 기자의 아티클로부터 인용하여, "폐소공포증에 걸릴 것만 같은 부산의 어느 도로에서 해안을 내다보아도 도대체 바다가 보이질 않는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블록처럼 몇 층으로 쌓인 컨테이너들이 시야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재미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폐소공포증" 운운은 그리 달가운 표현은 아니지만, 실제 부산의 끔찍하게 열악한 도로망 사정을 감안할 때 실감나는 지적이긴 합니다. 그리고 겹겹이 진을 친 컨테이너 야적 환경이 해안선 감상을 방해한다는 말도 마치 사진처럼 정확합니다.

이 책의 저자 마크(Marc) 레빈슨 교수(전직 이코노미스트 금융 담당 편집자)는 "컨테니어 운송이 그리 당연하거나 자연스럽지만은 않았던 시대"를 실제로 살아 봤을 만큼 나이 지긋하신 분입니다. 광안리나 해운대 등 주거지구 쪽에선 그리 자주 눈에 띄는 광경은 아니지만, 어쩌다 집 근처를 벗어나 서쪽으로 이동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게 거대한 컨테이너들의 야적 상태였습니다. 어린 눈에는 그게 흉물 이상으로 비춰지질 않았는데,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부산이 뉴욕이나 함부르크 등 유수의 무역항을 제치고 세계의 으뜸 항만 중 하나로 우뚝 서고, 나아가 한국이 굴지의 무역 대국으로 올라서게 된 건,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이 컨테이너의 발명 덕분이었다"는 거죠. 그저 당연할 뿐 아니라, "시시하고 흉하게까지 보였던" 것이, 사실은 "무역대국, 혹은 일류 항만으로 성장하기에 근본적 한계(거대 시장인 북미와 서유럽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입지 조건 때문)를 지녔던 도시와 국가"를 부강하게 키워 준 은인이었던 셈입니다.

컨테이너 운송 시스템의 고마움을 알려면, "컨테이너 이전에는 과연 무엇으로 해상 운송을 했을까"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책은 챕터 하나를 할애해서, 이른바 "브레이크 벌크 방식"으로 통칭되는(제 생각에는 이 역시 retronym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즉, 컨테이너 방식이 출현하고 나서야 종전 시스템을 그리 부르게 된 거죠. 마치 스마트폰- 피처폰의 관계처럼요), 불과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각국 무역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매우 비싸고 더럽고 혐오스러우며 범죄적이기까지 했던" 시스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1장을 보면, 불과 반 세기 전만 해도 세상이 이처럼이나 불편하고, 안심할 수 없는 곳이었음을 알고 경악하게 됩니다.

어떤 나라도 자급자족으로 모든 경제적 수요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부족한 물자는 외국에서 들여 와야 생활이 곤란해지지 않습니다. 한편, 같은 나라 안이라고 해도 특정 지역에 모든 물자가 고루 공급되거나 산출될 수는 없고, 다른 멀리 떨어진 고장에서 물산을 사 와야 하는 게 일반적이죠. 그러자면 항구를 통해, 원격지에서 누군가가 보낸(판매자일 수도 있고, 친족이나 지인이 선의로 부쳐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품을 들여 오는 게 필수입니다. 헌데, 그 운송비가 막대하여 물건 값보다 더 비싸게 치이거나, 운송 과정이 엉망으로 관리되어 분실, 도난이 일상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세상에서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어려울 뿐 아니라, 평온한 개인의 일상마저 위협 받을 수 있습니다.

부두 노동자들이 운송품을 험하게 다루거나, 아예 포장을 뜯고 물건을 훔치거나 (음식, 주류의 경우) 마구 소비하는 건 (앞서 말했듯) 불과 반 세기 전만 해도 매우 흔한 행태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건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나빠서 그를 보상, 보전"한다는 게 명분이었다고 하니 기가 차죠. 운송비가 치솟는 건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불법 파업 등 실력행사로 인한 임금 인상 뿐 아니라, 업종의 현실에 걸맞지 않은 2교대 근무가 만연하는 등(비번일 때는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근처 술집에 가서 고주망태가 됨) 임금이 노동생산성을 지나치게 초과했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애써 생산된 부가가치의 상당부분이, 세금도 안 내는 매춘부, 혹은 뚜쟁이나 포주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뿐이라면 전체 경제 성장에 이로운 영향을 줄 리가 없죠.

또한 기껏 생산된 혁신적 상품이, 단지 운송(비)의 제약 때문에 소비자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되질 못한다면, 전체 경제가 활력을 얻고 살아나는 효과가 지속될 리 만무합니다. 저자는 정통파 경제학자답게, 수백 년 전 고전파 경제학자 리카도의 말을 인용하며, "운송비 0의 세계가 본디 이상적인 자유무역 모델의 큰 전제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운송비가 전체 원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구조에선 시장 경제의 혜택을 모든 경제 주체가 누리기 어렵다는 점을 일찍부터 간파한 소치라는 거죠. 이처럼 이 책은 정통 경제학자의 시선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나 일반 논픽션 작가의 책과는 달리 "학문적 바탕"이 탄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학부생 경제학도가 시선을 넓히기 위해 부교재로 읽기 알맞은 책인 이유입니다.

무역 일 처음 하시는 분들(신입사원)이 어려워하는 게, 대체 "브레이크 벌크" 같은 용어의 뜻이 헷갈린다는 겁니다. 무역용어(혹은 영어)라는 게 말만 책에서 배워 알 수가 없고, 시스템 전체를 파악하는 눈이 길러져야 애매모호한 개념들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습니다. "브레이크 벌크"에서 포인트는 "벌크"가 아니라, "브레이크"입니다. 화물이 통할하여 한 단위로 관리되는 게 아니라, 화물 하나하나마다 포장이 따로이며 운송자가 적재와 관리에 "개별" 노력을 기울여야 하죠. 뿐만 아니라 육상 운송, 항만 적재, 선적, 이송, 하역 등이 다 개별(수동) 과정을 거친 후에야 제 임자 손에 들어갑니다. 한마디로, "자동화", "연속성", "표준화"가 결여된 성질이 저 "브레이크"라는 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 재래식 브레이크 벌크 시스템으로는 국제 무역에서 수지를 도저히 맞출 수 없다는 게 이미 1950년대부터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바였다고 책에는 나옵니다. 이 오래된 장애, 그러나 누구도 타개할 생각을 못 했던 애로사항을 두고, 말콤 맥닐이라는 어느 트럭 운송업자가 처음으로 "까짓것 어디 다 갈아엎어보자"는 야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책에서도 지적하듯 본디 이 사람은 해운 운송에 대해 문외한, 국외자나 다름없었는데도 이런 "엄청난" 업적을 이뤄낸 거죠.

이 책은 "컨테이너 박스 시스템"의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운송업의 거인, 원가 절감의 혁신가" 말콤 맥닐의 평전도 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디 영세한 트럭 회사 사장에 불과했고, 어차피 제살깎아먹기가 고작인 육상 운송(도로 운송이나 철도 운송 분야 모두)에서 경쟁 자제, 담합 같은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천재적인 아이디어와 수완으로 업황을 재편했습니다. 신규 노선 면허가 나지 않으면? 기존 업자한테 사들이면 됩니다. 트럭이 부족하면? 유휴 자원을 가진 이들에게 임차(책에는 임대라고 되어 있습니다만...)하면 되죠. 비싼 값을 주고 차를 지입해 봐야 남는 게 없다면? 이 당시 미국 정부는 제대군인 지원책의 일환으로, 저리 융자(혹은 보조금 지급)를 통해 트럭을 한 대씩 구입하게 해서 생계를 잇게 권했다고 합니다. 맥닐은 바로 이거다 싶어, 싼 값으로 트럭을 들인 제대군인들을 대거 채용, 시설 투자 문제를 해결했다는 거죠.

뿐만 아니라 그는 연료 소모를 최소로 줄이는 트럭 개조에도 관심을 쏟았고, 한 번 노선을 달리고 빈 차로 돌아오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각종 운송 패턴의 실사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같은 노선을 달려도 원가를 최소로 줄이는 방식을 개별 운전자에게 교육시켰고, 이들을 모범 운전자로 만든 후 후배들에게 그 방식 그대로를 전수시키는 인센티브를 마련했죠. 그의 경영 방식을 보면 경영학 각론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교의의 가장 모범적인 실전 응용이나 다름 없습니다.

육상 운송을 제패한 그가 다음에 눈독을 들인 건, 매번 느려 터지고 의욕과 활기가 없고 비리와 비효율은 몽땅 다 갖춘 듯한 항만 운송 방식이었습니다. 이 영역에서 엄청난 원가가 발생하는 이상, 어떤 매력적인 상품도 한번 물을 건너면(잘 건너기나 하면 그나마 다행이죠) 다른 시장(외국)에서 도대체 팔릴 가망이 없습니다. 맥닐이 꿈꾼 방식은, 육상에서 표준화한 "상자, 박스"에 실린 상품들이, 항만에서도 그대로 기계가 번쩍 들었다가 배 안에 차곡차곡 사뿐히 올려 놓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손을 번잡하게 거칠 것도 없고, 무한대에 가까운 노동과 정성도 발휘될 필요 없으며, 혐오스러운 절도범의 손길이 장난을 칠 가능성도 최소로 줄어드는데다, 포장과 운송이 튼튼하기까지 한 방식, 상상력이 풍부하고 도전 정신이 강한 그의 머리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이었습니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 항만 당국, 운송 회사 모두가 만족할 만한 시스템이었으나, 발전을 거부하고 기존 방식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세력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전문가라는 이들도 "컨테이너 방식이 기존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을 장담하는 풍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어떤 항구 도시는 많은 돈을 들여, 재래식 운송에 필요한 인프라를 새로 대대적으로 건설하기까지 했으니, 판이하게 바뀐 미래가 코 앞에 닥쳤는데도 애써 현실에 눈을 감는 인간의 둔감함이란 이 지경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맥닐이 대세를 타고 대박을 친 데에는, 당시 막 기하급수적 성장을 일궈 나가던 일본에서 대세를 바르게 내다보고, 신식 컨테이너 항만을 대거 건설했던 기막힌 운수도 작용했습니다.

맥닐의 방식이 마냥 옳았던 건 아닙니다. 앞서 "없으면 빌리면 된다"는 게 그의 수완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는 차입 경영의 대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엄격한 기준으로는 아찔할 만큼, 뭔가 전망이 보이면 바로 가진 전부를 다 쏟아붓는, 소위 "분산 투자의 원칙" 따위는 정면으로 무시하는 과감한 행보와 결단이 그의 특징이었습니다. 이것만큼은 경제/경영 교과서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거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고 털어 놓기도 했으며, 우리의 예를 보면 실제 이병철씨 같은 인물이 말년에 그처럼 반도체에 올인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삼성은 없었을 겁니다. 그럼 우리도 이런 방식을 따라해야 하느냐? 그건 또 아니죠. 맥닐도 위험할 때에는 과감히, 그간 애써 가꿔 온 사업을 팔아치웠으며, 차입도 자제했습니다. 무작정 차입 곡예만 벌이다 결국 파멸을 맛본 예로는 김우중 회장 같은 분이 있죠. 그래서 언제 "고"를 외치며, 언제 "스테이"를 할지가 어려운 겁니다. 이걸 일일이 촉으로 맞히는 사람은 진짜 하늘이 낸 거고요.

컨테이너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산업 번영과 무역 활황은 없었을 것이다? 대체 그 투박한 직육면체 상자가 뭔데 말입니다. 이 컨테이너가 지금 이런 표준화한 모양이 되기까지는, 역시 맥닐 등 많은 선구자들의 시행 착오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맷슨 내비게이션(현 Matson, Inc.)은 맥닐의 회사와 함께 유력한 경쟁자였던 굴지의 업체였는데, 책에서는 두 업체의 상반된 경영 스타일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습니다. 맷슨은 OR(작전 연구. 혹은 경영수학이라고 번역되는)의 창시자 격인 분이 경영에 합류하는 등 이지적이고 우아한 방식을 추구했는가 하면, 맥닐 쪽은 창업자의 개성처럼 밑바닥부터 일단 부딪혀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란 거죠. 저자는 도요타의 그 유명한 JIT 방식도 이 컨테이너의 발명이 없었더라면, 선적까지 무한정 기다리며 재고비용을 소진하는 등의 한계 때문에 출현하지 못했을 거라고 합니다. 싱가포르 역시 국제 무역항으로서 오늘날처럼 번영하는 위상이 아니었다고도 하고요.

요 몇 달 전 한진해운의 파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해운 산업의 엄청난 리스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에도 잘 나오듯, 컨테이너 운송 방식이 정착하고 나서도 마냥 해운회사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건 아닙니다. 일단, 기존의 방식은 해운 경기가 불황이다 싶으면 노동자를 정리해고한 후 고정비 지출을 줄이면 됩니다. 그러나 이 현대식 자동화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거액의 시설 임차료나 유지관리비는 일감이 있든 없든 지불해야 하며 전혀 융통성이 없습니다. 신문기사에서 왜 "해운업은 주기적으로 엄청난 위기가 찾아오며, 이 위기를 잘 넘긴 곳만 다음에 기회를 맞이한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분들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 답이 그대로 나옵니다. 바로 컨테이너 시스템이 몰고 온 빛과 그림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역과 해운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우리들이, 대체 무엇이 오늘의 편익을 가져다 주었는지 곰곰 진지하게 생각하게 도와 줄, 흥미로운 "역사책이자 전기"입니다. 결코, 당연한 게 당연하지만은 않았다는 진리, 박스가 인간에게 깨우치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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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립 - 2022 학교도서관저널 추천도서 에프 영 어덜트 컬렉션
웬들린 밴 드라닌 지음, 김율희 옮김 / F(에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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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애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소년 브라이스의 할아버지(외조부입니다)가, 브라이스의 깊고 푸른 눈, 환한 미소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중인, 같은 학교 친구 소녀 줄리(애나) 베이커에게 들려 주는 말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평소에 말씀도 잘 하고, 유쾌하며, 여러 면으로 매력이 넘치는 분인데, 이상하게도 브라이스(와 그의 가족) 앞에서는 그저 엄격하고 과묵한 모습만 드러내 왔습니다. 그 이유가 뭐였을까요? 할아버지는 이런 말도 합니다.

"걔가 제 아버지도 많이 닮았지."

할아버지에게는 릭 로스키(자신의 사위이자 소년 브라이스의 아버지)가 영 눈에 차지 않나 봅니다. 이런 던컨 노인이, 줄리애나 베이커가 자신이 아끼던 플라타너스의 벌목(땅 주인이 소유권에 기해 적법히 행사하는 조치)을 막으려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신문(지역 저널이겠죠) 기사를 읽고, 이 소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브라이스는 이 외할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브라이스가 다소 서운한 게 있다면, 외할아버지 역시 자신을 알려 들지 않아 보인다는 거죠. 그러던 분이 고작 "그 줄리라는 애가 누구래니?"를 묻기 위해 처음으로 자신과 친해지려 들었다는 게 더 서운합니다. 허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습니다. 브라이스는 나이가 아직 어린 탓도 있지만, 매사를 피상적으로 대하고 현재의 풍족한 상황에 만족할 뿐인, 다소 어리석은 남자애라서이죠. 반면 브라이스의 친누나 리네타는, 생각 없는 이 남동생이 싫고 아빠와 엄마(아빠만큼은 아니지만)와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소설 후반부에서야 잘 드러납니다만 이 리네타는 가난한 베이커 씨네 쌍둥이(나중에 뮤지션이 되고 싶은)를 좋아하나 봅니다.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없는 열정, 정직함, 재능, 생의 바른 방향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능력 등을 부러워해서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실상 줄리라고 봐야겠습니다만, 소설은 무슨 까닭인지(아니, 이유는 우리가 다 알고 있죠) 소년 브라이스와 소녀 줄리의 시점이 매 챕터마다 교차되며 전개됩니다. 같은 사건인데 먼저 브라이스(이 점도 우리 독자들이 눈여겨 봐야겠습니다. 왜 브라이스가 먼저인지)의 시점으로 사건이 묘사되고, 그 다음은 같은 일을 두고 줄리 버전으로 설명하는 식입니다. 처음 브라이스가 본 줄리는, 잘생긴 자신에게 쓸데없이 스토커처럼 들러붙어 말을 거는 "수다스러운" 여자애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멍청한 브라이스의 속은 신경도 안 쓰고, 줄리는 자신에게 발표 대회 그랑프리를 안겨다 준 "닭 사육"에 온갖 정성을 다 쏟은 후, 시가 100불 상당의(ㅎㅎ) 계란을 매번 브라이스에게 갖다 줍니다. 베이커씨네 뒤뜰이 아주 지저분하다는 걸 알게 된 브라이스는 가뜩이나 성가시고 못생긴 줄리의 계란을 쓰레기통에 족족 버리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줄리는 (야무지고 당찬 성격인데도) 너무나 마음이 아파 브라이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후 자리를 뜹니다.

처음에 저는 줄리가 플라타너스 위에 올라가는 걸 보고, 공부는 못 하고 반사회성만 강한 애인가보다 짐작했는데, 그렇지 않고 (저 대회에서 다양한 미디어를 손수 제작하여 빼어난 PT를 성공시킨 거만 봐도 알 수있듯) 머리가 좋고 영리한 아이더군요. 소설 후반부에, 로스키 씨 집에서 열린 정찬 모임에서도, 어른들과 "영구 기관"에 대한 토론을 거침없이 이어갈 정도인 그 지식 수준만 봐도 알 수 있죠(물론 아직 "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질문[매우 적절하긴 했으나]을 던저야 하는 단계이긴 합니다만). 브라이스는 머리가 나쁘고 이해 수준이 떨어져 이런 대화에 단 한 마디도 거들지 못합니다. 그가 보기에는, 할아버지 던컨이나 줄리나 다 "수다스러운 인간"의 범주에 들어갈 뿐입니다. 어떤 바보도 다 자기 수준에 맞춰 판단하기 마련이죠.

이런 브라이스가 바뀌기 시작한 건, 뭔가 듬직하고 "완성되어 보이는" 던컨 씨(즉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신문을 가리키며 "겉모습 밑에 가려진 내면을 보라"고 말한 후부터입니다. 그 후 계란 사건이 터지고, 베이커 씨(줄리의 아빠)에 나란히 선 자신의 부친(릭 로스키)의 초라한(분명 손꼽히는 미남자인데도)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 뭔가 근본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음을 자각하고 나선, 이제 줄리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반면 줄리는 계란 사건 후, 이 브라이스가 생긴 것만 멀쩡할 뿐 많이 모자란 애라는 걸 깨닫게 되죠(이후에, 개럿 등 질 나쁜 애들과 브라이스가 함께 모여 자신의 장애인 삼촌을 험담하는 것도 엿듣게 됩니다). 던컨 씨도 그런 쪽으로 말했고, 엄마한테서 "20년 만에 남편의 참모습을 엿보고 매번 싸운다"는 팻시 로스키 여사(즉 브라이스의 엄마)의 말을 전해 들은 후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난 로스키 아줌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곧, 브라이스 같이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애와 사랑에 빠져 이후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팻시 로스키 여사는 한편, 남편이 느닷 비열하고 찌질한 추측성 험담을 마구잡이로 내뱉는 태도에 충격을 받습니다.

"걔들이 돈이 어디서 나서 데모음반까지 만들었겠어? 분명 마약 같은 걸 팔았겠지."

사실 릭 로스키 씨가 충격을 받은 건, 자기 상식이나 기대에 맞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과거의 좌절된 자신의 꿈, 즉 음악가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던 기억이 되살아나서죠. 당시 그는 여건이 허락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적당히 자위하며 넘겼으나, 이번에 베이커 씨네 쌍둥이의 모습을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자신은 첫째 재능이 전혀 없고, 둘째 꿈을 이어가기 위한 진지한 열정도 없었으며, 셋째 인생의 각종 어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항상 적당한 도피와 외면, 왜곡으로 때웠다는 자책과 자괴가 밀려왔기 때문이죠. 이제 그는 고통스럽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된 꼴입니다. 그러니 애먼 아이들한테 "마약상"이란 정신 나간 누명을 씌워야 직성이 풀렸겠고, 그 부인 팻시는 이 순간 남편의 비열한 인격을 눈치채게 된 겁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 어리석음을 남 탓으로 언제나 치환하고 보는 열등 분자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마지막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소년 브라이스가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같은 전철(즉 아빠 릭)을 밟지 않기 위한 발버둥에 나섰다는 겁니다. 그 방법이 바로, "알고 보니 매력덩어리"였던 추녀 줄리와 사랑에 빠지는 거죠(여기서, 진정 성장이 필요한 브라이스 입장에서 "성장담"이 본격 펼쳐질 걸로, 소설에서 생략되고 만 후일담[언제 나오려나요?]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습니다). 허나 줄리가, 이제 만정이 떨어지다시피한 브라이스를 다시 받아줄지는 의문입니다. 여튼 브라이스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줄리 같은 당찬 애를 매혹시킬 수 있었던 잘생긴 용모를 갖추긴 했으니 말입니다. 이도저도 아무것도 안되는, 그저 속물이기만 한 다른 인생은 어떻게 해야 답이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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