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 100 IDEAS 시리즈 8
짐 볼턴 지음, 홍석윤 옮김, 장병탁 감수 / 시드포스트(SEEDPOST)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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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입니다. 책의 내용과 형식상 아름다움이 독자를 매료시키기에, 책의 주제인 "웹"까지 덩달아 아름다워 보이게 만든다고나 할까요? 일찌감치 특급 엔지니어, 분석가들은 "인터넷이란 말부터가 낡은 어휘가 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는데, 현재 웹은 너무도 우리의 일상에 깊이 파고들어 그저 당연한 공기나 가재도구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해서,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란 여간해선 어려운데, 당연한 게 결코 당연하지만은 않았다는 진리를 우리는 여기서도 실감하게 됩니다. 웹은 초기의 그 어설픈 걸음마를 딛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동시에 대견하기까지 한 녀석입니다.

"인터넷이 인쇄기의 디지털 대체물이라면, 웹은 이동식 활자다." 이 책 p57에 나오는 저자 짐 볼턴의 말입니다. 바로 뒤에 나오지만 그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에 따른 기독교 성경의 배포를 빗대어 이 "사건"을 감개어린 어조로 회고하는 겁니다. 구텐베르크의 쾌거, 지식과 권위 독점의 타도가 지금으로부터 근 육백 년 전 사람들이나 동시대의 목격이 가능했던 대단히 희귀한 변혁이기에, 이 저자의 벅찬 의미 규정이 새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 축복의 강도와 파급력을 실감케 한다고나 하겠습니다. 이 파트에 언급되는 CERN은 물론 우리가 아는(몇 년 전 힉스 입자의 발견으로 세계적 유명세를 탄) 그 연구소입니다. 그들 연구자들이 경과와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 만든 프로토콜(이 책 pp. 44~45도 참조하십시오)은, 이제 널리 세계인을 이롭게 하는 편리한 탐사선, 브라우저(여러 종류가 있고 아직도 주도권 경쟁 중입니다만)로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정보의 민주화를 통해 권력과 부의 재분배에까지 그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책은 모두 100가지의 테마를 다룹니다. 이 중에는 "사건"도 있고, 여러 사건과 연구를 통해 초기의 형태와 기능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엘리먼트"도 있으며, 도구도 있고 포맷도 있고 현상도 있고 트렌드도 있습니다. 범주의 층위가 다른 이런 여러 "주인공"들을, 자유자재로, 또 살뜰히 살펴 초대장을 보낸 후, 이렇게 예쁜 책 한 권에 큐레이션으로 마련한 저자, 역자, 출판사 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센스 있고 매력 넘치고 귀한 신분의 빈객들이 성장(盛裝)을 한 채 우아한 무도를 즐기는 모습은, 그냥 구경만 해도 뿌듯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이 책은, 그 무도회를 구경하는 옵저버(우리 독자들)까지도 충분히 배려한 진행까지 마련합니다. 어쩌면 주(主)와 빈(賓)이 하나가 된, 무아지경의 놀이터가 바로 웹이고 인터넷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와이파이는 처음에 와이브로, 와이맥스 등과 헷갈리곤 하던 통신 기술입니다. 뒤의 둘은 현재 거의 잊혀지다시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만, 와이파이 역시 그 태반이 된 시초 기술이 탄생한지는 의외로 꽤 오래되었음을 이 책은 어느 미녀의 흑백 사진을 통해 독자에게 의미심장하게 상기시킵니다. p68 사진의 주인공은 헤디 라마르(이 책의 표기로는 "라마"인데, 우리나라 나이드신 영화팬들도 그리 알고 있을 겁니다), 1940년대 후반 성경 소재 에픽 걸작으로 꼽히는 <삼손과 데릴라>에서 완벽히 원형 심상을 구현한 그 전설적인 여배우입니다.

치렁치렁 곱슬곱슬한 흑발 때문에 누구 눈에도 유대 혈통이 드러나는 외모인 그녀는, 합스부르크 치세의 번영한 빈(Wien)에 오랜 세월 머물러 살았던 풍족한 가문의 소생이었습니다만, 흥미롭게도 종교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케이스입니다(이런 경우가 꽤 많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분이 두뇌까지 총명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데, 빼어난 공학자의 자질까지 겸비했던 그녀는 오늘날 와이파이 활용에 핵심적으로 쓰이는, "주파수를 건너 뛸 수 있는 무선 통신"의 아이디어를 무심히 몸매 관리 비법에 대한 수다 끝에 거론했고, 이것이 해당 기술의 특허가 그녀 이름으로 공동 등록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창시자라고까지 치켜세우기엔 다소의 무리가 따르기도 하지만, 여튼 순간 번득이는 영감을 구체적인 창의로 변환시키는 데 능한 그들 민족 고유의 개성이 확인되는 또하나의 대목이기도 합니다.

간단한 텍스트를 활용한 기술에 불과한데 웹을 돌아다닌 모든 로그를 자그마한 덩치에 모두 간직, 기억하는 쿠키, 때로 범죄자의 구린 행적을 폭로하는 결정적 증인 구실도 하는 이 귀여운 이름을 가진 녀석도, 여튼 웹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속 편히 망망대해를 유영하는 우리의 편의에 크게 기여합니다. 우리가 사우나나 여객선, 항구, 공항, 역(과거)에서 사용하곤 했던 물품표 중 증거증권이란 게 있는데, 본디 이것은 발행자(수탁인)과 수령자(위탁인) 사이에서만 오가야 정상이죠. 쿠키도 초창기에 비슷한 원리였던지라, 오늘날 우리 상식으로는 놀랍지만 1997년 당시 해당 태스크 포스는 제3자 발행 쿠키가 금지되어야 한다고 권고했다는군요. 이건 비유를 하자면, 유가증권 중 예컨대 약속어음 같은 것에서 배서, 인수를 배제하자는 주장과 같습니다. 많은 폐해와 부작용, 범죄를 예방할 수 있겠지만, 대신 거래에 큰 불편이 따르겠죠. 우리도 암묵적으로 제3자 쿠키를 매번 내 컴퓨터에 앉히면서 웹을 서핑하는 겁니다. 다만 이용자가, 주기적으로 쿠키를 삭제(브라우저에 따라 이름을 확인해 가면서 지울 수 있게 옵션도 마련합니다)해 주면서 표적 광고(지금도 당하고 있습니다)를 피하는 수 말고는 없죠.

이 책에 실린 100가지 아이디어 중 "하이퍼"라는 접두어를 단 아티클이 두 꼭지가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카드입니다. 전자는 오늘의 웹을 만든 아버지들이 그저 기능과 효용에 몰두하다 우연히 이룬 성취가 결코 아님을 증명하듯, 창의적이고 영민한 정신이 언제나 바른 방향으로 몰입하고 사로잡히는 주제가 "인문적 자유"임을 잘 확인시켜 줍니다. 올바른 인문의 상상이, 기술이건 자연과학이건 모든 의미 있는 발전을 추동하는 것입니다. 짐 볼턴의 감동적이고 유려한 문장을 이를 잘 표현합니다. 하이퍼카드는 글쎄요, 적당히 나이가 있지 않다면 떠올리기 힘든 프로그램 아닐까 싶은데요. 저자의 기술에 따르면 이 역시 건전한 네트워크, 올바른 소통을 꿈꾸던 정신들이 빚어낸 총아이나, 선(Sun) 같은 더 개방된 분위기에서 탄생했다면 대표 브라우저로 더 커나갔으리라며 아쉬움, "개탄"을 토로한다고 하네요. 여기서도 애플의 폐쇄성이 또 지적되는 셈인데, 그렇다 쳐도 어차피 MS의 끼워팔기 공세(이 책 꼭지 No. 22를 참조하십시오) 앞에 위축되지 않았을까요.

헉! p154를 보십시오. 이 책에는 아름다운 여배우 사진이 뜻밖에도 자주 게재되었군요. 저주받은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그러나 훗날 작가, 감독, 개발자, 과학자, 심지어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영혼에 영감을 준 <블레이드 러너>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큰 혼란을 느끼며 담배 한 모금으로 번민을 달래는 레이첼의 자태입니다. "너는 인간이냐 기계냐?" 이 물음을 인간이 컴을 향해 던지면 튜링 테스트 같은 거고, 기계가 (인간이 작성한) 메일에 대고 물으면 그건 바로 "캡차"입니다. 저자는 재치 있게도 이를 "역(逆) 튜링 테스트"로 규정하는데, 사실 5% 유의수준 이슈만큼이나 이 인위적 기준은 미심쩍고 막연하며, 과학에 속한 중 가장 비과학적 색채가 짙다고도 생각합니다. 무튼 기계와 인간이 어디서 감정적, 가치 판단 개입의 소통을 이루는지 살필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죠.

정성껏 꾸려진 모든 책의 공통점 중 하나는 충실한 인덱스입니다. 이 책 자체가 웹에 바치는 예쁘고 작은 인덱스인데, 그것도 부족해서 책 말미에 따로 사항 인덱스를 또 갖춰 놓았네요. 저런 인덱스 항목을 무엇무엇으로 잡았느냐에서 저자만의 가치, 컨셉, 지향이 또 드러나게 마련이죠. 오늘날의 성취와 자부가 있기까지 어떤 계단을 밟았을까를 벅차게 회고하는 작업은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과연 시드페이퍼에서 낼 법한 알차고 예쁜 책, 너무도 잘 읽었습니다. 책을 쓰신 분, 다듬으신 분 모두의 아름다운 마음이 오롯이 담겼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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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페이퍼 2017-10-27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시드페이퍼 출판사입니다. 먼저 이렇게 길고 정성스런 리뷰를 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이 책은 영국의 예술 전문 출판사 로런스킹에서 꾸준히 출간되며 많은 사랑을 받은 아이디어 100시리즈의 완결판으로 출판사내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출간한 책입니다. 그러나 분야가 웹이라는 점과 이전에 나왔던 영화, 광고, 그래픽디자인, 패션, 예술, 사진, 건축과는 살짝 다른 방향성을 담고 있어 어느때 내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던 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감사한 리뷰를 보니 마음이 더없이 따뜻해집니다. 저희 책을 읽어주시고 아껴주시는 독자분들을 위해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만들고, 많이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소중한 리뷰는 저희 블로그에 담아가 많은 분들께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포근한 금요일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시드페이퍼 드림
 
예쁜 여자들
카린 슬로터 지음, 전행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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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아줌마들이 티격태격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빅 리틀 라이즈)> 같은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조금만 말을 꺼내도 내용 누설이 될 것 같아 리뷰 쓰기가 조심스럽지만, 여튼 뒤로 가면 갈수록 추악하고도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고, 사건의 스케일도 엄청 커지는, 창작에 공을 많이 들인 뛰어난 소설 같았습니다. 재미있기는 한데 소재가 꽤 불편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줌마들이 티격태격하는 이야기 바로 직전에 굉장히 충격적인 인트로가 깔리긴 합니다. 갓 보호관찰에서 풀려난 멀쩡한 아주머니, 아직도 웬만한 젊은 남성에게 끈적한 시선을 충분히 모을 만한 미모를 간직한 분이, 바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술 두 잔 마신 후 같이 귀가합니다. 바람직하죠. 바에서 배우자를 만나는 게, 만약 배경이 한국이라면 그 빈도가 얼마나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집에 들어갈 게 아니라 으슥한 곳에서 간만에 기분 좀 내어 보자고 합의까지 보았다면? 역시 권태 때문에 서로의 체취만 멀리서 맡아도 진저리치는 실패한 부부보다야 훨씬 낫습니다. 나무랄 건 아닌데, 조심은 했어야 옳았습니다.

"조심을 안 한 피해자가 잘못이지!" 이게 아니라, 괜찮은 사람들이 공연히 쓰레기 같은 범죄자들의 밥이 된 결과가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지요. 피해자를 오히려 비난하고 드는 후진적인 풍토는 미국에서도 여전히 일각에서 살아는 있나 봅니다. 조금 뒤로 더 넘어간 후리디아가 동네 아는 분과 테니스 치다가 격분하여 반 고의로 부상을 입힌 에피소드에서 지나가듯 등장합니다. 피해자나 그 가족(피해자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합니다) 입장에서는 치가 떨리기에, 그런 반응이 나왔을 법도 합니다. 충분히 이해는 가는데, 우리 독자 입장에서는 리디아에게도 쉬이 동감을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너무 상처가 많은 분이고, 그런 못된 일을 겪기 전부터도 이미 그녀는 성격이 좀 불안정한 타입이었으며, 이후의 대처 방식도 그리 현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끔찍한 상처를 입었더라도, 자기 파괴가 답이 될 수는 없죠.

"조심을 안 한 게 잘못이야!" 글쎄요. 사람에 따라서는 정말 이런 말을 들어야 할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 남편 폴 스콧을 두고 하는 소립니다. 그렇게나 똑똑하고, 매사에 사려 깊은(다 읽고 나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세심히 분위기를 세팅해 가는 작가의 너무도 노련한 솜씨 때문에 이 정도는 독자도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왜 하필 그런 무모(미국은 치안이 불안하잖아요)한 충동에 이끌렸을까요? 평소의 그 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무장 강도, 성폭행범의 공격에 대응하여 그는 용감하게, 아내를 지키려 위험을 무릅쓰고, 놈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고 "죽습니다".

스릴러에서 드물지 않게 세팅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래도 독자의 마음이 덜 불편(어차피 픽션이니까요)한 결단을 취한 폴이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이거는 정말 중간까지 읽어가야 아는 건데) 폴은 그런 행동이 어울리는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위험도 잘 피해다니고(분위기나 기분은 다른 선택을 통해서도 낼 수 있죠), 혹 판단착오로 위험에 빠졌다 해도 자기 목숨을 걸고 아내를 구한다.... 폴에게는 안 어울리죠. 물론 우리는 폴이 진짜 그런 사람(용기 있는 순정파)이길, 혹은 노력을 통해 그런 사람으로 바뀌길 기대하며 책을 내처 읽어 나가게 되지만(이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입니다.

"폴! 우리를 실망시키지 마!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거라고! 당신은 할 수 있잖아!"), 사람 타고난 모양새란 게 그리 쉽게 휙휙 편할 대로 고쳐지는 게 아니죠. 이런 분들, 더 어려운 과업도 척척 해내는 능력자(ㅠㅠ)들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할 진짜 숙제는 내내 피해 다닙니다. 그래서 정상인 범주에 못 드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리 능숙히 조종하면서 왜 자신은 못 바꿉니까? 사이코패스가 비난 받아야 할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거지, 무슨 머리가 좋다느니 매력이 많다느니 이런 게 잘못이 아니죠. 많은 이들은 그저 시샘 때문에 이들을 비난할 뿐, 남을 속이고 중상모략해서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는 못된 심뽀는 거의 공유하다시피합니다. 매력도 없고 무능하면서도 멘탈만큼은 똑같이 타락한 건데, 비난을 할 자격이 없죠.

클레어는 아름다운 여인이고, 내내 허술한 수컷들이 자신의 매력에 홀려 빌빌대는 꼴을 어쩌면 다분히 가학적으로 즐기며 살아왔다고나 할, 그 나름 축복받은 인생이었습니다만, 역시 이기적일 뿐 아니라, 모든 동기가 말끔한 양심에서 우러나오지는 않는, 쉽게 동일시를 이루기는 좀 어려운 타입입니다. 그녀는 "죽은" 남편 폴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속였고, 내내 "훔쳐 보고" 있었으며,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나 자신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재미로 그토록 오랜 연극을 벌였다는 사실(이라고 일단 그녀는 판단합니다)에 치를 떨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어디로 도피하건 인터폴의 추적도 받을 만한(연방 형법 차원의 범죄임은 말할 것도 없고) 끔찍한 일에 연루(적어도)되었음도 눈치 채게 됩니다. 혹시 이 책을 읽는 남성 독자들은, "와 야동 숨기는 방법이 저런 게 다 있구나. 흠, 통화 추적 안 당하려면 쌧컴 쓰면 된다는 거지?" 같은 나쁜 교훈은 습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별 쓸모도 없고, 이미 그 정도는 파훼법이 다 알려져 있습니다. 괜히 주목이나 끌죠.

클레어와 그 언니 리디아가 그리 건강한 내면이 아니라는 점은 앞에서 말했습니다만, 이것도 그녀들의 어린 시절, 끔찍한 사건이 터져 집안 분위기가 줄곧 정상이 아니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를 해 줘야 합니다. 이런 논리를 잘못 확장하면, "상처 있는 사람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일종의 낙인 이론으로까지 부당한 일반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여튼 지난 18년 동안은 몰라도, 리디아나 클레어나 지금 이 대단히 불행하고 불쾌하며 당혹스러운 비극을 접하고서는, 매우 성숙한 처신을 하려 애쓰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작가는 분명히,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당신 같으면 못난(여러 이유에서) 언니를 그 오랜 불화의 시간을 딛고 화해하려 들겠는가?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온갖 추악한 진실을 정면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저 믿고 싶은 대로 편하고 믿고 말지 이제와서 불편한 진상을 수용, 소화할 자신이 생기겠는가? 차라리 루저인 언니를 마음대로 단죄하고 왜곡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클레어는 정말 용감합니다. 또, 그런 클레어를 바로 보고는 이제부터 다시 우애를 회복하여 감싸려 드는 리디아도 일단은 높이 평가를 해 줘야 하겠습니다(그러나 좀 더 읽어 보시고요). 소설은 숨겨진 미스테리의 진상이 하나 둘 밝혀지는 과정도 빼어나게 잘 쓰였습니다만, 이처럼 등장인물들의 내밀한 심리, 미칠 것 같은 갈등을 세심히, 적나라하게 들춰 내어 독자 앞에 드러내는 기법도 빼어났습니다. 어리석은 타입은 마음이 불편하면 무작정 남탓만 하고 들지,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 곪은 상처를 들여다 볼 생각을 않죠. 죄를 내가 뒤집어쓰라는 게 아니라, 남이든 나든 원인 소재를 정확히 알고 치료를 해야 "자신이 앞으로 안 아플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치를 모르고 취학전 아동처럼 무작정 눈에 먼저 띄는 타인에게 원인을 전가하며 큰 소리로 빽빽 우기는 이들을 보면, 하등 동물을 보는 양 딱해질 뿐입니다.

이 소설이 특히 재미있는 건("재미"라고 하면 좀 어폐가 있긴 합니다만), 모든 현재의 비극 그 배후를 캐고 들어가면 반드시 부모 대(代)에 그 원인이 싹트고 있다는 시사입니다. 내용 누설 우려 때문에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폴과 클레어 커플은 알고 보니 "부모 대에서부터" 달갑지 않은 연이 한 자락 얽혀 있더군요. 서브보컬처럼 간헐적으로 다른 톤을 빌려 들려 오는 "어느 분"의 목소리는, 계속 들어 보니 그 청자가 "그의 다른 딸"이었습니다. 이건 이유가 있더군요. 지척에서 달콤한 대화를 빙자하여 접근하고는, 바디 스내처처럼 상대의 내면으로부터 정보를 모조리 빼가는 무서운 인간 스캐너, 그 자의 본명이 후반부에 밝혀지고, 왜 하필 그들 부자(부자였다니!)가 다른 "부녀"를 주시하게(관음하게) 되었는지도 서서히 드러납니다.

[아래 내용은 읽지 마십시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중반쯤부터 낌새를 챘을 겁니다. 범죄의 징후가 보이면 사소한 가능성부터 일일이 의심하고 들어야 마땅한 경찰서장이, 왜 클레어에게만은 과도한 안심을 시키며(그 나름 둘러댄 근거가 치밀하기는 했습니다. 결국 그게 가짜였지만) 덩달아 독자에게까지 사태의 때이른 진정을 시도한 걸까요? 또, 그의 죽음이 페이크였다면 그런 연극의 공권력의 개입 없이 과연 가능했을까요? 시민의 공적 사망이 뒤집혀지는 전개라면, 작가가 바보거나 작품의 스케일이 엄청 커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 소설 작가는 엄청 똑똑한 분이라서, 소설은 정말 장난 아니게 파장을 불려 가며 독자를 빠져들게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진행을 그리 달가이 여기지 않습니다만 이 스릴러가 워낙 치밀한 준비를 거쳐 이뤄진 작업이라 흠을 잡기도 힘들더군요)

소설 중에도 두어 번 언급되지만(지하실부터 해서) 토머스 해리스의 전설적 장르소설 <양들의 침묵>에서 영향을 받은 바 큽니다. 특히 전지전능하다 할만큼 객체의 심리를 훤히 꿰고 천리 밖에서 조절하는, 지적이고 섬세한 정신병자 한니발 렉터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실감 나는 캐릭터(들)의 재현은 압권입니다. 뿐 아니라 이 소설은 "피해자" 스탠스의 여성들에 대해서도 실감과 박력, 독자적인 선명한 위상을 배분해 두어, 장르소설의 진화가 능력 있는 여성 작가의 손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잘 실증한다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진짜 취향은 아닌데, 완성도가 높고 재미가 풍부하단 건 분명히 확인해 줄 수 있습니다. 어설픈 피해의식에 가득한 싸이코패스물을 그간 너무 자주 봐 왔던 터라 이 장점은 더 두드러집니다.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은데 리뷰에서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 내용 누설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이고 미숙한 민폐가 참 꼴불견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같은 어리석음을 범할까 싶어서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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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 부국강병, 변법, 혁명의 파노라마
신동준 지음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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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중국 근대사의 거인 증국번의 생을 다룬 도서를 읽었습니다만 이 격동기를 산 여러 뛰어난 인물들을 한 권에 묶어 소개한 책이 혹시 없을까 해서 찾아보니 마침 신동준 박사님이 쓴 대중서가 한 권 보이더군요. 책에는 여덟 명의 인물이 다뤄졌는데, 활동 시기가 비슷하기도 하고 서로 얽혀들거나 치열하게 대립한 국면도 선명하기 때문에 책 한 권에 과연 다 커버될 만하다 싶었습니다. 새삼 책 표지로 돌아가 보니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가 제목입니다. 이 시기는 과연 "인물들의 삶"이 역사 전체로 그대로 수놓아지고 전사, 마이그레이션된 시기가 아닐까, 인물로 읽어야 제대로 읽혀지는 시기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임칙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편전쟁 당시 영국상인들의 파렴치한 물품을 모아 소각한, 강직한 청백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대세를 생각 않고 무모한 결단,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아 소탐대실하는 "그릇 작은 원칙주의자"를 비판도 하는데, 임칙서는 오히려 저 사건 때문에 그 원대한 비전과 현명한 통찰력, 박학다식하고 유연한 지성, 인품이 과소평가된 경우입니다. 책은 해당 사건에 대해, 그가 다른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한 후, 피치 못해 내린 정치적 결단이며, 참으로 매력적인 그의 자질과 개성에 대해 논급합니다. 만주족이 퇴조하고 한족 정통 지식인이 부상한 건 그의 현명한 처신이 유발한 결과였습니다. 구한말 이 땅에도 큰 반향을 부른 <해국도지>의 저자 위원도 그의 후배이며, 공양학의 태두 캉유웨이의 제자입니다.

증국번은 며칠 전 리뷰(와 책)에서도 자세히 언급된 주제 인물이고요. 신동준 저자께서는 오늘날 공사("회사"의 중국어)의 형태가, 이 증국번의 관독상판과 매우 흡사하다고 주장합니다. 증국번의, 시대를 앞서간 혜안에 대해서는 감탄하나, 물경 백 오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이런 반관반민 형태가 지배적인 중국의 신뢰 부재, 자율성 결여의 풍토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이 교차하네요.

증국번이 엄청난 지주 가문에서 나고 성장한 것과 달리, 좌종당은 아주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인생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시절 서세동점에 대항해 유일하게 국위 선양에 성공한 게 이 좌종당의 군사 원정이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죠. 야쿱 벡의 위구르 배후에는 특히 러시아가 도사렸는데, 여튼 이런 간접 대결에서 청이 국가 해체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기에 오늘날과 같은 영토의 판도가 유지되었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때 좌종당과 일합을 겨룬 야쿱 벡이 보다 유연한 자세로 동족 피지배층(동 투르키스탄 인들)을 대했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적 단합을 이뤄, 오늘날처럼 핍박 받는 소수 민족의 설움을 겪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과분의 위기라는 건 마치 오이가 나눠지듯 땅이 쪼개져 나라가 망하는 걸 뜻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풍자 카툰이 있는데 아래 이미지를 참조하십시오.


이홍장은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세계관을 가졌고, 위안스카이 등을 부리며 조선의 내정에도 깊숙이 간섭한 자입니다만, 여튼 중국의 위인은 일단 그의 고국인 중국의 이해를 먼저 염두에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죠. 저자께서는 "99년 조차" 조항을 두고 언젠가는 후손들이 땅을 찾으리라는 원대한 숙고의 산물이라고 평가하십니다만,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봅니다. 영국이 한심한 국위 쇠퇴를 겪지 않았다면, 또 야무진 등소평이 일처리를 그리 해내지 않았다면, 99년은 그저 현상으로 굳어 영원히 외국에 귀속되었을 겁니다. 또, 이홍장이 설령 영구 할양을 싸인해 줬다 해도, 힘을 갖춘 중국이 그걸 묵과하고 있었겠습니까? 다른 조약에 대해서도, 중국은 "이건 제국주의 시절에나 효력을 지니는 불평등조약"이라며 깡그리 무시합니다. 이홍장이 뭘 생각했건 그 은덕을 입어서 오늘의 재귀속이 이뤄진 건 전혀 아닙니다.

캉유웨이는 공양학파의 태두이며, <춘추공양전>에의 깊은 천착을 통해 중국형 부강론을 제기한 석학입니다. 논자에 따라선 출세지향적 언동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광서제는 그와 연합하여 서태후와 맞서려 했으나, 황제나 재상 모두 이 노회한 여걸에 대항하기는 역부족의 기량들이었죠. 캉유웨이는 조선에서도 그의 문명이 크게 알려진 정치-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당대의 명사였으나, 역시 한계도 뚜렷한 인물이었습니다.

양계초는 캉유웨이의 제자(대략 17년 정도 나이 차가 나죠)지만 어떻게 보면 그 스승의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 학문도 깊었지만 현실 참여나 경세의 수단도 더 노련했고요. 요즘 한국의 특정 정당 몇 군데에서 "자강론"이 자주 나오는데, 자강불식의 도그마를 당대에 크게 퍼뜨린 이가 바로 양계초입니다. 캉유웨이와 달리 민족주의 성향도 두드러졌죠. 그가 말하는 "다변"은 말 많다는 多辯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처신할 것을 강조한 취지입니다.

손문은 위안 스카이보다 몇 살 아래인데, 어린 시절부터 연줄을 잘 잡아 마른자리만 골라 앉은 그와 평생의 숙적으로 대립했죠.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무너졌지만 어디까지나 미완의 혁명이었는데, 군벌 실력자 위안 스카이의 무력에 기대었기 때문입니다. 허울뿐인 공화정은 끝내 무너지고 위안 스카이는 분별도 없이 황제정을 다시 부활하는데(이른바 복벽), 마치 후한말에 스스로 천자를 칭한 원술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성씨도 같고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은 생전에 뭔가 성취를 못 보고 다 실패로 끝난 도전들이었습니다. 엉뚱하게도, 학문적 각성이나 집안 배경도 부족하며 뭔가 인성도 덜 갖춰진 듯한 마오가 결국 천하통일- 외세 배격을 이뤄냈는데, 이는 세계 정세가 그리 돌아가다 우연히 귀착된 지점이 아닐까 봅니다. 인물로 역사를 보는 프레임을 만들지, 아니면 구조적 팩터 분석을 통해 인물을 재규정해야할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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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의 서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소설, 아주 길고 긴 만큼 사연이 풍성하기도 하지만 두 줄로 요약하면 이럴 것 같습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
"결국 주인공은 나야 나"

요즘 소설은 작위적으로 불행한 주인공을 만들어 내어, 삶이 순탄치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 진통제나 투여하듯 불건전한 처방을 내리는 수가 많습니다. 반면, 우리가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에서 그 발랄한 재주의 일면을 이미 맛 본 것처럼, 스위스인 조엘 디케르는 소설의 본령, 본연의 사명에 매우 충실한 작가입니다. 전하는 말들이 밝고 따스하며, 그렇다고 억지로 밝아지려고 발버둥치지 않는, 유쾌하면서도 현실감 있는 사연을 직조해 냅니다. 사연에 사연이 꼬리를 무는 것도 어쩌면 전통적인 이야기꾼들이 청중을 앞에 두고, 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며 그 예전부터 의존하던 방식에 가깝지요. 주인공들 역시, 세상을 향해 막무가내로 안기려 들거나, 반대로 투쟁의 시선으로 일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정은 인정대로 받고 싶되(솔직히 좀 속물이 아닐까 싶게), 아니다 싶을 때는 무모한 싸움을 서슴없이 걸죠. 다만 그 과정에 균형감각과 현실적인 지혜가 필요 합니다. 재능이 뛰어나되 이 순간적인 절제, 센스가 결여된 이들은, 바로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내 신중하고 관계 속에서의 현명함을 발휘하며 살아 온 이가, 단 한 번 한순간의 실수(절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로 모든 것을 잃고 말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부모가 반 팔자"라고도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법칙의 예외를 만드는 생이 너무도 많죠. 반면 성장기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거의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고 들어가지 않나 싶습니다. 성장기를 불행하게 보냈거나, 불건전한 영향만 가득 받고 자란 사람은 커서도 결국 실패자가 되거나, 망상만 가득한 채 허언과 허세로 가득한 연극(그 연극이 즐겁기나 하면 좋을 텐데) 같은 삶을 살게 되죠. 이런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극과 극입니다. 한순간 악몽("난 모든 관계로부터 버림 받았구나!")을 맞았다가, 자기 의지가 아닌 우연한 요행으로 "가짜 목표"가 손에 들어왔으니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얼마 안 가 자기 생의 실체가 눈 앞에 들어 오면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겁니다. 현실 도피가 답이 될 수는 없는데, 여튼 당장 감정의 지옥을 면했으니 억지로 기분을 띄우고 돌아다닙니다. 과거로부터 뭔가 배우는 바가 있으면 그 인생이 이처럼 단순반복의 땜질로 점철되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주인공 마커스("마키") 골드먼은 현재 베스트셀러 한 편을 성공적으로 시장에 띄워 놓아, 아직 젊은 나이에 모두의 선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비극적인 사건은 7년 전에(11년 후에) 벌어졌(진)다."란 문장이 하도 반복되기에, 이 사람 저 <미저리> 같은 데 나오는 중노년 은거 작가라도 되나 싶었지만 아직 꽤나 젊기에, 옆집에 사는 진짜 은퇴 노인(법학 교수)가 가끔 놀러 와서 체스도 두고 시비도 거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죠(거의 아들뻘이라서 무람없이 대하는 듯한....).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안 해도 젊다는 게 눈치채어지는 대목은, 여자 마음을 너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웃 노인 레오 교수가 혀를 찰 정도죠. 우리 독자가 잊지 말아야 할 건, 이 마커스는 이미 셀럽의 위상이라는 겁니다. 누구하고 썸을 타도 그 상대까지 다 셀럽이며, 웃기는 건 세상이 좁다고 어렸을 적 아주 진한 감정을 공유하기까지 했다네요. (나중에 나오지만 아는 누나 겸 과외선생 겸 동아리 겸 이웃 겸 좀 복잡합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인생이지만 우리는 1부(총 4부로 나뉘어졌습니다)가 다 끝나갈 때까지, 이 마키를 그저 루저인 줄 압니다. 과거를 회고하며 내내 징징거리고, 심지어 현재에도, 사춘기 시절부터 가장 아끼던 여인을 "막강한 위너"에게 선점당했으며, 대놓고 퇴짜 맞고 푸대접 받는 등 아주 깝깝한 인생이나 된 듯 우는 소리를 합니다. 그러니 독자들은 나중에 뒤통수 맞지 마시고(근데 이런 말이 스포일러일까요? 좀 우려되는군요), 마키의 신분과 처지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좀 해 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어떻다고, 과민성 대장증상이 갑자기 당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 눈높이를 잔뜩 낮춘 채, 1)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시샘하지 말고, 그렇다고 2) 터무니없는 헛물을 켜지도 말고, 3) 저처럼 나아져야지 하는 자극만 받고 자신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까요? 1)과 2)가 압도적으로 흔할망정, 3)의 예는 좀처럼 보기 드물 겁니다. 1부 내내 어린 소년, 영 애덜트 시기를 보내는 마키가 3)의 자세를 유지하는지는 우리 독자로서 알 수 없습니다. 1)과 2) 사이에서 끊임없이 위태한 줄타기를 하는 듯만 보이는데, 사실 우리는 1인칭 관찰자로 머무는 마키한테 시선도 안 줍니다. 무대를 압도하는 주인공은 힐렐과 우디이기 때문입니다.

힐렐은 그 부친(마키의 백부) 사울 골드만(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천재소년입니다. 우디는 그 힐렐과 서로 긴요한 도움을 주고받는, 골드만 씨의 "또다른 아들"이며, 운동신경이 빼어나고 모든 여성이 선망할 만한 건장한 체구를 지닌 위너입니다. 이런 멋진 아들(들)을 둔 골드만 씨 곁에는, 최고 평판을 얻은 의사인 아니타 여사가 그 아내로 머물며, 서로 순도 높은 교감과 사랑(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을 나눕니다. 골드만 씨는 의료기기 판매업으로 큰 돈을 번 부친 밑에서 순탄한 성장기를 보냈으며, 현재는 백전백승의 민완 변호사입니다. 이건 뭐 말도 안되는 사기 인생이죠. 적어도 우리에게 이 얘기를 들려 주는 마키는 그렇게 표현합니다. 마키는 이 가족을 그저 부러운 눈으로만 바라보는, 별 재능도 매력도 없고(적어도 스스로의 확신이 매우 부족한) 그저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평범한 아이겠고 말이죠.

비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은 성장기 내내 화려한 경력으로 자신의 십대를 장식하거나, 반대로 그 빼어난 재능이 타인(어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며 자초한 큰 시련에 부딪힙니다. 힣렐은 여튼 머리가 좋고 복잡한 사태를 간명히 파악하는 능력이 있으며, 언변이 무척 뛰어납니다. 반면, 체구가 매우 왜소하고 운동신경이 둔합니다. 이 힐렐을 미러링하듯 비슷한 약점을 가진 아이가 이웃 패트릭 씨의 아들 스콧인데, 다만 스콧은 힐렐처럼 빼어난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면서 난치병까지 앓고 있습니다. 패트릭 씨는 사울 골드먼 씨보다 더 부유하면서, 외모까지 빼어난 상류층 신사입니다. 아버지의 좋은 점만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는지, 스콧의 누나인 알렉산드라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미인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위에서 다섯번째 문단 끝, 마키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누나, 여친이며, 나중에 유명 가수가 되어 다시 사랑에 빠지는 셀럽이 바로 이 알렉산드라입니다)

우디는 머리가 단순하긴 하지만, 못하는 운동이 없습니다. 흔히 미국에서 십대시절에는 이런 애가 모두의 스타로 군림하지만, 우디는 주위에서 띄운다고 본분을 잊는 허황된 성품이 전혀 아닙니다. 아주 착하고 의리로 뭉쳤지만, 감정에 이끌려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만다는 게 흠입니다. 하긴 우리 중 누구라도 이 함정에서 자유롭겠습니다까만.... 아, 우디에게는 또 하나 약점이,.. 큰 상처가 있습니다. 순탄치 않은 과거 때문이었는데, 그건 책을 읽으면서 알아보시길 바랍니다.

머리가 아주 좋거나, 혹은 만능 스포츠맨이거나, 이 모두가 자라나는 청소년에겐 나도 저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하는 유형들입니다. 이런 압도적인 재능의 자력, 자장 속에서, (우리가 까맣게 잊은) 주인공 마키가 영 엇나가거나 의기소침한 아이로 자라나지나 않아야 할 텐데요. 마키는 소설 속에서 줄곧 이들을 우상화합니다. 우리 독자가 살짝은 피곤해질 만큼요. 마키는 물론 동등한 신분의 "골드만 갱단" 멤버입니다만, 간혹은 멤버십을 잃었는지 다른 멤버(예를 들면 알렉산드라나 스콧)에 그 자리를 내어 주고 겉돌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 없는 마키를, 코어 멤버(우디와 힐렐)은 결코 잊을 수 없는(혈연 이전에) 뭔가의 매력 때문에 붙들어 두고 싶었는지, 떨어질 만하다가도 결국은 도로 결합을 이룹니다. 마키 버전의 설명만 듣는 우리들은 이 점이 사실 좀 납득 안 되기도 합니다.

[이하 내용 누설이 있으니 주의해서 읽으십시오]

마키의 시선으로 힐렐은 내내 천재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그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객관적 팩트를 날카롭게 체크한 독자들은 좀 아리송한 대목을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입 전형에 대해 "... 과거의 지식을 열심히 토해 놓기만 하는 정신을,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정신 앞에 둔다는 건 너무도 어리석지." 이런 말은, 한번 듣고 보기만 하면 모든 걸 이해한다는 천재의 입에서 나오기에 다분히 자기합리화성 발언(일 뿐 아니라 열등생들의 말버릇)입니다. 어차피 우수한 두뇌는 사회에서 뭘 규칙으로 놓아도 승자가 되기에(창의력이든 지식이든), 저런 불평을 할 필요가 없죠. 창의력이고 지식이고 모든 게 빵점이면서 남의 생각과 말만 베끼는 실직자도 아니고 말이죠. 힐렐은 또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면 어떤 불편한 결과가 닥친다는 걸 예상 할 만큼 머리가 좋지는 못한가 봅니다. 그 중학교 교장 선생 헤닝스 씨(이 사람은 냉혹하고 무정한 게 아니라, 매사에 터무니없이 판에 박힌 관료적 대응 방식이라 오히려 코믹하기까지 하더군요. 인공지능? ㅋ)가 하는 말대로, 정신은 육신에 앞서는 위상이니 니가 그렇게 머리가 좋다면 니 머리를 써서 그 곤경을 탈출할 것이지 왜 맞고 있냐고 비꼬는데, 이게 딱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나중에 뭐 옷도 잘 입고 사교계에서 세련된 말빨로 여자들의 시선도 모은다고는 하나, 제 생각에는 마키가 열광해대는 것처럼 탁월한 지성은 아닌 듯합니다. 고교 풋볼 팀에서 힐렐은 자신의 허약한 체력, 체격 때문에 선수로 뛰지 못하는 한풀이를, 뛰어난 전술 수립 능력과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 파악으로 커버하는 코치 노릇을 하며 푼다는 말도 나옵니다.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아무리 고교 리그라고 해도 현대 풋볼에서 뭐 새로운 전술이 개발될 여지가 남았을까 싶어서 좀 고개가 갸웃해지더군요. 마키, 혹은 작가 디케르 씨가 좀 더 연구를 해야 할 부분 같습니다. 화자가 아직 젊으니까 독자들이 봐 주고 넘어가는 거죠.

[이 부분은 절대 읽지 마십시오]
마키는 내내 힐렐과 우디를 부러운 눈으로 보지만, 끝에 가서 위너가 되는 건 별 장점도 없이 무난한(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잘생긴)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ㅎㅎ 이 장편 소설은, 내가 그들 모두를 이기고 승자가 되었다는 자기 자랑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결국 그 얘길 할 걸 내내 "난 장점이 없어, 난 평범하고 불행해. 남들은 근데 왜 저렇게 다들 뛰어나지?"로 내내 징징거리던 화자가 꺼내드는 결론이니 독자는 순간 "어, 루저가 위너 되는 이야기네? 감동!"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쩜 이 소설은 내내 서술 트릭을 채용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알렉산드라가 왜 그 잘나신 우디와 힐렐을 다 제쳐 두고 마키를 찍은 후 무려 월도프 아스토리아에 가서 뜨거운 밤을 보내겠습니까. 그저 만만해서? 아니죠. 아니 작중에서 알렉산드라 대사로 "내가 널 택한 게 벌써 니가 승자라는 소리야."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이건 워낙 마키가 징징거리니까 독자들이 그저 흘려 듣고 넘어가죠.

그 백부 사울도 마냥 부러운 인생은 아닙니다. 3, 4부에 집중 폭로되지만, 학생 시절에는 운동권이었고, 그 앞선 시기에는 인생 진로의 갈피를 못 잡고 내내 부친과 충돌한, 눈 밖에 난 아들이었죠. 반면 마키의 부친이야말로 똑똑하고 말 잘 듣는 엄친아였습니다. 이랬던 게 가업인 의료기기 판매 회사가 도산하고 집안 전체가 핀치에 몰렸을 때, 말썽쟁이 아들 사울이 유망기업 하나를 눈여겨 봐 뒀다 주식이 대박을 치는 바람에 그때까지의 우열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죠. 마키는 태어나면서부터 내내 이렇게 굳은 모습만 봐 왔기에, 자기 부친은 태생의 루저고 백부는 인생의 승자라고 잘못 여긴 겁니다. 백부가 부친에게 그리 냉랭히 대한 것도, 워낙 동생에게 성장기 내내 쌓인 열등감을 풀기 위해서였고, 조부모가 백부한테 편애하는 듯 보인 것도 일종의 미안풀이라고 봐야죠.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있고)

이 소설의 올바른 진상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겉보기에 완전한 인생의 승자였던 사울 골드먼 씨의 내면을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는 자기 동생에게 열등감을 품었고, 성공하고 나서도 이웃인 패트릭 씨를 내내 질시했으며(이게 큽니다. 제 생각에는 이걸 계기로 이분 인생이 망조로 접어든 겁니다), 자기 아들들을 패트릭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무리수를 두었고, 끝내는 아내까지 잃게 됩니다. 아내를 잃은 것도 자신이 먼저 바람을 피워서인데, 외모도 더 월등한 아내는 정작(끝에 가서야 드러나지만) 아무 외도를 안 했음에도 이 남편이 자격지심에 일을 저지른 거죠. 그 역시 "여전히 자기 분야에서 잘 나가고, 십대 아이들에게까지 성적인 영감을 주는" 아내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보육원 고아인 우디를 구태여 양자로 들인 것도, 유일한 직계비속인 힐렐에 대해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사울 골드먼 씨가 질시의 눈으로 바라봤던 패트릭은 그럼 어땠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는 오히려 골드먼 씨가 선망의 대상이었죠. 아름답고 유능하며 지혜로운 아내를 두었으며, 그 친아들은 매우 명석하고, 어디서 데려왔는지 떡대 좋은 스포츠 유망주까지 양아들로 들인 잘나가는 변호사, 반면 자신은 돈만 많았지 인생에 정열을 쏟을 만한 낙이 없고, 마누라는 바가지를 긁어 대며,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녀석은 난치병 환자니 신세가 깝깝하게 느껴질 밖에요. 제 생각에 패트릭 씨의 가장 큰 잘못은, 보물 같은 딸인 알렉산드라에게 정성을 안(덜) 쏟은 겁니다. 생에 끼어든 모든 사소한(?) 불운을, 이 딸의 성장이 상쇄해 주고도 남았을 텐데 말입니다. 여튼 패트릭 씨가 하나 잘 한 건, 설령 기분이 울적해져도 덜컥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경솔함은 피했던 겁니다. 반면 골드먼 형제들(사울과 네이튼)은, 99를 잘 하다가 마지막 1에서 덜컥 감정으로 치닫습니다. 그리고 모든 걸 망치는데 이건 집안 내력인 듯합니다.

힐렐은 왜, 고마운 우디의 인생을 망쳤을까요? 우디의 단순한 머리로는 죽을 때까지 생각해 봐야 답을 못 찾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적었습니다. 부친 사울이 아들의 대용품으로 우디를 곁에 두고 모든 정성을 쏟는 그 속내를 영리한 두뇌로 알아채곤, 이를 일생의 상처로 키웠던 겁니다. 사실 이는 우디도 마찬가지인데, 중학생 때 농구로 전향하려 했던 게 순전히 아버지 핀 씨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였지 않습니까. 결국 아이에게 영구적인 상처를 안기거나, 반대로 발전의 동력을 선사하는 건 다 부모입니다. 재능도 없는 아이한테 과도한 부담을 줘 가며 키운 부모는 그 자녀를 망상과 허세와 자존감 부족에서 헤어날 수 없는 실패자로 만드는 거고, 반대로 (이 소설에서 티 안 나지만) 은근 알토란처럼 좋은 영향만 주며 정서를 균형잡히게 가꾼 부모는 마키처럼 진짜 엄친아를 두는 거죠. 행복 속에 엄청난 비극과 운명의 급전직하가 롤러코스터처럼 재주를 피우는, 그 와중에도 인생을 향한 여전히 긍정적인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는, 재미있으면서도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유쾌한 장편이었습니다. 처음에 별 네 개만 주려고 했는데, 뒷맛이 계속 흐뭇하고 좋아서 한 개를 더 늘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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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들의 지혜 - 현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허해구.진실연구회 지음 / 지식공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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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족의 진보와 발전이 안겨다 준 "빛" 못지 않게, 뒤따라 드리워진 그림자 역시 짙고 깁니다. 故 마이클 크라이튼은 자신의 어느 장편 속에서 캐릭터 이언 말콤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 식기 세척기, 세탁기 등 가전 제품은 물론 주부의 노동과 수고를 덜어 주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인간의 삶이 질적으로 나아진 바가 무엇인가?" 2500년 전 노자, 장자 등이 만약 되살아나기라도 해서, 현대인들이 어머니 대지에 자행하는 작태를 보면 과연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저자는 말합니다. "(전략)... 인류도 하나이고 지구도 하나이고 우주도 하나이기 때문에, 진리도 사후세계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 (중략) 그러므로 기독교와 불교도, 동양철학과 서양철학도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법과 도덕, 진리와 인간의 길도 결국 하나로 통한다.(후략)" 옳으신 말씀이긴 합니다. 다만 그 길이 아직 우리 인류에게 명확히 제시가 안 되어서 아쉬울 뿐이지만요.

"현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할"이란 보조 제목이 함께 붙은 이 책 <성자들의 지혜>는 일단 장정이 참 예쁩니다^^ 저는 책 덕후라서 일단 외관이 기품 있고 멋진 책들, 두꺼운 책을 참 좋아라 하는데, 이 책은 일생긴 모습이 그 조건들을 모두 갖춰서 너무 좋았습니다^^ 지금도 혹시 가운데가 벌어지지 않게, 조심조심해 가며 한 장 한 장 넘기고 특유의 책 향기도 맡는 중이죠.

이 책 제목에 표기된 "성자"는,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소크라테스 등 인류 역사와 문명에 지대한 기여를 남긴, 말 그대로 만인의 모범이 될 만한 분들입니다. 책 표지에 적힌 대로, 결국 하나의 진리를 말했으나 어리석은 후대인들이 여러 갈래로 오해, 왜곡하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싸우기까지 하는 우(愚)를 범했을 뿐이죠. 저자는 이런 소중한 가르침을 다양한 불경 등 권위 있는 텍스트에서 인용하여, 저자의 심원한 식견으로 한 줄기로 섞은 후 우리 독자에게 준엄히 가르칩니다. 읽어 보면 다 지당한 가르침들입니다^^

p94에 보면 마이클 샐던의 책으로부터 그 유명한 예화를 인용하십니다. 선로 위에 놓인 1명의 목숨과 5명의 목숨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이야기인데, 사실 이는 샐던이 처음 고안한 것도 아니고 독일어로 Pflichtenkonflikt라고 하는, 대학 강단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논쟁적 이슈로 다뤄지던 과제였습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주제로 자세한 논증을 한 적이 있죠. 저자께서는 어차피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협소한 상대론적 관점에서 인위적으로 비틀어 유사 딜레마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지적하시는데, 바로 그 앞 대목의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었으나 이런 이슈들이 다분히 말을 위한 말로 상술처럼 가공된다는 진단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 책 전체를 꿰는 저자의 주장은 "자기 입장에서 이거다 저거다 현상과 과제를 왜곡하지 말고, 만물의 진리는 오로지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에 동의한 후, 모두가 마음을 열고 화합하여 궁극의 진리에 순응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씀이나, 인류의 지난 역사라는 것도 지성이 뛰어난 개인이 돌출하듯 이색적인 주장을 방대한 체계로 펴 나가면, 기존의 체계와 충돌을 빚게 되고, 입장들이 치열한 논쟁을 주고받으며 어느새 집단 지성에 의해 발전적으로 융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모두가 순응, 승복해야 할 단일 체계의 진리란 게 어느 시대에나 강조되었으나, 역시 인간의 제한된 지혜에서 빚어졌을 뿐이니 그 효용이란 제한될 범위에서 발휘될 수밖에 없었죠. 발전과 모색을 위한 불협화음이란, 그래서 혹여 그 과정에 교란, 불화가 빚어지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도 등한히한 채 시간을 낭비"하는 작태 역시, 그 사람 입장에서야 보람 있고 좋은 일에 열심을 바치는 중이겠으나, 객관적으로 보면 자신도 망치고 자신 주변의 사회관계망 모두에 폐를 끼치는 헛수고일 뿐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건, 공동체 도처에서 빚어지는 갈등, 이익 충돌, 밥그릇 싸움 역시 대승적 관점에서 하나의 정의를 직시하면 결코 빚어지지 않으리라는 저자의 관점이, 이 사이비 종교 현상을 비판할 때에도 적용된다는 겁니다. 결론은 차이가 없는데, 그 논거 구성 면에서 저자만의 고유성이 드러납니다. 사이비 종교 믿는 사람들이 꼭 되묻는 게 이렇죠. "우리 OO교가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남한테 피해 안 끼치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씁니다." 이런 질문에 대개는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무시하지만(시간과 정력의 낭비), 엄밀히 말해 우리한테 그럴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단죄하고 무시하려면 그럴 만한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하죠. 제가 주목한 건, 저자가 구태여 그런 이슈에 대해서까지 논거를 마련하려 애쓴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사실 서양철학(중에서도 대륙의 합리론)의 본질적 방법론과도 통합니다. 이 책에도 여러 번 원용되는 칸트의 저서를 읽으면서도, 평범한 이들 생각에는 "대체 그런 문제를 왜 해명해야 하며, 이처럼이나 번거로운 과제를 파고들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같은 회의가 떠날 새가 없습니다. 허나 이런 문제를 짐짓 경시하는 듯 젠체하는 소양 없는 무자격자들도, 어디서 본격 인문 주제가 논쟁의 핵심으로 대두하면 그제서야 인식론, 해석학의 기초 개념을 (벼락치기로 베껴 온 후) 뜻도 모르면서 급조한 수다 속에 허세를 떠느라 정신 없습니다.

저자께서 주장하시는 만물일통의 세계관에서는, 저 사이비 종교에 미혹되어 인생을 망치는 어리석은 무리들이나, 진리의 일면만 보고서는 망령되이 편린적 진실을 전부인 양 우기는 무자격자들이나 결국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뜻입니다. 똑 같은 사이비 신도가 다른 사이비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니 이보다 더한 촌극이 없죠.

저자의 탁견은 특히 Part3에서, 어떻게 하여 담백하고 질박한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이, 번잡한 말과 말 속에서 본지가 타락하고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현학 공론의 장으로 변했는지 설명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특히, 사도 바울 이후 기독교는 선행의 실천을 강조한 예수의 순정한 초기 지침을 잊은 채 유대교처럼 인격신을 전면에 내세우며 형식적 교리가 득세함으로써, 정작 예수의 가르침과 멀어졌다는 통박은, 현재 기독교 교단의 정통파 신앙과는 까마득한 거리를 두겠으나 중립적 독자 입장에서는 경청할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또한, 석가모니 이래 여러 제자나 권위자들의 입장을 거치며, 부처님의 "원음"이 무수한 왜곡과 가필을 거친 채 이제는 무엇이 본지였는지도 혼란에 휩싸일 뿐이라는 저자의 지적 역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이 저자의 논지와는 별개로, 아소카 왕 이래 확립된 엘리트 불교에서 어떻게 대승과 유식론이 갈라져 나왔는지, 또 이후 이 입장들이 어떻게 힌두교 측과 발전적 논쟁을 거치며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의 서술이 참으로 명쾌합니다.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든 않든, 이 대목은 보편적 교양 습득을 위해서도 한번 읽어 볼 만합니다.

부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모두, 사회가 폭력과 범죄에 물들어 극한 타락의 길을 걸었을 때 출현한 성자들(저자의 관점)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오탁악세"라고 하는데, 이런 성인들이 나타나 인류가 자멸과 종말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지 않게 심오한 가르침을 베풀었듯,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테러와 증오의 악순환이 뭇 백성의 작은 안위도 차마 담보하지 못할 판이며, 이 판에 일부 불순분자들은 폭력을 부추기고 엉뚱한 반사회적 사고를 공유하며 한심한 제 처지를 합리화하기에 바쁩니다. 이런 난세를 두고 오히려 저자는 "그나마 이 세상이 아직 법계의 자격을 유지한다는 증거이다. 도덕의 문란과 위법의 수위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응보인 혼란상이 빚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는가?" 같은 주장을 합니다. 명시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런 오탁악세에 다시 한 번 성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어 위대한 가르침으로 누리를 씻어낼 기대도 어느 정도 함축하는 논리입니다.

저자는 모 추기경이 선도한 "내탓이오" 운동 역시, 악행을 저지르고 온갖 탐욕과 비리를 앞장서 부추긴 세력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나 결과면에서 다를 바 없다고도 합니다. 말하자면 권선징악, 신상필벌을 내세움이신데, 역시 해당 문단을 읽는 독자 개인이 알아서 잘 새길 일이겠습니다. 같은 대목에서 정치인들이 한데 모여 구국기도나 법회를 열었던 행태도 신랄히 비판하시는데, 행실은 따르지 않으면서 입으로 무슨 기도나 염불을 읊은들, 원인 없이 결과가 하늘에서 떨어지길 비는 꼴이라며, 연못에 던진 돌멩이가 느닷 수면 위로 떠오르길 바람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네요.

저자는 후반부에서 플라톤의 철인 정치론을 소개하며, 작금의 한국은 계층과 직역 불문하고 각자의 분수를 알며 현실의 의무에 충실하자는 자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으로 결국 쇠망하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반대로 각자가 생업에 충실하며 헛된 망언으로 정신을 더립히지 않고 정직과 진실에 힘쓴다면, 팔천만 인구로도 세계를 이끌 으뜸 민족이 될 수 있다고도 하시네요. 정부가 개입해서 불완전한 시장의 작동 원리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케인지언 스탠스와, 그 대척에 서서 완전한 자유방임만이 일체의 비효율을 제거한다는 시카고 학파의 주장까지 소개하는 등, 저자의 시야가 참으로 넓고 보편의 상식에 부합하는 청론(淸論)이라서 쉽게 잘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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