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빛 - 창비소설집
김향숙 지음 / 창비 / 198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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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소설은 독자의 아주 원초적인 감정선을 건드리는 데 능숙한 것 같습니다. 18주차에 강유일 작가의 <빈자의 나무>를 리뷰했는데 그 역시 서로가 서로를 너무 아낀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죽을 듯한 회한에 빠지는 사연들이 복잡하게 얽혀드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작품집에는 모두 13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었습니다. 권말에는 염무웅 교수의 작가론이 실렸는데 교수님 특유의 분단(分斷)담론이 농도 짙게 반영되어 독자의 시야를 넓혀 줍니다. 솔직히 저는 책을 읽으면서 그런 방향으로 독해할 생각은 전혀 갖지 못했는데 다 읽고 나서 그런거였던가 싶기도 했습니다. 더 생각을 정리해 봐야 할 듯하네요.

<문 밖에서>는 암환자의 이야기입니다. 요즘도 암치료는 매우 힘든 과정이며 하물며 저무렵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직 젊은 아내와 두 아이를 남기고 이제 생을 정리해야 할 처지라면 차라리 몸이 아픈 고충은 둘째일 것 같습니다. 물론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물리적 고통이란 그 묘사가 너무도 절절해서 독자의 신체에까지 그 증세가 전이되는 양 섬뜩한 느낌입니다.

주인공이나 그 아내 되는 분이나 배울 만큼 배운 분들이라서인지 자신보다는 상대방의 감정을 우선 배려하느라 내내 노심초사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파하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노출하지 않기 위해 먼 곳의 별장에 은거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 여인을 알게 됩니다. 독자는 이 와중에 혼외관계로 슬쩍 기우는 듯한 주인공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볼 수도 있지만, 그건 피상적인 관찰입니다. 아내분이 어떤 기색을 보이는지를 보면 이 기이한 전개에 어떤 상호 배려가 깔렸는지 짐작이 가능하죠. 

아빠가 이제 얼마나 먼 길을 떠나야 하는지 짐작도 못하고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독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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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의 미래 - 미중 전략 경쟁과 새로운 국제 질서
이승주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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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미국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했고 중국은 이것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훼손한 행위라면서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1997년에도 미 하원의장 뉴트 깅리치가 비슷한 액션을 취했으나 이때는 중국이 미온적으로 나왔고 국제적으로도 큰 이슈가 못 되었던 걸 감안하면 세상이 크게 변했다는 방증입니다. 현재까지는 미국이 패권국이라 할 만하지만 앞으로는 알 수 없고 인도, 사우디나 터키(튀르키예) 같은 나라가 미국에 보조를 안 맞추고 저렇게 독자노선을 걷는 걸 보면 이미 패권에 금이 많이 갔다고 해도 될 듯합니다. 이 책은 앞으로 미중 양국의 외교 전략이 어떻게 변화할지, 또 어떻게 국제 질서가 변화할지를 예측하는데, 모두 여섯 분의 국제정치학자가 각자의 전망을 펼칩니다.

냉전 종식 후 30년 동안은 미국의 單極 체제였다고 서울대학교 전재성 교수는 진단합니다. 사실 중국이 저처럼 요란하게 자국의 자존을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하지만 그 표현에 과장된 바가 많고 다분히 국내용으로 내세우는 경향이 강합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고, 정말로 지금 미국하고 전쟁이라도 붙으면 중국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미국이 현재 러시아 전선에 집중하다 보니 아시아태평양에서까지 군사적 긴장을 에스컬레이트 못 시키는 거죠. 다만 어떤 방송의 뉴스 앵커가 어리석게 잘못 짚었듯, 대만이 펠로시 방문을 만류했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들은 이제 중국의 일부로 정체성을 자리매김하기보다 독자적인 타이완인으로서 세계에 나서길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미국은 대만이 너무 나가는 걸 부담스러워 하기에 표면상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하는 입장을 유지할 것입니다.

단극체제에서 오히려 미국의 패권이 언더마인되었다는 同 敎授의 진단은 워딩상으로 다분히 역설적이지만 엄연히 현재의 국제 질서를 잘 반영합니다. 트럼프는 재임 기간 동안 독일, 중동에 주둔하는 미군을 빼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배치하려 든 것 같으며 다만 한국에 대해서는 방위비 분담금 액수를 대폭 늘릴 것을 요구하는 등 예외적인 스탠스로 나온 바 있습니다. 

김상배 서울대 교수는 특히 21세기 들어 사이버 보안이 중요해졌다고 합니다. 실제로 중국은 막강한 화력의 사이버軍을 유지, 운용하며 그들 전력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규모나 활동 범위, 구체적인 목표 등이 대외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게 아니겠습니까. 또 該當 아티클의 필자는 민간, 정부 섹터에서 애써 개발한 기술이 허무하게 외국으로 유출되는 걸 막는 역량을 하루빨리 강화해야 한다고도 주장합니다.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회담에서 "우리 미국은 양질의 투자 자본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발언한 적 있는데, 이는 "약탈적 투자 관행(p145)"을 지양하겠다는 약속으로도 들립니다. 몇 달 전 스리랑카가 물가 폭등, 경제난을 못 이겨 국가부도 선언을 했었는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긴 하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앞세운 중국의 약탈적 행태가 한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이 유력합니다. 이승주 중앙대 교수는 토머스 J 라이트 예일대 교수의 저술을 인용하며, "상호 의존의 무기화"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소개합니다. 사실 이는 묵시적으로나마 중국이 외교 경제 책략으로, 미국보다 앞서 일찌감치 구사한 듯도 보입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위치에 놓였으며 중국 어느 실력자가 말했듯 이사를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닙니다. 이런 시대의 격변기를 맞을수록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국가 전략을 점검, 재조정해야 하며, 결코 감정적으로 경거망동하여 대세를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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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날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4
카롤린 라마르슈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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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책 맨처음의 헌사, 제사에도 나오듯 작가가 실제 1995년에 겪은 일로 영감을 받아 창작된 작품들 같습니다.

<트럭 운전사의 이야기>는 남성 화자가 들려 주는 가슴아픈(?) 사연입니다. 트럭 운전사라고 하면 거친 기질에 둔한 감성, 큼직한 떡대 같은 게 연상되지만 이 화자는 스스로 자신의 체구가 가냘프다고 하며, 또 그런 자신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고속도로에 버려진 개 한 마리 때문에 그는 트럭을 세우고 조치를 취했다고 하는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끔찍한 사고가 "창조될" 뻔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창조되다"라는 어휘의 사용이 적당치는 않은 것 같다고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즉시 수정한 후 대안을 내세우거나 하지는 또 않습니다.

이어 그는 자신에게 지금 아내가 있으며 금발이고 아름답다고도 합니다. 이 말은, 자신과 같은 트럭 운전사, 게다가 풍채가 좋지도 못한 운전사에게는 과분한 아내라는 뜻이며 적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보리라는 점을 잘 안다는 일종의 방어막처럼도 들립니다. 방어막을 미리 치는 사람은 대개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며, 내가 내 약점을 잘 알고 있으니 제발 상처를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호소를 하는 셈도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화자는 자신 주변의 작은 세계에 대해 제법 과감한 해석도 내놓으며, 아마도 이 점을 자각해서인지 "창조한다"는 표현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자주 쓰는 듯합니다.

심지어 그는 도망친 제르멘에 대한 슬픈 회상도 하는데, 이 역시 실재한 일이기나 했는지는 여전히 모를 일입니다. 그의 부모가 마치 아까 그 고속도로의 개처럼 자신을 버렸다고도 하는데, 이것마저도 그에 의해 "창조된" 하나의 허구 혹은 보조관념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과연 그는 트럭운전사이긴 할지, 심지어 남성이기나 할까요?(저는 처음부터 이 사람이 여자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하나 확실한 건 그 혹은 그녀가 고속도로의 개 한 마리가 유발, 아니 창조한 엄청난 상실감과 고립감에서 헤어나올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천사와의 싸움>은 어느 가톨릭 신부의 회고입니다. 제목에 나온 "천사와의 싸움"은 기독교 구약 창세기에서 형 에사오에게 쫓겨난 야곱이 어느날 천사와 한판 겨룬 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는 다소 기이한 그 이야기를 레퍼런스합니다. 그 이상한, 그러나 살벌한 대결에서 이기고 난 후 야곱은 주어진 보잘것없는 운명의 질곡에서 벗어나 거대한 종족의 아버지로 거듭나지만, 이 작품의 화자는 성적인 무력 상태에 빠져 수동적으로 사제직을 수행할 뿐인 좌절한 영혼입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화자는 도로에 버려진 개 한 마리를 떠올리며 침울한 기분에 젖어드는데, 그럴수록 집착하게 되는 건 그에게 금단의 열매 그 자체로 다가온 소피라는 여인입니다. 사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요한"도 회화 등에서 뭔가 여성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전통이 있는데 여기서 거세된 남성으로서 사제의 거죽만 쓴 화자 역시 "지혜, 앎(소피)" 앞에 무력해진 장(=요한)이란 세례명이며 또 본인도 그 점을 분명히 인식합니다. "그 개는 죽어서 분해되었을 것이다." 존재의 무게를 감당못하는 모든 영혼들은 분해, 해체를 갈망합니다. 사실 그는 이스라엘만 되지 못한 게 아니라(이스라엘은 아무나 되는 게 원래부터 아니겠고) 심지어 야곱에도 미치지 못한, 흔해빠진 하나의 장(Jean)이었을 뿐입니다.

<생크림 속에 꽂혀 있는 작은 파라솔>에서 처음으로 여성인 1인칭 화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 역시 도로에서 그 개를 보았으며, 이를 동기 삼아서는 자신의 결별식(남자친구와의)과, 어린시절부터 오랜 동안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상처와 상실감을 길게 뇌까립니다. 모래는 먹을 수도 없고 살에 닿으면 느낌도 불쾌하지만 멀리서 해변에 송송 꽂힌 파라솔을 보면 마치 생크림 케익 표면에 장식된 작은 양초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질은 외관을 통렬히 배신하며, 남은 것은 불쾌한 환멸뿐입니다. "그때 이미 태양은 우물 속에 가라앉고, 검은 물 아래 버려진 개가 있는 것이다." 이 버려진 개란, 그냥 버려지기만 한 게 아니라 죽기까지 했고, 또 불쌍하기만 한 게 아니라 뭔가 절망감 같은 감정마저 유발하는 듯합니다. 

"곡예사의 재주, 철사같이 팽팽한 정신력.." 이런 문구들은 <자전거를 타고> 초반에 나오는 아름다운 거미 한 마리의 자태와 동작 파트와 잘 연결됩니다. 사실 거미를 보고 그 기묘하게 진화한 동작과 생태에 대해 미적 황홀감까지 느끼기란(그래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습니다. 남편 니코를 암으로 잃었으나 "젖(p129)"은 끝내 지킨 덕에 사랑하는 안(Anne)을 낳을 수 있었고 행복한(이 단편집에서 드물게 보는) 여성은 결코 "별수없는" 처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가슴 앞에 압도당하고 좌절하여 음경의 기능을 잃은 앞의 저 가톨릭 사제 장(Jean)과는 대조적입니다. <영원한 휴식>의 주인공 화자 스무 살짜리 안은 아마도 저 여인의 딸 안과 같은 인물일 텐데, 그녀의 얘기 속에서 드디어 왜 저 버려진 개 한 마리가 그토록 애상, 절망을 자아냈는지 비교적 분명히 드러납니다. 살아있을 때, 또 버려지기 전의 개들이란, 얼마나 기운차게 길을 달리고 또 달려들댑니까. 언젠가 그 생명을 다하고 비참하게 길 위에 누운 채 발견되더라도, 이런 아름다운 질주가 한때 생과 육신을 지니고 대지를 활보한 존재의 추억이자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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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소비에트 변방 기행 - 조지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여행자의 시선 2
임영호 지음 / 컬처룩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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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변방, 그리고 (구)소비에트의 변방인 세 나라에 대한 임영호 작가님의 기행문과 화보입니다. 

 

소련이란 이름을 가졌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초강대국에 대해 저자는 여러 단상을 머리말에서 풀어 놓습니다. 그 중 하나는 비토리오 데시카 연출, 소피아 로렌 주연 영화 <해바라기>입니다. 헨리 맨시니 작곡의 주제가로도 유명한 이 영화를 젊은 시절 보고, 막연히 공산국가에 대해 지녔던 부정적 이미지가 크게 동요했었음을 저자는 술회합니다. 이 책에 실린 조지아(옛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모두 구 소련 시절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나라들입니다. 

 

1991년말 소련 붕괴 후 15개 구성 공화국들은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느슨한 연맹체를 구성한 적 있는데 현재는 그마저도 유명무실합니다. 그리고 앞 두 나라, 즉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는 이제 독립은커녕 국가 생존 차원의 위기를 느끼는 중입니다. 벨라루스는 질 나쁜 독재자에 의해 러시아의 속국이 되다시피했으니 역시 "독립국"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p28에 자세히 나오는 바대로 조지아는 원래 그루지야로 밖에서 불렸으나 러시아색을 탈피하고 유럽을 지향하고자 이름을 그리 바꿨습니다. 역시 책에도 설명이 나오지만 그루지야나 조지아나 모두 그리스어의 게오르고스에서 유래했으며 이 단어는 "땅(geo), 농부"와 관련되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한국이라 일컫듯 저들은 자신의 땅을 사카르트벨로라 칭한다니 행여 그쪽분들 만나면 실례라도 하지 않게 잘 외워 둬야 하겠습니다. 한국에도 물론 조지아 대사관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트빌리시를 수도로 한 이 작은 나라는 관리들의 부정부패라든가 구 소련식의 후진적 시스템 때문에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런 근현대사의 여러 질곡도 마치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 닮은 점들이 있습니다. 조지아는 유서 깊은 기독교권 국가이기도 한데, 한때 아케메네스朝 페르시아가 국세를 떨칠 때 조로아스터 교를 강요당한 적도 있었다 하니 놀랍습니다. 독재자 스탈린도 이곳 조지아 사람인데 그 가난한 모친이 자신의 어린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 사제로 만들 생각이었다는 사실도 매우 유명합니다. 스탈린의 으뜸가는 심복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 즉 KGB 수장도 조지아 사람이었지요. 마치 박정희가 일생을 두고 아꼈던 고향 후배 김재규처럼. 

 

책에는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아름답고 신기한 모습을 한 수도원과 성당들의 사진이 가득합니다. 한국도 시골에 가면 곳곳에 불교 사원들이 즐비한 사정과 닮았습니다. 조지아가 기독교를 전면 수용한 시점과, 우리 겨레가 불교를 받아들인 무렵이 서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아름답고 신심 깊은 나라에서 어쩜 스탈린처럼 무서운 독재자가 출현해서 자국도 아니고 큰 러시아를 송두리째 접수했을까요. 저자는 현재 조지아인들이 가진 스탈린에 대한 태도는 매우 복합적이고 양가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우크라이나편은 챕터 둘로 나뉘어 집필되었는데 앞부분은 수도 키이우, 뒷부분은 오데사와 르비우를 다룹니다. 이 구분은 물론 전통적으로 동부와 서부가 문화적, 역사적,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크게 차이 나는 사정을 감안했겠으나, 전쟁이 터지고 난 지금 와서 보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서부의 키이우는 대체로 유럽을 지향해 왔고 2차 대전 당시 처음에는 나치의 진군을 환영하기까지 했으나(가슴아프지만 이 역시 사실이죠) 이후 본색을 드러낸 그들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았습니다. 물론 직전 시기 스탈린으로부터도 끔찍하고 잔인한 수탈을 당한 역사가 있었죠. 

 

우크라이나는 물론 조지아에 비해 큰 나라이지만 어쩌면 국토 곳곳에 이렇게나 아름답고 토착적인 개성을 잘 표현한 수도원과 대성당들이 많은지, 그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이 호강을 합니다. 이런 멋진 고장이 현재는 러시아 침략군의 무차별 포격에 의해 어쩌면 상당수가 훼손될 위험에 놓였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며, 아름다운 고장에 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행여 마음과 몸을 다치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책 서두에서 저자는 영화 <해바라기> 중에 나오는 소련 시가지의 발달된 모습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전철만 놓고 보면 사실 한국의 수도 서울보다 북한의 평양에 더 먼저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구 공산권에서 선전의 목적이라든가 여러 이유로 신경 써서 건설했던 인프라이기도 하죠. p171을 보면 화려한 양식으로 지어진 키이우의 지하철 시설들에 대한 언급이 또 있는데, 키이우의 전철은 러시아 본토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이름은 레닌그라드)에 이어 세번째로 구 소련 내에서 이른 시기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이에는 여러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겠습니다만.  

 

p238 이하에 특히 자세히 나오지만 우크라이나는 한국처럼 단일한 민족이 거주하는 게 아니라,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폴란드인, 심지어 러시아인들까지, 그 민족 구성이 참으로 복잡하며 거주 분포도 여러 역사적 단계를 거치며 강제 이주 등을 겪어 여간 사정이 꼬이고 꼬인 게 아닙니다. 얼마전 미국하원 의원 중 한 우크라이나계 공화당 의원이 젤렌스키를 비난하는 등 난감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그 연원도 따지고 보면 이처럼 곡절 많은 지나간 역사의 굴절에 기인합니다. 

 

벨라루스는 친 러시아 성향인 만큼 곳곳에 소비에트 기념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p291에 나오는 사진처럼 위대한 조국 전쟁 기념관 같은 곳이 대표적입니다. 벌써 대조국전쟁이라는 말부터가 러시아식이며, 벨라루스가 지닌 역사관과 러시아의 그것이 서로 이처럼 닮을 수가 있나, 아니면 그렇게 여기길 강요라도 받나 싶어서 착잡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곳 역시 앞선 두 나라처럼 풍광이 아름다우며 고유의 역사와 사연을 잘 간직한 멋진 곳처럼 보였는데, 어떤 강압이나 압제에 의해 자기로 남기가 어려워지기라도 한다면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가까운 역사 구간에서 이웃에 의해 큰 아픔을 겪었기에, 이런 일들이 남의 사정이나 강 건너 불구경처럼 여겨질 수 없겠으니 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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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스파르타쿠스는 어쩌다 손흥민이 되었나 건들건들 컬렉션
하마모토 다카시 외 지음, 노경아 옮김 / 레드리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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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이 생겼을 때 담백하게 당사자 둘의 물리적 대결로 해결하는 건 인류의 오래된 관습입니다. 두 사람의 피지컬이나 격투 실력이 비슷할 때에는 더 간절하고 더 억울한 쪽에 승산이 있겠으므로 이 방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소리 같아도, 중세에 벌어진 귀족, 기사 사이의 많은 다툼을 해결하는 데 이 방법이 큰 지지를 얻은 건 이런 이유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이런 식으로 당부를 가리자면 폭력배가 매번 올바른 승자가 되는, 아주 부당한 결과가 빚어지기 십상이라서 근세 이후 문명 사회에서는 결투를 칭송하기는커녕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형사 범죄로 규정하기에 이릅니다. 책에서는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 영향도 분석합니다(p120).

30년 전쟁의 향방을 프랑스 왕국에 이롭게 이끈 노회한 정치가였던 리슐리외 추기경(p62, p106)은 루이 13세를 보필하며 내정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1626년의 반결투법이 의회에서 통과되게 한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p63,  또 p152 등에 나오지만 이 결투라는 방식은, 명예라는 게 뭔줄 알고 또 지킬 명예라는 게 있기나 한 귀족들의 전유물입니다. 루이 14세 때에도 결투에 몸이 단 양 당사자를 똑같이 엄벌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비로소 분쟁이 해결되었다는 사례가 책에 나옵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스웨덴, 러시아에서도 결투가 군주의 명에 의해 금지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인명중시나 인도주의 같은 의도가 아니라 절대 왕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고 합니다. 단 이후 계몽군주의 시대(p111)로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지긴 합니다.

그럼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귀족이 몰락했으니 이 결투라는 관습도 자연히 같이 사라졌을 법합니다만 그렇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저자는 오히려, 이때부터 근대적 결투가 새로 시작되었다고까지 단언합니다. 인간의 욕구 중에는 명예욕이라는 게 있고, 결투 신청을 통해 구 귀족처럼 품위 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것도 속물 근성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단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 널리 결투가 퍼지지는 않았는데, 이 배경에 대해서는 책에 특별한 설명이 나옵니다.

결투는 이른바 신명(神命) 재판의 일종이었습니다(p47). 물론 모든 결투 재판이 중세에 교회 주관이었던 건 아니고, 종교와는 무관하게 귀족, 왕의 공권력에 의해 열린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820년 바르셀로나 백작 베라가 이슬람 세력과 결탁하여 반역하려 들었다는 혐의를 쓰자, 루도비쿠스 황제는 고소인인 루시용 백작의 대리인 사이의 결투를 마지못해 승인합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고트 족의 명문 혈통이었으며 고트 전통 역시 결투로 누가 신의 뜻을 얻었는지 가리는 방식을 좋아했습니다. 이 역시도 신명재판이었기에 패자가 된 바르셀로나 백작은 죄를 자인하고(!) 다만 황제의 자비로운 사면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습지만, 신이 반대편의 손을 들어 주어 결투에서 이기게 했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이런 재판은 중세말에 이르러 현저히 줄어들었는데, 일단 종교 당국이 폭력을 점차 금하게 되었고(p63, p96), 대중 역시 그저 물리력이 우세한 자(혹은, 그저 결투 당일 운이 좋았던 자)가 정의롭게 판정되는 이런 결과에 대해 점차 불신하게 되었다는 설명인데 상식에 비추어서도 타당합니다. 중세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미국 영화 <엘시드>에도 자우스팅 장면이 있습니다. p80, p194 등에 나오듯 결투는 이를 지켜보는 대중에게 하나의 오락으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와 스웨덴 왕 칼 9세 사이에 있었던 서신 결투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후자가 덴마크 측의 칼마르 점령을 항의하며 일대일 물리적 결투를 신청하자 전자가 "결투까지 갈 것도 없이 당신에게는 이미 신의 벌이 내렸음이 분명하다! 결투니 뭐니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벌써 정신이 돈 것 아니겠는가?"라며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확실히 크리스티안 4세의 반응이 훨씬 성숙하고 이성적입니다. 이 일은 1611년에 있었으나,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 말에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항우가 유방더러 일기토를 신청하자, 유방이 "남아라면 당연 지혜를 놓고 한판을 겨룰망정 어찌 폭력으로 자웅을 가리겠는가?"라며 상대를 점잖게 꾸짖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실제 싸움이 벌어졌다면 이미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든 데다 변변히 무술 훈련을 받은 적도 없는 평민 출신 유방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을 텐데 약아빠진 그가 이런 방식을 수용했을 리 없습니다.

반면 19세기 서부개척시대에 벌어진 미국의 결투는 귀족적이라거나 명예로운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야만적 행태였습니다. 등 뒤에서 총을 쏘지 않는다는 영화적 허구가 퍼져 있긴 하나 그런 신사적 낭만이 무법천지 미국 서부에서 통했을 리 만무합니다. 책에도 나오듯이 영화에서 즐겨쓰던 대표적인 배경이 애리조나인데 이곳은 합중국 가입이 보류되던 준주(準州. territory)에 블과한 지위였습니다. 이 책에는 유럽뿐 아니라 미국의 결투 그 유명한 사례들도 소개되는데 하나 아쉬운 건 미국사상 아마 가장 큰 화제가 된 결투였을 알렉산더 해밀튼과 애런 버 사이의 총격전 언급이 없다는 점입니다.

여튼 책은 후반부에서 나치 독일이 어떻게 결투를 하나의 제의(際儀)와 오락, 스포츠로까지 발전시켰는지 분석합니다. 이 점이 책의 품격을 높이며, 독자에게도 그저 역사잡학 가십거리의 제공을 뛰어넘어 체계적이고 통찰력 있는 역사 고찰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미도 있고, 생각할 소재도 많았던 고마운 책이었어요.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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