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MD : 브랜드 편 - 대한민국 최고의 슈퍼 MD가 알려주는 브랜드 큐레이션의 모든 것! 패션 MD 시리즈 2
김정아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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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편집숍("멀티샵, 셀렉샵"이라고도 국내에서 부릅니다) 브랜드 체인(일본의 "빔즈")에 근무하는 여러 직원들의 "집 이야기"를 묶은 책(제목은 <136명의 집>)을 읽고 서평을 남긴 적 있습니다. 현재 한국형 편집숍을 직접 운영하고 업계 원톱으로 일컬어지는 저자님의 책 1권(당시 1권이라고 제목이 붙진 않았으나 이렇게 2권이 나왔으니 이제 1권이 된 셈입니다)을 몇 년 전에 읽었는데, 길에서 별 생각없이 보고 지나쳤던 부띠끄의 경영과 활황 뒤에 그런 숨가쁜 노고와 고도의 센스가 녹아 들었다는 걸 알고 많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지요. 당시 그 책을 읽으면서 "바잉(buying) 실력" 같은 낯선 용어를 접하고, 업계마다 천양지차인 논리와 법칙, 수완이 지배한다는 점 실감했습니다.

브랜드는 명품 마켓에서만 위력을 발휘하고 관련 종사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심지어 떡볶이가게, 보쌈집도 그 나름의 브랜드를 설득력있게 구축해야 매뉴팩처들의 실력,연구의 보람이 살아나는 법이지요. 브랜드는 현대 마케팅에서 고객, 대중과 접촉하는 유일한 채널이요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미디어이자, 제품의 기능과 효용을 한몸에 압축하는 화체 이상의 실체이며, 차라리 "모든 것(everything)"입니다. 그래서 현재 가장 잘나가는, 최상의 감으로 업계를 쥐락펴락하는 슈퍼MD가 자신의 비결, 노하우를 털어놓는 책은, 어느 대목에서건 자기 일에 활용할 수 있는 영감을 얻을 수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적어도 그런 기대를 갖고 책을 펼쳤네요.

이 2권의 주제는 "브랜드"인데,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트렌드를 만드는 브랜드, 브랜드를 만드는 트렌드"가 보다 세부화한 캐치프레이징이겠습니다. 브랜드 안에 집약되어 있는 시장의 모든 법칙을, 이성뿐 아니라 세련된 감성으로 탐구하되, 무모한 일반화보다는 신중한 귀납으로 결론과 미래를 도출, 예측해 보자는 의도겠습니다. 말이 이렇다뿐 일상에서 그래도 친숙히 접하는 브랜드의 흥망성쇠를 통해 마케팅과 경영의 이치를 더듬자는 것이니 꽤 재미있고, 좀 심하게 말한다면 보기만 해도 설레는 패션 브랜드(따라서 상당수는 크레이에터인 디자이너의 이름 그대로인)를 컬러사진과 함께 페이지 쇼핑하는 과정이니, 그냥 지면으로 눈호강한다 여기고 일단은 책장만 넘겨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이자 MD)가 어떤 의미심장한 표현과 어구로 가이딩을 해 주건, 그로부터 뭘 얻는지는 독자의 능력이겠지만 말입니다.

p74에 보면 베라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가 <보그>에서 그 어린 나이에 편집자로도 명성을 떨쳤다는 건 처음 알았고, 그녀의 컬렉션에 3만원짜리 드레스도 있긴 하다는 것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저자는 그 약점으로 "지나치게 갈래를 친 라인업이 전체 아이덴티티를 흐뜨린다"고 지적하는데, 동양인 특유의 야무지게 시장 전(全) 셰어를 갈무리하려는 습성의 표현이라고 저는 봅니다. 패션 관점에서는 못마땅하겠으나, 혹 패션 자체의 논리와 시장의 생리가 분기하는 대목이 있다면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저자분 개인의 회고와 여담도 재미있는데, 로즈로코 뉴욕(책에는 해당 백화점에서 철수했다고 나오지만 다른 곳에는 [사세가 많이 위축되었는지는 모르나] 여전히 영업 중입니다)이, 한국 전체가 외환 위기로 망국의 고통에 접근해 갈 때 쌩쌩히 잘나간(명품 바람이 분 건 이때부터입니다. 중산층이 날린 재산의 흐름이 고스란히 극소수에 유입될 무렵이죠) 과거를 잠시 언급하시네요. 베라 왕 이브닝드레스의 성급한 국내 론칭으로 이 샵이 치명타를 입었다는 분석이신데, 확실히 시장보다 반 발짝만 앞서가라는 조언이 여기서도 타당한 듯합니다. 여기서, "아름답고 세련된 용모의 대표"님은, E대를 나오신 그 U님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승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서술이라 흥미롭기도 했습니다.(헉)

편집숍은 그냥 명품 부띠끄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습니다만, 그 "편집"에는 엄청난 내공과 센스가 녹아있어야 하며, 앞의 베라 왕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지면이든 웹이든, 매체이든 샵이든 간에 그 의미가 다르지도 않다는 점 새삼 배울 수 있었네요. 앞으론 그저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저래서 저 랙에 저 브랜드가 놓여졌나 보다 하고 꼼꼼히 그 배후의 센스, 심리, 세계관을 관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게 돈의 흐름과 수입, 승부에 관련된 문제인데 그저 최종의 과시 소비 욕구를 푸는 장소로 안이하게 생각한 자체가 큰 어리석음이죠.

너무 고가의 명품에는 눈이 잘 못 가고, 아무래도 본문 텍스트 중 "가성비"란 단어에 유의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당연히 전 남자지만 이런 건 여친한테 뭘 사줄 때에도 필히 유념해야 할 사항 아니겠습니까?) 이브닝드레스의 또 하나 심연(돈 없는 소비자에게)은, 그 화려한 의상의 구조 때문에, 다른 기회와 장소에서 두 번을 착용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글켔죠). 그래서 가성비의 미덕이 다시 강조되는 거겠지만요. p79에 보면 타다시 쇼지(의 브랜드)가 소개되는데(책에는 "다카[하]시 쇼지"라고 오식이 나오는데 그분은 가수죠),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레이스(의 디자인)은 물론 패브릭조차 돌체앤가바나 라인의 500~600만원선 작품(아이템)에 못지 않다고 하십니다. 제 막눈으로는 모르겠는데, 탁월하신 대표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아주 잘 명심해 뒀다가 요긴하게 써먹겠습니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스트리트웨어 정신"을 강조하는데, 저는 이야말로 창의력과 기묘한 저항 정신이 결합해 "아큐파이 더 스트리트"로 사업적 성공을 거두기까지 한 놀라운 혁신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락&펑크가 샤넬 라인 한 모서리를 점유하기까지 하는 현실(이건 아이덴티티의 희석이 아니라고 저자는 판단하시나 보죠?ㅎ)은, 비유를 하자면 현재 KB가 부동산 앱에까지 진출해, 좋게 말해 고객을 속속들이 만족시키는 스트로잉 브랜칭 아웃, 나쁘게 말해 문어ㅂ.... 여튼 뭐 고객 입장에서야 걸치기 예쁘고 가격 착하면 된 거죠 뭐. 30년 전 쓰레기 취급이나 받던, 소외된 독자층 상대로 코 묻은 돈이나 빨아들인다고 비난의 대상이 되던 B급 문화는 이제 어엿이 주류로 편입하여 당당한 독자적 장르를 개척하기에 이르기도 했는데, 이런 패션 트렌드와도 결코 무관치 않습니다. B급 코믹스 폭력 문화 일부가 북유럽 신화 일부를 싸구려로 차용하여, 도시 하류층에 단단한 팬덤을 구축하기도 했는데(따라서 그런 컨텐츠는 원전이 아니라 2차 가공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족보를 세탁하고 블록버스터로 둔갑한 영상물은 대단한 신분 상승을 이룬 거죠. 이런 게 무작정 끌린다며 얼토당토않게도 신화 원전과 연결하는 네티즌이 있다면, 그 취향의 근원이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하겠습니다.

과거에는 유니섹스라고 했습니다만 젠더리스 컨셉은 여전히 현대에도 두루 무난하면서도 젊고 도회적인 분위기를 창출할 수 있는 유효한 외양이라 생각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샵에 어울리지는 않아 바잉은 염두에 안 두지만(역시 저의 감각으론 속속 납득이 안 되는 평가이십니다), 다른 편집숍(더 젊은 층을 염두에 둔- 아 그런 뜻이였군요 이제 겨우 접수)에는 코너에 따라 훌륭한 서브 밸런스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요 대목은 그냥 저의 표현입니다) 조언을 베푸시는군요.

저자는 스테판슈나이더(브랜드)를 소개하며 "전형적인 유러피안 감성의 파스텔 컬러 팔레트로 똑떨어지는 스타일을 보여준다"고 하십니다. 잘은 몰라도 왠지 그럴 것 같습니다. 저자는 앤 드뮐미스터(우리나라에선 이렇게들 쓰는데 정확히는 "드묄러메스터"입니다. ee는 "이"가 아니라 "에"의 장음이라서요)와 이분이 학교 동기라는 점까지 거론하시는데, 이 책에서는 드뮐미스터를 독립 항목으론 안 다룹니다.

"트래디셔널 미니멀룩이야말로 트렌드나 유행에 관계없이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저자가 이 책 곳곳에서 펴는 지론 중 하나입니다.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좋은 브랜드의 고급스러운 룩을 구매하라"는 겁니다. 이런 좋은 충고가, 돈도 없는 주제에 잔돈푼 월급 모아 지가 걸칠 명품만 자나깨나 생각하는 정신 빠진 인간 좋으라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빅토리아 베컴을 두고 "코스의 의상은 예쁘다. 그러나 진정한 럭셔리 라인의 미니멀리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2%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고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착한 가격이 거의 모든 사소한 불만족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씀도 좀 씁쓸하게 공감되는군요.

책에서는 역시 대세를 충실히 반영하여 스칸디나비안 룩을 따로 한 챕터 분량의 분석,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 앤 소피 백(안 조피 바크)은 꽤 긴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입니다만 저자께서 지적하시는 대로 "지적이고 스타일에 신경 쓰면서도 혁명적인 이미지를 좋아하는" 여성들에 의해 (여전히) 선호, 지지되는 디자이너의 작품들입니다. 책의 바로 직전 편 "아방가르드"에 분류되었어도 잘 어울릴 성격이었죠. 필리파케이, 타이거 오브 스웨덴 등 유서 깊은 명품이 있는가 하면, 세실 코펜하겐 등 "어린(저자의 표현)", 그리고 패기넘치는 컬렉션도 있습니다. 바이킹의 시대가 저문 지 천 년이 지났어도 유럽 게르만의 아득한 원류, 순혈이라는 고유의 혼과 자부심이 있기에 이토록 긴 역사를 면면히 이어 오며, 1차 산업과 가공업 외에도 이런 고부가가치 산업의 한 핵심을 영위해 나가는 거죠.

저자는 영어 이름을 Anya로 쓰신다고 하는데, 이름이 같은 가방 브랜드 중 안야 힌드마치라는 곳이 있는가 봅니다. 전세계에 여섯 곳만 운영되는 매우 희귀한 스토어인데, "고객이 자사 제품과 함께 자신이 그린 그림 혹은 손글씨를 가져 오면 장인이 그 자리에서 수를 놓아 주거나 새겨 준다(p391)"고 하는군요. 이 브랜드가 특히 인기 높은 곳이 일본인데, 저자는 그 이유를 "장인과 고객을 이어주고자 하는 브랜드의 노력을 알아주는" 분위기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우리 소비자들은, 브랜드나 디자이너만 떠올리지 만드는 장인의 수고는 그리 염두에 안 두는데, 소비자뿐 아니라 브랜드에서도 다들 장인을 그리 각별히 대접하는 풍토인 것만도 아니라고 봅니다. 책에서는 그 점을 환기시켜 주어 유익했습니다.

에필로그에는 역시 멋진 말씀이 많이 나오네요. "패션은 살아 있는 생물이다." 이 말은 한국에서는 어느 정치인이 자신의 종사 분야인 정치를 주어 삼아 코인한 구절인데, 직업인 모두가 명심해야 할 사항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해진, 아주 제한된 범위만 딱 설정해 놓고, "조거 이상 일하면 내가 손해"라며 딴짓이나 하다간 반드시 퇴출됩니다. 목표는 언제나 살아 숨쉬며 종사자를 리드하고, 마치 헬라 신화의 프로테우스처럼 모습을 수시로 바꾸며 관찰자의 눈을 어지럽히기 마련입니다. 고착되어 과거만 주시하는 자는 반드시 낙오합니다. 저자께서 지적하듯 현재 유통 빅 3(현대, 롯데, 신세계)가 주도하는 업계의 재편 전망도 이런 맥락에서 관찰될 필요가 있겠고, 역시 저자도 시사하듯 단 한 순간도 시장의 동향으로부터 주의를 놓지 않고 연구하다, 골든 타임에 혁신의 결단을 내린 과정이 쌓이고 쌓여 이 지점에 이른 겁니다. 단, 현재 중국 시장에서 롯데와 신세계는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인데, 유통과 패션이 결국은 (저자의 지적대로) 한 몸의 지체와 본체처럼 돌아가는 구조를 생각하면, 과연 결과가 어떠할지 주시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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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키퍼스 와이프
다이앤 애커먼 지음, 강혜정 옮김 / 나무옆의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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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구약에 보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의 이기적인 생존만을 도모한 게 아니라, 식용에 직접 기여도 못 하는 각양각색의 동물들까지 모두 큰 배에 싣고 "종 다양성"이라도 수호하겠다는 양 사명감에 불타는 노아의 모습은 현대인에게까지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우리가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 일부이기도 하지만, 그를 넘어 "동물에게도 연대 의식을 가짐으로써, 인간에 대한 근원적 애착과 존엄을 더욱 다지게 한다"는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폴란드에 본래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살기는 했습니다만, 이 책의 주인공 얀과 안토니나 부부는 유대 혈통은 아니었습니다. 부유하고 명성 높은 가문 출신이었고, 나이도 아직 젊었던 터라 조국 폴란드가 언제나 외세로부터 든든히 독립해 왔던 양 긍지와 애국심도 대단했죠. 이민족의 탱크와 폭격기가 강토를 짓밟고, "슈, 슈 하는 거친 치찰음과 낯선 말투, 어휘가 내가 살던 고장을 가득 메울 줄은" 전혀 짐작 못 했던, 외국의 침략은 역사 교과서에나 나왔던 일일 뿐 나와 내 이웃에게 실제로 닥칠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그저 선량하고 자신의 일상을 충실히만 살아 오던 이들이었습니다.

얀과 안토니나는 진심으로 동물을 사랑하며, 자신이 돌보던 동물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베풀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일생을 두고 가꾸던 동물원은, 1939년 9월 1일 나치가 국제법이란 깡그리 무시하고 폴란드의 국경을 무단히 넘음으로써 처참히 망가졌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동물들 역시, 여태 평화로이 거주하던 터전이 철저히 파괴되고, 생전 겪어 보지 못하던 혼란과 결핍, 굶주림에 시달리며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전쟁통에 피난 행렬을 떠나는 난민들에 대해서는 무심히 눈길을 주는 데에 그치지만(지금도 진행형의 현실 아닙니까? 아프리카 각국이나 시리아 같은 데서요), 난데없이 폭격을 받은 동물원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황 상태에 빠진 동물들을 놓고는 그 상상 만으로도 측은함이 솟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정을 베푸는 듯하면서, 경멸감과 쾌감까지 드러나며 빈곤과 전쟁의 참상을 비웃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나치나 공산주의 잔당처럼이나 비뚤어지고 타락한 심성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도 자기 감정을 다룰 때는 추한 눈물을 지어가며 자기 연민에 빠지죠. 싸이코패스보다 몇 배는 더 저질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얀과 안토니나의 조국은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히틀러는 참으로 가증스럽게도, 명시적으로 "폴란드의 문화, 인종, 관습, 이익 등 모든 것을 철저히, 서서히 말살하라."고 명령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자기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다 부수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설령 그랬다 해도 용서가 안 되지만), "레벤스라움"을 마련하려고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선 제노사이드를 획책했다니 이런 나쁜 놈이 또 어디 있습니까.

저자는 다분히 풍자적으로, 히틀러가 노린 건 "사람의 레벤스라움"뿐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의 미친 순혈주의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 종에 대해서도 같이 적용되었는데, 이런 걸 보면 무지하고 비뚤어진 인간의 광신이, 어느 정도까지나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불쌍한 보르수니오!" 가족 같던 어린 것이 겁에 질려 문 앞에서 애원했을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팠다.(p74:1) 가업을 동물원 경영으로 삼고 사람보다 더 자주, 더 속 깊게, 동물들과 소통했을 자빈스키 부부가 꼭 아니라도, 우리 독자들 역시,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을 맞고 이러저리 분주히 뛰어다니며 생존을 도모했을 동물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지죠. 상상만으로도 너무 불쌍합니다. 혹시 동물들도 궁지에 몰려 다 죽어가는 인간을 보면, 자신의 생존에 어느 정도 여유가 확보된 후라면,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냉정하게 그런 사정을 주판알 굴려 가며 계산한 후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불쌍하니까 도와 주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합니다. 자, 그리고, 이제 다시 히틀러가, 유대인, 집시, 불구자 등에게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떠올려 보십시다.

루츠 헤크는 이 논픽션 저작 속에서 양가적인 성격을 띤 인물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생각할 여지도 베풀 필요 없는, 또하나의 극악무도한 나치"로 여겨도 무방합니다. 저자도, 또 자빈스키 부부도, 그 판단을 크게 다르지 않게 내립니다. 여튼 이 논픽션은 꽤 공정하기에, 그의 외견상 신사적이고 품위 있는 처신(속에 무엇이 들었든 간에)까지도 상세히, 또 인상적으로 묘사합니다. 아이히만이나 히믈러, 괴링 같은 자들도 취향은 꽤 고상하고, 반려동물을 특히나 아끼고 사랑하는 면모를 보인 이들이었음을 고려하면, 이 헤크란 자의 다분히 모순적인 개성은 그리 놀랍다거나 충격적인 것도 아닙니다. (숨은 동기로는, 이 서평 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만 동물의 레벤스라움"을 마련할 작정이었다는 걸 저자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저자의 연구는 참으로 폭 넓어서, 식민주의자들의 공통 습성 중 하나가 새로이 식민한 지역에 기존 거주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식하고 싶어한다는 것도 날카롭게 짚습니다) 자빈스키 부부는 유대인도 아니고, 해당 지역에서 오랜 시간 기반을 다지며 풍족한 생활을 영위한 계급이기에, 헤크는 "같은 중산 계급의 동질감"으로 이들을 정중하게 대우합니다. 일단은요.

민간어원설에 불과하겠지만 폴란드라는 나라 이름이 히브리어로 "포 린", 즉 여기서 쉬라(이 책 p22 중간쯤)는 뜻과 통해서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폴란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히틀러에게는 가뜩이나, 독일인의 거주 공간을 침훼하고 드는 슬라브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차에, 유대인들까지 바글바글하니 얼마나 못된 침략 야욕을 합리화하기에 좋은 여건이었겠습니까.

"지엔 도브리!" 폴란드는 제법 떨어진 프랑스의 문물 영향도 폭 넓게 받았지만(유럽에서 안 그랬던 국가가 없긴 하지만요),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민족이기에 러시아 문화와 닮은 점이 꽤나 많습니다. 이 책 저자는 "독일"에 대해 그처럼이나 오랜 기간 동안 침략당하고, 점령되고, 무시, 능멸당한 역사를 언급합니다만, 사실 폴란드를 직접적으로, 더 자주, 더 길게 괴롭힌 건 당연히 러시아입니다. 저 인삿말도, "도브리 지엔(디엔)!"이란 러시아어 인사와 어순만 차이 날 뿐 거의 같은 구성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레지스탕스라고 하면 비시 정부와 나치 직접 통치 지역에서의 프랑스에서 이뤄진 저항 활동만 압니다. 그러나 이 책은, 폴란드인들이 나치에게 야만적인 기습 침략을 당한 후 생활 터전이 초토화한 후에도, 얼마나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사보타지, 소규모 공격, 정보망 가동, 위조 증명서 발급 등으로 후방에서 나치를 괴롭혔는지 자세히 묘사합니다. 폴란드 레지스탕스가 이토록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 줄 소상히 확인하는 것도 책을 읽는 큰 재미와 보람 중 하나였습니다. 세계 역사가 이런 줄기찬 노력을 너무 과소평가해 온 듯하고요. 폴란드는 1980년대 레흐 바웬사의 자유 노조 운동을 통해 공산주의의 압제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저항을 벌였습니다. 이런 노력이 아니었다면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일은 없었거나, 훨씬 늦게 일어났을 겁니다. 2차 대전사를 읽다 보면 폴란드 망명 정부(김광균 시인의 <추일 서정> 중 어느 구절 때문에 친숙하기도 하죠)의 분투, 영국군에 조력하며 펼친 활약이 지나치게 폄하, 푸대접 받는 대목에서 분개하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런 사항들이 더 단단한 맥락을 갖추게도 되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선 지금도 바그너의 곡들을 공개장소에서 연주하는 게 금기시된다고 합니다. 사실 독일은 인류 문명 창달에 기여한 바가 너무도 큰, 뚜렷한 문화 민족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부부가 급박한 상황에서 "독일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p361 중간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독일어로는 슈텐트헨. 도이치넘버 889)"를 연주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곡은 아주 고품격의 클래식이라기보단 (너무 자주 들어서 그런지) 민요처럼 궁상맞은 느낌도 없지 않은데, 여튼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순수 예술 작품도 이처럼 후손들의 실책과 과오에 따라 흉측한 빛깔이 덧씌워지는 건 참 안타깝죠.

자빈스키 부부의 영웅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동료는 게슈타포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두 열강의 싸움판 가운데에 끼어 피해를 입는가 하면, 마침내 소련군의 진주에 의해 이뤄진 바르샤바 해방은 진정한 해방도 아니었습니다. 책에 자세히 서술된 대로, 독일인들은 폴란드인에게 너무도 낯설게 들리는 이방의 어휘, 언어를 구사하며 나치 군의 행진에 뒤이어 "살 터전(레벤스라움)"을 찾아 몰려와선, 이곳저곳에서 식민지를 일구고 살려 들었습니다. 강점기에 일인들이 보였던 행태와 비슷하죠. 이러던 게, 소련의 진주와 함께 썰물처럼 휩쓸려 나가고, 구 동프로이센이나 오데르 나이세 동안(東岸) 같은, 전통적인 독일인 거주지 일부에서조차 독일인들이 대거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땅은 폴란드에 고스란히 귀속되었으나, 소련은 대신 폴란드 동부 영토를 집어삼켰는데, 소련은 폴란드의 민족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고 탄압했습니다.

"감히 전쟁(2차 대전 발발, 나치 침략) 전의 독립을 찬양하거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봉기에 참여하여 싸웠던 이들을 영웅시하는 행위는, 반동적이고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위험시되었다(p391에서 재인용)..." 자신의 의지와 주견을 자유롭게 펴면서 살 수 없는 어떠한 개인, 집단, 민족도, 마치 야생의 본능을 억압당하며 동물원에 갇혀 박제된 생을 연명하는 신세와 다를 바 없음을, 이 책은 예외적이고 온정적이며 정의로웠던 개인들의 실제 삶을 통해 잘 보여줍니다. 왜 우리는 자빈스키 부부의 사연을 지금에서야 알게 된 걸까요? 억압자 소련과 사실상 타협, 공모하여 약소 민족의 명예와 권익을 무시한 미국의 의도 때문이라고 해도 그리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제국주의 세력의 야욕과 만행 때문에 크나큰 상처를 입은 처지이기에, 이런 슬픈 역사를 접하고 얻는 감회가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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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린터 - 언더월드
정이안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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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단거리보다는 장거리 달리기에 더 특화된 종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라토너들 못지 않게 100m, 200m 등 단거리 선수들에게도 큰 환호를 보내며, 광고 시장 등에서의 "상품 가치"는 이들 단거리 선수가 더 높이 매겨지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에는, 인간의 눈 앞에 더 바싹 다가선, 더 높이 세워진 한계, 장벽에 도전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고 장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있겠습니다.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려면 물론 근력도 갖춰져야 하고 (이 책 중간쯤에도 언급이 있는 대로) 유연한 리듬감도 배양되어야 만족스러운 기록이 나올 것입니다. 테니스 같은 스포츠와는 달리 육상 단거리는 10대 시절에 전성기를 맞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한데, 여러 이유로 동아시아인의 신체 특성은 백인이나 흑인 등에 맞서 겨루기 어려운 한계도 지녔죠. '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쾌거를 이룬 류샹 선수가 당시 크게 화제가 된 건 그래서 당연했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처럼, 아직 어린 청소년이, 우리 동아시아인에게 영원히 아득한 목표처럼 여겨지는 육상 단거리에서 빼어난 기록을 세우고, 전국민(나아가 세계인)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다면 참 신나는 상황일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작품 속 1인칭 주인공 "강단"은, 매니저 스티브의 실수로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도핑 테스트에서 적발된 탓에, (이 작품 속 표현을 그대로 따르자면) 한순간에 "국민영웅에서 국민 쓰레기로" 전락한 형편입니다. 악플에 시달리고 비전도 사라진 채 막막한 신세가 되어도 이 소년이 버텨낼 수 있는 건, 피 한 방울 안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친동기간보다 더 사이가 좋은, 창던지기 선수 지태, BJ 연아, 이 둘과 영원한 삼총사로 즐겁게 지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견뎌낼 수 없는 일도, 나의 분신, 혹은 alter ego라 할 또래 친구들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고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소년소녀는 각각 다른 가정에서 자라다 한순간에 고아가 되었는데, 아이들을 모두 입양해 자신의 친자녀처럼 키운 고마운 "엄마"가 한 분 계십니다. 무작정 사랑을 베풀고 매사에 양보를 해 줘도 사춘기 아이들이라는 게 마냥 착하게 굴지만은 않는 게 차라리 당연한데, "어떤 일"을 계기로 이 아이들은 엄마가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깨닫고 정말 화목한 가정을 이룹니다. 이런 배경 사정은 회상과 대화 중에 지나가듯 언급될 뿐이고, 소설은 막을 엶과 동시에 거의 막바로 초대형 테러의 발생으로 서울, 우리가 사는 바로 그 도시, 전철 1~8호선과 몇 종류의 노선이 더 복잡히 얽히며 운행되는 그곳에서, 커다란 혼란이 빚어진다는 급박한 전개로 돌입합니다.

전철 테러는 픽션에서 드문 소재가 전혀 아닐 뿐더러, 아직 애들이다 보니 세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지극히 단순한 터라(단, 여자애인 연아가 꽤 똑똑하고 예리한 편입니다), 처음에는 별 기대가 안 되었던 게 사실입니다. 대개 이런 영 애덜트 대상 SF 판타지(단, 이 소설이 판타지에도 무난히 분류될지는 좀 생각을 해 봐야겠습니다)에서 설정은 매우 참신하고 거창하게 벌여져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참신한 초기 세팅이 재미의 전부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소설은 반대였습니다. 갈수록 설정 밀도가 높아지고, 서서히 드러나는 진상도 충격적으로 꾸며졌습니다. 캐릭터들도 처음에는 "그저 애들"로 여겨졌는데, 이야기가 흥미진진 전개될수록 각자의 개성을 더 굳혀가더군요. 천진난만하면서도 의심이 많고, (요원 기현국의 노림수대로) 설익은 영웅주의에 쉽게 휩쓸리지 싶으면서도 영악하고 이기적인 면모도 드러내는 터라, 실감과 입체감이 돋보였습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육상 기대주였다고는 하나 능력, 인격, 감성 모든 면에서 성장 도상에 놓인 아이들일 뿐이고, 그나마 다른 두 아이는 평범한 자질일 뿐입니다. 또 자신의 세계가 붕괴 직전의 위험에 놓일 때, 그저 익다 만 "달리기 재능" 하나로 어떻게 만인을 구원하겠습니까? 물리적 능력은 물론 정신적 준비도 채 갖춰지지 않은 이들은 그래서 아직 영웅으로 부상할 마음도 안 먹은 상태이며, 당장 이 재난으로부터 자신들과 "엄마"부터 살리기나 하고, 이후에는 "하와이(그저 국외 세상의 은유로 보입니다)" 등으로 이주하여 자신들을 푸대접한 한국과 절연할 생각마저도 품습니다(특히 지태). 이 책은 앞으로 장대히 이어질 <스프린터> 시리즈의 첫 권인데, 이처럼이나 주인공들은 어설프고 무력합니다. 앞으로 길게 이어질 후속 사연에서 우리 독자들은 이들이 "커 나가는 과정" 그리고 죄 많은 세상이 어떻게 정화될지를 지켜 봐야 하겠지요.

[이하 내용 누설이 있으므로 주의해서 읽으십시오. 가능하면 안 읽는 편이 낫습니다]

타락하고 음흉한 정치인인 박정근 대통령, 주한미군 사령관, 국정원장, 에너지공단 이사장(ㅎㅎ) 등은 거의 절대악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남산(과거 중정에 의해 여러 만행이 저질러져 탄압과 압제, 음모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한) 아래에 "노아"라는 거대한 지하 공간을 건설합니다. 여기서 권력은 노숙자들, 실직자들, 혹은 4류 코미디 영화에서 참된 자아상을 발견하는, 테러리스트를 닮은 부적응 호구 등을 대거 끌어들여 생체실험을 하는데, 기본 전제는 "이 좁은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이 산다"는 겁니다. 다수는 생산에 기여도 못 하고 그저 다른 이의 짐이 될 뿐인데, 그렇게 의미 없는 연명을 할 바에야 마루타 노릇으로 동시대인과 후손에 좋은 일이나 좀 하라는 거죠. 과학자들은 인체를 통해 핵에너지를 능가할 만한 엄청난 근원적 힘을 뽑아낼 수 있게 되는데(소설 속의 표현에 따르면, 이 배터리를 일렬로 세워 미 대륙을 횡단하게 할 경우 일시에 폭발시켜 지각 전체를 다 날려버릴 수 있다네요), 이들 노숙자들이 항구적 바이오매스처럼 포박된 채로 지상의 거주자들을 위해 싼 값으로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괴생명체인 프로젝트 피조물 하나가 중요한 구실을 하는데, 얘 이름이 "신야"입니다. 정체가 계속 가려져 있다 후반부에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치 폴 버호벤의 <토탈 리콜>에서 반란군 지도자 쿠아토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사실상 하등 종족으로 고착화한 노숙자나, 그곳 화성의 방사능 오염 돌연변이 족속이나 닮은 점도 많은데, 여기서의 신야는 섬뜩한 늙은 추물인 쿠아토와는 달리 중성적 외양의 꼬마이며 독립 신체를 지니고 잘 돌아다닙니다. 잘 돌아다닐 뿐 아니라 염력으로 비언어적 소통을 자유롭게 행하는데, 쿠아토뿐 아니라 <맨 인 블랙 III>에서의 그리핀과도 비슷한 능력입니다. 아니면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에 나오는 그 누구하고도 좀 닮았죠.

여기서 압권인 건 국정원 요원 기현국이 아이들 셋의 행방을 드론으로 파악한 후, "빨간 버튼을 눌러" 모두를 구하라고 이중의 거짓 설득을 하는 장면입니다. 자기 딴에는 철두철미한 양심의 발로로써, 윗선의 (더 잔인하고 야비하며 파렴치한) 지시까지 생까고 짠 계획인데, 이 말을 들으면 우리의 주인공들은 다 죽게 됩니다. 이들이 위기를 모면하는 과정은 직접 책을 읽어 보고 확인하시고요. 근데 신야가 너무 사기 유닛이라 능력치 밸런스가 좀 안 맞기도 합니다. 신야는 모든 것(못나고 유한하며 어리석은 인간들[동시에 자신의 창조주이기도 한]의 탐욕, 감정 따위)를 이해하지만, 그 천박함과 빤함에 질렸는지 내내 냉담하고 태연하며 무관심한 표정입니다. 이런 캐릭터의 매력과 개성이 앞으로 이 긴 사연을 이끌어 갈 하나의 동력이기도 하겠습니다.

p280이하에 보면 철덕을 자처하는 어느 네티즌(이렇게 평범하고 이름없는 선의의 시민들이 모여, 아직은 어설픈 주인공들을 도와 악한 세력의 음모를 분쇄한다는 게 주제의식 이해에 필수인 사정이죠)이, "이 테러가 참으로 이상한 게, 그렇게 특정 구역만 클리어 커팅하듯 파괴하는 폭파가 현 기술 수준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웹에 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대목의 상세한 설정은 작가의 심도 있는 연구가 선행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서술이었을 겁니다. 그저 기발한 상상만으로는 SF가 현대 독자의 구미를 사로잡을 수 없는데, 이런 성의와 설계상의 치밀함이 읽으면서 참 좋았습니다. 다만 용병대장 뭐 이런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뿐, 이런 극비의 프로젝트에 뭘 한몫 낀다는 게 좀 현실감이 떨어지지 않나 싶었고, 작가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의심을 받고 발끈하는 모습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2부가 여튼 많이 기대되네요. 투자비 많이 들여서 한국형 헝거게임이 영화 포맷으로 또다른 한류 열풍을 일으켰으면 하는 응원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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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선비들 - 광기와 극단의 시대를 살다
함규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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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극단의 시대를 살다."

선비들이 가장 처세하기 어려운 시기라면 당연 정치권력의 지평이 급변하는 때이겠습니다. 교활한 상인들이나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저 새로운 질서에 영합하여 잇속을 취하거나(참으로 가증스럽지만 본디 천한 장사치들의 생리가 그러하니 탓할 일도 아닙니다), 가뜩이나 주리던 배를 혼란기에 더 곯지나 않게 생존에의 고민에 정력을 쏟으면 그만이죠. 하지만 특히 동아시아 전통 유학의 가르침에 지조와 지성을 바친 이들이라면, 육신을 지닌 인간이기에 물리적 생존도 꾀해야 하고, 공부한 게 아까워서라도 입신 출세의 길을 곁눈질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닦은 정신의 칼날이 아까워서라도 아무에게나 충성을 바칠 수는 없고, 여러 모로 고민의 겹이 두터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라 남달리 총명하단 소리를 듣고 자란 이들이, 하필 이런 난감한 시절을 만나 극단의 번민과 훼절을 일삼거나, 혹은 반대로 대쪽 같은 지조를 지키다 한생을 마치는 과정은 그래서 남다른 감회를 부릅니다.

이 책에는 주로 구한말, 일제 강점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아, 다양한 이력과 평판을 지닌 이들의 생애가 압축되어 실렸습니다. 모두 스무 명의 "선비" 열전인데, 이들 중 상당수는 (당연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방백세, 어떤 이들은 유취만년, ... 그들이 몸 담고 분투한 분야는 다양해도, 이처럼 "선비"라는 범주 하나에 공통적으로 묶일 수도 있다는 점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선비의 생을 압축적으로 소개했다지만, 다들 익히 알려진 인물들이기에, 사항 나열이나 행적 요약에 그치는 또하나의 책 아닌가 생각도 잠시 했었으나,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매 장은 저자의 개성적인 관점이 충분히 녹아 있고, 그간 전해 오는 정보를 비교문헌 방법론이나 일반 고증을 통해 비판한 대목도 많으며, 무엇보다 문장이 명쾌하고 유려합니다. 그런 반면 현재 한국의 정치판을 어지럽게 더럽히는 진영 논리(어느 편이건 간에)가 최대한 절제되어 있어, 어떤 편향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친일 성향이 두드러진 인물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인간적인 번민이라든가, 권력과 총칼 앞에 누구라도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치를 고려하여, "인간을 인간으로 본 시선"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완용 같은 구제불능의 악질은 (그가 혹여 선비적 소양이 매우 뛰어난 면 있었다 쳐도) 아예 논의의 대상이 안 됩니다.

친일파의 대척에는 당연히 우국지사의 지조 높은 삶이 서 있겠으나, 이 책은 무능하고(선비로서야 탁월했겠으나, 관료로서 지도자로서 한없는 결함을 노출했던) 유약한 선비들 못지 않게, 그들의 꽉 막히고 융통성 없는 사상적 경향, 나아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대, 모화사상까지도 짚고 넘어갑니다. 모든 선비는 그 나름의 이유에서 비판 받을 이유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남다른 재능이나 의기, 집념으로 이룬 학문적 성과를 또 따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고지식한 훈구 척사 진영이 있는가 하면, 양심과 쓸개를 모두 팔아넘기고 일제에 들어붙은 이들도 있는데, 그 중간에 서서 추상같이 민족 반역자를 타매함은 물론, 시류를 무시하고 고지식하게 옛 질서에 집착한 이들까지도 싸잡아 비웃은 매천 황현 역시, 저자는 그만이 범했던 독특한 오류를 지적하며 비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물론 뛰어난 점은 그것대로 선명히 짚고요. 이처럼 오로지 근대성의 관점에서 모든 인물을 재해석하기에, 유치한 선과 악,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독자를 호도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최익현은 일생을 두고 흥선대원군과 척을 진 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대원군 개인에게 증오의 초점을 두어서라기보다, 그가 지향하는 정통파 유학의 이상향을 구현하는 데 이하응이 일일이 장애물 구실을 해서였을 겁니다. 척화비를 세우는 등 대원군이 필요 이상의 강경노선을 걸었던 것도, 이들 최익현으로 대표되는 정통파 유림과 선명성 경쟁을 벌이다 보니 원치 않던 선을 넘은 것도 있겠지요.

중반부 박제순 항목에 지나가듯 언급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외국의 외교관들이 그를 평가하길, 말귀를 잘 알아먹으면서도 강경하지 않아서 좋다고들 했다..." 이 말은 뒤집어 새기면, 말귀도 못 알아먹고 무조건 대책없고 비현실적인 강경론만 고집한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도 됩니다. 물론 박제순은 뛰어난 어학 실력을 자랑하는 유능한 관료였겠으나, 이 책에서도 뼈아프게 지적하듯 강단도 없고 의기도 부족하고 긴 시야로 시국을 내다보지도 못한 채, 그저 무력과 협박에 굴복하는 걸로 처신의 전부를 채운 불쌍한 친일파였습니다. 이 점에서, 저 혼자 신이 나서 친일과 매국의 풍악을 울린 이완용과는 구별되죠. 또 책 뒤에 나오듯 마음으로부터 일본의 문물을 사모했으면서 정작 세상이 바뀔 때 훈작이나 금품을 챙기지도 못한 이인직(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빈선랑을 두고 저자는 전국시대의 세객 장의와 비교하는 탁견을 제시하네요) 같은, 어리석고 둔한 친일파와도 다릅니다. 김윤식은 어떤 포지셔닝을 하기가 좀 모호한 편인데, 유명한 불가불가(세 가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죠) 코멘트가 그의 흐릿한 개성을 잘 대변합니다(저자께서는 이 일화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입니다). 여기 잠시 등장하는 외부 교섭국장 이시영은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권투선수... 가 아니라 초대 부통령인 바로 그분입니다.

유길준과 김옥균은 이들과는 또 빛깔이 많이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양반 권귀 가문의 엘리트들은 물론, 상놈(책에 나온 표현 그대로입니다) 출신, 궁녀 할 것 없이 그가 내세운 대의에 공명하여 죽음도 개의치 않고 거사에 동참했다"고 하시는데, 그가 예사로운 인물 같았으면 결코 이런 헌신적인 동지들이 따르질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본에 망명하여 파당적 활동에 몸 담는가 하면, 특유의 풍류 거사 기질을 못 버리고 한가하게 로맨스를 벌이기도 하죠. 저자는 특히 "마지막 몇 달만 참았던들 오히려 정계 중심에 화려하게 복귀할 수도 있었다"며 정치적 안목에 대해 낮은 평가도 하는데, 제 개인적 생각으론 결과론적 성격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여튼 흥미로운 견해이긴 합니다.

김옥균 못지 않게 부유한 태생이었으면서도 유교의 정통 교리에 충실하기 위해 "극단적 청빈"을 택한 선비로는 전우라는 분이 있습니다. 사실 서양의 초기 기독교도 그랬고 특정 가르침에 문자 그대로 충실하며 엘리트의 가치를 지키려 든 이들은 대개 물질과 물욕을 아주 크게 배격했습니다. 전우의 사례는 좀 의아한 면이 없지 않으나, 그가 가르친 제자들 중 김병로, 백관수 등이 모두 빼어난 인재로 성장한 걸 보면 은둔자로서의 그의 생이 참으로 보람에 가득찼다고밖에 평가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평안히 다지고 정신의 평형을 찾았기에 당시로서는 극히 장수한 편인 팔십수를 누린 것이겠고요.

최익한 역시 뼈대 있고 가세도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기로 유명했는데, 다만 저자는 특유의 예리한 분석으로 "그저 암기력이 출중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놀랄 만한 기재를 뽐냈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 마디를 하시네요. 어느 편이든 간에 종래의 유학 경전 암송, 과거 급제, 출세의 루트가 유일한 인생의 목표였던 세상이라면, 이분은 의심의 여지 없는 신동 반열에 올랐을 겁니다. 대개 신중한 성품이었던 그는, 스승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저자의 표현입니다) 곽종석이 일제의 모진 처사로 목숨을 잃자, 그때부터 거침없는 실천가, 혁명가로까지의 노선 전환을 보이며, 나중에는 사회주의자, 맑시스트로까지 변신합니다. 이 챕터 끝에는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풍채가 근사한 젊은 날의 김일성이놈도 보이고, 그 뒤를 백범이 걸어가는 귀한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아마 저자의 의도는 이 남북협상단의 일원으로 최익한이 참여했음을 독자에게 상기시키려는 거겠지요. 백범은 본인 자신이 유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므로 어느 기준에서도 "선비"에는 못 끼는데, 책에는 유림의 유(儒)가 겁쟁이 유(懦)와도 통한다더냐?라고 비웃던 그의 일화도 나와 있습니다. 백범은 이 책에서 여러 대목에 등장합니다.

심산 김창숙이나 단재 신채호처럼 그야말로 굽히지 않는 절조와 강단으로 일생을 채운 분들도 나오는데, 저자는 특히 "해방 후 점령군처럼 느닷 성균관을 장악한" 심산을 두고 여러 소회가 엇갈리시나 봅니다(모교의 창설자이시기도 한데). 이처럼 비범한 기개와 총기를 자랑한 분이 있는가 하면(다수죠),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아 이십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진로를 고민한 이병헌 같은 선비의 일생도 우리 독자에겐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백범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만년에는 무도한 약육강식의 풍조에 염증을 느껴 "유교의 종교화"만이 모두가 살 길이라는 결론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실 성균관이 지금까지도 말끔히 해결 못 한 난제이고 고민이기도 하죠. 선비들의 고뇌와 번민에 가득찬 행보를 보며, 우리 민족이 이 근세를 얼마나 힘들게 통과했는지 더듬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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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버스에 돌을 던지다 - 작은 손들의 반격 성장이 어떻게 번영의 적이 되었는가
더글라스 러쉬코프 지음, 김병년.박홍경 옮김 / 사일런스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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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제 - 사회 전 분야에 도도히 밀어닥치는 뉴 메가트렌드를 "4차 산업혁명"이라 일컫습니다만, 수십 년 전에도 (오늘날에 와서) "3차 산업혁명"이라 (재)규정될 만한 흐름이 분명 있었습니다. 경제, 산업 현상은 그 독자논리로 설명되면 충분하지만, 사회학자, 인문학자들은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인문적(혹은 다른 패러다임적) 의미 부여를 하려 들었습니다. 정보화의 물결은, 필연적으로 불특정 다수 사이에 다량의 정보가 공유되는 결과를 낳고, 이것이 민주주의, 탈 중앙집권, 경제 민주화 등을 차례로 유발한다는 게 그간 많은 이들(적어도 진보 진영)이 막연하나마 품어 왔던 기대였습니다. 실제로 그런 기대는 그간 적지 않은 부분이 충족, 실현되기도 했고, 아랍의 봄이니 유로마이단이니 하는 대사건들이, 모두 정보의 민주화라는 분명한 대세의 덕을 입은 게 확실합니다.

이 책은 크게 보아 마르크스적 진보 패러다임을 적잖이 계승하고(물론 현대적 재해석과 비판도 다분히 개진합니다만), 현재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역사의 진보, 민주주의의 확산, 자본의 착취적 작동 기제 완화(내지 폐지)와는 상당히 먼 목표와 결과를 향해 달려감을 꼬집은 내용입니다. 저는 처음에 제목만 보고 일부 (IT) 기업의 이기적, 반사회적 행태를 고발한 내용일 줄 알았는데, 그보다 다루는 범위와 주제가 훨씬 크더군요. 매우 원대한 비전과 분석을 담은 책이므로, 경제학, 사회학의 세부 어떤 분야에도 부교재 비슷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 어르신 세대 같으면 사회과학 동아리에서 발제용 텍스트로 대번에 선정되었을 성격입니다. 물론 효용이 다한 고리타분한 이념 타령이 아니라, 소재가 철저히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경제 구조적 모순, 비위, 혹은 불건강한 혁신 등에 초점을 두었기에, 과거의 이념 추이에 대해 전혀 몰라도 읽어 나가는 데에 부담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쪽에 소양이 있는 독자들이 이 책을 훨씬 재미있게 독파할 것입니다. 마치 오래 전에 끊긴 시리즈물이 뜻밖의 시점에서 속편을 내놓은 양 말이죠.

자연이 편안히 제공해 주는 정도 분량의 식량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만큼 종족의 머릿수가 늘어남에 따라, 우리들 인간은 일정한 체제를 구성하여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을 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화폐 경제, 시장 경제는 본디 아주 소박한 기원을 잡고 시작되었습니다. 저자는 귀금속류와 "영수증"류가 어떻게 해서 금속 화폐, 지폐로 탈바꿈을 했는지 매우 직관적이고 재미있게 설명하시는데, 좀 지나친 단순화라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많은 초보 독자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서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튼, 저렇게 소박하게 시작한 시스템이, 어떤 무오류나 영속적인 특성을 본질로 그 안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자연히 모순이 발생하고, 수시로 기름칠을 해 주지 않으면 반드시 부작용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수시로 표현되는 대로, "꼬리가 개를 흔드는" 역작용은 바로 성장 제일주의, 물신주의, 시장 만능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 따위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핵심에 놓여지는 키워드는 "자본 수익률과 실물 경제 성장률 사이의 간극, 괴리"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실물의 성장, 생산은 속도가 느릿한데, 오로지 자본만이 쉴 새 없이 과실의 증식(쉽게 말해 이자 상환)을 독촉하니, 사람이고 사회고 공동체고 그 등쌀을 배겨내겠냐는 겁니다. 저자께서 탁월한 입담, 빈틈없는 논지로 이런 주장을 펴시니, 책을 읽는 중 독자들은 "아, 성장은 원칙이 아니라 예외에 불과했구나."처럼 절로 설득이 안 될 수가 없더군요.

이러던 게, 중세 이후, 또 1차 산업혁명 초창기를 거치며 착취적 체제의 특성을 더욱 고착시키다 보니, 산출이 늘어나고 생활이 풍족해질망정 사람이 행복해할 시간은 역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결과가 발생하는 거죠. 이제 이 왜 책 제목이 "구글 버스에... "인지로 다시 눈을 돌리겠습니다. 리뷰 서두에 "정보화와 민주화는 함께 가는 친구"란 기대가, 지식인들이나 IT 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만연했다고 썼습니다(물론 이 책을 읽으며 얻은 사항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런 나이브한 기대가 작금의 본격 4차 산업혁명을 맞으며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통렬히 고발한 책이라고 해도 됩니다. 오히려 부의 편재는 가속화되며,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의 독점은 더욱 공고해지고, 사람들은 (이미 여러 미디어에서 경고 섞인 보도를 해 온 대로) 일자리를 도처에서 잃어갑니다. 마르크스 이래 여러 사상가들이 지적해 온 바대로, "일에서, 경제에서, 생산에서, 사람이 소외되어서는 안 되며, 사람은 언제나 최우선의 가치를 점해야 마땅한데" 최근의 추세는 그와는 정반대로 간다 이 소리입니다. 물론 이 책은 그런 예리하고 탁월한 결론의 제시에만 장점이 있는 건 아니고, 그런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원용, 정리, 분석된 방대한 사례들을 또 눈여겨 봐야 합니다.

이미 1940년대에 노버트 위너는 사이버네틱스의 시원적 아이디어를 체계화한 적 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위너가 무슨 말을 꺼낸 건지 이해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을 텝니다. 우리는 지금 그가 예견한 사회상이 거진 다 실현되어가는 "미래"에 살고 있기에, 이 예견이 얼마나 너른 지평을 마련했었는지, 또 그 지엽적 희망 일부가 어떻게 역설적이고 파괴적인 결말로 수렴해 가는지, 민망하게도 일일이 관찰해 가는 처지입니다.

MIT의 브리뇰프슨과 맥카피는 "대 분리(great decoupling)"이란 개념을 규정하는데(이 책 p72), 이건 쉽게 말해서 혁신과 성장(실물 성장이 유지되는 기간에서조차)은 성장대로 따로 놀고, 사람들의 만족이나 행복, 일자리 수 등은 그것대로 감소, 퇴락, 하향세를 따로 그린다는 겁니다. decoupling이란 말 자체가, 과거 한때에는 동조화를 이루던 때도 있었음을 암시하지 않겠습니까? 자본주의가 한때 맹렬한 찬사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커플링"이 매우 희망적 추세를 보였을 시절입니다. 자본은 증식하고, 부자는 당연히 돈을 벌고, 노동자도 덩달아 풍요를 누릴 수 있던 "호시절"말입니다. 정보화 사회가 추세를 가속화하고 새로운 동력으로 떠오르면, 이런 장밋빛 희망은 더욱 농도가 짙어졌으면 짙어졌지, 그 빛이 퇴색하지는 않으리라는 기대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일부 이기적이고 타락한 경영 윤리, 생산 방식을 가진 기업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는 게 저자의 논지입니다.

저자는 화폐의 발달사에 대해서도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우리 독자 앞에 능란한 화술로 부각합니다. 그에 따르면, 본디 화폐는 "로컬"한 성격이었으나, 이를 중앙 정부가 권력 집중 과정에서 발행권까지 독점하려 들었고, 현대인들이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상식처럼 "중앙 정부 아닌 그 어떤 단체가 발행하는 화폐란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범죄"라는, 정반대의 통념이 자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요즘 시민사회단체 일각에서 지방화폐 보급 운동을 열심히 펴 나가는 추세가, 이 관점대로라면 더 의미심장해지기도 하죠. 그게 별난 게 아니라, 이제서야 정상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겁니다. 영어에 seigniorage effect란 말이 있는데, 이 용어가 처음 코인되었을 때에는 발행자 측의 부당한 횡포를 꼬집는 의미가 더 강했습니다. 저자는 특히, 부당한 생산성 강요의 행태, 강제 기제가 이미 중앙 정부의 법화 발행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고까지 합니다.

저자가 이 긴 논의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비트코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목에서 그 점까지 유추한 후 기대를 품고 책을 열어 본 독자는 거의 없지 싶은데, 이 책은 (사실)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당연히 비트코인 이야기도 제법 많습니다. 비트코인은 앞서 말한 대로, 중앙정부가 부려 대는 화폐 독점 발행권의 횡포를 전면 제거하고, 지방화폐의 공간적 제약도 극복하며, 인쇄기술의 복잡한 잔재주도 부리지 않은 채 이중거래, 부정거래, 조작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빼어난 기술입니다.

그럼 이 착취적 시스템으로부터 경제적 약자를 해방시킴과 동시에, 거래의 편의도 증폭하고, 거래비용도 0에 수렴하게 만드는 자유와 진보의 벗이 비트코인일까요? 저자는 "그 희소성(아직은 아니나 이제 곧 직면하겠죠)"이 바로 민주주의의 적이 될 핵심 독소라고 지적합니다. 비트코인에 투자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언제든 그 대안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요(또, "비트코인은 본디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고도 합니다. 마치 도사님의 예언 같습니다). 저자의 통찰은 참으로 예리한데, 왜 월스트리트가 갑자기 이 가상화폐 투자에 2013년부터 열을 올리기 시작했냐는 겁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중국인들이 부쩍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쪽에서도 일종의 보험이나 헷징 삼아 물량 확보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거죠.

3장은 아예 노골적으로 지역 화폐 이야기입니다. "돈은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거참, 진짜 멋진 말 아닐까요? 우리말 "돈"은 어원상 돌고돌아서 돈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저자야 당연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지만 돈은 기본적으로 무제한의 유통을 보장해야 한다는 거죠. 돈은 결코 그 자체가 가치를 표상해서는 안 되며, 어디까지나 교환과 유통을 촉진하는 수단에 그쳐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이 생각을 조금만 더 확장하면 모든 투자를 투기로 볼 수 있고, 생산된 재화나 용역은 최종 소비자의 직접 효용 창출에만 쓰여야지 결코 딴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건데 조금만 더 나아가면 공산주의 맞습니다^^ 하지만 본디 약과 독은 배합에 따라 용도가 갈릴 뿐 같은 스펙트럼상에 있지 않습니까? 개혁과 혁신,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3장은 후반부에서 지역화폐의 활용에 대한 정책 대안이 꽤 구체적이므로 정말 일독할 가치가 있습니다.

4장은 혹시 정말로 공산주의 아니냐는 오해를 훨훨 떨어내기 위해(?), 금융의 탈개인화, 탈중개화가 어떤 식으로 투자 효율화를 가져오는지, 크라우드 소싱 방식이 얼마나 사업자의 위험과 부담을 체계적으로 덜어내었는지를 논증합니다. p281을 보면, "... 망(net)이 제대로 활용되기만 하면, 자금 제공자는 중개기관을 거치지 않아도 되고, 신속한 엑시트(exit)를 위해 한창 진행 중인 생산을 접을 필요도 없어지며... "란 대목이 나옵니다. 제 생각엔 저 뒷부분이 진짜 포인트인데, 순전히 채권자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발생하는 엄청난 개인적, 사회적 비효율과 낭비가 원천적, 이론적으로 차단된다는 함의 아니겠습니까? 진짜 성장과 번영, 행복, 일자리가 "커플링"되어 행진할 수 있다는 벅찬 결론도 되고요.

저자의 결론은 결국 "탈 권력의 분산경제"입니다. 이 분산경제를 그동안 여러 뜻있는 운동가들과 개혁가들이 이루려 했으나, 그 제도적 뒷받침이 미비했고, 그 이전에 약탈적 시스템의 폐해와 모순도 제대로 간파 못 했던 거죠. 디지털은 잠시의 초기 착시를 통해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꿰뚫게 도와 줬고, 현재 일부 기업들이 독점을 통한 파렴치한 오용을 꾀하긴 하나 이런 움직임 역시 깨어 있는 시민들에 의해 간파되어 간다는 겁니다.("오클랜드 시민들, 구글 버스에다 돌을 던지다!") 돈 몇 푼에 내 자존과 자유를 팔지 말고, 무한히 열린 가능성을 보다 생산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으로 선용하자는 게 결국 저자의 바텀 라인입니다. 절대 어려운 책이 아니니 꼭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좋은 말만 가득 쓰인 책보다 이처럼 이론적 분석까지가 치밀히 이뤄진 책이 훨씬 유익한 자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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