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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좋아하고
또한 술을 좋아한다. 다만 땅이 궁벽하고 해가 흉년이어서 빌리고 사려해도 취할 곳이 없다. 한창 무르익은 봄볕이 사람을 훈훈하게 하니, 다만 빈 바라지 앞에서 저절로 취하게 되는 듯하다. 마침 내가 술 한 단지를 받은 것과 같이 시여취詩餘醉 일부를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이상하다! 먹墨은 누룩이 아니고, 책에는 술그릇이 담겨 있지 않은데 글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겠는가? 장차 단지를 덮게 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런데 글을 읽고 또 다시 읽어, 읽기를 3일 동안 오래했더니, 꽃이 눈에서 생겨나고 향기가 입에서 풍겨 나와, 위장 속에 있는 비릿한 피를 맑게하고 마음 속의 쌓인 때를 씻어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즐겁게 하고 몸을 편안하게 하여, 자신도 모르게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 들어가게 한다.

아! 이처럼 취하는 즐거움은 마땅히 문장에 깃들어야 할 것이다. 무릇 사람이 취하는 것은 취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요. 굳이 술을 마신 다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붉고 푸른 것이 휘황찬란하면 눈이 꽃과 버들에 취할 것이요, 분과 먹대로 흥겹게 노닐면 마음이 혹 요염한 여자에게 취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이 달게 취하여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 어찌 술 일석과 오두보다 못하겠는가? 읽어서 그 묘처를 능히 터득하는 것은 그 맛의 깊음을 사랑하는 것이요. 읊조리고 영탄하며 차마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취하여 머리를 적시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때떄로 혹 운자를 따서 그 곡조에 따르는 것은 취함이 극에 달해 게워내는 것이고, 깨끗하게 잘 베껴서 상자에 담아두는 것은 장차 도연명의 수수밭을 삼으려는 것과 같다. 나는 모르겠노라. 이것이 글인가? 술인가? 지금 세상에 또한 누가 능히 알겠는가?

*이옥(李鈺, 1760~1812)의 글 묵취향서墨醉香序이다. 명나라 반유룡이 편찬했다는 사선집詞選集을 읽고 난 후에 붙인 서문이라고 한다. 이옥의 독서론과 문장론에 대해 채운의 책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다'의 '취하고 토하라'는 쳅터에 담긴 글이다.

몇 번이고 읽기를 반복하고 있다. 글 맛에 이끌려 머물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취한다는 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곱씹어 보기 위함이다. 책을 손에서 놓지는 않지만 딱히 나아지는 것도 없고 술은 마시지도 못하고, 겨우 꽃에 취해 몇해를 건너왔다. 그것도 경험이라고 '취하고 토한다'는 말의 의미를 짐작케는 하니 귀한 경험으로 여긴다.

그동안 책에 취하였고 요사이 꽃을 핑개로 사람에 취하고 있으니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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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1년을 기다렸다.

마음은 이미 해가 바뀌고 한겨울 섬진강 매화로 향기를 품었다지만 뭔가 빠지듯한 아쉬움이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뜰에 있는 매실나무에 올해 첫꽃이 피었다. 두손 모아 합장하고 벙그러질 듯한 꽃봉우리를 골라 정성스럽게 담는다. 찻물을 끓여서 잔에 붓고 꽃 하나를 띄운다. 꽃이 펼쳐지며 가슴깊이 스며드는 향기에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이 드디어 열린다. 봄맞이 의식을 치르듯 나만의 소중한 시간이다. 정월 보름의 귀밝이술을 대신한다.

비로소 봄의 시간에 들어섰다.

봄을 歆饗흠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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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볕인양

그럴싸한 폼으로 사방을 애워싸고 덤벼들며 아애 통으로 품을 기세다. 굳이 양지바른 곳 찾지 않아도 될만큼 넉넉한 볕이 코끝까지 와 있는 봄을 뜀박질하게 만든다. 살랑거리는 바람따라 꽃향기 스미고 살포시 다가온 볕에게 품을 열어두니 아직은 끝맛이 맵다.

아차하는 순간 봄이라 속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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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딘 걸음은 잡힌 마음 탓이리라.

꽃소식을 접하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런저런 핑계야 없진 않지만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될만큼 넉넉해진 마음이 큰 이유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모처럼 나선 길, 숲은 봄인양 스스로를 풀어내고 있다. 땅도 나무도 새순도 볕을 품어 존재를 드러내기에 소리없는 아우성이다. 이끼가 전하는 봄소식이라 이해하니 마음에 초록으로 싹트는 듯하다.

짧은 눈맞춤으로 봄기운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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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2-13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기운이라 맘이 포근하네요.
 

이 차가움이 좋다.

코끝이 찡 하도록 파고드는 냉기가 싫지 않다. 겨울답지 않았던 낯선 모습에서 오는 당혹감이 비로소 물러간다는 반가움이기도 하다. 시린 손끝에 온기가 돌면서 냉기와는 다른 볕의 넉넉함으로 건너가는 시간이다.

봄기운을 불러오기 위한 겨울의 배려가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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