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_읽는_하루

오월 어느 날

산다는 것이
어디 맘만 같으랴

바람에 흩어졌던 그리움
산딸나무 꽃처럼
하얗게 내려앉았는데

오월 익어 가는 어디 쯤
너와 함께 했던 날들
책갈피에 접혀져 있겠지

만나도 할 말이야 없겠지만
바라만 보아도 좋을 것 같은
네 이름 석자
햇살처럼 눈부신 날이다

*목필균의 시 '오월 어느 날'이다. 문득 헤아려보니 오월이다. 늦거니 빠르거니, 사회적 거리두기로 야단법석을 떨면서도 잘 건너온 봄이 무르익었다. 산딸나무꽃 핀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_농가찻집 #곡성여행 #섬진강 #기차마을 #나무물고기 #우리통밀천연발효빵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길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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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귀가 부끄러워

그늘진 쪽으로 몸이 기운다
모든 사랑은 편애

제철 맞은 꽃들이
분홍과 분홍 너머를 다투는 봄날
사랑에도 제철이 있다는데
북향의 방 사시사철 그늘이 깃들까 머물까
귀가 부끄러워, 방이 운다 웅-웅
얼어붙은 바닷속 목소리

철도 없이 거처를 옮겨온 손이 말한다
혼자 짐 꾸리는 것도 요령
노래나 기도문처럼 저절로 익혀지는 것
점점 물음표를 닮아가는 등
끝은 언제쯤일까 의문문은
봄이 가기 전 완성되어야 한다

내내 겨울인 북극 떠올리기
사람이라는 뜻의 이누이트에게 물을까 배울까
화를 다스리는 요법에 대해 알려줄게
얼음 평원을 향해 걷는다 한다
걷고 걷다보면 해질녘 극점
발이 멈춰 온 길을 되돌아온다 한다
뉘우침과 용서와 화해의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도
나는 뉘우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화해하지 않겠습니다
사시사철 환한 그늘이 한창일 북향의 방
얼어붙은 바다를 부술 것, 목소리를 꺼낼 것
끝은 어디쯤일까 봄이 오기 전
의문문은 완성되어야 한다

도처에 꽃말과 뉘우침과 용서와 화해들
귀가 부끄러워, 결별하기 좋은 봄의 시국

*이은규의 시 '귀가 부끄러워'다. 마음이 기우는 동안 그늘과 편애는 같은 감정 안에 머문다. 성급하게 달려온 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부끄럽지 않을 귀를 위해 이 봄에 무엇을 보아야할까.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 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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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미간(眉間) 

눈썹과 눈썹 사이
미간이라 부르는 곳에 눈이 하나 더 있다면
나무와 나무 사이
고인 그늘에 햇빛 한줄기 허공의 뼈로 서 있을 것

최초의 방랑은 그 눈을 심안(心眼)이라 불렀다
왜 떠도는 발자국들은 그늘만 골라 디딜까
나무 그늘, 그의 미간 사이로 자라던 허공의 벼

먼 눈빛보다 미간이 좋아
바라보며 서성이는 동안 모든 꽃이 오고 간다

나무가 편애하는 건 꽃이 아니라 허공
허공의 뼈가 흔들릴 때 나무는 더 이상 직립이 아니다
그늘마다 떠도는 발자국이 길고

뒤돌아보는 꽃처럼 도착한 안부, 어느 마음의 투척(投擲)이 당신의 심안을 깨뜨렸다는 것
돌멩이가 나뭇잎 한 장의 무게도 안 되더라는 말은 완성되지 않았다
온전한 무게에 깨진 미간의 기억이 치명적이었다는 소견, 왜 미간의 다른 이름은 명궁(命宮)일까

사람들이 검은 액자를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화염의 칼날이 깨끗이 발라낸 몸, 뼈가 아직 따뜻한데
직립을 잃은 허공이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눈인사 없이 떠난
그가 나무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믿지 않는 봄날

투척의 자리에 햇빛의 무늬, 밀려가고 밀려오는

*이은규의 시 '미간(眉間)'이다. 되돌이표가 붙은 악보를 보듯 반복해서 읽는다. "먼 눈빛보다 미간이 좋아/바라보며 서성이는 동안 모든 꽃이 오고 간다" 문장 하나를 건너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아픈 봄날의 하루보다 길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 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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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놓치다, 봄날

저만치 나비 난다
귓바퀴에 봄을 환기시키는 운율로

흰 날개에
왜 기생나비라는 이름이 주어졌을까
색기(色氣) 없는 나비는 살아서 죽은 나비
모든 색을 날려 보낸 날개가 푸르게 희다
잡힐 듯 잡힐 듯, 읽히지 않는 나비의 문장 위로
먼 곳의 네 전언이 거기 그렇게 일렁인다
앵초꽃이 앵초앵초 배후로 환하다
바람이 수놓은 습기에
흰 피가 흐르는 나비 날개가 젖는다
젖은 날개의 수면에 햇살처럼 비치는 네 얼굴
살아서 죽은 날들이 잠시 잊힌다

봄날 나비를 쫓는 일이란
내 기다림의 일처럼 네가 닿는 순간 꿈이다
꿈보다 좋은 생시가 기억으로 남는 순간
그 시간은 살아서 죽은 나날들
바람이 앵초 꽃잎에 앉아
찰랑, 허공을 깨뜨린다
기록되지 않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어느 날 저 나비가
허공 무덤으로 스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봄날, 기다리는 안부는 언제나 멀다

*이은규의 시 '놓치다, 봄날'이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듯 봄날이 품고 있는 희망은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오늘 그 희망을 내 손으로 잡는 날이기에 언제나 멀리 있는 안부를 묻는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 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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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바람의 지문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이은규의 시 '바람의 지문'이다. 꽃으로 대표되는 봄은 바람과도 때어놓을 수 없다. 봄 햇살의 리듬에 따라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실려오는 것이 어디 꽃향기 뿐이랴. 아련한 추억 속 그 장면을 비롯하여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꿈도 불러온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에 있는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 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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