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성 없다, 하지만… 웃음은 있다

‘깨는’ 발명품 진도구의 세계



▲ '휴지걸이 모자'와 '얼굴 일체형 마스크', '보행용 빨래건조대' 등 진도구를 착용한 채 서울 테헤란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 한국진도구협회는 "얼굴 일체형 마스크가 평범한 흰색 마스크보다 덜 눈에 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훨씬 더 눈에 띄었다. 보행용 빨래 건조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델 정다정씨는 평범한 직장인이나, 진도구를 착용하니 전혀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진도구(珍道具)='진기한 도구'의 준말. 오로지 한 가지 문제만을 해결하거나, 하나의 기능만을 가진 창의적인 물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문제 서너개를 유발하는 도구. 단 실용성이나 상품성은 전혀 없다.


황당하고 당황스럽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묻게 된다. 정신이 나갔구만. 그런데 문제는 자꾸 보게 된다는 것이다. 웃음이 ‘퍽’하고 터진다. 터지는 건 웃음 만이 아니다. ‘이런 황당한 물건도 있는데, 뭔 안되겠어?’란 생각이 들면서, 자유로운 발상을 옭죄던 고정관념이란 틀도 터져 열리는 기분이다.

한국진도구협회가 최근 펴낸 ‘진(珍)도구적(的) 발상’이란 책을 펼쳤을 때 일어나는 연쇄반응이다. 별의별 희한한 물건 224개가 담겨있다. 예를 들면 비즈니스맨을 위한 ‘여름용 와이셔츠’. 등판이 없어 여름에 입으면 시원하다. 단, 재킷을 벗었을 때 자칫 변태로 보일 수 있어 민망하다는 단점이 있다. 김지경(35) 한국진도구협회 회장은 “‘단,…’ ‘하지만…’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진정한 진도구라 부를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진도구(珍道具). ‘진기한 도구’의 준말이자, ‘진정한 도(道)를 구하는 도구’를 뜻하기도 한다. 진도구란 말은 일본 가와카미 겐지(川上賢司·57)씨가 처음 만들어 썼다. 일본진도구학회 회장이다. 가와카미씨는 원래 제대로 된 발명가였다. 여기서 제대로 된 발명가란 ‘남에게 돈 받고 팔 수 있는 아이디어 상품을 고안해내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그가 내는 아이디어마다 “비실용적이다” “그걸 누가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때 누군가 “재미있네. 그냥 하면 어때”라고 위로를 던졌다.

작은 위로가 가와카미씨에게 큰 힘이 됐다. ‘실용성이나 상품성은 전혀 없지만 오로지 한 가지 문제만을 해결하거나, 하나의 기능만을 가진 창의적인 물건’이라는 진도구의 정의를 내렸다. 1987년부터 한 통신판매잡지에 자신이 개발한 진도구를 하나씩 연재하기 시작했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진도구 아이디어를 보내왔고, 진도구학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진도구학회는 현재 준회원 5만여 명과 정회원 1만3000여 명으로 구성된다. 준회원은 아이디어를 협회로 보내온 사람들, 아이디어가 협회에 채택돼 진도구로 실현된 아이디어를 보낸 사람들이다.

한국진도구협회는 지난 6월 결성됐다. 회장 김지경(35)씨는 8년 동안 일본 유학을 거쳐 광고와 드라마 영화 제작일을 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 ‘거룩한 계보’ 등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지난 1월, KTF ‘쇼’ 런칭 광고에 등장시킬 재미난 물건을 찾기 위해 일본을 뒤지다가 진도구를 알게됐다. ‘발명이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란 선입견을 깬다는 생각, ‘이렇게 하면 부끄럽겠지’란 생각에 의해 막힌 창의성을 뚫어주고 고양시킨다는 진도구 철학에 매료됐다.

가와카미씨에게 연락해 책을 출간하고 한국진도구협회를 인증받았다. 김지경 회장은 “한국어로 ‘학회’라고 하니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들어 ‘협회’라고 했을 뿐이지 일본진도구학회와 연결된 단체”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회원은 100여 명. 10월 1일 협회 인터넷 홈페이지(www.chin dogukorea.com)를 오픈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고 회원을 모집한다. 10월 13일에는 신촌과 홍대앞, 명동, 강남역, 코엑스, 분당 서현에서 홍보 퍼포먼스도 벌인다. 김지경 회장은 “퍼포먼스라고 대단한 게 아니라, 개그맨 지망생 셋이서 진도구 착용하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걸을 것”이라고 했다.

김지경 회장은 “상품화해서 파는 물건도 아니고(상품화하면 큰일 날 물건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특허를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닌, 정말 현실에 찌들린 현대인을 위해 단지 진도구적 발상을 서로 공유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진도구적 발상, 그리고 진도구의 넓고 깊은 세계를 맛보기로 보여드린다.



콘택트렌즈 분실 방지 보안경


운동이나 목욕할 때 콘택트렌즈를 잃어버려 고생했다면 사용해본다. 직경 5.5㎝ 금속 그물망을 사용한 보안경이다. 콘택트렌즈가 떨어져도 그물망에 걸려, 금새 다시 끼울 수 있어 편리하다. 물안경처럼 착용한다. 정다정씨는 “생각보다 잘 보인다”면서 “얼굴에 살이 많으면 눌리겠다”고 했다. 햇볕이 강하면 눈가가 그물모양으로 탄다.



휴지걸이 모자


머리에 두루마리 휴지가 ‘세팅’돼 있다. 눈물, 콧물 가리지 않고 바로 휴지를 풀어서 닦을 수 있다. 약간 창피하다는 점만 꾹 참으면 너무나 편리하다. 정다정씨는 “착용감이 생각보다 좋다”면서 “거울이 45도 각도로 달려 있다면 더욱 편리하겠다”고 덧붙였다. 단, “휴지 좀 쓸게요”라는 공짜족의 습격이 예상된다.



(모델=정다정)




조선일보
글=김성윤기자 gourmet@chosun.com 
사진=조선영상미디어 이경호 기자 ho@chosun.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음식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되는 사람과 세상
  • [검색어로 본 오늘의 문학] 10. 음식남녀
  •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 ‘나는 스스로를 서른이 다 되도록 정신 못 차리는 년이나 사랑의 의미도 모르는 이기적인 여자라 말하는 대신 ‘같이 밥 먹어주는 여자’라고 소개한다. 왜? 같이 밥 먹어주는 일로 돈을 벌고 생활을 연명하니까.’

      새내기 여성작가 하재영(28)이 단편 ‘같이 밥 먹을래요?’로 주목 받고 있다. 올해 계간 ‘실천문학’ 봄호에 발표된 ‘같이 밥 먹을래요?’는 최근 나온 ‘문학과 사회’ 가을호에 재수록돼 문단 샛별 하재영의 위상을 높였다. ‘모든 욕망은 하나로 귀결돼요. 바로 타인의 시선. 사람들은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치나 전전긍긍하는 속물근성을 보편적인 욕망으로 포장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마치, 혼자 밥을 먹을 때 혼자가 아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것처럼.’





    • ▲ 미식가들을 겨냥해‘생 트러플 버섯’요리를 내놓는 서울의 한 호텔 레스토랑. 음식을 소재로 웰빙 시대의 세태와 입맛을 그리는 현상이 2000년대 한국 문학에서 두드러진다. /조선일보 DB


    • 혼자 밥 먹는 사람의 고독을 달래는 이 소설에 대해 “왜 식사는 정치적인가 하는 문제가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난다”고 평가한 평론가 이광호(서울예대 교수)는 “혼자 밥 먹는 사람에 대한 배타와 차별을 생산하는 온갖 집단주의는 어디에나 언제나 있다”고 풀이했다.

      대만 영화 ‘음식남녀’(94년 아태영화제 작품상)가 요리를 통해 개인과 가족, 사회, 문명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듯이, 오늘의 한국문학에서 음식문화는 실존적이면서 사회적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은희경의 소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비만에 대한 현대 사회의 집단적 냉대를 바탕에 깔고 있다. ‘빙하기 원시인은 늘 굶주렸기 때문에 어쩌다 음식을 접하면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고 한 이 소설은 묄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대비시키면서 비만해소를 위해 땀 흘리는 현대문명의 아이러니를 묘파했다. 뚱뚱한 사생아인 남자 주인공이 탄수화물 섭취를 금하는 다이어트 과정을 그린 이 소설에 깊이 공감한 한 독자 블로그에 들어가봤다. ‘탄수화물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한 내가 보기에는 남의 얘기지만 참으로 고통스러웠다…그런데 (아버지 빈소에서) 이 남자는 국밥을 폭식하고야 만다. 그 장면에서 난 ‘으아아아악~~~안돼’ 외쳐버렸다.’ 근자에 소설과 독자가 이토록 큰 공명(共鳴)을 빚은 경우가 또 있을까.

      오늘의 작가들은 맛집 안내서와는 다른 차원의 음식 산문집을 통해 ‘글맛’을 보여준다. ‘어머니가 급히 지져낸 장떡은 사실은 고추장떡이었다…평안도와 황해도에서는 된장을 주로 쓰는데…’라는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은 미식가들이 범람하는 풍요의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맛에 대한 추억을 펼친다. 맛있는 음식에는 ‘가장 중요하게는 궁핍과 모자람이라는 조건이 들어 있으며, 그것이 맛의 기억을 최상으로 만든다’라고 황석영은 역설했다.

      소설가 윤대녕의 산문집 ‘어머니의 수저’는 탐미적이고 구도적인 음식 명상집이다. ‘장아찌는 밥상의 조연이면서 없으면 서운한 일등공신이다…장아찌는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금강경) 할 때의 그 말씀에 값하는 음식이다.’

      소설가 성석제의 음식기행집 ‘소풍’은 환희와 유희로 가득하다. “음식에서 깨달음을 찾고 먹는 데서 구원을 갈구하는 무리들이 걷는 길은 식도(食道)요, 그 무리는 식도(食徒)라 하겠다”고 한 성석제는 “음식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는 사람과 세상에 관해서 썼다”고 밝혔다.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9-04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넌 아웃이야” 경쟁사회 축소판… 비인간성 비꼬기도
  • 검색어로 읽는 오늘의 문학 9. 야구
  •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 미국 뉴요커의 감성을 대변하는 소설가 폴 오스터는 야구 때문에 글을 쓰게 됐다.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뉴욕 자이언츠의 강타자 윌리 메이스에게 사인을 받을 기회를 잡았으나 마침 몸에 지닌 필기구가 없었다. 그후 오스터는 항상 연필을 갖고 다녔고, 결국 작가가 됐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야구 때문에 작가가 됐다. 어느날 야구장 외야석에서 시원하게 날아가는 야구공을 보면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 그는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썼다. 2000년대 한국 문학에서도 야구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스포츠 종목 중에서 야구가 시와 소설에서 직간접적 소재로 가장 많이 활용됐다.

      ‘평범한 야구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는 장편 ‘삼미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은 80년대 프로야구의 최하위 야구팀을 통해 경쟁사회의 세태를 비판하고, 낙오자들을 위해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형상화했다. ‘임시직 노동자, 청년 실업자, 신용 불량자가 수백만씩 되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이 소설은 개그 같은 말 솜씨로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소설가 황석영)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 ▲ 세이프냐 아웃이냐. 냉엄한 경쟁 사회의 축소판인 야구는 오늘의 세태풍자소설에서 패자를 위한 이야기 소재로 각광 받고 있다. /조선일보 DB 사진



    • ‘고백하자면 저는 1루에서 상대 선수와 나누는 대화를 사랑했습니다’는 젊은 작가 김도언의 단편 ‘전무후무한 퍼스트 베이스맨’(계간 ‘세계의 문학’ 2007 여름호)도 프로야구를 통해 경쟁사회의 비인간성을 풍자한 소설이다. 21년 동안 프로야구팀에서 활약해 온 노장 1루수 ‘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선수를 인류애로서 돕는 것. 그것이 야구가 가르치는 휴머니즘’이라고 믿어왔다. ‘나’는 1루에 온 상대 선수들의 가정 형편을 꿰뚫게 된다. 아버지는 식물인간 상태이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여동생들은 가출했다는 등등 상대방 선수의 고민을 들어주는 식이다. 마침내 ‘나’는 결단을 내린다. ‘저는 상대팀 선수 중에 기록이 시원치 않고 부진에 허덕이는 선수가 1루에 나오면, 우리팀의 수비 전략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투수의 주무기라든가, 다음에 던질 공의 구질, 특이한 버릇, 사인의 의미 같은 거 말이에요. 그리고 도루를 적극적으로 권하기도 했어요.’

      이해경의 장편 ‘말하지 못 한 내 사랑은’에서 야구는 유희와 노동의 경계가 없는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스포츠다. ‘저기 봐요, 야수들이 전부 건들거리고 있죠? 야구에 뜻이 없어 보이죠? 그런데 저러고들 있다가 투수가 와인드업이나 셋 포지션에 들어가면, 동시에 모두 허리를 싹 낮추면서 굽혀진 다리는 팽팽해지고…전 그 순간이 너무 좋아요. 최대한 릴랙스…그러다가 한순간 집중력을 최고로 끌어올려….’

      2002 월드컵과 붉은 악마 열풍에도 불구하고 한국 소설에서 축구가 야구에 밀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386세대 문학평론가 장은수는 “지금 한국 문학의 주류인 30~40대 작가들이 프로야구를 보면서 성장기와 청년기를 보낸 세대이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5년 뒤 붉은 악마 세대 작가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축구를 다룬 소설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외국인 노동자’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검색어로 읽는 오늘의 문학] 8. 외국인 노동자
    “그들의 삶 통해 황금만능주의 꼬집어”
    우리 내부의 타자에 대한 관심 증폭
  •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 “아내의 대화 상대인 이 외국인 친구, 사트비르 싱이라는 이름의 인도인이 집으로 찾아온다는 얘기를 미리 전해 들었음에도 막상 문을 열고 이 친구가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자 당황스러웠다.’(김연수의 단편 ‘모두에게 복된 새해’)

      동인문학상(2003년) 수상작가 김연수가 올해 초 월간 현대문학에 발표한 단편 ‘모두에게 복된 새해’는 낯선 외국인과의 대면에서 시작한다. 외국인 노동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부인을 둔 보통 한국 남자 ‘나’를 만난 인도인은 서툰 한국어로 횡설수설하면서 한국인들의 편견과 무지를 힐난한다. ‘저는 매일 터번을 쓰지 못하겠어요. 한국 사람들 안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한 시간 버스 타야 합니다. 버스에서 술 취한 사람들, 알 카에다 말합니다. 버스에서 개새끼들 있습니다. 그치?’





    • ▲ 한국이주노동자 건강협회로부터 무료 진료를 받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2000년대 한국 소설의 새 주인공은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조선일보 DB사진



    • 국내 거주 외국인이 72만 명을 돌파했다고 최근 행자부가 발표했다.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외국인이 등장하는 한국소설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외국인 이주 노동자문제가 한국 소설에서 새로운 테마로 불거지고 있다. 김재영의 소설집 ‘코끼리’(2005년)는 이주노동자들을 한국 사회의 새로운 소외계층으로 조명한 리얼리즘의 정신을 보여줘 주목을 받았다. 수록작 ‘코끼리’는 네팔인 아버지와 조선족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13세짜리 소년 ‘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한때 돼지 축사로 사용했던 낡은 베니아판 문 다섯 개가 붙은 건물’에 살고 있는 ‘나’의 이웃들은 파키스탄 청년, 방글라데시 아줌마, 러시아 아가씨, 미얀마 아저씨 등이다. 박범신의 ‘나마스테’(2005년)를 비롯해 이혜경의 ‘물 한모금’, 김혜정의 ‘등에’, 홍양순의 ‘동거인’도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작품들이다.

      문학평론가 문흥술(서울여대 국문과교수)은 “3D 업종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과거 70년대 한국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에 나왔던 난장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며 “요즘 한국소설에서 서양인은 별로 등장하지 않는 대신, 주로 아시아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통해 황금만능주의와 정신적 가치의 상실 등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우리 내부의 타자’에 대한 관심의 증폭은 한국사에 실재했던 외국인의 삶을 재조명하는 소설도 탄생시켰다. 김경욱이 최근 펴낸 장편 ‘천년의 왕국’은 조선 인조~효종 때 귀화했던 네덜란드인 박연(朴淵·벨테브레)의 내면 풍경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했다. 특히 이 소설은 박연을 1인칭 화자로 등장시켜 서양인의 눈으로 당시 조선을 묘사하고, 이방인의 내면을 스스로 털어놓게 했다. ‘문명은 죽음에 대한 겸손을 가르친다. 개별화된 죽음 앞에서 문명 세계의 인간은 두려움과 경외를 느낀다. 그러나 야만인들에게 모든 죽음은 해 질 무렵 땅거미에 녹아드는 사물처럼 뭉뚱그려진 죽음일 뿐이다…죽음의 개별성이 거세된 주검은 신의 형상을 본뜬 피조물로서의 위엄을 잃고 피비린내 나는 승리를 증명하는 한낱 전리품으로 전락한다.’

      “우리말에 서툰 외국인의 어눌한 말투를 의도적으로 소설 문체 속에서 살리려고 했다”고 한 작가는 “박연은 오늘날로 치면 외국인 이주노동자 혹은 이중국적자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양물감 2007-08-1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가는 이야기네요. 제 직업이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거였거든요.
     

  • “돈은 피다… 이 시대의 푸른 혈액이지”
  • 검색어로 읽는 오늘의 문학 7. 주식
    펀드매니저… 개미… 자본의 의미 캐묻고 경험을 소설화 하기도
  •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 ‘그날의 증권시세도 어김없이 벌건 사막에 풀어놓은 미친개였다. 뉴욕 증시가 어쩌구, 미국의 이라크 공격 계획이 저쩌고 하는 해설이 있었으나, 실은 머니 게임이 가지는 특성 중의 하나인 투자심리의 변덕으로 죽 끓듯 하던 장(場)은 결국 지수가 30포인트 가깝게 빠지면서 끝이 났다.’(이문열의 장편 ‘호모 엑세쿠탄스’ 중에서)

      소설가 이문열의 최신작 ‘호모 엑세쿠탄스’의 주인공은 증권사 근무 10년째를 맞은 386세대다. 이 소설은 종교적 구원이나 혁명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간 해방을 모두 거부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고뇌를 바탕으로 2002년 이후 한국 사회의 내부 갈등을 풍자와 환상을 뒤섞어 그린 작품이다.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작가는 “제가 증권사 직원을 주인공으로 쓴 것은 ‘속됨’과 ‘현대성’의 이미지를 결합한다는 정도로 보면 될 것”이라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 ▲ 주가 지수 1800을 넘어섰던 지난 18일 여의도 증권거래소 풍경. 주식 열풍의 현장을 묘사하는 소설도 주목 받고 있다. /조선일보 DB



    • 주가 2000 시대 개막을 눈앞에 둔 오늘날 전국에 주식 투자 광풍이 불기 전부터 한국 작가들은 주식 시장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경제 풍속도를 주목해왔다. 소설가 정미경의 장편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2005년)는 고객의 비자금을 은밀하게 관리하는 사설(私設) 펀드 매니저를 주연으로 등장시킨다. ‘장(場)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미친 듯이 오르내린 날이면 흔히들 피를 말렸다고 하지만 그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돈은 피다…돈은 이 시대의 푸른 혈액이지. 중호는 주먹을 꽉 쥐고 손등에 솟아난 제 혈관을 쓰다듬는다.’

      이 소설은 자본의 21세기적 의미를 정면으로 다룬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이 나라 주식과 파생시장에서 현대판 허생이다. 자본력에서 현저히 밀리다 보니 농간 부리는 걸 뻔히 보면서 속수무책’이라고 인정하거나, ‘그 사람들(조지 소로스나 워렌 버핏)은 탐욕을 위해 금욕을 실천하는 철학적 투기꾼’이라고 정의한다.

      “지금까지 자본은 문학에서 주변부에 속했지만, 저는 이 소설을 통해 당대 사람들의 돈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한 작가 정미경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소액 투자도 해봤는데, 매수 시점은 잘 포착해도 글을 쓰느라고 매도 시점을 놓쳐 크게 손실을 봤다”고 털어놓았다. 소설책 인세로도 그 손실을 보전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영화 판권은 팔렸다고 한다.

      소설가 김영하의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인 ‘보물선’(2004년)은 증권 시장의 ‘작전 세력’이 벌이는 주가 조작의 실태를 냉소적으로 그렸다. 학생운동권 출신의 극단적 민족주의자가 일제 시대의 보물선 인양 사업을 주장하자, ‘작전 세력’은 보물선의 진위 여하를 묻지 않은 채 그 사업에 뛰어든다. ‘보물선 닷컴’이란 유령회사를 작은 건설회사와 합병시켜 상장한 뒤 대대적인 보물선 소동을 선전해 투자자를 모은다. ‘주가총액은 이미 바다속에 가라앉아 있다는 금괴 100톤의 가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전형적인 폭탄돌리기였다.’ 결국 작전세력은 주식을 팔아 막대한 차익을 거둔 뒤 빠져나가고, 순진한 ‘개미’들은 깡통을 찬다.

      소설가 이청준은 주식투자 경험을 바탕으로 일찌감치 단편 ‘시인의 시간’(1999년)을 발표한 적이 있다. 누나가 건네준 돈으로 주식 투자를 시작한 어리숙한 시인이 처음에는 재미를 보다가 욕심이 생겨 매도 시점을 놓치는 바람에 결국 휴지조각만 남는다는 이야기다. ‘주식 시장의 개인들은 어차피 얼마쯤의 판 값을 물고 관전석 정도를 사 들어가 진짜 선수들의 게임을 즐기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러니 구경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각 링 밖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중략) 그리고 진짜 선수들이 어떤 밀약 속에서 게임을 펼쳐가든 나는 그 게임의 즐거움을 관전료만큼 누리고 나오는 구경꾼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의 몰입이나 동참을 그쳐야 한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