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속머리 위 약 50미터쯤 되는 곳에서 별로 분명하지는 않지만 뭔가 인간의 얼굴과도 흡사한 존재를 실은 두 개의 반짝거리는커다란 강철 날개를 보았다. 처음으로 반인반신을 본 그리스인처럼 나 또한 감동했다. 눈물도 흘렸다. 

소음이 바로 내 머리 위에서 왔다는 걸 인지한 순간 — 비행기가 아직 드물 때였다. — 내가 처음으로 보려고 하는 것이 비행기라는 생각에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신문에서 감동적인 말을 기대할 때처럼,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 비행기의 모습이 보이기만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비행사는 가는길을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앞에 ㅡ습관이 나를 포로로 하지 않는다면 내 앞에도 ㅡ모든 공간의 길, 삶의 길이 열려 있음을 느꼈다. 

그는 조금 더 멀리 날더니 몇 초 동안 바다위를 활주하면서 갑자기 결심한 듯, 중력과는 반대되는 어떤힘에 끌린 듯, 마치 자기 나라에 돌아가려는 듯, 금빛 날개를 가볍게 움직이면서 하늘을 향해 곧바로 돌진했다. - P314

* "일하시오, 일하시오, 내 친애하는 친구여, 유명해지시오. 그대는 할 수 있습니다. 미래는 그대의 것입니다." 퐁탄이 샤토브리앙에게 1798년에 보낸 편지의한 구절로, 샤토브리앙이 『무덤 너머의 회고록』에서 인용했다. 퐁탄(Louis deFontanes, 1757~1821) 후작은 미미한 작가로, 공포 정치 후 런던에서의 망명 시절 동안 샤토브리앙과 친교를 나누었다.(소돔」, 폴리오, 615쪽 참조.) - P319

암소 몇 마리만이 울음소리를 내며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밖에 남아 있었고, 몇몇 소들은 인간에게 더 관심이 있는지 우리가 탄 마차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어느 화가만이 좁은 언덕 위에 이젤을 세우고 이 거대한 고요와 가라앉은 빛을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쩌면 암소들은 무의식적으로, 또 무보수로 화가의 모델로 쓰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귀가한 후에도, 그들의 관조하는 모습과 고독한 존재감이 그 나름대로 저녁이 발산하는 강력한 휴식의 느낌을 주는 데 기여했으니 말이다.  - P322

나는 내 삶이이렇게 세 개의 도면 위에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다중적인 양상에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가 한순간 과거의 인간이 될 때, 다시 말해 오래전부터 자신의 모습인 자아와는 다른인간이 될 때, 우리의 감수성은 더 이상 습관에 의해 약해지지않고, 아주 작은 충격에도 강렬한 인상을 받으면서 이전의 인상들을 모두 희미하게 만들며, 또 그런 강렬함 때문에 술에 취한 사람이 느끼는 일시적인 흥분과 더불어 그 인상들에 빠져든다.  - P323

그사이 나는 남작이 손에 들고 있는 발자크의 책을 바라보았다.
그 책은 첫해에 그가 내게 빌려주었던 베르고트의 책처럼 그저 우연히 구입한 종이 표지의 책이 아니었다. 

그 책은 그의장서 중 하나로 "나는 샤를뤼스 남작에게 속하느니."란 명구나, 때로는 그런 명구 대신 게르망트의 학구적인 취향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항상 전쟁만 하는 것은 아니다. (In proeliisnon semper.)",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Non sinelabore.)" 같은 명구가 쓰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 모렐을기쁘게 하기 위해 이 명구가 다른 명구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될것이다.  - P330

*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즉 "크세주?(Que sais-je?)"는 몽테뉴의 명구로『레몽 스봉의 변호』(1588)의 부록에서 설명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정면에 새겨져 있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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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5-31 16: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샤토브리앙! 스테이크 맛나는 안심살 구이가
갑자기 생각 ㅎㅎㅎ
미미님은 벌써 잃시찾의 구름위를 활공중이쉼 ~٩ʕ◕౪◕ʔو

미미 2021-05-31 16:26   좋아요 2 | URL
아~‘구름위를 활공‘ 프루스트 감상에 더없이 적합한 표현이네요~♡
{´◕ ◡ ◕`}♡주석도 훌륭해서 작품 읽는 재미가 배가 되요ㅋㅋㅋㅋ👍

새파랑 2021-05-31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뒤로 갈수록 내용이 더 심오해지는거 같아요. 하지만 문장은 여전하네요. 암소의 감정까지 표현하다니 ^^

미미 2021-05-31 22:57   좋아요 2 | URL
저 조금전에 ‘잡담‘에 관해 읽었는데 모든 게 이런 식이니 계속 감탄 연발입니다. 보는 만큼 쓴다는 말을 엇그제 김영하작가님의 (예전) 팟케스트에서 들었는데 그걸 증명하는 프루스트~♡
 

아 이 대목 읽고 웃다가 침까지 흘..죄송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수면의 관계에 대한 임상실험 결과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있다. 최근에 읽은 《소설가의 일 》프롤로그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김연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완독한다는 신년 계획을 세우고 매일 자기 전에‘ 10 페이지를 읽겠다고 결심하지만 3월 4일까지 그가 읽은 건 고작 1권의 47 페이지였다고 고백하며 이렇게 탄식한다. "빌어먹을 저녁식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는 프루스트의 원고를 거절함으로써 문학사에 영원한 놀림거리로 남은 어느 편집자의 편지를 소개하기도 하는데, 꼭 내가 쓴 편지인줄 알았다. 
"친애하는 동료여, 제가 아둔패기라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주인공이 잠들기 전에 침대 위에서 뒤척이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서른 페이지나 필요한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 P39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3권에는 프루스트를 읽다 잠든 우리를 위로하는 내용이 있다.
은신처에 피신해 있는 여주인공 아오마메와 그녀의 뒤를 봐주는 과묵한 남자 다마루의 대화.
식료품과 일용품의 전달 방법을 진지하게 설명하던 다마루가 뜬금없이 묻는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때?" 

갑자기 교양을 시험당한 아오마메는 되묻는다.
 "당신은 읽었어요?" 그러자 다마루가 담담하게 말한다. "아니, 나는 교도소에도 간 적이 없고, 어딘가에 오래 은신할 일도 없었어. 그런 기회라도 갖지 않는 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들 하더군" 

이어지는 대화는 점입가경이다. "주위에 누군가 다 읽은 사람이 있었어요?" "교도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 내 주위에없는 건 아닌데, 다들 프루스트에 흥미를 가질 만한 타입이 아니었어." 그러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지 못했다고 해서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건 감옥에 가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 P40

그렇다면 이토록 읽기 어려운 작품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고전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탈로 칼비노가 정의한 것처럼,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 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고,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하기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보다더 적절한 책은 없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다

☆프루스트를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프루스트를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
다만 끝까지 읽은 사람이 극히 적을 뿐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1권의 66 쪽에 나오는,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고 책을 덮으려는 무렵에 등장하는 홍차와 마들렌 때문이다.  - P4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속 ‘홍차와 마들렌‘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깨닫고,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기억을 통해 삶을, 나아가 세계 자체를 되찾으려는 아름답고도 절망적인 프루스트의 시도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이제야 우리들의 꽃이란 꽃은 모조리, 스완 씨의 정원의 꽃이란 꽃은 모조리, 비본 내의 수련화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과 그들의 조촐한 집들과 성당과 온 콩브레와 그 근방,그러한 모든 것이 형태를 갖추고 뿌리를 내려, 마을과 정원과 더불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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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5-31 12:00   좋아요 9 | 댓글달기 | URL
ㅋ 저도 김연수 저 글 읽고 엄청 웃었어요. 저기다 덧붙이길 내 잃어버린 시간도 못 찾았는데 남의 잃어버린 시간까지 찾아야하냐며...포기 이유를...ㅋ

미미 2021-05-31 12:02   좋아요 5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아 ㅋㅋ웃프네요! 김연수작가님에 급호감이 갑니다ㅋㅋ

coolcat329 2021-05-31 12:03   좋아요 6 | URL
<소설가의 일> 산문집에 나옵니다.ㅋ
이 책 재밌어요.

미미 2021-05-31 12:14   좋아요 5 | URL
그 책이군요! 바로 담았어요ㅋㅋㅋㅋ여기 써 있는데도 프루스트 땜 몰랐네요!

scott 2021-05-31 15:53   좋아요 2 | URL
김연수 작가님 산문은 진심 꿀잼 (◍•ڡ•◍)❤

페넬로페 2021-05-31 12:0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소설가의 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 읽고 싶어요 ㅠㅠ
밤에 자기 전에 10페이지라도 읽고 싶은 책이 넘 많아요 ㅎㅎ~~

미미 2021-05-31 12:08   좋아요 6 | URL
아 이 책 재밌어요! 지금 40페이진데 몇번 뿜었어요ㅋㅋㅋㅋ그쵸! 저도 이책 저책 반찬 먹듯 조금씩 맛보고 싶은 책들 많음요ㅋㅋㅋ

페넬로페 2021-05-31 12:20   좋아요 6 | URL
지금 문자 왔어요
도서관에서 따끈한 희망도서 3권 찾아가라고요~~
도서관 가면 미미님 올려주신 책도 빌릴것 같은데 ㅠㅠ
북플에 들어오지 말아야 하나봐요^^

미미 2021-05-31 12:28   좋아요 6 | URL
저도 매일 그러면서 들어와요ㅋㅋㅋㅋ희망도서 신청하신것 구매됐군요!! 축하드려요~♡ (매번 다른 신청자와 중복되어 탈락한 사람ㅋㅋ)

scott 2021-05-31 15:52   좋아요 4 | URL
안됨!!요
페넬로페님 안계시는
북플은,,,,,
이리도 시스템이 기이하게 굴라고도
플친님들때문에 24시간 클릭하는뎅 (>_<。)💦

행복한책읽기 2021-05-31 12:4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 넘넘 재밌습니다. <프루스트 읽기를 때려치운 작가들>이란 제목으로 책 나와도 되겠어요. 근데 저 1Q84 읽었는데, 것도 대따 흥미롭게 읽었는데, 저 대사는 전혀 기억 나지 않는다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러 가야 할까요 ㅋㅋㅋ

미미 2021-05-31 12:52   좋아요 5 | URL
그렇네요!ㅋㅋㅋ저도 <1Q84>읽었는데 저 두 화자는 기억나는데 저 대사는 넘 새로워요ㅋㅋㅋㅋ

scott 2021-05-31 15:51   좋아요 5 | URL
<프루스트 읽기를 때려치운 작가들>
요! 테마 좋습니다
이 기회에 작가들 커밍아웃 우르륵 ㅎㅎㅎ

그레이스 2021-05-31 14:1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조이스도 추가! 율리시즈ㅎㅎ
그래도 둘다 일글꼬에요.

미미 2021-05-31 14:32   좋아요 5 | URL
그렇죠 조이스!!! 그레이스님이 다 보실꺼라 저는 믿슙니당~♡ㅋㅋㅋㅋ

scott 2021-05-31 15:50   좋아요 4 | URL
저도 믿습니돵!!٩(*˙︶˙*)۶

공쟝쟝 2021-05-31 14: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금며드셨다...*

미미 2021-05-31 14:37   좋아요 5 | URL
앗ㅋㅋㅋㅋㅋ티를 너무 냈나요?ㅋㅋㅋ

새파랑 2021-05-31 14:5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 1Q84에 저 내용 기억나요. ㅋ 1Q84 완전 짱 좋음. 제일 많이 읽은 책이었던거 같아요ㅋ
밑줄 그은 문장 완전 재미있고 극공감 가네요 ^^ 미미님은 끝까지 읽으실거 같아요~!

미미 2021-05-31 15:17   좋아요 6 | URL
여러번 읽으셨나봐요! 저는 아오마메 캐릭터가 특히 좋았어요~♡ 새파랑님 계속 같이 뛰어주시면 저도 완독가야죠! 읽는 분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도 같구요. 올해 완독을 꿈꾸며ㅋㅋ😆👍

scott 2021-05-31 20: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읽다가 포기 하다가 완독 하지도 못한 작가분들이 계시다니!!ㅎㅎ
작가님들은 엄청난 속도로 폭풍 완독 할 줄 알았는뎅 ㅎㅎㅎ
연수 작가님 넘 솔직하고 인간적이 신데요
전 처음에 잃시 찾 야심차게 한달에 한권 완독 목표 세웠다고
1-2-3권만 거의 십몇년째 왕복中ㅎㅎㅎ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 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고,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하기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보다더 적절한 책은 없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다.]
ᖗ( ᐛ )ᖘ
오늘의 밑줄 쫘악

미미 2021-05-31 16:04   좋아요 4 | URL
저도 작가님들이라면 왠지 꿀꺽꿀꺽 잘 소화하실줄 알았는데 위안이 됐어요ㅋㅋㅋㅋㅋ그래도 역시 어느정도 읽어보니 한 번만 볼 내용은 아닌것 확실합니다!ㅋㅋ♡⁽⁽ଘ(。•ө•。)ଓ⁾⁾♡

그레이스 2021-05-31 18: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약도서 대출하러 갔다가 이책도 함께 데리고왔어요~~

미미 2021-05-31 18:12   좋아요 3 | URL
오 빠르시네요👍 함께 읽는거 신나욤ㅋㅋㅋ✧*。(◍˃̵ᗜ˂̵◍)ॱ◌̥*⃝̣ ⋆♡

붕붕툐툐 2021-05-31 22: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미미님 올려주신 발췌글 보고 빵빵 터지네용~ 바로 다음 빌릴 책으로 찜!!ㅎㅎ

미미 2021-05-31 21:41   좋아요 5 | URL
재밌죠?ㅋㅋㅋㅋ웃다가 침흘렸...;;정도니 말이지요ㅋㅋ강추합니다!👍👍

독서괭 2021-05-31 22: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정말 위로가 되네요~~ 저도 저책 읽어봐야겠어요!!

미미 2021-05-31 22:28   좋아요 3 | URL
그쵸?!! 프루스트 읽다가 몇번 졸았는데 정상 인증받은 기분이예요ㅋㅋㅋㅋㅋ

mini74 2021-06-01 17: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 이야기인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ㅎㅎ

미미 2021-06-01 17:59   좋아요 1 | URL
정말 다행이죠?ㅋㅋ미니님도 정상!ㅋㅋㅋㅋ
 

약 5천 년 동안 남성은 재현 주체였고 여성은 재현 대상이었다. 남성은 사람이지만, 여성은 여성이다. 미술 작품 제목을 보자. 로댕의 (생각하는 남성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 앵그르의 (욕탕의 사람들이 아니라) <욕탕의 여인들>이다. ‘유관순 언니‘가 아니라 ‘유관순 누나‘이다. 이처럼 국민, 노동자, 민중, 시민의 개념은 성 중립적이지 않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여성이 이들 범주에 포함되려면 여성 노동자‘와 같이 기존 개념에 부가적인 명칭을 갖게 된다.
- P94

말 자체가 여성 혹은 남성에게만 해당하거나 여성 비하적이어서, 성별에 따른 역할 분리(차별)를 규정하고 당연시하는 경우도 많다. 

미혼부라는 말은 없다. ‘걸레‘는 남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영웅‘은 여성을 뜻하지 않으며, ‘변태‘는 이성애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연상의 여인‘ 이라는 말은 있지만, ‘연상의 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여성 상위‘라는 말은 있지만, ‘남성 상위‘라는 말은 없다. 남성이 연상이거나 상위인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태아성감별과 여아 살해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권 침해 사안인데도, 그 원인이 되는 남아 선호 악습을 ‘남아 선호 사상‘이라고 부른다. 살인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폐습을 굳이 사상‘ 이라고 칭할 필요가 있을까?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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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5-31 12: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리 있는 지적들입니다. 아주 시원한 일갈이에요.

미미 2021-05-31 12:53   좋아요 2 | URL
읽을수록 이 책이 고마워지고 시각이 트이는 기분이예요~♡
 

(현모양처)

왜 현부양부(賢父良夫)라는 말은 없는 것일까. 스위트 홈‘과 자녀 양육이소중하고 성스러운 일이라면 그것은 책임이라기보다 권리일 것이고 남성들도 앞다투어 참가해야 한다. 

그러나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말은 노동 시장에서 남성들이 듣는 가장 모욕적이고 비참한욕이다. 현모양처가 과연 성취 가능한 일인지도 의문이다.
- P78

가정 내 성폭력이 3분의 1을 차지한다. 근친 성폭력은 드문 일이아닌 것이다. 친족 내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가정폭력의 특징은 반복과 은폐다. 아버지의 딸(혹은 아들)에 대한 성폭력이 지속 가능하려면, 지지는 방관이든 어머니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근친 성폭력가정의 어머니가 현모가 되려면 딸 편을 들어야 할 것이고, 양처가되려면 남편을 옹호해야 한다. 이것은 ‘미션 임파서블(불가능한 임무)‘이다.
- P79

가족 구조에서 어머니의 노동이라고 간주되는 육아와 가사는 문화적으로 비하되고 경제적으로 보상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일이단순하고 반복적인 미숙련 노동이라는 인식은 공적 영역에도 확장되어, 노동 시장에서 여성 노동에 대한 낮은 평가와 연결된다. 

노동현장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본래 업무 외에 추가된 성역할 노동을하면서 아니, 그러한 이중 노동을 하기 때문에 저임금이 합리화된다. 배려와 보살핌, 감정 노동을 중요한 노동 요소로 요구하는 사회복지사나 간호사, 유치원 교사의 저임금은 이들 노동의 특징이 어머니의 노동을 닮은, 성별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학력과 연령대의 남녀가 담당하는 남성 경비원과 여성 청소부(사실 청소의 노동 강도가 더 세다)의 급여가 다섯 배 격차가 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일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동 현장에서 커피 접대, 사무기기 청소 등 여성의 일이라고 간주되는 일을 남성에게 시켰을 때, 남성 노동자는 자존심의 상처를 넘어 회사를 그만두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 P80

나는 몇 년 전 국가 폭력과 관련한 국제 학술 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한 남성 참가자로부터 "어떻게 아줌마가 (애를 안 보고)이런 곳에 다 왔느냐."라는 ‘칭찬‘을 여러 번 들었다. 나는 그 말을모욕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는 칭찬이라고 주장했다. 그 말은 "여자주제에 어떻게 인권과 평화를 논하는 자리에 왔느냐."는 의미가 아니다. 그 대회에 참가한 미혼 여성들은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 아줌마는 여성이 아니라 제3의 성이다. 공적 영역에 나올 수 있는 여성은 남성이 규정한 여성 이미지 ㅡ 젊고 예쁜, 자신의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에 걸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줌마는 그들이 기대하는 여성이 아니다.
- P85

전 세계에서 이혼율이 가장 낮은 국가는 인도인데, 대신인도는 기혼 여성의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2005년 기준.통계는 이면을 읽어야 함) - P88

누가 나더러 여성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라는 말을 소개한다. "착한 여자만이
천당 갈 수 있다."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생각이라면, 여성주의는 "나쁜 여자가 천당 간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와 거리가 멀다. 여성주의는 남성을 미워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든 증오는 이제까지 남성에게 쏟았던 기운을 여성 자신에게 돌릴 것을 제안한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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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늙은 다윗 왕을 내겠소."

ㅡ카드 게임에서 다윗은 스페이드 킹이다.
- P221

 "날씨가 바뀐것 같군." 

이 말은 나를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마치 그 말이본래 내포하는 것과는 다른 수많은 배합에서 솟아오른 깊은생명력이 다른 변화를 예고하고, 또 이 변화가 나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듯했기 때문이다.  - P222

내 동료 중에 고대사 강의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전날잠을 자려고 수면제 한 알을 먹었는데, 강의 중에 필요한 그리스 인용문을 기억해 내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는군요. 

그 약을추천했던 의사는 당연히 그 약이 기억력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죠. 그러자 그 역사학자는, 아마도 당신은그리스 인용문을 말할 필요가 없었겠죠. 라고 의사에게 냉소적인 말투로 오만하게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 P237

우리는 최근 삼십 년간의 추억을 모두 회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추억들은 우리를 완전히 적시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삼십 년에 한정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런 예전의 삶을 탄생너머로까지 연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 뒤에 있는 추억의 어느 부분 전체를 알지 못하고, 그 추억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며, 내게로 그 추억을 소환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누가 그미지의 덩어리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나의 삶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추억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 P239

샤를뤼스 씨의 사랑이 보여 주는 사랑의 반사회적인 성격때문에 그 편지는 정념의 흐름이 표출하는, 지각할 수는 없지만 강력한 힘의 놀라운 사례였으며, 이런 흐름을 통해 사랑하는 연인은 헤엄치는 사람이 그러하듯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물결에 떠밀려 내려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육지를 놓친다

아마도 정상인의 사랑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욕망이나 후회, 환멸, 계획 따위를 계속 지어내면서 모르는 여인에 관해온통 소설로 엮어낼 때면, 그 사랑은 컴퍼스 두 쪽 사이에 벌어진 간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 헤아리게 해 준다. 그렇지만 이거리감은 보편적으로 공유되지 않은 정념의 성격과, 샤를뤼스 씨와 에메 사이에 놓인 신분의 차이로 인해 특별히 더 확대되었다.

(사랑의 반사회적 성격ㅋㅋㅋㅋㅋ)
- P253

마차는 성당까지 우리를 데려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케톨므를 나오자 마차를 멈추게 했고, 알베르틴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가 이 성당이나 다른 기념물, 몇몇 그림에 대해 "당신과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요!" 라고 말하면서 나를 두렵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즐거움은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나는 아름다운 것 앞에 홀로 있을때라야, 아니 혼자 있다고 상상하면서 침묵을 지킬 때라야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의 도움을 받으면 예술에 대한 감각을 키울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감각은 그렇게 전달될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잠시 그녀와 헤어졌다가 오후 끝자락에 찾으러 오겠다고 말하는 편이 더 신중하다고 생각했다.  - P256

"감기가 얼마나 심한지!"
하고 그는 마치 내가 혼자서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듯이 덧붙였다. "의사가 백일해라고 하는군요."라고 말하며 내게 다시 기침과 침을 뱉기 시작했다. 

"말하느라고 힘 빼지 마세요." 나는 선의의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가식이었다. 오히려 백일해에 옮을까 봐 겁이 났는데, 그것이 나의 호흡 곤란 증세에 더해지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몸이 아파도 실려 나가기를 거부하는 명연주자처럼, 줄곧 자랑스럽게 말을 이으며 침을 튀겼다. "아뇨,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당신에게는 그럴지 모르지만내게는 그렇지 않은데요.‘라고 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전 금방 파리로 돌아갑니다. (잘됐군요. 그 전에 내게 병을 옮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파리는," 하고 그는 말을 계속 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가 봐요. 이곳이나 몬테카를로보다 훨씬 더요.

(엘리베이터 보이ㅋㅋㅋㅋ)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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