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        

 

     알래스카의 정유회사에 고용되어 야생동물들을 사냥하는 주인공 오트웨이. 하지만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깊은 우울감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마침내 일이 끝나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 하지만 얼마 후 비행기는 추락을 하고 설상가상으로 늑대들이 나타나 생존자들을 위협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죽어가면서 오트웨이와 생존자 일행은 살아남기 위해 눈밭을 헤매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날고기 같은 영화다. 그것도 얇게 저며서 각종 양념을 넣어 만든 육회가 아니라 갓 사냥한 짐승을 거칠게 도축해 뜯어낸 듯한 그런 영상이다. 생존이라는 절박한 과제 앞에서 인물들은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고, 보는 이들 또한 그러하다.

 

     결국 감독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살아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다. 자살을 시도했던 그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주인공 오트웨이는 살아남기 위해 갖은 고생을 감수하는 것을 마다치 않는다.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과 기술을 동원해 생존자들을 이끌고 살 길을 찾아 나선다. 진짜 죽음의 위기 앞에서 어쭙잖은 감상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단순한 메시지다.

 

     다만 그 가운데서 인간과 늑대의 차이가 무엇인지 점차 희미해져간다. 자신들을 공격하던 늑대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서 “We are animals” 라고 외치는 한 인물의 말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다 벗겨놓고 보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유물론적 환원주의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사실 포스터도 인간과 야수의 모호한 경계를 암시하는 것 같다)

 

 

 

     에너지가 넘친다. 다만 에너지만 넘친다. 생존에의 투쟁 자체는 훌륭하게 묘사했지만, 그 투쟁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까지는 하지 못했다. 의미보다는 느낌이 좀 더 강조되는 영화. 개인적으론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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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언어 - 하늘문을 여는 열쇠
김우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1. 요약 。。。。。。。                    

 

     방언을 하늘의 언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통로로 여기는 저자가 자신의 삶을 간증으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방언을 하는 곳에서 놀라운 일들(능력?)이 나타나고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 당연한 논리적 결론으로 저자는 모든 신자들이 방언을 할 수 있으며, 또 방언을 해야 한다는 방언 일반론을 주장하고, 나아가 방언을 하지 ‘못하는’ 신자들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식 - 지적인 교만 내지는 무지 - 으로 몰고 가는 듯한 인상을 보여준다.

 

 

2. 감상평 。。。。。。。                   

 

     이런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건 쉽지 않다. 우선은 책의 내용이 기독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 거기 담겨 있는 저자의 관점이 거의 전체적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전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길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이럴 경우 책의 내용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평가를 하게 되는데, 일단 그런 글은 재미도 없고 필경 공격적인 문장들로 마쳐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어쩌겠나.. 

 

 

     책에 담긴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19세기 이래로 부흥했던 기독교 영지주의의 재판(再版)이라고 하겠다. 초대교회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다가, 박해의 시기가 지나며 교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건강한 교리를 재확인하는 일이 시작되면서 잦아들기 시작했던 이 사조(思潮)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다시 크게 부흥했다. 능력과 성결, 더 높은 삶, 영적인 비밀과 같은 용어들은 그들의 전매특허였다. 물론 저자는 이걸 ‘사탄이 교회에 침투해 성령의 역사를 인간적인 의와 지식으로 대치해버’린 것(235)으로 생각하는 듯하지만.

 

     방언을 ‘인간의 이성적인 무엇보다 더 고차원의 영적 지식의 통로’(96)로 여기는 저자의 생각은 정확히 이런 영지주의적 경향과 맞닿아 있다. 아울러 기도를 하며 성령의 목소리를 직접 자신의 입으로 냈다는 (성경 어디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을 하는 그는(119), 방언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로 올라가’기를 구한다(120). 방언을 통해 ‘십자가의 비밀’, ‘보혈의 비밀’, ‘예수 이름의 비밀’, ‘교회의 비밀’, ‘깊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와 같은 비밀구절들의 의미들이 풀어질 것이라는 구절(210)은 영지주의적 공동체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부분이다.

 

 

     특정한 비전(秘傳)적 수단을 통해 더 높은 영적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영지주의는, 불가해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중심적 사고의 결정체다. 처음부터 기독교의 주변부에서 싹이 텄던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기독교의 그것과 매우 유사해 많은 사람들을 혼동에 빠뜨리게 해 왔다. 일상적인 것들보다 더 우월한 무엇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사모는 영적인 계층을 만들었고, 이 계층을 지켜내기 위한 비밀들을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그러나 성경은 비밀들과 영적인 계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깊으신 비밀은 이미 다 풀렸는데, 그분의 영원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비밀’의 내용의 전부이다. 여기에 또 어떤 비밀을 덧붙이려 하는 저자는 성경의 저자들도 감히 넘보지 않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침범하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들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되지 못하고, 대신 그 자리를 주관적인 느낌과 경험들이 차지하고 있다.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게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87)이라는 설명이나 모든 영적 은사는 방언을 기반으로 나타나기에 방언은 은사의 기본(108)이라는 주장,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방언을 했기 때문에 영적 충만함을 누리며 강한 능력을 경험했다(110)는 부분, 방언에 대한 ‘지식 없음’이 방언을 하지 못하도록 제어했다(175)는 구절 등은 저자의 주장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사유와 경험에 기반해 있을 뿐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다니엘이 방언을 할 줄 몰라 그의 기도가 사탄의 세력에게까지 흘러들어가 하나님의 응답을 방해했다는 식의 지적을 담고 있는 부분(88-89)은 기가 차다.

 

 

     모든 것을 방언이라는 중심을 떠받드는 시종으로 만드는 시도는 방언에 대한 경계를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상상에 올려놓는 자의적 해석(216)을 낳기까지 하고 있다. 저자가 그토록 자주 참조하는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의 유익을 강조하고 권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를 위한 내용이지만, 방언에 대한 저자의 사랑은 성경구절을 정확히 반대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고린도 교회는 공동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깨어진 상태에 있었는데, 바울은 그런 교회를 향해 개인만을 위하고 자랑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라고 권면한다. 방언과 예언의 대조는 이런 문맥에서 등장한다. 그건 방언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고,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임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원문에는 끊임없이 ‘호 데’, 즉 ‘그러나(but)’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잘 하는 것을 자랑하고 그들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18-19절)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A도 좋지만 B가 더 나아’라는 말을 듣고서 A도 좋다고 했다는 부분만 가져다 쓰는 꼴이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저자가 영지주의적 이단에 속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문법들이나 단어들, 사유의 논리는 영지주의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기독교의 용어들을 담고 있긴 하지만, 기독교에 관한 책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동일한 출판사에서 마이클 호튼의 『미국제 영성에 속지말라』라는 책을 펴낸지 2년 만에 이런 책을 출판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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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생각한다.

사랑은 감정의 파도에만 휩쓸리고 지적으로는 잠에 빠진,

생각 없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항상 생각하느라 분주하다.

먼저 사랑이 담긴 생각이 있어야

행위가 뒤따르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알렉스 켄드릭, 스티븐 켄드릭, 『사랑의 도전』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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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
마이클 호튼 지음, 김재영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1. 요약 。。。。。。。                    

 

     저자는 ‘미국제 영성’을 영지주의적 신앙과 동일시한다. 바른 교리보다 특별한 감정적 고양의 상태를 더욱 우월한 것으로 여기며, 인간적인 노력으로 절대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으며 종종 이를 위해 주술적 형태의 신앙행위를 동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를 가르치면서도 성/속, 영/육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이 혼합주의적인 신앙이 이미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책 전체에 걸쳐 저자는 오늘날 이 영지주의적 신앙이 어떻게 교회 안에 부활해 사람들의 생각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인간의 생각에 기초한 종교가 아닌 하나님의 방식과 기준에 따른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2. 감상평 。。。。。。。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그분에 관해, 이 세상에 관해 말씀해주신 계시의 내용을 근거로 성립된 신앙체계라는 면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진다. 기독교 신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것 안에서만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실제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사유해왔음에도 신학 전 분야에 걸쳐서 여전히 완전히 이해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신론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에 대한 이해가, 인죄론에 관해서는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관해, 구원론에 있어서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교리들이 완전함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애매함과 불가해한 부분을 하나님의 속성에 기인한 ‘신비’로 인정하고 그들의 무지함을 겸손하게 인정해왔다. 영지주의는 바로 이런 신비를 인간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려 이해 가능한 수준의 설명을 제시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에서 비롯되었다. 당연히 이런 시도는 어제 오늘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다를 어항에 담으려는 시도는 잘 해야 실패로, 최악에는 어항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는데도, 모든 것을 인간 지성으로 담아내려는 이러한 시도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문제다.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기독교에 대한 관점들(특별히 영지주의적 접근, 즉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치 않고, 인간 중심의 종교로 재배열하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쉽게 오염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제 영성’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인간본위의 신앙행태는 우리에게 너무나 편하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때문에 단시 신학적 자유주의자들만이 아니라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이러한 경향들이 자주 발견되는 것. 저자가 경고하는 대로 성경의 계시가 말해주고 있는 방식과 한계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파괴적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다만 영지주의 자체가 워낙에 잡다한 사상들을 통칭하는 이름이기에 ‘아닌 것은 모두 영지주의’라는 식으로 설명되는 느낌이 드는 부분과, 수사적인 표현들이 종종 등장해 내용이 반복되기만 하는 것 같은 부분이 보이는 것은 좀 아쉽다. 전자야 영지주의 자체가 가진 문제이긴 하지만, 후자 쪽은 전작과는 달리 저자가 좀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걸까 싶다. 물론 주제와 동떨어진 내용을 덧붙인 것과는 다른 부연이긴 하지만 말이다.

 

     책 속의 어느 구절처럼 ‘진리보다 솔직함을, 실재보다 감정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한, 기독교는 더 이상 생명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여러 종교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바른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면서, 이 주제에 관해서 가장 실제적이고 분명한 교훈을 담고 있는 좋은 책이다. 읽고, 위기에서 탈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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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타조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카림. 어느 날 집에 있던 아내로부터 급히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청각 장애인인 큰 딸의 보청기가 동네 저수조에 빠져버렸다는 것.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니 철없는 둘째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쓰레기로 가득 찬 저수조에 물고기를 키워 돈을 벌겠다고 하다가 도와주던 누나의 보청기를 잃어버린 것. 결국 보청기는 찾아냈지만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새 보청기를 사기에는 너무 비싸다. 심란한 마음으로 일을 하다가 타조 한 마리가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고 결국 해고까지 되고 만다. 도시로 나갔다가 우연히 오토바이 택시 일을 시작하게 된 카림. 과연 그는 딸을 위한 새 보청기를 살 수 있을까?

 

 

 

2. 감상평 。。。。。。。                    

 

     이란의 한 시골 마을에서 날아온 따뜻한 가족 이야기. 거리상으로는 수천 km 떨어져 있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과도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전통적인 가장과 아내 자녀들의 모습, 다 같이 풍족하진 않지만 이웃이 어려우면 조건 없이 도와주는 시골의 정(情), 약사 빠른 도시 사람들과 그런 그들과 접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순박한 시골 사람들 등 우리의 지난 모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상들이다. 감독은 이런 영상들을 통해 ‘결국은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낸다.

 

     아무리 말썽을 부리고, 시종일관 티격태격해도 결국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향한 깊은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웃을 수 있는 이유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친구들과 함께 저수조를 청소하며 물고기를 키울 꿈을 꾸는 것도, 자신 때문에 힘들게 일하는 아버지를 위해 길거리에 나가 꽃을 파는 이유도 다 그들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

 

 

 

     이런 차원에서 보면 급증하고 있는 깨어진 가정들은 심각한 손실이자 문제다. 어떤 사회 복지제도로 건강한 가정을 대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난 가정을 국가(와 같은 거대권력) 주도의 공동체로 재편하려는 쪽도, 철저하게 경제적인 논리로만 해석하고 조작하려는 쪽도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가정이란 경제논리, 정치논리 이전의 무엇인데, 돈의 세례를 받고 물질주의의 신자가 된 요즈음의 사람들은 이마저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부족하고 종종 오해가 빚어지더라도 가정은 소중한 건데 말이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영화다. 천편일률적인 헐리웃 산(産) 공산품 같은 영화도 나름 재미는 있지만, 한 땀, 한 땀 손으로 짜내려 간 듯한 수공예품 같은 이런 영화들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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