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에 관한 세 번째 관찰은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익숙해짐이나 애착 못지 않게, 사람들의 사고를 강하게 지배하는 것이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두려움을 갖게된다.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 아기는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 안에는 어떤 위험요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양수라는 따뜻한 물에 잠겨 있으면서,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배고픔을 느끼면 탯줄을 통해서 어머니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으면 되고,

피곤하면 그냥 그대로 자버리면 되는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태아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즐겁게 놀기도(?)한다고 한다. ㅡㅡ;

뭐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곳이다.




더구나 자궁 안은 사시사철 일정한 온도로 맞춰져있다.

난방, 냉방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태아가 잠겨있는 양수는, 웬만한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 곳에는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혼란함도, 소음도, 매연도 없다.

태아에게 있어서 그 곳은 낙원인 것이다.

에덴동산이 그 곳과 비견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아닐까?





하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태아는 영원히 그 곳에서 살 수는 없다.

10개월의 기간이 지나면, 태아는 그 낙원에서 혼란한 세상으로 밀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아마 태아도 직감적으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한없이 편안하기만 했던 그 곳이,

이제는 자기의 자라버린 몸을 겨우 담고 있는 크기로 줄어든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낙원에서 세상으로 나와야 할 때,

아기는 엄청난 두려움에 접하게 된다.





아기가 처음 보고 느끼는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요즘에야 거의 대부분 산부인과를 찾아가서 출산을 하니,
(난 집에서 태어났다는... ㅡㅡㆀ)

대부분의 아기들은 병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대한 첫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한 번 아기의 입장이 되어보자.




'한 두달 전부터 내가 있는 곳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전에는 참 편했는데 말이다.

이제 여기 말고 좀 더 편한 곳으로 나가고 싶다.

지난 열 달간 계속 나랑 얘기하던 누군가한테 말해야겠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난 말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좋은 수가 생겼다.

바디 랭귀지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내가 답답하다는 것을 몸으로 알려주자.




아.. 뭔가 감이 온다.

헛..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이 더 답답해져온다.

이대로 있다가는 깔려 죽을지도 모르겠다.

어디 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아, 저기 통로가 있는것 같다.

좀 작아보이긴 하지만, 지금 난 살기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다.

저 밖에 뭐가 있을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도전해보자.





드디어!! 내 머리가 빠져 나왔다.

아.. 근데 여긴 너무 이상하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 저기 많은 존재들이 움직이는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고,(아직 난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가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내 섬세한 피부도 갑작스런 자극에 놀라는 것 같다.

다시 들어가야겠다.

여기는 내가 살 곳이 못되는거 같아.

조금 불편하긴 해도 전에 그 곳이 더 나아.

헛.. 근데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가려고 몸부림을 칠 수록 자꾸자꾸 빠져나오기만 한다.





아.. 결국 완전히 빠져나오고 말았다.

이런 괴물들이 사는 곳에 나 혼자 떨어져 나오게 된 것이다.

아얏! 누가 날 때렸다.

슬프다. 이제 이렇게 난 맞아 죽는 것인가...'





약간의 과장과 상상이 들어갔지만,

태아는 분명 이 과정에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인간은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변화라는 것은 양면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반면,

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은 안정된 현재의 위치를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단 권력자들 뿐만 아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돈이나 물건 등 여러가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비이성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도록 만든다.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의처증이나 의붓증이 이런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미래에 어떤 것이 있을지 알 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두려움도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까이에서 찾아보자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자그만치 12년 동안의 공교육을 받은 결과를 측정하는 단 한 번의 시험.

물론 많은 준비를 해왔겠지만,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법.

안심하고 시험에 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같은 맥락에서 취업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성취하고 싶은 목적을 이룰지 못할까봐 갖는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의 눈을 좀 더 크게 떠 보자.

이 모든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없을까?

급격한 변화로 인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

이런 두려움들이 점점 확장되어서 가장 극치에 이를 때가 언제일까?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죽음보다 더 극적이고 큰 변화가 있을까.

인간이 상실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인간이 예상할 수 없는 가장 큰 상태는?

죽음 이후의 상태일 것이다.






뭐.. 너무 작위적이지 않느냐고 반문을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죽음은 너무나고 급작스럽고 큰 변화이며,

인간이 잃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잃는 것이고,

죽음 이후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단 하나의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이 비록 급작스러운 변화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보다 앞서서 그 변화를 경험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리라고 약속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생명이라는 큰 자산을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앞서 말한 그 분이 그들에게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인들도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위에서 말한 그 분이 그들에게, 그들이 죽은 다음 있을 곳은 좋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보다 더 크고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자, 그러면 이제 시선을 다시 우리에게로 돌려보자.

우리는 이미 가장 큰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이다.

조금 전 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가?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크게 느껴지는가?

그런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이미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인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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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래 성품 중, '익숙해짐'에 반대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애착'일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끈질긴 사랑'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단어는

앞서 말했던 '익숙해지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익숙해짐'이 대상을 오래 접하면서 나타나는

무관심, 무배려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애착'은, 대상과 오래 함께하면서 생겨나는

그 대상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다. 

 




사람은 누구나 애착이 가는 대상이 있다.

그것이 돈 일수도 있고, 사람 일수도 있다.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에 애착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맹이에 애착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길 가다가 우연히 주운 작은 조약돌 하나라도,

그것을 오래도록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보면

버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주머니 속에 있는 조약돌을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다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그래서 그 돌맹이를 차마 버릴수 없어 늘상 들고 다니고,

만약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대부분 세탁하려다 그것을 발견한 어머니의 손에서 사라진다),

한동안 아주 허전함을 느낀다.


 


물론, 이 정도로 예민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빗방울 하나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봤냐고

친구한테 물어봤다가,

무안만 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애착이란 것은 정도와 대상의 종류에만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이 가지는 성질 중 하나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것에 가장 많은 애착을 보일까?

내 방 창가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쉬엄쉬엄 쓰고 있는 글이라

특별히 설문조사 같은 것을 해 본바는 아니지만,

그동안 읽어왔던 수많은

역사서적들(역사 만큼 이 물음에 도움이 되는 자료가 있을까?)과,

소설들,

신문(이 매체를 다룰때는, 그것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과장, 왜곡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TV(이것은 소설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의 삶을 대신 살게 해 주는 주요한 도구이다),

그리고 내가 만나본 여러 사람들을 종합해 볼 때,

그것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에 대한 애착만큼 강한 것이 또 있을까?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가족에 대한 애착,

친구에 대한 애착,

심지어 인류에 대한 애착까지..

'사람에 대한 애착'이라는 표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범주의 것들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가지는 애착이

'인류전체에 대한 애착'으로 발전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대부분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관련된는 매우 근접한 범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닥쳐올 문제들의 경과추이를 지켜보면서

일희일비 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나의 문제가 잘 풀리면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다가도,

이내 다음의 문제에 직면하고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또, 가족에 대한 애착도 매우 강하다.

자신의 배우자, 자녀, 부모에 대한 애착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생물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종의 공통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리고 대개는 나이가 먹어가면서 위의 순서로 그 중점이 변한다. 

 

 

즉,

나이가 어릴때는 배우자, 혹은 이성상대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가,

어느정도 나이를 먹으면 결혼을 하고,

그 다음에는 자식들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다.

그보다 후에,

즉 나이가 많이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실때 쯤이 되어서야,

부모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다. 

 

 

 

어린 나이에 가지게 되는 이성에 대한 애착.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첫사랑에 대한 기억.

대부분 이것은 어린 나이에 남게된다.

'첫사랑의 열병'이라고 하던가?

어린나이에 가지게 되는 이성에 대한 애착은

'열병'이란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성질의 것이다.

가슴이 두근두근뛰고,

기분이 한 없이 좋아졌다가 저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
(마치 열이 올랐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상당수도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그리고 알고 있는 결론일수도 있지만, 

이성에 대한 애착은 영원하지 못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애착이라고 하더라도,

막상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어지게 되면 차차 잊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망각'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기능때문에 그러한데,

(망각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이 망각이라는 기능 때문에 이 종류의 애착은 영원할 수 없다.

첫사랑의 추억은 영원하다고?

그것은 추억으로써 남는 것이지,

막상 오랜 시간이 지난다음에 만나게 되면

처음과 같은 종류의 애착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자녀에 대한 애착이 한국인들에게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수십, 수백만원짜리 유치원에 보내고,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며 과외를 시킨다.

부모들의 자식의 장래직업 1순위는 판사 혹은 의사이고,

많은 경우 자식의 결혼상대까지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지를 먼저 보게된다.




하지만, 자식은 자식일 뿐.

자식의 삶까지 내가 살아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인생이 있을 것.. 

 

 



부모에 대한 애착은 가장 늦게,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부모가 늙고 약해지는 모습을 볼 때서야,

인간들은 부모에 대한 애착의 강도를 높여간다.

그렇게 늘 한 박자씩 늦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부모란 존재는,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데 한정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줄 것이 적어지면, 관심 또한 적어진다.

 




왜 좀 더 일찍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의 표현을 하지 못하는가?

왜 언제나 부모는 불평과 투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이 부모에 대한 애착까지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부모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죽고 시간이 오래 지나게 되면,

결국 또 망각이라는 커튼으로 살짝 가리워지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결론은 간단하다.

인간이 가진 애착이란 어느것도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거나 약화되기 마련이고,

결정적으로 죽음은 이런 종류의 애착을 사라지게 만든다.

죽고 난 뒤에까지 애착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이런 종류의 애착 자체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

이런 종류의 애착을 가지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단 한가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애착이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애착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죽음조차 이를 없애지 못한다.

오히려 죽고 난 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애착이 극대화된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위에서 말한, 인간이 가지는 모든 애착 역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애착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하고, 완전한 것.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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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주 접하는 대상에 대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익숙해짐.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인간도 예외는 없다.

아니, 인간 뿐 아니라, 동물, 식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먹이를 줄 때마다 종 소리를 들었던 개가,

나중에는 종 소리만으로도 침을 흘리게 되었다는 실험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또, 분재를 아는가?

어린 나무를 두꺼운 철사로 감아서, 이리저리 휘어지게 만든채로 자라게 하면,

나중에 그 철사를 풀어도 여전히 그 기괴한 모습으로 자라는 것이다.



이 모든 종류의 생명체에게서 나타나는 '익숙해짐'이란 것이

긍정적으로 발현될 때는 여러모로 유익한 점이 많다.

불필요한 시간적, 물질적, 정신적 낭비를 줄여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언제까지나 처음 하는 것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그런 일이라면 적성에 안 맞는 것이니 포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운동 선수가 아무리 노력해도 경기장과 친해질 수 없다면, 어디 운동선수인가?



반대로 이 '익숙해짐'이 부정적으로 나타날때가 있다.

그 익숙해진 대상에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발현은 다른 생명체에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기 힘들다.

내 관찰에 의하면 오직 인간에게서만 나타난다.



인간은 '익숙해짐의 정도'가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다.

다른 사람과는 잘 다투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형제 자매, 부모님과는 더 잘 싸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익숙해진 대상이기 때문이다.



익숙해진 대상에 대해서는, 처음보다 더 적은 관심을 쏟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상대의 작은 감정변화에도 신경을 쓰지만,

관계가 지속되면, 지속될 수록 관심도는 낮아진다.

그와 반비례해서 이기적인 경향은 증가한다.



상대가 오로지 나에게만 맞춰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상대의 작은 변화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상대가 내 작은 변화에 신경을 써주기만을 바란다.

모든 다툼은 내가 상대방을 좀 더 배려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법.

인간은 이 사실을 실제로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때문에 익숙해지면 익숙해 질수록, 다툼은 더 자주 발생한다.



어떤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일정 부분의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것을 전혀 양보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떤 관계라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계를 가진지 오래되면 오래될 수록,

관계를 맺는 양 주체는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한다는 결론이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을 위해 희생과 양보를 한 대상에게,

익숙해질수록 더 잘해줘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조금 더 많은 것을 주려고 하고,

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신경을 써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인간이라는 배은망덕한 족속들은,

그들의 첫 조상이 하나님을 배신한 이래로,

아직도 그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은 아무리 익숙해져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는 분이니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만약 인간이 익숙해진다는 것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 대신 익숙해질수록 조금 더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을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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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 푸른숲 비오스(Prun Soop Bios) 5
게리 윌스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아담이 더 낮은 사랑(이브를 향한)을 사랑의 원천(하나님)에서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이브를 돕지 못하고 자신도 돕지 못했다는 것이다.

 

  

 . 요약 。。。。。。。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에 관한 학문적인 평전 하나가 나왔다. 자칫 지나친 우상화나 적대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기 쉬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과 그의 삶이지만,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 나와 있는 기록에 근거해 그의 개인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객관적인 묘사를 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열고 있다.

 

        이제껏 겉핥기식으로만, 혹은 매우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의 일생에 대해 매우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다. 다만 그의 사상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설명은 약간 부족해 보인다.(평전이라는 특성상 보다 역사적인 부분에 치우치는 것은 어느 정도 감안되어야 하리라.)



 

 

 . 감상평 。。。。。。。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쉽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가 남긴 영향력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는 고대 교회와 중세 교회를 이어주는 인물이자, 현대에까지도 남아 있는 수많은 철학적, 신학적, 심리학적, 정치적 문제들을 던지고 대답했던 인물이다. 개신교와 카톨릭 모두에서 교부(敎父)로 인정되고 있을 만큼, 그의 무게감은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에 대해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작지만 알찬 책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의 전반적인 일생과 사상에 대해 접근하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학문적인 책이기 때문에 이쪽 분야에 대해 선지식이 별로 없는 독자들에게는 약간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가 처음부터 쉽게 익힐 수 있겠는가. 처음은 원래 어려운 법이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당장에 그의 저작들을 집어 들기보다는, 이 책을 통해 일단 워밍업을 해 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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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만찬 1
하비에르 시에라 지음, 박지영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그와 더불어서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이

실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점 역시 깨닫게 될 거요.

마지막 하나, 진실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라오.

 

 

 요약                                                                                                

 

        또 ‘제 2의 움베르토 에코’님이 나오셨단다. 책 겉장에 삽입되어 있는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찍은 사진(하필 이렇게 나온 사진을 실은 이유가 뭔지..)을 보니 저자에 대한 기대감이 반으로 확 준다. ㅡㅡ;;


 

 

        저자는 이번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어디서 많이 봤던 설정이다. 달라진 점은 이번 이야기에서 레오나르도는 시온 수도회의 수장이 아닌 카타리파의 핵심요인으로 나온다는 것.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바로 이 ‘카타리파’이다.

 

        아무튼 레오나르도는 이 카타리파의 일원으로, 자신이 맡은 작품들에 카타리파의 비밀 교리들을 상징을 사용해 숨겨 놓았고, 누군가 이 사실을 알고서는 아고레로라는 가명으로 로마 교황청에 레오나르도의 작업을 막아야 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이 사건을 맡아 밀라노로 파견된 종교재판부의 레이레 신부. 레이레는 그 곳에서 아고레로가 누구인지, 그가 경고하고 있는 일의 진상이 무엇인지 수사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수사는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았고, 실마리는 레이레 신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최후의 만찬’에 숨겨진 비밀 상징.


 

 



↑ 이게 문제의 저자 사진..;;


 

 

 감상평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나로서도 특별히 할 말은 없지만, 문제는 소설이 사실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 말미에 번역자의 입으로 이 책은 80:20의 비율로 사실과 상상이 섞여 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니, 책의 내용에 담긴 특성상 나도 어쩔 수 없이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을 지적하는 ‘변증적’ 성격의 약간은 지루해질 지도 모르는 감상평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먼저 소설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카타르 파’에 대해 잠깐 설명이 필요하다. 책에는 ‘카타르파’로 번역되어 있는 이 이름은 아마도 영어의 Cathars를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아는 신학서들에서는 모두 라틴어 Catari를 음역한 카타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마도 그 당시 그들을 언급한 문서들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가능한 현장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했다면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카타르’보다는 ‘카타리’라고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예를 들어,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를 영어식 발음인 시세로로 읽겠다고 우긴다면야 뭐 할 말은 없지만, 키케로 자신은 자기를 부르는 지 못 알아듣지 않았을까?)

 

        책에도 약간 실려 있는 것처럼, 카타리파는 중세에 등장했던 이단 종파 중 하나이다. 사실 카타리파의 성격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듯 하다. 어떤 학자들은 기독교의 다른 모습이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단지 기독교적 외형장식만을 차용한 ‘전혀 다른 종교’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카타리파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엄격한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세상은 선과 악의 전쟁터이며,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므로, 사악한 물질세계에서 선한 영혼의 세계로 탈출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교리적 문제 때문에, 비록 그들의 조직이나 행동들이 수도원적 생활이나 가난하지만 진실된 설교자들과 비슷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일찍부터 이단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보다는 바빌로니아의 종교인 마니교와 더 유사해 보인다.


 

 

        이 정도의 선지식을 가지고 책을 들여다보면, 저자는 책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배경부(당시의 종교적 분위기나 특정한 건물, 인물 등에 대한 묘사 중 일부)를 빼고는, 이야기의 스토리를 이루는 중요한 고리들의 대부분은 상상에 의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나마 사실관계에 있어서도 오류를 보이는 부분이 많다. 1권 96쪽의 주에 실려 있는 내용은 ‘영지주의(그노시즘)’이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자’라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그노시즘은 그리스어의 ‘지식’이라는 어휘인 ‘그노시스’에서 온 말로,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만이 진짜 지식을 가졌고, 그 지식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빈정대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비밀스런 지식~’ 어쩌구 하는 존칭의 의미는 들어있지 않다.

 

        또, 저자는 카타리파를 그노시즘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다시 그노시즘을 플라톤 사상과 동일하게 보고 있지만, 이들 사이의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보여주는 근거는 없다. 그저 비슷해 보이면 다 연결지으려는 진화론적 사고방식의 오류이다. 숟가락과 삽이 비슷하다고 해서 숟가락이 발전해 삽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99쪽에 나온 것처럼 ‘고태 카타리 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카타리파가 상징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2권 124) 저자의 설명에 대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교회의 신학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 예컨대 성경이 교회에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을 신의 계율을 어긴 일이라고 말한다고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며 주장하는 것(2권 137)은 저자의 편견이 반영된 설명일 뿐이고, 소설에 나오는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가 ‘위험한 신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2권 181)은 ‘신학적 가치’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오해에서 비롯된 말이다. ‘나그 함마디 문서’가 사해사본보다 중요하다는 저자의 확신(2권 277)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도 나그 함마디 문서의 기록시기를 3, 4세기에 가깝게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초기 교회의 문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쯤 해서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책에는 자주 ‘고도의 지적 게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책이 끝날 때 까지 나는 도대체 그 ‘고도의 지적 게임’이 어디에 등장하는 지 발견하지 못했다. 문자에 숫자를 대입해서 원하는 단어를 만들어내는 케케묵은 수법이나(사실 오늘날에는 컴퓨터의 발달로 원하는 모든 단어를 이런 식으로 조합할 수 있다), 말하지 못하는 그림에서 자신이 원하는 말을 (‘상징’이라는 멋들어진 방식을 통해) 이끌어내는 수법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이런 방식들은 말 그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내용 밖에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이 치밀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해 갈 것이라는 기대는 종반부로 갈수록 점점 줄어들고 만다. 책에는 특별히 ‘사건의 진행’이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의 설정대로 이야기의 끝까지 거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많지만, 그들 모두가 사건에 충분히 개입되지는 못하고 있고, 내용의 진행과 함께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은 매우 적다. 책에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에 관심이 별로 없는 독자라면, 이내 질려버리고 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반부에 아고레로가 누구인지 찍었는데,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이 책을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의 중간쯤으로 소개하는 건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인물들이 중세에 살고 있다는 점을 빼면 ‘장미의 이름’과 닮은 점이 별로 없고, 교회를 뒤집을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의 발견이라는 허풍을 뺀다면 ‘다빈치 코드’와도 비슷한 점이 적다. 오히려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의 아류작쯤으로 보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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