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 이야기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9
베벌리 나이두 지음, 이경상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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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곳을 떠나는 최초의 가족들 중에 하나였다.
정권을 잡은 보어 인들은 요하네스버그에 백인만 살기를 원했다.
우리 동네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들은 모조리 떠나야 했다.




. 요약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중요한 정책 중 하나였던 인종분리, 아니 인종차별정책을 이르는 말인 ‘아파르트헤이트’. 이 책은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일어났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은 일종의 모음집이다.

     재미있는 것은 각각의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모두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어린아이들의 눈을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우월주의 정책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혔는가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 감상평 。。。。。。。                     

 

     19,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과학기술의 폭발적인 발전과 그에 따른 삶의 질의 급격한 개선은, 이제 곧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인간에 대한 신뢰를 품고 있는 이상주의자들은 이대로만 간다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설교를 그치지 않았다. 과학과 기술만 발전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는 장미빛 기대.

 

     이러한 기대를 완전히 깔아뭉개버린 사건 중 하나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도 어이없는 정책이다. 유럽에서 이민을 온 백인들에 의해, 오로지 백인들을 위해, 백인들의 나라를 세우고자 만들어진 이 정책은, 단지 인간을 피부색으로만 구분하고 판단하고, 재단하고, 차별과 비난, 모욕을 하는 멍청한 법률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의식의 발전과 함께 나가지 못할 때 나타나게 되는 비참한 현실은, 자유와 인권을 향한 외침(의식)을 총(과학과 기술)으로 억누르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이 책이 남아공에서 있었던 그 반인류적 정책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고발하는 르포 형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은 그 땅에서 일어났던 그 차별과 폭력을, 그다지 강력한 비난의 어조나 흥분된 없이 그저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구성에서 각 이야기의 화자가 어린 아이들이라는 점은 사태의 심각성을 역으로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정확한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벽에 부딪히고, 상처받는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더 큰 공감대를 갖게 된다. 다만 어린아이의 시각을 사실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글을 통한 강한 정서적 감동이나 전이가 약하다는 점이 아쉽다.(좀 많이 잔잔하다)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문제 해결에 관한 중요한 시발점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인간들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읽었던 ‘내 이름은 임마꿀레’라는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르완다 내전에서도, 소위 서구 강대국이라고 하는 유럽의 열강들이나 미국들은 자국의 유불리를 따지면서 팔짱을 낀 채 르완다 정부의 대량학살을 방치했고, 오늘도 여전히 관타나모 수용소에는 정식 재판절차를 밟지도 않은 채 단지 미국 정부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갇혀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도 미국은 침략전쟁을 통해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을 기분 내키는 대로 살해하고 있다. 중국은 티벳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하고 있고, 북한의 당국자들은 수많은 양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데도 군대를 키우는 데 만 온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과학의 발전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물질적인 무엇에만 계속 집중한다면, 우리는 제 2의 아파르트헤이트, 제 3의 르완다 내전 등을 쉴 새 없이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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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천사 하얀 악마 - 검정과 하양의 문화사
김융희 지음 / 시공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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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색이건 색의 정체를 한마디로 밝히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불가능한 일이다.

색의 정체는 색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색과 색이 만나는 관계 속에서,

그리고 색과 만나는 우리들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감지되고 서명되고 소통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색의 정체를 탐색해보는 일은

우리 내면에 아로새겨진 색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 요약 。。。。。。。                      

 

     제목만 보면 ‘다빈치 코드’ 종류의 신비주의를 가미한 통속소설로 보이지만, 사실은 미술사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검은 색과 흰 색이라는 두 개의 무채색을 소재로, 인류의 미술사에 그것들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사용되어왔는지를 비교, 대조하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서론에서는 두 색의 공통점인 ‘무채색’이라는 점에 관한 가벼운 생각으로 시작하고, 1장(하얀 천사와 검은 악마)에서는 두 가지 생이 가지고 있는 고전적인 관념-신성, 선의 대표색으로서의 흰색과 악의 상징으로서의 검은 색 -을 다룬다. 2장에서는 이와는 반대 개념으로서의 두 가지 색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3장(세상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난, 쉼표 같은 색)에서는 두 가지 색에 관한 약간은 철학적인 상념들이 담겨 있다. 마지막 4장(우주의 원리를 담은 흑백의 본질)에서는, 앞서의 논의들과는 달리 동양적 사고에 있어서의 두 가지 색의 의미를 설명한다.
 

. 감상평 。。。。。。。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릴 때, 가끔 내 전공과는 영 거리가 있는 책들을 한 권씩 빌리곤 한다. 물리학이나 수학, 음악 등에 관한 책들이 그것이다. 늘 읽는 기초 인문학 관련 책들만 계속 읽다보면 솔직히 약간 지루하기도 하고, 머리가 자꾸 굳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이 책도 그런 생각의 일환으로 뽑아 든 녀석이다.

 

      책은 앞에도 설명했듯이, 검은색과 흰색이라는 두 개의 무채색들의 독특함과 그 독특함에서 파생해 나온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가지고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놓은 것이다. 색깔 자체야 ‘나는 이런 색입니다’라고 뭐라고 말할 수 있겠냐 만은, 똑같은 색을 두고도 시대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부여하는 모습이 제법 재미가 있다. 저자도 말했듯이 ‘색의 정체를 탐색해 보는 일은 우리 내면에 아로새겨진 색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한편 미술에 관한 책답게, 저자는 자신의 설명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많은 수의 그림 보조 자료들을 사용해 ‘보는 재미’도 함께 느끼게 해 준다.(물론 덕분에 책값은 상승?!) 역시나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실감하겠다.

 

      저자는 검은색과 흰색이라는 두 가지 소재가 담고 있는 다양한 상념을 한 권의 책으로 엮고자 노력했다. 나름대로 주제에 관한 역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업이긴 하지만, 반대로 때로는 서로 반대되는 진술들이 고작 몇 페이지만을 사이에 두고 나오기도 하니 약간 혼란을 느낄 만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백의민족’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완전 정반대의 내용으로 두 번에 걸쳐 실려 있다. 요런 건 좀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우리나라 사람이어서인지 문장들은 매끄럽다.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으니 쉬어 가는 기분으로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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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에 처한 교회음악 - 기독교인을 위한 필독서 101
프랭크갤럭 외 지음, 홍성수 옮김 / 두풍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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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음악)가 젊은이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음악이 주는 메시지의 가치기준과 메시지의 성격이 반복을 거듭하면서

젊은이의 마음은 감동받기 쉬운 상태가 될 것이다.

하루에 여섯 시간씩 강력하면서도 감정적인 음악의 매개체에 노출됨으로써

그 메시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의 마음을 채울 것이고

그들의 삶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 요약 。。。。。。。                     

 

     저자는 현대의 교회음악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전제 아래 책의 내용을 진행시킨다. 구체적으로 그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는 ‘록 음악을 교회음악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록 음악’이라는 수단 자체에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떤 노래가 주는 영향력에 있어서 그 가사보다는 음악 자체(멜로디와 리듬)가 더 큰 영향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록 음악의 경우에는 그 음악 자체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어떤 식으로 그것을 바꾸어도 교회 안에서는 사용하기에 어렵다는 것이다.

 

 

. 감상평 。。。。。。。                   

 

     어떤 것들을 대할 때, 그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향성’까지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는 저자의 기본적인 전제에는 동의한다. 때로는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내용보다 그 이면에 숨겨진 내용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 법이니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하루에 여섯 시간씩 강력하면서도 감정적인 음악의 매개체에 노출됨으로써 그 메시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의 마음을 채울 것이고 그들의 삶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저자들(이 책은 공저로 되어 있다)은 록음악에 대해 매우 경계하는 입장을 취한다. ‘위험에 처한 교회음악’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 책의 제목은, 그런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들이 보는 ‘위험’은 록음악이 교회음악 안으로 들어오는 현상을 말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록 음악이 가지고 있는 ‘관능성’ 때문이다. 저자는 ‘어떤 감정은 악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악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음악 역시 악하며, 록음악이 그런 기능을 하므로 그것은 악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삼단논법을 사용해 자신의 주장을 매우 확고한 것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주장은 매우 극단적인 반문화적 견해나, 혹은 엘리트문화와 대중문화를 구분하고 전자만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기를 즐겨하던 고전문화 이론가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선 저자의 논지의 핵심적인 전제인 ‘어떤 감정은 악하다’는 문장은 과연 옳을까? 이 문장은 ‘어떤 감정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감정 중 본질적으로 악한 감정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어떤 감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치 못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분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분노조차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악을 ‘미워하고’, 사탄을 ‘대적하라’고 강하게 권하고 있다. 즉, 분노와 같은 파괴적 감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적절한 방향을 향해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악을 향해 있을 때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관건은 ‘구조’가 아닌 ‘방향’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오류는 어떤 음악의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때문에 특정 장르, 특정한 비트, 특정한 악기와 기구들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선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성경의 진술과는 모순된다. 성경의 내용에 충실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 악하지는 않으며, 다만 인간의 타락과 그 영향력으로 인해 그것의 방향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그것들을 비난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본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록 음악 자체가, 그것에 사용되는 악기나 특정한 리듬, 또는 전자적으로 소리를 변형, 증폭시키는 어떤 기구 자체가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주장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내 생각이 기존에 나와 있는 모든 록 음악을 교회 안에서 노래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록음악이 태생적으로 6, 70년 대 영국과 미국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마약과 같은 향정신성 약물들, 극단적인 체제의 부정, 변태적인 섹스나 인간관계 등의 요소들을 안고 성장해 온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그런 흐름을 그대로 이어 받아 자신이 만든 음악에 그런 변태적이거나 건전치 못한 사상들을 섞어 짜 내려간 노래들이 많고, 이런 것들은 분명히 경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방향의 문제이지 본질이나 구조의 문제는 아니다.

 

     록 음악 안에 있는 타락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정련 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멀리하고 매장시키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개인적으로는 록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록 음악에 관한 변론 아닌 변론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르게 회복시키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꽤 극단적이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그리스도인들도 비종교적이면서 훌륭한 음악은 들을 수도 있고 또 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이원론적인 태도가 묻어 있는 진술이다. 사실 인간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는 그 자신의 종교적 신앙이 함께 나타난다. 특별히 예술과 관련된 부분에는 이러한 경향이 좀 더 분명하고 강하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비종교적인’ 무엇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문제 이외에, 현대의 교회 음악이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적, 인간 중심적 경향에 대한 지적은 매우 날카롭고 타당하다. 또, 매체 자체의 본질적인 악함이 아니라 작곡자의 경향성에 대한 비판 부분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책의 구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 책은 구체적인 추론 과정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고, 대부분 단언과 유리한 어구들(성경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만 나열하는 모습이다. 사실 이 책의 논리적인 연결은 최초에 등장한 몇 문장의 삼단논법이 거의 전부이다. 썩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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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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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상인들이 다른 사람이 취하는 행동의 이유를 언제나 이해하지는 않는다.

정상인들이 행동의 이유나 의도에 대해 언쟁하는 모습을 보면 명백하다.


 




. 줄거리 。。。。。。。                    


     주인공 루는 자폐인이다. 그는 사물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데 특별한 재능을 가졌고, 회사에서는 그런 루의 재능을 이용해 회사에서 만든 프로그램의 오류를 찾아내는 일을 맡겼고, 루는 그 곳에서 동료 자폐인들 몇 명과 함께 근무를 하고 있다. 비록 일상생활에 있어서 약간의 어려움은 있지만, 매주 수요일이면 참석하는 펜싱 클럽에서 만난 마저리라는 아가씨를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등, 루는 그런대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무난하게 지속하며 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루의 회사에 크렌쇼라는 새로운 상사가 부임을 하면서 위기의 징조가 나타난다. 처음부터 루와 같은 자폐인들에 대해 삐딱한 시각을 보여주던 크렌쇼는, 마침내는 그들 모두를 새로 개발된 수술대에 올려서 ‘정상인’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회사 측에서 루와 동료들에게 제공하는 여러 가지 부대 서비스 비용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루가 ‘정상인’이 된다면 더 이상 그런 서비스를 제공할 이유가 없어지니 말이다.

     하지만 새로 개발된 그 치료기술은 아직 한 번도 사람에게 시술된 적이 없었고, 뇌에 자극을 주는 그 방식은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지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크렌쇼는 루와 그 동료들에게 새 프로젝트(뇌 시술)에 참여할 것을 해고의 위협을 하면서 강요한다. 과연 루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 감상평 。。。。。。。                    

 

     자폐증이라는 병(그것은 신체의 일부에 생긴 병이지 미친 것이 아니다!)도 기억상실증과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병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식으로 문학작품과 영화 등을 통해 그려지고 있다. 기억상실증이 병 자체의 성격 때문에 그런 배지를 달게 되었다면, 자폐증의 경우는 그 병의 의도치 않은 결과 때문에 붙이게 되었다는 점에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물론 병을 함께 지켜봐야 하는 가족이나 동료들에게 그것들은 생각처럼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KBS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자폐인들을 다룬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 역시 자폐인들이 가진, 특정 분야에 대한 놀랄 만큼 뛰어난 특징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 번 보면 그대로 그림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 뛰어난 피아노 즉흥곡 연주 및 작곡 능력, 그냥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도의 긴 수식을 빠르게 계산하는 능력, 한 도서관 전체에 꽂혀 있는 책들을 그대로 암기하는 능력 등 비자폐인들의 경우 상상할 수도 없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시각이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레인 맨’을 보라) 이런 방송 프로그램 등이나 영화 등은 공통적으로 자폐인들에 대한 이유 없는 두려움이나 적대적 감정을 완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시도들로 인해 자폐인들이 더욱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엘리자베스 문의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루 역시 숫자와 패턴에 관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증상을 설명하기 위한 한 가지 소재로만 등장할 뿐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핵심 소재(그래서 그를 비범한 누군가로 만드는 데 사용되는)로 다뤄지고 있지는 않다. 소설의 루는 그저 비자폐인들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할 뿐이다. 소설은 ‘장애를 가진 자폐인이 어떻게 다른가’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반대다. 때문에 소설 속의 주인공 루는 끊임없이 장애와 비장애가 어떻게 다른가를 묻는다. 결국 그들 모두 함께 살아가는 동료들인 것이다.

 

 

     주인공 루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비자폐인들도 늘 옳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비자폐인인 크렌쇼와 돈의 ‘비정상적인’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 작가는 직접적인 적대행위는 아니더라도,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들을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냄새를 맡는다. 젖은 잎, 바위에 붙은 이끼, 지의, 바위 자체, 흙…… 자폐인들이 냄새에 너무 민감하다고 쓰인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도 개나 고양이의 민감한 후각은 거북해하지 않는다.’

     ‘자폐인들이 작은 소리에 너무 민감하다고 쓰인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동물들의 경우에는 아무도 거북해하지 않는다.’

 

 

     한편, 소설적 과장을 대놓고 들이대지 않고 있다는 점은 저자의 뛰어난 글 솜씨를 잘 보여준다. 주인공 루는 마저리라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삶이 마저리에게만 매어 있는 모습은 아니라는 옮긴이의 지적은 그 한 예이다. 그것은 그의 삶의 일부이고, 그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하고도 많은 문제들과 얽혀 있다. 저자는 그 모든 문제들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고, 이는 소설의 내용에 좀 더 많은 생동감을 더해 준다.

 

 

     책을 읽고 나서 자폐라는 증상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책이 가진 사회학적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해야 하나? 이야기의 플롯이나 등장인물들 사이의 균형, 주인공의 심리 등 문학적인 면에서도 손색이 없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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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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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상황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아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튀어나와 놀라게 된 것 아닙니까,

대단한 극적 효과지요.


 


. 줄거리 。。。。。。。                   

 

     단 한 명만 빼 놓고 모든 사람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끔찍했던 상황이 끝난 지 4년, 사람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그 때의 기억을 묻어버리기로 약속을 한 듯하다. 하지만 수도에서 일어난 한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다시 그 때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날 일어난 백지투표 사건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새벽부터 쏟아지는 엄청난 비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투표장으로 오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의 역할을 했고, 오후가 되어서도 좀처럼 투표장에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사상 최악의 낮은 투표율을 기록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질 즈음, 드디어 비가 그치자 일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떠올려보라, 엄청난 사람들이 같은 시간 집에서 나와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공중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그 촉수를 구역별로 마련된 투표장으로 뻗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모든 문제는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개표가 시작되면서 더욱 경악스러운 일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상 초유의 백지투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전체 투표수의 70% 이상이 아무 정당에도 투표를 하지 않은 말 그대로 백지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었던 것. 일주일 후 실시된 재선거에서는 그 비율이 더욱 높아져, 무려 83%에 달하는 백지투표가 이루어졌다.
 

  

 

     이 사건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정부는 말 그대로 혼란에 빠진다. 총리 이하 각 부의 장관들은 연일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결국 모든 책임을 수도의 주민들에게로 돌리는 결론을 도출한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부의 모든 기관들을 수도 밖으로 이관시키고(우리나라였으면 관습헌법 위반으로 문제가 되었겠지만), 이 경악할 일을 꾸민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비밀요원들을 침투시키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가두고 심문하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던 중 수도에서부터 날아 온 한 통의 편지는 사건에 대한 접근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든다.

 

. 감상평 。。。。。。。                    


     전작인 ‘눈먼 자들의 도시’보다 훨씬 더 정치적 색채가 많이 가미된 책이다. 아마도 ‘선거’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드는 듯하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이 특정 정당에 투표하는 대신 백지투표를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역시나 이색적인 상상은 이 책에 재미를 부여하는 핵심적 요소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강하게 부각되는 부분은 정부를 비롯한 권력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이다.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집행하는 자리에 있는 그들은, 법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는 데에도 전문가였다. 누가 봐도 현 정치권에 대한 불신임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 분명한 대량의 백지투표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찌감치 이번 사건은 현 정권에 대한 불신임을 나타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 버리고, 도리어 이 일을 주도한 세력을 반정부인사나 불순한 선동가로 몰아세운다.

 

     한편 정부의 무책임한 계엄령과 정부기관들의 이전으로 일어난 무정부상태에서도 수도의 주민들이 보여준 의연함은 매우 대조적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각종 언론을 통해 곧 폭동을 비롯한 심각한 혼란이 수도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지만, 그들의 말과는 달리 실제 수도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도 주민들을 괴롭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해 지하철 폭발이나 일으키는 정부 당국자들이었다. 그들은 법을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초법적인 일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이 모든 내용들을 통해 저자의 이력에도 있는 공산주의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정부와 같은 권력자들을 근본적으로 믿지 못하고, 시민 혹은 인민들의 대동단결로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회주의적 발상. 물론 저자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제한과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폭력’.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주제 사라마구는 전혀 폭력이 동원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제안하고 있다. ‘투표’라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도구를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연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에서 현실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약점이다. 과연 사회주의자들이 원하는 세상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누구도 실제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저자 역시 소설 상의 도시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인 스케치로만 그려져 있을 뿐, 그 세부적 구조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도 주민들의 모습은 그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을 정도다.

 

 


     전작인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기발한 발상으로 인간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본성을 실감나게 그려낸 저자는, 이번 작품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비록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시력은 가지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진실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에 전작과는 달리 지나치게 정치색이 많이 칠해져 있어서 오히려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보다는 인간성에 대한 탐구가 좀 더 드러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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