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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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과 음료수 혹은 작은 핸드폰의 마케팅을 위해서도 수백억 원이 기꺼이 동원되지만

정작 사회 전체를 위한 장기적 평화에는 아무도 돈을 내지 않는 상황에서,

이 평화라는 공공재가 산업적 여력을 갖게 되는 일이

장기적으로는 전쟁에 대한 거의 유일한 안전판처럼 보인다.

 

 

1. 요약 。。。。。。。  

 

     ‘평화 경제학’이라는, 약간은 생소한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 경제에 대한 전망서이다. 저자는 현재 우리나라가 적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큼은 이미 제국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인 수출위주의 정책을 편 결과 급속한 ‘경제수치 상승’을 이끌어 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국내에서 원료의 공급처와 판매처를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새로운 ‘식민지’, 혹은 ‘영토’를 찾아야만 유지할 수 있는 비정상적인 경제구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제국주의 경제구조’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식민지’가 될 만한 땅이 쉽게 나타날 리 없다는 데 있다. 제국주의적 정치, 외교를 펴고 싶지만, 실제로는 국력이 약해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방식을 찾아내는데, 바로 미국에 의존해 제국주의 흉내를 내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저자가 말하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바로 이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그저 내용 없는 구호 정도로 여겨졌던 이 생각이 어떻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구체화 되었는지, 그리고 이명박 정권에 이르러 더욱 완고해졌는지 저자는 날카롭게 집어 나간다.

     2장에서는 그런 ‘촌놈들의 제국주의’가 통일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북한마저도 내부 식민지화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고, 3장에서는 특히 원유 등의 자원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인근의 일본과 중국도 유사한 길을 걷고 있기에, 멀지 않은 미래에 삼국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표시하고 있다. 

     마지막 4장에서는 이 책의 주제인 ‘평화 경제학’에 관한 이야기로, 이러한 여러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최소 앞으로 30년 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저자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2. 감상평 。。。。。。。

 

     우리나라가 제국주의적 길을 걷고 있다는 저자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란가. 백의민족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침략을 받을지언정 침략하지 않는 민족이 아닌가. 하지만 책을 조금 더 읽어 나가다보니 어느덧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저 역사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뿐이고, 고구려나 발해와 같은 광대한 영토를 지녔던 우리의 과거에 대한 조명은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를 높이기 위한 시도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사극들의 제작과 이어지는 마케팅들에 숨겨져 있는 제국주의적 의식들을 집어낸다. 탁월한 글 솜씨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제국’으로의 길을 좀 걸으면 어떤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국이란 필연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착취’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자국의 이익’이라는 허울 좋은 가면도, 사실은 기득권층의 이익일 뿐이고, 나머지 국민들에게는 그 부스러기만이 큰 은혜인 양 할당될 뿐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제국주의화 하는 가운데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을 비롯한 각종 경쟁 과정에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제국민도 식민지민도 피해갈 수 없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을 전쟁의 한복판으로 몰아넣고 싶은가.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우리가 계속 제국주의의 길을 걸어가야 할까.

     저자의 주장에 호감을 갖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평화를 주제어로 삼고 있으며 (대개 실체가 없으며 따져보면 소수의 권력자들의 이익을 늘리기 위한 핑계일 뿐인) ‘조국의 영광은 영원하라’와 같은 구호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솔직하지 않은가.

 

 

     저자의 말처럼, 평화란 그것으로 인해 누구도 직접적 이익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누구도 그것을 위해 돈을 쓰려하지 않는, 참 ‘값싼 보물’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뼛속 깊이 욕심이라는 것으로 가득 찬 존재가 인간일진대 말이다. 누가 평화를 위한 비용을 지불할 것인가.(우파들은 군대에 사용하는 비용이 평화를 위한 비용이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오늘날 군수산업 혹은 방산업체들의 계약 및 생산, 납품 과정들, 그리고 그들을 살찌우는 전쟁의 실체들을 생각할 때, 그 의견에 쉽게 동의할 수는 없다.)

     저자는 대안으로 평화를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국민의 50% 이상이 되도록 평화산업을 육성할 것을 주장하지만, 솔직히 말처럼 쉬울 것 같지 않다. 게다가 ‘평화산업’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육성해 나갈지, 무엇보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할 지에 대한 깊은 논의는 부족하다. 사람이란 언제나 당장 눈앞에 닥쳐야 움직이는 경향이 있는데 말이다.

     저자는 때로 ‘시민적 상식’에 의존하는 듯한 모습(154쪽)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과연 이 ‘시민적 상식’은 무엇으로 확보할 수 있을까. 사실 정확히 누구를 믿겠다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 ‘상식이 있는 시민들’이 50% 이상 되는 나라는 또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근본적인 의문 중 하나는, 저자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나라’를 과연 유물론적 세계관을 통해 건설할 수 있겠냐는 점이다. 저자가 종교에 관해 편파적 관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이러한 의문은 좀 더 커진다. 경제학자이기에 세상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하려는 태도 자체를 뭐라 하기는 어렵지만, 종교에는 경제적 동기 이외의 동기가 작용한다.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종교를 바로 이해할 수 없고, 그렇다면 종교를 제대로 분석해내기 어렵다. 한국 교회가 중동으로 선교팀을 보내는 것을 제국주의의 첨병쯤으로 비하하는 부분은, 책 어딘가에서 저자가 경계했던 (설명할 수 없는 것들까지도 단 하나의 척도만으로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에 저자 또한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결국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것 - 경제와 정치, 인간이 이루어 놓은 여러 제도와 작품, 도구들을 - 뿐만 아니라 영적인 무엇까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생각엔 그 두 가지를 일원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종교이다. 또, 저자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많은 사업들도 그 기본에는 종교적 동기가 숨어 있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애초부터 한쪽에 대해 반감을 갖고 접근한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좀 더 많지 않을까. 평화를 위한 경제학과 평화를 위한 종교 혹은 신학이 함께 길을 걸어갈 부분이 분명히 있을 텐데 말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분명히 한국 사회는 무엇인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미래를 향해 마구 달려가고 있는 상황처럼 보인다. 월드컵을 기점으로 사람들은 강력한 집단의 힘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민족적 자존심을 제국주의적 형태로 표출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시대에서 평화를 위한 경제학을 제시하는 것은 상당한 의의가 있다. 이건 얼른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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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김기연 옮김 / 새날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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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는 어디서나

현존 사회 및 정치 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혁명운동을 지지한다.

 

 

1. 줄거리 。。。。。。。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계층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그들이 가진 태생적 한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불공평한 상황을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지에 관한 선언이다.

     저자들은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대자본의 축적이 프롤레타리아라는 계층을 탄생시켰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노동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자본가들에 대한 절대적 약자의 위치로 전락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폭력을 동반한 혁명을 제시하며, 전 세계적인 노동자들의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2. 감상평 。。。。。。。

 

     공산주의의 캐터키즘(Catechism)이라고 부를 만 한 내용이다. 아직 실제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던 청중과 독자들을 향해, 공산주의는 이런 것이다 라고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논리상 ‘공산당 선언’의 이론적 근거는 공산주의적 역사관에 있다. 저자는 그 위에 현재 프롤레타리아들이 처해 있는 위기는 후천적인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올려 놓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논리를 쌓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역사해석은 매우 단순한데, 그는 경제구조(혹은 생산구조나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려고 했다. 바로 이 점이 그의 탁월한 면 중 하나이다. 우선 이 간단한 해석은 그다지 많은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들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상대적으로 덜 배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이 점은 어쩌면 필수적인 것이었으리라. 또, 스스로를 ‘과학적 해석’으로 자처하는 이 방법은 당시의 산업혁명과 친척뻘인 ‘과학주의’에 젖어 있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충분히 ‘먹어주는’ 방식의 논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 역사해석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누군가가 마르크스처럼 한 가지 주제만으로 역사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할 것이다. 물론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끄는 동력과 같은 것들을 말할 수도 있지만, 모든 역사적 사건이나 흐름은 복합적인 측면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또,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는 생각의 극단인 실증주의적 역사탐구방식은 이미 한물 간 이론이다. E. H. Carr 식의 ‘대화’ 혹은 역사가 개인의 ‘관점’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과연 누가 ‘엄밀하게 객관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식의 역사 해석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직접적으로 ‘폭력을 통한 노동자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왜 하필 그런 방법이어야 하는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가? 또, 전적으로 새로운 제도와 규칙들의 당위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현존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가 과연 해답인가 하는 질문들이 그런 맥락이다.

 

     혁명가적 기질이 묻어나오는 문장에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구호는 강하지만, 비전은 불투명하다. ‘인간’과 ‘인간성’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저자들은 노동자들의 단결을 믿고 있지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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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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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먼저 시작하는 측은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인간으로서 승인하지 않는 억압자들이지,

억압과 착취와 차별을 당하는 피억압자들이 아니다.

불만을 먼저 터뜨리는 쪽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1. 줄거리 。。。。。。。

 

     교육학 관련 책인 줄 알고 꺼내든 책이다. 남미에서 태어난 저자는, 유럽의 침략 이래도 오늘날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억압적 사회구조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이라는 카드를 꺼내 든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을 다룬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이론서’나 ‘혁명지침서’라는 느낌이 좀 더 강하다. 

     저자가 교육의 타깃으로 삼은 사람들은 주로 ‘무식한 농민’이나 ‘근시안적인 노동자’들이다. 그들을 그렇게 부르고 무시하는 ‘억압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이유 없이 그저 빼앗기고, 모든 기회를 봉쇄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저자의 관심대상이다. 저자에 따르면, 억압자들은 교육을 통해 그러한 사회구조를 ‘자연스럽고’,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 양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바른 교육’, 즉, ‘억압자를 위한 교육’(이 책의 원제목이기도 하다)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교육의 형식은 ‘은행저금식 교육’이 아니라 ‘대화식 교육’이다. 피교육자를 단순히 입금되는 돈을 저금해 두는 통장으로만 여기고 계속 교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을 쏟아 넣는 방식의 교육으로는 사회비판적, 사회변혁적 시각을 갖기 어렵고, 반대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내용만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대화식 교육’이라는 생각이 또 하나의 핵심주장을 이루고 있다.

 


2. 감상평 。。。。。。。

 

     확실히 남미 쪽 상황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책이다. 하지만 꼭 남미에만 국한된 상황을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다. 비록 그 형태나 겉모습은 약간 다를 수 있겠지만,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꽤나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자유와 평등이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공식적인 근본적 신념이긴 하지만, 경제적 ․ 사회적 불평등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힘 있고 가진 이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반면, 어이없게도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구조는 상당히 많은 못 가진 자들에게 지지되고 있다. 이 책의 첫 판이 나온 지 벌써 수 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책의 유용성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는 사실이 착잡하다.

 

 

     저자가 강조하는 ‘교육의 목표’에는 상당부분 공감한다. 현실과 유리된 교육은 결국 죽은 교육일 수밖에 없고, 그런 교육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다시 말해 모순된 구조를 강화시키는 교육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영어를 많이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화식 교육’이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는 상황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교육이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에(교사의 수급, 교육 환경의 구성, 예산 문제 등) 당장 프레이리 식의 교육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남는다.

     또, 이럴 경우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인 ‘혁명’을 통한 해결방식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우려가 든다.(저자의 생각에도 언뜻 이런 생각이 묻어 나온다) 결국 폭력을 통해 또 다른 질서를 세우겠다면, 그 질서의 정당성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문제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에의 어려움이라는 말이다. 체 게바라의 투쟁이 아무리 아름다운 목표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부군을 죽였다. 그렇다고 정부군에 속한 사람들이 억압자들과 동일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 혁명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피델 카스트로나 스탈린 식의 권력독점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프레이리가 꿈꾸는 세상이 과연 어떤 모습일 지 나로서는 잘 그려지지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무지를 ‘게으름’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오늘날에 있어서 그러한 문제들은 비단 개인적인 요인들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경우도 많다. 단결되지 못한 노동자는 언제나 고용주들의 만만한 상대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느슨한 농민들의 연합체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강하게 결합해 있는 거대 재벌들과 정치인들을 이길 수 없다.

     물론 이런 문제를 지적한 것이 프레이리 한 명 만은 아니다. 다만 이 책의 독특한 점이라면 ‘교육’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좌파 빨갱이니 극우 꼴통이니 하는 식의 극단적인 이념적 분쟁만이 존재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정작 중요한 ‘인간’이 소외당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인간보다 이념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누가 심어 놓은 것인가!

 

 

     내가 속한 기독교적 전통의 입장에서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한다.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은 ‘혁명적 상황에서의 폭력의 정당화’라든지, ‘궁극적인 사회 구원의 동력으로서의 인간’ 등의 주제가 그런 예이다. 하지만 저자도 책에서 말했듯이(“나는 그리스도교도와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나와 의견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것으로 확신한다.”)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불의를 그냥 두고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저자의 이력에도 어느 정도 드러나듯(WCC에서 일했다고 한다. WCC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약어), 현실에 대한 진단에 기독교적 용어들이 몇몇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웠다. 특히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주제어로 설명하는 부분(“불만을 먼저 터뜨리는 쪽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은, 마치 ‘자기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주제를 설명하던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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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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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앤장이 추구하는 ‘고객의 이익’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말하는 것일까?

능력과 수단을 겸비한 법률 기업이 강자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면

공동체의 질서는 대체 어떻게 될까?

 

 

1. 줄거리 。。。。。。。

 

     한국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변호사 집단인 ‘김&장 법률사무소’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책이다. 현역 국회의원과 시민운동가가 함께 책을 썼다는 것 자체만 해도 흥미로웠지만, 책에 담긴 내용은 그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조직 자체의 비합법성은 물론, 비리와는 단짝인 ‘비밀성’은 재정과 인적구성, 실제 활동 상황에 걸쳐 널리 퍼져있었고, ‘안 되는 일까지도 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은 전현직(놀랍게도 현직도!!) 정부의 핵심 관료들을 채용해 막대한 연봉을 주는 데 있었다. 또, 현행 법률이나 변협의 권고조차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도 떳떳할 수 있는 당당함은 온갖 작위적인 법률해석과 언제나 가진 자, 힘 있는 자 편에 서는 처세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법이 정의가 아닌 사익을 위해서만 추구될 때, 그리고 법률가들이 권력자, 악성 자본과 결합될 때 어떤 괴물이 만들어지는 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고발서.

 

 

 

2. 감상평 。。。。。。。      

 

     책이 급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저자들을 소개하는 글이 여느 책처럼 수사구들이 붙은 문장들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이력들을 짤막하게 늘어놓은 데에서도 짐작이 된다. 그만큼 다급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면, 그렇게 알려진 것들만을 모아도 책 한 권이 금방 만들어질 수 있을 정도라는 말. 공식적으로 민주주의를 국체(國體)로 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귀족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불법과 편법이 사용될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모든 것을 은밀하게 진행해도 꼬투리는 잡히기 마련이라는 지고의 진리를 보여준다.

 

     규모면에서나 구성원으로나 국내 최대의 로펌(Low-Firm)이라고 자부하는 ‘김앤장’이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있고, 자신들의 법적 지식을 돈 벌이에만 남용하고 있으니 이걸 어디서부터 고쳐 나가야 할까.

     민주주의를 유지시킬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공정한 법과 그 정신을 살릴 수 있는 공정한 집행이다. 당연히 그것들을 무력화 시키려는 시도는 민주주의의 적이고 암세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암세포는 수술을 통해 제거를 해야 하는데, 누군가 이런 썩은 냄새가 나는 부분에 메스를 들이대려고 하면, 언론과 권력을 이용해 입을 막아버린다. 나 참.

     민주주의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아테네의 페리클레스 시대도 사실은 페리클레스의 장기독재였다는 것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이런 현실이 민주주의의 한계는 아닐까 싶기도 하고... 결국 법을 만드는 것도, 그것을 적용하는 것도 귀족들의 특권이니까.

 

 

     책의 말미에 저자가 써 놓은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들이 김앤장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수준 높은 주제’가 아니라 ‘최소한 불법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어서 말이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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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세계에 대한 경고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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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지 정치적 계산의 낮은 차원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 뿐만 아니라

무엇이 고상한 것이며 무엇이 명예로운 것인가에 대해

서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재간있는 서방의 법률학자들이 최근에 개발해 낸 용어는

“법적 현실주의”라는 말인데

그들은 그 말을 어떤 것의 도덕적 평가를 배제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솔제니친이라는 저자의 이름보다는, 손봉호라는 추천자의 이름 때문에 사게 된 책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솔제니친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이 책은 솔제니친이라는 인물이 미국과 영국에서 했던 연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솔제니친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책을 접하게 된 나로서는, 책 안에 살짝 등장하는 저자에 대한 정보를 통해서 그라는 인물을 재구성 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 러시아에서 반체제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추방 된(강제수용소가 아니라 추방된 것은 서방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는 정치적 인물들을 러시아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었기 때문) 이력 때문인지, 그의 논조는 대단히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을 넘어서) 적대적이다. 

        저자의 학문적인 수준이 결코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거의 책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가 충만한데도, 책의 수준이 떨어져보이지는 않았다. 저자는 특별히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그러면서도 사회에 대한 매우 세련된 분석을 통해 공산주의가 어떤 식으로 서방을 속여 왔으며, 어떻게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비판하고 있다. 


 

        우선 저자의 현실에 대한 분석에 이르는 과정이 매우 날카롭다는 데에서 저자의 관점에 대한 호의적인 의식을 갖게 된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항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단호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현실인식에는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느낌도 든다. 어느 정도 시대적 한계가 있지 않나 싶다. 실제로 포르투갈이 곧 공산화 될 것이라는 저자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는가. 오늘날 미국 공화당의 국제정세 인식이나 우리나라의 한나라당의 수구파들의 현실 인식이 저자와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점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에 있어서는 매우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서방 세계가 안고 있는 질병의 근본 원인을 영적인 부분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는 탁월했다. 전반적으로 기독교적인 숭고한 가치가 정치의 영역에서도 발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에, 심정적으로 유사성을 느낄 수 있었다. 



        공산주의의 폐해를 피해 서방으로 와서 서방의 세속화를 비롯한 각종 문제를 인식하게 된 저자로서는 조국 러시아가 나아가야 할 길은 서방과 동일한 길이 아니라 영적인 가치를 회복한 새로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저자를 통해, 오늘날 서방식의 현대주의의 문제점의 극복을 위해 무조건적인 공산사회에 대한 동경을 꿈꾸는 또 다른 극단적인 잘못 옳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좋은 반론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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