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동생 야고보 유골함의 비밀 - 찬우물 고고학 시리즈 1
허셜 섕크스 외 지음, 이원기 옮김 / 찬우물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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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유골함이 발견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 야고보에 관해 알려진 것 대부분을

재검토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어떤 사람이 골동품상으로부터 유골함 하나를 구입했다. 처음에는 그 유골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몰랐던 소장가는, 어느 날 그 유골함을 저자에게 보여준다. 여러 고고학 관련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던 생크스는 그 유골함에 써 있는 글귀를 보고, 유골함이 매우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임을 알아본다. 유골함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야고보, 요셉의 아들, 예수의 형제.”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동생(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이자,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고, 야고보서의 저자로 알려진 바로 그 야고보의 유골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생크스의 주장이다. 

        과연 그런 명문 하나만을 보고서 그것이 정말 그 당시의 물건인지, 그리고 그 당시에 새겨진 것인지, 또 설사 그것이 진품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이르는 것인지 하는 산적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저자는 매우 여러 장에 걸쳐서 그 유골함이 진품이며, 그 당시 요셉이라는 아버지를 두고, 예수라는 형제를 둔 야고보의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증을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주장한다. 



        책의 두 번째 부분은 또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앞서 생크스가 유골함의 진위여부에 대한 글을 썼다면, 둘째 부분을 쓴 벤 위더링턴은 그 야고보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쓰고 있다. 내용상으로 앞의 것에 2배가 약간 안 되는 분량이었다. 

        위더링턴은 성경과 그 이외의 몇 가지 참고문헌들을 통해 야고보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 사실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야고보라는 인물이 초기 기독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 그런 그가 왜 오늘날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었는가 등의 문제를 그리 깊지 않게 써 내려가고 있다. 

        한편의 ‘야고보 전기(轉記)’를 쓰듯이, 야고보의 탄생부터 그의 삶, 죽음까지를 시간의 순서에 맞추어 진행한다. 



        야고보의 유골함이라.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기 위한 참고도서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사실 내가 서 있던 서가에 있을 책이 아닌데, 왜 그 곳에 꽂아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우리 학교 사서들 책 분류 기준은 뭔지..) 

        책의 공동저자 중 한 명인 생크스는 이 유골함의 발견을 역사적인 ‘비밀’을 밝혀낼 수 있는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래서 책 제목에 ‘비밀’이라는 매우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는 자신의 이 발견의 중요성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려는 시도가 나타날 것을 대비해(사실 일부분 이런 예상은 맞았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통해 그 유골함이 진짜 서기 1세기 경의 것이고, 명문 역시 그 시기에 새겨진 것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 지나치게 장황해 보이는 ‘증명과정’은, 단지 나에게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에 불확정성이 얼마나 많이 개입되는가 하는 점과 인간들이란 다른 사람이 좀 좋은 것을 찾아냈다고 하면 그에 대한 시기심과 의심이 얼마나 놀랄 만큼 잘 발휘되는가 하는 점뿐이었다. 뭔가 발견되었다고 하니까 하나같이 나서서 ‘그건 가짜요.’라고 외치며 이름을 내보려고 하는지. 



        사실 이 유골함의 발견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는가? 내가 보기엔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선 생크스가 참고한 통계학적 자료들은, 솔직히 말하면 지나치게 짜 맞춘 듯한 느낌이 든다. 요셉이라는 아버지와 예수라는 형제를 가진 야고보라는 인물이 몇 명이나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정말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하더라도, 그 유골함은 그 이상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냥 그렇다는 것뿐이다. 

        저자들은 그 사실을 통해 야고보가 예수님의 친동생(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낳은)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밝혀줄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 부분은 ‘믿음’에 관한 문제지, 이런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극단적으로, 야고보가 예수의 친동생이었다라고 쓰인 글이 발견되더라도 그 신빙성을 쉽게 증명하기는 어렵다.) 

        또,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내용인 야고보의 일생에 관해서는 더더욱 알려주는 것이 없음은 분명하다. 책에 나온 것처럼 유골함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가 부유했다거나 하는 주장은 옳지 않고(유골함은 상당히 싼 가격이었다.), 그 유골함이 정확히 어디서 밝혀졌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의 죽음과 장례에 관련된 어떤 정보를 얻어내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래서인지 2부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유골함의 발견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추론했다기 보다는, 이런저런 고대의 문서들과 현대의 주석가들의 글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했을 뿐이다. 요컨대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왔다기보다는 이미 알려졌던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대해 비판만 하는 것도 좀 미안한 일이 될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이 발견으로 인해 ‘과거에 야고보에 관해 알려진 것 대부분을 재검토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면,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는데 좀 더 흥미를 갖도록 만든다면,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영향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후반부의 내용들은 비록 유골함으로부터 직접 추론한 것들은 아니라고 하나, 야고보라는 인물에 대해 제법 상세하고 일관된 정리를 하고 있다. 기록된 자료들도 제법 여러 권을 찾아가며 쓴 것처럼 보인다. 야고보라는 인물에 관해 알고 싶으면 책의 후반부를 중심으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대포장된 면만 아니라면 무난한 느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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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 복음과 서구 문화
레슬리 뉴비긴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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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인해 밝혀진 실제 세계는,

목적이 아니라 인과율 중심의 자연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40년 가까이 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선교사. 그런 인물이 쓴 기독교 변증서는 어떤 모양일까? (적절하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선교 사역을 하시는 분들에게 신학적 깊이를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선교 사역이라는 것이 워낙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일이 주가 되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으며 연구를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책의 저자가 35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선교 사역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그 사역의 고귀함을 인정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내용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가졌었다.(모두가 이전에 뉴비긴을 몰랐던 내 무지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 좋았다. 

        책의 주요 내용은 현대주의에 물든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경적 진리를 가르치고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었다. 이를 위해 우선 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고(1장), 현대 사회(특별히 서양근대사회)의 기초적 전제들을 검토한 후(2장), 그에 대응을 했던 교회의 반응들과 우리가 택해야 할 기본적 방향을 정리 한다.(3장) 이렇게 올바른 방향을 정립한 후, 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제시할 수 있는 ‘타당성 있는’ 논증을 소개한다.(4장) 복음은 단지 신앙의 차원이 아니고 사회의 실제적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함을 강조한(5장)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오늘날 교회의 사명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으로(6장) 책을 마무리 한다. 



        왜 나는 이 책을 좋다고 말하는가? 저자에 대한 선이해가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오직 이 책의 내용만이 그런 평가에 영향을 주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매우 탁월했다. 특히 말하고자 하는 논점을 흩트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서술해 나가는 집중력, 그리고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 이면에 감추어진 기초적인 전제들을 정확히 집어내는 날카로운 분석능력, 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키(key)로서의 성경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해 내는 능력 등이 그러하다. 

        저자의 말처럼, 서양근대사회는 결코 정상적이지 못하다. 죄의 영향 때문이다. 복음을 따라가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세속사회의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과 따로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가? 저자는 바울의 오래된 설명(고전 5:10)처럼,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임을 말한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격적인 분열을 겪고 말 것이다. 방법은 이 시대의 세계관이 어떤 면에서 잘못되었는지를 명백히 지적하고, 올바른 세계관으로의 ‘시각의 교정’을 이루어내야만 한다. 저자는 이 시각의 교정을 ‘회심’이라는 말로 부른다.(이 얼마나 탁월한 표현인가.) 

        현대 사회는 세계에서 ‘목적’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고, 오직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로 설명한다. 그런 눈으로 신앙을 바라볼 때, 그것은 결코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시도가 이런 문제, 즉 적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있다고 보고, 그 안경을 벗겨내는 데 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전개와 고찰은 불분명하거나 흐리지 않고 매우 선명하다. 



        책 내용은 매우 무게감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논리적 전개나 저자가 사용하는 어휘들에 담긴 함의가 지나치게 난해하지는 않다. 그래서 책을 읽어나가는 일 자체가 우리에게 어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것이 이 책이 갖는 또 하나의 장점일 것이다.(두려워하지 말고 사서 읽어보라는 말이다.) 

        저자의 이력 가운데 WCC의 주요요인이라는 것이 있고, 그래서 매우 가끔 물음표가 떠오르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단지 신학생들, 혹은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특별히 그런 그리스도인 청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주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가장 크게 높임을 받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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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은혜의 지배 거룩한 삶의 실천 시리즈 4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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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싸우는 신자가 힘든 것은

외부에서 밀려오는 죄의 유혹의 강함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죄와 결별하지 못하는 신자 자신의 죄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문제로 인해 고민을 할 것이다. 비록 십자가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변한 것 같지 않은 자신의 모습 때문에 수십, 수백 번 절망을 하기도 하고, 맹렬히 회개를 한 후에도 어느 샌가 다시 같은 죄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심정이란……. 

        이 책은 바로 그런 신자 안의 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책 제목 『죄와 은혜의 지배』란 불신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갈등을 다룬다. 과연 죄는 어떤 식으로 신자에게 접근해 그를 지배하는가, 신자가 반복적인 죄의 지배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신자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어떤 것이 있는가. 저자는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서두름 없이 조목조목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죄는 신자 안에서 절대적인 지배를 이룰 수는 없다. 책의 후반부에는 신자 안에서 죄의 지배의 불완전성과 어떻게 하면 은혜의 지배 아래로 들어갈 수 있는 지를 중점적으로 살피고 있다. 


 

        저자가 자주 인용하고 있는 유명한 청교도 존 오웬의 저작을 딱 한 번 읽어 본 경험이 있다. 학부 때 어떤 강의의 과제를 하느라 읽었던 책이었는데, 학부를 들어가자마자 읽었던 책이라 뭐가 좋은지, 뭐가 나쁜지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을 때였다. 아주 힘들게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 참 책을 힘들게 써 놨구나 했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 책도 그 때 읽었더라면 좀 지루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끊임없이 죄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죄가 가져온 영향을 굳이 1, 2, 3 하면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는가. 죄는 그냥 나쁜 거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이제 10년 쯤 하게 되니까 그러한 좀 다르게 느껴진다. 오히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러한 점이다. 저자는 죄의 문제를 매우 깊게 연구하고 파헤치면서, 조목조목 그에 대해 서술한다. 저자의 그러한 세밀한 연구는 독자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죄의 요소들을 그냥 무감각하게 넘길 수 없도록 만든다. 그 무감각함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뿌리에는 어떠한 것이 도사리고 있는 지, 매우 구체적으로 정리되고 있어서 책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보를 얻는 것과 그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책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좀 길다는 점과(때문에 내가 이 책을 선물로 주려는 걸 보고 신학생들한테가 아니면 다들 무리라고들 했다.) 유사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실 책의 내용이 깊으면 내용이 길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보다 세밀한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데서 의미를 찾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책 자체는 가볍게 만들어져서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부피만 빼면 부게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사한 내용의 반복은 이 책이 애초에는 설교를 목적으로 작성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설교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언급했던 내용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법. 때문에 저자는 자주 반복을 통해 이를 일깨우려고 한다. 사실 이 정도의 깊은 내용을 이렇게 오랫동안 설교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운 일이다. 일선의 목회자가 이정도의 깊은 영성과 지성을 설교에 담아 설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설교를 꾸준히 듣기를 원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한다면, 앞서 말한 단점은 오히려 감탄으로 바뀌게 된다. 




        죄와의 싸움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에게라면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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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름으로
헨리 나우웬 지음 / 두란노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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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 대한 유혹이 막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사랑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대한 손쉬운 대체물을

힘이 제공하기 때문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 되는 것이 더 쉽고,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컨트롤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기독교 영성에 관한 여러 책으로 유명한 헨리 나우웬의 책이다. 이번 책은 21세기의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한 강연회에서 그가 한 연설을 엮은 것이다. 영성운동의 대가가 말하는 리더십의 요건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 읽기를 시작했다.


        저자가 말하는 기독교 리더의 요건은 목차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세 가지였다. 지나치게 현실 지향적일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성 중심으로 임할 것과,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진실한 ‘목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자신이 무엇이든지 결정하고 이끌어간다는 우월적인 자리에서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는 자리에 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강연을 목적으로 한 글을 엮은 얇은 책이기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면서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헨리 나우웬 특유의 영성이 넘치고 감동이 배어있는 글솜씨 때문에, 내용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만든 책이다. 약간은 힘들고 어려워지는 요즘 내 사역에, 작은 위로를 받기도 했다.

        헨리 나우웬의 글이 이토록 감동적인 것은, 그의 뛰어난 영적 고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말과 일치하는 삶 때문일 것이다. 그가 쓴 글들에는 언제나 그의 치열한 삶의 고백과 경험들이 담겨 있는데, 이 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정말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아쉬운 점은,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용어들을 개신교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책의 서두에도 이를 미리 밝혀놓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헨리 나우웬의 다른 책에서 보이는 ‘저자의 체취’가 반감된 듯 하다. 카톨릭 사제인 저자의 글을 개신교 출판사에서 펴내려다보니까 아무래도 좀 거슬렸나보다. 그래도 번역의 제일되는 기본원칙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인데, 지나치게 이런 저런 용어들을 바꿔버린 것은,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결국 기독교인이라면 어디에 서든지 리더가 되어야 할 사람들 아닌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리 길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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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안경 - 쉽게 풀어 쓴 신국원의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신국원 지음 / IVP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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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은 근본적 신념의 문제로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영성 또는 영적인 힘이다.
삶의 한 부분에 영향을 이치지 않고 종합적 안목에 영향을 미치므로
과학적 분석과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 세계관을 소개하는 책이다. 유사한 내용의 몇 권의 책들을 봤지만, 다른 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쓰인 책이다.


        제목에 표현되어 있듯이, 저자는 세계관을 ‘안경’에 비유한다. 모든 사람은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 이해(先 理解)’적인 것으로, 이성적 사유와 과학적 연구 조사의 전제로서 기능한다. 누구나 인식을 하던, 하지 못하던 자신의 세계관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저자는 그렇게 한 사람의 생각의 전제가 되는 세계관 중, 가장 올바른 세계관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추천한다. 그리고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유명한 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에 대해 살핀다. 아울러 각각의 축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실제적인 인식과 행동의 변화가 필요한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실제적인 조명은 이 책의 특징이면서 책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부분이다.


        특별히 오늘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바른 세계관을 회복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세상’ 자체에만 집중할 뿐, 그 세상을 보는 자신의 ‘눈’에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기 마련이다.

        자칫 이런 이야기는 내용이 딱딱해지기 쉽다. 또, 지나치게 논의가 발전하면서 실제적인 삶의 정황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자주 예로 들고, 논의마다 적절한 실천적인 문제(특히 교회 공동체 내에서 있을 수 있는)들을 연결시키면서 논의가 공중에 뜨는 것을 미리 막고 있다. 덕분에 '머리에 쥐가 나는 일‘ 없이 논지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읽어내려 갈 수 있다.

        아직 세계관에 관한 책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먼저 추천하고 싶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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