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바꾼 한 권의 책 - 크리스천 리더 22인이 말하는
스캇 라슨 엮음, 박원철 옮김 / 위즈덤로드(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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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책의 제목 위에 붙어 있는 문구처럼, ‘크리스천 리더’라고 불릴만한 스물 두 명의 저자들이 자신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을 소개한다.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달라스 윌라드 같은 명망 있는 기독교계의 지성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고 있는 목회자와 선교사들, 그리고 여러 사역자들의 소중한 추천도서들로 가득한 책이다.


2. 감상평 。。。。。。。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것처럼, 현대에서의 정보검열은 이전과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전에는 특정한 책이나 매체를 금지함으로 이를 이루었다면, 오늘날에는 쉴 새 없이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냄으로써 꼭 필요한 정보를 쉬이 찾지 못하도록 하는 방식이 동원된다.(물론 의도와 비의도를 쉽게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일반 도서에 비해 정보의 풀(pool)이 작은 기독교 출판계에도 이는 동일하게 적용되어서, 정말 제대로 된 기독교 도서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허탄한 것을 말하고,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며, 거짓된 꿈을 말하는(슥 10:2)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계의 리더라고 불릴만한 이들이 추천하는 책들을 모아 놓은 것은 꽤나 의미 있는 시도였다.

 

     아쉬운 것은 저자들이 모두 서구인들이어서 국내 독자들에게 친근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도 앞서 언급한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 달라스 윌라드 정도에 이디스 쉐퍼까지나 익숙한 저자들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접해보지 못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런 성격의 책의 경우 아무래도 저자들의 익숙함이 책 선택에 큰 영향을 줄 텐데 말이다.

     바르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독서경향은 생각보다 비슷했다. 많은 사람들이 C.S. 루이스의 책들을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책으로 꼽고 있고, 이는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언제부턴가 루이스가 쓴 책이라면 일단 사서 읽어보는 습관이 생겨버렸으니까. 이 책을 읽으며 두 권의 책을 사기로 결정했고, 한 개의 글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었으니, 분명 평균 이상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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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먹으라 - 영적 독서 유진 피터슨의 영성 2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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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을 성경에서 읽는 내용에 굴복시키면, 

우리 이야기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우리 이야기를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야기가 진정한 이야기가 되는 더 큰 배경이며 플롯이다.

 

1. 요약 。。。。。。。

 

     성경을 어떻게 읽어나갈 것인가에 관한 저자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먼저 1부에서는 ‘책을 먹는다’는 은유를 사용해, 성경을 단순히 눈으로 읽고 그와 관련된 정보를 머릿속에 넣는 식의 읽기가 아니라, 그 내용을 ‘살아내는’ 방식의 독서가 필요함을 주장한 저자는, 이어서 2부에서는 실제적으로 이 ‘거룩한 읽기’ 방식을 ‘렉치오’, ‘메디타티오’, ‘오라티오’, ‘콘템플라티오’의 네 가지로 설명한다. 3부는 성경의 번역과 관련한 두 가지 논점 - 일상언어로의 번역(코이네 헬라어)과 당대의 문화를 반영하면서도 독특함을 유지 -을 언급하며, 저자 자신이 직접 현대적 문화의 용어로 번역한 신약 성경인 ‘메시지’를 출간하게 된 소감을 피력하고 있다.

 

2. 감상평 。。。。。。。

 

     기독교적 영성의 대가답게, 저자는 성경을 읽는 행위가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나 ‘먹는 책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발견은,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소득이다. 요새 유행하는 표현대로 설명하자면, 저자는 평면위에 기록된 문자를 읽는 2D 방식의 독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을 실제로 맛보고, 느끼고, 경험하며 읽어나가는 3D 방식의 독서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책을 읽어가면서, 특히 3부의 개인적 일화를 보며 저자와 함께 성경공부를 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다만 책에 등장하는 용어들 중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쉽다. ‘모든 말은 탈 육화될 수 있다’(193)와 같은 문장을 과연 평신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책의 내용 자체가 어느 수준 이상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는데, 이 점은 책의 내용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성경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틀림없이 귀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성경을 처음으로 읽어보려고 하는 이보다는, 한 두 차례 읽으며 여러 가지 한계와 부족함을 느껴봤던 독자에게라면 더욱 와 닿는 면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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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도전 - 사랑이 이끄는 결혼 생활을 위한 40일 여정
알렉스 켄드릭.스티븐 켄드릭 지음, 이지혜 옮김 / 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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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생각한다. 

사랑은 감정의 파도에만 휩쓸리고 지적으로는 잠에 빠진,  

생각 없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항상 생각하느라 분주하다. 

먼저 사랑이 담긴 생각이 있어야 행위가 뒤따르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 요약 。。。。。。。

 

     영화 ‘파이어 프루프’에서 이혼 위기에 있었던 주인공의 아버지가 건네주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준 책이다. 영화에서 소개된 것처럼 총 40일 동안 하루에 한 가지씩 사랑에 관한 덕목을 제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실천사항과 이를 기록하는 란으로 구성되어 있다.

 


2. 감상평 。。。。。。。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다. 책 전체에 걸쳐서 사랑에 관한 기독교적 관점을 잘 녹여내고 있으며, 그렇다고 내용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갈수록 결혼의 가치가 떨어지고, (약간의 손해만 감수하면) 그저 언제든지 해지할 수 있는 보험 계약 정도로 생각하는 풍조가 확산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 사랑과 결혼의 고결함이라는, 고지식하지만 중요한 가치를 저자들은 잘 제시한다.

     책에 담긴 관점은 대체로 복음주의적이며 약간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읽기에 그다지 저항감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기독교에 관해 익숙지 않은 사람의 경우 중반부에 나오는 ‘복음 제시’ 장(章)에서는 약간 거부감이 들 수도 있어 보인다.
 

     실제로 이 책이 이혼위기까지 몰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결혼 예비자들이나 연애를 하고 있는 커플들이라면 같이 읽어보며 함께 사랑의 도전을 시작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상대방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변하기를 염두하며 하루씩 실천해 나간다면, 어느 순간 둘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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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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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미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교인들이 목회자를 ‘참아 주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 요약 。。。。。。。


     저자는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자신이 그동안 교회 때문에 느낀 슬픔, 절망 그리고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6) 1장부터 3장까지는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 교회의 현실을 지적하며 이를 ‘교회 속의 세상’이라는 표현으로 정의한다. 이런 현상을 발생시킨 것은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라고 지적하는 저자는(4장) 국가에 의해 교회가 인정을 받게 되면서 너무 많은 것을 내어준 결과, 세상 속에서 교회의 독특성을 드러내야 함에도 반대로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와 버렸다는 것. 그 결과 중세 말 종교개혁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교회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극도로 심해졌고 30년 전쟁이라는 극심한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도 지적한다.(5장)
 

     6장부터는 그러면 ‘대안’은 어떤 것인지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저자는 그 시작을 중세에 등장했던 ‘이단들’에서 찾기 시작하는데, 사실 그들이 주장했던 것들은 성경에 좀 더 가까운 주장들이었으며, 이는 위클리프나 후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약자를 품을 수 있는 교회(7장), 그로 인해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지는 교회(8장)가 되어야 한다고 천명한 저자는, 더 이상 개혁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간곡한 부탁(9장)으로 글을 마친다.



2. 감상평 。。。。。。。

 

     이런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저자의 뜻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나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그 비판받는 공동체의 한 일원이기 때문이리라. 나아가 책이 지적하는 내용들이 아예 사실과 거리가 먼 것도 아니기에, 단지 내가 한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는 식의 간단한 반박도 통하지 않는다. 책을 쓴 저자도 많은 고민과 아픔을 안고 썼겠지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도 그 못지않게 힘든 일이다.

  

     저자가 오랫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사실과 다르지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내장질환을 앓고 있었고, 결국 그 질병이 겉으로 드러나기에 이르렀다는 데에는 교회에 대해 긍정, 혹은 부정적 감정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이다. 문제는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이다. 어떤 사람은 이를 교회 자체에서 기인하는 문제로 보고, 또 다른 사람은 외부적 상황을 좀 더 중요한 요인으로 본다.

 

     이 책에서 저자는 후자를 좀 더 주도적인 원인으로 진단하면서, 그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교회의 잘못을 함께 지적하는 방향으로 내용을 진행한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은 박해받던 교회에게는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결국 국가에 의한 교회 개입이라는 좋지 않은 전례를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면서 교회의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진단.

 

     기본적으로 문제의 구조에 대한 저자의 진단에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저자의 훑어 나가는 역사에 대한 약간의 보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매우 단선적으로 교회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그 중심에는 ‘주류는 언제나 잘못이 많고, 비주류는 선하다’라는 일종의 선입관이 있는 것 같다. 콘스탄티누스는 문제의 원인이고, 카타리나 왈도는 선한가? 어쩌면 ‘주류’라는 것은 그것이 더 지속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더 많은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아닐까? 카타리나 왈도파가 끝까지 남았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었을까? 분파는 교단을 형성하고, 교단은 기득권을 만들며, 기득권은 다시 분파를 낳는다는 교회사가들의 말은 좀 더 깊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교회가 왜 그래’라는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난의 대상과 원인을 적절히 잡아내서 하는 비난은 많지 않다. 기껏해야 기독교인 중 누가 하는 짓을 보니 기독교는 나쁘다는 식의 일차원적 비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물론 그런 비난과 지적일지라도 잘못된 것이라면 귀를 열고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지적의 깊이가 얕고 어설프면 그 해결책이 제대로 나올 리 없다. 우리나라 범죄자들의 99%가 쌀밥을 먹었다고 해서 쌀밥이 범죄를 일으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는 모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우리가 교회 문제를 생각할 때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전자는 교회에 대한 대책 없는 비난을 자제케 해 주고, 후자는 교회에 대한 무조건적 옹호로부터 깨어나게 해 준다.

     이 책은 나름대로 문제에 대한 진지하면서 애정 어린 지적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한 대안적 교회 모델도 나름 흥미로운 ‘실험’이 될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저자 역시 느끼고 있듯 그러한 실험을 어느 정도까지 밀고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헌법의 풍경』에서 받았던 저자에 대한 인상은 다루고 있는 분야는 다르지만 이 책에서도 꽤나 짙게 느껴진다. 역시나 꼭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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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김진 지음 / 위즈덤로드(위즈덤하우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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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물이 고이면 썩게 마련이에요.

앞에서 지적한 섬김과 치유와 쉼이 없는 교회의 모습도

모든 것이 교회 안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교회 안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닌 것도 큰 문제로 부각되고,

그러다 보면 갈등과 싸움이 많아지는 것이에요.

지금 말씀처럼 세상에 나가서 복음과 진리로 싸우면

교회 안에서 섬김과 치유와 쉼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밖에서 그렇게 힘들게 고생하다 보면

안에서는 서로 위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게 생길 테니까요.

 

1. 요약 。。。。。。。

 

     ‘왜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지 않느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100분 토론 형식으로 꾸며낸 책이다. 교회와 예수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다소 소모적인 논쟁(1장)으로 이야기의 불을 붙이는 전략을 사용한 저자는, 본격적으로 2장으로 들어가면서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알맹이 빠진 모습(저자는 이를 ‘붕어빵 기독교’라는 용어로 표현한다)이라고 지적한다. 3장에서는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짚어보고, 4장부터 6장까지는 그 결과 나타나고 있는 파열음들을 들려준다. 7장부터는 결론부로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올바로 회복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짚어보고 있다.

 


2. 감상평 。。。。。。。

 

     이 독특한 방식의 책의 구조는 여러모로 저자에게 잘 맞았던 것 같다. 우선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해 일종의 변증과 발전적 제안을 한다는 책의 기본 방향에 잘 어울린다. 일반적인 서술로 진행했다면 자주 반복되는 구조로 인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토론형식을 사용함으로써 중간중간 저자와 독자 모두의 생각과 어긋나는 발언 삽입함으로써 이런 위험에서 벗어났다. 또 이런 형식에는 일반적인 유리점도 있는데, 먼저 각각의 인물이 짧은 시간동안 발언을 해야 하기에 일부러 길게 저자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만 툭툭 던져도 된다는 것(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서술상의 편리함인지 모두 알 것이다)과, 등장인물이 많기 때문에 혹여나 어떤 독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주장이 나와 항의를 받더라도 ‘그건 내 생각이 아니었소’라고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서술 방식에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약점도 있는데, 한 명의 저자가 성격이 다른 여러 등장인물들의 입자에서 발언을 꾸미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야기의 후반으로 가면서 점차 등장인물들의 발언만 놓고 보면 서로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저자가 하고 싶은 부분에 가까워질수록 여유가 사라진다고 할까.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재미있는 시도이긴 했다.

 

     저자가 지적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은 대부분의 신자와 비신자들이 공유하는 문제일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제의 원인은 3장에 잘 나와 있는데, 성경해독력의 저하와 구원의 의미에 대한 축소, 제자도에 대한 외면, 맘몬주의 등이 그것이다.(76-77)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비교적 정확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총신대와 가장 진보적 신앙을 천명하는 한신대 양쪽에서 모두 공부했던 저자의 독특한 이력의 영향도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양쪽의 신학이 적어도 실천적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용상에서도 저자는 여섯 명의 인물들의 입장을 자유로이 오가고 있다.

     문제는 그 해결방향. 책 속에도 언뜻 언급되었듯이 쉼과 적극적인 섬김은 서로 어디쯤에서 조화를 시킬 수 있을지 그 경계를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 큰애 젖을 물리면 둘째가 칭얼대고, 둘째를 안으면 셋째가 울기 시작하는 것처럼. 어떤 문제에 대해 애정 없이 파상공세를 취하는 것은 늘 쉬운 법이다. 그리고 각각의 공세를 각각의 방식으로 막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때 과연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모델이 나올 수 있는가 인데, 책은 이 점에 대해서는 놓쳐버리고 있다.

     또 저자가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 예수에 대한 믿음과 예수의 믿음을 구별하는 것도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문제다. 이는 초반부의 소모적 논쟁 중 하나인 예수와 교회를 분리할 수 있는가 와도 연결되는 문제인데, 우리가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제자들이 남긴, 나아가 교회가 보존해 온 문서들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믿음과 예수에 대한 믿음은 딱히 구별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굳이 두 가지를 나누어 구분하려는 것은 ‘원시적인’ 신앙을 가졌던 고대 신자들에 비해 자신들이 좀 더 사실적으로 과거를 재구성해낼 수 있다는 현대 신학자들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분명 오늘날 현실 기독교의 모든 면이 만족스럽지는 않다. 이를 굳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위에 대한 공격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천박한 문화에 휩쓸려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볍게 문제를 다루지 않고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고 있는 이 책은, 교회에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민을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신자들은 신자들대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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