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정신 믿음의 글들 392
우치무라 간조 지음, 양현혜 옮김 / 홍성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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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 간조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오래 전 간략하게만 들어봤다.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딱 이 정도였다.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쳐서 몇몇 한국 무교회주의자들의 사조쯤 되었던 인물. 이번 책은 그런 우치무라 간조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약간이나마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전도”는 흔히 말하는 새로운 사람을 교회로 초대하는 그런 작업이 아니라, 흔히 “교회 사역”이라고 하는 좀 더 큰 개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목회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문에 처음 여섯 개 장에서 말하는 “OO을 위한 전도”라는 부분은 목회자의 사역 동기에 관한 내용처럼 읽히기도 한다.





책 초반 저자는 무엇을 위해 교회 사역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반복해서 던진다. 그러면서 생계나 명예, 교회를 위한 사역은 그 동기로서 충분치 않다고 지적한다(여기서 교회를 위한 사역이란, 정확히는 자신이 속해 있는 특정한 교단이나 교파를 위한 사역을 말한다). 차라리 교회 밖에서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소득이 있을 거라는 말이다.


나라를 위한 전도라는 장 초반, 저자는 애국심에 대한 굉장한 강조를 한다. 찾아보니 이건 저자의 특징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예수(Jesus)와 일본(Japan)이라는 두 개의 J가 가장 중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곧 “그 주된 목표를 국가를 위함에 두는 종교는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나라를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나라를 위해 교회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할 때에 비로소 전도는 세상을 유익하게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려, 자신의 뜻을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면, 전쟁과 핍박을 낳게 된다는 것.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장은 이어지는 6장의 “사람을 위한 전도”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추상적 신념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 보이는 (특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드러나야만 한다는 지적이다.


책의 전반부가 목회의 동기에 관한 내용이었다면, 후반부는 목회자가 갖춰야 할 조건들에 관한 내용이다. 흥미로운 건 신체적으로도 적절한 조건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인데, 건강한 신체와 권위 있는 용모의 중요성을 가리킨다. 물론 건강하지 않다고 해서 목회를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두통 때문에 진리를 제대로 못 외치는”(76) 상황에 대한 한탄은 공감이 된다. 사실 좀 더 중요한 건 마음의 건강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이외에도 적절한 지적인 연마와 이를 실천에 옮기는 “실험과 훈련”이 또한 강조된다. “사람의 종교는 그의 경험 이상이 되지 못한다”(91)고 보았던, 그의 지적은 귀에 쏙 박힌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책상과 목양실 속 세상에만 갇혀 있는가.





한국 교회의 목회자 수급률은 진작 포화상태이다. 정식으로 교육부에서 인가된 신학교들만 해도 매년 수천 명의 졸업생을 쏟아내고 있으니까. 다양한 이유로 신학교에 입학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검증이 있는지는 미지수다.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쉽게 알 수는 없는 법인지라 무엇보다 자기 점검, 자기 확인이 중요할 텐데, 이 책이 여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오래 전 읽었던 김남준 목사의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책과 함께.)


물론 지금 사역을 이미 하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에게도 한 번쯤 도전을 줄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100년 전 글을 읽으면서도 오늘의 신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덕분에 우치무라 간조라는 인물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


처음에는 청일전쟁을 찬성하는 글을 쓰기도 했으나, 곧 자신이 국가의 세뇌에 빠져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반성을 했던 인물(반성이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갖출 수 없는 덕목이다).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중 천황의 교육칙어에 고개를 숙이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결국 쫓겨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던 이 인물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 우리 곁엔 그처럼 비겁하지 않은 기독교인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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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사도신경 - 입술의 고백에서 삶의 신앙으로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송동민 옮김 / 죠이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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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기독교 역사 초기에 등장한 신조 중 하나다. 신조란 우리가 어떤 것을 믿는지를 요약해 정리해 놓은 것을 말한다. 여기에 존중의 의미로 ‘경(經)’이라는 단어까지 붙었을 정도로 교회는 이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물론 이름에 담긴 것처럼 사도들이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일부 전설에는 사도들이 한 문장씩 완성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사도들을 통해 전승된 복음의 핵심적 내용들을 모은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 책은 맥그래스가 바로 그 사도신경을 설명해 놓은 책이다. 사도신경 전체를 여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서, 한 주에 한 장씩 교회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각 장의 말미에는 관련 성경 구절과 함께 나눌 만한 질문도 포함되어 있다. 맥그래스가 이런 책도 쓰는구나 싶은 느낌.





당연히 내용은 정통적인 신학에 기반하고 있다. 각각의 항목을 차근차근, 소개하며 설명한다. 다만 애초에 이 책이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위해 쓰인 책이라면 조금은 부드럽게, 그리고 쉽게 설명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맥그래스의 책이나 문장이 늘 그렇듯 쉽지만은 않으니까.


예를 들면 저자는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언급되는 데서 예수님이 받으신 수난의 “공적인 성격”을 읽어낸다. 또, 그리스도의 승천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예수님의 청원을 들으심을 암시”함을 유추해 낸다. 이런 개념들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그 정도까지 이 책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교회에서 이 책을 사용하려면 먼저 리더가 충분히 소화를 하고 설명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미 어느 정도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게 익숙한 독자라면, 익숙한 문장들 사이에서 깊은 통찰을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면, 표지를 잘 만들었다. 영문으로 된 사도신경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중 몇 개를 골라 음각 대신 검은 잉크로 인쇄했다. 그리고 그 검은 잉크부분만 모아서 읽으면 I BELIEVE라는, 사도신경의 첫 구절이 된다. 재미있는 포인트.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판은 이 검은 잉크가 인쇄된 위치가 미세하게(한 1mm 정도?) 오른쪽으로 넘어가서 자세히 보면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사실 각각 따로 두 번에 걸쳐 인쇄해야 하는 작업인지라, 정확히 맞추는 게 어렵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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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은혜를 시험하는 자리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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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란 오늘날 참 인기 없는 덕목이다.(사실 요새 어디 “덕”이라고 불리는 것들 중 인기가 있는 게 존재하긴 하는지 의문이긴 하다) 내가 한 대 맞으면, 상대방의 팔 하나는 부러뜨리지 못하더라도 당연하게 받아치는 장면을 기대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장면을 보고는 ‘고구마를 (물 없이) 먹는 것 같다’며 투덜댄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풀리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분명 자신이 먼저 시작한 일이라도 그렇다. 오늘날 일어나는 끔찍한 사태들의 배경을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가 뒤바뀐 역사적 경험이 있던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복수(혹은 이 책의 용어로 “비용서”)는 아주 질긴 잡초와 같아서, 그 씨앗이 한 개라도 뿌려진 곳에서는 어느 새 들판 전체를 뒤덮어버리곤 한다.





이 책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리로서 용서를 말한다. 하지만 그 용서는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단순히 책상에 앉아서 성경 구절을 이리저리 짜맞추면서 용서라는 그림을 만들어 가지 않는다. 책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실제 사람들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용서를 하는 것이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술 취한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경험한 딸에게, 수년 후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아버지의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모든 것을 용서해야만 한다고 쉽게 충고할 수 있을까? 지난 세기 인류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범죄 중 하나였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서 살아나온 생존자에게, 우리는 히틀러를 용서하라고 권고할 수 있을까?


물론 어려운 일이다. 만약 용서가 쉬운 일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책이 나올 필요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우리에게는 진정한 용서가 꼭 필요하다. 용서는 우리에게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102).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는 뜻이다. 반대로 “용서하지 않을 때 나는 과거의 감옥에 갇히며, 변화의 잠재력은 완전히 차단”되어 버린다(104).


여기에서 우리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꼭 필요하지만, 쉽게 할 수 없는 이 결단을 위해,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이 하는, 할 수 있는 반응이다.





책은 그렇게, 용서의 필요성과 비용서의 악영향,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를 반복해서 제시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애초부터 몰랐던 것은 아니다. 언제나 문제는 우리가 무엇이 좋은지를 모르는 것보다는, 좋은 줄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데 있으니까. 그 때문에 용서란 정교한 이론을 가르치고 배우는 식이 아니라, 좀 더 강렬한 정서적 감응, 혹은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면에서도 좋은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고, 무엇이 내가 용서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종종 죽음이 임박해서 용서를 시도하는 인물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는 비로소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는 식이다. 용서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평안이라면, 좀 더 일찍 했더라면 어땠을까. 인생은 생각보다 사소한 것 때문에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의 연속인 것 같다. 우리의 삶이 언제라도 금세 꺼질 수 있는 촛불과 같다는 걸 기억한다면, 살아있는 동안 좀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누릴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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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아타나시우스 지음, 피넬로피 로슨.오현미 옮김 / 죠이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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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유명한 교부 중 한 명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닌 최초의 피조물로 격하시키려고 했던 아리우스에 대항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인물로, 이 때문에 몇 번이고 추방에 처해지기도 했었다. 흔히들 착각과 달리 2세기 로마제국에서는 아리우스파가 우세했다. 당장 콘스탄티누스가 죽기 직전 세례를 받을 때도 아리우스파인 총대주교가 집례를 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불굴의 의지력을 가지고 있던 아타나시우스는 결국 성경에 기초한 성자의 신성을 정통교리로 관철시키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 혼자만의 공헌은 아니지만, 아타나시우스의 수고를 빼고 이 논의를 진행시킬 수는 없는 것도 사실. 이 책은 바로 그 아타나시우스가 성육신이라는 교리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오늘날과 같이 여러 책들을 참조할 수도 없는 시절, 아니 성경 자체도 보유하는 게 쉽지 않은 시절 다양한 성경 구절들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입장을 세워가는 작업이 인상적이다.





책의 전반부는 왜 성육신이 이루어져야만 했는가에 관한 내용이다. 인간의 타락과 그로인한 멸망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만 했고, 또한 인간이 되신 그분은 사람들을 대신해 죽으실 수 있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에서도 아타나시우스는 흥미로운 포인트를 읽어내는데, 두 팔을 벌린 채로 당하신 죽음은 한 팔로는 유대인을, 다른 팔로는 이방인들을 부르시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


성육신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곧 부활로 이어지는데, 아타나시우스는 부활의 타이밍도 너무 일러서 죽지 않은 것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고, 너무 늦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절묘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음을, 이것이 부활의 중요한 증거라고도 덧붙인다.


책의 후반은 성육신에 대한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의 의심에 대한 변증에 할애되어 있다.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구약의 여러 구절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주장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그리스인들에 대해서는 신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논리적 증명과 성육신 이후 그리스의 전통적인 예언이나 신전의 작동이 사실상 멈췄다는 점을 실천적인 근거로 제안한다.

오래된 글이지만 여전히 힘이 있다. 그건 아마도 저자의 생애가 가지고 있는 강인한 의지가 덧붙여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죠이북스에서 좋은 기획을 냈다. 이 시리즈로 후속편이 나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조금은 아쉬운 일이다.





사실 이 책이 관심이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사실 중요했던 이유는) 이 책의 서문을 C. S. 루이스가 썼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원본이 처음 나왔을 때는 아니고, 이 책의 영문 번역판이 나왔을 때의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즐겁게 읽었던 부분이었는데, 읽으면서 계속 ‘이거 어디서 읽어봤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읽어본 구절들이 잔뜩 있었으니까.


몇 권의 책을 다시 뒤적여 봤는데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답답해하던 차에, 결국 『피고석의 하나님』이라는 책에 이 책의 서문이 실려 있었던 걸 발견했다. 서문의 내용은 아타나시우스의 글에 대한 찬사도 일부 담겨 있지만, 실은 고전 읽기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주요 내용이다. 예전 책과 요즘 책을 한 권씩 번갈아 읽어보는 게 가장 좋지만, 여의치 않으면 요즘 책 3권을 읽은 후에는 꼭 고전 한 권은 읽으라는 중요한 조언이 담겨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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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게임 믿음의 글들 383
랍비 데이비드 포먼 지음, 김구원 옮김 / 홍성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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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저자 이름에 주목하자. 데이비드 포먼. 여기까지는 그냥 미국인 이름이구나 싶지만, 그 앞에 붙어있는 호칭이 흥미롭다. ‘랍비’, 유대인 교사를 가리키는 칭호이다. 출판사에 알아보니 저자는 유대인이고, 정식 랍비라고 한다. 이 책은 랍비가 유대교의 관점으로 출애굽 이야기를 풀어낸 내용이다. 유대교와는 적어도 몇 단계에 걸쳐 멀어져 있는 한국의 개신교인으로서 일단 기획 자체가 흥미롭다.


사실 출애굽 이야기는 구약 성경 전체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주제다. 이건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출애굽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예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적 해석 말고, 이 책은 유대교에서 이 주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꽤 인상적이다.


물론 이런 접근은 단순히 저자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고, 유대교 성현들로 불리는 앞선 세대 랍비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본문의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오경 내 다른 본문들과의 연결성까지 이어가는 작업에는, 물론 저자의 글솜씨도 한 몫을 했을 거고.





우선 책에서 저자는 기존에 접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질문을 출애굽 본문에 던진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출애굽 과정에서 나타난 열 가지 재앙들(이집트 측에서 보면)과 관련해서 우리는 흔히 재앙의 종류와 강도에 대해 집중하곤 한다. 그런데 저자는 파라오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강도가 아니라 정확도였다고 지적한다. 정확한 시점에 정확한 강도로 재앙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에 관한 논의라는 것.


또, 출애굽 본문에서 가장 곤란한 부분 중 하나인, “하나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본문에 대해서도 저자는 흥미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히브리어로 이 구절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단어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어떤 이의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이고, 다른 하나는 “완고하게 하다”이다. 저자는 이 중 하나님은 파라오가 두려움에 (유일신에 대한 아무런 생각의 변화도 없이) 그저 뒷걸음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마음에 용기를 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출애굽 본문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하지만 그냥 쉽게 지나치곤 하는) 장자됨의 개념에 대한 강조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에 따르면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로 확인되는 사건이었다. 이는 하나님과 하나의 큰 가족이 되는 의미도 내포하는데, 흥미롭게도 여기서 저자(와 유대교 성현들)는 이 이야기를 요셉의 이야기와 연결시킨다.(전형적인 유대교적 접근 방식이다)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들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은 묘한 재미가 있다. 특히 그 대상이 성경일 경우 이건 단순히 재미만이 아니라 큰 유익을 주기도 한다. 성경을 “새롭게” 읽는 것만큼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일도 몇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유대교의 관점으로 출애굽 사건을 능숙하게 읽어내는 이 책은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다만 저자 자신이 유대교 랍비이기에, 이 책의 접근에서 기독교인들이 원하는 그런 내용으로의 전환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 사건이 십자가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하지만 뭐 이런 부분이 크게 문제가 되는 내용은 아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활동하는 저자답게, 초강경파 유대교인들(유대교 내에도 수많은 분파들이 존재한다)과 같은 식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정서는 보이지 않으니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극단적인 현대주의자들보다 이쪽이 기독교인들에게 좀 더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저자의 주장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는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로 소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 하는 독자의 역량에 달렸다. 책 후반 저자는 요셉의 이야기를 출애굽의 프로토타입으로, 요셉의 채색옷에서 장자권의 전달을 읽어내는데, 흥미로운 주장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일 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데 뭐 그건 이 책만 그런 건 아니니까.


간만에 홍성사에서 흥미로운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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