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교육의 불편한 진실 - 환상에 사로잡힌
박제원 지음 / EBS BOOKS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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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 개정교육과정부터 한국 교육은 혁신교육의 흐름과 더불어 지식위주의 수업과 교육과정, 학력관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 흐름은 학생중심의 수업과 배우는 과정, 그리고 주제통합형 수업, 통합교육과정, 프로젝트 수업 등을 중시한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과거에 비해 지식에 대해 소홀히 하는 느낌이는 드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인터넷의 대두와 더불어 인공지능까지 떠오르며 지식은 좀 홀대받는 느낌이다. 

 저자는 이런 분위기를 파고들어 최근의 한국 미래교육이 학습의 가장 중심인 지식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책을 펴냈다. 특히나 혁신 교육이 전통적 지식 중심 수업을 도외시 하고 이를 중요시하는 교육계의 한 주장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교육정책을 펴나간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는다. 

 개인적으로 혁신교육과 미래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 이를 추종하는 책들이 대세인 가운데 반론을 제기하는 책을 봐서 신박하게 보았다. 우선 저자는 전국적으로 진보교육감이 당선되며 혁신교육이 도입된 가운데 지식교육을 도외시 한 나머지 학력이 떨어졌음을 제시한다. 자료는 PISA에서 측정한 시험이다. 그리고 문해력의 감소와 사교육비의 증가도 문제로 제시했다. 보면서 약간 설득력에서 회의적이었는데 우선 학력 같은 경우 감소폭이 그리 크지 않았다. 2010년대부터 제시한 학력 수준은 10년초반에 낮았다고 15년즘을 향하면 상승하고 이후 다시 2020년을 향하며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하락수준이 10년초반과 비슷해 크게 낮아졌다고 보기 어려웠다. 당시는 오히려 보수교육이 일제고사를 실행하던 시점이었는데 그 때와 비슷한것이 낮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또한 학력의 경우 전통적 학력과 혁신교육의 학력은 개념자체가 매우 다르다. 보수쪽에선 지식위주의 객관식 시험점수를 학력으로 보는데 혁신교육은 역량 중심으로 실제 문제해결력, 학생의 학업이나 문제해결 의지, 협동능력, 자기주도성을 복합적으로 학력으로 본다. PISA 시험문제에 대해서 잘 모르나 이것이 낮다고 학력이 낮다는 것은 전통적 관점을 것이다. 그리고 문해력의 감소도 그렇다. 문해력이 낮아지는 것은 전세계적 문제인데 이는 스마트폰과 영상의 범람때문이다. 물론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낮아졌으니 이 문제를 교육계에 책임지울순 있겠다. 하지만 한국이 더 디지털화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청소년이 더 디지털 환경에 노출되기 쉽다는 것도 고려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교육 부분인데 실제 통계자료상 사교육비가 혁신교육 도입이후 증가했다. 저자는 이를 학력의 하락으로 인한 보충으로 보고있지만 2010년대 2만달러에서 2020년 3만달러로 국민소득 자체가 증가한 점, 그리고 이 시기 4차산업혁명에 대한 사회적 이슈가 커지며 코딩이나 드론 등 미래교육 방향으로 새로운 사교육 시장이 생성한 점도 고려했어야 한다. 이를 혁신교육의 책임만으로 지우기엔 역시 설득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학력관과 더불어 혁신 교육은 지식을 도외시 하지 않는다. 다만 구성주의에 입각해 지식을 학생이 스스로, 협력하여 경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생성하는 것을 중시한다. 외부주입보단 덜 효울적이겠지만 그 방식을 선호한다. 이러한 수업이 효율이 떨어지고 지식의 체계성을 쌓는데는 다소 약점이 있다고 볼순 있겠다. 하지만 혁신 교육 역시 이 모든 것에 기반에 기초기본지식이 있음을 인정하며 실제 목표에서도 기초바닥으로 항상 설정하고 있다. 혁신교육이 목표로 삼는 역량은 매우 복합적이고 상황맥락적이기에 실제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장기적 관찰과 향상과정을 꾸준히 전문적으로 행해야 할 것이고 실제 평가기록도 이런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능력주의가 많은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역량의 측정과 그를 위한 교육과정과 수업, 평가의 일체화는 이런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다소 떨궈줄 것으로 생각된다.

 책은 혁신교육에 대한 비판외에도 학습과학에 근거한 학습 전략을 제시하는데 이 부분은 좋았다. 학습전략으로 9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정보가 작업기억에 오래 유지되도록 실질적인 용량을 늘려주는 것으로 청킹 전략을 제시한다. 둘째로는 작업기억에서 인지과부하가 생기지 않도록 교사가 교육내용을 짧게 여러 개의 단위로 나눠 가르치면 효과적이라고 한다. 셋째는 정보를 장기기억으로 옮기는 되뇌기 전략이다. 단순 반복과 장기기억에 저장한 지식을 다른 것과 관련짓는 전략, 정보를 공동범주에 묶어 재구조화하는 방법이 있다. 넷째는 장기기억에서 정보가 잘 인출되게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 다섯 째는 시청각 자료와 스토리 텔링, 여섯째는 충분한 휴식주기, 일곱번째는 디자인 씽킹, 여덟번째는 융합적으로 사고하기, 마지막은 학교에 예술교육늘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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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민 - 어리다고 견뎌야 할 말은 없습니다
아거 지음, 최진영 그림 / 창비교육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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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2010년대 이전까지 한국의 학생들은 고교를 졸업하기전까지 일종의 유예와 예속에 가까운 상태로 살아왔다. 스포츠머리와 단발머리외엔 허용이 되지 않았고, 옷도 교복만 가능하며, 학교와 학원, 공부외에 다른 생각과 행동에 대한 자유는 사실상 없었다. 모든 것이 공부와 너의 미래를 위하여란 이름하에 희생되어 왔던 것인데 학생들도 이를 내면화하며 살아왔고 어른이 되어서도 학교와 비슷한 억압적 사회에서 이를 재현해왔다. 

 이런 억압과 예속을 위한 폭력은 학교에 만연했다. 학생을 인격적 존재로 대우하는 존중어는 언감생심이었고 폭력이 당연시 되었으며 학교에 학생을 위한 민주적 공간은 없었다. 자신들의 대표도 회장이란 대표성보단 학급담임의 대리 성격을 띠는 반장이란 이름으로 선출되었고 후보도 학업과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만 입후보가 가능했다. 90년대 중반부터 학생에게 존중어를 사용하란 명령이 적어도 서울에서는 교육청에서 내려온듯 한데, 그 때 이를 두고 많은 문제점을 열거하던 고교 윤리 선생님이 생각난다. 폭력은 정말 많았다. 너무 일상적으로 맞아와 많은 것들이 생각나지 않지만 충격적이던 폭력 두 가지가 아직도 생각난다. 하나는 초등 1학년때 무려 15개나 되는 반중에 하나에 들어가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 낯설어하다 쉬는 시간에 만난 유치원 친구를 보고 반가와 따라 들어갔다 그반 담임에게 따귀를 맞은 일이다. 이유는 뭐, 남의 반에 함부러 들어가서다. 다른 하나는 중학교 2학년 때 개교기념일에 동네를 거닐며 집 근처 중학교를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마침 체육수업을 하던 그 학교 중학교 선생이 나를 불러세운 일이었다. 평일 오전에 학생으로 보이는 녀석이 학교에 없으니 뭔가 문제가 있는 아이로 나를 보았던 듯하다. 개교기념일이고 학교까지 말하여 이렇다할 트집이 없자 그는 왜 수업중에 학교를 지나가냐며 다른 중학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내 옆머리를 잡아당겼다. 물론 매우 수치스러웠다. 지금같으면 고발 감이다. 

 하여튼 책 '어린 시민'의 저자는 우리가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진정한 시민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을 어릴적 부터 마땅히 생각과 언행에 자유를 갖고 인권을 존중받으며 이를 펼칠수 있는 민주적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무척 당연한데 가정과 학교 및 사회는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학교나 가정에서 아이는 흔히 말을 잘 들어야하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졸업식이나 입학식에서 소감을 말 할때 공부를 잘 하거나 어른이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겠다고 말하는데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드물지 않을까 싶다. 유럽이나 미국의 아이라면 내가 좋아하는걸 하고 싶다거나 재밌게 지내거나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을까. 하여튼 아이의 의견을 묵살하여 이렇게 존엄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순종과 복종을 원하고 아이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며, 아이를 생각과 인격이 없는 소유물로 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이런 모든 행위를 아이를 위하여란 말로 포장하고는 하는데 이 위하여에 정작 아이 본인의 의사가 빠져 있다는게 문제다. 즉, 언제든지 어른들의 입맛과 생각을 위해 아이들을 다루게 되기 쉽다. 

 저자는 책에서 체벌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한다. 저자는 악몽같은 체벌을 겪었는데 저자는 원래 남앞에 나서서 뭔가를 하고 조직하여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고교시절 저자는 부학생회장이었는데 회장과 더불어 학생들의 서명을 받아 일요일 자율학생 폐지를 학교장에 건의했다. 학교장은 젠틀하게 회장과 부회장을 맞이했고, 분위기도 훈훈하여 저자는 기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월요일이 되자 방송으로 회장과 더불어 호명이 되었고, 교무실에 도착하자 네 까짓게 뭐냐라는 교사의 말과 함께 폭행이 이뤄졌다고 한다. 아마 회장은 공부를 잘하거나 집이 잘 살았는지 폭행은 저자의 몫이었다고 한다. 

 체벌은 즉각적이고 문제를 바로 해결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부작용이 훨씬 더 많다. 학생이든 가정의 부모든, 교사든 체벌은 갈등상황을 힘으로 해결하여 민주주의의 문제해결 방식인 대화를 통한 갈등조절의 기회를 상실하게 한다. 오히려 성인이 되어 힘에 의한 해결을 선호하는 계기를 주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체벌은 맞을 짓이 있다는 생각을 때리는 사람이나 맞는 사람, 보는 사람에게 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체벌은 맞은 사람에게 폭력의 상흔을 정신에 영구히 남기며 그로 인해 폭력이 향후 재생산하는 악순환을 불러온다. 맞아본 사람이 더 잘 때리게 되는 법이다. 

 저자는 아이들의 노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한국의 사용자들은 최저임금을 잘 안지키고 편법을 쓰는 걸로 유명하지만 그 대상이 성인이 아니고 학생이면 더 심하다. 그냥 노동한 것에 대해서 계약한대로 법적으로 규정된대로 급여를 주면 되는데 꼭 돈을 왜 버냐고 물어보며, 그리고 공부하지 않고 저녁에 돈을 버는 학생을 문제아 취급한다. 한국의 근로기준법은 15세 이상에게 노동을 허락하면서도 18세 이하에겐 누구나 노동을 하는 경우 부모나 후견인의 동의를 받게 한다. 저자는 이를 학생을 보호하기 보다는 청소년을 예속의 존재로 보는 또 하나의 시선으로 파악한다. 

 책은 작년에 읽은 '어린이라는 세계'와 더불어 학생을 보는 시각을 잡아주는 좋은 책이다. 어린이라는 세계가 좀 더 어린 아이들의 눈과, 그것에 대한 존중과 이해, 동심을 불러일으켜준다면 이번 책은 어린이를 하나의 시민이자 시민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으로 보고 이에 대한 생각을 고취시켜주는 책이다. 좋은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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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생각하며 읽었던 리뷰네오 ~~ 닷슈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닷슈 2022-03-10 23: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도 축하드려요.

서니데이 2022-03-08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닷슈 2022-03-10 23: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그레이스 2022-03-08 1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닷슈 2022-03-10 23:25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축하드립니다.

이하라 2022-03-08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닷슈 2022-03-10 23:2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하라님.

강나루 2022-03-09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오늘 투표하는 거 아시지요^^

닷슈 2022-03-10 23:26   좋아요 2 | URL
사전투표를 이미 했었죠. 나루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포노 사피엔스를 위한 진로 교육 - 진학과 직업에 몰입된 진로 교육 벗어나기
김덕년.유미라.허은숙 지음 / 교육과실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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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마트폰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 포노 사피엔스. 특이한 양상과 변동성이 큰 미래를 살아갈 이들을 위한 색다른 진로교육 필요하다는 취지로 나온 책이다. 

 책은 먼저 포노사피엔스의 특징을 살핀다.

 우선 순간성인데 포노사피엔스는 워낙 모든게 빨리 변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판단을 위해 깊게 숙고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짧은 시간에 행동하고 결정한다. 한우물을 파기보다는 세상은 즐길것과 할 것이 많다. 다음은 무경계성이다. 시공간의 구분이 분명치 않고 메타버스의 등장으로 이런 변화를 더욱 커지고 있다. 마지막은 개체성으로 네트워크로 어느때보다 타인과 연결성이 높아졌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은 매우 개별적이고 파편적이다. 다만 모든 기준이 자기 자신으로 여기서 시작해 원하는 관계나 집단을 형성하고 그 파급력을 키운다. 

 이런 포노사피엔스에게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도 제시한다. 책에서는 이들에게 나 자신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이것은 과거처럼 좋은 대학이라는 특정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해나가는 과정 자체를 중시해주는 것을 말한다. 또한 호기심을 갖고 이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바로 지금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책은 진로교육이 특정 직업에 대한 생각을 갖기 보다는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자기 이해나 자아 정체성등에 대한 파악이 최근엔 중시된다. 그래서 최근의 진로교육은 자아 이해와 타인과의 의사소통 능력에 기초한 사회적 역량을 기르고 진로목표에 따라 자신의 진로를 창의적으로 설계하고, 준비하는 역량이 된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었는데(저자가 3명인걸 보니 한 장씩 나누어 쓴듯 하다) 1장이 언급한 이론적 내용이고 나머지 두 장은 교사들이 진로교육과정에서 겪은 실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진로교육같지 않고 상담이나 학생 이해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는데 최근의 방향이 그러하니 이런 내용이 실리는 것이 맞다고 본다. 

 책 제목과는 다르게 포노 사피엔스에 대한 구체적인 것 보다는 그냥 최근 아이들과의 소통과 상담, 이해과정이어서 얻고자 하는 내용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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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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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은근히 채사장의 팬이다. 채사장이 낸 책을 모두 사서 읽고 소장하고 있으니 그렇다. 매우 인상적이었던 지대넓얕 시리즈 제로편에이어 오랜만에 나온 그의 신작은 소설이었다. 제목이 좀 이상해서 다소 의아했지만 열한계단이나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같은 제목도 있었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설마 소설이었다. 

 하여튼 어떤 소설일지 많은 호기심을 갖고 읽기로 했다. 내용이나 배경은 모두 의외였다. 인생과 사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니 현대적인 내용이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중세 십자군 시절이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이었다.

 소마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십자군들이 세운 왕국 주변부에 사는 한 작은 이교도 마을(십자군의 관점에서) 소년이다. 느낌은 인도느낌인데 십자군 왕국 주변부이니 아마도 아라비아 반도 인근일 것이다. 소마는 아버지로부터 신에대해 배우고 어느날 아버지와 집근처 호숫가에 나간다. 아버지난 강하게 활을 쏘고 이 활을 찾아오라고 소마에게 시킨다. 그래야 인생이 활처럼 곧을 거라나.

 일종의 성인통과의례 같은 이런걸 수행하러 소마는 길을 떠난다. 아버진 장사였는지 이 활을 넓디 넓은 호수를 넘어가 소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마는 길을 헤메고 비를 맞다 지쳐 동굴로 들어간다. 그 동굴에서 이상한 석상같은 걸 만나는데 그 석상은 소마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그 댓가로 세계를 지배하게 해준다고 한다. 화살도 찾게 해줌은 물론. 소마는 고통 끝에 허락한건지 아닌건지 애매한 상태로 동굴에서 나온다.(아마 허락한것 같다)

 그리고 마을에 와보니 마을은 십자군들에 의해 약탈방화살인이 이뤄진 후였다. 소마는 어머니의 시신을 끌어안고 며칠을 보내다 다시온 십자군에 의해 구출된다. 그리고 소마의 이름은 왕국에 걸맡게 사무엘이 된다. 소마는 십자군 아데사 왕국에 살게되고 한 실력자의 집에 머물게 된다. 유산을 거듭하던 한나가 소마를 살피고 아들처럼 키운다. 하지만 이교도에 이민족인 소마는 자식이 없는 한나의 집안을 노린 한나의 오빠 바가렐라의 아들 헤렌이 오면서 밀려난다.

 헤렌에 모든 걸 빼앗긴 소마는 왕국기사단에 들어가 네이케스와 고네등으로 이뤄진 진보적 집단과 만난다. 그들은 삶에 대해 고민하고 왕국의 마녀사냥등에 반대하며 이들을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녀희생자를 구하다 일이 틀어져 고네도 죽고 소마는 왕국에서 나와 오히려 적국인 크레도니아의 군인이 된다.

 크레도니아엔 소마같은 이민족 부대가 있었고 소마는 사무엘에서 다시 소마의 이름을 되찾고 20년간 전쟁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헤렌이 이끄는 어리석은 부대를 궤멸시키고 크레도니아마져 차지해 석상이 말한 것처럼 세계를 지배하는 자가 된다. 

 황제가 되어 제국을 다스리던 소마는 백성을 위한 삶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개혁이 지체되자 서서히 지쳐간다. 지독한 삶에서 호화로운 삶은 누리며 인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불운과 원망만 계속하며 짐승처럼 살아온 자신의 삶에 후회를 느낀다. 그러다 눈먼 소녀를 만나고 소녀에게서 안식을 찾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정사를 멀리하게 된 소마는 아들 에다(그는 소마가 죽인 헤렌의 아들일 수 도 있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다. 과거 소마의 동료이자 부하였고 지금은 그에 의해 요직을 차지한 이들의 배신도 물론이었다. 소마는 두눈과 혀, 귀, 코를 잃고도 살아남는다. 그러고도 세계를 헤메며 자신이 걸어왔던 모든 것을 돌아보며 생을 마무리한다.

 책의 이야기는 많이 보는 배신과 복수의 굴레바퀴로 제법 흡입력이 있다. 채사장은 한 사람의 굴곡진 인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얻는것도 모든 것을 잃는 것도 하나로 보는 느낌을 선사하려는 것 같았는데 다 읽었지만 그런 느낌이 많이 들진 않았다. 소설가로의 첫 변신이었는데 이전 그의 작품들이 주는 느낌이 강렬했기에 어렸웠을 이번 시도가 썩 인상적이진 않았다. 바닥부터 최고 권력, 다시 바닥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인생의 무상함이나 단일자를 보려주려는 시도였던 것 같은데 오히려 고민하는 현대인을 배경으로 삼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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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그렇기에 주변의 인간과 협력 및 경쟁을 한다. 주변 협력자들 중에는 자신과 유전자를 100%공유하는 일란성 쌍둥이에서 절반을 공유하는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일부를 공유하는 인척들이 있다. 그리고 유전자를 거의 공유하진 않지만 나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나 믿을만한 협력자들, 그리고 같은 문화권의 부족 구성원들도 있으며 이들은 나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을 준다. 반면 나의 생존과 번식에 방해를 주는 경쟁자들은 성적 경쟁자들이나 생존을 위한 자원을 갖고 다투거나 사기 및 공격적 행동을 보이는 인간들, 우리 부족과 적대적 성향을 띠는 경쟁부족 구성원들이다. 

 이렇게 주변의 사람이 나의 생존과 번식에 협력적이냐 경쟁적이냐에 따라 인간은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가중치를 부여하게 된다. 민주사회에서 태어난 우리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배우고 그리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모든 주변인을 평등하게 대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사람에 대한 자신의 가중치의 정도를 공감이라는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개인의 유전전 근인도, 그리고 같은 사회문화권 구성원, 개인적 친밀도나 그 사람의 협력도, 혹은 사회의 쓸모 있는 구성원으로서 그 사람의 위치나 외모, 성별, 나이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람은 매일 일어나는 사건 사고 속에서 피해자의 조건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가 보이는 공감정도는 현저히 달라진다. 때문에 공감이란 수단이 도덕성의 조건으로 그리 좋지 못함을 책 공감의 배신은 보여준다.


 






 공감에 대한 차이는 재난 영화를 봐도 쉽게 볼수 있는데 재난 영화에는 많은 공식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빌런인데 모두가 생명상실의 위기 상황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모두를 위기에 몰아넣거나 구조순서를 가로채려고 시도하는 그런 자들이다. 그런데 이런 빌런들은 이상하게도 대부분 성별은 남성이며 나이는 대개 젊거나 중년층이고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다. 영화 해운대에서 난리치다 구조대원을 죽음으로 이끈 젊은 재벌, 부산행에서 주인공들을 막아버린 아마 적당한 기업 중역으로 보이는 안경 쓴 아저씨, 2012에서의 러시아 재벌, 샌안드레아스의 역시 재벌, 영화 엑시트에서의 지배인, 타이타닉에서의 로즈의 약혼자등이 그렇다. 아마 좀더 찾아보면 이보다 훨씬 많은 것이지만 아마 빌런의 유형은 상당히 비슷할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유독 남성, 그것도 젊거나 중년이면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비교적 높은 이들이 이런 진상을 부리는데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이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각자도생의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완력을 쓰기 좋은 위치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나 노년, 어린 아이들에 비해 힘이 강하니 스스로 살고자 난리치기 적합하다. 더구나 사회경제적 위치가 높은 사람은 그 상황에서 그것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용할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들이 아무래도 가장 공감 받지 못하는 존재로 위기 상황에서 가장 낮은 가중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트롤리 딜레마란 윤리학 사고 실험이 있다. 양편 중 한 쪽을 반드시 죽일 수 밖에 없을 때 선택을 하게 하는 실험인데 크게 사람의 수나, 그 사람이 나 자신 혹은 얼마나 나와 관련이 있는지, 나이는 어떤지, 성별은 어떤지가 조건으로 주어진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이 상황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적은 수의 사람보다는 더 많은 사람을, 남자 보다는 여자를, 그리고 어린 아이를, 노인보다는 젋은이를, 뚱뚱하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보다는 보통으로 보이는 사람을 더 살리려는 경향이 있다. 재난영화의 각자도생의 상황은 어찌보면 트롤리의 딜레마 상황과 가장 유사하다. 그렇기에 중년 혹은 젊은 남성은 자신이 가장 가중치가 낮음을 스스로 깨닫고 난리치는 것이 아닐까. 그저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의 구조순서나 탈출순서가 마지막이 될것이 자명하고 그것은 자신의 생존율을 급격히 낮추기 때문이다. 실제로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에서 남성승객은 20%, 여성승객은 74%, 어린이는 50%가 생존했다. 남성이 의도적으로 구조에서 배제되었거나 혹은 스스로 양보했음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사실 각자도생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 젊은 남성의 가중치가 가장 낮음은 다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원시사회에서 젊은 남성은 소규모 집단에서 완력이 강해 집단의 전투력이나 생존력을 높이는데 가장 기여할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꾸로 각자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여성이나 아이, 노인, 혹은 같은 다른 남성에게 자신들의 생존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이며 동정이 가장 가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중치가 낮은 것일까? 

 

 하여튼 개인은 그럴지언정 헌법이나 여러 법들에서 선언적으로 우리 사회, 혹은 세계 모든 구성원은 평등하다고 외치는 국가나 사회, 세계마저도 사실 사람마다 현저한 가중치를 두고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를 매우 쉽게 접할수 있는데 가령 같은 죄를 저지르고도 사람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형량이 매우 다르며 심지어 기소조차 되지 않는 경우, 혹은 같은 20년형을 받고 복역을 하더라도 누구는 만기를 채워야 나올수 있지만 누군가는 특별한 형태로 4-5년만에 나오기도 하는 그런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리고 이런 사회가 개개인에게 부여하는 가중치는 생명가격표라는 이름으로 가장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바로 이 책의 제목이다. 생명 가격표는 글자그대로 생명에 가격을 붙이는 것인데 재난이나 테러, 사건사고로 사람이 생명을 잃는 경우 유족에게 부여되는 보상금이나 배상금이 바로 그것이다. 같은 사고로 사망한 경우라도 누구는 1억 누구는 10억의 배상금을 받는다. 이것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산정하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한 개인의 생명가격을 산정하는 방식으로 널리 사용되는 방법은 비용편익 분석이 있다. 비용편익분석은 순현재가치의 최대치를 지닌 대안을 가려내는것으로 흔히 선택된 규제안이 가져올 비용과 편익에 대한 고려를 할때 사용된다. 가령 에너지 전환을 위해 한국에서 시대착오적으로 신규로 건설하고 있는 화력발전소를 모두 폐기한다면 상당한 고정비용과 해당 기업에 대한 배상금이 투입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에 미세먼지와 탄소 발생량을 줄여 국민 건강과 환경에 기여하고, 한국의 대외이미지를 개선시킨다면 이것이 편익이 된다.

 이 비용편인 분석엔 많은 문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우선 통계적 생명가치를 중요한 투입변수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통계적 생명가치는 생명 하나당 공정하게 주어지는 생명가치인데 이게 높으냐 낮느냐에 따라 생명가격표가 현저히 달라지게 된다. 미국의 경우 통계적 생명가치는 10만 달러정도로 높게 책정되어 있는데 이는 미국의 기대소득치는 넘는 수준이다. 때문에 미국의 경우 인명 상실에 대한 보상금액이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이다. 한국은 생명상실에 대한 보상금이 매우 낮은데 이는 아마도 정부 당국에서 통상적으로 통용되는 통계적 생명가치가 낮기 때문이 아닌가로 추정된다. 

 비용편익분석의 또 다른 문제는 통계적 생명가치가 실제 위험이 증가하는 현재가 아닌 사망이 발생하는 미래를 의미하는데 사용된다는 점이다. 화력발전소를 그대로 존치시켜 발생하는 현재의 손해보다는 그로 인해 사람이 사망하는 이후를 계산하기에 현재적 쓸모가 적다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할인이다. 미래의 사망에 대한 손해를 계산하고 미래의 것이기에 경제적 개념으로 물가상승률에 대한 할인이 적응된다. 물가가 매년 10%오르면 현재의 10만원은 7년후면 5만원의 가치에 불과하다. 때문에 할인을 적용하면 미래 세대의 생명이 현세대의 그것보다 현저히 가치가 작아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정량화하기 어려운 요소를 간과하는 면이 있다. 화력발전소의 경우 혜택을 보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동식물도 이득을 본다. 하지만 이런 것은 편익내역에 대개 포함되지 않으며 포함하려고 해도 산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발전소의 폐쇠는 바로 견적이 정확히 나온다. 또한 공정성이 고려되지 않는다. 대개 피해를 입는 계층은 사회적 약자나 서민일텐데 발전소 관련자는 보다 재벌이다. 공정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이런 비용편익을 분석하는 집단들 역시 이들과 엮여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비용편익 분석이 생명의 가격을 특정 사업에 대한 사회적 규제안에 다한 편익과 비용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사람의 사망에 대한 보상금은 보다 직접적인 생명가격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죽게 만든 사람은 민사 형사상 책임을 지게된다. 형사는 징벌적으로 죄에대한 형벌이고 민사는 사람을 죽게 한 것에 대한 보상이다. 민사에서 보상금액은 실제비용과 기회비용으로 나뉘는데 실제비용은 장례비용등을 포함해서 희생자의 죽음을 처리하는데 드는 비용이며 기회비용은 희생자가 살아있었을 경우 기대할수 있었던 소득이나. 봉사등이다. 이 기회비용이 사람의 나이나 성별, 직업에 따라 매우 달라질수 있기에 개개인의 생명가격표는 매우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보상금액의 산정에 생명자체에 대한 가치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미국의 많은 법이 생명자체에 상실에 대한 보상은 규정하고 있지 않으며 희생자등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문제만을 고려한다. 어찌보면 법은 철저히 산자만을 위한 것이란게 여기서도 드러난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경우도 그가 자살하거나 사망하면 사건은 그냥 종결되어버리고 피해를 구제받지 못한 희생자만 남게되는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점 때문에 자주 희생자가 사망한 경우보다 사망하지 않고 큰 부상을 입은 경우 보상금이 더 커지는 일이 생기곤 한다. 미국에서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 원래대로 생활할수 있게끔 지원하고 보상하는 것이 개념이기에 큰 부상을 입어 평생재활을 해야하는 경우 보상금이 사망보다 더 커진다. 매우 역설적인 경우다. 

 이런 식의 보상금 규정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바로 직업이 없는 아동이나 특정 직업이 없는 가정주부의 경우 보상금이 터무니 없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 경우 가정주부는 그가 기대소득은 없지만 가정에 기여하는 서비스나 봉사의 정도를 크게 잡거나 아이의 경우 유가족의 정신적 충격과 상실에 대한 고통을 고려하는 비경제적 손해배상을 크게 잡아 실질적 보상금을 높이는 형태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처럼 저자는 책 생명가격표를 통해 법적인 평등으로 포장된 우리의 삶이 실제로는 사회적 가중치를 부여받아 적나라하게 돈으로 책정되는 현실과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매우 일상적이며 의외로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지만 상당히 기업과 권력있는 사람들 편향적일 수 있으며 투명성과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생명가격표, 즉 사회적 가중치가 낮게 책정된 사람들은 그 생명의 가치가 낮게 책정되었기에 마구잡이로 취급당하고 존중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국의 경우 위험한 건설현장이나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생명가격표는 매우 낮게 책정되어 있다. 때문에 기업주들은 그들이 죽어도 경제적으로 형사적으로 그리 큰 손해를 보지 않기에 이들을 마구 잡이로 소모한다. 그 결과가 매일 6-7명이 죽어나가는 한국의 산업현장이다. 기업은 이윤극대화가 목적이기에 사업비용과 사람의 생명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 늘 수익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실제 역사상 수많은 담배회사들이 이것이 건강에 치명적 문제를 일으킴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오래도록 숨겨왔으며 많은 위험한 화학물질을 배출하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도 이 제품이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얼마나 많은 해악을 안기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은폐했다. 

 때문에 사회적으로  개인의 통계적 생명가치를 높게 책정하는게 필요해보인다. 한국은 이것이 낮기 때문에 보상금이 터무니 없이 적으며 형사적으로도 형벌이 매우 낮다. 그래서 기업이 지금처럼 할수 있는 것인데 형사처벌 수위를 높이고 보상금을 상당히 크게 한다면 지금같은 행태를 부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생명가격표에서 모두가 다르기에 개인의 직업이나 기대소득에 따른 가중치는 어느 정도 반영하더라도 모든 사람에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을 받을 수 있는 통계적 생명가치를 높게한다는 평등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어느정도 선언적 평등을 실현할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법상에서도 생명자체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필요해보인다. 사망보다 부상의 배상금이 더 큰 것은 여러모로 역설적이다. 현실이 이렇기에 어설프게 사고를 내느니 확실히 사고내서 교통사고 사망자를 죽이는게 더 낫다라는 우스게 소리가 심각하게 돌아다니는게 아닌가.

 그리고 개인의 생명가격표를 책정하는 과정을 투명하게 하고 독립된 기관에서 이를 수행하는 것도 필요해보인다. 한국의 많은 규제기관은 노동부건 환경부건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마치 기업부처럼 행동하는 경향성을 많이 보인다. 때문에 이런 생명가격을 책정하는 독립기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사람하나하나의 생명가격표는 다르더라도 그것이 충분히 높아 모두가 어느 정도는 평등하고 귀하다는 생각을 가질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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