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김건우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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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하지만 당시 현정부는 야당과의 분쟁을 피하고 정치적 개혁과제의 원만한 수행을 위하여 건국 100주년 기념을 대대적으로 하지 않고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이는 헌법에 대한민국의 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국내에 상당함을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이를 반대했던 세력은 현 한국사회의 우익세력인데 상당히 아이러니 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파가 아닌  반공, 기독교, 민족주의 특징을 지닌 전형적인 우익세력이 중심인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현 한국의 우익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굳이 1919년이 아닌 1948년으로 잡고 싶은 것은 1948년의 정부세력이 전통적인 관점의 우파세력이라기 보다는 냉전질서에 기초해 당시 한국에 강한 세력을 행사하던 친미, 친일에 기초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며 이들이 현 한국 우익의 조상격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 한국 우익세력은 우익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중심에 자국 민족주의가 최우선이 아닌 친미 친일에 기초한 외교관계나 그들에 대한 의존이 더 우선시 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과거 이런 의존이 그들 집단의 생존과 권력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책 '대한 민국의 설계자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후, 남한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진정한 보수우익들에 대해 살핀 책이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반공, 기독교, 반일, 민족주의에 기초한 당시의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지만, 해방 후엔 미국과 연합한 친일 세력 중심의 이승만 정권, 그리고 이후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의 주류세력에 편입되지 못함으로써 한국 우익의 적장자들이 되지 못했다. 이는 한국사회의 안타까운 대목으로 아직도 진정한 민족주의의 실현의 어려움과(과거 독재정권과 지금의 보수는 민족주의를 매우 강조하지만 이는 독재 및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 다수의 시민을 경제적으로 희생시켜 상위층이 주로 이득을 향유하는 불공평한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왔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른 나라에 비해 우측으로 지나치게 편향되는 불균형성을 야기하였다.

 책이 주목하는 초기 우익들은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근거하는 우익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대개 지주나 상공인 출신이었다. 분단과 함께 진영재편이 이뤄지면서 탄압을 받은 이들은 일찌기 공산주의의 좋지 못한 점을 경험하고 한국전 이전에 이미 반공정신을 투철하게 갖게 된다. 이들은 일제 시기 평양을 근거로 하는 도산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 중 여러가지 이유로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이들이 이후 건국의 주체로써 떠오르게 된다. 평안도에 기독교가 광범위하기 퍼져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조선시대 내내 차별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중국과 연결되어 있어 조선후기 실학이 꽃피던 시절부터 외부세계의 문명이 들어오는 입구로 작용하였다. 이로 인해 서북은 일찍이 상공업이 발달했고 ,개화 계몽기에는 기독교가 빠르게 수용되었다. 기독교를 통한 서북의 개화는 사립학교의 대거 설립으로 이어졌는데 일제 말 각종 사립학교의 70% 이지역에 집중하였다. 서북인들은 과거 조선과는 다른 새로운 국가를 꿈꾸었고 이것이 이들이 발빠르게 개화한 주 이유였다. 

 책은 이런 인사들로 정치쪽에서는 장준하, 김준엽, 서영훈,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을 꼽는다. 그리고 종교인으로는 김수환, 지학순을 문인으로는 조지훈, 김수영을 언론인이나 학계에선 천관우, 이기백을 종교사상가로는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을 꼽는다. 이들은 일제말 제국의 학문을 접할수 있었던 매우 소수 엘리트로 1917-1923년 정도에 출생하여 학병으로 강제징집되는 나이대의 인물이었다. 어렸기에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친일을 할만한 기회가 없었고 이로 인해 깨끗하고 주체적인 건국세력으로 물망에 오르는게 가능했다.  

 장준하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탈출 후 대한광복군에 들어갔다. 박정희와 대립하며 자신의 광복군 출신임을 자랑했던 그였지만 당시엔 광복군의 현실에 적잖이 실망하였다. 광복군은 말로만 군대였지 훈련 및 시설이 매우 열악하여 제대로된 군사훈련을 커녕 도수제련이 고작인데다고 미약한 세력임애도 3개의 지대가 서로 파벌싸움을 하고 있었다. 장준하는 반공정신을 가진 인물로 이 중 김원봉이 이끄는 제1지대에 대해서 상당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장준하는 백범 김구계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이범석 계로 실제 그는 이범석이 해방 후 귀국하여 조선민족 청년단을 조직하자 여기에 합류한다. 장준하는 반공정신이 강했기에 통일정부를 구상한 김구와는 다르게 남한의 단독 정부수립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런 장준하의 생각은 박정희의 독재와 1960년대 중반부터 함석한과 한국신학대학 계열 인사들과 교류하며 바뀌게 된다. 1972년 7.4남북 공동선언 때에 이르면 장준하는 중도통일 노선을 표명하고 한국사회의 모든 적폐와 문제점은 분단에서 기원함을 주장하고 이로인해 남북 통일을 민족 최대의 지상과제로 주장할 정도로 바뀌게 된다.  

 장준하가 한국사회에 기여한 큰 공로는 사상계의 출간이다. 사상계는 1950-60년대 대한민국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지식인 잡지로 1952년 4월 장준하와 서영훈이 '사상'을 출간하며 시작되었다. 사상의 발간에는 미국 공보원이 후원할 정도였는데 서북세력을 경계하던 이기붕과 박마리아에 의해 견제받아 폐간된다. 하지만 장준하의 은사 백낙준이 사상에 이은 사상계를 출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백낙준은 한국사회에 뿌리 깊은 족적을 남겼는데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교육 목표인 홍익인간의 이념이 그의 작품이다. 홍익인간은 민족을 넘어선 세계주의적, 보편주의적 가치관을 표방하는 것이다. 그는 도마다 1개의 국립대학을 설치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실현시키기도 했다. 

 사상계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전성기엔 발행부수가 1만부에 달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말기까지 주요 인사가 서북출신에 편중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사상계의 편집 방향은 다섯 갈래로 민족의 통일, 민주사상,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창조, 민족적 자존심이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총체적 근대화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들은 국가이념의 모델로 서구자유주의를 설정하였으며 이는 이들 지식인들이 미국식 자유주의에 다소 경도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상계는 박정희 군사정부와 날을 세우게 되었고 군사정부는 세무사찰과 반품작전으로 이들을 압박하였다. 결정적 타격은 주로 대학교수였던 편집위원들을 압박하여 이들을 이탈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한국사회에서 교수들의 역할이 변하던 흐름과 맞물리기도 한다. 1960년대 이전의 대학교수들은 실천적 지식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정부가 급여이외에도 연구비를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연구자로써 그리고 정부정책을 옹호하고 따르는 집단으로 변모하게 된다.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는 이런 실천지식인들에게 처음엔 환영받았다. 1960년대의 우익 지식인들은 이승만 정부를 구태세력으로 보았다. 그럴만도 한것이 그 중심세력이 청산되지 못한 친일세력에 국가를 잘못 경영하여 후배들에게 망국에서 자라나는 아픔을 선사한 망국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의 우익 지식인들은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이 근대화를 열망하는 자신들과 결합하여 민족 근대화를 이뤄야한다고 생각했다. 무력을 가진 고려말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결합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때문에 당시 그들은 5.16을 무려 4.19의 연장선으로 바라보았다.

 사상계의 경우에서 언급했던 해방후 1950년대의 우익 지식인들은 근대화를 서구의 것을 따라가야하는 것으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망국의 아픔과 설움이라는 시대상황 속에 가질 수 밖에 없는 배경이었다. 하지만 이후 1960년대에는 근대화를 민족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변화가 생겨난다. 근대화의 맹아를 무조건 서구에서 찾기보다는 우리 본연에도 그러한 것이 있음을 바라보게 된것이다. 역사시간에 흔히 배우는 조선 후기 실학에서 자주적 근대화의 요소를 학습하게 되는 것은 이시기에 이뤄진 성과다. 

 한국우익 중에서는 무교회주의자들도 깊은 족적을 남겼다. 이들의 사상적 근원은 일제시대 일본학자 우치무라 간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 창조자로 천황에 대한 교육 칙어 불경사건과 러일전쟁 반대로 일본사회에서 찍힐대로 찍힌 인물이었다. 훗날 한국의 잡지 성서조선의 김교신, 양인성, 함석헌, 류석동, 정상훈, 송두용등이 그의 제자였다.

 성서조선은 한국 기독교 정신주의의 가장 비타협적 지점에 위치한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하면서도 자신의 삶 전체를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 제도권 기독교와는 갈등관계였는데 그럴만한 것이 이들은 신앙공동체 자체를 교회로 파악하여 성직 제도나 예배당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류달영은 5.16군사정부에서 국민재건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덴마크 모델에 기초한 국민교육, 농수로 제작과 농지개간을 하는 향토개발, 주택과 식생활과 환경을 개선하는 생활혁신, 도농자매결연, 결식아동급식등의 사회협동을 주장했다. 그는 가정의례준칙을 수립하고 각종 의식을 간소화했다. 무척 길던 결혼 예식을 지금수준으로 30분정도로 줄인 것은 그가 한 일이다. 그의 이런 사상은 훗날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의 모델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달영은 국가주의자들과 사상적으로 부딪혀 정권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는 마을금고라는 이름의 신용조합을 만들어냈고 평생교육이라는 개념도 최초로 사용한다. 

 이찬감은 1958년 충남 홍성 홍동면에서 지금도 매우 유명한 풀무학교와 풀무공동체를 설립한 사람이다. 풀무공동체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세계관 가치관 방법론을 집약한 곳으로 녹슨 쇠붙이를 녹이고 정련해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다는 뜻으로 '풀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우치무라 간조의 위대한 범인과 함석헌의 씨알 개념을 사용하여 위대한 평민을 교훈으로 삼았다. 풀무공동체에서 학교는 하나의 마을이자 생활의 공동체로 이는 지금 한국 혁신 교육의 마을교육공동체와 이론적 실천적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유명한 유기농 역시 이 집단에서 시작되었다.

 함석헌은 우치무라보다 류영모에게 영향을 받았다. 류영모는 노자를 예수만큼 중시했는데 그는 참된 삶이란 신앙적인 진리 정신과 서민적인 근로정신이 일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함석헌의 씨알도 류영모에게 온 것으로 씨는 생명, ㅇ은 하늘, ㅏ는 극소이자 소우주인 자아, ㄹ은 활동양태다. 즉. 씨알은 우주의 생명의 내려와 인간의 얼이 된 존재다. 

 한국천주교는 개신교보다 그 역사가 오래됨에도 사회적 영향력이 미비했다. 이는 개별 교회가 각자 따로 노는 개신교에 비해 천주교가 로마바티칸을 중심으로 강한 통일성과 방침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즉, 지역성을 갖기 어려웠던 셈인데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로마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현대세계에 발맞춰 변화를 선택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된다. 이 회의에서 기존 성직자 중심을 평신도 중심으로 이동시키고 미사에서 라틴어 외에 모국어도 사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김수환과 지학순은 사회 참여로 이해하였다. 

 김수환은 독일 요제프 회프너에게 기독교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런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다. 김수환은 1968년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이 되었으며 1972년 미사생중계때 정부의 국가호위 특별 조치법을 대놓고 비판함으로써 정부의 눈밖에 나게 된다. 하지만 추기경이라는 막강한 위치덕에 군사정권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는데 그 덕에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일종의 피난처 역할을 하게 된다. 김수환은 1972년 남북이 야합한 공동성명에 대해서도 남북의 정권을 연장하고자 하는 적대적 공존 수단으로 파악하여 비판하였다. 김수환은 자연법을 근거로 유신을 비판하였는데 자연법은 신적 정치에 기초해 모든 실정법 위에 존재하는 원리로 국가의 법이 이에 비치되면 그것은 악법이자 무효가 되는 것이었다. 김수환은 반공주의자로 민주화 운동 인사였음에도 공산주의에 대해 경계하는 발언을 하였다.

 지학순은 카톨릭이 평신도 위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1966년 원주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는데 이것이 지금도 존재하는 한살림의 전신이다. 그는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수용하였으며 1974년엔 최초로 유신헌법에 대항해 최초의 양심선언을 한다. 양심선언은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그로부터 2개월후 지금도 존재하는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된다. 

 천관우는 1954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58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자 편집국장, 196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활약할 만큼 젊어서부터 언론인으로 성공했다. 그는 자유언론의 전통을 세웠는데 언론 자율과 자유 수호를 매우 중시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정권에 대한 날을 세우다 밀려났는데 이는 당시 일련의 흐름과 관계한다. 1950년대만 해도 언론에서는 언론을 만들어내는 기자나 편집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언론이 대형 기업화하면서 경영진이나 소유주가 편집인보다 우위에 서기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정권은 언론의 통제를 기존 기자통제에서 경영진을 통제하는 형태로 구조변경을 시도한다. 이런 언론 권력의 변화흐름에서 천관우는 힘을 잃는다.

 천관우는 뛰어난 언론인이기도 했지만 우수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학부 졸업논문이 실학의 개념과 발전과정을 최초로 이론화한 것인데 이는 세계사적 근대화의 맹아가 조선말 외래 유입에서 온 것이 아닌 자생적으로 생겼음을 주장하는 최초의 패러다임 변화였다. 언급한 것처럼 1960대는 학계에서 자생적 발전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이른 당시 한일 협정이라는 사회적 반감과도 관련한다. 

 책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사상적 흔적과 업적을 남긴 다양한 전통 우파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들은 현재 우파의 적장자가 되지 못해 크게 잊혀진 존재로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들에 대한 배경과 업적에 대해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이들이 성공하여 현재 우파의 사상적 직계 조상으로 자리매김했다면 지금의 한국사회가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해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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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아이는 외로운 어른이 된다 -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 관계를 치유하는 시간
황즈잉 지음, 진실희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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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은 어른에게 완벽함을 요구한다. 공정하며 일관적이고 완벽한 조건없는 사랑, 즉, 어른스러움이다. 그런데 완전한 어른은 사실 없다. 어른은 그저 다른 어른들이나 사회적 기대 혹은 자신이 어릴 때 본 것처럼 완전해보이는 어른을 흉내내는 것 뿐이다.(그 어른도 사실 뭔가를 매우 잘 흉내낸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전혀 잡히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평생 갖고 있는 것처럼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실제 어른에 가깝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어른이 진짜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어른은 대부분 완벽하지 못한 어른을 만나며 어린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그렇게 불완전한 어른이 되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불안하게 아이를 대하게 된다. 일종의 악순환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이런 것에 대한 내용이며 대인과정이론이라는 것에 근거한다. 대인과정이론은 모두가 건강한 개인이라고 전제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한 것은 환경이나 상대방이 바뀌었음에도 전략을 적절하게 변경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스택 설리반은 어린 시절 부모와 반복적으로 겪은 상호작용이 인격과 자아를 형성한다고 본다. 타고난 성격요인에 부모라는 초기 환경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이후 다른 대인과 환경이 개인의 성격을 형성한다는 것으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많은 부모는 언급한 것처럼 완벽한 부모를 만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불완전성은 더욱 커졌기에 자신의 생의 아픔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기가 버겁고 그로 인해 아이를 사랑해주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부모이고 어른스러운 척을 해야하기에 부모는 억지로라도 나는 부모다라는 설득을 통해 아이에게 사랑과 곁을 내주는게 가능해진다.  

 반면 건강한 사람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는데 하는 일이나 장소,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며 이로 인해 유연하고 성공적인 관계를 맺는게 가능하다. 

 책에는 부모가 아이를 고통스러벡 하는 상황이 나오는데 유념할만 하다. 

 부모가 정서적 대응, 일분배, 가사분담 및 의사표현등에서 분명하게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경우, 부모가 지나치게 감정적, 변덕으로 아이에게 일관된 감정경험을 주지 못하는 경우, 부모가 권위를 내세워서 아이를 휘어잡고 붙잡으려 하지만 아이가 막상 곁에 머무르면 소홀리 대하거나 감정적으로 협박하고 아이를 소유물로 간주하는 경우, 부모가 미숙하여 아이를 물심양면으로 배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기가 부모의 욕구를 지나치게 배려하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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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물질과 공룡 - 우주를 지배하는 제5의 힘
리사 랜들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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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어떤 책을 읽으며 재밌는 의견을 본 적이 있다. 지구 빙하기는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편인데 이는 태양계가 은하계를 공전하며 태양 빛을 많이 산란시키는 짙은 가스층이나 성운주변에 주기적으로 들어가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층에 들어가게 되면 태양과 지구사이에 빛을 막는 물질의 농도가 짙어지게 되고 이로 인해 지구로 들어오는 태양 빛이 줄어 그 기간 빙하기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태양이 멈춰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태양계 전체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우리 은하를 공전하고 있다. 다만 태양계 전체가 태양에 딸려 다같이 움직이기에 태양은 우주 한 가운데 멈춰있고 지구 같은 행성들만 태양주위를 공전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기적인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지구와 소행성들의 충돌 빈도다. 내가 어릴적만 해도 공룡의 갑작스런 멸종 이유는 의문에 가까웠으며 그나마 유력한 이론은 갑작스레 찾아온 빙하기로 인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6600만년전 거대한 소행성이 유카탄 반도에 떨어져 궤멸적인 파괴현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대멸종으로 공룡이 사라졌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책의 저자 리사 랜들은 지난 2억 5천만년동안 발생한 지구의 크레이터(소행성의 충돌 흔적이다)를 바탕으로 충돌의 빈도가 주기성을 갖고 있으며, 그 이유는 우리 은하에 존재하는 암흑물질이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책 '암흑 물질과 공룡'은 그 과정하나하나를 밣아가는 책으로 우주의 기원부터 생명의 기원, 태양계,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 우리 은하 등 관련 지식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다룬다.  


1. 암흑 물질

 우주는 암흑에너지 69%, 암흑물질 26%, 물질 5%로 구성된다. 은하나 별, 그리고 우리 같은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이 고작 5%에 불과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지만 암흑에너지나 암흑물질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우주의 팽창과 팽창에도 불구하고 은하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그리고 우주의 총물질량과 에너지량이 이론과 도무지 맞지 않기에 이들은 실제 관측이 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이중 암흑물질은 사실상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하며 심지어 우리 몸을 실시간으로 통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보통물질과는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아 감지조차 되지 않는다. 암흑물질은 빛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기에 사실 전혀 보이지 않으며 관측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암흑물질도 물질이기에 자기들끼리 뭉쳐 한곳에 집중되며 그 결과 강력한 중력효과를 나타낸다. 이런 암흑물질의 성질덕에 우리 은하를 비롯한 우주 초기의 은하단이 생성될수 있었다. 

 암흑물질의 중력으로 인해 이들이 있음을 알아낼수 있기도 하다. 먼저 1970년대 루빈과 켄트 포드는 별들이 은하중심에서 멀리 떨어졌음에도 회전 공전 속도가 중심부와 거의 같음을 발견했다. 사실 이 정도 거리면 은하중심의 중력이 거의 미치지 않아 이 별들은 은하 바깥으로 튕겨야만 했다. 하지만 보통물질 이상의 물질이 은하내에 존재해 더 강한 중력이 작용한다면 이들이 이렇게 붙어 있는 이유가 설명된다. 때문에 이는 암흑물질의 존재를 입증하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암흑물질의 존재를 설명하는 또 다른 증거는 중력렌즈다. 빛은 직진하지만 중력이 큰 부분을 지나게 되면 그것에 이끌려 휘게 된다. 지구와 일직선상에 놓은 별이 방출하는 빛은 가운데 커다른 은하가 있다면 그것에 가려 원래 보이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은하 위 아래로 지나가는 빛이 은하의 중력에 이끌려 아래로 휘게되고 그 결과 일직선상에 가려져있던 지구에도 별의 빛이 도달하게 된다. 다만 위 아래에서 오기에 그 별이 두개로 보이게 된다. 이 휘는 정도로 은하단이 갖는 질량의 계산이 가능해지는데 그 결과 은하단의 중력은 보통물질보다 훨씬더 강한 것으로 계산되며 이 역시 암흑물질이 은하내에 존재한다는 강한 증거가 된다.

  

2. 우주의 시작과 암흑물질

 우주의 나이가 십의 -43승 도 안되고 우주의 크기가 십의 -33승 cm도 에 불과한 시점에 빅뱅이 시작되었다. 초기 우주는 1조*1조배의 온도와 수많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는 고밀도 에너지 덩어리였으며 이 입자들이 광속으로 날아다니며 서로 상호작용하고 소멸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빅뱅으로 인한 팽창으로 우주가 식자 에너지 밀도가 큰 무거운 초기 입자가 더 이상 생성될수 없었다. 이 무거운 입자들은 반입자와 같이 소멸하여 에너지로 전환되었고, 이 에너지가 남아 있던 가벼운 입자에게 에너지를 주었다. 빅뱅 후 몇분이 지나자 양성자와 중성자는 온도가 충분히 떨어져 날아다니기를 멈추고 강한 핵력으로 뭉쳐 원자핵을 형성한다. 원래 양성자와 중성자는 수가 같았으나 중성자가 약한 핵력에 의해 붕괴하여 양성자가 되어 둘의 상대적 존재비가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중성자는 매우 느리게 붕괴하므로 충분히 남아 양성자와 함께 원자핵에 흡수된다. 헬륨이나 중수소, 리튬의 원자핵이 형성되고 이 때 오늘날 우주에 남은 이 원소들의 양이 결정되었다. 

 우주가 더 식어 빅뱅후 38만년이 지나자 양전하의 원자핵과 음전하인 전자가 결합하여 중성원자를 이룬다. 마침내 우주는 전기적으로 거의 중성이 되어 전자기력을 전달하는 입자인 광자가 하전입자들에 더는 포섭되는 일 없이 우주를 산란없이 직진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복사가 우주배경복사로 현재까지 관측이 가능하게 된 이유다. 초기의 빅뱅은 무거운 초기 물질을 파괴했지만 식으며 우주를 메울 물질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우주는 초기에 급팽창했기에 매우 균일하고 평평하다. 현재 우주는 급팽창으로 1%수준으로 평평하다. 하지만 완전히 균일하지는 않았는데 이로 인해 은하의 별이 탄생하게 된다. 

 항성계는 우주의 밀도가 낮아지고 물질이 복사보다 에너지가 많아진 시점에야 생성되었다. 복사가 더 강한 시점엔 물질이 뭉치는 것을 마구잡이로 부딪히며 방해했기 때문이다. 우주는 평평하고 균일했지만 작은 밀도 요동은 있었고 여기서 부분의 밀도가 커지기 시작했다. 중력은 물질을 당기고 복사는 물질을 밀어내는데 질량이 어느정도 커지게 되면 밀어내는 힘을 능가하여 물질이 계속 뭉치게 된다. 암흑물질은 이 과정에서 복사의 영향을 받지 않기에 보다 수월하게 인력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암흑물질은 지금도 중력을 발휘하여 별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게 하고 초신성에서 분출된 물질의 일부를 은하로 도로 끌어당기기도 한다. 그 결과 은하는 이후에 별형성 및 생명형성에 필요한 중원소들을 보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주에서는 저밀도 지역이 더 빨리 팽창하고, 고밀도 지역은 느리게 팽창한다. 그 결과 저밀도 지역이 더 팽창해 고밀도 지역을 부피로 압도하여 고밀도지역은 저밀도 지역의 가장자리에 실처럼 몰리게 된다. 그리고 고밀도 영역은 저밀도 지역의 부피에 눌려 섬유처럼 형성되고 이런 섬유들이 만나는 지역이 상당한 고밀도가 된다. 이 지역이 바로 은하형성의 시작점이다. 


3. 은하와 태양계의 형성

 이 고밀도 지점에서 보통물질은 뭉치는데 특이하게도 항성이나 행성처럼 공모양이 아닌 원반형태가 된다. 이는 회전때문인데 그 회전은 물질이 형성될때 모인 가스구름으로부터 물려 받은 성질이다. 물질이 식으면 붕괴에 대한 저항이 낮아져 한 방향으로 붕괴하는데 이는 나머지 방향으로의 붕괴가 가스의 회전에서 생기는 원심력으로 방지되거나 약화되기 때문이다. 일단 회전을 시작한 물질은 최초의 각운동량을 보존하므로 가스는 수직으로는 붕괴해도 방사상으로는 붕괴하지 않는다. 그래서 원반이 되어 납작해지는 것이다. 

 이 은하에서 형성된 태양은 초속 220km로 은하를 공전한다. 이런 엄청난 속도에도 은하자체가 상당히 크기에 한번 공전하는데 무려 2억 4천만년이 소요된다. 태양이 형성되자 태양의 강한 하전입자에 의해 수소와 헬륨이 바깥으로 날아가고 고온에서도 녹지 않는 철이나 니켈, 규산염, 알루미늄만이 가까이에 남아 응축되어 내행성의 재료가 되었다. 이런 태양의 하전입자로 날아간 풍부한 재료로 인해 외행성계는 중력이 낮아 물질이 부족했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재료가 넘치는 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외행성들은 크기가 크고 수소를 잔뜩 축적하여 상당히 빠르게 형성되었다. 이들은 형성 직후 갑작스레 움직였는데 목성은 태양계 안쪽으로 나머지들은 바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들의 강력한 중력에 딸려 소행성들도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이 갑작스러운 이동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소행성들이 궤도에서 벗어나 태양계 안쪽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지구와 달, 수성등에 남아있는 후기 대충돌에 의한 크레이터들은 대부분 이때 형성된 것이다. 

 이는 상당히 파괴적이었지만 지구에 긍정적 역할도 남겼는데  생명과 물, 귀금속 자원의 형성이다. 초기의 하전입자로 인해 지구에는 내부에 약간정도의 물만 남아있는 것이 가능했는데 외부에서 날아온 소행성에 의해 상당량의 물을 축적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물의 양이 적당하여 행성 일부는 물에 잠기고 일부는 드러나 향후 다양한 생명의 분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인류문명에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된 무거운 금속원소들도 이 때 충돌로 축적된 것이다. 지구가 생성되며 무거운 원소들이 지구중력에 의해 핵근처로 말려들어갔는데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내외부의 금속들은 대부분 소행성충돌로 생성되 지구지각 내외부에 축적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생명의 형성이다. 소행성에는 아미노산이 충분히 있는데 이 아미노산이 충돌과 더불어 역시 지구에 대규모로 쏟아져내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확실한 것이 아니며 그것만으로 생명의 기원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지구 최초의 생명이 35억년전에 발생한 것과 후기 대충돌이기가 40억년전으로 시기적으로 비교적 유사한 것은 묘한 여운을 남기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태양계는 형성되어 내행성과 소행성대, 외행성대 카이퍼대, 오르트구름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성은 외행성계의 대장으로 소행성대를 강력한 중력으로 묶어두어 내행성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중 단주기 혜성과 소행성들은 카이퍼대에서 주로 공급되며 안정적 궤도를 갖는다. 하지만 장주기혜성은 오르트 구름대에서 공급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르트 구름대는1000에서 5만 천문단위거리에 있다.


4. 은하 중심의 암흑물질과 소행성의 흔들림

 지구에서 생명은 35억년전에 처음 생겼지만 5억4천만년전 캄브리아기에 생명이 지금처럼 대폭발했다. 이후 생명은 환경의 급변에 의해 대규모로 혹은 부분적으로 멸종하였는데 환경의 급변은 크게 지구내부의 지각변동에 의해서 그리고 외부 소행성과의 충돌이라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 발생했다. 지금까지 다섯번 정동의 대규모 멸종이 발생했는데 이중 3번은 지구내부의 지각 변동에 의해서 그리고 나머지 두번은 외부 소행성충돌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이런 대규모 혹은 부분적 종의 감소나 멸종이 지질조사 결과 2700만년 정도의 주기 또는 6200만년 정도의 주기를 갖고 발생하는 것으로 밝혀냈다. 지구 내부의 지각변동도 주기성을 어느정도 갖기는 하지만 이 책에선 소행성의 주기적 충돌에 주목한다. 그리고 지구 궤멸적 효과를 갖는 충돌은 소행성보다는 혜성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유는 두 가지로 우선 소행성 충돌은 주기성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충돌 에너지가 혜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충돌에너지는 충돌체의 질량과 속도와 관련하는데 혜성은 속도가 최대 초속 70km까지 나오는 반면 소행성은 10-30km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기 역시 상대적으로 혜성이 더욱 큰 편이다. 

 혜성의 발생은 소행성의 무작위성에 비해 주기성을 가질 확률이 높은데 이는 혜성이 오르트 구름대에서 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언급한 것처럼 오르크 구름대는 태양의 중력이 간신히 미치는 곳으로 아주 작은 다른 별이나 은하에 의한 섭동에 의해 소행성들이 충분히 교란되어 그 궤도가 바뀔수 있는 지역이다. 궤도가 바뀌면 태양계 바깥으로 벗어나거나 안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태양계 안쪽으로 궤도를 향하여 안쪽까지 도달하는데 수천년이 걸리게 된다. 만약 이런 섭동에 주기성이 있다면 태양계 안쪽으로 혜성들이 떼를 지어 주기적으로 대규모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며 지구같은 별에는 주기적 멸종을 갖고 오게 된다. 

 태양계는 은하주위를 공전하는데 나선면을 따라 수평으로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도 요동친다. 태양은 은하주의를 2억4천만년간 공전하면서 3회에서 4회정도 수직으로도 수직 이동을 한다. 수직이동을 하게 되어 은하의 나선 위아래로 향하면 태양계는 상대적으로 밀도가 낮은 지역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며 은하나선면 중심을 향하며 밀도가 높은 지역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밀도가 높은 지역을 만나게 될때 오르트 구름대의 천체를 흐트러뜨릴만한 섭동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은하의 보통물질의 밀도만을 생각한다면 태양계 외곽을 흐뜨러트릴만한 조력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 있고, 또 다른 문제는 보통물질 은하의 수직두께는 200광년정도의 크기인데 이 두께와 지구의 멸종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있다. 일치하려면 은하의 두께는 더 얇아야 한다. 

 리사랜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제시한 해법은 바로 암흑물질이다. 리사랜들은 책에서 우리 은하에는 보통물질 은하보다 훨씬 얇은 원반형의 암흑물질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리사랜들은 암흑물질 전체가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만이 상호작용할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상호작용하는 이들만이 에너지를 방출할수 있어 보통물질처럼 같은 원리로 식어서 원반을 형성할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암흑물질은 보통물질보다 입자질량이 100배정도 클 것으로 추정되는데 보통물질과 암흑물질이 같은 온도로 식어있고 같은 속도로 은하로 회전하려면 은하의 두께 역시 100배 얇아야만 한다. 그러면 암흑원반의 두께는 2광년정도로 줄어들고 섭동을 일으킬만큼 강한 중력을 띠어 지구의 멸종주기와 일치하게 된다. 이 경우 태양계가 암흑원반을 통과하는 시기는 100만년에서 200만년정도가 되며 섭동에 의한 유성체의 흐트러짐과 이어지는 대충돌은 약 3200만년 정도의 주기를 띠게 된다. 그리고 태양이 은하평면을 왔다갔다 수직이동하는 주기는 3000만에서 3500만년정도로 모든 것이 대개 일치하게 된다.

 즉, 정리하면 지구의 멸종은 주기를 갖는데, 이는 유성체와의 충돌에 의한 것이다. 충돌유성체는 오르트 구름대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발생주기는 태양이 은하를 공전하며 암흑물질로 이뤄진 농도짙은 암흑원반을 지나는 시기다. 그러므로 우리 은하내의 암흑물질이 지구 생명을 멸종시키는 충돌유성체를 주기적으로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신비의 물질은 암흑물질과 지구의 생명기원과 멸종을 주기적으로 연결시킨 아이디어가 놀라운 책이었다. 더 나아가 은하들도 서로 움직이면서 충돌하곤 하는데 더 큰 스케일에서 은하들의 움직임이 발생시키는 무언가도 지구나 태양계의 역사에 주기적은 뭔가를 일으키지도 않을까란 생각이다. 아니면 이 스케일은 시간적으로 너무커서 지구나 태양계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비교적 간단했지만 리사랜들은 이 과정을 하나하나 설득하듯 지난하게 그 과정과 이론적 배경을 설명한다. 아무래도 암흑물질이란 것 자체가 신비롭다보니 이론 자체게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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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인구는 거의 80억에 도달했고 가까운 시일내에 100억 돌파도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문제는 지구가 이 모든 걸 부양할 만큼 그리 크지 않고 인간은 개체수가 본래 가장 적어야할 최상위 포식자라는 점이다. 이런 무리한 부양을 위해 인간은 현재 태양이 매일 제공하는 에너지를 사용할 능력이 부족하자 과거 지구가 축적한 에너지인 화석에너지를 이용했고 자연순환 이상의 질소고정을 하여 식량을 증대했다. 그리고 나머지 동물군과 식물군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여기에 식량작물과 가축들을 배치하여 지구상의 생물에너지 대부분을 자신의 식량에너지로 삼고 있다. 현재 지구상의 동물군의 무게는 인간자체와 인간에게 에너지를 직접 제공하는 가축이 99%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수만 많고 적은 개체수를 간신히 유지하며 에너지와 자원을 인간에게 모두 빼앗기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태의 식량증대 방법은 지구 환경과 식량이 되는 동물에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윤리적 문제를 가져왔다. 책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자연순환에서 농경순환 그리고 산업화와 화석에너지를 식량으로 변환하는 산업화된 순환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한다. 그리고 책 '값싼 음식의 실제가격'은 우리가 실제 먹는 수많은 식물, 동물음식이 사실 화석연료와 보조금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이 환경에 가하는 부담과 보조금으로 인한 가격이므로 실제로는 엄청나게 비싼 가격을 초래하는 것임을 밝힌다. 규격화되지 않았거나 약간의 손상이 있기에 상품화되지 않고 버려지는 음식도 엄청나다. 그리고 반대쪽에서는 그것이 없어 굶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에서는 69년을 기점으로 인간이 개체수가 늘어나고 풍요로워지면서 반대로 얼마나 지구가 끔찍해졌는지를 수치로 담담하게 제시한다. '고기로 태어나서'를 한국의 책으로 작가 자신이 닭, 돼지, 소, 양계, 식용개를 다루는 축산업계에 직접 취업하며 겪은 동물들의 끔찍한 삶을 가감없이 드러낸책이며, 피터싱어의 '동물 해방'은 공리주의에 입각하여 쾌락과 동물을 충분히 겪는 동물의 이익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함을 주장하는 책이다. 

 이 책들은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하고 환경과 윤리적 문제에 대한 영감을 준다. 하지만 해결은 매우 어렵다. 상당수의 인간이 자신의 잡식동물로서의 본능을 포기하고 채식으로 돌아서거나 아니면 감당이 가능할 정도로 인구의 수를 줄여야 한다. 그러나 이중 어느 것도 인간의 본능에 부합하지 않는다. 인간은 열량이 높은 육류를 선호하고 갈망하며, 환경이 좋아져 경제성장이 되면 충분히 번식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 때문에 육식의 포기는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실제로도 그래왔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등장한 세포배양육은 이런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가능성을 갖고 있다. 세포배양육은 글자 그대고 동물의 세포를 배양하여 식용이 가능한 고기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기술은 10년정도 전에 실체를 조금씩 드러냈지만 당시만 해도 무척 비쌌다. 세포배양육이 모습을 드러냈을때 치킨 너겟단가가 500g당 무려 120만 달러였다. 그야말로 요리사가 살 떨며 조리할만한 가격이었는데 2019년엔 그 가격이 500g당 1000달러 선으로 크게 내려갔다. 치킨 너겟 개당 가격 50달러 수준인 셈이다. 아직은 치킨 너겟 한 개당 한화 5-6만원 수준으로 비싼 수준이지만 가격이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은 시간 문제이며 재생에너지의 가격이 화석에너지의 가격보다 싸진 것처럼 배양육의 가격이 재래식 축산육의 가격보다 내려가는 날도 가까운 시일내에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언급한 것처럼 세포배양육은 재래식 축산업이 야기하는 환경파괴의 문제와 동물에 대한 윤리적 문제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 현재 축산업은 전 세계가 배출하는 온실가스량의 무려 14%를 배출한다. 그리고 이는 축산업계의 반발로 제법 보수적으로 추정한 수치다. 이 온실가스의 총량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량과 선박, 기차, 비행기에서 내뿜는 온실가스의 배출량을 상회한다. 재래식 축산업은 인간이 배출하는 온실 가스중 이산화 탄소의 9%, 메탄의 37%, 아산화 질소의 65%를 차지한다. 재래식 축산업중 온실가스 배출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소다. 이는 소개 네 개의 위를 통해 음식을 발효하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메탄가스가 대량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소는 메탄가스 배출기계나 다름이 없는데 500kg의 소가 무려 100kg의 메탄가스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재래식 축산업은 가성비가 매우 떨어진다는 약점도 지닌다. 소고기 450g을 얻기 위해서는 사료가 2.7kg이 필요하며 돼지고기 500g을 위해서는 사료 1.6kg, 닭고기 500g을 위해서는 사료 900g 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사료는 굶주리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이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현재의 축산업은 부유한 국가 시민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국가사람들을 부양하지 않는 것에 식량체계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재래식 축산업은 식량 뿐만 아니라 상당한 양의 토지와 물을 소모한다. 매우 밀도 높은 공장식 축산업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구상의 가축수가 엄청난 만큼 상당한 양의 토지와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래식 축산업은 그 대상인 가축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온다. 생물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태어나며 그를 위한 본능과 그것이 충족될 때 갖는 기쁨이 있다. 하지만 공장식 축산업은 그 모든 것을 박탈한다. 소는 더이상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을 뜯을 수 없으며 돼지는 흙목욕을 하지 못하며 심지어 뒤를 돌아보지도 못할만큼 좁은 공간에 갇혀 그 스트레스로 다른 돼지의 꼬리를 물어뜯는다. 닭은 발톱으로 땅을 긁을 수 없으며 날개짓조차 하지 못한다. 이들 모두는 인간을 위해 새끼와 자신의 고기, 우유나, 달걀 등을 착취당하며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음을 맞게된다. 이는 상당한 윤리적 문제를 일으켰다. 물론 식물이 아닌 동물의 하나로서 인간은 지구상의 다른 생명을 자신의 에너지원으로 바꾸어 생명을 유지할수 밖에 없으며 이는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는 윤리의 영역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의 축산행위가 윤리의 영역이 되는 것은 인간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생존을 유지할수 있는 다른 방안과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인간은 채식을 통해서도 충분한 단백질과 다른 영양분을 얻을 수 있으며 육식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광범위한 극도의 고통을 주는 형태를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 

 세포배양육은 이런 문제를 모두 해결한다. 세포배양육이 재래식 축산업을 대체할 경우 같은 고기를 생산하는데 에너지의 45%, 온실가스 배출의 96% 토지사용이 99% 물 사용량이 96%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무척이나 인상적인 수치다. 또한 고기를 만들어내는데 동물의 본능의 박탈과 고통의 증가, 죽음이 없기에 윤리적 문제도 제기되지 않는다. 

 여기에 몇 가지 장점이 더 있다. 제공되는 고기가 매우 안전하고 친환경적이라는 것이다. 자연상태이건 축산업이건 동물은 외부환경에 노출되며 이로 인해 기생이 발생하거나 세균에 고기가 오염된다. 우리는 도축 및 유통과정에서의 위생강화와 조리과정에서 충분한 열을 통해 고기를 요리함으로써 이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으며 이로 인해 가끔 식중독등의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세포배양육은 무균환경에서 배양되기에 유통과정에서의 관리만 잘 이뤄지면 매우 안전한 고기가 공급된다. 공장식 축산업에서 알게모르게 들어가게 되는 환경호르몬이나 항생제등의 문제에서도 자유롭다. 

 세포배양육이 제공할만한 또 다른 장점은 식량 위기의 극복이다. 기존 축산업은 상당한 식량자원과 수자원을 소모한다. 때문에 지금처럼 계속 인구가 늘어나고 기후위기가 닥칠 경우 충분한 인구 부양력을 가질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공장식 밀집 사육으로 인한 잦은 질병의 발생도 문제다. 또한 근본적으로 기존의 축산업은 수많은 기술발전에도 불구하고 해당 지역의 기후에 크게 의존한다. 실제로 세계적 축산 국가는 미국이나, 호주, 유럽, 아시아 지역 등 동물사육에 적합한 온대기후지역이다. 건조지역이나 한대, 열대지역에서 채산성있는 축산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공장이나 다름 없는 실내 건물에서의 세포 배양은 이런 나라도 기술만 충분하다면 세계적 축산국으로 변모시킬수 있다. 

 세포배양육은 기술적으로 3가지 요소를 갖는다. 세포, 배양액, 바이오 리액터다. 세포는 동물의 세포로 보통 동물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생체검사를 통해 얻는다. 배양육 업계는 최근 여러 종의 동물세포를 보관하고 있는 기관이나 업체로부터 안정적으로 세포를 공급받고 있기도 하다. 세포배양은 기본적으로 세포분열을 통해 고기를 얻는데 문제는 세포가 자연상태에서 보통 50회만 분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충분한 단백질과 항산화제 보충 배양액을 이용하면 이 횟수를 10회정도 더 늘릴 수 있으며 좀 더 증식하는 특정 종류의 동물 세포군의 세포 사용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있다. 

 배양액은 현재 각 회사마다 비밀로 붙이고 있는 부분이다. 동물의 세포는 당연히 다르기에 소, 돼재, 오리, 닭의 세포에 적합한 배양액은 각각 다르다. 특히, 조류의 세포보다는 포유류의 세포가 더 민감하기에 고도의 기술을 적용한 배양액이 필요하다. 초기 배양액은 소의 태아 혈청을 사용했지만 가격이 4컵 정도에 1150달러정도로 매우 비싸다. 지금은 기술개발로 배양액의 가격이 업체마다 다르긴 하지만 리터당 1-5달러 정도로 저렴해졌다. 600리터 정도의 배양액이면 닭 1500마리 정도의 고기 생산이 가능하다.

 바이오리액터는 배양액 안에서 세포가 헤엄치며 자라는데 필요한 환경을 구현한 기계장치다. 바이오 리액터는 산소와 영양분이 고르게 분포하도록 휘젓는 제트기류를 꾸준히 발생시키며 그 강도가 세포의 성장을 방해하지는 않을 정도로 적당히 조정된다. 바이오리액터는 일정 온도와 PH를 유지하며 산소의 농도와 영양도의 농도를 꾸준히 감지하며 관리한다. 

 세포배양육은 이런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넘어야 할 한계도 존재한다. 우선 기술적 개선이다. 현재 세포 배양육은 근육조직을 배양한 것이다. 하지만 재래식 축산업은 이 근육과 지방이 적절히 혼합된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고기의 맛과 풍미는 지방이 좌우한다. 사실 지방이 없다면 소나, 돼지, 닭, 오리의 맛은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때문에 고기로서의 경쟁력은 지방이 좌우한다고 볼 수 있는데 아직 배양육은 근육조직과는 다르게 지방세포부분에서는 연구가 미흡하다.

 다른 장벽은 사회적 편견과 재래식 축산업계의 반발이다. 재래식 축산업계는 세포 배양육이 가격경쟁력과 품질경쟁력을 갖출 경우 그 어떤 카드도 갖고 있지 못하게 된다. 윤리적 문제와 환경파괴라는 치명적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각국의 정부에 강한 압박과 로비를 가하고 있으며 세포배양육을 고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저자는 축산업이 발달한 미국에서 이런 강한 압박을 겪었는데 상대적로 환경파괴 문제에 민감한 유럽이나 식량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아시아에서는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고기에 대한 전통적 생각도 넘어야할 문제다. 세포배양육이라는 명칭 자체는 그 고기가 갖는 친환경성과 안전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고기처럼 여겨져 강한 거부감을 갖게 한다. 특히, 세포배양육을 장기섭취했을 경우 인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에 대한 연구도 전무한 것이 사실이다. 

 재밌는 가능성은 세포배양육이 특정 종교의 계율로 인한 음식문화를 바꿀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돼지 고기를 금기시하며 힌두교에서는 소를 금기시한다. 전통 유대 율법에 기반한 코셔시장 규모는 연간 240억달러수준이며, 무슬림 율법 식단인 할랄은 시장 규모가 무려 1조6천억 달러에 달한다. 이 종교들의 계율에선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 하지만 세포배양육을 통해 만들어진 돼지 고기 역시 기존의 돼지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이 이것을 허용한다면 그야말로 수천년만에 이들의 식생활에 지각변동이 생겨날 것이다.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에서도 고기의 허용을 금지한다. 생명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을 죽이지 않는 세포배양육을 불교의 승려가 거부할 이유는 마땅지 않다. 이 부분에서도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인간은 세포 배양육으로 만든 다양한 고기를 즐기며 과거 동물을 잔인하게 도축하고 무리하게 개체수를 불려 지구 환경을 파괴했던 야만스러운 시절을 과거의 일로만 회상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축산업의 농장이 차지했던 자리는 숲으로 돌아가 자신의 에너지를 빼앗겼던 다른 생물들이 다시 차지하게 될 것이며 생겨난 숲은 탄소를 흡수해 지구온난화를 조금이나마 막아줄 것이다. 비건이라는 선의로 시작된 좋은 용어도 사라지게 될 것이고 오직 건강상의 이유로만 채식을 즐기는 소수의 사람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런날이 머지 않아 올것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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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2-02-22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포배양육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는데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아 갑니다. 특히 지방세포부분에서 연구가 미흡해서 재래식 축산업의 고기와 맛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어서 빨리 기술이 발달할 날이 오면 좋겠네요!

닷슈 2022-02-22 21:20   좋아요 1 | URL
저도 그날이 빨리 오길 기다립니다.
 
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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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한국만 봐도, 고조선은 그렇다쳐도 패자인 고구려, 백제, 가야의 역사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세계사로 시선을 넓힌다면 승자를 유럽 쪽일 것이고 거기서도 정주세계, 즉 체계적 농경문화를 구축하고 여기서 산업화로의 성공적 이행까지 거둔 쪽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지금도 세계를 지배하며 우리 역시 그 중 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교역과 선진기술의 흐름이 육상에서 해양으로 향하고, 화약으로 인해 기마병이 무력화되기 전까지 세계 역사의 중심축중 하나는 분명이 유목세계였다. 그리고 지구의 유목세계는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실크로드가 지나는 지역이다. 책은 이런 중앙아시아에서 어떤 민족과 나라가 흥망성쇠롤 거듭했는지 서술한다. 두껍지 않은 책에 여러 나라들과 민족, 종교, 인물, 사건등이 나열되어 좀처럼 읽기 쉽진 않았다. 하지만 무척 흥미로웠고 이부분에 대해 관심만 많지 접해본적은 없는 지라 많이 배우기도 했다.

 책에서 언급하는 중앙아시아는 지금의 -탄으로 끝나는 나라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북부, 중국 신장과 내몽골, 몽골과 만주지역, 남시베리아, 러시아 서부와 흑해 일대다. 이곳은 건조기후지역으로 유목에 적합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수목과 산맥이 없어 동서방향으로 이동이 용이하다. 하지만 건조하고 기후가 혹독하여 농경엔 부적합하여 인구밀도가 높지 않다. 중앙아시아에 등장한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책을 다읽고 나니 상당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국가나 민족개념보다는 씨족이나 부족연합체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들은 정주국가에 비해 신분개념이 다소 희박하여 칸으로 옹립하여도 동등한 일원 중 가장 고귀한 대표정도로 여겼다. 승계도 형제승계였으므로 정주국가의 농경왕조에 비해 평등해보이지만 체계가 쉽게 흔들리고 내부나 외부세력에 의해 내분에 휩싸이기 쉽다는 약점이 있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칸 이라는 명칭의 사용이다. 둘째는 개방성과 포용성이다. 확장하는 시점에서는 정주국가나 다른 유목민을 철저히 파괴하고 살해하지만 점령하고 나서는 현지인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확장하고 나면 현지 언어나 문화 종교를 잘 받아들이는 편이며 세월이 지나면 오히려 그곳에 융화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지리적 여건상 상업적 능력도 매우 우수했으며 다언어적 환경이었고 학문과 문화를 잘 융합하여 발전시키기도 했다. 종교의 경우 이슬람이 침투한 후에는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인다. 셋째는 연쇄효과다. 로마제국의 멸망 요인으로 훈족에 의한 게르만족의 침투를 꼽는다. 유목부족들은 자신들끼리의 정복과, 정주국가를 멸망시키거나 혹은 정주국가에 의해 토벌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세력을 밀어내기도 하며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여 다른 세력을 만들어내어 세계사를 흔들곤 했다. 


1. 유목민의 출현

기원전 1만에서 8천년 세계인구는 1천만이었고 이중 50만이 중앙아시아에 거주했다. 기원전 3천년기 인구가 늘면서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관개 농경이 등장하고 수공계, 야금에 종사하는 인구가 도시를 형성했다. 이들은 지구라트를 통해 알수 있는 것처럼 제도화된 종교도 발전시켰으며 초기 문자도 발전시켰다. 기원전 2천년기 지나친 경작과 재앙적 기후변화로 이 지역은 쇠퇴했고, 기원전 1천년기 이란계 민족이 흑해초원과 중앙아시아와 더 북방쪽으로 이주했다. 유목민에겐 말이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이 없는데 말의 사육은 기원전 4800년경에 시작됐다. 3700년경 말을 타기 시작했고 2000년경 일부 자급자족형 농민이 목축에 의존하며 스텝의 목초지로 계절이동을 하며 우리가 아는 유목민이 탄생하게 된다. 기원전 2천년기 스텝의 목축민 일부가 기마민족으로 발전하였고 기원전 2000년 전차가 처음 등장하여 중동과 중국으로 전파된다. 이어 나무와 동물의 힘줄을 이용한 복합궁이 발명되었는데 복합궁은 작으면서도 강하여 말위에서 모든 방향으로의 사격이 가능했다. 철제무기와 복합궁, 말이 결합되며 탄생한 강력한 기마 유목민은 주변에 대한 약탈이 가능해졌으며 이로 인해 세계사는 격변하게 된다. 

 유목민은 마구잡이 사회같지만 실제로를 매우 고도화된 사회였으며 신중하고 계획되고 방어된 경로를 이용해서 목초지로 이동했다. 이들은 노동집약적이지 않았고 큰 인구의 규모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유목은 가업으로 4-5가구가 함께 야영했고 대개 이들은 친족이었다. 보통 5인의 인구부양을 위해 대략 100마리 정도의 가축이 필요했다. 유목민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경우 농경민이 되기도 했는데 유목사회에서 이는 신분의 추락을 의미했다. 유목민은 전쟁만 한 것 같지만 사실 상업적 교역과 문명의 전파자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잉여물을 정주세걔의 식량, 물, 무기와 교환하였고 일부는 큰 부를 축적했다. 

 유목민은 정주세계와 교류 및 교역하며 집단을 대변할 필요성이 생겨났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조직이 생겨났다. 유목민은 씨족 연합 기반으로 종종 연합했으며 대개 정치적으로 가장 강력한 부족의 명칭을 전체의 명칭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유목민은 대개의 경우 비국가적 부족 연합 상태였으며 오직 정주세계의 부를 탈취하거나 외부 침입이 있을 경우 집결하여 국가를 건설했다. 유목민은 많은 비용을 초래하는 정주국가의 정복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다만 성공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 매우 강한 지배 왕조를 탄생시켰고 이 왕조는 신속히 제국 유지를 위해 정주제국을 모방하였고 휘하 유목민도 정주민으로 변모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실크로드 세계의 중심 연결 고리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은 당연히 이 교역로를 보호했다. 교역로는 몽골 고비사막, 신장 타클라마칸 사막, 투르크의 카라쿰 사막등을 경유해 매우 혹독한 환경이었다. 유목민은 단순 전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발명품인 현악기와 바지도 정주세계에 전파했으며 유목 세계 여성들의 전투참여는 아마존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신화 원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고대유목국가들

고대의 중앙아시아의 주인은 이란계 주민이었다. 이들은 유목민의 특성보다는 정주인이었고 오아시스 인근에 정착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고 투르크어에서 도시를 의미하는 칸트는 이란어에서 차용되었다. 사마르칸트가 그 예다. 기원전 3000-2500년 전후 인도-유럽어 공동체가 해체하며 퍼지게된다. 토하라인이 기원전 3천년기 후반에서 2천년기 초반 신장에 도달했고, 인도-이란인이 동쪽으로 이주해 시베리아, 몽골, 신장, 북파키스탄에 도달한다. 인도-이란인은 기원전 2000년경 남아시아 인도어 사용 주민과 중앙아시아 이란어 사용인으로 분화한다. 기원전 3-4세기에 투르크계 민족이 나타나며 이란계를 몰아내고 본격적 유목시대를 연다. 

 오아시스와 강유역에 정착했던 이란계 주민들은 우즈벡 지역에서 소그디아인과 화라즘인으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박트리아인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이들의 국가는 키루스 2세가 중앙아시아를 침공하며 복속된다. 이 지역은 알렉산더의 원정 이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방령이 되며 페르시아의 통치아래 이란권 중앙아시아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장거리 교역 네트워크 연결을 한다. 

 기원전 3세기 그 유명한 흉노가 나타난다. 그 유래는 알기 어렵다. 기원전 215년 진은 흉노의 선우 두만을 북으로 몰아내며 이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당시 흉노는 월지에 복속상태였으므로 두만은 맏아들 묵특을 볼모로 보낸다. 이후 두만이 월지를 침공하고 묵특은 탈출해 원한관계인 아버지를 죽이고 묵특 선우가 된다. 세를 불린 흉노로 인해 진을 이은 한은 기원전 198년 화친 조약을 맺는다. 왕실공주와 상당량의 비단, 직물, 음식을 제공해야했다. 흉노는 그 대가로 중국천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고 침공을 하지 않았다. 

 기원전 162년 노상 선우가 월지의 왕을 죽이고 월지를 서로 몰아낸다. 이로 인해 월지 이란계 유목민은 박트리아와 이란으로 이동하게 된다. 세가 역전되어 한무제가 기원전 127년에서 119년 중앙아시아를 침공한다. 한은 101년 페르가나를 정복해 목표로 하던 한혈마를 확보하고 중앙아시아를 안정화시켜 실크로드가 안정된다. 그 덕에 간헐적으로 도착하던 비단이 지중해세계에 안정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흉노는 기원전 72-71년 계속 패배한다. 중국은 흉노를 분열시켜 흉노는 남과 북으로 갈린다. 북흉노는 중국의 압박으로 서진해 강거로 이주한다. 이들은 선우가 살해되자 강거에서 훈이라는 이름으로 부족명을 개편한다. 남흉노는 한에 복속되었고 한 멸망후에는 선비, 강계 국가에 흡수된다. 

 서부에는 쿠샨과 훈이 부상한다. 쿠샨은 전성기에 박트리아, 동이란, 동서 투르키스탄, 파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다. 이들은 중앙아시아 교차로에 위치해 여러 문화를 융합했다. 조로아스터교, 토착중교, 불교과 공존했고 예술은 사실적 표현과 , 곡선미의 인도양식, 정형화한 이란 양식을 종합해 간다라 미술을 탄생시킨다. 쿠샨은 관개로 농업을 발전시켰고, 상업도 발전했으며 대상으로 중앙아시아와 인도 항구바다를 연결했다. 불교 순례와 국제무역도 동시 장려한다. 

 쿠샨은 사산왕조에 230-270년경 멸망한다. 그리고 쿠샨의 빈자리를 채운게 훈족이다. 흉노계인 이들은 소수의 지배집단이 카자흐로 진출해 다른 부족과 합류하여 생겨났다. 훈은 중앙아시아 부족의 압박으로 375년 불가강을 건너 알란과 고트족을 격파한다. 그리고 이에 놀란 게르만 족이 로마영내로 이동하게 된다. 훈의 왕 아틸라는 440년 헝가리와 인접 지역의 게르만 슬라브, 기타 민족의 지배자로 부상한다. 아틸라는 로마제국의 변경을 약탈하였지만 실제 로마 정복이 목적은 아니었다. 다른 유목국가가 그렇듯 위협을 통한 공물 약탈이 주목적이었다. 훈의 공포는 서구 사회에 깊게 남았으나 사실 중대한 위협은 아니었다. 


3. 돌궐의 등장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나라의 기반을 만든 왕조로 평가된다. 오죽하면 중국인이 한족일까. 그리고 유목국가의 전범 같은 국가가 바로 돌궐이다. 흉노와 한이 멸망한 공백기에 중앙아시아에는 북중국의 탁발과 몽골 초원의 아바르, 쿠샨땅의 헤프탈이 등장한다. 탁발은 이후 중국식으로 북위로 개명한다. 아바르와 북위는 전쟁을 하는데 이 때문에 유목민이 서진하게 되어 내륙아시아 초원을 이란계에서 투르크인으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이 혼란에 돌궐이 부상한다.

 다른 유목민들이 그렇듯 돌궐도 암늑대와 적에게 전멸당한 한 부족의 유일한 생존자를 조상으로 둔다. 546년 돌궐 수령 부민이 아바르를 도와 철륵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세를 키워 아바르를 정복한다. 돌궐은 유라이사를 횡단하는 최초의 대제국을 세우는데 중국북부와 만주, 흑해에 이르는 영역이었다. 돌궐은 교역로를 확보하고 비잔틴과 외교하기도 한다. 

 유목국가가 그렇듯 이들은 제국을 세우면 영역을 나뉘는데 마치 유목민들이 부족이 연합해도 자기 고유 영역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 돌궐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뉜다. 기원한 지역인 동부가 서부에 비해 지위가 더 높았다. 돌궐 역시 유목전통으로 형제승계를 하였는데 삼촌들이 모두 물러나면 맏형의 아들에게 지위가 돌아갔다. 

 자연 내분이 일어났고 481년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돌궐에 첩자를 보내 분열시킨다. 하지만 수는 무리한 베트남, 고구려 침공으로 내부 반란이 일어나 붕괴하고 이 내부반란은 동돌궐이 돕는다. 이 후 등장한 당은 동돌궐의 힐리 카칸이 계속 침공하자 그에게 공물을 바치면서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 거기에 초원에 폭설과 서리가 수년간 지속되어 630년 당은 힐리 카칸을 생포하여 사망시킨다. 동돌궐은 이렇게 멸망하여 무려 100만이 당에 투항하고 당은 이들을 잘 융화하여 북방 변경에 정착시키고 자원으로 사용한다. 부족장은 중국식 칭호와 관직을 받았고 당태종은 이들을 무인으로 잘 활용한다. 이를 기반으로 640년 당태종은 신장의 고창을 정복한다. 그리고 659년 서돌궐마저도 당에 무릎을 꿇는다. 당은 중앙아시아를 장악해 아프간 일부와 이란 변경까지 진출한다. 

 하지만 당이 쇠퇴하자 동서돌궐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돌궐 제 2제국이 설립한다. 돌궐은 칸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돌궐의 카간은 하늘이 내린 존재로 피를 흘리면 안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돌궐은 칸은 살해하게 되는 경우 교살한다. 외튀겐 고지대와 오르콘 강 유역등 자신들의 기원 지역을 신성시하였고 여기를 지배하는게 칸의 정치적 정통성 확보에 중요하다. 이런 식의 전통의 이후 유목 국가에도 계승된다. 이들은 매우 강력하고 기동성있는 군대를 바탕으로 오래 번영했지만 결국 광대하면서도 다양한 민족을 지배하는데 드는 비용이 막대하였고 내부가 항상 불안하였기에 742년 결국 멸망하고 만다. 

 

4. 공백기 이슬람의 침투

 지금도 있는 위구르인이 이 때 등장하여 744년 돌궐과 당의 공백기에 몽골초원, 신장, 인근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위구르 카간국을 수립한다. 755년 위구르는 안녹산의 난으로 당이 도움을 요청하자 난을 진압해주고 당의 수도 장안을 약탈한다. 위구르는 돌궐과 다르게 소드드인과 중국인의 도움으로 수도를 건설하였고, 757년 오르콘 강 유역에 수도 오르두 발릭을 건설한다. 

 9세기 전반은 격동기였다. 중국은 쇠퇴했고, 티베트도 친불교파와 반불교파로 나뉘어 싸웠다. 위구르도 금새 내부분쟁이 일어났고 외부적으로는 티베트, 카를룩, 키르키즈와 싸웠다. 위구르 부족은 이 혼란에서 중국 변경으로 두주하여 신장과 간쑤에 소규모 국가를 세우고 토착민을 위구르화한다. 

 키르키즈는 중앙아시아 여타 유목 제국과는 다르게 오르콘강과 셀렝게 강 유역을 국가의 중심부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힘을 떨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근거지인 예니셰이 강으로 돌아갔으며 중동 중국과의 무역 관계에만 만족했다. 권력의 공백기에 등장한 것이 거란이다. 거란은 북중국과 만주에 요를 건국한다. 그리고 10-11세기에 이르면 인종적으로 몽골어 사용 유목민이 몽골초원에서 투르크계 언어 사용 유목민의 수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안녹산의 난으로 중국이 중앙아시아에서 철수하고 탈라스 전투에서도 주변 부족의 배신으로 이슬람이 승리한다. 그 결과 중앙아시아로 이슬람이 침투하는 기회가 열린다. 이슬람교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서 지배종교가 된다. 트란스옥시아나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거의 일치한다. 오랜 기간 사용되던 아람어가 아랍어로 대체되었고 중앙아시아의 이란어 사용 도시민 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이 지역을 오랜 기간 지배하던 소그드인과 화라즘인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을 경제적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언급한 위구르 제국의 부상은 다시 민족 이동을 불러왔다. 투르크계 부족들이 이란-이슬람권 트란스옥시아나까지 밀려나가 일부는 흑해까지 밀려났다. 

 하자르 카간국은 서돌궐 아시나 혈통으로 북코카서스와 우크라이나,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국가를 건설했다. 하자르인은 우크라이나의 불가르 족을 격파했는데 이 때 불가르 인들의 일부가 679년 발칸으로 이주하여 토착 슬라브인을 정복하고 동화하여 지금의 불가리아인으로 발전한다. 하자르 카간국은 이 지역에서 중세 최대의 상업지가 된다. 발트해-북유럽삼림지대-카스피해-볼가강을 지배하여 이슬람의 무역 경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하자르 칸국은 비잔틴과 자주 동맹관계를 맺고 통혼한다.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와 정치경제적으로 교류했고 강성하여 볼가강 하류 그들의 수도 아틸에는 무려 25개 피지배민족 상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사만왕조는 우마미야 왕조 시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지방 영주의 후예들로 9세기 초 트란스옥시아나의 지배세력이 된다. 사만왕조는 초원의 투르크계 유목민을 약탈 공격하여 군사노예로 삼는다. 사만왕조는 이들의 전투력에 반해 군사노예 학교를 설립하여 이를 아예 사업화한다. 하자르 칸국과 사만왕조는 당시 노예의 주 공급자였다. 이들은 전쟁포로나 동유럽 삼림, 농겨지대의 슬라브족을 노예로 삼았는데 이들을 이슬람 세계의 강자 압바스 왕조에 공급했다.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특정 정파와 민족에 휘둘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이들을 선호했다. 투르크계 민족들은 인내력과 전투력도 매우 우수했다. 아랍세계는 이 전투노예들은 처음에는 굴람 나중에는 맘루크라 부르게 된다. 굴람들은 특수부대에 편입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힘을 키운 이들이 나중에 압바스 왕조를 뒤집게 된다. 

 1005년 카라한 왕조가 사만왕조를 정복한다. 이들은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도로 돌궐칸의 정치 전통을 계승해 국가를 왕족의 공동소유물로 보고 승계권이 돌고, 분할통치를 한다. 카라한 왕조는 투르크-이슬람 문화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슬람 색채의 문학을 가졌고 많은 수의 투르크계 유목민이 중앙아시아 농경지대로 이주한다. 그 결과 투르크어가 공동어가 된다. 


5. 몽골 제국

13세기 초 중앙아시아에는 신생 화라즘, 요의 후예가 세운 카라 키타이, 금, 셀주크 제국 4개의 나라가 있었다. 몽골은 12세기 몽골지역의 여러 부족 연합중 하나에 불과했다. 서구에서는 몽골인을 타타르인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타타르인은 초기 몽골의 적이었다. 실제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인에게 독살당한다. 칭기즈칸은 1189년 몽골 칸이 되고 1196년 타타르 격파 1206년 전 세계의 황제를 의미하는 칭지즈칸으로 추대된다. 그는 1209년 서하를 속국으로 삼고 1211년 금을 침공하여 1215년 대도를 함락한다. 1216-18년에는 카라 키타이 1219년 화라즘, 1220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함락한다. 1223년 루스를 격파하고 귀환길에 볼가 불가르를 침공했으며 1226년 서하를 정복하고 칭기즈칸은 사망한다. 

 칭기즈칸은 네 아들은 두었는데 첫째는 아버지보다 이미 먼저 사망하였고 셋째 우구데이가 대칸으로 추대된다. 각 형제는 울루스(백성, 토지)와 군대를 물려받았고 이들은 대 몽골국 내 작은 국가를 이루었다. 전통에 따라 맏아들이 부친의 땅에서 가장 먼곳을 물려받아 주치의 아들 바투와 오르다가 킵차크와 서시베리아 지역을 상속한다. 바투는 볼가강 유역에 수도 사라이를 건설한다. 우구데이는 북신장과 남시베리아, 이르티시를 상속하고 몽골초원 중앙부에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한다. 

 몽골은 확장을 지속하여 1241년 킵차크인과 루스공국을 복속하고 폴란드와 헝가리도 일시 점령한다. 하지만 우구데이가 사망하여 철수한다. 유럽인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우구데이 사망후 대칸경쟁이 벌어지고 여기서 툴루이 가문이 승리해 뭉케가 자리를 이어 정복을 계속한다. 뭉케의 뒤를 이은 퀼라이는 이란, 이라크, 소아이아 대부분을 정복하지만 맘루크인이 이들을 저지한다. 

 쿠빌라이는 새 수도인 대도를 건설하고 국가명을 원으로 개명한다. 1279년 중국 정복을 완수하고 1270년 일본도 침공한다. 칭기즈칸은 네 아들 주치, 차가다이, 우구데이, 툴루이를 두었는데 주치는 14명 차가다이는 8명 우구데이는 7명 툴루이는 10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각가 자기의 울루스를 두었고 권력투쟁에 참여해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다. 뭉케는 우구데이 사후 대칸 경쟁에서 우구데이, 차가다이 일족을 숙청한다. 여기서 주치와 툴루이 연합이 이뤄졌지만 이들의 연합도 이후 와해된다. 

 쿠빌라이는 제국의 다언어 환경으로 인해 모든 언어를 표기할수 있는 언어의 개발에 착수한다. 1269년 티베트 승려 파스파에게 이를 개발하게 하여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노력과는 달리 이 알파벳은 널리 퍼지지 못한다. 파스파문자는 한글창제에도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있다. 

 원은 동과 서를 모두 연결하여 역사상 매우 안전하고 평화로운 문화, 교역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를 통한 정보교환으로 각지의 지식인과 상인들은 더 넓은 시야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얻게 된다. 원의 정복은 역시 민족의 이동을 불러왔는데 원의 팽창으로 밀려난 주변부 투르크인의 일파는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핵심세력이 되었고, 타이계 주민들은 버마 왕국으로 이주하여 변동을 일으킨다. 

 원의 몽골인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정복민과 동화되어갔다. 몽골인들은 의도적으로 투르크계 유목민을 재편하여 부족을 해체한 후 자신들의 군대에 편입시켰는데 그 결과 오랜 기간 유지되던 이들의 혈연 기반 부족전통이 와해되고 이후 자신들이 새로운 부족을 편성하는 경우 자신들의 혈통보다는 칭기스 계열의 혈통을 리더로 삼거나 유력인사를 집단명으로 사용하게 된다. 

 차가다이 울루스가 혼란상태에 빠지자 티무르가 등극한다. 그는 제국내 극심한 분열을 이용하여 1370년 실권자가 된다. 다만 그는 스스로 칸에 오르지 않고 칭기즈 일족을 꼭두각시로 하고 자신이 실질 통치한다. 티무르 제국은 유목민을 정착시키는데 그 결과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현대 우즈벡 민족의 형성에 주 역할을 한다. 티무르제국은 오스만을 격파하고 술탄마저 잡는등 위용을 과시한다. 티무르는 1404년 명정복을 위해 출정하나 가는 동중 1405년 사망한다. 명으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420년 칸 계승 분쟁, 가뭄, 전염병으로 주치 울루스의 해체도 가속화한다. 1443-1466년 크림반도, 볼가강 중류, 하류 아스트라한에 새로운 칸국들이 수립된다. 1368년 원이 멸망하자 초원으로 돌아간 몽골인들은 오이라트를 세운다. 오이라트는 서몽골, 신장, 이르티슈강 유역을 지배했다. 그들은 1449년 만주 및 중국까지 세력을 뻗여 명황제를 사로잡아 무려 1년가 생포한다. 주치 울루스의 또 다른 일족인 자니백과 기레이는 오이라트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스스로를 우즈벡-카작인으로 칭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슬라브계 자유민 코사크를 지칭하게 된다. 이들은 수천단위로 지금의 발바슈호와 천산산맥 사이에 정착하여 오늘날의 카자흐인을 형성한다. 

 

6. 정주제국의 압박

16세기에 이르자 환경이 급변한다. 정주왕국은 화기를 개발하여 유목민을 강력한 기마부대를 무력화하는 수단을 갖게 된다. 또한 세계의 무역과 문화, 정보의 흐름이 기존 유라시아 육상로에서 해양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유목민족들은 이와 같은 시대변화에 민감하지 못했다. 16세기 중앙아시아는 여러 정주제국에 둘러싸인다. 사파비 왕조는 이란을 정복하고 시아파이슬람을 국교로 한다. 1550년 모스크바 대공국이 볼가강 유역의 주치 울루스 계열 국가를 정복한다. 

 16세기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그리스 정교회와 몽골 지배자로부터 정통성을 부여 받고 다른 루스 공국들을 복속한다. 1552년 이반 4세는 카잔 칸국을 정복하고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을 정복한다. 이반 4세는 비잔틴 황제와 몽골의 칸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자신의 정복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성전처럼 묘사하였다. 러시아는 무슬림 타타르인들은 정교회로 광범위하게 개종하였고 타타르 귀족들은 등용되고 귀족화하여 러시아에 급속히 동화되었다. 이를 거부한 이들은 상인이나 이슬람 성직자인 울라마가 된다. 

 1500-1900년까지 러시아는 하루 130제곱km의 영토를 획득한다. 시베리아 지역엔 이렇다할 정치적 장애물이 이 시기엔 없었고 마침 시베리아 토착민들이 천연두와 여러 질병으로 떼죽음을 당하여 무주공산 상태였다. 러시아는 1638년 태평양에 도달하고 1640년 오호츠크를 건설한다. 러시아의 전진은 청과 충돌하고나서여 멈추게 된다. 

 이 시기 한 시대를 풍미하던 몽골은 부침이 심해진다. 이들의 분열은 심했는데 종교인 불교가 결집요인이 된다. 다얀 칸의 후손 알탄 칸이 동몽골을 부흥시키고 중국, 티베트, 오이라트와 전쟁을 한다. 북경근처까지 진격하여 명과 평화조약을 맺었고 명은 이들을 막기 위해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만리장성을 축조한다. 이시기부터 몽골에서 칭기즈 일족과 불교는 일체화하여 서로를 강화한다. 이 불교는 티베트 불교인데 칸들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에 의해 이전 칸들의 환생으로 선포되며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반면 몽골은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의 패권을 보장했다. 

 

7. 근대 세계의 완성

17세기는 소빙기로 기근이 어이져 경기가 침체하고 인구는 감소하며 정치적 혼란이 찾아온다. 글로벌 위기로 세계무역의 패턴이 변화했는데 해상무역 그리고 육상무역의 방향 변화다. 유럽의 해양무역으로 이시기 육상교육이 크게 쇠퇴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방향이 바뀌었을뿐 규모자체는 크게 줄지 않았다. 기존 동서방향의 육상 교역은 남북방향으로 바뀌었다. 말과 노예 무역이 여전히 중시되었고 무굴제국은 연간 10만 마리의 말을 수입할 정도였다. 

 동오이라트는 준가르 제국을 건설한다. 정주세계에 위협을 가하는 사실상 마지막 중앙아시아 제국이라 할수 있다. 동오이라트의 지배자는 칭기즈의 후예가 아니어 칸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1670년 왕자 갈단이 티베트 유학길에 올라 달라이 라마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보슉트 칸이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준가르는 청과 러시아를 이용했는데 청은 준가르가 몽골인을 통제하고 그 대가로 교역권을 제공했으며 러시아 역시 준가르에 교역권을 주었다. 하지만 1696년 청의 강희제가 40만 대군으로 준가르의 갈단군을 대파한다. 이에 준가르가 티베트를 약탈하자 청은 1720년 티베트를 편입하고 1757년 청은 준가르를 점령한다. 

 이후 중앙아시아에는 이전 보다 세가 매우 작은 칸 국인 부하라 칸국, 히바칸국, 코칸드 칸국이 생겨난다. 하지만 부하르는 1868년 러시아의 보호국, 히바칸국은 1873년 러시아 보호국, 코칸드 칸국은 1876년 러시아에 병합된다. 러이사는 국경을 이란, 아프간까지 확대하고 무려 2천만의 무슬림을 보유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내몽골에는 많은 중국인이 유입된다. 몽골 전역에서 중국 상인이 경제를 지배하고 문화적, 경제적 착취로 몽골과 중국사이에는 적대감이 생겨난다. 티베트 불교는 몽골인의 정체성 유지에 기여한다. 고비 사막 이북의 몽골 왕공들은 러시아를 중국견제로 이용한다. 이슬람화한 신장은 문화 종교의 현저한 차이로 청에 융화되지 않는다. 청은 1884년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신장을 지방으로 승격시키고 지배를 강화한다. 

 러시아의 예상과는 다르게 카자흐 유목민은 러시아, 기독교화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분열시키려 민주주의, 근대화 유입을 차닪한다. 신무기 공급도, 이를 막기 위해 심지어 징집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 현지 보수층과 손잡아 공중위생시설에 종교개념까지 붙여 이를 개선하지 않았다. 후진성의 영속화였다. 러시아는 현지를 자원수탈로만 바라보고 저항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다른 서구 열강처럼 이 지역의 종교, 씨족, 부족에 따라 민족 분류를 하였다. 이는 매우 작위적이었고 러시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1890년 러시아는 대규모 식민화로 이지역에 무려 100만의 러시아인을 이주시킨다. 20세기 들어 세계적 면화수요가 폭증하며 전통적 면화재배지역이었던 중앙아시아는 대표적 면화재배지역이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단일작물에 의존하게되어 경제적으로 취약해지고 수자원이 고갈되었다. 거기에 산업화로 전통장인과 공예가들이 몰락한다. 

 1920-40년 카자흐스탄, 투르크멘,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한다. 1929년 타직이, 1936년 키르키즈가 공화국이 된다. 이들은 과거 왕족 중심이었으나 소련에 의해 민족국가가 되었고 심지어 정체성도 갖게 되었다. 1970년대가 되어서 소련은 중앙아시아 공화국의 현지민들에게 통치권을 이양하기 시작한다. 

 1924년 동투르키스탄의 지식인들은 타슈켄트에서 모임을 갖고 위구르라는 명칭을 부활시킨다. 위구르 민족주위를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1944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설립하나 1949년 중국이 이를 해체하고 다시 신장으로 삼는다. 중국은 1960-70년대 신장으로 중국인을 대거 이주시켜 현재 위구르인 850만 중국인 750만 수준이다.

 내몽골의 지도자는 중국과 함께 일본군과 함께 싸워 자치권 획득을 노렸다. 하지만 실패하고 현재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중국은 1919-20년 외몽골을 차지하나 1921년 혁명가 수흐 바토르가 독립권을 찾았다. 1924년 군주제를 폐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운다. 그리고 2차대전후 몽골은 독립이 확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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