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 - 꼿꼿하고 당당한 털의 역사 사소한 이야기
커트 스텐 지음, 하인해 옮김 / Mid(엠아이디)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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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피부를 가진 상당수의 동물은 표피에 무언가 있기 마련이다. 어류와 파충류에게는 비늘이 있고, 새에게는 깃털이 포유류에게는 털이 있다. 양서류나 달팽이 같은 연체류 등 뭔가 없는 녀석들도 점액질로 피부를  보호한다. 인간은 동물중에서 머리 털과 중요 부위를 제외하고는 마치 털이 없는 것처럼 보이곤 하는데 잘 안보이게끔 가늘게 퇴화해서 그렇지 아직 인간 역시 털복숭이를 벗어나질 못했다. 책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 역시 다른 동물들 처럼 위기상황이나 공포를 느낄때 털을 쭈뼛 세운다. 사실상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아 아무효과가 없음에도 이런 기제가 남아있는 건 인간이 아직까지  털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책 헤어는 이런 털의 과학적 기원과 역할, 그리고 사회문화적 측면까지 그야말로 털에 대한 모든 것을 두루 살핀다.

 

1. 털의 기원 

우선 털의 기원. 털이 생기기 위해서는 피부 다층구조가 필요하다. 때문에 무척추동물은 피부가 단층구조라 털이 생길 수 없다. 생명체에 척추가 생겨나며 몸의 단일 세포층에서 다층구조로 변모하는데 털이 생겨나는 기본전제가 확립된 셈이다.

 생물이 육상으로 진출하며 생명체는 물과는 다르게 건조한 대기,  태양의 전자기 복사, 산소 중독, 물리적 충격, 극단적 기온 변화를 견뎌야 했다. 때문에 피부는 물과는 다르게 두꺼워지고 단단해져 수분장벽을 생성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털의 기원에는 3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비늘에서 진화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털인 모간이 분비기관에서 진화했다는 설이다. 모든 모낭에는 피지선이 있고, 모간의 큐티클 구조 역시 지방질을 피부표면으로 배출하기 위한 구조라는 점, 그리고 고대동물은 수분 손실을 막기 위해 이런 역할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마지막은 털이 어류와 양서류의 감각기관에서 발전했다는 설로 실제 물고기들에 이런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역시 그럴 듯 하다.

 

이처럼 책 헤어는 얇지만 털에 대한 종합서적이다. 나와 동물이 갖고 있는 털에 보다 관심을 갖기 좋은 책이다.

 

2. 털의 역할과 인간

다음은 털의 역할이다. 우선은 감각작용이다. 털은 피부위로 솟아난 일종의 안테나 같아 감각을 크게 도운다. 털이 있는 상태에서 동물은 해충의 침입을 훨씬더 잘 감지한다. 그리고 털은 보온효과가 있다. 인간에겐 많이 상실된 능력이나 과거 포유류는 털의 보온효과로 인해 밤에도 활동하여 냉혈동물과 시간차를 낼수있었다. 털은 열손실을 최소화하는데 전도율이 크게 낮아 납의 고작 80만분의 1에 불과하다. 또한 추위를 느끼면 털이 솟아 두터운 보온층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런 보온효과에 부작용도 있으니 바로 열배출이 용이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털에 둘러쌓인 다른 동물들은 여름철 열배출에 상당한 곤욕을 겪는다. 기껏하는 것이 혀를 내밀거나 털이 작은 부위로 열을 간신히 배출하는 수준이다. 때문에 이들에게 장거리 운동과 뜨거운 볕에서의 운동을 금물이며 열대지방에서 살기가 힘들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털을 없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 큰뇌와 관련한 가설이 설득력이 있다. 뇌조직은 열에 매우 민감한데 42도만 되어도 조직이 괴사한다. 인간이 털을 버리고 두뇌를 키울수 있었으며 더불어 열대지방으로도 마음껏 진출할수 있었다. 털의 상실은 사회성의 발달도 촉진했다. 유인원의 경우 어린 유인원이 어미의 털을 잡아 버텨 어미가 양손이 자유로운 반면 인간은 털이 없어 새끼를 안아야해 두팔이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 이지점에서 인간 어미는 다른 개체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이것이 사회성의 발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3. 털이 성장과 퇴화

털은 4단계의 주기를 갖는다. 성장기-퇴화기-휴지기-탈락기가 그것이다.

성장기에 모낭이 새로운 모간을 형성하는 시기다. 성장기에 모낭은 피부 깊숙히 파고들어 가장 안쪽의 세포들이 맹렬히 분열한다. 새로운 세포가 한달에 1cm정도씩 자라서 올라오는데 이러면서 털이자란다. 털의 길이는 이 성장기에 따라 달라지는데 머리털은 성장기가 6-7년에 달하는 반면 눈썹은 한달에 불과하다. 그래서 눈썹이 짧은 것이다.

 모간이 이처럼 주기적 교체를 하는 이유는 크게 세가지다. 모간의 마모, 더러워진 모간의 해충과 먼지제거, 모간의 교체를 통한 주변환경변화로의 적응이다.

 이에외도 모간은 호르몬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임산부의 경우 태아로 인해 모낭성장인자 호르몬이 많아지게 된다. 이로 인해 모낭의 성장기는 길어지고 탈락기는 지연되는데 아이를 출산하면서 탈락기가 한꺼번에 오게 된다. 출산후 머리가 한움큼씩 동시에 빠지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4. 털과 문화

털은 많은 문화적 의미와 사회적 메시지를 지닌다. 털은 비문명이자 야만을 의미하기도 했고, 반면 삭발은 비인간화와 정복을 표시하기도 한다.  처형전의 죄수를 삭발하거나 수인을 삭발하는 게 대표적인 예이다.

 털은 대개 건강이나 힘 성적매력과 관련지어지는데 이로 인해 탈모는 좋지 못하게 받아들여지며 질병과 동일시 되기도 한다. 젊고 건강한 머리는 성적 순종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머리를 길러 남자를 기다리는 라푼젤이 이런 이미지를 투영한 대표예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과장된 머리 스타일이 지위 권력 부를 상징한다. 이는 가발이나 머리는 준비하는데 많은 재력이 소요되고 헤어스타일의 치장에도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중전들의 가채를 보라] 중세유럽에서는 머리가 풍성할수록 정치적 지위와 권력이 강하다고 생각되어 가발이 유행했다.

 한편 과거 털의 손질은 의료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성직자의 수술이 금지된 이래로 이발사는 의사로서 활동해왔다. 양자는 구분이 되기도 했지만 엄격하지 않았으며 1745년에서야 확실히 분리된다. 지금 이발소의 간판에는 의료행위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과거 이발소에는 큰 기둥이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묶고 시술하는 기둥이었는데 처치가 끝나면 환자가 없다는 뜻으로 이 기둥에 흰 붕대를 걸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차차 동맥혈의 붉은 색과 정맥혈의 푸른색 흰 붕대가 결합하여 지금의 광고기둥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이발소가 흑인과 관련이 깊다. 미국백인들은 흑인 노예에게 자신들의 치장을 맡겼는데 그중 솜씨 좋은 이들을 이용하여 주인들이 이발소를 차리기 시작한다. 몇몇 대담한 흑인은 이를 통해 주인으로 부터 독립하여 자신만의 이발소를 차리고 가족까지 해방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흑인 이발소의 손님은 당연히 백인이고 흑인은 이용이 불가했으며 이는 19세기 말에서야 풀린다. 흑인 이발소의 손님들은 이발을 기다리며 다양한 종류의 노래를 부르고 새로운 음악의 탄생에 기여했다.

 20세기 질레트가 안전면도기를 개발하며 남자와 여자 모두 집에서 면도를 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발소는 많은 고객을 잃게 된다. 지금은 미장원이 많고 머리의 치장이 다소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17세기 까지만 해도 남성이 공공장소에서 여성의 머리를 만지는 것이 금기시되어 여성용 미장원은 나중에야 등장한다.

 

5.큐티클과 헤어스타일

모간에는 큐티클이 있는데 모든 동물의 큐티클 방향은 뿌리에서 바깥쪽을 향한다. 큐티클은 살짝 벌어져 튀어나온 것으로 실제로 자신으 모발을 뿌리에서 바깥쪽으로 쓰다듬으면 부드러우나 반대방향일 경우 매우 저항이 심하다. 이런 큐티클로 인해 머리카락을 서로를 엉키게 되며 단단해진다. 그리고 이런 원리로 양모를 이용한 펠트천이 탄생한다.

 모간의 단백질은 케라틴 단백질인데 모발은 85%-90%가 단백질이다.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동물은 케라틴을 소화하지 못한다. 케라틴 단백질의 성질을 이용하여 우리는 헤어스타일의 변화를 주는 것이 가능한데 우선 케라틴 단백질의 약한 수소결합을 끊는 방법이다. 수소결합은 물에 젖으면 쉽게 끊어진후 다시 형성되므로 머리를 물어 젖게 한후 말리며 헤어스타일을 바꿀수 있다. 하지만 다시 젖으면 바꾼 형태로 변형되므로 매우 일시적이다. 우리가 머리를 감은 후 드라이어와 빗질로 헤어를 만들 수 있는게 이런 원리다.

 보다 영구적인 방식은 황결합을 끊는 것이다. 이 결합은 강고하며 물에 젖어도 상관이 없어 영구적 변화가 가능하다. 물론 모간이 빠지므로 영구성이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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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1 - 1910-1915 무단통치와 함께 시작된 저항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1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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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 실록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대단한 그림과 군데군데 숨어 있는 익살, 거기에 왕들의 성격에 맞는 인물 작화와 용포의 색상, 실록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수많은 대신들간의 업적과 알력 다툼까지. 뭐하나가 빠지지 않았다. 만화라고 우습게 볼게 아니었다. 상당히 깊이 있는 만화이기에 완성까지도 근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런 작가의 다음 작품이 일제35년이다.

 아무래도 이 책은 7권시리즈인 것 같은데 5년단위로 끊어서 진행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역사이고 굴곡진 역사로 쓸 거리는 많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 길게 잡은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온지 좀 시간이 되긴 했지만 기대를 갖고 1권을 잡았다.

 역시나 책 내용이 쉽지가 않았다.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여러가지 일을 하는데 제법 역사에 관심좀 있다고 자부해온 나로써도 대부분의 인물들이 익숙치가 않았다. 한때 공무원공부좀 했었던 동생이 책을 살펴보면서 하는 말이 역사교재로 삼아도 되겠다고 할 정도였다.

 재밌는 부분은 종교 관련 부분이었다. 구한말 우리의 기존 종교들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일제의 적극적 포섭때문이었다. 우선 가장 큰 일제의 근심거리는 불교와 유교였다. 워낙 오래되었고 세가 강해 민족세력으로 집결시 무시못할 수준이었기 때문. 하지만 의외로 순순히 포섭된다. 불교는 우선 사찰을 정비하고 큰 사찰의 주지를 일제가 자격을 허가해주는 형식을 구사했는데 대신 주지에게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주지 후보자들은 일제에 충성하며 쉽게 포섭되었다.

 유교는 더욱 어이가 없다. 형식적으로나마 유교를 우대했으며 실권이 없는 자문기구인 중추원이 많은 사람들을 넣었기 때문이다. 겨우 이것에 낚여 많은 유학자들이 일제에 그대로 포섭디었다. 물론 이미 쓸만한 유학자들이 이 시점에서는 거의 항일운동이나 자결등으로 희생되었단 점도 컸다.

 반면 동학이 완전히 와해된 시점에서 나철의 대종교가 민족저항운동에서 역할을 하였고,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기독교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개화사상에 눈뜬 이들중 기독교를 자연스레 신봉하게 된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있었으며 아무리 서슬이 퍼런 일제라도 서양 선교사들의 비호를 받는 기독교 세력은 쉽사리 건드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승만에 대한 부분도 좀 나온다. 이승만은 사실 당시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 헛바람을 주었던 미국 대통령 윌슨을 어쩌다 접견하게 되어 상당한 후광을 업는다. 그는 상당히 빠른 기간에 석사와 박사를 마치는데 여기에 외교적이유를 댓고 그것을 허락한 프린스턴에서 말도 안되는 기간에 박사를 거저 얻는다. (그리고 평생 이박사로 칭송되니 웃길 일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하와이로 향한 후의 행보인데 이승만은 당시 하와이에서 민족지도자로 명성을 얻던 박용만의 도움으로 하와이에 정착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점차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는데 박용만의 일궈논 하와이 한인 사회를 가로채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만의 한인 단체를 만들고 어용들로 그 밑을 채웠으며 놀랍게도 법인이 되야할 단체를 사익화하려는 시도를 수차례한다. 개인적 친분으로 이를 묵인하던 박용만과도 부딪히게 되며 결국 하와이 사회는 상당부분 이승만의 차지가 된다.

 독립운동을 개인영달의 도구로 사용한 셈인데 이후 이루어질 그의 행보를 잘 보여줄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실력양성에서 이젠 무장투쟁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한 독립운동을 어이없게 보았는데 그가 보기에 강대한 일본을 상대로 해외에서 보잘것 없는 세력으로 큰 돈을 써가며 무력을 키우는 것보단 외교적 압박이 더욱 효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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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5-08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승만은 ‘대통령’이란 직함을 유독 좋아했죠
 
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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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찌보면 보기와는 달리 제법 강력한 유물론 책이다. 걷기를 통해서 인간이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질운동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과 외부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은 유물론적 주장이다. 그리고 이에 강하게 동의하는 편이다.

 사람이 걷기에 적합한 동물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걷는 다는 것은 직립과 상당히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사람의 커다란 뇌가 걷기 등의 다른 인간적 특질을 낳은 것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직립등의 환경의 압력에 적응한 신체적 요소의 변화가 큰 뇌를 낳았다는 가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걷기에만 집중하다면 사람은 직립함으로써 머리와 손에 자유를 얻었고, 특히 걸을 때 머리의 자유로 인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하늘위를 바라볼수도 있으며 주변 풍경을 자연히 감상할수도 있다. 걸으면서 사람은 온전히 자신의 신체를 느끼게 된다. 저자는 걷는 것은 매우 불안한 자세라고 하는데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을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조절하고 언제든지 넘어질 위기를 겪는 실존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걷기가 실존과 관련함은 미처 몰랐다.

 걷기는 또한 생각을 없애준다. 걷다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오래걷다보면 결국 잡념은 사라진다. 물아일체라고 할까. 갖가지 잡념과 스트레스 속세의 생각이 사라지며 자연스레 자연과 하나가 된다. 반대로 걸은 후에는 사람은 생각이 넘쳐난다. 철학자 칸트가 그토록 오래 걸으며 생각한것도 이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는 나름의 과학적 근거도 있는데 그 내용은 책 운동화 신은 뇌에 나온다.

 책의 골자는 과거의 통념과는 다르게 운동을 하면 오히려 뇌 조직의 생성이 일어나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힘뺀다고 체육과 수업을 자습으로 대체하는 고등학교의 행태나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오후에 체육수업을 하는게 오히려 근거가 없었던 셈이다. 실제로 이 책의 영향으로 교육계에서는 체육수업을 가급적 1교시에 배치하는 것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걷기는 또한 건강에도 좋다. 과거 만난 한 기관의 장학사는 점심을 먹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단다. 교사에서 장학사가 되면서 운동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인데 장학사는 교사와 다르게 점심을 나가사 먹어야만 하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식사후 거의 30분 이상을 걷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뱃살의 사라짐이었다. 그래서 위처럼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는 책이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중병을 앓아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환자는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다. 치매환자에게도 걷기를 시키거나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승마를 시키는 것들은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자동차를 비판한다. 자동차가 등장함으로써 그리고 현대의 다양한 이동수단이 우리를 빠르게 움직이게 함으로써 우리는 걷기 본능을 잃었고 나의 발은 사용처를 잃었다. 풍경은 수동적으로 지나갈 뿐이며 우리는 더욱 자연과 멀어진다. 빠른 이동수단으로 공간과 시간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진 셈이지만 역으로 시간과 공간에 더욱 얽메이데 되었다. 예전이면 그 시간에 갈수 없는 공간에 우리는 자본에 얽메여 반드시 가야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도시도 걷기와 관련이 있다. 도시는 걸어 나오는 사람들의 수와 양태로 시시각각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새벽을 걷는 사람들, 술에 취한 사람, 점심시간에서의 사람들의 사라짐. 밤의 붐빔등. 도시에서 걷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다양한 만남을 만들어내며 여러가지 도시만의 색깔을 만들어낸다. 최근 자동차의 발달로 인도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도시 계획과 프랜차이즈 가가게들의 등장은 이런 걷기가 만들어낸 다양한 도시의 색깔을 지워낸다.

 저자는 역사적으로도 걷기를 살핀다. 걷기는 지금이야 자신의 건강과 여유를 위해서 하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생존의 문제인 적도 있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걸음과 스페인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토착민에게 되레 당해 수년에 걸쳐 수천킬로미터를 걸어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간 일, 종교순례를 위한 걸음들은 모두 위험했고 생존을 위협했다. 걷다가 잠을 청하는 순간에는 갖가지 곤충과 동물의 위협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중국의 삼장이 인도로 향하면 쓴 서유기는 책에 등장하는 온갖 요괴들의 수만큼 과거의 장거리 걷기가 생존에 위협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장거리 걸음이 주는 극도의 피곤함 후의 휴식, 그리고 극도의 갈증후에 느끼는 물마심의 쾌감과 시원함이 걸음이 주는 또하나의 선물이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봄날을 만끽하며 걸어봄이 어떠한지. 한국인은 안그래도 비타민 D 결핍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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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08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자동차와 스마트폰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생활하게 되면 두뇌 능력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상대방과 만나면서 대화를 나누는 행위도 뇌의 진화와 관련이 있어요. 외출을 하지 않고,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삶이 무조건 좋지만 않은 것 같아요.
 
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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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진주귀고리 소녀 출처-네이버블로그]

뒷글에서 역자는 모나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만큼 매혹적이지도 않고, 여러 의미를 보이는 미소가 비웃는 것 처럼 보였다고 한다. 가장 끌린 그림은 얀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 소녀라고 한다. 뭔가 우수에 찬 눈빛에 촉촉한 입술과 큰 눈동자, 사연이 있어 보이는 얼굴. 거기에 검은 배경까지. 그래서 진주귀고리소녀를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칭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자나 역자는 이를 기분나빠할 것 같다. 화가인 얀 베르메르 역시 별로 유명치 않다. 남긴 그림도 적으며 당대에 유명한 다른 네덜란드 작가들에 빛이 가렸다.

 소설 진주귀고리 소녀는 이 사연있어 보이는 얼굴의 주인공과 화가인 얀 베르메르에 대한 상상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저 소녀의 이름을 그리트로 정했다.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활동지인 네덜란드 소도시 델프트에 살고 있으며 네덜란드 답게 이 도시에도 운하가 있다. 그리트의 아버지는 타일을 만드는 타일쟁이였는데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며 그리트의 집 가세가 급격히 기운다. 아버지는 공장과 더불어 양눈을 잃었고, 삼남매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리트는 집을 돕기 위해 남동생과 여동생을 나두고 하녀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그리트가 하녀가 된집은 운명적이게도 얀 베르메르의 집이었다. 얀 베르메르는 화가였다. 대책없이 아이를 많이 낳고 있었는데 베르메르는 무려 11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그 집에서 그리트는 고된 하녀생활을 하며 주말에만 집을 향한다. 생활은 고되었지만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될 수 있었고, 꼼꼼한 성격의 그리트는 하녀역할을 잘 해 큰 마님의 눈에 든다. 하지만 웬일인지 베르메르의 아내 카타리나와 선배 하녀 타네커는 그리트를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긴다. 거기에 베르메르의 딸 중 한명인 코넬리아는 이상스레 그리트를 자꾸 괴롭힌다.

 그리트는 시장의 푸줏간이나 야채가게로 심부름을 가는 일도 많았는데 특히 푸줏간을 자주갔다. 그건 그리트의 고기고르는 솜씨와 흥정하는 재주가 제법 괜찮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리트는 시장엘 자주가서 바람을 쐬고 친동생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푸줏간집 아들 피터가 그리트에게 보이는 눈이 심상찮다. 그리트는 이상스레 그의 손톱 밑의 빠지지 않는 핏물과 고기 냄새가 싫었다. 피터가 제법 근사한 외모의 소유자였음에도 말이다. 시장엔 카타리나의 아이들을 데려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이들과 시장에 나선 어느날 그리트는 자신의 친여동생을 만나고 반가워하는  동생을 향해 심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자신의 여동생과 비슷한 또래의 집주인 아이들의 심기가 불편해질까봐서였다.

 동생에게 전할 미안할 마음을 털어버릴 요량으로 주말만 기다리던 그리트에게 비보가 전해든다. 자신의 집이 있는 구역이 전염병으로 격리된 것이다. 수개월후 격리는 풀리나 그리트의 여동생은 전염병으로 죽고만다.

 상심에 빠진 그리트에게 큰 마님은 다락방의 청소를 맡긴다. 다락방은 베르메르의 작업화실이었다. 그곳엔 많은 신기한 물건과 그림이 있었고, 그런 그림들을 그리트는 좋아했다. 그리트는 타고난 예솔적 기질이 좀 있었던 탓인지 청소하는 과정에서 물건들의 배치를 잘 기억하고 손대지 않았으며 이게 마음에 든 베르메르가 그리트에게 물감을 만드는 일을 시키기 시작한다.

 남자 안주인의 이런 행태는 그리트의 위치를 불안하게 한다. 카타리나와 타네커는 이일을 계기로 그리트와 더욱 멀어지게 되었으며 큰 마님은 이를 염려하면서도 묵인한다. 어려운 집안 형편과 그림 그리는 속도가 시원찮은 사위가 그래도 그리트가 작업을 도운 이후로는 속도가 제법 붙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트는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피터외에도 베르메르에게 그림을 청탁하는 부호는 툭하면 추문을 던져댔다. 그가 최종적으로 원한 것은 바로 그리트의 그림이었는데 이는 그리트를 더욱 곤란하게 했다. 이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하고 어려운 부모님의 형편을 돕는 피터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에게도, 카타리나와 타네커에게도 허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처녀여성이 그것도 하녀가 그려진다는건 여러모로 곤란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그리트는 모델이 된다. 싫었지만 좋기도 했다. 사실 그리트는 얀 베르메르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얀 베르메르와 큰마님 역시 매우 곤란했으나 작업을 맡기로 한다. 돈은 현실적으로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림은 완성되나 뭔가 허전했다. 감각이 예민한 그리트 역시 이를 알았다. 빈 공간을 메울 무언가는 바로 베르메르의 아내 카타리나의 진주귀고리였다. 베르메르는 그리트에게 감히 자신의 아내의 진주귀고리를 착용할 것을 명한다.

 그리트는 거부하고 싶었으나 힘이 없었다. 하녀이기에 그를 사모하기에 그리고 그림을 보고 싶었기에 받아들여야 했다. 귀를 뚫는 과정도 아팠다. 자신의 적은 급여를 틀어 마취약을 샀고 바늘을 달궈 한쪽 귀를 뚫어냈다. 그런 그리트에게 베르메르는 매정하게 반대쪽 귀마저 뚫기를 지시한다. 반대쪽은 그림에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림은 그렇게 완성된다. 당시는 여성이 머리카락을 드러내는게 정숙치 못한 것으로 취급되어 그리트는 모자를 항상 썼지만 베르메르가 추천한 천을 머리에 터번처럼 둘렀다. 입을 열고 있는 것 또한 정숙치 못한 것이었으나 베르메르가 요구했다. 우수에 젖은 눈은 방금 생살을 뚤어낸 귀의 아픔일수도 복잡한 마음이 만들어낸걸수도 있었다.

 그렇게 그림은 완성되고  못된 아이 코넬리아의 고자질로 모든 것을 뒤늦게 알아낸 카타리나로 인해 그리트는 그집에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날은 피터가 그리트의 부모님께 청혼을 허락받으로 간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십년이 지나며 어느새 피터의 아내이자 푸줏간 안주인이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그리트에게 타네커가 찾아온다. 그리트의 몸에선 어느새 그토록 싫어하던 고기냄새가 떠날줄 몰랐고, 피터처럼 손톱 밑 사이로 핏물이 빠지질 않았다. 십년만에 찾은 저택에서 그리트는 베르메르가 죽었으며 자신에게 유언을 남긴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 진주귀고리의 상속이었다.  

 그리트는 그 진주귀고리를 갖고 고민한다. 피터의 아내이며 과거에 하녀였고, 고기집의 안주인은 그리트에게 귀고리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그리트는 귀고리를 처분한다. 그리고 받은 돈 20길더중 15길더는 남편 피터에게 주려한다. 베르메르의 집은 피터의 고깃집에 15길더의 외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5길더만이 그리트에게 남았고,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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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사피엔스의 식탁 : 인류가 선택한 9가지 식품 - 인류가 선택한 9가지 식품
문갑순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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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특질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특질은 바로 먹을거리다. 책은 인간의 먹을거리 변화가 얼마나 진화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고, 사회문화적으로도 인간 역사에 많은 작용을 하였으며 향후 환경에도 미칠 영향을 지적한다. 책은 그렇게 크게 3가지 부분으로 나눌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과학책 같기도 사회문화역사책인 것 같기도 환경책인것 같기도 하다.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역시 농경사회 더불어 인간이 선택한 9가지 종류의 먹거리인데 대충 예상한 것도 있었고, 전혀 의외의 것들도 있었다. 책이 선정한 9가지는 우선 [밀, 쌀, 옥수수], 감자, 콩, 소금, 향신료,  설탕, 생선, [커피, 차, 카카오], 바나나이다. 하나씩 책을 따라가며 기존에 먹기만 하던 식품들의 유래와 관련 지식, 세계사적 영향력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1. 밀, 쌀, 옥수수

 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경작하는 종으로 전분외에 단백질이 포함되어 물과 반죽하면 글루텐이란 망상조직을 생겨난다. 이걸 통해 우린 밀을 빵이나 국수로 가공해서 먹는다. 밀은 재배가 까다로운 편인데 토양에 질소량이 풍부하고 강수량이 적으며 한랭한 기후에 잘 자란다. 그리고 이러한 기후는 바로 지중해성 기후대다.

 하지만 밀은 파종 대비 수확량이 고작 3배에 불과하며 3대작물중 열량도 가장 낮아 인구부양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유럽지역은 과거부터 가축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았으며 낮은 인구밀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20세기들어 새로운 육종법의 개발로 수확량이 크게 늘어난다.

 쌀은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두 종이 있으며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작물중 최고다. 거기에 쌀은 기후에 따라 2모작이나 3모작이 가능해 밀과 비교한다면 인구부양력이 무려 3배에 달한다. 쌀의 주산지인 아시아가 땅의 넓이도 있지만 지금까지도 서구와 비교해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이유다. 쌀 역시 품종개발로 키가 작고 수확량이 많은 품종이 개발되었으며 우리나라의 통일벼도 그중 하나이다. 한때 통일벼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세계 최대에 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품종은 맛이 떨어져 수확량이 충분한 지금에는 사라지고 말았다.

 옥수수는 파종 대비 수확량이 무려 80배에 달하며 토질이 안좋아도 잘 자라는 품종이다. 미국에서 옥수수에 주목한 이래로 하이브리드 옥수수가 개발되어 잡종 1세대의 경우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라 장점만 나타나 수확량이 크게 증대되었다. 하지만 잡종 2세대는 열성형질이 드러나 수확량이 떨어져 잡종 1세대를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에 종자를 의존해야하는 단점이 드러난다.

 과거 아즈텍인들은 자신들을 옥수수 인간이라 칭할 정도로 옥수수 사랑이 대단했지만 지금은 전세계 사람들이 스스로를 옥수수 인간으로 칭해야 할 정도로 전세계인들은 옥수수에 의존하고 있다. 수퍼마켓에 분포한 4만 5천여 제품중 무려 25%가 옥수수를 원료로 하고 있을 정도다. 거기에 고기 수요 급증으로 인한 대량 비육을 위해 옥수수는 사료로 사용되고 있으며 옥수수 전분은 소시지나 과자 식품 전반에 사용된다. 가격이 싸고 잘 변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과거 설탕을 사용하던 당류도 이성화당의 개발로 고과당 옥수수 시럽으로 대체된지 오래다.

 

2. 감자

감자는 재배적응력이 높고 옥수수 정도의 파종 대비 수확량을 자랑한다. 거기에 조리가 쉽고, 재배 방법이 간편하며 영양성분이 우수하고 한랭한 기후에서도 잘 자란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신대륙에서 도입된 감자는 좀처럼 유럽에서 자리잡지 못했다.

 이유는 종교 때문인데 당시 기독교의 영향으로 유럽인들은 신과 가까운 하늘의 음식인 새고기가 과일을 중시하고 땅에서 자라는 것들은 악마의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자를 가지과 식물로 오인하여 마녀나 미신과 관련한 음식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감자에 주목한 유럽국가는 독일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감자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식용조치하였다. 이에 프랑스가, 그리고 다른 나라로 감자는 전파된다. 가장 극적인 나라는 아일랜드였는데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는 식량수탈로 먹을 것이 없었다. 영국인이 남긴건 유제품류 뿐이었는데 당시 기술로 영국으로 가기전 모두 썩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일랜드에 감자와유제품의 조합은 나쁘지 않았다.

 감자덕에 아일랜드의 인구는 820만까지 늘었으나 감자마름병으로 100만 이상의 아사가 일어났으며 인구는 440만까지 격감한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여러 음식이 퍼지는 계기가 되는데 감자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도시노동자에게 감자만한 식품이 없었고, 기름이 저렴해지며 감자를 튀겨먹는 풍습이 자리한다. 기존의 생선튀김과 어울려 피쉬앤 칩스가 탄생한 계기다.

 미국의 경우 유럽의 편견과 다르게 감자가 빨리 자리잡았으며 감자는 노동력을 적게 요구해 땅은 넓고 인구는 적은 미국에 매우 안성맞춤이었다. 미국은 감자를 품종개량해 러셀버뱅크종을 개발하는데 이는 분절감자로 튀김에 매우 적합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감자가 강원도 화전민들의 대체식량으로 들어왔으며 잘 부서지지 않는 점질감자인 수미감자가 다수를 차지한다.

 감자는 이외에도 당면의 재료, 비타민c의 원료, 술주정등 여전히 다방면에서 사랑받는다.

 

3. 콩

농경을 시작한 문화권은 곡류와 더불어 콩류를 같이 재배한다. 이는 콩류가 곡류의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하기 때문인데 콩류는 단백질이 무려 20%나 분포하고 대두의 경우 40%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는 콩의 뿌리에 자리한 뿌리혹 박테리아 덕에 질소고정으로 콩류가 단백질 형성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콩은 지방 역시 20%나 갖고 있어 콩기름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나머지 찌꺼기는 단백질이 풍부한 사료로 적합하다.

 콩은 한민족과 관련이 깊은데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각종문헌도 콩을 처음으로 활용하여 발효시킨 민족이 한민족임을 말해준다. 콩은 영양가가 매우 높지만 단백질 소화저하 혈청용해, 소화불량등의 부작용도 있는데 발효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또한 콩을 발효하면 콩단백질이 분해되어 글루탐산을 형성해 매력적인 갈색과 풍미가 더해져 음식맛을 드높인다.

 콩은 중국남부에서 동남아시아로 전해졌는데 이들은 콩간장에 캐러맬화한 야자당과 향신료 혹은 어장을 첨가하여 걸쭉하게 만들었고 이를 케첩이라 불렀다. 이것이 유럽에 전해져 유럽인들이 자신들이 활용가능한 버섯이나 토마토를 활용하여 나름의 소스를 만들어 토마토 케첩이 된 것이다.

 농업을 산업화하는데 천부적인 미국은 콩을 주목했다. 대규모 콩 가공공장을 설립하는데 이들은 콩 전체를 섭최하는 아시아와는 달리 콩에서 기름을 생산하고 잔류물을 사료로 사용하는 공정을 택했다. 또한 잡초가 많이 자라는 콩밭의 제초제로 라운드 업을 개발했고, 라운드 업에 견디는 유전자 조작 콩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4. 소금

수렵시절 인류는 육식을 통해 소금을 자연히 얻었지만 농경시 시작되며 소금의 확보는 필수적이 되었다. 실제로 세계 문명의 산지 근처에는 강과 더불어 소금산지가 있음을 이를 잘 증명한다.

나트륨은 고등동물의 세포 외액에 존재하고 칼륨이 내액에 존재한다. 이들간의 농도차로 신경세포의 전기신호가 전달되며 영양소흡수에도 관여한다. 나트륨이 부족하면 신경전달은 물론 영양전달이 안되고 근육을 움직일 수 없단 의미다.

 반면 움직임이 없는 식물을 나트륨이 필요없어 그 함량이 낮다. 인간이 소금을 찾아 헤메게 된 이유다. 과거 로마에서는 병사에게 급료로 소금을 지급했는데 소금을 뜻하는 살에서 샐러리란 용어가 파생한다.

 소금은 매우 귀했기에 국가의 번영과 관련했다. 5세기 아틸라의 훈족의 사육을 피해 베네치아에 지라잡은 이탈리아 인들은 도시의 소금을 이용해 번영한다. 지중해 연안은 겉보기에만 좋은 절벽이 가득해 소금생산에 매우 불리했다. 베네치아는 소금을 통한 무역으로 1000년가까이 번영한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국가차원에서 소금을 전매한다. 5세기까진 소금전매가 국가수입의 무려 80-90%였고, 청대에는 25%였다. 중국이 소금전매제를 폐지한건 최근인 2014년에 이르러서였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소금 수요는 커졌는데 중세 유럽의 주요 식량이 청어와 대구가 되면서 염장을 위해 소금수요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화학이 발달하며 소금은 그 활용도가 더욱 커졌지만 통조림의 등장과 냉동 냉장 기술의 발달, 건강에 대한 염려로 그 수요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

 

5. 생선

인류는 수렵채집기부터 육식을 시작했는데 가장 안전한 육식은 아무래도 생선이었다. 인간의 뇌에는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불포화지방산이 많은데 이는 인간이 오래도록 해산물을 섭취한 증거로 받아들여지기도한다.

 유럽이 기독교화되자 교황청은 교인들에게 엄격한 금육 금식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예수의 고행과 관련한다. 금육기간은 연간 무려 251일일까지 늘어났는데 예외로 생선은 허용되었다. 물고기는 예수의 이름과 비슷하고 성경에 여러차례 등장하는등 긍정적 이미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생선 수요에 비해 잡는 기술은 떨어져 초기에는 강과 양식업이 중시되었다. 여러 물고기를 양식했는데 특히 물밖에서 무려 6일이나 생존하는 뱀장어가 중시되었다. 하지만 결국 늘어나는 수요로 바다를 향하게 된 유럽인들은 청어를 잡기 시작한다. 청어는 떼로 몰려다녀 그야말로 대박 생선이었다.

 하지만 청어는 기름기가 많아 쉽게 부패하여 소금이 많이 필요했는데 네덜란드에서는 이 청어를 빠르게 가공하는 방법이 개발되어 네덜란드는 청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얻고 이를 통해 금융업, 목재업 분야로 진출하며 스페인에게 청어무역이 봉쇄당하자 향후 향신료를 찾아 눈을 돌린다.

 청어 이후 유럽인이 주목한 생선은 대구다. 크기가 무려 1m에 달하고 무게도 100kg에 달하여 식량가치가 높은 대구는 흰살생선에 단백질이 많아 영양가가 높았다. 거기에 유순하여 상대적으로 잡기가 쉬웠는데 이 큰 대구에 먼저 도전한 것은 바이킹이었다. 이들은 북유럽과 그린란드 아이슬란드에 대구 가공공장을 세웠다.

 다음은 스페인의 바스크인으로 천일제염이 많은 자신들의 지역 특성을 이용해 오래도록 대구어업으로 번영한다. 바스키인의 어장은 오랜 비밀이었는데 영국인들이 이 곳이 뉴펀들랜드 지역임을 알아내고 이로 인해 이 지역으로의 이주가 시작된다. 미국에는 대구어장을 통해 보스턴이 설립되고 뉴잉글랜드 인들은 좋은 대구는 유럽으로 판매하고 질이 나쁜 대구는 카리브해의 노예용으로 판매한다. 대구 판매로 카리브해에서 당밀을 수입하고 이를 통해 노예무역을 하는 삼각무역이 이루어져 번영하나 미국의 독립후 노예제가 폐지되어 수요가 급감하자 북미 대구어업을 큰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거대하게 성장하는 미국 내수시장의 성장으로 산업자본가화하는데 성공한다.

 

6.향신료

인류는 고귀한 향으로 인해 향신료를 신에게 봉헌물로 사용하곤 했다. 또다른 용도는 병의 치료였으며 다른 하나는 음식의 부패를 막고 산미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유럽은 향신료의 존재를 알게되고 대량으로 유립하게 된다. 당시 유럽인은 양질의 고기는 귀족이 하품을 일반 농민이 소비하였는데 일반 농민은 대개 훈제나 염장고기를 먹고, 부패가 심해 이를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향신료는 부패취를 감추고 맛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향신료는 가격이 매우 비쌌으며 소금 무역으로 자본을 축척한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대상으로 향신료 무역을 한다. 베네치아가 공급한 향신료는 유럽 전체 공급량의 80%에 달했다.

 반면 포르투갈은 직접 향신료 산지를 노렸다. 이들은 다우전투의 승리로 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정향과 육두구의 산지를 발견하고 실론섬의 계피도 차지한다. 포르투갈은 이로 번영하고 베네치아는 쇠퇴하나 곧 네덜란드가 등장한다. 이들은 포르투갈의 산지를 하나씩 빼았았다. 또한 포르투갈과는 달리 유통루트 차단을 넘어선 생산지 차단 관리에 들어간다. 이는플랜테이션 농업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고 세월이 훌러 다른 나라에 향신료가 유출되기 시작하며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져 향신료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과학의 발달로 약리효과도 사라지고 음식 본연의 맛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합성향신료도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7. 설탕

단맛에 대한 인간의 갈망한 상당한데 설탕이 없던 과거 북아프리카와 중동은 대추야자, 아시아에서는 엿기름, 그리스는 포도와 무화과가 감미료 역할을 해왔다.

 설탕은 사탕수수나 사탕무에 다량 존재하며 결정화가 쉽고 맛이 상쾌하다. 설탕은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확대함에 따라 지중해 전역으로 설탕정제술과 사탕수수가 퍼져나간다. 설탕 제조 방법은 강한 노동을 요구해 초기부터 노예노동이 시작되었다.

 사탕수수는 베어지자마자 옮겨져 수액의 추출과 가열이 시작되었는데 수액이 마르면 설탕의 수확과 결정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사탕수수는 크고 무거워 옮기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부를 강탈하고 노예공급을 시작하였는데 베냉지역에서 노예를 공급하다가 고갈되자 콩고지역으로 거기도 고갈되자 앙골라와 아프리카 전역으로 이루어지는 식이었다. 설탕재배는 콜럼버스에 의해 카리브해로 도입되었고, 지력 소모가 심해 섬을 자갈밭화하였다. 처음에는 자메이카, 다음은 아이티, 다음은 쿠바로 이동한다.

 유럽지역에서는 차마시는 문화가 퍼져나가며 설탕소비량이 급증한다. 홍차, 커피, 카카오등에 설탕이 사용되었으며 18세기 후반 영국이 서인도제도에서 벌어들인 설탕 관련 수입은 다른나라에서의 교역수입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처럼 유럽 각국에서는 설탕자본을 통해 거대자본이 등장하고 이들이 산업자본으로 변모하였다.

 이를 위해 18-19세기 동안 무려 1000만 가까운 아프리카 노예가 수입되었고, 이들은 이동과정에서 지그재그로 누워 서로의 토사와 용변, 땀으로 뒤범벅되어 죽어나갔다. 이동과정에서 20%가 사망했다. 설탕플랜테이션은 매우 가혹하여 3년이내에 50%의 노예가 사망했다. 흡착롤러에 손과 온몸이 들어가기 일쑤여서 흡착롤러 곁엔 항상 도끼가 있었다. 이들 노예들은 영굯산 면직물과 염장대구 옥수수로 연명했다.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노예해방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아이티가 프랑스러부터 독립을 시도한다. 성공하나 프랑스는 아이티에 대량의 배상을 요구했고, 프랑스와의 무역금지,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의 무역 봉쇄로 아이티를 탄생과 더불어 최빈국으로 전락한다. 미국은 노예제가 폐지되자 루이지애나의 설탕농업을 하와이로 이식하는데 노동력이 부족하자 쿨리라고 불리는 인도계약노동자를 도입한다.

 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불만을 제기하자 다음은 중국, 그리고 다음은 일본, 그리고 다음은 한국, 포르투갈, 필리핀 노동자순이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대륙이 봉쇄되자 사탕무에서 설탕을 정제하는 방법이 개발된다. 이를 통해 카리브해의 설탕농업은 붕괴하고 향후 아스파탐과 이성화당등의 개발로 설탕 농업은 사양화한다.

 

8. 차, 커피, 카카오

 신대륙에 도착하기전 전 유럽은 그야말로 술에 취해 살았다. 16세기 스웨덴인은 지금의 40배의 맥주를 마셨고, 영국은 1인당 하루 무려 3리터의 맥주를 마셨다. 이는 당시 염장음식이 많아 갈증이 심했고, 깨끗한 식수를 구하기 어려웠으며 힘든 현실의 도피처 역할을 술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대륙 도착이후 17세기 부터 커피와 차, 코코아가 이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커피는 예멘지역에서 재배되며 오스만 제국이 이를 통제했다. 초기엔 이슬람과 기독교 모두 악마의 음료로 배척했으나 점차 퍼져나가며 빈에서는 비엔나 커피가 영국에서는 커피하우스가 등장한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정치 비판과 학술의 장소가 되었으며 여기서 증권사나 은행, 보험사등의 근대적 기관이 탄생하기도 한다.

 차는 육로와 해로 양자로 퍼졌는데 육로에서는 차로 발음되고 해양에서는 푸젠어로 티로 알려진다. 영국은 쌀쌀한 날씨로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은 차가 인기가 좋았다. 중국과의 차무역에서 적자가 누적되자 영국은 인도에 심은 아편으로 이를 상쇄하였고, 이는 아편전쟁으로 이어진다.

 영국은 꾸준히 인도에 차를 이식하여 아삼지방에서 차나무를 재배하나 맛이 얼싸해 인기가 없었다. 그러다 중국의 차산지와 유사한 히말라야 인근의 다르즐링에서 차나무 재배에 성공하여 중국의 차 독점이 깨어진다.

 초기 미국인은 영국인들의 차습관을 모방하나 영국과의 갈등이 심해지고 보스턴 차사건으로 이어지자 홍차를 버리고 커피를 선택한다. 아메리카노의 시작이다.

 카카오는 다 익은 열매를 발효시키면 갈색으로 변하는데 이것을 건조한게 카카오 콩이고 볶아서 분말로 만든게 카카오페이스트며 여기서 카카오 버터를 제거한게 카카오 음료이고 카카오 버터와 설탕 우유를 첨가해 굳힌게 초콜릿이다.

 산업혁명시기 코코아 음료가 영국에서 인기가 드높았는데 카카오버터로 인해 맛이 기름지고 껄끄러웠다. 네덜란드인 콘라드 반 호템이 카카오 버터를 제거한 탈지카카오를 개발해 인기가 좋았으며 브리스틀의 프라이가 카카오버터를 곧힌 판형 초콜릿을 개발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스위스의 약제사 네슬레가 개발한 밀크초콜롯이 인가기 좋았고, 미국의 허시는 자신만의 밀크 초콜릿을 미국에서 개발한다. 그는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과 허쉬 키세스를 개발한다. 포레스트 마스는 아버지와 더불어 초코바 밀키웨이를 개발했으며 스니커즈를 만든다. 후에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아 허쉬의 윌레엄머리와 합작하여 만든 초콜릿이 M&M이다.

 카카오는 비극을 낳았는데 카카오 주산지인 아프리카 서부 지역의 나라가 독립하여 가나가 된다. 가나의 대통령은 아프리카 카카오 카르텔을 구성하여 이익을 챙기고자 했으나 허쉬와 다른 기업의 사재기에 밀려 실패한다. 이들의 가격 후려치기에 원주민들은 열대우림을 파괴하여 카카오 경작지를 늘려나가나 가뭄과 화재로 가나의 카카오는 붕괴한다. 카카오는 이웃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이동하는데 역시 원가후려치기에 이나라는 아동노예무역으로 원가절감에 대응한다.

 최근 이런 사태를 유발한 이 기업들에 철퇴가 내려지고 자정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9.바나나

마지막은 의외로 바나나다. 바나나는 우리에겐 과일이나 동아프리카와 열대지역 주민 4억명에겐 쌀과 같은 주식이다. 바나나는 보존성이 없어 냉장기술이나 포장법등 식품 유통기술의 발달에 기여한다.

 미국의 프레스턴이 최초로 바나나 기업인 UFC를 만들고 이것이 지금의 치키타이며 바카로는 Dole을 설립한다. 바나나는 주로 중남미에서 생산되었는데 이들 기업이 이를 독점하고 1920년대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적은 대가에 분개해 분쟁이 일어난다. 미국 정부는 이들 기업과 더불어 노동자 파업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1940-1950년대 콜롬비아에서만 무려 18만의 농민이 희생된다.

 과테말라에서는 ufc에 대항하여 아르벤스 대통령이 당선되나 미국과 이들 기업에 의해서 추방된다. 한편 이런 행태에 대한 세계적 비난과 미국내에서의 비판적 여론으로 미국 법무부는 태도를 바꾸어 이들 기업을 독점법으로 제재한다. 그 결과 UFC는 중남미에서는 철도사용권을 그리고 미국내에서는 수퍼 독점권을 잃는다. 그 사이 미국인의 입맛도 다변화하여 바나나의 수요가 급감해 이들 기업은 사양세를걷는다.

 바나나는 씨앗이 없는 품종으로 그 유전형질이 모두같다. 과거 그로미셸종이 사용되었으나 병으로 절멸하고 현재는 개번디시 종이 주 품종이다. 이 품종 역시 파나마 병에 취약하여 아직 병이 진행되고 있어 위험한 상태다.

 바나나에 의존하는 4억명의 사람들에게 큰 위기인 셈이다. 거기에 바나나는 아기에겐 이유식 그리고 이가 약한 노인도 먹을 수 있는 영양가 높은 과일이어서 고령화 시대에 적합한 작물이다. 우리가 바나나에 신경을 써야하는 또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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