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다트넬의 신작 '인간이 되다'가 출간했다. 전작 '오리진'을 워낙 감명 깊게 본지라 이번 저서도 적잖게 기대가 되었다. '인간이 되다'를 보며 알게 되었는데 루이스 다트넬은 인류 문명 3부작으로 이 책들을 진행했다고 한다. 첫 작은 '사피엔스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과학지식', 두번째가 오리진, 세 번째가 인간이 되다 순이다. 오리진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와 지구의 자연지리 환경의 변화가 인간의 진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물질, 환경, 지리면에 초점을 두었다면 '인간이 되다'는 인간 자체의 문화의 심리에 대해 중점을 두었다. 


1. 인간 이타성의 진화, 독재자의 출현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인간이 이기적이라 생각하지만 인간은 존재 자체가 협력적이다. 세포의 연합을 이루어 다세포 상태로 서로 분화하고 협력하여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고, 그 세포 안에서는 미토콘드리아와 같이 공생한는 상태며, 같이 한 몸이 아니어도 장속과 온몸에 세균과 소화 및 다른 여타과정에서 협력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사람과도 매우 협력적이며 타고나게 선하다. 이런 면을 강조한 책은 '협력의 유전자', '휴먼 카인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이다. 

 '인간이 되다'에서도 사람의 이런 협력적 진화를 강조한다. 인간의 협력을 위해서 두 가지 심리가 진화했다. 공격성의 감소, 유례없는 수준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성의 발달이다. 공격성은 반응성 공격성과 주도성 공격성이 있다. 반응성은 위협에 대응하는 본능 같은 것이며 주도성은 충동과 감정이 아닌 사전에 계획하는 공격이다. 인간은 전자는 크게 줄이고 후자는 더욱 정교화시켰다. 

 실제로 다른 영장류들은 제법 평화로운 보노보까지 쳐도 인간에 비해 물리적 공격빈도가 100배에 이른다. 서로 이렇게 공격적이니 협력이 될리 만무하다. 그래서 인간은 수렵사회에서도 대개 평등하고 독재적 알파나 서열 싸움이 거의 없다. 그리고 인간이 발전시킨 협력성과 도구는 압도적 독재자의 출현을 상당히 오랜 시간 견제했다. 인간은 서로 협력하여 2인자 및 다른 약한 무리가 협력하여 손쉽게 1인자를 제거한다. 또한 인간은 도구로 무기가 있기에 제법 강한 일인자더라도 멀리서 여럿이 원거리 무기를 사용해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에서 개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물리적 힘이 아닌 사회적 관계망에 힘과 관대함, 협조를 기반으로 쌓은 명성, 즉 평판이 되었다. 그래서 초기 수렵채집사회의 우두머리나 지도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항상 나누고 평판을 유지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하지만 농업의 발전과 초기 문명이 출현하면서 독재자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수렵사회에서는 음식의 저장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항상 이동했기에 저장하더라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매우 번거로웠다. 하지만 농경은 잉여생산물을 발생시켰고 양곡은 저장이 용이했다. 때문에 나누는 것보다 저장을 하고 축적과 배분에 관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세습을 하여 부가 축적되어 격차를 더욱 벌릴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특권층이 생겨나고 사회가 계급화되었다. 

 또한 금속기술의 발전이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과거 석기와 나무가 무기일 때는 누구나 무기의 재료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지만 청동과 철기는 귀했고, 제련에 특별한 기술과 시설이 필요했다. 부가 축적된 소수가 이것을 손에 넣는 것이 가능했고 그들이 이것을 자신을 보위할 사람들에게 무기로 만들어 무장시켜 군대로 조직할 수 있었다. 

 이타성의 발전은 상호이타성에서 시작한다. 상호이타성은 친족이 아닌, 즉 유전적 연관관계가 없는 개체들끼리 서로 돕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쥐가 굶주린 다른 박쥐를 위해 먹은 피를 게워서 전해주는 것이다. 호혜를 받은 박쥐는 이를 기억했다 다음 번에 반드시 돕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물과 수렵채집 수준의 인간은 잉여를 저장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에 다 먹지 못할 남는 것을 다른 개체에게 나눠주는 것이 다음번을 위한 보험수단이자 안전장치가 되었다.

 다음 단계는 간접적 호혜성이다. 사회가 커지면 내가 호혜를 베푼 개체를 기억하기도 다시 만나기도 어렵다. 때문에 간접적 호혜성은 내가 다른 개체를 돕고, 도움 받은 개체는 또 다른 개체를 도와서 사회 전체가 항상 다른 개체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체제의 구축이다. 이 경우 내가 도움 받을 만한 개체인지가 중요하다. 이것이 평판이다. 그리고 평판이 가능하려면 다른 사람에 의한 뒷담화와 목격이 필요하다. 또한 무임승차자나 사기꾼을 처벌하기 위한 이타적 처벌도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은 공정하지 못한 것, 사기에 대해 매우 불관용적이며 민감하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며 목격과 뒷담화에 의한 평판도 쉽지 않아졌다. 그 다음 단계가 종교적 계율이나 신, 성문법이다. 특히 성문법은 제도화된 평판 체계라 할 수 있다. 오늘 날에는 P2P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사람들은 다시금 낯선 사람들 간의 거래를 촉진하기 위한 평판제도를 리뷰 및 별점등으로 진행하고 있다. 


2. 감염병


 





 

 지구상의 수많은 미생물 중 인간을 감염시키는 것은 1128종이다. 50%가 세균, 20%는 바이러스, 10%는 균류와 기생성 원생동물이고 나머지 287종은 기생충이다. 병원성 미생물 중 60%는 인수감염능력이 있다. 인간은 농경을 시작하면서 같이 모여 살고, 가축을 키우게 되었는데 이는 감염병의 창궐과 발생을 불러왔다. 동물과 오랜 시간 같이 하다보니 동물의 감염병이 인수감염병으로 진화하였고 또 모여 살기에 더 잘 전파되었다. 

 감염병의 역사에는 인간을 대량으로 살상한 감염병의 역사가 잘 정리되어 있다. '농경의 배신'에서는 농경이 인간을 절멸시킨 하나의 원인으로 감염병의 창궐을 꼽았고, '한국인의 기원'에서는 지구 기후의 한랭하는 생산성과 영양상태를 악화시켜 감염병의 창궐로 사회를 붕괴시키고 이동을 촉진했음을 주장한다. 

 감염병 중 말리라이는 원래 사하라 이남의 풍토병이고 황열병은 아메리카의 토착병이다. 황열병은 초기 고열과 근육통, 두통, 간과 신장을 손상시켜서 치사율이 매우 높다. 감염병은 인간의 역사에서 생각보다 많이 다뤄지지 않지만 그 영향은 생각보다 절대적이다.

 미국은 영국과 독립전쟁을 하면서 초창기 매우 불리했다. 개전 2년간 승전이 없었을 정도다.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고 병력을 정예병이었다. 미국은 2년만인 1777년 10월 뉴욕주 새러토가에서 처음 승리했는데 이로 인해 전황이 뒤집협 유럽의 각국이 영국을 견제하고자 미국에 협력하면서 전세가 기울 수 있었다. 

 영국은 미 남부에서 고전했다. 미 남부는 아열대 기후로 말라리아와 황열병이 창궐하는 곳이다. 당시 말라리아 약인 기나나무 껍질이 알려져 있었지만 영국은 인도에서 이를 상당 수 소진했다. 반면 미국은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고, 이미 미 이민자들이 세대를 거치며 남부의 질병에 적응한 상태였다. 때문에 남부에서의 승리는 미국이 독립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다.

 히스파이올라 섬은 카리브해에서 쿠바 다음으로 큰 섬으로 지금의 아이티다. 프랑스가 여기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1775년 세계 커피의 50%, 설탕, 목화와 담배, 코코아, 인디고를 수출한 경제의 중심지였다. 열대의 고된 노동으로 50만의 흑인 노예를 유지했고 노예 손실도 많아 매년 3만을 보충해야 했다. 1791년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은 이에 불안을 느껴 2만 3천병력을 파병했으나 무려 60%가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노예출신 투생 투베르튀르가 생도맹그, 즉 아이티를 흑인 독립국가로 선포한다. 1802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경제의 중심지를 되찾고자 2만 5천 병사를 파병한다. 최정예인 이들은 지도자 투베르튀르를 생포하고 승기를 잡았으나 적들이 내륙으로 숨어 게릴라전을 펼치자 결국 감염병을 당해내지 못하고 1/3의 병력이 감염되고 많다. 이후 지속된 전쟁에서 프랑스는 무려 5만의 병력을 병으로 잃게 된다. 

 원래 나폴레옹은 아이티를 되찾고 이를 거점으로 경제력을 회복하여 루이지애나주를 경영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감염병으로 인해 실패함으로써 식민지를 정리하고 유럽의 경영에 전념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래서 신생국 미국에 루이지애나를 판매하게 된다. 여러모로 미국은 감염병에 상당히 신세지게 된 셈이다.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아프리카에 접근했고 침투하려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감염병이 워낙 드세 해안의 좁은 범위에만 거주했고 케이프타운 지역 정도에만 거주가 가능했다. 때문에 오랜 흑인 노예무역도 아프리카 자체 집단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세기들어 말라리아를 막는 키니네가 보급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키니네는 매우 써서 설탕을 탄 탄산수에 녹여 먹었는데 이것이 인디언 토닉 워터로 진토닉 칵테일의 근원이다. 1880년대에 이르러 네덜란드 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고품질의 열나무 껍질을 대량생산하면서 키니네의 가격이 크게 하락하였는데 이로 인해 아프리카의 전대륙 침탈 및 식민지화가 본격화하였다. 

 감염병의 확산에는 교역과 전쟁도 크게 한몫한다. 전쟁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병사들이 더럽게 비위생적인 곳에 모여 살았고, 영양상태와 부상으로 감염에 매우 취약한 상태가 된다. 이들은 또한 처음 보는 먼지역에 가서 감염병에 걸리고 전쟁 후에는 귀국하여 자기 지역에 이를 퍼뜨리게 된다. 항생제가 생기기전 대부분의 전쟁에서 전사자는 대개 전투보다는 감염병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1850년 크림 전쟁에서 영국군은 전투보다 이질과 발진티푸스로 사망한 병사가 1배나 더 많았다. 17세기 전반 신성로마제국의 30년 전쟁에서 군인 사상자는 50만이었는데 이중 66%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기원전 1000년 경 유라시아 문명들은 높은 인구 밀도와 교역망을 세웠는데 감염병도 같이 전파되었다. 아테네 역병이 그것이다. 로마의 전성기에 로마의 인구는 100만이었다. 하지만 165년 파르티아와 싸우던 로마군에 안토니우스 역병이 전파된다. 이 병은 잘 닦여진 로마의 도로와 교역로를 따라 전파되어 로마 인구의 10-30%를 죽게 만들었다. 249년 키프리아누스 역병이 에디오피아에서 발생한다. 이 역시 로마 전체에 퍼지게 되었고 로마 전체인구의 1/3인 500만이 사망하게 된다. 이 당시는 로마의 위기였고 대량 사망과 사회혼란으로 정치혼란과 금융시스템이 붕괴하고 기독교 전파의 결정적 계기기 된다.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제2의 전성기를 마련하고 로마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수복한다. 하지만 541년 가래톳 페스트가 창궐한다. 창궐 2년만에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의 인구 절반 가까이가 사망한다. 그리고 동로마 전지역에서 무려 2천만에서 5천만의 인구가 죽는다. 동로마 인구의 인구 격감으로 경제불안과 세수가 감소하였고 심지어 군인 봉급을 크게 삭감해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국방력의 약화로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으며 동로마와 라이벌인 사산조 페르시아가 감염병으로 쇠퇴한 틈을 마호메드의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1346년 흑해의 카파를 포위한 몽골군은 페스트로 죽인 시체를 투석기로 날리는 최초의 생물학전을 수행한다. 1347년 유럽 시칠리아에 페스트가 처음 도착하였고 피렌체 수민은 60%가 사망한다. 흑사병은 1353년까지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인구의 1/3에서 1/2를 사망하게 한다. 5천만에서 1억 수준인데 향후 인구회복에는 무려 200년이 걸리게 된다 .노동력의 급감으로 농민과 장인의 권한은 크게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중세봉건제가 붕괴한다. 땅값의 하락으로 농민은 땅을 구매하게 되었고 임금증가로 삶의 질이 개선되고 불평등이 감소하였다. 봉건제에서는 토지를 농민이 사용하는 대가로 노동력을 제공하였지만 흑사병 이후로는 임금노동과 지대지불의 현대적 형태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인구 감소로 인해 양곡에 여유가 생기면서 주식작물만 재배하던 것에서 다양한 농산물재배로 변화하게 된다. 또한 인구 부양을 위해 거의 모든 토지가 경작지였지만 목초지로 일부를 돌리는 것이 가능하였고 이는 모직산업을 발전시켜 영국의 경우 나라 자체를 크게 변화시키게 된다. 

 천연두는 아메라카 대륙을 절멸시켰다. 유럽인 토착 전 아메리카의 인구는 5500만에서 6천만으로 추정되지만 천연두의 창궐 이후인 1600년에는 500만 수준으로 줄어든다. 90%가 사망한 것이다. 추정이긴 하지만 이런 아메리카 토착민의 절멸로 인해 대륙의 경작지 상당수가 초지로 돌아가 대기중의 이산화 탄소 흡수가 증가하고 이로 인해 온실효과가 낮아져 17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소빙기가 도래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1918년 미국 캔자스 주의 한 육군 병원에서 스페인 독감이 처음 보고 된다. 일반 독감의 10배 치명률이었고 사망W곡선을 보여 20-40대에게도 병이 치명적이었다. 면역계에 과잉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독감 팬데믹은 당시 세계인구의 1/3인 5억명을 감염시켰고 이중 5천만에서 1억이 사망했다. 1차 대전 당시 독일 군은 서부와 동부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동부전선의 병력을 서부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독일에 독감이 퍼져 상당수 병력이 감염되어 전투를 원활히 수행할 수 없었다. 감염병이 패퇴의 한 원인인 셈이다. 인도도 스페인 독감으로 무려 1200만에서 1800만이 사망한다. 당시 1차 대전 중이라 영국은 인도의 병력과 식량을 모두 동원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영양 불량을 일으켜 감염병을 더욱 확대시켰다. 전후 인도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항의하고 자치권을 얻어내려 했으나 영국은 이를 거부한다 .1919년 인도 내에 대대적인 사회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향후 인도 독립의 원천이 된다. 


3. 인구의 힘








 인구는 고대 전쟁에서 절대적 요인이다. 전쟁을 위한 보급, 물자의 보충에 인구는 절대적이다. 특히 현대전에서는 총력전이 이뤄지기에 대규모 징집과 군수공장의 운영에 전 국민이 동원된다. 때문에 책 '인구의 힘'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인구의 힘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구는 수요로 작용하기에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발전을 과학기술의 발달로만 생각하지만 경제성장을 급격이 이뤄낸 모든 나라들은 그것이 인구성장과 더불어 같이 상승작용을 일으켰고 인구가 감소하거나 쇠퇴하는 곳들은 경제적 활력이 크게 줄어든다. 

 프랑스는 1803-1812년 나폴레옹 전쟁기간 100만이 사망한다. 이런 사회적 혼란으로 출산율이 크게 감소하는데 그래서 산업혁명 당시 다른 유럽 경쟁국들이 인구가 크게 증가했음에도 프랑스는 인구가 정체한다. 원래 중세까지 프랑스는 유럽의 최강국이었고 여기엔 인구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프랑스 인구는 유럽 인구의 25%를 차지했다. 나폴레옹때도 2800만으로 러시아 다음이었고 독일보다 10%많았고 영국보단 2배나 많았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유럽 인구가 2배 증가하는 동안 프랑스는 고작 40%증가에 그친다. 19세기 말 프랑스 인구는 4천만에 머무는데 영국은 그 사이 4배증가하여 인구에서 프랑스를 추월했고 독일은 5600만에 이른다. 결국 인구에서 뒤진 독일은 비스마르크에 패배하고 이후 독일과 영국에 계속 열세를 보이게 된다. 프랑스의 인구 정체는 나폴레옹 전쟁기도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장자상속제를 폐지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가정은 재산의 보존을 위해 자녀의 수를 줄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니었으며 산업혁명의 여파로 인구가 크게 증가했을지도 모른다. 

 1차 대전도 사실상 인구싸움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 헝가리오스트리아제국, 오스만 제국은 2500만의 군대를 동원했지만 상대방인 연합국은 3800만명을 동원했다. 

 소련은 2차 대전에서 2600-2700만의 인구를 상실했다. 때문에 제2의 인구대국에서 2차 대전 후 젊은 남자의 부족으로 출산율이 급감한다. 러시아는 2차 대전의 영향으로 인구 부양비가 요동쳤다. 1990년 중후반에서 2000년 초반 러시아는 경기가 매우 좋았는데 이는 유가상승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 인구구조로 인해 인구부양비가 급격히 적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이제 2030년까지 인구는 급감하면서 인구부양비가 크게 증가할 예정이다. 소련은 전쟁으로 성비도 붕괴했다. 2차 대전후 성비는 0.64였는데 이로 인해 기혼 여성수가 급감하고, 이혼율은 증가했으며 나이 차가 많은 부부가 증가하고, 혼외 자녀도 늘어났다. 러시아의 성비는 이때의 여파로 지금도 0.87에 불과하다. 여성과잉으로 이혼과 혼외출산, 혼전 성관계가 지금도 많다. 

 16-19세기 대서양으로 끌려간 아프라키인은 무려 1250만에 달한다. 이 중 무려 200만에 몇달에 걸친 고된 항해로 인해 사망한다. 그외 사하라 종단 무역, 홍해 노예무역, 인도양 노예 무역으로 600만이 추가로 유출되었다. 그래서 사하라 이남의 인구는 19세기 5천만에 그쳤는데 노예 무역으로 인한 인구유출이 아니었다면 1억 정도의 인구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예상인은 남성 노예를 선호했다. 그래서 1.8:1정도의 성비로 노예를 팔아넘겼다. 그래서 사하라 이남은 장기가 남성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전통적인 남성일을 여성이 하는 경우도 많았다. 때문에 이런 남성 유출지역들은 지금도 성평등적 문화를 갖고 있다. 그리고 남성이 부족하다보니 일부 다처제가 성행하고 있으며 이는 성병의 확산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서아프리카는 에이즈 감염률이 높게 나타난다. 언급한 것처럼 풍토병으로 노예의 공급과 수급을 유럽인이 담당하지 않고 현지 부족들을 이용했다. 그렇다보니 수백년간 서로 간의 신뢰가 끊어졌고 불신의 문화가 팽배해졌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진출하지 못한 지역에 제도와 사회적 기반 시설을 건설하지 않았는데 이런 것들이 아프리카 지역의 미발전의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이 독립하기 이전 영국은 미국으로 매년 죄수를 2천명 씩 보냈다. 그것이 교도소에 보내는 것보다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독립으로 곤란해지자 호주로 선회한다. 1868년까지 15만 7천명의 재소자를 보냈는데 당연히 84%가 남성이었다. 때문에 호주에 초기 심각한 성비불균형이 일어난다. 


4. 중독 물질들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진화하였고 이런 행위를 할 때마다 특정 호르몬이 만족감을 주는 보상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자연계의 특정 물질들은 그것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보상호르몬을 강력하게 불러일으켜 생존과 역행하는 행동임에도 인간은 이를 강하게 추정하게 되었다. 이런 물질들을 중독물질이라 부르며 이는 상당한 경제규모를 형성했고 인간 역사를 움직였다.

 먼저 알코올이다. 알코올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기에 재료가 다를 뿐이지 인간 문명에 보편적이다. 알코올은 수인성 전염병을 일이크닌 미생물을 죽이기에 안전한 수분 섭취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알코올은 인간의 전전두엽을 억제하여 제어 기능이 느슨해져 긴장이 풀리고 불안감이, 자의식이 적어져 사람을 외향적으로 변화시킨다. 

 인간은 알코올 탈수소 효소를 사용해 알코올을 분해하는데 다른 영장류보다 40배나 강력하다. 영장류는 오래도록 알코올 분해효소를 진화시켰는데 아마 떨어진 과일이 자연 발효된 것을 먹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효모균은 양조 과정에서 당을 분해하여 에탄올로 바꾸는데 너무 높은 알코올 농도로 인해 더 이상 성장 못할 때 까지 성장하고 이 한계가 14도다. 하지만 인간은 증류를 통해 이 농도를 넘어선다. 에탄올은 끓는 점이 78도에 불과해 술을 끓이면 에탄올이 먼저 증발하고 이를 냉각시키면 고농도의 술이 되는 것이다. 증류주는 고농도의 알코올이기에 쉽게 변질되지 않아 먼거리 수송이 가능했다 .

 럼은 16세기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인이 사탕수수 즙으로 만들었다. 17세기 중엽 영국인이 바베이도스에서 설탕 재료의 부산물인 당밀로 제조하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래서 럼은 가격이 싸면서 농도가 높아 보존이 오래되어 대서양 무역의 한축을 담당하게 된다. 돈 대신 아프리카에서 럼을 주고 노예를 구입하고 그 노예를 사탕수수 농장으로 보내어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부산물로 럼을 생산해서 다시 노예를 사오는 방식이다. 

 카페인도 인간을 중독시킨다. 세계 인구의 90%는 카페인을 섭취한다. 카페인은 커피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가공식품과 음식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커피는 튀프키예의 카흐베이서 유래한 말이다. 이탈리아로 퍼져 카페란 말이 영어의 커피가 되었다. 유럽에서 초기 커피하우스는 토론과 계몽사상의 전파에 이바지한다. 

 차와 커피에 대한 열정은 장거리 해상 교역을 촉진한다. 18세기 초까지 유럽의 커피는 모두 예멘의 것이었으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인도 제도의 식민지들에게 커피를 재배하는데 성공해 암스테르담이 커피의 수도가 된다. 이후 생도맹그에서 프랑스가 커피를 재배한다. 하지만 아이티 독립으로 농장이 황폐화하자 다음 농장은 브라질이 된다. 19세기 브라질의 커피 생산은 1822년 독립한 이후로 무려 75배나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커피는 사치품에서 대중화하게 된다.

 차는 네덜란드가 커피를 장악했기에 영국이 집중했다. 영국은 국제무역에서 잘 손상되지 않는 발효되고 산화한 홍차를 거래했다. 그리고 여기에 설탕과 우유를 들이부어 지금의 밀크티를 만들어낸다. 차도 대량생산과 수입으로 대중화한다. 영국은 중국이 차 생산을 독점하자 차나무를 빼돌려 인도 아삼 지역에서 재배하기 시작한다 .

 차는 미국의 독립과도 관련한다. 식민지 미국은 차를 수입했는데 밀거래로 네덜란드 산은 싸게 수입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동인도 회사에 차 재고가 쌓이게 되자 영국의회가 차조례를 통과시킨다. 중국에서 아메리카로 차를 직접 수출하게 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를 세금 전가로 파악하여 분노하였고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난다. 영국은 메사추세츠주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보스턴항을 폐쇠하고 이로 인해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난다. 

 세계 인구는 매년 800만이 사망한다. 이중 15%가 흡연으로 인해 사망한다. 이게 다 유럽인이 아메리카에서 담배를 들여온 후 전 세계로 퍼뜨린 까닭이다. 영국은 담배 농장을 시도하였는데 이것이 미국의 정착으로 이어졌다. 담배는 환금 작물이었는데 이로 인해 식민지 미국이 자급 농업 경제에서 상업 농업 경제로 이행하게 된다. 상업이 성장하자 더 많은 이주민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담배는 지력을 심하게 고갈시킨다. 동부해안에서 점차 서부로 경작지를 옮길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토착민과의 갈등이 일어났고 미국은 점차 서부로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담배는 고도의 노동집약 농업이다. 노동력이 부족했고 당연히 이를 노예 무역을 더욱 확장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실 책 '중독의 시대'에 나온 것처럼 담배는 중독물질로 해악시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유럽에서 팽배하였다. 하지만 1차 2차 대전에서 연합국 측은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궐련 형태의 담배를 제공하였고 대부분이 이에 중독되어 담배가 사회적으로 해악이라는 분위기는 크게 희석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중독물질은 아니지만 레몬주스 부분을 정리한다. 18세기까지 유럽의 장거리 항해와 해군의 고질병은 괴혈병이었다. 비타민 부족으로 생기는 이 병의 해결방안으로 영국은 레몬주스를 고안해내었고 이런 해군의 강력함은 영국이 해상을 제패하고 나폴레옹을 패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레몬은 엉뚱하게도 시칠리아 마피아를 낳았다.

 영국의 해군 본부는 1795-1814년까지 레몬주스는 730만 리터나 수입하였는데 이 대부분이 감귤류의 주산지 이탈리아 시칠리아 산이었다. 시칠리아는 당시만 해도 유럽 본토에 비해 매우 낙후하였고 심지어 19세기까지 봉건제가 유지되었다. 갑작스런 부의 유입으로 시칠리아는 근대적인 상업행정, 사법, 치안 제도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치안 부재로 각종 감귤 농장이 도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농장주들이 생각한 방법은 토착 폭력배를 고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주객이 전도되어 폭력배들은 오히려 강제로 보호받는 것을 강제하게 되었고 이를 명목으로 막대한 보호비를 뜯어내게 되었다. 마피아는 이렇게 시칠리아에서 성장해 이탈리아 본토의 정계, 재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가난한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은 대거 미국으로 이민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마피아도 같이 가서 미국 영화 대부의 주인공들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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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의 최소한의 경제 토픽 - 달라진 세계를 이해하는 21세기 경제사 수업
홍춘욱 지음 / 리더스북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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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이 최소한의 경제토픽인 만큼 현재 세계 경제의 주요 흐름만 잘 짚어준다. 쉽고 막판 요약정리도 훌륭하다. 쉽다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기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바쁜 사람들을 위해 여러모로 잘 정리한 책이다. 

 중국은 세계 경제의 일원이었다. 미국을 포함한 많은 선진국들이 그들이 어느 순간 자본주의와 민주주주의에 편승할 것이라 보았지만 그들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도광양회로 속내를 숨기다 본색을 드러낸 것은 2008 베이징 올림픽이다. 1위를 했고, 성장한 국력을 과시했다. 특히 2008 경제 위기에 미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더욱 자신감을 얻은 듯 하다. 중국은 이후 10년간 미국과의 대결을 위해 일대일로에 무려 2400억 달러 이상을 퍼부었다.

 육로와 해로의 일부를 개척하긴 했지만 문제도 있었다. 우선 공급과잉이다. 지속적인 투자로 생산능력을 올리다보니 중국내 만성적 디플레이션이 형성되었다. 미중갈등 이전엔 세계 다른 나라로 물량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것도 어려우며 관세장벽에 부딪혔고 반감도 크게 사고 있다. 둘째는 정부의 효울성의 감소다. 경제개발 초창기 개발하는 곳곳 성공했지만 경제가 성숙해지며 옥석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아졌다. 일당독재 국가에서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중국은 2020년 이후 경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이 무너졌는데 이 영역은 GDP의 20% 고용의 30%를 담당했다. 그렇다보니 청년의 실업률이 21.3%에 달했다. 중국은 노동자가 학력이 낮다는 문제가 있다. 학구열이 강한 나라지만 그것은 지금의 이야기이며 1950-60년대의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며 당시 4500만이 아사했다. 이후 출생률이 반등해 1962-1975년까지 4억명의 베이비붐세대가 탄생했고 이들이 중국 경제성장의 주역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려운 시기에 출생하여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중국의 고졸 노동자가 겨우 28.8%에 불과한 이유다. 이들은 지금의 정보혁명에 적응이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양극화다. 중국은 호구제로 인해 농민공이 생겨났다. 농민들이 호구가 농촌임에도 도시 지역의 일자리를 위해 도시에 몰래 사는 것이 농민공인데 그렇다보니 자신들과 그 자식들이 국가가 제공하는 기본 의료, 교육, 복지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 여기에 도시민들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며 해안가의 주택가들을 넘겼는데 이를 통해 거액의 부를 챙길 수 있었다. 현재 농촌과 도시 지역의 소득차는 2.3배정도다. 

 중국의 또 다른 문제는 저출산이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2800달러 수준이지만 벌써 출산율이 1.1명까지 떨어졌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 경제는 고유가로 인해 21세기 초반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크름반도 침공으로 경제제재를 당하며 경제고 곧두박질 쳤는데 그럼에도 푸틴은 전쟁을 택했다. 결과는 참당하다. 20만의 젊은이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20만은 카자흐로, 7만은 조지아로 6만 6천은 유럽연합으로 징집을 피해 떠났다. 러시아는 인구가 점차 감소중인데 이번의 전쟁으로 인해 젊은 층이 대거 감소하여 그 여파가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미국처럼 제조업이 붕괴했다. 소련 시절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었는데 70년대 1차 석유파동으로 고유가의 단맛을 보며 에너지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로 전화되기 시작했다. 원유를 팔다보니 달러가 유입되어 환율이 상승해 제조업 부분의 수출경쟁력은 더욱 악화했다. 

 저자는 푸틴의 이번 전쟁이 마지막 발악이라고 보고 있다. 제조업의 붕괴로 더 이상 첨단 무기를 만들기 어렵고,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보이기에 군사적 확장을 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독일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잘 나가다 몰락했다. 독일은 메르켈 때 원전을 없애고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택했다. 그리고 과도기로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했다. 에너지 가격이 저렴해 수출에 도움이 크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공급이 끊겨 에너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독일은 중국 의존도가 크다. 독일의 실물 및 금융 수출의 10%가 중국이다. 하지만 2015년 디젤게이트로 전기차로의 전환이 늦어졌고, 코로나 19로 중국의 내수가 침체하며 타격을 입었다. 

 독일은 최근 정치상황이 심각하다. 극우정당인 AfD가 득세하고 있다. 이들은 남유럽 구제금융에 반대하며 생겨났고 최근 동독 지역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으며 세력이 커졌다. 반면 기존 사민당은 지지율이 하락했는데 이민정책에 관대하여 기존의 지지세력은 노동조합의 이탈이 뼈아프다.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파운드와 가치가 30%나 하락했다. 영국은 지난 20년간 총요소생산성이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영구은 금융과 석유, 바이오가 강세인데 석유는 떨어지는 해이고, 바이오는 비만 치료제 부분에서 약점이 있어 미래가 어둡다. 파운드화의 약세로 인플레이션이 심한데 브렉시트로 인하여 6%의 경제성장 손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다 죽어가던 경제가 아베노믹스로 크게 살아났다. 아베노믹스는 양적오나화, 대규모 재정정책, 민간중심 경제성장이다. 양적완화의 이점은 컸다. 우선 엔저 현상이 발생해 수출경쟁력이 생겼고 앤캐리 트레이드가 세계적으로 발생했다. 둘째는 금융기관의 경영수지 개선이다. 일본은행이 자금을 확보해 이를 일본 국채와 증시에 투자했다. 그 결과 일본 닛케이 지수가 4배나 상승했다. 마지막은 금리하락이다. 이로 인해 주택 구매 부담이 낮아져 주택 구매 수요가 늘었고, 채권 보유자는 가격 상승으로 차익을 거두었고 일본 국채를 보유한 국내 금융기관들의 재무구조가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어둡다. 이 나라는 48년 건국 이후 계속 전쟁 중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교를 신봉하나 크게 4집단으로 나뉜다. 근본주의자인 하레디는 종교적 가치를 우선시하여 고대 경전 토라를 공부하고, 직장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다티는 하레디와 세속주의 유대인의 중간 성격이나 우파적 성향이 강하다. 마소드티는 다티보다 조금 더 개방적이다. 세큘라는 세속주의 유대인으로 이들은 유대교를 믿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사실상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집단이다. 문제는 하레디의 출산율이 무려 6.6명인데 비해 세큘라는 2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사실상 무임승차 집단임에도 하레디의 정치적 발언권이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이스라엘은 남자는 30개월 여자는 24개월 의무 군복무를 한다. 그런데 임신 및 출산하거나 육아중이면 면제가 되고, 종교학교 예시바에서 토라를 공부하는 학생도 면제가 된다. 이렇다보니 대부분의 하레디가 면제가 된다. 2012년 이스라엘 대법원이 하레디의 병역 특례를 위헌 결정하였지만 하레디는 인구 12%임에도 종교정당에 지지를 몰빵하고 분열된 정국에서 줄타기를 잘 하여 아직까지 병역을 유예받고 있다. 

 하레디는 군복무는 하지 않으면서도 주변 아랍민족들에게 대해 매우 강경하다. 미국의 유대인은 대부분 중부유럽 출신의 아슈게나트인데 하레디는 중동과 남부 유럽출신이다.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과 정책이 예전 같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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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랜드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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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6년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거의 200여년 만에 다시 두 개로 쪼개진다. 하나는 서부와 동부 해안지대를 차지한 연방공화국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플라이오버 스테이트들을 장악한 공화국연맹이다.  

 연방공화국은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추구한다. 그들은 지금의 민주당 계열로 사회보장을 추구하고 모든 차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부해안과 동부해안의 주들이 편입되었고 히스팩닉과 흑인등 유색인종의 70%이상이 연방공화국을 택했다. 하지만 연방공화국은 공화국연맹의 테러와 공격에 대응한다는 이유로 모든 시민에게 심어놓은 생체칩을 통해 그들의 행동과 모든 대화를 실시간으로 감시한다. 자유를 위해 자유를 억제하는 셈이다. 연방공화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실패가 사실상 경제적 불평등에서 왔음을 인지하고 모든 기업의 매출 5%를 세금으로 걷어 그것을 사회 복지에 사용한다. 때문에 사회는 매우 안정되었고 범죄가 거의 사라졌다.

 공화국 연맹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이다. 국가의 지배자는 사실상 12사도라 불리는 인물들이다. 모든 시민은 기독교를 믿어야 하고, 결혼과 분리된 섹스는 불법이다. 낙태도 금지되고 있으며 오직 남과 여 두 개의 성만이 허용된다. 유색인종은 사실상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연방과의 체제경쟁을 위해 자신들이 더 자유롭다고 선전하며 실제로 그렇다. 이들은 중심 계율에선 상당히 엄격하나 그 외의 것에서는 의외로 자유로우며 국민을 실시간으로 감시하지도 않는다.

 미국이 갈라진 근본 원인의 시작은 레이건 때 시도된 신자유주의의 시도다. 미국 사회를 지탱해오던 거의 모든 사회보장책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한 제조업의 해외 이전으로 백인 중산층이 일자리를 잃고 그들의 거주지역이 별 볼일 없는 플라이오버 스테이트가 되어 버렸다. 트럼프의 재선은 이렇게 벌어진 사회에 더 큰 균열을 내고 실질적인 분열의 시작이 되었다. 바이든 이후 계속 공화당이 집권하고 그들이 상하원을 장악한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대법관은 모두 보수 인사로 가득해져 공화당에 유리한 선거구를 짰기에 민주당은 계속 패배한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등 국제적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과정에서 클리블랜드에서 대규모 테러가 일어난다. 극단주의자들이 기관소총으로 무장하며 수천명을 학살한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미국은 분열한다. 유명한 기업의 CEO 채드윅은 군대를 포섭하여 공화당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미국의 분열을 주도한다. 각 주는 투표를 통해 연방공화국이 될지, 공화국연맹이 될지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주가 원치 않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수십만에서 수백만의 사람이 이주해야 했다. 이주 과정은 과거 인도 파키스탄 분리때처럼 대혼란이었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이동과정에서의 폭력으로 사망한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배경인데 사실 이 내용자체가 소설보다 더 재밌었다. 소설은 연방공화국은 정보국 요원 샘스텐글에게서 시작한다. 그는 막심이라는 요원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 막심은 트랜스젠더로 신성모독을 하다 공화국연맹에 납치되어 화형당한다. 놀랍게도 공화국 연맹은 이를 생중계하며 이런 화형영상을 다른 나라에 팔아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다.

 샘스텐글에게는 작전이 떨어지는데 놀랍게도 자신의 이복동생인 케이틀린 스텐글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지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샘스텐글은 자신에게 이복동생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었다. 작전의 수행을 위해 샘 스텐글을 성형까지 해가며 신분 세탁을 하고 중립지대인 미네소타의 한 도시로 향한다.

 이 부분도 재밌는 상황인데 주 전체가 한 진영을 택한 다른 주들과 달리 미네소타 주는 반으로 쪼개져 갈라졌고 그러다보니 마치 냉전시대 베를린처럼 양 진영이 모두 소유하여 갖는 중립지대 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샘스텐글은 정확히 이 중립지대로 파견되어 작전을 실행하게 되며 그 결말까지가 소설의 내용이다. 

 전 세계적으로 신 자유주의가 경제적 피폐를 낳고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중산층들이 일자리를 잃어 그 생계가 위협받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국제사회 및 민주주의가 해결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분노늘 파고든 극단주의 포퓰리즘 집단이 정치적 지형을 넓히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비단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 유럽에도 해당이 된다. 디지털 플랫폼은 민주적 융합과 토론의 장을 마련하기는 커녕 잘못된 정보와 주장도 마구잡이로 나르며 오히려 갈등의 골을 키우고 있다.

 때문에 이런 소설이 나온 것이다. 소설의 배경을 한국에 대응해도 지금 상황에선 전혀 이상하지 않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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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낱이 파헤치는 여론조사의 모든 것
마크 팩 지음, 김문주 옮김 / 이사빛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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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나, 각종 시사프로그램에서 여론조사는 항상 주요 소재거리다. 여론조사는 현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뉴스거리가 되기도 하고 시국을 이끌기도 한다. 최근 탄핵된 대통령의 여당의 지지율이 크게 오른 여론조사가 나왔는데 이걸로 인해 정국이 요동친게 그 예다. 직관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많은 설왕설래가 언론에서 있었다. 

 여론조사는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건국 초기 개별적인 주 의회에서 그 주의 전국 선거인단을 선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선거인단의 구성을 일반국민의 투표로 선발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1800년 미 16개 주에서 겨우 5개 주만 일반투표를 했지만 1824년엔 24개 주에서 18개 주가 1836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한 개 주만 일반투표를 하지 않을 정도로 일반화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중의 다수 생각을 미리 아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되었고 이것이 여론조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초기 여론 조사는 주먹구구였다. 독립기념을 같은 다양한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누구를 지지 하는지 물었고, 공공장소에 책을 두고 거기에 지지하는 후보를 쓰게 하기도 했다. 한편 민병대 소집일에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런 엄격한 통계적 표본추출이 없는 것을 밀짚조사라 한다. 밀짚마냥 바람 가는데로 영향을 받는다는 비유에서다.

 20세기 들어 미국에서 전국지인 리터러시 다이제스트가 현대적인 여론 조사를 수립한다. 이들은 1930년대 금주령에 대해 5백만명에게 설문조사를 하였고 1916년에서 1932년의 5번의 대선 결과를 성공적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여전히 밀짚 여론조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이제스트는 1936년 대선에서 무려 천만명에게 편지를 송부했고 이중 220만에게 답신을 받았다. 결과는 57:43으로 공화당 후보의 승리가 점쳐졌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터무니 없게 달랐다. 무려 39:61로 민주당 루스벨트가 승리한 것이다. 이는 엄청난 실패였다. 답신 수가 상당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당시 잡지가 부유층 위주로 조사를 했고 당연히 부유층은 공화당 지지자가 많았다. 또한 공화당 지지자 측이 당시 더 적극적으로 답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터러시 다이제스트와는 다르게 겨우 5만개의 조사로 예측에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조지 갤럽이다. 그는 응답자 수보다는 대표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 성공으로 1935년 미여론연구소를 설립했고 이것이 지금도 존재하는 갤럽이 된다. 갤럽이라는 이름은 전세계로 퍼져 여론 조사 기관의 대표처럼 느껴진다. 조지 갤럽은 1940년과 1944년의 대선도 정확히 예측한다. 1948년에는 예측에 실패해 여론조사 업계가 잠시 위축되었지만 그야말로 잠시 뿐이었다. 

 현대 여론 조사에는 두 가지 필수 기법이 있다. 하나는 표본 추출이다. 전체 인구를 대표할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을 정확히 선발하는 것이다. 표본이 올바르기만 하다면 표본의 크기는 많지 않아도 된다. 다음은 가중법이다. 표본은 절대로 완벽하게 설정되지 않기에 그것의 보완을 위해 결과를 보정하는 것이다. 

 표본을 무작위로 확보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할당이다. 성별이나 나이, 직업 등을 기준으로 정하고 그에 해당하는 수가 응답할 때까지 여론 조사를 실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할당을 채우는 과정에서 다른 편향이 개입할 수 있다. 가령 여론 조사는 비용절감과 정확성을 위해 특정 시간 안에 행해져야 하는데 조사원이 이를 하기 위해 일부로 사람이 많은 곳이나 한가해 보이는 사람들만을 찾는다면 그 행위 자체가 특정 집단에 편향된 표본을 구성하게 된다. 

 여론 조사에는 4가지 방법이 있다. 대면조사, 우편조사, 전화조사, 온라인 조사다. 대면조사는 오랜 과거의 것이고 우편조사가 20세기 초만해도 많이 시행되었다. 다만 우편 조사는 편지를 송부하고 수신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오래 소요되며 그 사이 사람들의 심리와 정치적 상황이 변화되는 것을 감지못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전화조사는 즉각적인 조사가 가능하며 사람들의 지역 및 떨어진 거리와 무관한 조사가 가능하여 소위 무작위 조사가 가능하다. 다만 전화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로 인해 역시 편향될 가능성이 있다. 온라인 조사는 무작위성이 가장 커질 수 있다. 비용도 저렵하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지만 전화처럼 온라인 조사도 실제 클릭하여 참여하는 의지가 필요하며, 인터넷 접근성도 하나의 제약이자 편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공개 여론 조사를 실시해버리면 특정 집단이나 사람들이 마음먹고 대거 참여해 여론을 크게 오염시킬 여지도 있다. 다만 인터넷 조사는 성문제 같은 논쟁적 주제에 대해 사람들의 비교적 솔직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론조사가 잘못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시기가 잘못되는 경우다. 둘째는 대표성과 아주 거리가 먼 표본이 추출 된 경우, 셋째는 표본이 체계적 결함이 있는 경우다. 가령 과거 표본에서 가구원 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4인 가족과 1인 가족 간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경우 이는 중요한 변인이 된다. 시대변화에 따른 이 변화를 잡아내지 못한 표본은 체계적 문제가 된다. 넷째는 무응답 편향이다. 응답이 없었던 사람도 새로운 후보나 정치적 상황이 등장하면 강하게 지지성향이 드러날 수 있으며 대개 자기 편이 유리하면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그렇지 않으면 응답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다섯 번째는 표현법이 잘못된 경우다. 실제로 질문은 단순이 앞뒤가 바뀌거나 맥락이 들어가서 같은 질문임에도 상당히 다른 결과가 도출 될 수 있다. 여섯 번째는 승자를 잘못 예측하는 경우다. 여론 조사에서 높게 나오더라도 자신의 지지층이 실제 투표장에 나가지 않는 것을 고려치 못한다면 패배할 수 있다. 또한 미국처럼 선거인단으로 대선승자가 결정된다면 지지율이 높아도 경합주에서 패배해 선거인단에서 져서 낙선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사례는 두 번이나 있었다. 

 패널설문조사는 한 집단의 사람들을 표본으로 추출해 오래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하는 방식이다. 이는 한 집단에서의 정치적 변화 패턴을 추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초기 패널을 잘못 구성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단점이 있으므로 좋은 패널 조사를 위해서는 사전에 패널을 잘 수집해야 하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자체가 커질 필요가 있다. 

 MRP라는 최근의 여론 조사 기법이 있다. 이는 다단계 회귀 및 사후 계층화다. 인간이 투표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요인(성별, 나이, 과거 투표이력, 직업, 선거구, 지역 등)의 특정한 조합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방법이다. 이 방식은 각 선거구의 모든 유권자를 모델화하고 그 결과를 종합해서 선거구의 결과를 예측하며 확률로 값을 제시한다. 가령 대졸에 민주당 지지 이력이 있고, 유색인종이며 직업이 전문직이라면 해당 선거구에서 공화당 지지 확률은 30%, 민주당 지지 확률은 70%형태로 제시하는 형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지지율을 조사해낸다. 이 방식에는 최소한 5만명 안팎의 표본이 필요하다. 많은 것 같지만 전구단위로 크게 조사하는 경우라면 오히려 경제적일 수 있다. 현대 여론 조사는 1000명 정도의 표본을 요구하는데 각 선거구마다 1000명을 확보해야 하는 경우라면 MRP방식이 경제적이다. 이 방식은 이번 선거에 성공적인 예측을 보였어도 다음번엔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 왜냐하면 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자체가 매우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이 조사가 전통적인 방식에 비해 아직 정확하다는 증거는 부족한 편이다. 

 현대의 여론 조사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꽤 있다. 우선 여론조사는 반드시 틀릴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그것이 선거토론과 보도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여론 조사 자체가 주객이 저도되어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그런 것을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 여론 조사도 문제가 있다. 대개의 정치 여론 조사는 대중매체가 여론 조사 기관에 의뢰하여 실시한다. 의뢰인 자체가 기사거리를 원하는 곳이다 보니 이들은 흥미진진한 결과를 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네가 의뢰하여 얻은 결과는 드러내고 남의 것을 깎아내리고 싶어한다. 때문에 정치 여론 조사는 의뢰단계에서부터 편향과 왜곡으로 의도성을 갖고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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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5-01-23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여론조사 포커스 스터디
공부할 적에, 여조 실행자 측에서
어떤 식의 질문을 만드냐에 따라
충분히 원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현재 여조의 심각하게 왜곡된
현상의 출발점이 아닌가 싶습
니다.

보정 역시 문제가 있죠.

닷슈 2025-01-24 10:2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그런데 수치만 보고 그런데 관심을 갖질 않죠
 
한국인의 기원 -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기후가 만든 한국인의 역사
박정재 지음 / 바다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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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내용과 제목은 좀 예상과 다르다. 한국인의 기원이라면 고대 한국인에서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집단 이동과 융합, 흡수, 갈등을 생각하게 되고 그 부분을 다루긴 하지만 책의 내용은 보다 거시적이다. 한국인의 기원이란 제목을 쓰긴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아프리카를 벗어나 중동과 유럽, 북미, 남미로 이어지는 인간의 이동을 살핀다. 그리고 여기에 환경 변화가 작용한다. 지구는 타원으로 태양을 공전하고,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고 세차운동으로 인해 그것이 조금씩 바뀐다. 이로 인해 빙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는데 이러한 환경 변화가 인간의 이동과 문명의 쇠퇴 및 발전의 근원적 원인이라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그리고 책은 다른 저서들과 다르게 연대의 기준은 인간이 지구 환경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친 서력1500년은 기준으로 삼는다.   

 

1. 인류의 이동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대략 12만년 전 아프리카를 나와서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 유럽의 추운 지역에는 네안데르탈인이 동아시아 지역엔 데니소바인이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40만년번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번성했으며 빙기와 간빙기를 무려 5-6차례 견뎌낸 만큼 추위에 대한 강한 내성과 상당한 수준의 문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데니소바인은 동아시아에 있었으며 기후가 따뜻해지자 네안데르탈인이 동진하면서 서로 교접해 혼혈아가 탄생하기도 했다. 

 13만년전 간빙기가 도래해 사하라가 습윤해지자 동쪽 지역에 초원이 생겨났다. 인간은 그 초지를 다라 시나이 반도와 남쪼그이 바브엘반데브 해협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후 다른 세력들이 간빙기가 도래할때마다 습윤해지는 사하라를 따라 순차적으로 계속 아프리카를 빠져나갔다. 인간의 아프리카에서의 이동은 여러 차례였던 셈이다. 

 7만 4천년 전 수마트라섬의 대형화산 토바가 폭발하여 환경이 악화되어 사피엔스의 수가 격감했다. 이 때 상대적으로 온난한 아프리카에 있었던 사피엔스 집단이 다시 유라시아로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멸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한 유럽의 인간 수렵채집민들은 이후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리냐크 문화를 이룩하고 다른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라베티안 문화를 이룩한다. 그라베티안 문화는 약 2만 2천년전 빙하기가 가장 추울 때 번성했다. 이들은 점성이 높은 역청, 동물 뼈를 녹인 물질로 창자루를 단단히 고정해 사냥능력을 높였고 뼈에 구멍을 뚫어 바느질을 하여 옷을 만들어 추위에 적응했다. 1만 8천년 전 마그달레나 문화가 있었다. 이베리아에서 시작해 후퇴하는 빙상을 따라 전파되었다. 투창가속기를 발명하여 지렛대를 이용해 창을 더 빠르게 던질 수 있었다.

 과거 북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유럽으로는 진출하지 않아 네안데르 탈인과의 교접이 없었던 기저유라시아인 집단이 존재했다. 그래서 현대 인류의 DNA는 네안데르 탈인과 교접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기저유라시아인의 유전자가 서로 반비례하여 존재한다. 기저유라시아인은 1만 4천년전 지중해 동부 레반트에 거주한 나투프인의 직계조상이다. 나투프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최초 농경민이다. 


2. 수렵채집민과 농경민, 유목민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마지막 빙기의 최성기가 끝나고 1만 4700년전부터 약 2천년간 풍요로웠다. 수렵채집민 나투프인 그래서 농경없이도 여기에 정착하는 것이 가능했다. 정착은 농경에 우선한다는게 최근의 연구다. 하지만 영거드라이아스 한랭기가 1천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급속한 온난화로 기상이변이 속출했다. 나투프인은 인구가 불어난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농경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농경은 급작스럽기 보다는 이미 수렵채집민 시절부터 부분적으로 시도하거나 그 방안은 대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후 위기가 그 본격적인 시도를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서유럽인은 크게 레반트 농경민, 이란의 농경민, 서유럽의 수렵채집민, 동유럽의 수렵채집민 네 집단이 이주하여 혼합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집단으로 유전적 차이가 컸지만 오랜 시간 서로 융합된 것으로 보인다. 

 수렵채집민은 대개 활동반경이 넓고 낮은 생산성으로 인해 식량을 찾아 이주한다. 따라서 인구 부양력이 낮고 영아와 노인 살해가 흔하다. 또한 피 정복 집단도 대개 노동력이 필요없기에 몰살시킨다. 농경민은 농경으로 항상 노동력이 필요하다. 정주 생활로 가내에서 일할 여성 노동력이 항상 필요하기에 정복하는 경우 상대편의 여성을 흡수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역사상 수렵채집민은 농경민 집단에 자주 흡수되었고 유전적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정주 농경사회에서 여성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다. 발가락이나 윗팔의 뼈 변형이 그 증거다. 이는 곡식을 무수히 빻았다는 증거다. 농경으로 여성이 집안일을 담당하자 남여의 차이가 생겨났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농경민들은 인구 증가로 농토가 부족해지자 이동했다. 9천년전 레반트와 이란 농경민이 아나톨리아 서쪽이로 이동하여 발칸 반도와 지중해를 따라 이베리아까지 이동했다. 다른 무리는 도나우 강을 따라 독일로 갔고, 또 다른 무리는 인더스 강으로 향했다. 

 홀로세 초기 농경민은 북부유럽에 관심이 없었다. 농경에 부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6천년전 기후가 온난습윤해지자 북유럽에 진출한다. 북유럽에 수렵문화 대신 깔대기 모양의 토기인 푼넬비커문화가 들어선 이유다. 한편 이란에서 북쪽으로 이동한 농경민은 흑해와 카스피해에 도달했다. 이들은 고대 북유라시아인의 후손과 섞여 초원지역에서 유목문화를 발달시킨다. 이들이 바로 얌나야문화다. 

 얌나야 문화는 5300-4600년전에 존속한 청동기 문화권이다. 대형고분인 쿠르칸을 남겼고 바퀴와 말을 동시에 활용한 최초의 집단이다. 말은 초원지대의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있다. 처음엔 식량이었겠지만 추위에 잘 견디고 바퀴살이 발명되어 수레가 끌만한 무게로 가벼워지자 운송수단이 되었다. 수레는 얌나야 문화에서 전차로 거듭났다. 유목민은 얌나야 이래로 농경민에 숫자가 적음에도 군사적으로 우위를 보일 때가 많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기병대였고, 야금술에도 앞섰다. 거주지 자체가 말 사육에 최적지이자 금속산지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유목민은 언젠가 기마술을 익혔다. 이로 인해 1인당 돌볼 수 있는 가축의 수가 증가하면서 목축의 효율성도 증가한다.

 얌나야인의 확장은 쿠르간 분묘 문화의 확산과 인도유럽어의 확산을 가져왔다. 4900년전 북반구 중위도 지역의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나며 기온이 하강한다. 얌나야 인은 초원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유럽지역을 장악한다. 이들은 동쪽으로도 이동하였는데 이 일파가 아파나시에보 문화를 이룩한다. 얌나야인은 중앙아시아로 진추랳 신타슈타문화와 안드로노보 문화를 이룩했다. 안드로노보문화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더스 계곡으로 진출한다. 농경민이 이룩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문화가 기온하강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쉽게 진출한다. 그 후손들은 2800년전 서쪽 이란 고원도 침공한다. 그래서 이란의 경전 아베스타와 인도의 경전 라그베다는 모두 샨스크리트어로 내용도 매우 유사하다. 두 종교 모두 생명의 나무와 세상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산을 숭배한다. 라그베다의 인드라 신은 초원지대의 초자연적 지배자다. 인도의 고대왕은 즉위하면 말희생제를 치뤘는데 말은 고온습윤한 인도에서 자생하기 어렵다. 이는 인도의 지배집단이 유목문화임을 말해주는 증거다.

 

3. 아시아로 향한 사피엔스

 아프리카에서 나와 동으로 향한 인간은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아라비아, 인도, 순다랜드, 사훌랜드의 순이다. 빙하기에 해안선이 내려가 인도차이나 반도와 섬들이 연결되어 순다랜드라는 대륙을 형성했고, 호주와 뉴질랜드, 테즈매니아, 파푸아뉴기니가 모두 대륙으로 묵여 사훌랜드를 형성했다. 순다랜드에서 추운 북쪽으로 향한 이들이 티안유안인이 되었고, 동남아사이에 남은 집단이 호아민 집단이 된다. 

 티안유안인은 중국 남부와 북부, 만주, 몽골지역에 자리잡았다. 여기서 더 동으로 간 것이 일본의 조몬인이다. 이들은 동쪽에 격리되어 티안유안인과 유전적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일본 열도는 당시 숲이 많고 바다에 인접해 생산력이 높아 수렵채집민이면서 정착이 가능했다. 1만 6천년 전 조몬인은 토기를 사용했는데 이건 정주의 흔적이다. 2800년전 한반도 기원 농경민에 의해 크게 위축되는데 그래서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한반도 기원 농경민이 90% 조몬인이 10% 정도다. 

 중국 북부의 아무르 강 유역의 티안유안계통에서 아무르강 집단이 분기된다. 이 집단에서 현대 동아시아인의 특징은 두꺼운 모발과 삽모양의 앞니, 땀샘 관련 유전자가 발견된다. 이 유전자는 추위에 적응하며 생겨난 것이며 기후가 더 한랭해지자 아무르집단이 한반도로 남하한다.  

 신석기 시대 농경으로 인구가 급증한다. 아무르강 집단은 수렵채집민이었고 황허는 동아시아 최초로 조와 기장을 작물화했다. 동아시아 유전자 구성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랴오허강은 반농반목문화였다. 이들은 기후가 한랭화하자 적극 남하하여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형성에 기여한다. 양쯔강 중류는 세계 최초의 벼농사 지역이었다. 이들은 6-7천년전 해안에 도달했고 일부가 북으로 이동하여 황허와 섞이고 해안을 따라 올라오는 사람들과 부딪혔다. 이들은 서로 썩여 동북아시아 현대인의 유전자에 기여한다. 홀로세 기후 최적기 이후 동북아시아인은 중원, 랴오둥, 한반도로 이동한다. 양쯔강 하류에서 남으로 이동한 이들은 대만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이스터, 마다가스카르까지 이동한다. 


4. 빙기와 간빙기의 원인

 온난한 신생대 3기가 끝나고 260만년전 부터 기온이 하강하여 4기가 시작된다. 4기는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로 구분한다. 플라이스토세는 간방기가 주기적으로 도래했다. 이는 지구 공전궤도의 이심률, 자전축의 기울기, 자전축의 세차운동 때문이다.

 플라이스토세의 간빙기는 20히 이상이다. 마지막 빙기 후 도래한 간빙기가 지금의 홀로세다. 대략 70만년전부터 지구는 빙기 11만년 간빙기 1만년의 기후 사이클이 있었다. 홀로세는 1만 1700년전 시작했다 지금은 주기상 빙기가 와야할 시점이지만 지구 공전 궤도의 이심률이 낮고 지구 온난화로 인해 홀로세의 간빙기는 향후에도 수만년간 지속될 예정이다. 

 인간은 20만년전 출현했다. 13만년전 빙기가 끝났고, 홀로세 이전 간빙기인 미이안 간빙기가 시작되었고 이때 사하라가 습윤해져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나올 수 있었다. 대략 10만년전, 7만 5천년전, 5만 5천년전, 3만년전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빙하기에도 열대 수렴대가 북쪽으로 확장했다. 

 11만년동안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2만 5천년 주기로 간방기가 도래했다. 그리고 1500년 주기의 아간빙기가 25차례 도래했는데 이는 대서양의 열염순환때문이다. 남대서양의 따뜻한 물은 고위도로 가서 한랭한 지역을 덥힌다. 그리고 동시에 이동하며 편서풍과 태양복사로 증발이 많아져 염도가 증가해 수온이 낮아지고 밀도가 높아져 심해로 하강한다. 그린란드 부근에서 하강해 다시 남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아간빙기가 오면 빙하가 녹아 담수가 대량 유입되어 대서양 고위도에서 물이 심해로 하강하지 않아 열염순환이 약화된다. 그러면 북반구가 추워져 빙하가 증가하고 다시 담수 유입이 줄어 염원순환은 강화된다. 이 반복이 아간빙기의 주기원인이다.

 홀로세의 또 다른 기후 변화 원인은 적도태평양 해수온도의 변화다. 적도 서태평양은 강력한 무역풍으로 항상 따뜻한 바닷물이 몰려든다. 하지만 무역풍이 약해지면 기온이 내려가며 바닷물이 북과 동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서태평양 해수 온도가 하강하여 인도네시아와 호주 일대에 가뭄과 산불이 증가한다. 동태평양은 기온이 상승해 홍수가 나는데 이것을 엘니뇨라 한다. 4-7년 주기이며 아기 예수라는 뜻이다. 이는 성탄절 즈음해 이 현상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홀로세 후기 400-60년 주기로 서태평양 온도가 내려갔는데 그러면 한반도를 포함한 북반구 여러 지역이 추워진다.

 또 다른 기후 변화 원인은 태양 흑점변화다. 태양 표면 흑점수가 늘면 태양에너지가 강해지는데 이 흑점 주기는 1년이다. 많은 기후학자들은 태양활동의 변화가 사실상 열염순환과 장주기 엘니뇨의 원인이라 본다. 


5. 홀로세의 기후 변화와 문명

 8200년전 갑자기 많은 담수가 대서양에 유입되어 열염순환 교란으로 기온이 3.3도나 내려가 단기 한랭기가 도래한다. 이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많은 수렵집단이 남하한다. 하지만 8000년전은 기후 최적기로 고위도는 산업화 이전보다 무려 3-4도, 중위도는 1-2도 저위도는 비슷하게 기온이 올랐다. 온난화의 영향은 항상 고위도에 더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이 시기 전세계에 초기 문명이 많이 나타난다. 

 황허강 이북에는 츠산문화가 있었고 7천년전에는 양샤오 문화가 있었다. 랴오허강은 싱릉와 문화가 있었다가 6700년전 훙산문화가 생긴다. 훙사문화는 중국의 다른 지역과 다르고 옥을 이용한 공예품이 발달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이 유목이나 목축 기반임에도 계급이 분화했음을 의미한다. 이 신석기 시대 훙산문화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 현대 한국인이다.  

 고조선은 시기상 훙산문화보다는 샤자덴 상층-하층 문화와 시기적으로 관련한다. 4200-3700년전 가뭄과 추위로 사람들은 괜찮은 환경으로 밀집했고 그러면서 문화집단이 생겨난다. 

 8200년전 외에도 4200년전에도 기상 이변이 있었다. 이는 엘니뇨 때문으로 동북아시아의 기후가 건조해졌다. 그래서 지구 상의 여러 문명이 붕괴한다. 아카드 문명, 나일강 고왕국, 인더스 하라파, 중국 룽산문화, 양쯔강 하류 저장성 량주 문화 등이 붕괴했다 기후가 한랭해지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서식지의 악화로 인구가 살기 좋은 곳으로 유입되어 갈등이 유발된다. 이를 견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장기 엘니뇨는 400-600년 주기로 이 시기마다 여러 문명이 붕괴했다.

4200-3900년전 세계 여러 문명 붕괴

3700년전 이집트 중왕국 붕괴

2800-2700년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2300년전 한반도 벼농사 문화 쇠퇴

1700년전 한제국 멸망, 삼국시대 도래

1200년전 멕시코 테오티우칸 문명 멸망

600년전 유라시아 흑사병 유행


6. 한반도의 인구 유입

 한반도에는 대략 5500년 전 부터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본격은 아니고 수렵채집의 보조수단이었다. 3000년전에야 정주 농경이 본격화 하였다. 안정적 기후로 숲의 생산성이 높고 삼면이 바다라 어패류가 많았다. 3700-3200년전 외부에서 농경 집단이 들어온 후 농경이 본격화한다. 4천년전 양쯔강 량주문화와 황허강 중산 문화 모두 기후변화로 쇠퇴한다. 이들은 동해안으로 이주해 혼합되고 산둥반도, 랴오둥, 한반도 남부 ,일본으로 이동했다. 이들의 빈자리는 북방 유목민이 차지한다. 기후가 나빠질때마다 북방민은 한반도로 남하하였고 이들은 선진문화도 같이 전파한다. 

한반도는 동아시아에서 토기 사용이 가장 늦을 정도로 고대인이 선호하는 지역은 아니었다. 산지가 많았고, 생산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기온이 지나치게 한랭화하면 남하하며 일부가 한반도로 내려왔다. 홀로세 후기가 되면 동아시아 전역으로 농경이 확대되며 인구 압박으로 남쪽을 향한 갈망이 커졌는데 이러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도 본격적으로 선택 된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는 랴오허 지역의 인구의 영향을 많아 받았는데 이 지역은 특히 한랭화가 심하게 진행되어 기후가 악화될때마다 이 지역 인구가 남쪽으로 이동하며 한반도로도 향한 것으로 보인다. 3200년전쯤 한반도 금강 유역의 송국리 문화는 이들의 작품으로 보인다.

 동북아시아의 기후는 3600년 전부터 습윤해졌고 때 마침 전파된 벼농경 덕분에 한반도의 인구가 증가하고 민무늬 토기의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다. 

 한반도의 송국리 문화는 2800년전 전성기였다가 차츰 쇠퇴하여 2300년전 거의 소멸한다. 이들이 일본 규슈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연다. 한반도는 송국리 문화가 사라져 무주공산이다 다시 북방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빈틈을 채우게 된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유전적 유사성이 높음에도 언어가 전혀 다른데 이는 송국리 문화 때문으로 보인다. 농경민은 송국리 문화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아남아 그들의 언어를 조성했고, 한반도에는 이들이 거의 사라져 새로운 반농반목민이 언어를 형성한 것이다. 

 2800년전에서 시작되어 5-600년 지속된 저온기를 철기 저온기라 한다. 이 때 서유라시아에서는 스키타이가 대대적으로 이동하고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한다. 한반도는 벼농사가 쇠퇴하고 북방민이 유입하고 토착민과 갈등한다. 이후 200-300년간이 로마 온난기다. 로마는 전성기를 맞고 중국은 한이 들어선다. 이후 1-100년간 태양 흑점수가 감소해 혼란기가 찾아오고 100-200년에는 흑점수가 증가해 로마는 5현제 시기가 온다. 200-300년은 다시 흑점수가 감소해 대 혼란기가 오고 중국은 삼국시대를 맞는다. 374-468년은 흑점수가 뚜렷히 감소해 기온이 내려갔는데 이 시기가 훈족이 이동한 시기이며 게르만의 대대적 이동을 초래하여 로마멸망의 원인이 된다. 

 한반도는 4세기 후반 부터 기온이 하락했는데 420년이 가장 기온이 낮았다. 고구려 장수왕의 천도는 427년인데 기후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주된 Y염색체는 C2(15%아무르), D(2%조몬), N(5%훙산), O1b2(32%샤자덴), O2(40%), Q(2%)다. 역시 샤자덴의 영향이 가장 강함을 보인다. 이는 기원전 3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큰 변화가 없다. 한국인과 유전적 조성이 가장 비슷한 것은 역시 북중국인이다. 

 일본은 야요이 문화에 이어 다시 한반도 도래인이 들어가 야마토 문화를 형성했는데 이들이 우리와 조상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언어는 일본 야요이 시대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에 지금의 우리와 큰 차이가 있다.

 

7. 기후 변화와 문명의 쇠퇴

 책은 기후의 주기적 한랭화와 문명의 쇠퇴를 강조한다. 인간은 다른 생물처럼 정주여건이 좋으면 인구를 불린다. 하지만 기후가 안좋아지면 인구 압박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즉, 인간 이주와 확장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후의 쇠퇴는 문명의 몰락을 가져온다. 기후가 좋으면 각 문명의 인구가 늘고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지만 그 상태에서 기후가 나빠지면 생산성이 악화하여 인구 부양이 힘들고 갈등이 생긴다. 특히 영양상태가 나빠져 전염병이 창궐하기 쉽고, 외부인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침투하고, 사회갈등이 심해져 문명이 붕괴하기 쉽상이다. 

 4200년전은 매우 한랭했다. 이후 1000년마다 기온이 상승하는데 3400-2800년은 청동기 최적기로 미케니, 히타이트, 이집트 신왕국이 전성기였다. 3200년 갑작스런 기후 변화로 문명이 쇠퇴하고 해양민족이 침략해온다. 2800-2300년전은 철기 저온기로 이 기시는 축의 시대다. 세계 10개의 종교가 이 때 탄생하는데 기온 저하로 인한 식량부족과 사회혼란이 종교의 도래와 관련이 깊다. 철기 저온기에는 게르만이 남부로 내려오고 스키타이는 서부로 이동했으며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다. 2250-1600년전은 로마 온난기로 로마의 전성기, 중국은 한이 융성했다. 이후 중세 저온기가 오며 게르만 대이동이 일어나고, 훈족이 이동했으며 중국은 삼국시대가 된다. 이시기 한국의 삼국도 쇠퇴하였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다. 반면 아라비아는 강수량이 증가하여 초지가 많아져 전투와 상업에 필수적인 낙타를 많이 키울 수 있었고 쇠약해진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를 상대로 세력을 크게 넓힐 수 있었다. 서기 800-1200년은 중세 온난기로 중국은 송이 전성기였고 고려도 전성기를 맞이한다. 13세기는 다시 기온이 하강했고 몽골의 침입과 쇠퇴기가 있었고, 1280-1350년에는 소빙기가 찾아와 흑사병이 창궐했다. 1620-1720년에도 한랭기가 찾아왔는데 당시에는 30년전쟁으로 800만이 사망했으며 한반도에는 경신대기근이 찾아온다. 또한 명청 교체가 일어났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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