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나는 적금보다 5배 이상 버는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손봉석 지음 / 다산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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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식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대충 20세기 말쯤 아직 어린 나이에 한국 경제상황중 두가지가 이해가 안갔다. 첫째는 한국, 특히 서울의 집값이 비 상식적으로 높다는 것과 둘째는 코스피 주가지수를 당시 시가총액을 100으로 환산하여 비교 계산하기 시작한 이후 경제가 10배 넘게 성장했음에도 주가가 박스권에 갇혀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1000포인트를 이상하리 만치 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번째에 대한 나의 기대치는 집값이 더욱 사정없이 오름으로서 보기 좋게 빗나갔고, 두번째는 주가지수가 현재 2000을 상회함으로서 비교적 적중했다.

 당시 군제대후 당연히 현금부족으로 부동산에 손을 댈 여유는 없었고,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시작해 몇 달간 번 피같은 돈 400만원으로 주식투자를 했다.  당시 산 종목은 아이리버로 유명한 레인콤과 lg텔레콤, 펜텍앤 큐리텔이었다. 기업에 좀 관심이 있는 분이 굳이 아니더라도 위와 같은투자가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다들 아실거다. 엘지텔레콤은 3-4배 올랐지만 레인콤과 팬택앤 큐리텔은 그야말로 공중분해되었다.

 400만원중 남은 금액은 100만원. 이 안타까움을 10여년 이상 묻어두다가 작년 마눌님의 강제연행으로 증권사까지 끌려가 남은 주식을 모두 팔고 현금회수했다. 돈은 물론 빼앗겼다. 마눌님의 자비로 알라딘에서 책 5만냥 어치를 살 작은 사치가 주어졌을 뿐이다. 결혼하기 전에 한 투자임에도 난 죄인이었다.

 책에서 말하는 주식투자의 골자는 크게 이렇다. 첨단제품이 아닌 안정적인 변화가 크게 없을 제품을 만드는 기업에 투자하라. 우리는 전문가도 아니고 일희일비할수 있고 정보도 없다. 그러니 전체적 흐름만 보고 장기투자하라이다. 저자는 부동산보다 주식투자가 낫다고 한다. 부동산투자로 큰 돈을 번다는 것은 다른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값이 지나치게 오르거나 전월세가격이 폭등하면 집없는 서민의 주거안정성은 크게 떨어진다. 반면 주식은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고 경제에도 긍정적이란다. 하지만 주식은 불안정하다. 집은 망해도 집이다.

 저자의 투자원칙은 7가지로 정리했다. 침고할만하다.

 

1. 1년이상 외국인이 꾸준히 매입한 종목

2. 외국인의 꾸준한 매입에도 저가인 종목

3. 의식주와 관련한 종목

4.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업

5. 시장점유율50%이상인 제품을 소유한 기업

6. per10이하이면 정말 좋음

7. 배당이 꾸준한 회사

 

여담이지만 과거 노점상 때 운영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었다. 어째서 여자들은 귀걸이와 목걸이를 고를때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면서 머리핀은 그리도 쉽게 집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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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17-05-23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줄, 여자인 저도 궁금하네요. 저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귀걸이와 목걸이는 잃어버리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머리핀은 엄청 잘 잃어버려서 어차피 잃어버릴 거 마음 가는 대로 사게 되는 게 아닐까요 ㅎㅎ

닷슈 2017-05-23 18:15   좋아요 1 | URL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나와같다면 2017-05-23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성전자가 100만원을 갈거라고 해서 그런 날이 오겠어?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ㅋ

911테러. 최근 브렉시트 때 인덱스도 아닌 레버리지로 들어갔습니다
전, 다른 사람이 공포감 느끼면 흥분되요..

닷슈 2017-05-23 22:47   좋아요 1 | URL
그게 어느덧 200이넘죠

AgalmA 2017-05-24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빼앗ㅋㅋ
머리핀은 실용적인 목적이 확실히 나뉘기 때문에 쉽지만 장신구는 심미적 외모 가꾸기라 그렇죠. 특히나 머리핀은 주로 뒤, 장신구는 앞을 가꾸기 때문에 더욱 그럴테고요 :)

닷슈 2017-05-24 08:20   좋아요 1 | URL
헐 정답같습니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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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무문관이란 책에 대한 책이다. 엉뚱하지만 무문관이란 이름을 접하자마자 고교윤리시간이 떠올랐다. 당시 시험문제에 대한 검토가 있었는데 흥분한 윤리선생님은 아이들의 주관식 답안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웃음을 참지못하며 몸소 답안에 상응하는 구타를 실행하고 계셨다. 당시 문제는 맹자가 말한 굽히지 않는 거대한 마음을 사자성어로 쓰는 것이었다. 답은 호연지기이다.

 윤리선생님이 흥분한 까닭은 당시 유행하던 중국영화와 무협지 제목이 답안으로 난무한 까닭이다. 쳡혈쌍웅에 영웅본색, 영운문등 같은 답안이 등장했다. 이런 멍청한 놈들. 윤리선생님과 웃으면서 난 친구들의 엉뚱한 답안에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내 답에 대해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답은 바로 '대도무문'. 무협지 제목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나름 답이라 생각하고 적었다. 잠시 후 내 번호가 호명되고 어안이 벙벙한채 나가 나역시 구타와 함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사실 맹자라는 단서만 없었다면 엄밀히 그리 틀린 답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여튼......

 제목이 비슷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지만 책은 잠시 엉뚱한 추억으로 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책은 무문 스님이 불교의 여러 화두를 48가지로 정리한 책이다.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가 이 알쏭달쏭한 화두들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달았다.

 무문관은 제목부터가 역설이다. 글자 그대로 문이 없는 관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작부터가 참 난해하기 그지없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글들이 화두로 무문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강신주는 48가지 애매한 화두를 기존에 제시된 순서와는 다르게 자신의 의도대로 재구성하였는데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순서 재구성의 의미는 모르겠다.

  책의 전체적인 주제는 강신주가 여러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처럼 역시 주체로 당당히 서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이가 당당히 부처로 설 것을 요구하는 불교철학은 이러한 강신주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재료로 매우 유용하다. 사실 불교에 대해 관심을 꾸준히 갖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책한번 읽은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불교에 대해서 어느정도나마 이해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에서는 '성불'하라는 말을 인사처럼 한다. 책을 읽기전에는 무식하게도 이를 기독교의 '신이 함께하시기를'이나 우리말의' 안녕하세요'나 '부자되세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글자그대로 성불은 '부처가 되라는 뜻'이다. 정말 심오한 인사가 아닐수 없다.

 어쨌든 이 같은 성불을 위해서 사람들은 수행을 하거나 공부를 한다. 석가모니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과 같은 부처가 되기를 원했지만,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한 말이나 사유들은 그 제자들에 의해 경전으로 이론적으로 정리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벗어나야하지만 뭔가를 알아야 창조도 있는 만큼 경전에 의한 공부도 중시되는데 이를 강조하는 것이 다들 아는 교종이다.

 하지만 경전을 중시하는 이런 교종은 당연히 많은 부작용을 안게 되는데, 우선은 경전 자체를 절대시하는 잘못된 풍토의 조성과 글자를 모르는 일반 평민들을 결국 성불할수 없게 되지 않느냐라는 문제였다. 실제로 초창기 우리나라의 유명 고승들은 모두 왕족이나 귀족출신알는 점은 이 같은 교종의 약점을 잘 드러낸다.

 이에 대응하는 것이 역사시간에 배웠던 선종으로 경전을 통해 부처가 되는 방법을 배격하고 사람 각자의 수행방법과 사유에 따른 성불을 강조한다. 선종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말이 '불립문자'로 글자 그대로 문자로 부처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강신주는 책에서 불립문자라고 하여 모든 문자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며 이때의 불립문자는 단순히 타인의 언어를 따르지 않는 것으로 봐야한다고 했는데 지극히 합당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또한 강신주는 책에서 시인과 부처가 매우 유사하다고 하였다. 양자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불립문자는 문자자체의 배격보다는 주체로 선 자신만의 독창성의 결여를 배격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주체성을 갖춘 부처로의 이행 과정은 자칫 다른 사람과 세상은 신경쓰지 않고 자신만의 고행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데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 역시 성불의 과정으로 이끌어나가는 방편이나 자비, 보시를 강조한다. 방편은 중생의 수준에 맞추어 깨달음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이고 보시는 재산이나 재물, 생각등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행위를 말한다. 인상적인 것은 자비였는데 자비는 우정과 연민의 결합어로 아래에 대한 단순한 연민이 아닌 함께 나아가는 수평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책을 일독하고나서 알면서도 모를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여러 생각이 몰려왔다.

우선 성불이 가능한가라는 점이다. 성불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각자 주체로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이루고 깨달음에 이르러야 하는데 모두가 주체로 서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라는 점이다. 주체로 살아가기 어려운 이유는 각자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면 서로간의 충돌이 있을 수 있고, 고대시대의 노예처럼 자신의 주어진 삶의 여건이 주인으로 일어서기 매우 어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둘다 가능한 것 같다. 주체로 서는 것 자체에는 앞서 말한 것 자비처럼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고려와 연민을 갖고 나아가는 과정이므로 자신만의 욕심을 갖고 다른 사람과 충돌하며 일어서는 것은 애초에 성불일수 없다. 또한 객관적 조건으로 인해 한계가 있을지라도 그안에서 주인이 될 수 있다. 불합리한 정권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돈과 직위를 보장하나 노예가 되는 길이며 반면 그에 항거하고 따르지 않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잃더라도 주체로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인간은 동물이고 근원적으로 결핍되고 타인과 다른 생물및 사물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가 되는 것이 천상천하유아독족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다른 것들과의 연기를 강조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애초에 이런 관계를 인정하고 나아가니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주체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강신주는 동양과 서양의 철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의 주체로의 나감을 강조한다. 때문인지 주체성의 철학과 타자성의 철학의 기준으로 다양한 사상들을 구분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답은 인간의 내부에서 찾느냐 외부에서 찾느냐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강신주의 친절한 설명을 읽고도 책 부록에 등장하는 무문관의 원전을 보면 도무지 해석과 이해가 어렵다. 정말이지 문이 없는 관문에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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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5-2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영삼대통령이 즐겨 사용했던 대도무문(大道無門) ..

고교 윤리시험에 대도무문을 쓰신걸 보면 92년도 즈음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신문도 열심히 읽고 뉴스도 잘 보는 성실한 학생 이였을듯..

닷슈 2017-05-23 22:48   좋아요 0 | URL
진짜그랬음 호연지기를 맞췄겠죠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스승의 날은 참으로 대단했다. 학교에서의 엄청난 공식행사. 스승의 날 노래 제창(사전연습까지 시켰다.), 선생님의 차 트렁크가 걱정될 정도의 선물 세례, 선생님은 쉬셔야 하니 학부모중 특별 직업이나 특기가 있는 분이 초청되 대리 수업까지 했다. 그랬던 것이 거의 모두 사라졌다. 많은 국민들(특히 화훼업자분들)도 아쉬움이 짙을 정도로 꽃마저 금지되었다. 작년 대학교수에 대한 커피한잔 증정 소동은 많은 논란을 나았다. 몇몇 학교는 여러 우려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아예 스승의날을 재량휴업일로 쉬거나 운동회를 거행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 문재인대통령의 간단한 지시에 의해 세월호 기간제교사 두분에 대한 순직처리가 진행되게 되었다. 그토록 어렵다더니 다소 허망하기까지 하다. 역시 많은 일은 몇몇 사람의 의지에 달린 경우가 많다. 그 말많던 반값등록금을 비록 서울시립대에 한하지만 박원순 서울시장은 취임하자 마자 단행해버렸다.

 교직에 대해서는 세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성직자관, 전문직관, 노동자관이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사망자에 대한 추이가 아직 완전치 못한 며칠간. 언론들은 학생들의 희생에만 과다하게 집중했다. 당시 언론의 느낌은 교사의 사망률을 지켜보는듯 했는데, 마치 교사의 사망률이 학생보다 낮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물어 뜯을 기세였다. 하지만 언론의 기대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생을 보호하려다 순직했다. 3월에 새로 발령받아 수학여행과는 사실 거의 무관한 단원고 교감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자살까지 했다. 문제는 이런 교사의 순직에 대해서 한국민들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당시 존함은 잘 기억나질 않지만 전교조 출신의 한 선생님은 교사의 희생을 당연시 하는 한국사회의 문화를 강하게 꼬집었다. 공직중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게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수 있을까? 대부분의 대답은 아마 군인일 것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소방공무원과 경찰이 될 것이다. 내 생각에 교사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유사시 우리는 교사의 죽음에 대해 매우 당연히 생각하고 심지어 요구하느니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다소 무섭게도 학부모인 어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이들 역시 매우 순진한 얼굴로 내가 물에 빠지면 선생님이 목숨걸고 저를 구하셔야죠라고 교사에게 아주 당연스럽게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런 관점이 교사에 대한 성직자관이다. 교사의 일을 신성시하고 성직처럼 대하며 그에 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성직자가 신도를 지키기 위해 순직한다고 해서 우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이 이를 잘 대표한다고 볼수 있다.

 이런 성직관때문에 세월호 순직 교사들은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순직처리하는 절차와 그에 걸맞는 대우는 결국 노동직 관이다. 성직자가 순교했다면 단지 기릴뿐 뭔가를 물질적으로 보상하지는 않는다. 순직한 기간제 교사 두분에 대해 순직처리가 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업무에 대해서는 성직자관을 요구하면서 정작 노동자로서 인정을 하지 않은 부분이라 할수 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는 다르게 노동자로서의 여러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사회 여러 기득권층이나 교총에서 전교조를 비판하는 부분 역시 교사를 노동직으로 본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교조는 현실로서 교사를 노동자로 바라본다. 이른 역시 그래서 전국교직원'노동' 조합이다.

 이처럼 교사를 노동직으로 보지 않는 사회의 관점때문에 교사는 5월 1일 노동자의 날에 쉬지 않는다. 스승의 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교사를 노동자로 보지 않는 관점이 보다 우세하기 때문이다.

 반면 교사를 변호사나 의사처럼 전문직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바로 전문직관이다. 이는 과거와 다르게 교사의 교수능력이 강조되면서, 그리고 교직이 얻기 어려운 직업이 되면서 강조되고 있다. 또한 임용고시라는 국가고시를 틍과해야 교사가 된다는 점에서 전문직관이 힘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교사의 성과물인 교육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측정될만한 산출물이 없거나 측정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면에서 교사를 전문직으로 보기 어렵게 한다.

 문제는 교사에 대한 이 세가지 관점인 성직자관과 노동자관, 전문직관이 서로 충돌한 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반적인 문화가 교사에게 성직자이길 요구한다. 이는 상당히 전통적인 유교적 관점이기도 한데 학생을 위한 마땅한 희생, 높은 도덕성에 대한 요구, 학생의 대한 사랑과 헌신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또한 현대에 들어와 교사로서 학생 교육을 위한 전문성을 갖추고 높은 교수학습능력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전문직으로서의 요구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교사가 학생교육과정에서 학교폭력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과거와는 다르게 법적으로 처벌하는데 이 경우 교사는 철저히 노동자가 된다. 성직자나 전문직이 그러한 경우에 처하는 경우는 좀츠럼 드물다.

 때문에 지금 한국사회에서 교사에 대한 관점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말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또한 시대 변화에 따라 요구하는 관점이 제각각인 것이다. 그렇기에 교사는 힘들다. 과거와는 다르게 높은 수준의 교육적 요구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연찬하고 교사가 되는 과정도 매우 지난해졌지만 그 대우와 권리는 실제 전문직의 그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으며 다른 전문직과는 다르게 전문성이 무어라고 딱히 말하기도 어렵다. 또한 교육헌장과 문화에 따라 사랑과 헌신으로 성직자처럼 학생을 교육하려 하지만 그 열정은 때로 오해받기도 하며 성난 민원에 의해 손쉽게 자신의 인권이 침해되거나 소모적인 법적싸움에 쉽게 휩쓸리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이 반드시 하나로만 정리되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럴수도 없다. 실제로 교사라는 직업은 이 세가지 관점을 모두 요구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전에 그 세가지 관점을 모두 충족시킬수 있는 문화와 사회적 합의 및 지원 역시 따라와야 하는 것이 아닌지 스승의날을 맞아 그리고 순직처리 되실 두 기간제 선생님을 보며 생각해본다.

 

 

-기간제 교사에 대해-

(기간제 교사는 교직의 비정규직이다. 정규직 교사와 동일한 점은 하는일이 같다는 것이며 다른 점은 국가고시인 임용고시에 통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연금등의 혜택이 없고 고용이 불안하지만 실제 학교에서 학생들은 누가 정규교사이고 누가 기간제인지 구분을 못할 정도로 하는 일은 대동소이 하다.

 교직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비교적 일치하는 초등학교의 경우에는 기간제교사에 대해 큰 문제가 없는 편이다. 초등에서 기간제 교사는 임용고시 합격자가 임용대기기간동안 잠시 현장경험을 쌓는 것이거나 아니면 한두해 낙방시 하는 것들이다. 물론 보건교사나 사서교사 영양교사 상담교사의 경우는 초등역시 비정규직인 기간제교사에 크게 의존한다.

 중고등학교인 중등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중등은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초등과는 달리 공급이 지나치게 많다. 전국의 수많은 사범대, 그리고 교육대학원 졸업생들, 게다가 일반 학과에서 교직이수과정을 거친자들까지 무수히 많은 공급원이 존재한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학입학은 초등에 비해 수월한 반면 임용고시의 합격은 매우 요원하다.

 때문에 중등학교들은 초등에 비해 기간제 교사에 매우 의존한다. 대부분의 교사가 담임을 맡아야 하는 초등에 비해 중등교사들은 절반정도만 담임을 하면 된다. 때문에 담임은 중등에서 기피업무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담임업무는 기간제 교사에게 전가되는 경우가 많으며 교내에서의 기피 업무들 역시 마찬가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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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16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생 때 사회를 가르치던 선생님의 말 한 마디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했던 말입니다.

“교사라는 직업은 리스크(risk)가 크다.”

리스크라는 단어 때문에 잊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처음에 그 분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제가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제자가 교사를 폭행하는 사건이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그걸 보면서 사회 선생님이 했던 말의 의미를 알게 됐습니다.

닷슈 2017-05-16 13:32   좋아요 0 | URL
진짜 그런것같습니다

nama 2017-05-1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의 ‘중등교사들은 절반정도만 담임을 하면 된다‘는 사실과 좀 다릅니다. 학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중학교에서는(고등학교는 다를 수 있음) 부장교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사가 담임을 맡게 됩니다. 원로교사인 경우에나 겨우 담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간제 교사가 교내에서 기피 업무를 맡는 건, 안타깝지만 사실이고요.

닷슈 2017-05-16 13:08   좋아요 0 | URL
음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읽은책이랑 현장이랑 좀다르네요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 넘치는 생각 때문에 삶이 피곤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 처방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이세진 옮김 / 부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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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렸을때 생각이 너무 많거나 내가 공상이 심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을지 모른다. 어릴 때의 문제라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그렇다면 여러가지 생활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을 정신적 과잉활동인이라고 한다. 책은 그들에 관한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우뇌형 인간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좌뇌가 발달한 일반인들처럼 순차적, 원인, 결과적 사고가 잘 안되는 편이며 마치 마인드 맵처럼 하나에 대해서 여러가지 관련 사고가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들은 간단하게 대처하는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고려하여 실행하기 때문에 행동이 둔하고 비효율적이고 강박적으로 보이며 답답해 보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예를 들어 스키 리프트를 탄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약간의 위험을 잠시 느끼다 곧 익숙해지겠지만 이들은 리프트가 멈춘다면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면 살수 있을까, 그물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떨어지는 무게를 견딜만한가? 스키를 차고 있으면 떨어질때 위험하지 않을까? 등등의 별의별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윤리적 기준 또한 높고 우뇌 발달형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역시 지나치게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으며 거절을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속칭 호구가 되기 쉽상이다. 간단한 문제에 대해 아니요를 할줄 모르기에 대부분 무리하게 일을 하게 되며 어쩌다 간신히 거절을 할때도 온갖 것을 고려하여 힘들게 간신히 말한다.

 정신적 과잉활동인들은 셜록홈즈 갖기도 하다. 모든 감각이 예민하여 상당히 관찰력이 뛰어나고 그런 감각이 공감각적으로 작용한다. 당신의 목소리는 마치 노란색 같군요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종합적이고 동시다발적 사고에 감각이 민감하니 관찰력과 이로 인한 종합적 판단력이 홈즈 수준인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정신적 과잉활동인들이 좌뇌편향적인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특히, 거부하지 못하는 정신적 과잉활동인들에게 계속 자기의 일을 떠넘기고 윤리적임을 악용하는 악마들을 매우 증오한다.

 인간의 뇌는 영유아시절 발달초기에 뇌세포들의 네트워크들이 엄청나게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것이 성장에 따른 경험을 통해 추려지고 효율적인 가지치기를 통해 적은 수의 네트워크들만이 남게되는데 정신적 과잉활동인들 같은 경우는 마치 이 가지치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 같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린아이들 경우처럼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고 아마도 시간도 이사람들에게 여전히 늦게갈것만 같다.

 저자는 정신적 과잉활동인들의 상당수가 영재이고 높은 감성지능과 종합적인 판단력을 지녔음을 높게 평가한다. 그리고 사회가 이들의 특성을 인지하고 잘 활용했음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프랑스책인 이 책에는 정신적과잉활동인이 15-20%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이들이 이런 특성을 잘 드러내지 않음을 감안해도 상당히 높은 수치라 생각된다. 한국에서 측정한다면 과연 얼마나 나올지 궁금하다. 반토막 수준이 아닐지. 우리 사회는 더욱 이러한 이들을 허용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책을 보며 자신이 정신적 과잉활동인인지 아닌지, 아니면 내가 어렸을때 그러했는지를 생각해보는것도 재밌는 것 같다. 나같은 경우는 어려서는 정신적 과잉활동인에 가까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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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5-15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책을 진득하게 못 읽고 여러 권을 수시로 번갈아 읽으며 또 책을 사고 있는 저를 생각하면 뜨끔하네요;;

닷슈 2017-05-15 08:41   좋아요 0 | URL
그건 장점인것같습니다

cyrus 2017-05-1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홈스 시리즈를 정주행 독서 중입니다. 어렸을 때 만났던 홈스에 대한 환상을 조금씩 벗기고 있습니다. 정말 닷슈님의 말씀처럼 홈스는 자신의 정신이 쉬게 하는 걸 참지 못해요. 정말 그런 사람과 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해요. 왓슨은 가상 인물이니까 제외.. ^^;;

닷슈 2017-05-15 19:26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그걸감당할사람이있다면 그역시도 연구대상이죠
숙적인 모리어티도 홈즈처럼생각이 많았을지궁금하군요

cyrus 2017-05-15 19:28   좋아요 0 | URL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셨어요. 제가 홈스 시리즈를 다 읽고나서 쓰고 싶은 글의 주제가 홈스와 모리어티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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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시작으로 '강신주의 맨얼굴의 당당한 인문학'을 3년정도 전에 읽었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 후로 강신주의 책을 잡지 않고 있었는데 아내가 이 책을 사두었고, 최근 참여하게 된 독서토론회에서 이 책을 때마침 선정하여 보게되었다. 이러니 책을 보게된 이유가 상당히 타의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은 보게 될 인연이었단 생각도 든다.

 그동안 강신주를 책이든 방송에서든 자주 봤던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모습이 많이 사라졌던 느낌이 든다. 책은 한때 지나친게 아닌가 싶을 만큼 쏟아져 나왔었고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종편이든 가리지 않고 여러 종류의 방송에 많이 출연했었다. 이렇게 사랑받던 한 사람이 어느 순간 희미해져가는걸 보면 연예계든 학계든 소비라는 것이 매우 유행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거 읽었던 책이나 강연을 곱씹어 보면 강신주는 항상 사람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것과 당당히 주체로 설 것을 주장했었다. 그래서 강연이든 책이든 혼란에 빠져있꺼나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게 만드는 역할을 많이 했으며 그 도구로 철학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솔직해 지지 못하고 주체로서 서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지적했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인간은 행복하고자 하는 동물이고, 그 과정에서 감정을 반드시 드러낸다. 이 감정에 솔직해야만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감정을 우리는 반드시 확실히 구분하고 알아야하는데 여기서 도구로 제시하는 철학은 스피노자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의 동물임을 파악하고 감정을 중시한 철학자로 이 때문에 매우 혁명적인 사람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따라서 책은 스피노자가 제시한 48가지 감정을 제시하고 자신의 생각과 스피노자의 이 감정에 대한 정의, 관련한 고전 소설, 그리고 역시 관련한 그림, 마지막으로 자신의 어드바이스로 1개 감정에 대한 장을 구성해 나간다. 제법 재미있는 구성이면서도 어찌보면 산만한 구성인데 이런 형태로 책이 만든 이유는 마지막 장에 나온다.

 어쨌든 책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관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윤리학을 제시함에 있어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이성이란 것이 결국은 전체사회를 위한 것이며 개인의 욕망은 통제되고 검열된다. 즉, 살아있는 나의 윤리학이 아닌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욕망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결핍된 유한자인 만큼 반드시 욕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욕망의 윤리학이며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도덕의 출발이라는 것이 결핍된 존재인 개인의 욕망을 넘어선 집단에서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함이라는 면에서 봤을때 윤리학의 출발을 개인의 욕망에 둔것은 매우 탁월해 보인다. 그런면에서 이성이라는 것은 집단의 욕망을 조절하기 위한 도구란 측면이 있고, 보다 추후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진화론과 연결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책에서는 그러한 부분을 찾을수는 없었다.

 책에는 인상적인 구절도 무척 많았다. 반드시 맞다고 볼순 없지만 그래도 무릎을 탁하고 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p188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의 구분.

이루었을때 허무하다면 타인의 욕망,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욕망

예를 들어 부모의 사회의 욕망과 바람에 의해 명문대 좋은 학과를 갖지만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음을 알고 허무하고 방황한다면 타인의 욕망인 셈이고, 아니라면 자신의 욕망인 셈.


p238

아름 다운 사랑 이야기로 무장한 고급 포르노의 시절이 바로 우리의 젊은 시절.


p258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


p266

영광의 이면에는 멸시와 경멸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 영광에 집착하면 스스로 고독을 감내해야 함. 사랑과 유대의 가치를 망각하고 타인을 경쟁상대로만 생각함.


p356

두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과 과거의 실패경험에서 비롯한다.


p367

동정은 동등한 상대에게서 갖으며 연민은 한 수 아래의 상대에게 갖는다.

그래서 동정하는 말과 행동은 상대방은 때론 화를 내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동등함과 상대가 생각하는 동등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듯 하다.


p374

온건한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는 짙은 그늘이 있다. 즉, 온건함이 자발적이 아니며 언제든지 약자에겐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애시엔 온건해보인 남편이 결혼하니 폭력적이더란게 대표적인 예.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렇게 많이 세분화한 감정을 철학자의 도구를 빌려 고전소설과 그림에 드러난 부분을 인용하여 그리고 저자의 경험을 이용하여 보여준다는게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이에는 크게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어 솔직하고 당당하게 주체로서 일어나는 것에 인상깊으면서도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다. 인간의 본성을 깊이 드러내어 보고 싶은 것도 우리의 본성이지만 감추고 싶은 것도 본성이 아닐런지. 저자는 인간은 결핍된 유한자이고 인생이 유한하기에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고 하지만 평생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 행복일 수 도 있다.

 그래서인지 강신주의 책과 강연은 시원하면서도 무언가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저자의 책과 강연이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식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언젠가 저자의 책에서 본적이 있기도 하지만 강신주는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적 성과들이 인문학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개인적으로는 강신주의 작업은 과학적 성과를 살짝 등에 업는다면 상당히 빛날수 있고 공통적인 부분도 적잖다는 생각에 무척 아쉽다.

 책에는 48가지 감정이 있는 만큼 사용한 48개의 고전소설과 48개의 그림이 있다. 당연히 책을 보다면 내가 몇개나 아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의 경우 소설은 고작 3편 그림은 0편이었다. 인문학적으로 빈곤함을 느낀다. 그리고 48가지의 감정중 삼분의 이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인간은 보다 세부적으로 분류하여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강신주의 선택이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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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7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7-05-07 22:24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결국 그런것도 내면적인거나 성찰적 인것이아닌 실용적 차원의유행이어서인것같습니다

2017-05-07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07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까미 2017-05-1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몇년전 읽었을 때 인상 깊었는데 강신주 작가의 동영상까지 많이 보고 그랬는데
어떤 시원한 곳을 찌른 것 같아서 좋았던것 같아요
작가 자신도 이유는 있겠지만 새로운 발전을 가지고 더 활동하면 좋겠어요

닷슈 2017-05-14 17:58   좋아요 0 | URL
저도 강신주 작가님 활동이 갑작스레 뜸해짓서 좀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