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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기념하라 - 카체트에서 남영동까지, 독일 국가폭력 현장 답사기 ㅣ 보리 인문학 2
김성환 지음 / 보리 / 2021년 12월
평점 :
거의 모든 국가엔 악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그 국가에는 국가가 악을 자행한 시간과 장소, 사람이 있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면 역사가 되어버리고 악을 직접 지시하고 실행한 사람은 무책임하게 죽어 사라진다. 하지만 그 장소만은 어떻게든 남는다. 그 건물이 온전하던 아니든 적어도 터는 남는다. 일각에선 이런 장소를 그대로 온존하여 악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에선 그 끔찍한 기억을 지워내고 싶어한다. 지워내고 싶은 자는 악에 가세했거나 옹호했기에 불편함을 느끼는 자, 혹은 그 일을 당해서 트라우마를 지우고 싶은 피해자, 혹은 혐오를 보기 싫어하는 일반의 감정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감하게 악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기념은 아니다. 기억에 가까운데 그런 장소를 지칭하는 한국어가 마땅히 없고 기념관 밖에 없으니 이런 용어를 책전체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한국은 악이 많이 자행된 국가다. 굴곡진 역사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 세력과 일반 한국인에게 일본인과 친일파가 자행한 악, 분단 후 전쟁 전 혼란기에 여수, 순천, 제주에서 행해진 악, 한국전쟁 중 양 세력에 의해 행해진 악,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독재정권기에 행해진 악들이 그것이다. 이 악은 당시 집권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한국은 악이 일어난 장소를 온존하기 보다는 없애려는 쪽에 가깝다. 대표적인 것이 김영상 정권때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였다. 당시에도 논란이 조금은 있었지만 결국 대다수 여론은 그것을 없애는 것 선택했다. 저자는 이것을 온존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저자에게 거의 동의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생각이 좀 다르다. 악의 장소는 온존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맞지만 총독부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과 광화문을 너무나도 철저히 가리고 파괴했기에 그냥 두기엔 좀 그랬다. 부수기 보단 어려워도 인근으로 이전이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실 우리에게 잘 보존되어 남아 있는 악의 장소는 많지 않다. 저자는 위의 열거된 악이 자행된 시기 중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주로 주목한다. 당시 공포의 장소는 남산 중앙정보부 6국,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 남영동의 대공분실이다. 이중 위 두 개는 사라지고 남아 있는 것은 남영동 대공분실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곳에 주목하고, 책에서 그 온존 방향을 주장한다.
그리고 악이 엄청 자행되었고 그랬음에도 이를 잘 보존하고 기억하며 교육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를 주목한다. 독일은 2차대전 중 반나치체제인사,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유대인, 집시 등을 격리 수용하고 절멸시킨 수용소와 이를 자행한 국가폭력기구들이 많이 있었다. 저자는 이런 독일을 집적 방문해 살피고, 남영동 개발의 해법을 찾는다.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로 대개 독일과 일본을 지목한다. 그들은 엄청난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후의 행보는 우리가 알듯 사뭇 다르다. 양국다 대표 지도자가 공식석상에서 피해국에 사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횟수와 진정성에서 독일이 앞선다. 또한 일본은 사죄의 발언을 언제했나 무섭게 자국내 정치인이 그를 뒤짚는 망언을 일삼는다. 하지만 독일은 그런 면에서 일관된다. 또한 자신들이 행한 악의 장소를 철저히 인정하고 보존하는 점에서도 다르다. 일본은 하시마섬을 국제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조건으로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해 기록하기로 하였는데 이런 국제상에서의 약속마저 지키지 않는 국가다.
양국이 이렇게 다른 길을 가게 된 이유는 뭘까. 혹자는 냉전 체제를 말하지만 저자는 단호히 아니라고 한다. 미국은 2차대전의 원흉인 독일과 일본의 전쟁 범죄자를 철저히 엄단하려 하였다. 하지만 발빠른 소련의 움직임이 장애였다. 소련은 유럽에서의 점령지를 빠르게 공산화하였고, 아시아엔선 북한과 중국이 공산화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을 공고히 하기 위해 냉전의 경계선이 있던 침략원흉국가를 빠르게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의 재건을 위해선 실무를 행할 공무원과 기업인이 필수였고, 그래서 전쟁에 가담한 이들 상당수가 이렇다할 처벌을 받지 않게 된다. 우린 일본만 그렇다 생각하는데 사실 독일도 그렇게 되었다.
양국의 행보가 갈리는 것이 이후다. 저자는 그 차이로 시민사회의 성숙도를 꼽는다. 독일은 나치청산에 사실상 실패한 후, 거의 20년을 그대로 간다. 나치청산 문제를 다시 거론한 것은 바로 68혁명 세대다. 이들은 전쟁에 무책임하게 동조한 아버지 세대를 비방하고, 나치 청산 문제를 20여년만에 독일사회 수면으로 다시 끌어올렸다. 독일의 과거 청산은 크게 5단계로 나뉜다. 우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68혁명, 1980년 미국에서 홀로코스트 TV방송을 계기로 일어난 반성 운동, 1980년대 역사 수정주의 논쟁, 1990년 통일 이후 동독 과거사 청산 논의다.
이처럼 독일의 과거사 청산운동은 2차대전 종전과 같이 완성된 것이 아니고 수십년 간 독일 시민사회의 노력과 그에 호응한 정치권의 반응으로 인해 조금씩 이뤄졌다. 책을 보다보면 기념관이 1980년대나 90년대 지어진 것도 있는데 그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또한 독일 역시 한국처럼 지방마다 정치색이 보수, 진보성향인 곳이 있기에 지역마다의 접근과 시기도 각각 달랐다. 이런 독일의 모습을 보면 결국 일본이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를 시민사회의 미약한 힘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반면교사로 한국 역시 시민사회의 힘이 미약하다면 우리의 악을 인정하고 온존하기 어려워 지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나치 수용소의 역사와 유대인 절멸정책
독일은 1차대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생겨난다. 전쟁의 책임으로 황제는 퇴위하고 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당시 사회주의 세력와 우파세력의 갈등이 극심했기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극단적 입장을 배제하고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도록 정치체제를 설립했다. 그래서 공화국을 유일 체제로 삼고, 의회의 권한을 세웠고, 비례대표제를 운영했으며 복지제도와 사회보장제를 도입했다. 또한 평소엔 의회우위의 정부를 운영하면서도 당시 시국이 어지러웠기에 비상시국엔 대통령에 비상대권을 갖춰 혼란을 수습케 하였다.
이처럼 바이마르 공화국은 좋은 정치를 시도하였지만 대내외 조건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했기에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또한 패전의 책임으로 상당 부분의 영토도 상실하였다. 여기에 1920년대 세계 경제공황이 불어닥치며 민심이 급격히 이반되었다. 이 때 나치당이 등장한다. 이들은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매도하고, 사회주의 세력이 1차대전에 찬성한 것을 공격하여 이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결국 1930년 내각은 붕괴하고 대통령 비상대권체제가 들어선다. 당시 대통령인 힌덴부르크는 다수당인 나치당의 당수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한다. 히틀러는 이를 수용하자마자 대통령을 가두고 공산당, 사민의원을 체포한다. 그는 입법권을 히틀러 행정부에 위임하는 악법도 통과시킨다.
그의 이런 과감하고 위험한 행보에 긴장을 느끼는 독일인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더 시국이 그를 도왔다. 국회방화사건이 일어난 것인데 사실 일탈 개인의 소행이었지만 히틀러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사회주의자 유대인의 일로 꾸민 것이다. 대대적 사정이 이뤄졌다. 전국에 걸쳐 공산당직자, 공산, 사민의원을 체포했고 그 수가 무려 8천에 달했다. 히틀러는 경찰력 뿐만 아니라 개인 친위대인 SA를 활용하였고 이들은 훗날 그 악명높은 SS가 된다.
한편 수용인원이 많아지자 전국의 유치장이 부족해진다. 나치당은 유대인이 운영하던 공장을 무단 압류하여 수용소로 개조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독일 전역의 유대인 절멸 수용소가 된다. 이 수용소는 나치 초기 공산당, 사회주의자를 가두는 용도로 쓰였고, 격리와 노동력 착취가 주 목적이었다. 나치는 수감자를 식별하려고 여러 색의 역삼각형을 썼는데 유대인은 유독 노랑색의 정삼각형을 썼다. 그러다보니 유대인이면서 사회주의자면은 별 모양의 식별표를 갖게 되었는데 이게 악명 높은 다윗의 별 수감자 식별표식이 된다. 나중엔 거의 죽음을 의미하는 모양처럼 여겨지게 된다. 당시 핍박받고 처형된 의원수는 무려 96명이었다. 민주주의의 완전한 파괴였다.
히틀러는 수용소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대규모 시설로 격상하고자 하였다. 그런 임무를 맡긴 자가 히믈러였다. 히믈러는 또 아이케를 등용한다. 아이케는 전국의 수용소를 총 관리하였는데 그는 작센 수용소를 먼저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델로 삼았기에 이후 나치의 수용소는 하나같이 비슷한 양태를 띄게 된다.
나치는 이후 수용소를 운영하면서 1941년 이후 유대인 절멸 정책으로 전환하였을 때 존더 코만도를 유대인중 선발했다. 이들은 건장한 자들로 하는 일이 동료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인도하고 죽은 뒤 시신을 소각장으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임기는 고작 6개월로 이후엔 그들도 같은 운명이었다. 잔혹하고 슬프게도 이들은 그 6개월 간의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를 위해 이일을 도맡았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동유럽에서 가장 잘 자행되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의도주의와 기능주의가 독일 학계에서 충돌했다. 의도주의는 히틀러의 중앙정부 지휘하에 학살이 일사분란이 일어났다는 것이고 기능주의는 기존의 반 유대주의와 더불어 학살이 각 지방에서도 나치의 직접적 명령없이도 자율적으로 집행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학계는 양자를 절충하는 것으로 나치의 직접 시행과 이에 자극받고 호응하는 지방조직의 자율적 자행이 같이 일어난 것으로 파악한다.
동유럽에서 유대인 학살이 잘 행해진 것은 당시 동유럽 사람들의 반감 때문이었다. 이들은 전쟁 이전 소련의 강제병합과 침공으로 반소주의 반공주의가 강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전 유럽에 퍼진 반 유대주의도 있었다. 나치는 해방군처럼 여겨졌고 이들이 선전하는 공산주의자가 곧 유대인, 유대인이 곧 공산주의자라는 슬로건은 아주 잘 먹혔다. 동유럽에서 유대인을 살해하는 일반적 방법은 이들을 숲으로 끌고가 땅을 파게한 후 일렬로 무릎끓려 총살 한 후 다시 묻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손이 많이 가자 나중엔 이동한다고 버스를 타게 한 후, 밀폐시켜 배기가스를 다시 집어넣어 일산화탄소로 죽게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후 청산가스가 발명되자 버스안에서 가스를 사용하게 되었고 수용소에서도 가스를 이용한 집단 학살이 일반화하였다. 유대인들은 씻는 다는 목적으로 샤워실에 들어섰는데 이후 문이 밀폐되고 가스가 새어나왔다. 가스는 무거워 아래부터 찼다. 그러다보니 가스실에선 죽음의 피라미드가 형성되었다. 가장 약한 아이와 노인들이 위로 오르지 못하고 깔려 가스를 마시고 죽었다. 가스를 피해 그 시신 위로 올라간 여성이 죽었고, 마지막은 그 시신 더미로 올라간 건장한 젊은 남성차례였다. 이렇게 죽음을 맡게 되니 가스실에는 사람이 켜켜이 피라미드처럼 쌓인 죽음의 피라미드가 생겨나게 되었다. 정말 끔찍한 정면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기념해야 하나
저자는 독일의 사례를 살펴보며 기념관에는 조성에 장소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건이 일어난 곳이 무엇보다 기념관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물도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픔을 아픔 그대로 드러내어 타인이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을 때 사회적 치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새로 짓고, 치장하는 것은 공감을 약화시킨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엔 이런 대표적인 장소가 있는데 바로 4.19기념장소다. 원래 4.19이후 정부는 기념장소를 서울시청앞과 남산에 조성하려 하였다. 그곳이 대표장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이런 민주적 혁명을 부정하기도 옹호하기도 어려웠던 박정희 정부는 장소를 아무 상관없는 수유리로 옮겨버린다. 여기에 조형물도 교체해버렸는데 김경승이 만든 애도상과 수호자상은 남여로 매우 비한국적인 우람한 체격의 사람들이 조각되었다. 이런 장소성과 당대 한국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모습은 기념관을 피상적이고 공감이 어려운 장소로 만들어버렸다.
서대문 형무소도 마찬가지다. 서대문 형무소는 악이 역사적으로 자행된 곳으로 일제와 독재정권이 모두 사용했다. 하지만 싹 새로 만들어버렸고 시기도 특정지어버렸다.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는 주로 일제의 악을 드러내는데 사용된다. 또한 새로 제작한 고문 도구 및 마네킹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역사성을 훼손하였다.
저자는 남영동에서만큼은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남영동은 보존되어야 하고 새로 신축할 필요가 있다면 지나치게 현대적이고 외양이 색달라 본래 공포건물의 아우라가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기념관은 피해자를 기억하나 그 범죄를 기획하고 조직, 실행한 사람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정치, 상황도 잘 설명하고 드러내야 한다. 한국은 이런 범죄에 대해 피해자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해자와 그 정치상황에 대한 기억은 필수적이다. 즉, 현장과 피해 기록을 잘 보존하고 국가폭력이 자행된 정치, 사회적 맥락을 기념관을 잘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