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공간 혁신 - 학교 공간 개선 솔루션
서예식 외 지음 / 해냄에듀(단행본)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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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신교육에서 최근 화두는 학교공간의 변화다. 수업의 변화, 교육과정의 변화에 이은 제 3탄인데 학교공간을 제3의 선생님으로 칭하기까지 한다. 인간이 공간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많이 받는지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학교가 전인적 인간교육을 표방하는 만큼 학교의 공간 역시 교육의 본질적 요소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최근의 당연한 견해다. 

 사실 그간 국내에서 교육의 변화는 수업방법의 변화와 교육과정의 변화에만 치우쳤다. 학교공간은 공간으로 보기보다는 사실상 환경으로만 치부했다. 그나마 신경을 쓴 것이 교실 뒷편이나 앞부분 칠판을 제외한 양 공간이었고 환경미화나 학급환경이란 말로 그 평면에 무엇을 부착하느냐를 갖고만 고민했던 것 같다. 

 연구에 의하면 건물상태가 최악인 경우와 최고인 경우 학업성취도는 4-9%의 차이를 보였으며 건물 상태가 가장 오래된 경우와 최신인 경우는 5-9%차이를 보였다. 공간에 학업성취도에 상당한 영향력을 보인 셈인데 이런 인지적 부분 외에도 정서적인 부분도 감안한다면 그 영향력을 더욱 클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교육부는 2021년에서 2025년까지 18조의 예산을 투입하여 학생중심의 미래 건물을 구축하는 사업을 시행한다.현재의 학습공간 중심에서 학생의 휴식과 소통의 생활공간 비중을 늘리고 정서적 안정과 미래교육에 적합한 학교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구체적 사업명을 그린스마트스쿨인데 친환경에너지 절약형의 건물과 더불어 학생의 미래교육에 적합한 환경을 구성하겠다는 계획이다. 

 학교공간을 개선하는데는 최근 사용자 참여형 공간 개선 사업이 눈길을 끈다. 이는 교육과정을 통해 사용자인 학생과 선생님이 자신들의 창의적 제안과 아이디어를 제시하여 이를 실제 설계로 바꾸는 행위를 통해 학교공간이 바뀌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학생과 교사는 학교공간에 대한 강한 주인의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수의 사용자를 배려하는 유니버셜 디자인 개념도 도입해야 하고, 구축한 공간이 입김이 강한 소수의 학생만을 만족시키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도 있다. 또한 소음과 분진 발생으로 인하 정독성의 훼손이나 사용의 지속가능성도 고려의 대상이다. 

 요소를 구체적으로 살피면 우선 학교휴게 공간이다. 학교는 학습에만 초점을 맞추어 쉬는시간도 무척 적지만 쉴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다. 하루종일 공부한 자기 책상에서 쉬고 싶은 학생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휴게 공간은 교실에서 가까운 것이 이상적인데 학교의 특정한 곳에 배치되거나 좌석이 적으면 다수의 학생이 공간을 평등하게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휴식공간을 별도로 마련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복도 양쪽으로 창턱에 의지하여 일자형 선반 테이블을 설치하는 것도 좋다. 학생들의 이동장애를 최소화하며 공간확보를 가능하게 한다. 학교 밖 풍경을 즐기며 창안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면 마치 카페에 온 느낌이 들것이다.

 학생자치실은 많은 학교에 없거나 있어도 매우 협소하거나 빈 쓸모없는 공간을 주기 마련이다. 아직 학교가 학생자치회의실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학생자치실은 잘 정리정돈이 안되고, 더러우며, 관리가 안되기 마련이다. 실제 학생들이 자치회으실보다는 오히려 카페에서 회의를 하고 싶어한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자치회의실은 깨끗하고 정리정돈되고 시설이 충분하고 넓어야 한다. 학생자치회의실에는 전체회의 공간, 소그룹회의공간, 특별활동공간이 필요하다. 수납함과 컴퓨터를 비롯한 회의도구와 칠판등이 잘 갖추어지면 자치회의실은 빛나게 된다. 

 공간을 굳이 만드는 것 외에도 도색을 하는 것도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공간을 변화하는 방법이다. 다만 이경우 기존의 색과 같은 도색은 금지다. 변화가 없어 만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색채디자인 업체에 설계를 맡기는게 좋은데 이 경우 전문가의 참여로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비용은 10%정도 더 필요하다. 교실이나 교무실, 특별실의 경우는 색을 구분하여 지정해주는게 좋고 복도나 계단도 색을 달리하는게 좋다. 층마다 설치된 방화문과 문틀도 별도의 색이 좋으며 페인트는 오염이 던되는 작서방지용 페인트나 친환경 무독성 페인트를 써야한다. 

 학교공간 프로젝트는 많은 돈이 드는 장기사업이다. 하지만 적은 돈으로도 당장 단위교실부터 학생을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꾸며나갈수 있다. 그과정에서 학생과 선생님 학부모가 머리를 맞대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성공이 가능해보인다. 이 책은 중등중심으로 사례를 재구성했는데 그러다보니 미술과 기술교과의 도입이 많았고 학생 스스로 시공을 하는 경우도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어려운 초등사례의 책도 볼 필요가 있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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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전환점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필립 M. H. 벨 지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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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도 80년 가까이 되어간다. 아마 직접 겪은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럽과 북미, 극동을 중심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이 전쟁은 그 이전의 그리고 그 이후의 전쟁을 모두 덮어버린 듯한 인상을 준다. 아마 관련 국가들이 전쟁 중 2차대전과 관련한 책이나 영화, 만화 등을 가장 많이 만든다는게 그 반증일 것이다.(미드웨이, 진주만, 퍼시픽, 라이언일병구하기, 밴드오브 브라더스가 모두 2차대전 영화 드라마다.) 2차대전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은 지금의 세계를 만든게 바로 2차대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전쟁으로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산업의 패권국으로 떠올랐고, 아직도 그 지위를 유지중이다. 소련은 해체되었지만 러시아가 그 뒤를 이어받아 여전히 군사적으로 강력하다. 그리고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은 2차대전후 냉전의 그늘하에 오히려 더 경제적으로 부강해졌다. 아마 이 질서를 뒤흔들어 재편할 만한 나라는 중국이 될 것이다. 그리고 미중 경쟁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된다면 아마 2차대전도 잊혀지지 않을런지.

 하여튼 그 2차대전의 주요 흐름을 잘 짚어 정리한 책이 이번에 읽은 12전환점으로 읽는 2차세계대전이다. 전쟁의 발발부터 종전까지 주요 전환점을 잘 짚어냈다. 읽으면서 2차대전을 잘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국이 2차대전 관련 저작물을 많이 만들어내다보니 그들이 무수한 희생을 치르고 전쟁을 끝낸것 처럼 느껴지지만 2차대전 당시 미군 전사자는 27만에 불과했다. 1000만에 달하는 소련을 생각하며 우스운 정도인데 이것도 미국이 영화를 많이 만들고 2차세계 대전의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1. 전쟁의 시작과 프랑스 점령

 2차 대전의 시작은 역시 독일이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다. 야욕을 숨기지 않은 그는 1935년 이후 빠른 속도로 재무장을 시작한다. 1938년엔 오스트리아를 병합했고 같은 해 9월 체코의 수테텐을 차지한다. 1939년 2월엔 체코의 나머지 지역도 병합했고 같은 해 9월엔 폴란드를 침공해서 겨우 5주만에 점령해버린다. 이런 야욕에도 1차대전의 트라우마가 컸던 영국과 프랑스는 유화정책으로 일관해 이런 독일의 세력확장을 초기해 견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경제를 봉쇄하고자 했는데 한발 빨랐던 히틀러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자원을 공급받기로 한다. 스탈린 역시 공산주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국경의 안정이 필요했다. 양자의 이해가 일치한 셈이다. 

 독일의 야욕이 눈앞에 드러나자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구축하고 방어계획을 세운다. 1차대전에서 서 최전선으로 워낙 고생했지만 무너지지 않았던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방어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빠르게 군대를 진군시켜 독일을 막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독일이 허를 찌른다. 바위지대로 진군이 어렵다고 생각했던 아르덴 지역으로 기갑사단을 진군시킨 것이다. 이 곳은 실제로 진군이 어려워 독일은 많은 교통체증을 일으켰지만 연합군은 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1940년 5월 13일 독일은 뫼르 강에 도착해 프랑스 진지를 1500대 가량의 폭격기로 맹폭한다. 벙커안 프랑스군은 56명만 사망할 정도로 피해가 적었지만 그들의 정신이 붕괴된다. 55보병사단이 전의를 잃고 와해되었으며 지상의 철저한 파괴로 통신이 두절된다. 독일은 빠르게 진군하여 대서양에 도착해 프랑스를 남북으로 분단시켜 버린다. 5월 24일 독일 기갑군이 덩캐르크로부터 불과 16km 떨어진 곳에 도달하지만 폰 룬트슈테르의 사령부와 히틀러는 너무나도 빠른 진격이 걱정스러웠는지 부대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이 귀중한 시간동안 연합군은 영화 덩케르트에 나온 것처럼 무려 22만의 영국군과 11만의 동맹군을 영국으로 귀환시킬수 있었다. 물론 무기는 모두 버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전쟁초기 프랑스는 이렇게 무력하게 빠른 시간안에 무너졌지만 갖고 있던 전력은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는 탱크 3250기로 독일의 2440기보다 많았고 오히려 탱크의 성능도 우수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탱크는 연료통이 작아 작전반경이 좁았고, 무전시설도 없어 전장에서 고립시 지휘체계가 붕괴되는 일이 많았다. 결국 전쟁초기 독일군의 우세는 전력자체보다는 아르덴을 통과하는 전략적 사고와 그 기세를 이어 대서양까지 프랑스를 횡단해버려 적을 포위해버린 과감성,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한 부대의 기동성에 있다 하겠다. 

 패전한 프랑스는 독일과 강화를 맺는다. 협정은 굴욕적이었다. 프랑스는 전 영토의 2/3을 내어주었고 육군은 10만으로 감축한다. 함대는 무장해제당했으며 독일의 점령비를 부담했고 무려 180만의 전쟁포로는 평화시까지 수감되었다. 600만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수도 역시 파리에서 온천도시인 비시로 옮겨졌다. 자유평등박애의 국가모토는 노력, 가족, 조국으로 변화했으며 이는 민주주의 질서의 파괴를 의미했다. 

 이런 독일의 전격적 승리에 세계는 동요했다. 파시즘은 과거 나폴레옹의 자유주의 처럼 새로운 질서로 세계를 뒤흔들 것처럼 느껴졌다. 이탈리아는 17년간의 파시즘으로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에도 참전하여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로 전선을 확대시켰다. 반면 스페인의 프랑코는 참전의 대가로 프랑스의 식민지와 영토, 전쟁보급품을 요구했다. 독일이 이를 거절하자 그는 참전하지 않고 추축국에 제한된 협조만을 하기로 한다. 겁을 먹은 영국은 한 때 독일과 강화를 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유혹을 현명하게 실행하지 않았다. 소련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은 애초 1차대전 처럼 독일과 영국프랑스가 오래도록 싸우며 힘을 빼는 사이 국력을 키울 심산이었다. 하지만 서유럽이 붕과히자 스탈린은 독일과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누가봐다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었다. 미국 역시 고민에 빠졌다. 대서양이라는 자연 장벽이 있었지만 프랑스가 붕괴한 이상 프랑스의 서아프리카 식민지와 카리브해 식민지에서 독일이 미국본토를 충분히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미국은 대서양을 포기하여 영국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참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아시아의 상황은 무주공산이었다. 유럽 열강들이 독일로 인해 혼이 빠진 사이 그들의 아시아 식민지를 무방비가 되었다. 일본은 약간의 의지만 보이면 이들은 곧 일본차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 바다사자작전

1940년 5월-6월은 히틀러가 영국을 침공하기 좋은 시기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승리에 놀란 히틀러는 이 시기를 놓친다. 그는 영국이 겁을 먹고 강화에 나설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으며 히틀러가 망설이는 사이 영국은 빠르게 해군력과 공군력을 강화한다. 육상전력은 형편없었지만 영국의 공군과 해군은 달랐다. 영국의 스핏파이어기는 독일의 ME109, M110E보다 속도와 성능이 우수했다. 거기에 영국은 레이더를 개발해 최장 160km까지 적기의 탐지가 가능해졌다. 

 초기 독일은 영국의 비행기지와 분소들을 공격해나갔다. 독일은 영국의 공군력을 무력화하고자 했는데 실수로 런던을 공격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영국이 즉각 베를린을 폭격했는데 두 사건 역시 피해가 미미했다. 하지만 격분한 히틀러는 보복으로 대규모 런던 공습을 감행한다. 이에 영국공군은 기지를 회복할 시간을 갖게 되었고 지속적인 소모전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공군은 마침내 독일공군에 우위를 갖게 된다. 히틀러는 1940년 9월 17일 영국침공계획인 바다사자작전을 조용히 포기한다. 공군의 특성상 전사자는 양측다 극히 적었지만 현대전에서 공군의 역할을 감안한다면 큰 패배였다. 


3.바르바로사 작전

바르바로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이름이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작전을 이 이름으로 정한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조약을 깨고 히틀러가 310만의 독일군과 65만의 동맹군으로 소련을 침공한다. 아직 기계화가 미미해 탱크는 4천대에 불과했고 수송은 주로 말이 담당해 무려 75만 마리나 되었다.

 히틀러는 비스물라강과 우랄산맥 사이의 영토를 병합하여 천년 제국의 기초수립을 구상했다. 이는 삶의 공간이었고 독일 민족의 우수성과 경제적 자급자족, 세계권력에 대한 히틀러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독일이 침공한 우크라이나 지역을 비롯한 소련의 서쪽 지역들은 소련의 압제로 인해 독일군을 환영하는 상태였다. 초기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격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히틀러는 인종적 광기로 이 분열을 전혀 이용하지 못한다. 오히려 점령지에서 인종청소를 감행하여 환영을 증오로 바꿔버리며 이는 큰 패착이 된다. 

 개전초기 히틀러의 침공을 걱정했음에도 스탈린은 침공의 현실을 부인하며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소련 공군은 출격하지도 못하고 지상에 묶인체 1800대의 공격기가 파괴된다. 초기 공군력을 상실한 소련은 이후 독일의 항공기 공포에 상당기간 시달리게 된다. 독일은 프랑스의 경우처럼 속도와 소련군을 포위한다. 중부전선에서 75만 키예프에서 66만을 포로로 잡았으며 소련군 전사자는 200만에 달했다. 독일은 소련 포로를 방치하다시피해 이들중 상당수가 사망하게 된다. 독일의 진격을 매우 빨라 중앙집단간이 6주간 무려 700km를 이동해 모스크바를 350km남겨두게 된다. 그 기세였다면 모스크바 점령은 시간문제였지만 히틀러는 공격목표를 왜인지 레닌그라드로 바꾼다. 이 망설임이 시간을 주어 소련은 반격의 시간을 갖게된다.

 소련은 초기에 군이 궤멸되고 주요 산업시설을 모두 빼았겼지만 빠르게 우랄 시베리아 지역으로 산업생산시설을 이전한다. 500만의 예비군이 동원되었고 산업생산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소련의 무기 생산과 병력은 독일을 크게 상회하게 되었으며 이 소모전에서 기세가 점차 역전되기 시작한다.


3. 진주만 

일본은 1937년 중국 본토를 침공해 1939년 말이면 중국 영토의 1/4가량을 점령한다. 유럽 열강은 여력이 없어 이를 방관하는데 일본은 영국으로 하여금 장제스를 지원하는 버마 로드의 폐쇄를 요구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입한다. 일본은 1940년 9월 삼국동맹을 결성한다. 하지만 독일의 기세가 주춤하자 영국은 다시 버마로드를 재개하였고 미국은 일본에 대한 고철수출과 석유수출을 전면 금지한다. 이에 일본은 동남아를 노리게 된다. 후방의 안정이 필요했던 일본은 소련과 마찰이 없기를 원했지만 독일이 말도없이 소련을 침공하자 당황한다. 1941년 일본은 제국회의에서 결국 소련을 침공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석유확보를 위해 인도차이나 남부를 점령하는데 그간 일본의 행보를 방관하던 미국은 이례적으로 신속히 반응한다.

 미국은 미국내 일본의 자산을 동결하였고 석유수출을 전면금지하였다. 일본은 미국과 협상하면서 3가지 요구를 하였는데 미영의 장제스 돕기 중지와 미영의 중국, 태국, 동인도 제도의 군사기지 설치 금지, 미영의 일본과의 교역 회복이었다. 반면 미국은 장제스 정권 인정, 1900년 이후 중국에서 얻은 조차지의 모두 반환을 요구했다. 양국의 간극인 너무 컸던 셈이다. 협상은 결국 결렬되고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선택한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쿠 이소로쿠는 항공모항의 새로운 역할을 인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모가 함대의 우산이 아닌 독립적 타격군이라 생각했고 1938년 일본 해군은 이 새로운 전략개념을 받아들여 대형항모를 생산한다. 1941년말 일본 해군은 항모를 10척 보유하기에 이르는데 당시 미국의 항모는 겨우 5척이었으며 태평양엔 그나마 3척이 전부였다. 

 진주만 공격은 사실 동남아사이 방어 전략의 일환이었다. 일본의 목표는 미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하여 남쪽으로의 대규모 병력 이동을 막는 것이었다. 야마모트는 미국의 장기적 산업생산능력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장기전이 불리하기에 단기전으로 끝낼 생각을 갔고 있었다. 

 진주만은 일본에서 무려 5600km거리에 있어 재급유가 작전에 중요했다. 공격방법도 고민이었는데 급강하와 어뢰를 통한 공격이 모두 고민이었다. 급강하는 행위 자체가 위험했고 어뢰는 진주만의 얕은 해안에서 잘 먹힐지 의문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강도 높은 개인훈련과 기동훈련을 실시한다. 일본해군 정보국은 미주재대사를 통해 진주만 해도를 입수한다. 미 정보장교는 이를 파악했지만 이를 군에 전달하지 못했으며 미 장교 일부의 진주만 주변 정찰요구도 이뤄지지 못한다. 

 1941년 11월 미 최고 사령부는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감지했지만 목표를 알아낼 수 없었다. 미국 정보망엔 구멍이 많았는데 일본 1,2사단의 항모 4척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1월 26일 일본군은 나구모 제독의 지휘 아래 쿠릴열도의 한 섬인 에도로푸 섬에서 북쪽 항로를 따라 하와이로 항진한다. 6대의 항모, 2척의 전함, 13척의 손양함, 그외 다양한 작은 전함과 상선으로 이뤄진 대규모 선단이었다. 항모에 탑재된 항공기도 450기였다. 

 이 기습은 알려진 대로 큰 성공을 거둔다. 8척의 미 전함중 6대가 침몰하고 나머지 2대도 항행불능상태가 된다. 11척의 작은 전함이 손상되었으며 188대의 항공기가 파괴되고 사망자가 2403명에 달한다. 일본의 피해는 고작 29대의 항공기 파괴와 6척 잠수함 손실이 고작이었다. 일본은 재공격하여 진주만의 기름탱크를 파괴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엄청난 비축유가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진주만 이후 일본은 승승장구하여 홍콩과 괌을 점령하고 필리핀을 침공한다. 말레이 싱가폴 보호를 위해 온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와 리펄스 호도 침몰시킨다. 1942년 싱가폴을 점령하였고 다수의 영국군 포로를 잡는다. 호주의 북부도시 다윈도 폭격하는데 이로써 동남아 전역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4.미드웨이

미드웨이는 태평양 한복판의 작은 섬으로 32대의 장거리 비행정과 23대의 폭격기가 있는 중요하지 않은 곳이다. 일본은 미드웨이에 대한 공격가능성이 회의적으로 공격을 주저한다. 하지만 진주만 이후 감행한 둘리틀 부대의 도쿄 폭격으로 미드웨이 공격이 결정된다. 

 일본은 호주 근방 코럴해에서 렉싱턴 호를 침몰시킨다. 하지만 일본은 렉싱턴과 요크타운 2항모를 침몰시킨 것으로 착각하였는데 미군은 거짓 교신으로 이를 더욱 믿게 만든다. 당시 일본은 항모4척과 소형항모 2척, 전함 9, 순양함 12, 구축함 44로 항모 3, 순양함 8, 구축함 15에 불과한 미해군을 전력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일본은 6월 4일 나구모가 이끄는 함대로 미드웨이를 폭격한다. 미군 기지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나구모는 다시 미드웨이를 폭격하려다 미 전함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뢰를 항공기에 설치한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어 다시 폭격을 준비한다. 이런 윗선의 혼란에 갑판과 아래층은 혼선에 빠진다. 미국은 51기의 폭격기가 어뢰로 일본 항모를 공격한다. 어뢰 폭격기는 당시 수면에 수평으로 저공비행을 하였기에 전함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7척만 남고 모두 파괴되었으며 전과가 없었지만 철통같던 일본함대의 방어진형을 흐뜨려놓는데 성공한다. 일본 전투기들 역시 이 어뢰폭격기를 격추하느라 수면 근처로 내려와있었는데 이 때 돈트리스 하강폭격기 54기가 일본 함선으로 급강하한다. 순간 무방비였던 일본 해군은 무차별적 폭격을 당하고 소류, 아카기, 카가 등 4항모를 모두 잃게 된다. 이후 양국의 해군 전력은 역전되는데 일본은 이후 10척 정도의 항모를 더 건조하지만 같은 기간 미국은 무려 90척의 항모를 더 건조하기 때문이다. 


5. 대서양전쟁

 대서양에선 태평양같은 격렬한 해전은 없었지만 꾸준한 소규모 전투가 있었다. 바로 독일 U보트에 의한 전투다. 2차 대전중 영국은 북미에서는 물자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독일 입장에선 이 공급을 해상에서 끊는게 중요했다. 독일은 2차대전중 무려 1150척의 U보트를 건조한다. 군인도 4만 900명을 배치하였는데 초기 U보트의 성과는 매우 경이적이었다. 독일의 U보트 사용은 노르웨이 점령과 프랑스 점령으로 대서양 주요 항구를 사용할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0년 58만톤, 1941년에는 100만톤의 선박을 침몰시틴다. U보트는 항속거리가 길고 속도가 대부분의 상선보다 빨라 매우 위력적이었다. 다만 어뢰공격을 위해서는 수면 가까이로 부상해야하는 약점이 있었다. 독일 U보트는 암호정보로 호송대의 위치를 알아낸뒤 일군의 U보트를 집단파견하여 공격하는 이리전술로 재미를 보았다. 이처럼 독일 U보트는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꾸준히 소모되어 몇년 만에 주요 잠수함의 함장이 모두 20대의 어린나이로 채워지게 된다. 

 U보트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상선호위는 상당히 효과가 있었는데 호위시 생환율은 80%였던 반면 호위가 없는 상선은 고작 20%만이 살아남았다. 영국은 블레츨리 파크에서 독일군 암호를 해독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연합군은 호위함 호위기를 늘리고 호위거리의 갭을 없애고자 노력한다. U보트는 그로 인해 점차 위력을 잃게된다. 거기에 U보트 상당수가 지중해와 이탈리아, 북아프리카로 파견되어 롬멜을 지원하게 되었고, 소련 침공을 위해 노르웨이로 배치되어 대서양에서 더욱 힘을 잃게 된다. 

 전세는 점차 역전되어 1943년 ONS 5 호송대 전투에서 독일은 U보트 41척을 출동시켜 12척 이상의 상선을 침몰시키지만 U보트가 9척 침몰하고 5척이 심한 손상을 입는다. 1:1의 손실비율이라면 독일입장에선 큰 손실이었다. 연합군은 독일 암호의 해독으로 인한 정보전의 승리와 공중전력으로 대서양전쟁에서 승기를 가져가기 시작한다. 대서양 전투에선 무려 2828척의 상선과 148척의 전함이 침몰하였다. 사망자도 5만을 넘는다. U보트는 1131척중 754척이 침몰하였고 4만의 군인중 무려 3만이 전사한다. 독일의 손실 역시 만만치 않았던 셈이다. 


6. 노르망디 상륙

1943년 1월에서 1944년 5월 사이 140만의 미군이 영국에 상륙한다. 그리고 1944년 900만 톤의 보급품도 대서양을 건넌다. 상륙전을 위해 연합군은 약 7천척의 전함과 수송선, 상륙용 주정을 집결시킨다. 해군작전은 조수와 달에 의존하는데 상륙부대들이 해안의 장애물을 처리하려면 조수의 상태가 최선이어야 하고 ,낙하산이나 글라이더를 이요한 공정부대의 침공에는 좋은 시야가 필요해 만월일때가 좋았다. 1944년 6월에 조수가 가장 좋은 때는 5-7일, 18-20일이였다. 그리고 우여곡적끝에 D-day는 6일로 결정된다. 

 독일은 엽합군이 드칼레로 상륙할 것으로 예상했다. 영국에서 최단거리해로이고, 항공기 지원이 용이하며 독일로 진군하기도 좋아 여러모로 최적이었다. 독일의 롬멜은 적이 상륙하여 정비하기전 해안에 기갑부대를 배치에 다시 해안으로 몰아넣는 방어계획을 주장했고, 폰 룬트슈테른은 적 상륙후 주력을 파악한 후 기갑부대로 집중공격하는 방어계획을 주장한다. 히틀러는 어리석게도 양자를 모두 채택해 안그래도 부족한 기갑부대를 프랑스 전역에 분산해버린다. 

 연합군은 노르망디의 다섯개 해안에 상륙하는데 유타와 오마하에는 미군이 골드에는 캐나다가 주노와 소드에는 영국이 상륙한다. 독일은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음에도 이를 연막으로 여기고 드칼레에 집중해 초기 대응을 놓치고 만다. 거기에 독일 21기갑사단의 선택은 더욱 아쉬웠다. 이들은 초기 발빠르게 진군에 캐나다와 영국군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상륙하는 엄청난 수의 연합군을 목도하고 퇴각해버린다. 

 이에 6월 16일까지 영국군은 2개 기갑사단 등 7개사단을 미국은 11개 사단을 상륙시킨다. 무려 50만의 병력과 7만 7천대의 차량이었다. 


7. 원자탄 투하

 레이테만 전투에서 일본은 전함 3척 쾌속항모 4척 순양함 16척 구축함 9척을 잃어 사실상 해상전력이 궤멸된다. 미국의 상륙 및 점령만이 남았는데 이게 쉽지 않았다. 이오섬 전투에서는 11만 미해병이 상륙행 5천이 전사하고 1만5천이 부상당한다. 오키나와에서도 17만이 상륙하여 1만2천이 전사하고 3만 6천이 부상당한다. 엄청난 비율의 손실에 미군은 일본 점령에 대한 손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대서양 전투처럼 미국인 해상전력이 궤멸한 일본이 상선을 마음껏 유린한다. 미 잠수함은 1943년 180만 톤 1944년 390만 톤의 일본 상선을 침몰시킨다. 거기에 일본 근해에 기뢰까지 부설하여 이본의 해로를 막아버린다. 사실상 봉쇄된 일본은 자원 부족과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1944년 마리아나 군도에 비행장이 완성되어 일본 본토 폭격이 시작도니다. B29 폭격기는 일본의 주요도시를 폭격하였는데 30-80만이 사망하고 800만이 집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은 일본의 건물이 주로 목조건물이어 소이탄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로 인한 화재 피해가 엄청났다. 

 미국은 맨하탄 프로젝트를 끝내고 원자탄을 개발한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가했는데 7만 6천채의 건물중 6채만 남고 파괴되었으며 인명손실도 7-13만에었다. 두번째 원폭은 나가사키였다. 원래 목표는 코쿠라였는데 날씨 문제로 목표가 나가카시카 바뀐다. 나가카시는 지형이 능성이 있고 계곡이 있어 핵폭풍피해가 반감되었다. 인명 피해는 3만에서 7만이었고, 이 무시무시한 두 폭판으로 일본은 항복을 결정하며 2차대전이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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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4-16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질적으로 독일을 상대로 가장 큰 피해
를 치르고, 독일군 주력을 격파한 나라는
소련이었는데 너무 연합국 위주로 전쟁사
가 편중된 그런 느낌입니다.

1944년에 소련에서 개시한 바그라티온
작전이 빠진 게 아쉽네요. 실제로 독일
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 넣은 작전이었
는데 말이죠.

닷슈 2021-04-16 10:57   좋아요 1 | URL
책에 바그라티온 작전은 책에 실려 있었습니다. 제가 리뷰에서 뺀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소련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4년여를 버텨냈고 일본의 후방을 견제했기에 승리할수 있었던 전쟁입니다. 저도 소련의 공로를 의식하면서도 전황을 극적으로 바꾼게 미국인지라 편향된듯 합니다. 미국의 희생이 고작 27만이란건 참. 그렇습니다.
 
인삼의 세계사 - 서양이 은폐한 '세계상품' 인삼을 찾아서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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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대항해시대를 이끈 건 값비싼 동양의 향신료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이슬람제국이 길을 막고 중개무역을 독점하자 서양인들은 한 때 헤라클라스의 기둥(지브롤터 해협)으로 막혔다던 대서양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커다란 아프리카를 돌아 동양에 다다랐고, 그 과정이 너무 힘드니 상대적으로 짧다고 생각한 서쪽으로 가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커피, 후추, 정향, 육두구, 카카오 같은 것들이 모두 인기가 좋았다. 서양은 동양에서 그것들을 직접 서양으로 날랐고, 수십 배의 이득을 누렸다. 그리고 향후엔 식민지를 건설하고 직접 플랜테이션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팔아치운 서양인들이 중국인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고 귀중했던 인삼을 몰랐을까? 이 책을 읽기 전엔 인삼이 아무래도 약재이고, 동아시아에서만 교역을 하는 것이니 그런 무역체제에 편입이 되지 않은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책 '인삼의 세계사'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인삼은 진시황이 불로초의 하나로 가능성을 점칠 정도로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에서 약재로 효능이 높았다. 무역은 당연히 생길 수 밖에 없었는데 위진시대 해로를 통해 인삼 무역이 시작되어 당나라 초기에 이르러 매우 중요해졌다. 당시 중국에서는 한반도에서 오는 인삼을 통칭해서 신라인삼이라 불렀다. 인삼은 명나라 중기에 전성기를 맞는데 사회가 안정되자 사치품 수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수요증대로 중국자체내의 인삼이 거의 고갈되자 변경의 마시나 호시를 통한 요동삼과 고려인삼을 많이 수입했다. 청을 세운 누르하치가 인삼과 모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게 가능해진 이유이기도 했다. 청대에는 만주족이 자신들의 토대인 만주를 중시하여 만주내에서의 인삼, 진주, 초피는 국가가 철저히 관리했다. 청초기만 해도 이게 잘 운용되어 성경지역에서만 인삼을 채취했지만 차차 재정결핍으로 인삼채취 지역이 만주내에서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인삼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채취가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인삼을 징수하고 생산지가 아닌 곳에서는 인삼세를 징수했다. 조선은 공납으로 인삼을 징수하였는데 전국 329개 군현중 112개 고을에서 인삼을 산출해 약재로 쓰거나 공물로 바쳤다고 한다. 조선은 인삼의 해외 유출을 통제하였는데 임진왜란때 군대를 따라 들어온 명상인들이 돈이 되는 고려인삼을 반출해갔다. 조선은 요동에서의 식량 조달을 위해 중강개시를 허용했는데 이를 통해 명이 자신들이 부족한 인삼과 은을 반출해갔다. 일본 역시 임진왜란때 고려인삼 종자를 탈취해가 조선인 포로로 하여금 자국내 이식을 시도한다. 조선의 인삼교역을 청대에 다소 혼란에 빠졌는데 늘 정기적으로 인삼을 요구한 중국황제들 중 거의 최초로 고려인삼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여진족들 자체가 만주에서 인삼을 얻어왔기 때문으로 이렇게 수출길이 막히자 조선 정부는 인삼을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청에서도 인삼 수요가 늘어나자 다시 인삼무역이 시작되었고 사행무역과 중강개시 및 후시를 중심으로 무역이 이루어진다. 조선 상인은 주로 청에서 백사와 비단을 수입했고 은과 인삼으로 대금결제를 하는 식이었다. 일본에서는 자생삼인 죽절삼이 있었지만 고려인삼에 비해 약효가 크게 떨어졌고,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일본에 동의보감등의 조선의학서가 보급되면서 인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난다. 이에 조선상인은 일본에 인삼을 팔아 은을 얻고, 이 은으로 중국에서 비단을 사고 일부를 국내에 유통하고 이를 다시 일본에 팔아 큰 무역이익을 얻는다. 당시 일본은 세계 제2의 은공급국이었는데 잦은 무역으로 은이 고갈되자 인삼 결제를 위해 은함략이 높은 특주은까지 만들어낼 정도였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조선내의 인삼도 고갈되고 일본내의 은도 고갈되자 양측의 인삼교역은 쇠퇴하게 된다. 

 조선에서는 17세기 이전엔 인삼을 끓여서 가공했다. 아무래도 생삼은 무역이 어려웠기에 건조하거나 끓이는 등의 가공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공재배가 시작된 이후 쪄서 말리는 증포방식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홍삼의 시작이다. 조선에서 홍삼무역을 주도한 것은 역관과 한양의 상인으로 홍삼제조 증포소는 1797년 한양에 처음설립된다. 하지만 1810년 개성으로 이전하는데 이는 개성상인의 힘이 매우 컸음을 의미한다. 이후 개성은 조선의 홍삼제조와 생산을 독점하여 1896는 개성의 인삼밭은 전국의 47%에 달했고 인근 금천, 장단, 풍덕을 더하면 무려 92%에 이르게 된다. 조선은 개화기에 이르자 왕실의 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내장원을 설치한다. 내장원은 산하에 인삼 및 홍삼에 대한 관리들 담당하는 삼정과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국내외 홍삼판매의 국영독점을 의미하게 된다. 이에 개성상인들은 직접 수출을 통한 이득이 크게 줄어 개성민요를 일으키기도 한다. 나라가 망하며 조선총독부의 주재로 개성의 홍삼무역은 미쓰이물산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해방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전란을 피했던 개성의 상인들은 홍삼산지와 제조지를 모두 잃게 된다. 이들은 1952년 전란중에도 개성에 잠입후 고려인삼 종자를 얻어오게 되며 이를 이전까지만 해도 인삼의 주변부였던 풍기, 금산등에 이식해 새로운 현대식 홍삼제조시설은 고려인삼창을 준공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유럽의 동인도 회사는 17세기부터 동아시아의 인삼을 유럽으로 들여온다. 하지만 인삼은 유럽자체에 수요가 많지 않았기에 본질적으로 장거리 무역상품이 아니었다. 동인도 회사의 현지무역상품이었는데 그것은 아시아의 한 지역에서 구입한 상품을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처분하고 그 돈으로 그 지역의 상품을 사서 다른 곳에 파는 연쇄거래를 의미한다. 동인도 회사는 유럽에 소량의 인삼만을 팔았으며 그 덕에 매우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삼이 돈이 되기 시작하자 북미지역에서 인삼을 찾는 노력이 이뤄지고 캐나다에서 인삼이 발견된다. 기후가 동아시아와 비슷하다는 것에 주목한 성과였다. 캐나다 모피 상인들은 원주민을 동원해 캐낸 인삼을 수출하기 시작했고, 북미의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인삼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북미의 인삼은 화기삼이라 불리는데 이는 미국의 상선이 처음 성조기를 달고 광둥에 입항할때 그 깃발이 꽃처럼 보여 중국인들이 화기라 불렀고, 화기가 가져온 삼이라 화기삼이 된 것이다. 북미에서 인삼에 대한 경제적 열품은 골드러시 못지 않았다. 그리고 막 독립하여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미국이 국제교역에 참여하는데 소중한 자산이기도 했다. 미국은 식민지 시절 차를 매우 비싼 가격에 수입하고 있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를 통한 교역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독립후, 차 수요가 끊이질 않자 차 수요 해결을 위해 중국과의 직접 교역이 필요했지만 서부개척 이전이라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긴 항로를 이용할수 밖에 없었다. 자본이 취약했던 미국에게는 차교역을 위해 미국에선 쉽고 싸게 구할수 있으면서도 중국엔 비싸게 팔수 있는 물건이 필요했는데 당시로선 화기삼이 유일했다. 미국은 중국과의 첫 교역을 위해 군선이던 배를 중국황후호로 개조하였고 첫 교역물품으로 화물 27만달러어치중 무려 24만달러치가 화기삼이었다. 첫 화기삼 거래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상선은 미국으로 돌아와 1500%의 이익을 누리게 된다. 이후 60년간 화기삼 수출로 뉴잉글랜드 상인들을 큰 자본을 축적하게 된다. 반면 화기삼의 엄청난 공급으로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영국은 인삼교역에서 거의 발을 떼게 된다. 그리고 아편에 집중한다. 중국내에서 화기삼은 인기가 값어치가 높지 않았는데 공급이 과잉한것도 있었지만 포장상태가 만주산이나 한국산에 비해 매우 조악했으며 만주나 한국산의 높은 수준의 가공기술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아편 공급으로 아편중독자가 크게 늘어나자 인삼의 해독능력에 의존하여 인삼수요가 늘었는데 상류층은 고려인삼을 서민층은 화기삼을 이용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18세기 들어 인삼의 위상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는 중국에 대한 서구의 인식변화와 일치하는데 산업혁명으로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며 따라잡고 싶고 닮고 싶어하던 중국을 정체된 곳이자 계몽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엔 약전이란게 있었는데 의약품의 균질성을 보전하려고 제법, 성상, 성능, 품질과 저장방법등에 대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지침서였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선 약전 개혁이 일어났고 표준화를 위해 유효성분이 있는 것에 주목했는데 이점에서 인삼이 불리했다. 인삼의 주성분인 사포닌이 한 분자내에 비극성 분자와 극성분자가 공존하는 화합물로 비누처럼 거품형태로 발생하여 이를 분리, 정제하기가 무척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삼의 성분은 당시 기술로 분석이 어려웠고, 효능이 워낙 좋다보니 동아시아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쓰여 그 효과가 오히려 더욱 의심받게 되었다. 거기에 서구에서 인삼의 위상이 추락하게 된 것은 서구화가 되지 못한 면도 컸다. 아시아나 아메리카의 다른 향신료들은 서구 자체내에 많은 수요를 일으켰고, 이에 플랜테이션으로 재배하기 시작했지만 서구의 식민지들중 인삼재배에 적합한 지역이 없었다. 이로 인해 서구의 교역역사에서 인삼은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인삼의 성분이 진세노사이드라는것이 분명히 밝혀지고 효능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지금은 전 세계에서 인삼이 재배되고 있다. 한중일은 인삼이 고갈되기 시작한 18세기 말부터 인삼재배가 본격화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캐나다나 뉴질랜드에서도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약효가 좋은 고려인삼의 종자가 마구잡이로 유출되었는데 인삼자원에 대한 보호는 지금도 잘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거기에 최근 고려인삼은 열을 높이는 작용을 하고 반면 서구의 인삼은 열을 내린다는 프레임이 생겨나 열대국가에서는 오히려 서구의 인삼이 인기가 좋아지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인삼은 다른 향신료들처럼 대항해시대 서구의 중요한 상품 중 하나였다. 특히, 미국같은 나라에는 초기 자본을 형성하게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상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차이점은 다른 향신료들은 서구사회 자체에 수요가 높았던 반면 인삼은 인기가 좋은 중국의 상품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거기에 동아시아의 높은 가공수준을 화기삼이 따라가지 못한 점이나 오리엔탈리즘으로 아시아의 모든 것을 얕잡아보고 기술적 한계로 인삼의 유효성분이 적절히 추출되지 못해 약리작용이 뒤늦게 입증되면서 인삼이 서구의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게 이 책에서 말하는 결론이다. 주제가 무척 흥미롭고 재밌는 책이었지만 처음으로 다루는 주제를 발굴한 책이다보니 잘 정리가 안된 느낌도 조금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읽어볼만한 책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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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지음, 이은진 옮김 / 시공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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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도덕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덕목론도 있었고 신에 의한 강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간 이성에 바탕한 도덕론이 우위였고,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였고, 인간은 야만을 드러냈으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하나로써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지자 대안으로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의식, 감정, 직관등의 동물적 용어가 많은 학문 및 다른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이고 뇌의 상당부분도 그러하니 이런 변화는 많은 인간행위와 인간존재에 대해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도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려의 도덕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덕목론도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무엇보다도 공감에 의한 도덕이 강조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유별난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감은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초기 혈연중심의 이타성에서 소속집단 및 사회와 국가구성원으로까지의 이타성의 확대는 인간 도덕발달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대상에 대한 이타성의 확대에는 공감이라는 심리장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 공감능력은 거울뉴런이라는 생물학적 장치에 의해 그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쯤되니 공감은 동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서 이성보다도 오히려 더 과학적인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간도덕에 있어서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요한 공감이 도덕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공감의 도덕으로 우리 인간이 대단히 잘못되고 편협되고 편향되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저자는 공감에 대해 분명히 정의한다. 왜냐하면 우린 공감이라는 용어를 대단히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겨도, 불쌍해서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적당히 안타까운 것도, 불쌍해서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공감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선 공감을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한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단순히 인문학적 분류가 아니다. 양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회로 및 활성화 부분이 다른데 인지적 공감을 하는 경우는 내측 전 전두피질 부분이 작동하고, 정서적 공감의 경우에는 전대상 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뇌의 다른 경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화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두 공감 중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지목한다. 이 정서적 공감은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과도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은 인지적 공감에 정서가 더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공유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은 편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혈연이나 내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이타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공감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기반한 도덕은 편향성을 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내가 판사여서 흉악한 살인범에게 사형죄를 내려야할때 그 살인범이 나의 자식이라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는가? 최근 미국에서의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만 해도 알수 있다. 백인집단이나 흑인집단에게 외향이 다른 소수의 아시아인은 쉽게 같은 코로나의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정서적 공감의 다른 문제점은 형편없는 수학적 계산을 유도해 우리로 하여금 매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의 강력함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친숙한, 혹은 매우 가까운 대상, 내가 쉽게 접할 만한 대상에게만 도덕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실제 우리는 나의 자식같은 혹은 우리 동네에 있을 법한 귀여운 아이가 살해당하면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큰 관심을 일으켜 정치 사회를 흔든다. 하지만 같은 일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어났다면 그 반응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 정인이 사건에 주목해보자. 한 아이기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로 아이외 생면부지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납골당까지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대기업처버 도덕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덕목론도 있었고 신에 의한 강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간 이성에 바탕한 도덕론이 우위였고,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였고, 인간은 야만을 드러냈으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하나로써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지자 대안으로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의식, 감정, 직관등의 동물적 용어가 많은 학문 및 다른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이고 뇌의 상당부분도 그러하니 이런 변화는 많은 인간행위와 인간존재에 대해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도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려의 도덕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덕목론도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무엇보다도 공감에 의한 도덕이 강조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유별난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감은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초기 혈연중심의 이타성에서 소속집단 및 사회와 국가구성원으로까지의 이타성의 확대는 인간 도덕발달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대상에 대한 이타성의 확대에는 공감이라는 심리장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 공감능력은 거울뉴런이라는 생물학적 장치에 의해 그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쯤되니 공감은 동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서 이성보다도 오히려 더 과학적인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간도덕에 있어서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요한 공감이 도덕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공감의 도덕으로 우리 인간이 대단히 잘못되고 편협되고 편향되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저자는 공감에 대해 분명히 정의한다. 왜냐하면 우린 공감이라는 용어를 대단히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겨도, 불쌍해서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적당히 안타까운 것도, 불쌍해서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공감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선 공감은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한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단순히 인문학적 분류가 아니다. 양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회로 및 활성화 부분이 다른데 인지적 공감을 하는 경우는 내측 전 전두피질 부분이 작동하고, 정서적 공감의 경우에는 전대상 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뇌의 다른 경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화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두 공감 중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지목한다. 이 정서적 공감은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과도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은 인지적 공감에 정서가 더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공유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은 편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혈연이나 내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이타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공감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기반한 도덕은 편향성을 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내가 판사여서 흉악한 살인범에게 사형죄를 내려야할때 그 살인범이 나의 자식이라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는가? 최근 미국에서의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만 해도 알수 있다. 백인집단이나 흑인집단에게 외향이 다른 소수의 아시아인은 쉽게 같은 코로나의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정서적 공감의 다른 문제점은 형편없는 수학적 계산을 유도해 우리로 하여금 매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의 강력함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친숙한, 혹은 매우 가까운 대상, 내가 쉽게 접할 만한 대상에게만 도덕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실제 우리는 나의 자식같은 혹은 우리 동네에 있을 법한 귀여운 아이가 살해당하면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큰 관심을 일으켜 정치 사회를 흔든다. 하지만 같은 일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어났다면 그 반응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 정인이 사건에 주목해보자. 한 아이기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로 아이외 생면부지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납골당까지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대기업처벌법이 여당과 야당에 의해 졸속처리되었다. 매일 7명정도의 노동자가 산업체에서 사망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인이 사건보다 중대기업처벌법에 분노와 감정, 노력을 쏟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하지만 강력한 정서적 공감은 이런 간단한 수학적 계산마저 쉽지 않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정서적 공감으로 분노하기에 정치권은 대개 공감정치를 하게 된다. 때문에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보다는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단기적인 해결책으로 반응하게 되며 이는 역시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정서적 공감의 마지막 문제는 정서적 공감이 폭력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연구결과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크게 공감하는 상대가 피해를 당한 경우, 그 가해자를 폭력적으로 처벌하는 것에 훨씬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9.11사태다. 당시 분노한 미국인들은 아무런 합리적 증거없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그 결과 양 국가의 정치체제가 무너져 엄청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하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피해자에 대한 지나친 정서적 공감은 폭력을 옹호하는 쪽으로 강력하게 작용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석을 통한 적절한 판단 및 해결을 방해한다. 이로 인해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 그리고 관련 3자도 새로운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정서적 공감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초점이 좁고, 특수 사례에만 잘 끌리며 간단한 수학적 계산마저도 못하게 한다. 거기에 정서적 공감은 공감을 잘 하는 개인을 매우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것은 정서적으로 매우 피곤한 일이다. 이럴 경우 공감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매우 소진된다. 실제로 정서적 공감을 잘 하는 사람들은 연민이나 동정, 인지적 공감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타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나 ,과잉보호, 균형잡힌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서적 공감이 강한 사람들은 신체적 정신적 능력도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아무래도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인지 심장질환이나 당뇨, 암의 위험성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정서적 공감은 올바른 도덕적 판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망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케케묶은 이성을 다시금 꺼내든다. 이성에 의해 합리적인 도덕적 판단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연민을 더한다. 공감이 타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이라면 연민은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것이다. 그리고 연민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강한 동기와 더불어 따뜻함과 관심, 배려의 감정이다. 때문에 저자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이라는 오래된 용어처럼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정서적 공감에 매몰된 잘못된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이성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공감이 온전한 도덕의 바탕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이성 역시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도 인정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성의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이성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의 문제라고 말한다. 즉, 이성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동물적이기에 완전히 이성적일 수 없으며 충분히 이성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인간자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도구보다는 사용자가 문제라는 거랄까나. 실제로 그러한 측면이 있다. 인간이 이성에 대한 의심의 눈을 갖게 된것은 근현대사의 아픔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실수에 이성이 자리한 부분은 없다. 양차대전과 대학살, 인종차별, 냉전등은 이성적 판단의 결과물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했기에 일어난 결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 이성에 대한 문제 의식의 시작은 인간 이성자체라기 보다는 충분히 인간이 이성적이지 못했기에 발생한 것이란 생각이다.

 이 책은 도덕성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준 책이다. 책을 읽기 전엔 나 역시 공감의 신봉자에 가까웠다. 물론 공감은 중요하고, 사람을 선하게 만들며, 가까운 관계에서 매우 필요하며 적절한 거리두기만 된다면 매우 유용한 것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정서적 공감이 불러오는 도덕적 판단 잘못은 충분히 경계할만하다는 생각이다. 책은 뒷 부분에 좀 힘이 빠지는 편인데, 아무래도 과학적 근거가 좀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싸이코 패스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재미난데 통상 사이코 패스는 공감능력이 크게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는 사이코 패스의 경우 오히려 정상인보다 공감능력이 높다고 말한다. 사이코 패스는 사람을 크게 괴롭게 할 수 있고, 대개 매력적으로 범죄대상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인을 괴롭게 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면 그가 괴로울지를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며,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역시 높은 공감능력을 요구한다. 즉, 사이코 패스는 인지적 공감능력이 높고 정서적 공감 능력이 낮다고 볼 수 있으며 공감능력보다는 절제력, 억제력이 매우 낮고 잔혹하며 대담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연구결과 인간의 공감능력과 공격성 사이엔 의외로 별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하여튼 재미난 책이었다. 공감에 대해 신봉하는 분이나 의심하는 분 모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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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4-07 0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직접 읽지 않아서..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네요 ^^ 한가지만 얘기하면, 저자는 공감대신 이성을 추구하자고 주장하는데, 이성자체의 불완전성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문제라고 했는데, 같은 논리로 보면 공감 역시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공감을 사용하는 또는 그것을 발휘하는 인간의 한계를 언급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닷슈 2021-04-07 14:31   좋아요 0 | URL
이성에 바탕한 차가운 도덕은 상당히 공리주의적 판단을 일으키기에 저자는 사실 인지적 공감과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에 의한 도덕적 판단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공감을 완전히 도덕에서 제거했다기보다는 도덕적 판단에 문제를 일으키는 정서적 공감의 배제를 주장한 듯 합니다. 즉, 공감전체보다는 일부분에 대한 비판이죠. 이성에 대한 부분은 책에서도 좀 아쉬웠습니다. 공감은 언급한 것처럼 최근 많이 주목을 받았고, 본성의 일부분으로 진화론에서 많이 다루지만 이성에 대한 부분은 연구가 오히려 별로없죠. 이성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별로 없고, 그에 대한 연구도 없는게 아쉽습니다. 그래서 책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이 약하죠.

북다이제스터 2021-04-07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과 비슷한 결론, 즉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는 책 <옳고 그름>을 읽으적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저자와 동일하게 이 책 저자도 분명 ‘공리주의자‘일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공리주의자들은 여전히 죽지도 않고 계속 살아남는 무서운 집단인 것 같습니다.ㅠ)

말씀하신 책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혹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면, 적어도 이성과 감성(공감, 직관, 욕망, 무의식)이
동등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철학이나 뇌과학에서는 ‘이성이 감성의 시녀‘즉, 감성이 이성을 지배한다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지 감성을 억누르고 이성에 따라 판단할지 궁금해 집니다.
<옳고 그름>에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혹시 이 책에는 있는지요?

닷슈 2021-04-07 14:33   좋아요 1 | URL
이성에 대한 그런 부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 뒷부분이 약하다고 말한겁니다. 이건 저자 자신의 한계라기보다는 최근 과학이 인간의 동물적 부분에 많이 주목에 감성에 집중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성에 대한 연구도 진화론적으로 신경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도 저자는 직접 언급은 안하지만 공리주의자로 보입니다. 연민과 인지적 공감에 바탕을 둔 공리주의자라면 좀 이상할까요.

초딩 2021-05-08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닷슈 2021-05-08 19: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5-08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닷슈 2021-05-08 19: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5-08 2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닷슈 2021-05-09 09: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5-09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즐거운 날 되세요~

닷슈 2021-05-09 09: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1-05-09 0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당선 축하새요.

닷슈 2021-05-09 11: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갈등 도시 -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시민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서울 선언 2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201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은 전체 5200만 인구 중 1000만 가량이 서울에 산다. 그리고 인접한 경기도에 1200만 정도가 살며 이들 중 대부분은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 도시에 거주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생각해도 서울과 관련한 사람의 수는 한국인구의 절반에 달한다. 여기엔 지극히 그 수가 적을 조부모세대부터 서울에 거주한 토박이도 있을테고, 조부모나 부모 세대가 서울로 올라온 2-3세대들, 그리고 지방에 살고있지만 과거엔 서울에 살았거나 아니면 지금 서울을 직장이나 학교등으로 생활권으로 둔 이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듯 서울은 상당히 많은 한국인의 삶의 터전이지만  사람들에게 서울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은 분명 고향이겠지만 웬지 고향같지 않을 것 같고, 살아가는 우리 동네임이 분명한데 웬지 우리 동네 같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서울이라는 도시가 정체성없이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변화엔 사람도 주변 건물도 자연도 포함된다. 실제 서울은 메갈로폴리스이자 첨단도시로 매우 빠르게 바뀌고 있다. 서울을 고향으로 삼는 사람들 중 서울내 수십년전 그들이 자라고 태어난 지역의 경관이며 이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얼마나될까? 아마 산천을 제외하고 몇개의 건물이라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면 매우 반가울 것이다. 이러니 고향같지도 동네같지도 터전같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문헌학자인 김시덕이 쓴 '갈등 도시'는 서울에서 직접 살아가는 도시민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자본의 논리로만 모습을 변모해가는 서울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김시덕이 보기에 서울은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우선 행정의 연속성이다. 지금의 서울은 조선의 한양과 일제시대의 경성, 그리고 광복 이후의 현대 한국의 서울의 연속성상에서 생성된 곳이다. 그 과정에서 매우 크게 확대되었고, 지배주체도 바뀌었지만 놀랍게도 행정의 연속성이 발견된다. 우여 곡절끝에 완성된 경인 아라뱃길은 원래 일제가 기획했던 것이었고, 서울, 경기지역의 본래 군부대의 위치는 일본군-미군-한국군이 바통을 이어 주둔했을 뿐 그 위치가 같다.  

 또 다른 특성은 도시 곳곳에 갈등이 산재한다는 것이다. 김시덕은 시층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지질학의 지층과 비슷한 개념으로 땅에 오래된 지층이 순서대로 켜켜이 쌓이는 것처럼 도시도 과거의 모습을 여러형태로 간직하며 이것이 현대의 모습과 공존한다는 것이다. 실제 강북의 사대문안 원심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은 과거 경기도의 농촌지역이었다.(이는 강남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서울에는 본래 그 지역을 터전으로 삼던 농민과 문중세력,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며 이후에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세력과 그 후손들, 그리고 개발이익을 위해 들어온 새로운 세력들이 재개발, 재건축을 두고 팽팽히 대립한다.

 세 번째특성은 보존의 편혐함이다. 서울은 아직 상당히 많은 과거의 흔적인 도시화석을 곳곳에 갖고 있지만 이는 개발 논리와 거주를 위해 빠르게 철거되고 있다. 상당한 거주 수요때문에 이런 개발은 피하기 어려운데 그럼에도 일부 유의미한 것을 역사적으로 보존하여 과거의 모습과 현대의 모습을 공존시켜가야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서울은 개발과정에서 보존하는 유산도 매우 적지만 그 보존의 대상을 조선시대 왕가와 양반들만의 흔적만으로 삼는 것이 또 문제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이나 근현대 노동자의 삶의 흔적이 담긴 곳에 전혀 보존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시대적으로도 오로지 조선에만 국한된다. 

 마지막 특성은 서울의 특권의식과 경계지역들이다. 서울은 현대 한국의 수도로서 특별시로 지정되고 상당히 많은 이권을 누려왔다. 주요 특권중 하나는 서울을 거주 및 상업지역으로만 개발해가면서 주요 필요시설들을 외곽으로 밀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요양원이나 석유비축기지, 물재생센터, 고아원, 군사시설, 화장장 등이 해당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처사에 저항이라도 하는듯 경기도의 도시들은 이런 시설들이 자신들의 지역내에 위치함에도 하나같이 시설 이름 앞에 '서울'이라는 두글자를 붙였다. 서울이 아닌 경기도임에도 서울이름이 붙은 이런 류의 시설이 유독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럼 구체적 지역으로 들어가본다.


1. 봉천-신림동

이 지역은 내가 나고 자라 성장한 지역이라 좀 더 재밌게 본 부분이었다. 대학을 진학하고 이사하면서 지역을 떠나게 되었는데 여전히 지역에 사는 친구들에게 동이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신림동은 무려 10개가 넘는 동이 있었고 봉천동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들의 이름이 모조리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동은 법정동과 행정동이 있는데 법정동은 각종 법규로 규정한 동이고 행정동은 법정동을 쪼개거나 붙이는등 조정을 해서 실제 현실에 맞게 바꾼 것이다. 즉, 봉천동과 신림동 지역은 법정동의 이름을 유지하되 행정동의 이름만 바꾼 것이다. 

 봉천동과 신림동은 서울의 많은 지역이 그러하듯 초기 철거민이나 도시 이주민등 빈민들로 형성된 지역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남부순환도로라는 간선도로가 개통되고 지하철 2호선이 지나고 하천이 복개되고 서울대학이 들어서 고시촌이 생기며 그 이미지가 서서히 변화했다. 그리고 이름의 변경은 이런 지역의 계급적 변경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 신림동이란 이름은 고시촌이 주는 좋은 이미지로 인해 남은 반면 봉천동의 이름은 빈곤 이미지로 인해 완전 사라졌다고 한다. 


2. 파주와 고양시의 미군위안부들

 파주와 고양시는 넓어서인지 도시의 중심이 하나가 아닌 여러 곳에 산재한 느낌이다. 하지만 과거 전체적인 무게중심이 동쪽에 있었다면 지금은 모두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파주와 고양은 원래 한반도의 중앙지역이었지만 분단으로 인해 남한의 최북단 변경지역이 되고 많다. 때문에 넓은 평야지대로 인해 개발이 용이했음에도 오랫동안 군사적 이유로 방치되어 왔다. 실제 일제는 인천과 서울을 잇는 서남라인의 개발을 중시했었다. 하지만 한국전 이후 한국정부는 군사적 방어의 이유로 개발이 쉬운 서쪽대신 고양-은평-강북-강남-성남을 잇는 서북동남라인을 개발했다. 지금은 이 지역이 모두 개발되어 편리해보이지만 경부고속로만 타고 이지역을 이동해봐도 얼마나 많은 터널과 산들이 존재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분단 이후 1966년까지 파주에는 미국부대가 주둔했고 기지촌만 38곳에 달했다. 당시 미군위안부 여성만 4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책에선 미군위안부란 용어를 쓰는데 일본군 위안부처럼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강제적이고 비인권처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시골에서 많은 여성들이 취업알선이나 다른 일자리인줄 알고, 혹은 인신매매등으로 미군위안부가 되었다. 이후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았고, 정부의 입김도 상당히 작용해 어쩌다 탈출해 경찰서로 갔음에도 경찰자체가 한패라 다시 끌려가는게 다반사였다 한다. 특히, 기지촌 여성들은 매번 성병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았는데 감염이 확인되면 강제로 페니실린 주사를 투여받았다. 부작용이 매우 강해 건강에 치명적 손상을 입거나 이로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미군위안부란 용어가 충분히 사용된만한 것이다. 

 하여튼 1971년 미 7사단과 1군단이 철군하면서 기지촌은 그 기능이 사라져 크게 쇠퇴한다. 그 유명한 용주골도 이 때 쇠퇴하는데 영업대상을 한국인으로 바꾸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간다. 이후 일산신도시가 개발되고 서울지역에 성매매와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집창촌이 서울외곽으로 튕겨나가 용주골은 어처구니없게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3. 을지로

어릴적 지하철을 타며 을지로가 뭘까 무척 궁금한 적이 있다.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책에 의하면 을지로는 글자 그대로 길의 이름이다. 이 길은 무척 유서가 깊어 저자는 조선은 물론 고려시대까지도 그 유서가 이어질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을지로는 지금의 서울시청에서 시작해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 근처 한양 공고에서 끝나는 길의 남북쪽 블록이며 서울의 구도심인 사대문 안 지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4개의 큰 길 가운데 북쪽으로는 종로, 남쪽으로는 마른 내로와 퇴계로 사이에 놓인 곳이다.

 이중 을지로3-4가는 매우 유서가 깊은데 이들이 현대적 면모를 같게 된 것은 일제시대다. 일본인들이 19세기 말부터 한국은 침탈해오며 청계천 남쪽에 거주하며 그 세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안을 느낀 한국인들이 울타리를 치듯 개량한옥을 대거 지었다. 하지만 일제시대 이후 2차대전중 미군에 의한 경성폭격 가능성이 제기되자 대규모 화재를 피하기 위해 울지로3-4가를 중심으로 종로부터 충무로 사이의 좁고 긴 구간의 목조주택을 철거했다. 화재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련된 공간에 광복후 세운상가, 청계상가, 삼풍상가, 진양상가들을 들어서게 된다. 


4.강남

 강남은 강남, 송파, 서초 3구를 말하지만 성남분당과 판교, 용인수지, 수원광교, 화성동탄까지를 확장 강남으로 보기도 한다. 강남지역은 본래 주거지로 개발되어서 서울에서 가구수가 가장 많고 인구서도 많으며 지역도 생각보다 넓다. 최근의 이미지로 고급 고층 아파트가 빽빽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 비율이 절반 이하이며 자연부락과 단독주택, 빌라가 더 많은 수를 차지한다. 

 강남엔 세 가지 시층이 있는데 농촌시절의 강남 모습을 드러내는 구마을과 서울의 경계지로 강남에 형성된 과거 빈민촌, 그리고 영등포의 동쪽인 영동이라 불리며 영동개발시기 지어진 단독주택과 주공, 시영아파트, 시영주택들이 두 번째 모습, 마지막은 지금의 모습으로 주류가 된 고급 고층 아파트와 주상복합, 고층건물들이다. 

 강남은 본래 농촌지역인데 뽕나무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실 배나무가 훨씬 많다. 이는 강남지역에서 뽕나무는 조선시대에 재배되었고, 현대에들어서는 배나무가 재배되었기 때문이다. 송파구 풍납동에는 의의로 삼표 레미콘 공장이 있는데 이 업체는 레미콘 1-2위를 다투는 업체다. 이는 서울근접성에서 얻는 경쟁력으로 가능한데 강남지역 주민의 반대로 업체의 이전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강남은 애초 사대문 안 원도심과 일제시대 개발한 영등포와 더불어 서울의 3대 도심으로 기획되었다. 때문에 공업, 광업기능보다는 거주 상업기능을 우선시하였는데 이런 강남에 레미콘 공장이 있다는게 무척 의외였다.

 강남은 박정희 정권때 개발되었느데 그 이유는 안보였다. 북의 공격시 강북에 집중된 서울인구의 방어가 어려웠기에 방어가 손쉬운 한강 이남 지역에 강북의 인구를 이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때문에 강남엔 과거에 만들어진 안보시설이 상당히 있는 편인데 비싸기로 유명한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내부 곳곳에 군사용 벙커시설이 설치되었다는 것이 일례다. 

 성남은 과거 이름처럼 넓었던 광주의 일부로 광주대단지로 인해 형성된 도시다. 원래 도시빈민들은 대개 일용직으로 일하고, 그들의 일은 대개 도심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들은 쪽방같은 곳을 감수하면서도 도시에 거주한다. 서울은 개발과정에서 철거민이나 수재민, 빈민들을 외곽으로 쳐냈는데 이 과정에서 광주대단지가 생겨난다. 하지만 위와 같으 이유로 빈민들은 다시 도심으로 돌아갔고, 이들이 떠나면서 남긴 토지에 대해 복잡한 부동산 거래가 일어나며 정부가 이를 규제한다. 그과정에서 시민 봉기가 1971년 일어났고 이를 정리하고 주민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탄생한 것이 성남이다. 

 용인은 더 재밌다. 놀랍게도 용인은 일제시대 일본제국의 수도 후보였다. 물론 다른 두 곳이 일본본토이고 한 곳이 용인이라 가능성은 높아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용인이 국토 중앙부에 위치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지역의 문화수준이 높고, 기성도시와 적당한 거리에 있기에 새로운 후보로 삼았다고 한다. 


이 책은 정리한 지역 외에도 서울의 다른 전 지역과 서울권으로 분류되는 경기도의 주요 도시들을 다뤘다. 서울이 확장하면서 철거민이나 빈민, 수재민등 기존 주민과 혐오시설을 경기도로 밀어내며 확장한 것, 그로 인해 애매한 경계지역에 혐오시설이 서울의 이름을 붙이고 어색하게 남아있는 것들, 개발의 논리만으로 서민의 모습이 남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잘 되어야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 그리고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이 지역을 자신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일수 있지 않을까? 서울 시장 선거를 앞두고 부동산 폭등에만 정치권이 집중하며 이런 문제는 모두 뒷전인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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