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갈림길, 나가사키 지성인들의 도시 아카이브 2
서현섭 지음 / 보고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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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카시 하면 짬뽕과 원폭이 떠오른다. 상당히 상반된 이미지인데 실제 나가사키 역사도 그렇다. 나가사키는 일본 큐슈의 서남쪽에 있는 도시로 지리적으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류쿠, 동남아시아 쪽을 향하고 있다. 자연히 일본 교역과 무역의 중심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지역이다. 상하이까지는 850km 부산까지는 49.5km 거리다. 인구는 140만정도인데 면적이나 인구 모두 일본 전체의 1%정도에 해당한다. 다만 평지가 적고 해안선은 무척 길다. 


1. 나카사키의 교역 

나가사키를 처음 찾은 서양인들은 대항해시대를 가장 먼저 연 포르투갈인이다. 나가사키 북서쪽에는 히라도라는 섬이 있는데 14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본거지였다. 그러던 것을 15세기 포르투갈이 먼저 들어와 1561년 히라도에 상관을 개설한다. 포르투갈은 1543년 조총을 전수하고 상관을 설치하여 히라도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활발히 교역한다. 하지만 막부는 카톨릭 포교 행위를 침략 전단계 행위로 인지하고 금교정책을 강화한다. 이에 따라 1624년 스페인선의 내항이 금지되고 상관도 폐쇄된다. 포르투갈 역시 기항지가 나가사키로 병합되고 더 좁혀져 1634년 신축한 인공섬 데지마로 축소된다. 1639년엔 포르투갈의 내항도 금지되는데 그들의 뒤를 이은게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스페인과 경쟁하며 막부측에 카톨릭의 포교와 침략을 이야기하였고 이것이 먹힌 셈이다. 

 1609년 막부는 동인도회사에 네덜란드 배는 일본의 어느 항구에도 입항해도 좋다는 허가장을 발부한다. 히라도 상관이 개설되고 네덜란드는 여기서 식량을 얻고 일본 용병을 동남아로 송출하기 까지 한다. 막부는 나가사키유력 상인 25명에게 공사비를 각출하여 부채꼴 모양의 데지마를 조성하였는데 네덜란드 만큼은 종파적으로 무해하고(신교이다) 통상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특혜 대우하였다. 데지마의 연간임대료는 포르투갈은 은80관에 달했는데 네덜란드는 55관으로 매우 저렴했다. 막부는 데지마 상관에 가족단위의 이주를 불허하여 상관장인 카피탄을 비롯해 회계, 상주원, 창고관리원등이 모두 남자였다. 데지마 상관의 책임자인 카피탄은 에도산푸라 하여 에도를 방문해 쇼군을 알현하는 특혜가 있었다. 그들은 무역허가의 대가로 예물을 헌상했는데 의외로 안경이 매우 인기였다고 한다. 

 1642년 나가사키 일대에 흩어진 유곽을 정리하여 현재의 마루야마로 이전한다. 에도 막부시대에는 에도의 요사와라, 교토의 시마바라, 나가사키의 마루야마가 일본의 3대 유곽이었다. 나가사키 마루야마의 명성은 전국적이었는데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유일한 유곽인데다가 쇼군의 직할령인 나가사키출신만 그 적을 올릴수 있어서 였다. 1690년 마루야마의 황금기에는 유녀수가 무려 1443명이었고 네덜란드인을 상대로는 그 가격을 일본인, 중국인보다 3배를 더 받았다. 유녀들은 데지마로 출장 및 체류가 가능했으며 임신하게 되면 사내아이는 중절하게 여자아이인 경우는 출산했다. 다만 막부의 쇄국령이 본격화한 1636년에는 혼혈아와 서양인 첩 유녀들이 모두 마카오와 자카르타로 추방된다.

 나가사키는 서양인들의 무대였던 것 같지만 사실 17세기만 해도 중국인이 주인공이였다. 당대 최구의 경제대국과의 교역이고 지리적으로 인접하다보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1562년 중국상선이 나가사키에 최초 내항하는데 임진년 이후 갈등으로 10년간 교역이 중단된다. 1610년 중국인 선주 주성여가 막부로붜 거래허가서인 슈인장을 받아 일본각지에서 무역을 하고 1639년 포르투갈의 내항이 금지된 후에는 중국상선이 사실상 나가사키 경제를 좌우하게 된다. 1688년이면 나가사키 입항 중국배는 무려 200척에 달했고 인구 5-6만 나가사키인중 1만 가량이 활보하는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이 크게 늘어나며 자연 문제도 생겨나 이들을 수용할 도진야시키가 생겨난다. 1689년 건설했으며 수가 많은 만큼 9400평으로 데지마의 두배크기였다. 1732년이면 도진야시키 방문 유녀가 2만 4644명에 달한다. 중국에 대한 교역은 일본 당국이 향후 의도적으로 줄이는데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생사를 주로 수입하고 금과 은을 수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16세기 초반 조선으로부터 회련법을 배워 순도 높은 은을 전세계로 많이 수출했지만 이즈음이면 크게 고갈되어 국내 통화로 사용할 양의 확보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나가사키에 퍼진 난학과 문화

1774년 타헤르 아나토미아라는 네덜란드 해부학서가 해체신서라는 이름으로 번역된다. 일본최초의 서양의학서인데 이 때 한의학에는 없는 신경, 연골, 동맥, 처녀막등의 단어가 생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 난학이 퍼지니 당연히 외국어에 대한 학습 필요성이 생겨났는ㄴ데 그래서 사전이 편찬된다. 포르투갈어 사전은 직즉 있었지만 네덜란드어 사전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미친 영향에 비해 매우 늦게 편찬되었는데 1854년에 이르러서야 사전 루프 하루마가 출현한다. 1808년 페이튼 호 사건으로 일본은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영어공부에도 매진하게 된다.

 스페인 포르투갈 선교사는 16세기말 나가사키에 남만과자 카스텔라를 전파한다. 설탕, 밀가루, 계란을 혼합한 카스텔라는 처음엔 쇼군이나 상위층만 즐기는 귀중품이었지만 에도시대 중엽엔 서민들도 즐길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정작 포르투갈엔 카스텔라라는 빵이 없는데 포르투갈인들이 스페인 카스텔라 지역의 빵이라는 표현을 일본인들이 카스텔라로 오해해 명명된듯 하다. 1624년 개업한 후쿠사야가 나가사티 카스텔라의 원조 가게다.

 덴푸라도 카톨릭신자들에게서 전파되었다. 카톨릭 신자들은 사순절에 부활절을 앞두고 단식, 절식, 육식을 금하는데 생선 프라이는 가능했다. 이 생선 튀김이 콰르투 템포라스이고 이것이 덴푸라로 변형된다. 이전에 일본엔 튀김요리가 없었지만 아무 생선이나 저렴하고 가볍에 튀겨 즐길수 있어 인기가 상당해졌다. 

 네덜란드 의사 지볼트는 일본 의학의 선구자다. 그는 군의관 자격으로 나가사키에 도착해 데지마 상관에서 매주 3회 서양의학, 과학을 배우고자 하는 통역들과 의사들을 가르쳤다. 강의와 실습을 병행하고 천연두 백신 접종, 백내장수술등을 시연했다. 지볼트는 훌륭한 식물표본, 논문 작성자에게 전문서나 현미경을 선물했고, 과정을 마친 학생에겐 네덜란드어로 작성한 서양의학 수료증을 수여했다. 당대엔 최고 권위의 의사면허인 셈이었다. 지볼트는 일본 최초의 의료사숙 나루타키주쿠를 개설하고 주1회 강의와 시술을 하여 천하의 영재가 몰려들었다. 놀랍게도 수강료와 진료비가 없었으며 가난한 자에겐 식사까지 무료제공하였다. 안과, 산부인과, 의과등 여러분야의 의사, 천문학자 150명이 배출되어 일본 전역에 선진 의료기술과 과학지식이 전파되었다. 지볼트는 일본에 있으면서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 일본식물지, 일본동물지를 출간하여 유럽에서 일본 권위자로 명성을 얻기도 한다. 


3.기리시탄

 일본 카톨릭과 그 신자를 일본에선 기리시탄이라 한다. 1549년 동방의 사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상륙한 것이 카톨릭의 첫 일본 전래이다. 일본에 온 선교사들은 곧 일본인이 영주에 절대 충성함을 알게되고 타겟을 영주로 바꾸게 된다. 이에 1563년 나가사키와 시가의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가 개종하게 되고 지역을 예수회에 기진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다른 영주의 침략을 방어하고 무역 관세 수입을 얻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실제 일본의 다른 영주들은 외세와의 교역에만 관심이 있었지 기리시탄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다노부나가는 경쟁세력인 불교세력을 탄압하고자 기리시탄을 공인하였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히데요시는 처음엔 기리시탄에 관용적이었지만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때만해도 남만 무역은 장려되었고, 포교도 어느 정도 묵인하에 이루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열자 1605년 20만, 1615년 50만의 기리시탄 신자가 생겨난다. 기리시탄의 교리는 주종관계와 상하질서를 거부하고 할복과 일부다처제를 부인해 일본 지배층의 질서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막부는 평등사상으로 인한 민중봉기 및 일부 경제적 이득을 노린 영주와 기리시틴 세력과의 결탁 가능성으로 인해 1614년에 금교령을 내리고 1635년까지 30만이 순교한다. 기리시탄의 시련은 1893년 금교령이 해제되고서야 풀린다. 

 1637년 나가사키 인근 시마바라에서 난이 일어난다. 시마바라와 아사쿠사에서 영주의 학정과 카톨릭 신교에 대한 박해에 항거한 반란으로 농민과 카톨릭 주축이었다. 사마바라, 아사쿠사는 기리시탄 다이묘인 아리마씨와 고니시씨의 영지로 주민 대다수가 카톨릭이었다. 하지만 기리시탄 임산부 고문치사 사건과 건축세, 선반세, 창문세, 출산세등 영주의 학정으로 백성들이 무장봉기한다. 막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규슈전 지역의 번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네덜란드 히라도 상관까지 지원을 요청해 그들에게 반란군을 향해 포격하게 한다. 막부는 10만 병력으로 하라성을 점령해 3만 반군을 모두 학살한다. 이후 막부는 네덜란드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게되고 반란을 야기한 시마바라 영주와 아사쿠사 영주를 처벌한다. 시마바라 영주 가쓰이에는 막부역사상 유일하게 할복자살이 아닌 참수를 당한다.  

 2010년 나가사키 나카마치 성당에서 이문희 대주교와 나가사키 대교구장 다카미 미쓰아키 대주교가 성로렌조 성당 설립 4백주년 공동 미사를 집전했다. 성로렌조 성당은 임진왜란때 큐수로 끌려온 조선인이 1610년 세운 성당이다. 당시 조선인 무려 1300이 세례를 받고 나가사키에 스페인 순교자 로렌조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하는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1614년 막부의 포교금지령으로 성당이 4년만에 파괴되고 만다.


4. 개항

 도쿠가와 막부는 개국 이후 해상 방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2척의 군함을 발주한다. 1855년 이 군함을 운용할 해군 양성을 위해 나가사키 해군전습소가 개설된다. 네덜란드의 빌렘3세는 증기선 솜빙호를 쇼군에 증정하고 일본은 이를 관광호로 개명하요 해군전용전습소로 사용한다. 1857년에도에 쓰키지군함조련소가 신설되며 해군전습소는 사라진다.

 일본의 에노모토는 일본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데 그는 유학하여 피셸링 교수에게 해상국제법을 익히고 이를 일일히 번역하여 만국해율전서라는 제목으로 제본한다. 그는 프랑스, 영국을 방문하여 제철소, 병기공장을 시찰하고 1864년 발발한 덴마크, 프로에센, 오스트리아 전쟁도 참관한다. 귀국후 막부의 해군 부총재가 되지만 막부와 유신정부간의 보신전쟁에서 패해 8대의 함대로 탈출하여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를 점령하여 3천병사와 항전한다. 전세가 기울자 에노모토는 적장 구로다에 만군해율전서를 맡기고 이를 본 구로다는 에노모트의 깊은 식견과 해상법에 대한 전문성에 감탄한다. 결국 에노모토는 3년간 복역 후 특사로 풀려나 1874년 주 러시아 공사가 된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을 하고 조선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권력 정치의 감각을 익힌 하나부사 요시모토를 조선으로 전출할 것을 건의한다. 

 글로버는 영국인으로 일본에 글로버 상회를 설립한다. 일본에 차수출을 하는 한 편, 사쓰마번, 조슈번의 요청으로 화약, 총기류, 함선류등을 상하이에서 수입을 주선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죽음의 상인이란 별칭도 얻는다. 글로버는 1865년 나가사키 오구라 해안에 일본최초의 철도를 부설하고 상하이에서 수입한 증기기관차1대를 주행하여 주목을 받는다. 글로버의 개항기 역할을 독보적이어서 일본 최초의 선박수리소, 다카시마 탄광 개설 자원, 일본 최초의 등대건설, 일본 최초의 조폐기 수입을 그가 수행한다. 글로버는 일본 개화기 중요인사들의 해외 유학을 도왔으며 막부의 붕괴를 예감하고 반군쪽을 지원한다. 다만 1868년 도마 후시미 전투에서 글로버는 반군에 최신 철포와 화기를 팔았는데 내전의 후유증으로 메이지정부로부터 1년간 대금을 받지 못해 상회가 파산하고 만다. 글로버는 파산후에 미쓰비시의 지원으로 부사장 역할을 하였고 1885년 일본 맥주제조회사를 설립하는데 이게 지금의 기린 맥주다. 글로버는 1908년 메이지 유신에 대한 기여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급 훈장을 수여하게 된다. 

 한편 이시기 나가사키에는 중국 푸저우 출신의 가난한 유학생이 다수였다. 중국인 크리스천 천핑순이 값이 싸면서도 푸짐한 영양만점의 중국식 우동을 개발하였고 이것이 짬뽕의 시작이 되었다. 짬뽕은 모든 것을 섞었다는 뜻과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샤뽕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짬뽕 면은 밀면에 탄산나트륨이 주성분인 도아쿠를 섞어 먼들며 이로 인해 밀면이 잘 변질되지 않고 짬뽕면 특유의 맛을 내게 된다. 


5.원폭과 평화

 원래 2차대전 중 제2원폭 목표지는 후쿠오카현의 고쿠라였다. 하지만 구름과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로 방향을 선회해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한다. 24만 시민 중 7만 4천이 죽고, 7만 5천이 부상당했으며 2만 7천 조선인중 1만이 사망한다. 나가사키에는 조선소에서 전함과 어뢰를 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폭격의 타겟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8년 나가사키 시의회에서 공산당 시마타 보쿠의원과 모로시마 히로시 시장의 질의 응답중 시장이 천황이 전쟁중지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오키나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참극이 있었다고 발언하였다. 지방의 일이었지만 이것이 석간신문과 TV 뉴스에 방영되어 항의가 빗발한다. 하지만 건강한 시민사회세력도 있어 시장은 지지서명도 일일 1만 4천을 얻고 최종적으로는 38만명의 지지서명을 받기도 한다. 한편 우익단체는 시장을 위협하였는데 1990년 다지리 가즈미가 시장에게 총격을 가한다.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모토시마 시장은 살아남는다.

 그는 사회적 약자인 재일 조선인, 중국인에 큰 관심을 가졌고, 조선인 원폭 위령비도 평화 공원 밖에 있던 것을 1979년 공원안으로 이전한다. 

 오카마사하루는 목사이자 나가사키 의원이고 나가사키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운영했다. 그는 일본 정부의 가해자 배상책임 문제를 거론하고 조선인 원폭 피해실태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원폭과 조선인 전 6집을 간행한다. 1979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건립하였고 하시마에서 1925년에서 1945년 사이 사망한 조선인 1222명에 대한 사망진단서를 찾아내 이들 대부분이 위험한 작업장에 배치되어 압사, 질식사, 폭사했음을 밝혀 이를 원폭과 조선인 4집에 기록했다. 마사하루 목사는 말년에 일본 가해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재일 한국인 차별 철폐, 정부 보상 실현을 위한 자료관 설립에 심혈을 기울이다 사망한다. 

 군함도에서는 조선인이 1939년부터 집단 연행되었는데 조선인은 지하 1천미터 이상 온도 40도 이상의 환경에서 근무하였다. 군함도에서는 1925년에서 1945년까지 1295명이 사망하였는데 일본인은 겨우 58명 조선인 1222명 중국인 포로 15명이었다. 

 전후 조선인 징용공 200명은 귀향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는데 태풍으로 배가 긴급회항하다 나가사키 해안의 계보단이 이를 막아 난파되어 무려 160명이 수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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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먼저 시작하는 학교자치, 스쿨퍼실리테이션 - 교사와 학생, 함께 주인이 되는 학교 만들기
권재우 지음 / 아이스크림(i-Scream)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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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민주국가가 분명하며 아시아,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 그 수준이 단연 최고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서구복지사회국가와 비교한다면 아직 나아갈 길이 먼게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의 핵심은 얼마나 시스템이 잘 받쳐주느냐, 시민들의 민주성이 어느정도이냐, 그리고 실권을 쥐고 있는 각 조직의 리더의 민주주의 실현의지에 어느 정도인지에 달려있다고 본다. 얼마전 엠비씨 뉴스에서 한국의 50대에 대한 전문가 분석이 있었는데 젊은 층이 보는 한국의 50대는 상당히 비민주적이었다. 약간 놀랍게도 50대 자신들도 스스로 어느정도 비민주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여튼 젊은 층의 평가는 적나라했다. 한국의 50대는 한국민주주의의 기틀인 시스템, 그리고 실권을 장악한 세대로 그들의 비민주성이 바로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보여주는 가장 큰 지표라 생각된다. 하여튼 갈 길은 정말 멀어 보인다. 

 이런 민주주의의 씨앗을 놓는 것은 단연코 교육현장이 된다. 하지만 학교엔 민주주의가 없다. 학생은 오랫동안 주어지는 교육만을 실행하는 수동적 존재였으며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역시 행정의 말단도구로 그져 주어진 교육내용과 지시를 수행해왔다. 그런 학교현장에 변화를 가져 온 것은 혁신교육이고 그래서 혁신교육은 무엇보다도 학교의 민주성을 중시한다. 

 하지만 학교현장에서의 민주주의는 정말 쉽지 않다. 제도적으로 학교장에게 예산 및 주요결정의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고, 교사 집단 및 학생, 학부모는 학교에서 민주적으로 뭔가를 실천해본 경험이 없다. 그런 학생과 교사집단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법을 알려준것이 이 책 스쿨퍼실리테이션이다. 

 퍼실리테이션은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고, 합의할 때, 중립적 입장에서 의사소통을 촉진하는 활동이다. 퍼실리테이터는 리더나 사회자가 아니고,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떤 사람들을 모아 어떤 논의를 해야하는가라는 회의를 디자인한다. 중립적 입장에서 팀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팀워크를 이끌어 최대한의 성과를 내도록 촉진하는 사람이다. 회의 구조는 크게 절차와 내용으로 구분되는데 절차는 회의운영시간과 의사결정방법, 마무리 방법등 프로세스이고 내용은 토의와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콘텐츠를 말한다. 여기서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은 절차는 책임지되 그 내용은 구성원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절차는 중립성을 통해 신뢰하는 분위기가 서로 조성되고 서로를 지지하는 학교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혁신교육 초창기 학교현장을 개혁한다는 사명감 아래 강하게 방향성을 갖고 학교를 밀고나아갔는데 여기서 기존 교사집단들과 충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성공한 혁신학교들은 하나같이 마음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거나 혁신교육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내신을 내고 다른 학교로 이전하면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주체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불거졌는데 최근 학교 퍼실리테이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부작용으로 개혁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책에는 구체적인 사례도 실려있는데 퍼실리테이션의 과정으로 사전점검, 생각꺼내기, 생각모으기, 평가하기, 의사결정, 마무리를 제시한다. 사전점검에선 워크숍을 준비하고 생각꺼내기에선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발산하며, 생각모으기에서는 비슷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분류하고, 평가하기에서는 분류된 아이디어를 분석 평가하며 의사결정에선 최종 아이디어를 선택한다. 

 합의를 찾아가는 '주먹 오' 방식도 있다. 기본적으로 다수결이 아닌 합의를 목표로 하며 구성원들은 다섯손가락의 갯수에 따라 특정 의견에 따른 동의 정도를 표현한다. 다섯손가락을 모두 펴면 가장 강한 찬성이고 0이면 절대반대이다. 합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0을 한명이라도 제기하는 의견은 폐기한다. 그리고 1이나 2점 정도 밖에 주지 않은 의견은 그 의견에 대해서 사람들의 견해를 듣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의견들이 4나5로 갈수 있는지를 묻고 1,2점을 준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새로운 대안에 대해 다른 구성원들이 서로 합의 및 논의한 후 새롭게 합의하여 정리하는 것이 방법이다. 

 회의에서는 세부규칙을 사전에 정해서 모두 지키는게 민주성을 담보하는 방법이다. 우선 회의시간 준수다. 외외로 잘 지켜지지 않는데 5분전 모이고, 10분전 모임을 방송하고, 시간은 퇴근전까지만이다. 회의때는 서로 존대어를 사용하며, 사회자의 진행을 존중하고 따른다. 안건 제출자는 회의 3일전에 안건을 제출하고, 합의된 내용은 반드시 실천한다. 회의 때 핸드폰 사용은 지양하며 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은 반드시 전체공지를 한다. 

 마지막으로 교사들이 좋아하는 회의의 조건과 싫어하는 회의의 조건이다. 좋아하는 회의는 교육활동 중심으로 안건이 이루어지고, 민주적 회의 시스템을 구축하며, 평등한 관계에, 충분한 논의 과정 거치기다. 학교장이나 실무자 중심으로 답이 정해지거나 논의 없는 회의는 싫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회의는 협의내용 사전안내가 없는 정기회의, 주제가 없는 의미없는 정기회의, 너무 잦은 회의, 마음 열기 없이 바로 하는 회의, 무조건 모여서 협의하는 회의, 회의규칙이 없는 회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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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중국해, 힘과 힘이 맞서다 - 교역의 중심, 동·남중국해를 둘러싼 패권 전쟁 메디치 WEA 총서 10
마이클 타이 지음, 한승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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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뉴스에서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연령대가 내려갈수록 중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는데 20대의 반감이 큰 이유로는 중국의 갖가지 역사 및 문화에 대한 자국중심주의적 해석(김치에 한복까지 기가 막히다.), 홍콩에 대한 반민주적 태도 그리고 이와 관련해 중국인 유학생이 국내에 많은 터라 이 문제와 관련해 직접 대학가에서 그들과 부딪힌 경험때문이다. 반면 중국의 경제개발로 인해 짭짤함을 같이 맛보며 성장한 중장년층은 그래도 반감이 좀 덜했다. 

 중국이 강짜를 놓는 곳은 한국 뿐만이 아닌데 남중국해가 그렇다. 바다 이름이 남중국해라고 해서 그 바다의 모든 것이 중국 것은 아닐진데 중국은 이 바다에 떠 있는 모든 섬들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지도를 보면 문제가 되는 파라셀 군도나 스프래틀리는, 파라셀은 베트남의, 스프래틀리는 필리핀의 코앞에 있는 군도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며 저자 이름도 마이클 타이인지라 동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무리수와 억지를 조목조목 비판하거나 현대적 상황에서의 갈등 및 미국과의 패권에 대해 동남중국해의 의미를 부여하는 책인줄 알았다. 하지만 책은 동남중국해의 역사책에 가까웠고, 중국의 입장을 많이 대변해주는 책에 가까웠다. 물론 설득력은 상당히 있었다. 

 책에서 역사를 다룬 이유는 동남중국해에 과거 어떤 세력이 있었고 그걸 알아야만 동남중국해의 영유권에 대한 당위성을 어디에 부여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중국해에 산재해 있는 여러 나라들과 중국과의 과거 역사관계를 통해 동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 각 나라가 택할만한 입장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1. 류쿠

우선 류쿠다. 류쿠는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다. 류쿠는 1609년까지 독립왕국이었고 중국에 조공하는 나라였다. 저자는 류쿠가 중국에 조공하던 시기가 가장 평화로웠다 말한다.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위해 류쿠에 식량을 요구한다. 워낙 요구량이 억지스러워 류쿠는 최선을 다했지만 요구액의 절반만 달성할 수 있었고 히데요시는 1609년 3천의 조총부대를 보내 류쿠를 점령하고 왕과 왕족들을 압송하여 굴욕적 항복문서를 받는다. 

 이후 류쿠는 일본 남부의 사쓰마번의 시미즈 가문이 통치하게 된다. 일본은 류쿠를 일본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시기가 좋지 못했다.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의 눈밖에 나 교역이 여러워지자 도쿠가와 쇼군은 류쿠를 통해 중국과 교역할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류쿠의 일본화를 잠시 피하고 류쿠가 일본의 세력하에 있음을 감춘다. 

 하지만 시기가 흘러 메이지 시대가 되자 상황이 돌변한다. 1871년 류쿠의 배가 타이완에 좌초되어 30명의 선원이 현지인에 의해 참수되자 이를 핑계로 일본 막부는 청에 강하게 항의한다. 어려웠던 청은 어리석게도 타이완이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고까지 하고 류쿠에 대한 영향력도 포기한다. 일은 이 사건을 통해 청에게 큰 배상금을 부여받고 류쿠에 대한 주권도 사실상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된다. 류쿠가 오키나와가 되는 순간이다. 

 일본은 류쿠를 오키나와로 만들었지만 그들을 극심히 차별한다. 메이지시대부터 2차대전가지 무려 60년간 많은 류쿠인들이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 흘러들었다. 하지만 낮은 임금, 잦은 폭력, 극악한 노동조건이 뒤따랐다. 1921년 사탕수수가격이 폭락하자 류쿠인은 해외이주가 많아졌는데 1924년의 미국 이민법 재정으로 이민 길이 막히자 주로 중남미로 흘러들었다. 거기서도 일본 본토인에 의한 차별은 계속되었다.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 대한 최후 방어선이었다. 미군은 무려 54만을 투입했고 11만일본군이 강한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했다. 엄청난 폭격과 함정, 자살 폭격등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인 1/4가 사망한다. 전후에도 오키나와는 산업 및 생활시설이 모두 파괴되어 주민들은 2년간 미군의 캠프에 수용된다. 오키나와는 전후에도 1971년까지 미군의 점령지였으며 주둔군 지위협정으로 미군의 범죄에 시달린다. 오키나와 인들은 전후 미국이 설계한 지역에 따라 배치되었는데 농사나 고기잡이, 공동체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터전을 잃은 일부는 오키나와 외곽섬이나 일본으로 이주하게 된다.


2. 베트남.

베트남인들은 오래전 자신들을 락족이라 했고 중국은 이들을 월이라 불렀다. 베트남은 훗날 비엣이라 자신들을 부르게 되고 이게국명이 된다. 베트남은 기원전2879-258년간 지속된 첫 왕조가 있었다. 왕은 반랑이었는데 이웃군벌에 점령된다. 이 군벌은 어우락이란 나라를 세우는데 어우락이 중국 자오루이에 합병되어 버리고 기원전 111년 한무제에 나라 전체가 점령당해 무려 1천년간 중국의 지방이 된다. 

 하지만 중국화 정책에도 중국화가 되지 않았고 당의 멸망후 응오꾸옌이 중국함대를 궤멸시킨 939년 독립을 쟁취한다. 이후 4개 왕조가 들어서며 번영을 구가하지만 1057년엔 송과 4년전쟁을 하게 되고 지금의 캄보디아인 베트남 남쪽의 참파가 100여년에 걸쳐 5차례나 침공한다. 몽골의 침입도 받는데 풍토병에 힘입어 방어에 성공하나 1406년 명의 영락제에 의해 다시 나라가 망한다. 중국은 다시금 강력한 동화책을 실시하나 1408년 레러이가 10년간의 봉기끝에 다시 독립을 쟁취한다. 베트남은 자신들을 괴롭히던 참파를 정벌해 남쪽까지 국경을 확장한다. 참파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도 자행하여 베트남내 참파인은 현재 16만에 불과하다. 

 1620년 북부의 쩐과 남부의 응우옌간의 전쟁이 일어나 50년이나 지속된다. 1772년 떠이선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남부지배체제를 뒤엎는데 성공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평등을 설파하고 식량과 돈을 재분배하는등 반향이 컸다. 1780년 떠이선은 레왕조를 무너뜨리지만 프랑스의 도움을 받은 응우옌 아인이 남부지역을 탈환하고 하노이까지 점령후 1802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유교질서의 베트남은 프랑스 기독교를 기본적으로 위협세력으로 느꼈고 프랑스는 19세가 카톨릭 개종자를 30만으로 늘리며 세력을 확장하자 양국관계가 본격 악화한다. 1847년 다낭에 구금된 선교사 석방을 위해 파견한 프랑스 전함 두척이 배트남 공격을 받자 이를 구실로 14척의 함선을 동우너해 프랑스가 다낭을 점령한다. 25년간 양국간 전쟁이 이어지고 마침내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화한다. 

 프랑스 덕에 오랜 중국과 베트남의 원한관계가 개선된다. 프랑스 식민치하에서 1925년 베트남혁명청년협회가 결성되고 호찌민이 중베트남간 형제적 연대를 맺는다. 1940년 프랑스의 허락하에 일본군 6천이 인도차이나에 주둔하자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동맹(월맹)을 결성한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베트민이 봉기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수도를 하노이로 삼지만 프랑스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인도차이나의 공산화를 염려한 미국이 프랑스의 전비80%를 감당하나 프랑스는 패퇴한다. 베트남은 분단되고 호찌민은 통일을 원했지만 한국전의 경험으로 미국의 개입이 두려운 중국은 이를 저지하며 선거를 통한 통일을 주문한다.

 하지만 남쪽 정부의 응오딘지엠이 선거를 거부했고 분단이 고착화한다. 베트남전이 발발하고 소련은 미국과 중국을 고갈시키고자 베트남 지원에 적극적이었지만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1965년 이후 베트남 지도자들은 소련에 기울기 시작했고 이는 호치민 타계이후 더욱 본격화한다. 캄보디아에 폴포트가 집권하자 양국관계는 더욱 악화했는데 양자는 기본적으로 캄보디아의 중립을 원하면서도 베트남은 참파였던 캄보디아에 대한 우위를 원한 반면 중국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한편 파리 평화회의에서의 평화적 분위기에 베트남은 중국의 진심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닉슨의 중국방문은 결정타가 된다. 1975년 사이공 정부가 무너지자 하노이는 사회주의의 이름하에 화교소유의 대형 기업을 흡수하고 1978년에는 화교를 추방한다. 그들은 베트남 국적 취득 또는 일자리의 상실을 요구받았다. 난민은 무려 14만에 이르렀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해양국경 확정을 위해 중국-프랑스 조약을 이용하려 했으나 이에 따르면 통킹만의 2/3을 잃게 되는 중국이 이를 거부한다. 베트남은 폴포트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캄보디아에 침공하나 타이로 피신한 크메르루즈는 대량학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는다. 아세안 역시 이 침공을 비난하고, 중국의 덩샤오핑은 징벌적 작전도 구사한다. 베트남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소련만이 믿을 길이었지만 아프간 전쟁후 소련의 지원도 줄어들자 1989년 캄보디아에서 철수하고 중국과의 관계도 개선해나간다. 


3.필리핀

필리핀은 무려 7천개가 넘는 섬이 있다. 스페인 이전 통합된 정치체제가 없었으므로 오래전 필리핀과 중국과의 교역은 국가간 교역이 아니었다. 9세기 부터 중국인은 중국내 입국이 금지된 아랍상인과의 교역을 위해 필리핀에 간다. 

 1571년 스페인은 마닐라를 만들고 멕시코와의 교역을 위해 중국과 교역한다. 현지인의 인구가 희박하고 문화 및 기술수준이 크게 부족해 이주한 중국인은 스페인사람들이 필리핀을 경영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중국인의 수가 늘자 스페인은 이들을 진압하거나 학살한다. 

 18세기 중반까지 중국인과 필리핀 혼혈인 메스티소가 인구의 5%를 차지하고 이들은 필리핀 중산층과 민족 형성에 중추가 된다. 메스티소들은 중국인이 개종문제로 필리핀에서 쫓겨나자 이들의 자리를 차지하며 더욱 성장했고 더 독립적이고 덜 순응적으로 변해가며 필리피노로서의 정체가 생겨난다. 

 1896년 스페인에 대한 독립전쟁이 촉발되지만 장비가 크게 부족했고 두개의 파벌리 나뉘어 계속 패배한다. 이들은 스페인과 망명에 대한 대가로 보상금과 평화조약을 맺미나 미국이 쳐들어와 마닐라를 점령한다. 미국은 필리핀 저항세력에 대한 대중의 지원을 끊기 위해 민간인을 강제수용하는 보호구역을 설정하고 여기서 30만 수용자중 1만가까운 수가 사망한다. 

 2차대전과 함께 일본은 진주만 공습후 필리핀 루손섬에 상륙한다. 일본점령군은 고의적으로 생멸을 경시해 수천명을 구금 처형하였고, 성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이 자행되고 식량과 의약품 부족으로 일본 점령기간 중 50-100만명 가량이 사망한다. 전후 미군이 돌아오지만 서방에 대한 필리핀의 시선은 좋지 못하다. 그리고 두테르테가 집권하며 이들의 친중성향은 더욱 강화된다. 


3.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최초의 국가는 푸난이다. 하지만 푸난이 몰락후 말라카 해협 주변 해양 교역이 일어나며 당연히 주변 해안 배후 지역이 강해진다. 항구 배후의 스리비자야가 수마트라 남쪽 팔렘방을 중심으로 말레이 반도를 대부분 차지하는 최초의 왕국이 된다. 스리비자야는 불교국가였지만 자바에서 발흥한 싱가사리와 마자파힛 왕국의 등장으로 쇠락하고 13세기 멸망한다. 

 이후 말레이는 시암이 차지하고 이슬람의 영향을 받는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말레이 계승자로 말라카 술탄국이 등장한다. 말라카에는 파라메스와자라는 국왕이 등장한다. 시암의 속국으로 힘이 필요했던 그는 직접 명에 방문에 보호를 요청한다. 영락제는 이들을 환대하고 정화가 이후 방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락제 사후 해금정책을 시행하며 중국과 관계가 멀어지지만 이즈음 술탄국은 충분한 힘을 얻는다. 

 1511년 아폰수드 알부케르크가 대선단을 이끌고 인도 고아에서 말라카로 항해해 적은 병력으로 이곳으 점령한다. 말레이 술탄은 상업손실로 권력과 속국유지에 큰 타격을 받는다. 1641년 말라카의 주인은 네덜란드로 바뀐다. 네덜란드는 말라카보다는 자바섬의 바타비아가 중심이었으므로 말라카를 오히려 쇠퇴시킨다. 1786년 영국은 페낭을 점령하고 영국의 스템퍼드 래플스가 싱가폴을 세운다. 싱가폴은 번영하여 말라카와 페낭보다 번성하게 되고 인구는 8만이상이고 교역 규모도 페낭의 3배에 이르게 된다. 

 1874년에 이르러도 말랴야 연방의 인구는 30만에 불과했다. 영국이 법과 질서를 이지역에 확립하자 많은 중국인이 이주해온다. 중국인 남자 수가 현지인 수보다 금새 많아지게 되었고 인도와 실론섬에서도 노동자가 이주한다. 초기 경찰은 이 지역에서 온 시크교도가 맡았는데 그래서 말레이시아의 경찰 복장이 시크교도의 복잡ㅇ인 수염을 기른 카키색 반바지 차림이 된다. 

 19세기 말라야의 중요인물은 중국인 얌아르로 그는 친구 류임광의 뒤를 이어 콸라룸푸르에서 두번째 중국인 지도자가 된다. 그는 말레이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광산을 복구하고 불탄 경작지를 다시 세웠으며 최초의 학교를 만들고, 법을 개정하고, 6개 경찰대로 치안을 안정시키고, 도로망을 개선하고, 벽돌로 튼튼한 시설을 건축한다. 

 전후 영국은 종교적 권한을 제외한 나머지를 술탄에게서 빼앗으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는 비말레이인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주는 것으로 말레이인에게 강한 저항을 불러온다. 온자파르가 1946년 통일 말레이 국민 조직을 결성하고1957년 말라야는 독립한다. 헌법에 말레이 인들의 특권을 명기하고 각종 법으로 말레이인은 인구대비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된다. 1969년 선거에서 비말레이인 야당이 선전하자 말레이인들에 의항 봉기가 일어나 중국인 재산 약탈이 시작되었으며 한달후에는 인도인을 겨냥한 폭동이 일어난다. 이에 정부는 신경제정책을 도입한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경제적 권한을 인종적으로 배분해 말레이인들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기업가가 성장하지 못하고 족벌정치에 부패, 제도적 비효율이 발생한다. 

 1981년 총리가 된 마하티르는 중국과의 교역관계를 증진하면서 그들과 함께 남중국해 석유공동탐사에 나선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도 찬성하고 수많은 인프라 구축에 도움을 받는다. 그는 자동차 제조, 남북 고속도로 건설, 새국제공항, 쌍둥이 빌딩, 푸트리자이드 행정수도 건설에 착수한다. 외환위기시 IMF의 요구를 거절해 재정파탄을 막은 것도 그의 치적이다. 다만 그는 언론 자유를 제약하고, 사법부를 약화시키고, 술탄의 권한을 축소하고 서방에 비판적이다. 중국과 말레이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4.남중국해 갈등의 역사

남중국해에는 파라셀, 스프래틀리, 플라타스라는 3개의 군도가 있다. 중국은 기원후 1세기부터 파라셀군도와 접촉한다. 이 군도에 대한 언급은 삼국시대 남주이물지에 나온다. 10세기에서 15세중반까지 중국은 500년간 해상활동을 활발히 하는데 남중국해는 중국의 교역을 위해 사실상 호수 역할을 하게 된다. 남송과 원이 교역에 적극적이었지만 원대에 이르러 해금하게 되어 청대까지 남중국해는 중국역사에서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외세의 침입이 남중국해로부터 시작되자 중국인은 남중국해를 교역을 방해하는 섬이 많은 지역에서 자신들의 본토를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인식을 전환하게 된다. 

 중국은 1884-1885 중국 프랑스 전쟁에서 처음으로 남중국해 섬들에 대한 주권을 주장한다. 1932년엔 프랑스가 파라셀, 스프래틀리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고 1938년엔 일본이 이를 점령하고 타이핑 섬에 잠수함 기지를 건설한다. 1941년 일본은 이지역을 타이완의 일부라고 주장했고 1945년 카이로 포츠담선언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 파라셀 스프래틀리 군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낸다. 1950년 국민당 정부가 내전에서 패하자 국민당은 파라셀과 스프리틀리에서 철수하고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인비전투에서 패배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하며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 주장을 완전 철회한다. 1956년 하노이는 파라셀 스프래틀리를 중국 영토로 인정하나 사이공 정부는 파라셀 스프래틀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수비대를 배치한다. 1974년 사이공은 스프리틀리에 정착민을 입식하지만 중국군이 베트남 군을 물리치고 파라셀 전체를 장악한다. 1979년 통일로 입장이 하나가 된 베트남은 초기 입장을 바꾸어 남중국해 모든 섬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한다. 한편 필리핀은 1974년 스프래틀리 5개섬을 점령하고 타이핑섬을 제외한 모든 섬이 무주지이므로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모든 섬이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중국은 스프래틀리 영유전쟁에 가장 늦게 뛰어든다. 스프래틀리의 44개 섬은 모두 인간이 점령했는데 베트남이 25개, 필리핀이 8개, 중국이 7개 ,말레이시아가 3개, 타이완이 1개다. 

 댜오위다오는 9개의 무인도 열도다. 과거 중국 명의 문헌에 댜오위다오가 등장하며 중국인은 교역을 통해 오래전부터 섬의 존재를 인식한 반면 일본이 주장하는 센카쿠라는 명칭은 과거 어느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19세기 들어서야 오키나와 총독이 댜오위다오에 대한 국가 표지건설을 주문한 수준이다. 일본은 댜오위다오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19세기 이전까지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타이완을 포기했지만 센카쿠는 명문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땅이라 주장한다. 거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논리와 같은 수준이다. 


5. 중국의 입장은

책은 중국의 입장을 대변한다. 중국은 전성기인 청왕조 시절이후 무려 180만km2의 영토를 상실했다. 중국은 1949년 이전 까지 1천개가 넘는 조약과 협정강요에 시달렸고 이를 통해 영토를 잃었다. 책은 중국이 한치의 땅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무리하게 영토협정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의 권익을 많이 포기하면서도 타협을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중국은 여러 역학이 작용하긴 했겠지만 과거 서구에 빼앗긴 본토인 마카오와 홍콩도 시간이 지나서 자연히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는 우직하고도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다. 

 책은 그리고 중국은 영유권 주장에 겁먹고 비방하는 서구세력을 오히려 비판한다.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러시아, 미국은 상당히 넓은 배타적 경제수역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인구가 6억에 불과하지만 경제수역이 5400만km2에 이르며 중국은 고작 90만km2에 불과하다. 중국의 것은 모두 앞마당에 불과한데 비해 이들의 것들은 3/4가 모두 본토와 멀리 떨어진 지역이다. 즉, 식민지 시절 발견에 의해 영유를 주장하고 그 이익을 자신들만 누리는 형태라는 것이다. 그럼녀서도 자신들의 행위는 보지 못하고 중국의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온당치 않게 여긴다. 책은 더 나아가 배타적 경제수역 개념을 없애고 모든 나라가 바다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책을 보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의 어렵고도 모른는 역사와 중국의 무리해보이는 남중국해 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었다. 남중국해는 해외 보급에 의존하는 중국에 반드시 필요한 경로이면서도 과거 식민침탈로 상실한 경험이 있어 더욱 강하고 뼈아프게 다가오는 지역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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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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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폰스 무하의 그림을 처음 본것은 책 '시대를 훔친 미술'에서였다. 20세기 초반 과학기술의 발달과 사상의 변화로 다양한 미술 실험이 일어날 때인데 시대에 맞지 않는 정말 예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을 멋진 일러스트레이트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실제 알폰스 무하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주요 광고와 포스터에 일러트스레이트를 그려넣었다.

 무하는 체코 사람이다. 태어날 당시엔 체코가 없었고 아마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는 어릴적 바로크 양식의 교회에서 음악 활동을 했는데 이 경력은 그의 활동과 예술에 영향을 꾸준히 미쳤다. 

 무하는 모라비아의 시골에서 벗어나 빈으로 향한다. 빈에서 무하는 두 가지를 얻었는데 우선 극장과의 만남이다. 공방의 일로 극장을 드나들면서 무하는 새로운 영감과 원천을 얻어 극적 표현방법에 눈뜬다. 다음은 한스 마카르트와의 만남이다. 당시 빈을 주름잡던 그에게 무하는 신화화와 역사화에 깊은 관심을 얻게 된다. 하지만 빈에서의 생활은 잠시 극장의 화재로 무하는 일감을 상실한다. 풀리지 않는 인생에 무하는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미쿨로브라는 곳에 머물며 우연히 마을 사람들의 초상을 그리며 연명한다. 곧 지역의 대지주 쿠엔벨라 백작의 눈에 띄어 후원을 받게 되고 뮌헨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파리로 향하게 된다. 

 파리에서 무하는 민족주의자들과 계속 교류하며 체코의 민속 미술에 대해 사회적 역할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나비파 화가들과의 교류에서는 신비주의적이고 비의적인 관심을 고조하게 되며 초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관심도 커지게 된다. 한편 무하는 백작의 후원에도 이렇다할 성과가 없자 백작은 무하에 대한 매달 200프랑의 지원을 끊는다. 생계가 어려워진 무하는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한다.

 일감을 조금씩 얻어 일러스트레이터로 명성을 얻어가던 무하에게 당대 최고 배우 사라 베르나라의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 의뢰가 들어온다. 무하는 이를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큰 성공과 명성을 얻는다. 1896년 사라 베르나르가 인쇄업자를 샹프누와로 옮기자 그들과 함께 장식 패널, 달력, 엽서등을 선보이며 소위 무하양식은 완성하게 된다. 

 무하는 특유의 양식과 더불어 광고주와 소비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잘 파악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성공요인이었다. 실제 이당시 무하의 광고 포스터나 그림들은 지금의 현대적 광고 모델들이 취하는 포즈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무하의 작품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당시는 세기말로 팜므파탈이 유행했는데 무하의 여성들은 그와 달리 고운 살결에 풍성한 머리칼, 몸체를 이루는 풍만한 곡선에 우아한 의상, 잘 꾸며진 실내와 화려한 악세사리가 어우러져 예의단정하면서도 우아한 고품격의 매력을 풍긴다. 

 무하는 독일 역사의 여러장면과 일화 작업을 통해 역사 삽화가로 명성을 얻게 된다. 무하는 슬라브민족으로 게르만의 작업을 할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으나 게르만의 호전성이나 공격성을 드러내는 대신 그들의 지적, 정신적 공적에 주목하고 체코인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과 사건을 부각시키며 작업을 수락한다. 그의 역사 삽화는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했는데 이는 의상, 소품의 사실적 묘사와 극장 경험에서 우러나온 극적 연출때문이었다. 

 삽화가로서 무하는 글과 그림의 조화를 중시했다. 1894년 루티와 함께한 연속된 끈의 꼬임처럼 상징적이고 양식화된 표제양식은 무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52부 한정판의 일세에서는 132개에 달하는 무하의 삽화와 장식적 표지가 있었다. 무하의 이런 삽화는 중세의 필사본을 연상시키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면이 있었다. 

 무하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에서 생활하지만 고국 체코로 돌아간다. 그는 그의 대표적 슬라브 서사시를 시작한다. 무려 20년 작업으로 슬라브 민족의 역사중 20개의 장면을 선정했다. 5개는 알레고리적 테마로 5개는 전쟁 5개는 종교 5개는 슬라브 문화였다. 그리고 이들 중 10개를 체코의 역사에서 그리고 나머지 10개를 다른 국가의 슬라브 역사에서 채택했다. 무하는 작업을 위해 서보헤미아의 즈비로흐성을 빌렸고, 캔버스를 팽팽히 하기 위해 거대 금속틀을 제작했으며 유화의 어려움을 경험해 템페라로 작업한다. 작업기간은 1차 대전중으로 재료 수급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무하는 1926년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후원자 크레인과 전시회후 이를 체코정부에 기증한다. 

 무하는 서사시 완성후 길고 폭이 넓은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흰두건을 한 여성을 많이 그려낸다. 삶의 경과에 대한 상징으로 보인다. 세월히 흘러 나치독일에 프라하가 점령되며 슬라브를 중시하는 무하는 나치 당국의 경계대상으로 체포되어 심문당한다. 심문의 여파인지 그는 193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는 체코가 공산화하며 민족성과 애국주의에 대한 경계로 오래도록 묻혀지내가 무하의 아들 딸의 노력으로 점차 빛을 발하게 된다. 1998년 무하의 상설전시관이 건립되고 작품도 항상 전시되게 된다. 무하의 파리에서의 양식은 아르누보 양식으로 미술과 삶이 결합해 주변 환경에 총제적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예술이 보기 쉽고 아름다우며 상업적인 부분과도 결합할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나와도 성공할 일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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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6-16 1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셩격도 좋고 후배들에게도 잘하고 마음은 따뜻했고 실력은 천재였고. 자신의 노하우를 모두에게 공개하고. 예술계의 사기캐 아닙니까 ㅎㅎ *^^*

닷슈 2021-06-16 20:37   좋아요 2 | URL
책에도 나오긴 하는데 후배들 챙기고 매일 파티하느라 그렇게 성공하고도 돈을 못 모았더군요. 말년에 나치에 당한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레이스 2021-06-16 18: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았던 책입니다

닷슈 2021-06-16 20:37   좋아요 2 | URL
무하 단독 책은 처음 보았는데 좋았습니다.
 
학습자 주도성, 미래교육의 거대한 착각 - 교사 없는 학습은 가능한가?
경기도교육연구원 기획, 남미자 외 지음 / 학이시습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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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의 흐름은 과거 존 듀이 시절의 개별화에서 산업화 및 대중화 시대의 보편화, 그리고 4차산업혁명시대를 목전에 두고 다시 개별화의 방향 가고 있다. 이는 개별화가 교육 본연의 목적 달성에 합당하고 AI 및 빅데이트등의 과학기술발달로 학생의 자율과 선택에 기반한 개별화 교육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학생의 자율과 선택은 필연적으로 학습자 주도성의 개념과 맞닿는데 과연 이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딴지를 건게 이 책이다. 사실 딴지를 걸었다기 보다는 제대로된 학습자 주도성을 위한 방향설정과 철학을 갖춰야 한다는게 책의 골자다. 

 책은 먼저 한국 공교육을 꼬집는다. 한국의 공교육은 능력주의를 최우선으로 한다. 때문에 개별학생의 자율과 선택을 보장하되 그 결과 역시 개인의 문제로 귀책하게 된다. 때문에 능력주의는 정의로운 것이 되며 교육은 계층 이동의 수단이자 도구, 신화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공교육은 필연적으로 공적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지배권력 강화수단의 도구가 되며 개인에게 모든 것이 귀책되는 고도의 불안속에서 오히려 개인의 사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된다. 

 한국 교육이 이렇게 방향타를 잘못 잡게 된데는 우선 5.31교육 대책이 있다. 5.31교육 대책은 김영삼 정부 시절 이루어진 것으로 한국 교육과정은 크게 바꾼 7차교육과정을 낳은 대책이다. 당시 이 대책은 학습자 중심으로의 전환을 대대적으로 명시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강조했던 자율은 그간 정부에 의한 획일 및 타율로 강조되던 교육의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는듯 했으며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의 전환도 이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5.31 교육대책은 당시 김영상 정부의 신자유주의 기조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자율은 사실 교육적 자율이나 학습자 중심으로의 전환보다는 규제완화에 가까웠으며 경제적 개념인 수요자 중심 교육, 교육 소비자등의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어 교육현장을 어지럽히는 개념들이 이 당시 도입되었다. 즉, 학습자 중심으로의 최초 방향전환의 기저에 경제적 논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어진 OECD의 영향도 마찬가지다. OECD는 경제협력모임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 전 세계 교육현장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교육정책들을 개발해내고 있다. 우리 언론이 매년 떠드는 PISA도 이들의 작품이다. OECD는 경제기구에기에 필연적으로 그들의 교육정책은 경제적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즉, 인간을 인적자원으로 이해하고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교육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전세계에 도입된 역량중심교육도 그러한 기저에서 탄생했다. 1997-20089데세코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역량중심교육은 향후 새로운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성장과 자본축적을 담보할 새로운 인간자본형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등장한 개념이다. 게다가 OECD는 언급한  PISA의 개발로 여러국가의 교육을 비교할 단일기존을 개발함으로써 더욱 깊이 여러 나라의 교육에 관여할수 있게 되었다. 교육의 시장화가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이런 신자유주의 맥락하에서 학습자 중심의 원리는 수요자 중심의 원리로 대체되게 된다. 학교는 시장화되고 학교별로 공개되는 성적 등의 지표가 수요자인 고객이 학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맥락하에서는 개인 학습자에게 학습의 권한을 이양하는 자율은 학교와 개인이 자신의 운명에 책임을 져야하는 채무성의 개념으로 다가오게 된다. 학교와 개인은 무한 경쟁사회에서 스스로에게 생긴 문제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 관리, 자기 경영 능력을 갖춰야하며 교육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관리할 책임 또한 단위학교와 개인에게 전가된다. 학교의 교사에게도 교사 책무성이 이러한 방향으로 강화되며 이로써 교사는 고립되고 단절된 교직문화에 빠지게 된다. 교육에 대한 회의감과 교사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야기된다. 이런 상황에서의 학생 선태권은 자신의 삶을 위한 유의미한 선택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오히려 선택을 위한 부모배경과 정보력이 무척 중요해지며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결과적으로 교육의 시장적 기제는 계급 양극화 된 사회를 고착화하고 불평등 구조를 심화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학습자 주도성의 방향은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책은 주도성은 개인이 자신의 세운 삶의 방향성에 따라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역량 또는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주도성은 자유의 개념이 내포되고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의 응답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자 소중이 여길만한 삶을 영위하는 역량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실질적 자유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사러 다른 고유성을 지닌 개인들이 고유한 차이 속에서 함께-서로-존재 함을 의미한다. 즉, 실질적 자유는 제약이 없는 자유와 달리 가치와 윤리를 전제로 한다.  

 때문에 공교육은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전제하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개별성과 독특성을 발현하면서도 살아갈 힘을 길러주는 것이된다. 또한 개별학습자가 자신의 고유성을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발현하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가는 사회적 존재로써 총체적 잘 살기를 하도록 실천하는 책임성 있는 시민이 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을 담아내는 교육과정은 현재 학습자의 수준과 능력에 맞게 구성되어야 하되 낯선 세계와의 만남에서 오는 어려움 또는 지루함을 견디는 힘을 기르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교육이 교사, 또래, 중요한 경험과의 관계 맺기이므로 이를 중시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디지털 기술 위주의 학습자 주도성을 강조한 개별화 교육은 그렇지 못하다. 우선 디지털 기기에 의한 개별화 교육은 배움과 학습자간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또한 디지털 플랫폼에 의한 학습은 성공적인 경우엔 괜찮지만 실패할 경우 그 책임이 학생에게 있는지 아니면 이를 활용해 지도한 교사에게 있는지 애매하게 된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개별화 교육은 다른 문제점도 내포한다. 우선 학습자의 개별 특성을 양적 지표로 세분화하여 학습자의 특성을 파악할 있다는게 교육의 전제인데 이 경우 질적 특성과 정보가 배제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알고리즘에 의한 학습의 진정성도 부족해진다. 알고리즘 자체의 문제도 또 있다. 알고리즘은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설계과정에서 얼마든지 객관성은 사라지고 설계자의 주관이 강하게 반영되며 이로 인해 특정 집단 차별의 가능성도 생겨난다. 또한 개별교육으로 사회적 관계 맺기가 어려우며 책임의식의 양성이 어렵다는 점도 거론된다. 

 이런 점 때문에 책은 학습자 주도성을 올바르게 정의하고 고찰하며 최근의 흐름인 디지털 플랫폼, 인공지능, 빅데이터에 의한 개별화 교육을 맹신하지 말것을 당부한다. 또한 학습자 주도성이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발현되기 어려운 만큼 교육 전문가인 교사에 의한 올바른 접근및 지도가 이루어질때 자신의 배움을 개쳑할 용기가 생겨나고 비로서 교육적 환경과 다양한 선택에 의한 학습자 주도성이 가능해진다. 

 책은 학습자 주도성에 대한 여러 교육집단의 생각도 드러내었는데 재밌었다. 학습자 주도성발현 촉진 요인으로 초등학생은 사고의 촉진상황, 분명한 목표, 권위 있고 신뢰할만한 교사, 다른 생각에 대한 여지를, 중고생은 분명한 목표, 정서적 지지, 평등, 소통과 존중의 환경을 초등교사는 단위학교의 자율성 보장, 정책적 경인, 혁신교육의 보편화, 교사 학생간 관계의 교차성을 중등교사는 교사별 교육과정 구성과 절대평가, 교육과정 유연화,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 풍토, 교사저문성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연구자집단은 교사의 학습동기 설계, 학습 계열의 개방성, 교사권위와 신뢰감, 학생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꼽았다. 

 반대로 학습자 주도성의 저해 요인으로는 초등학생은 정답이 정해진 수업, 강압적이거나 지나치게 친구같은 교사, 피곤함 배고픔등 신체요인, 산만한 분위기를 중고생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수업, 너무 높은 목표, 소통의 부재, 노력의 배신을 초등교사는 주도성에 대한 오개념, 교사의 고정 관념, 정책의 획일성과 폭력성, 사회불안과 불평등을 중등교사는 경쟁적인 교육문화, 주도성에 대한 오개념, 입시와 직결된 평가, 교사의 재량권 부족을 연구자들은 기능을 상실한 평가, 경쟁적인 대학입시제도, 분절적 교육과정, 교사의 전문성 부족을 꼽았다. 

 책은 잘못오해되는 것처럼 학습자 주도성과 교사는 서로 반대개념이 아니며 학습자 주도성의 달성을 위해 교사의 적절한 교육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경제적 개념에 오염된 교육계의 개별적 선택 위주의 방향도 꼬집었으며 디지털 플랫폼에 의한 개별화 교육의 문제점도 잘 드러내었다. 실제 조사결과 학교 급을 막론하고 학생들은 교사변인을 학습자의 주도성을 발현하고 촉진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결국 미래시대의 학습자 주도성에느 교사의 학습자 주도성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인식을 토대로 한 교육과정 설계 및 개입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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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6-11 16: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기주도 학습’이 어느날 뚝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큰 역사적 배경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OECD가 교육정책까지도 개발하여 강요하는군요... 무서운 놈들... ㅠㅠ
우리나라 교육정책이 왜 점점 산으로 가는지 조금 이해될 것도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닷슈 2021-06-14 14:12   좋아요 1 | URL
OECD는 무서운 놈들이긴 합니다만 어느 정도 맞는 교육정책을 만들긴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혁신교육도 이걸 받아들이긴 한 거죠. 하지만 말씀 하신 것처럼 그들 본연의 목적을 항상 알고 교육이 수단화 되지 않도록 경계하긴 해야 합니다.

붕붕툐툐 2021-06-11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사에게는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고, 저에겐 뜨끔한 부분도 있네요~ 궁금했는데 넘 잘 요약해 주셔서 한 권 다 읽은 기분이네요~ 감사합니다!

닷슈 2021-06-14 14:13   좋아요 1 | URL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등이신지 초등이신지 궁금하군요.

붕붕툐툐 2021-06-15 00:50   좋아요 1 | URL
전 중등이에용~ 고등학교에 있습니다. 닷슈님은용?

닷슈 2021-06-15 07:23   좋아요 1 | URL
전 초등입니다

붕붕툐툐 2021-06-16 00:26   좋아요 1 | URL
훌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