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
바버라 J. 킹 지음, 정아영 옮김 / 서해문집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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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상 감정은 주변 세계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생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긍정적인 감정은 주변 세계가 나의 생존과 적응에 유리한 것이기에 부여되며 부정적인 감정은 그 반대다. 슬픔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잃었을 때 나타난다. 책'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에서 다루는 슬픔은 발로 주변 개체를 상실하였을 때의 슬픔이다. 나와 늘 친하게 지내던 형제나, 자매, 부모, 또는 항상 같이 지내던 친구 같은 개체의 상실에서 나오는 슬픔이다. 그리고 이런 류의 슬픔은 인간에겐 매우 당연시 되지만 동물에게선 의문시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동물과 가까운 삶을 산 사람들은 동물이 이런 종류의 슬픔을 마땅히 느낀다고 생각하며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경험적, 과학적 증거 모두 없음을 말하며 이에 반대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는 이런 종류의 슬픔을 많은 수의 동물도 마땅히 느낄수 있음을 주장한다. 다양한 경험적 증거를 대는데 우리가 이런 동물의 슬픔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동물들이 이런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인간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며 인간은 주변에 동물을 가까이 하지 않고 따라서 이런 감정을 잘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물같은 경우는 사별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며 자의식도 부족한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상실에 의한 슬픔을 못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변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 개가 죽어서 사라졌는데 다른 개가 그 사라짐을 죽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의견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데 이는 동물 역시 인간처럼 서로 협력하고 장기간 그 관계를 유지하는 집단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슬픔과 그 애도는 진화상 하나의 적응적 감정이다. 동물이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되는데 같이 지내던 개체가 사라지는 것은 이 집단의 해체를 의미하며 이는 곧 해당 개체의 적응도를 떨어뜨리는 일이되는 만큼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슬픔이라는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적응에 유리한 일이 된다. 부정적 감정을 통해 스트레스를 받은 개체는 해당 상황을 빠르게 해쳐나가려고 노력할 것인 만큼 이는 진화상 충분히 나타날만한 적응행동이된다. 때문에 집단을 형성하는 동물에게 상실에 따른 슬픔이 나타날수 있다는 논리는 매우 타당하다. 

 책에서 저자는 고양이와 개, 말, 닭, 토끼, 돌고래, 염소, 코끼리 등 다양한 동물이 오랫동안 함께한 동료나 가족이 상실되었을 때 보이는 다양한 슬픔을 일화로 제시한다. 물론 이는 과학적으로 잘 설계된 실험은 아니며 저자의 직접 경험이나 들은 일화들에 불과하다. 이것이 이 책의 약점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설득력이 떨어지진 않는다. 이들은 일상에서 우리가 충분히 경험해온 내용이기 때문이다. 

 재밌는 점은 원숭이들이 고도의 협력성에도 불구하고 새끼나 동료의 죽음에 마땅한 슬픔이나 애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미 원숭이들은 새끼가 사망한 경우 상당 기간을 죽은 새끼를 업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동과 행위에 상당한 위험성과 에너지 소모가 생기는 만큼 이는 새끼를 상실한 것에 대한 깊은 슬픔 반응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미원숭이들은 사망한 새끼를 앉고 교미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평소 새끼를 안전하게 안는 방법과 죽은 새끼를 들고 다니는 방법이 다른 것으로 보아 죽은 것은 인식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거기에 죽은새끼를 결국 버리는 시점은 수유기의 종료와 일치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예상과는 다른 셈이다. 다만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무던함과는 다르게 막상 주변 개체가 포식자에 의해 희생되거나 사고로 죽으면 호르몬상 큰 스트레스 수치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막상 표현은 안하더라도 큰 슬픔을 생리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셈이다. 원숭이들이 이렇게 겉으로 슬픔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들의 높은 사망률과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원숭이 집단은 성체가 되어서도 12%정도의 높은 사망률을 보이는데 이는 이 집단이 항상 생존의 압박을 느끼며 이것은 슬픔과 애도에 쓸만한 에너지와 시간이 충분치 않음을 의미할수도 있다. 즉, 슬픔을 표현할만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실제 인간도 전쟁이나 극한 상황에선 슬픔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그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슬픔이 삭혀지진 않는다. 이후 돌이켜 생각나며 곱씹게 되고 오히려 충분히 애도하고 슬퍼하지 못한 것에 향후 더큰 부정적 감정을 갖는 경우도 생겨난다. 원숭이 사회는 이런 상황과 비슷하지 모른다.

 책을 진화론적으로 살피긴 했지만 무척 인상적인 애도와 슬픔에 잠긴 동물의 이야기가 책엔 많이 실려있다. 이들이 회복하는데는 공통적으로 자신보다 어리숙하고 약한 새끼와의 만남 혹은 다른 개체와의 만남이 주요 계기가 된다. 어떻게 보면 집단의 회복이 슬픔의 감소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말이 죽어서 묻히자 다른 말들이 이상스럽게도 그 주변이 원형대형으로 자주 모여 있으며 심지어 좋아하는 먹이임에도 헌화한 꽃을 먹지 않은 사연, 함께 지내던 고양이나 토끼가 죽자 무척 슬퍼하는 모습, 심지어 다른 종간에도 상실에 의한 아픔을 느끼는 일화들은 아름답고 가슴을 먹먹히 한다. 여러면에서 의미있는 책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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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 - 인도, 문명의 나무가 뻗어나가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1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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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처한 시리즈 서양미술편의 성공에 이어 예상했듯 동양편이 나왔다. 거의 모든 것의 주도권이 200년전 서양으로 넘어가 아직 동양으로의 귀환이 안 된만큼 미술 영역 역시도 그렇다. 우리의 미술시각과 미술지식, 작품에 대해 갖는 심미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가장 대표하는 예술품의 가격이라는 것은 서양의 것이 동양의 것을 압도한다. 그래서 항상 동양미술에 딱히 아름다움을 크게 느끼지 못하면서도 알고자 하는 욕구와 부채의식이 있다.

 책은 동양미술 중 그 시작으로 인도편을 다룬다. 시작부터 예상이 빗나간 셈인데 난처한 서양시리즈처럼 시대순으로 전체를 다룰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서양중심의 시각일런진 모르겠으나 하여튼 책은 1편으로 인도의 고대미술을 선정했다. 그리고 막상 그럴만도 한 것이 인도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이며 동북아와 동남아, 남부아시아의 문화와 의식,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미술은 동양의 미술에 비해 확실히 사상과 과학기술, 그리고 시대를 비추는 세계관이 바뀌며 그 사조를 달리한다. 즉, 역사성과 체계성을 비교적 크게 갖는데 동양의 미술은 어떤 책을 보아도 좀처럼 그런 것이 드물다. 그것은 서양의 미술이 일상에서 벗어나 그려져왔던 것에 비해 동양의 미술은 철저하게 일상에 밀착하여 생활형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인도로 다시 돌아가면 인도의 불교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을 생각보다 크다. 한국엔 범종이 많은데 범종의 범은 산스크리트어를 의미하므로 범종은 산스크리트어가 새겨진 종을 말한다. 동양식 종은 밖에 서 타종하여 소리를 내는데 비해 서양의 종은 내부에서 종을 울린다. 한해가 넘어가면 108범 타종을 하는데 이는 인도의 영향이다. 반면 한국은 과거 통행금지 시간에 28회 통금 풀리는 시간에 33번 타종하며 재야의 종도 33번 타종한다. 이는 불교의 새벽예불시간 28회, 저녁 예불시간 33회 타종의 영향을 받느 것이다. 33은 불교의 핵심세계관과 연결되는데 불교의 삼천대천세계와 관련한다.

 인더스강 유역은 알렉산더가 정벌했을 만큼 메소포타미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다. 그래서 서양중심이던 과거 역사계에서는 인더스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더스 문명 이전의 선인더스 문명이 발굴되며 상황은 역전된다. 이 문명은 메스포타미아 유적의 시기를 아득히 앞지르기 때문이다. 선인더스 문명은 메르가르가 대표적이다

 선인더스 문명의 메르가르는 보통의 신석기 토기가 추상적 무늬를 그려넣는데 반해 구체적인 동물을 그려넣었고 그릇 벽이 상대적으로 매우 얇다. 이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으로 당시 문명의 발달정도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인도는 토기가 동북아시아처럼 도자기의 수준까지는 발달하지 않았는데 이는 도자기 그릇에 밥을 담아먹는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도는 과거에는 나뭇잎이나 나무, 최근에는 스탠이나 알루미늄에 카레나 식사를 담아 먹는다. 이는 인도인의 생각때문인데 흙은 물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고, 땅의 흙은 남의 침을 흡수한 것으로 더럽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대인도에는 토르소라는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조각상이 발견된다. 그리스 로마는 상당이 균형잡히고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조각상이 많은데 인도의 것들은 하나 같이 살집이 푸근하다. 고대인도인은 살집이 있는 몸을 이상적으로 바라보았는데 튀어나온 아랫배를 프라나라고 한다. 고대인도어로 숨, 숨결을 의미하는데 인도요가에서는 호흡을 중시하며 아랫배가 발달해야 온몸의 균형이 잡히고 호흡으로 몸의 기를 원화할게 순환시킬수 있기에 그렇다. 

 선인더스문명 이후 인더스 문명도 기원전 2천년 정도를 전후하여 쇠락한다. 아리아인이 이 지역을 차지하는데 그들이 베다에 남긴 드라비다 인에 대한 기록때문에 역사계는 한때 아리아인의 침공으로 인더스 문명의 주인이 교체된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과 제반 증거들은 침공보다는 기후의 변화로 자연스레 드라비다 족이 남으로 이주하고 건조지역에 익숙한 아리아인이 건조해진 이 지역을 계승한 것으로 보는 추세다. 

 베다는 사실 책이 아니고 구전이었다. 무려 기원전 1500-기원후 400년인 거의 이천년간 구전으로 이어져왔으며 이후에야 기록으로 남겨진다. 베다에서는 아리아인을 고귀하게 여겨 카스트제도의 발판을 마련한다. 카스트는 강고하여 왕족인 크샤트리아마저 브라만의 눈치를 보아야 했는데 이로 인해 부를 축적한 바이샤와 더불어 카스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다. 이시기 때마침 떠돌이 수행자들은 브라만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진리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이들 중 하나가 석가모니다. 

 석가의 가르침 역시 바로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의 사후 무려 500명의 제자가 서로 의견을 주고 이견없이 정설로 인정되는 것을 정리하였는데 이런 결집이 수백년간 여러차례 이뤄졌다. 그리고 1세기가 되어서야 글로 기록되었으며 석가가 깨우친 이런 진리를 다르마라고 한다. 카스트가 만연한 불교에서 모든 이가 해탈할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교는 유연하여 윤회등 인도의 전통사상을 받아들이는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근거지인 인도동북부에서 시작되었고 200년간 인도 전역으로 퍼진다. 그리고 불교가 인도전역으로 퍼지는데는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통일과 그것을 해낸 아쇼카왕의 역할이 컸다.

 인도의 상징은 4마리 사자상인데 이 조각상을 만든게 아쇼카다. 알렉산더의 침공이후 그들이 철수하자 인더스상 북부 유역엔 힘의 공백이 생겨난다. 여기에 마우리아 왕조가 등장하여 지역의 강자로 부상해 인도를 통일한다. 아쇼카는 잔혹한 왕이었으나 통일 이후 자신의 행위에 회의를 느끼고 무차별 살상을 금지하는 법을 선포하고, 불교는 우선하며, 이를 나라의 통합수단으로 이용한다. 아쇼카는 페르시아의 것을 본따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12미터 높이의 석주를 전국 곳곳에 세운다. 석주에는 법륜이 있는데 법륜은 수레바퀴로 법의 바퀴를 뜻한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의 움직임을 비유한 것으로 명백한 우주의 진리이자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퀴를 굴리는 왕인 전륜성왕이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군주를 의미하며 아쇼카와 신라 진흥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자처했다. 

 인도는 돌이 사암이나 동판암이 많아 매우 무른 편이다. 그래서 조각하기가 매우 수월한데 그래서인지 회화보다 조각이 먼저 발달했다. 하지만 세월에도 약한 편이어서 인도인은 돌의 내구력을 높이기 위해 겉을 마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인도는 보통의 사람들이 사망하며 화장하여 유골을 강에 뿌리는 관습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은 화장하여 그 유골을 스투파라는 곳에 세워 묻었다. 스투파는 이후 투파, 탑파, 솔로파등으로 불리다 한국에서는 탑으로 명명된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그 사리를 주변 8개국 왕이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툰다. 결국 나누어 갖는데 이 8장소가 근본 8탑이 된다. 아쇼카가 이후 제곡을 통일하여 이 8개의 유골을 무려 8만 4천개로 나누어 전국에 뿌리는데 그래서 인도 전역에 8만4천개의 스투파가 생겨난다. 스투파 주변엔 자연스레 사원이 생겨 하나의 종교성지가 된다. 인도인들은 스투파 주변을 탑돌이하며 사리에 힘을 빌려 소원을 성취하고자 했는데 탑돌이는 우측으로 돌아야만 하며 그래서 본고장 인도의 스투파 주변에는 탑돌이를 위한 울타리가 있다.  

 향후 인도 각지로 스투파가 퍼지며 크기가 12cm정도로 매우 작아진다. 이런 미니 스투파는 개인 예배를 위한 것으로 왕이나 승려, 일반 신자도 이를 만들어 향후 자기 유골을 여기에 봉안하기도 했다. 이런 작은 스투파로의 변형이 스투파의 1차굴절이다.

 2차굴절은 동남아등지에서 생겨난다. 미얀마로 퍼져나간 스투파는 윗부분의산개와 하르카가 거의 사라지고 복발이 기존 인도이 반구형에서 계란 노른자처럼 하단부로 갈수록 퍼지는 형태로 변형된다. 이것이 유명한 미얀마의 쉐지곤 파고다와 쉐다곤 파고다로 이들은 수천킬로미터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형태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아 당시 미얀마에 스투파를 만드는 전형이 있었던 것으로 예측된다. 이 미얀마의 것이 동남아의 표준으로 자리잡아 태국, 캄보디아 등지로 비슷한 형태의 것들이 생겨난다. 

 3차굴절은 동북아시아의 탑이다. 히말라야를 넘어간 불교 승려들은 현지인들에게 스투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북아시아는 화장하는 풍습이 없었고, 따라사 시신을 탑에 안치하지도 않았다. 다만 높이 쌓은 건물로 상상하여 만든 스투파가 탑이다. 초기엔 목탑을 지었으며 탑은 홀수로 지었는데 홀수가 기운이 강한 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목탑은 향후 석탑으로 바뀌는데 그 과도기에선 굳이 그럴 건축한적 필요가 없음에도 석탑을 목탑 양식처럼 짓곤 했다. 한국의 미륵사지 석탑이 그렇하다. 이후 석탑 만의 양식이 자리잡으며 목탑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인도에서는 스투파에 무덤이나 마찬가지인 큰 규모의 복발이 스투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나 동북아의 탑은 복발은 윗부분에 흔적만 남게되며 탑돌이를 위한 울타리와 다른 기단 부분이 합쳐져서 사실상 그부분이 탑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특히 문이 생겨나는데 이는 인도의 스투파의 큰 차이점이다. 목탑시절에는 인도에선 별 의미가 없는 장식적 역할인 찰주가 목탑 전체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탑의 층을 세는 방법은 지붕의 갯수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스투파에 이어 마침내 불상이 생겨난다. 사실 석가모니는 무려 천번의 전생끝에 열반에 들어간 자로 속세와의 연이 끊어진 자를 형상화하는 것자체가 논리적 모순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끝에 석가의 모습이 불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불상엔 인도에 있었던 쿠샨제국이 역할을 한다. 쿠샨은 매우 독특한 나라로 본디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의 월지가 흉노에 밀려 인도 북부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 지역엔 원래 알렉산더의 후예들이 만든 그리스 박트리아 제국이 있던 곳으로 쿠샨은 자신들의 중앙아시아 유목문화에 그리스 로마문화, 인도 북부의 문화가 섞여서 생겨난다. 

 그리스 로마는 유명인물이나 신의 모습을 주화로 만드는 문화가 있었는데 쿠샨도 이를 본땄고 카니슈가 왕의 동전을 앞면에 그리고 반대편에 여러 신의 모습을 새겼다. 그리고 이 신중 부처도 등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부처가 형상화된다. 이후 불상이 제작되는데 불상엔 공통적 특징이 있다. 우선 석가의 높은 지혜로 머리가 아닌 머리뼈가 불툭 튀어나온 유슈니가 있고, 석가를 빛내는 광배가 있다. 또한 통견이라는 승려들의 격식있는 복장이 모든 불상의 공통 특징이다. 

 책은 인도고대 문화로 마무리하는데 보면서 예술책인지 인도 역사책인지 잘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그만큰 아시아에서 미술은 별도로 분리된 것이라기 보다는 역사 및 생활, 종교, 관습과 함께했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2권인 중국편인듯 하다. 기대되며 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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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25만 부 기념 봄 에디션, 양장)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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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인을 보면 그 사람의 실제 철학이나, 가치, 능력은 대개 선택의 뒷전이란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들은 특정 사건이나 만들어진 이미지, 그리고 보여지는 진정성으로 주로 판단을 한다. 책도 그렇단 생각을 많이 한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표지나 제목이 딱딱하고 재미 없어 보인다면 잘 팔리지 않으며 별것이 없더라도 그것을 잘 해낸다면 잘 팔린다. 얼마전에 엔트로피란 책을 봤는데 그 훌륭한 책이 그런 제목과 표지로 과연 얼마나 팔리겠는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제목의 이 책도 그렇다. 안좋게도 후자다. 책을 읽으며 뭔가 나오겠지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별게 나오지 않는 것을 경험하며 완독했다. 500페이지나 되어서 힘들었는데 마지막 200쪽 정도는 사실 기대를 많이 접고 거의 훑는 형태로 보았다.

 책에 기대했던 것은 기차라는 것이 주는 경험과 철학자들에 대한 저자 나름의 일관성 있는 정리였다. 기차를 매우 좋아하는데 실제로 그렇게는 잘 하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느린 기차를 천천히 타고 바깥에는 비가 내리며 차창에서 홀로 따뜻한 커피를 즐기며 책을 읽어나가는 상상을 자주 한다. 그런 기차와 인문학의 정수 철학이라니 매우 좋아보이는 결합 같았다.

 책은 예상과는 매우 달랐는데 책을 읽기 힘들었던 이유는 철학에 대한 소개도 자신만의 시각을 갖고 체계를 갖고 언급하기 보다는 개인사와 관련하여 언급하는데 그쳤고, 상당수의 내용이 개인사와 관련하여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아도 공감이 안가 읽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철학에 대해 개괄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설명없이 진행되는 내용에 힘들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하여튼 책은 저자가 좋아하는 몇몇 철학자나 인물들과 관련한 지역을 직접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그들의 살아생존 장소나 지역 등을 방문하며 저자가 관련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이다. 스크라테스, 루소, 쇼펜하우어, 에피쿠로스, 간디, 공자등이 나오며 벌써 잊었지만 처음 드는 몇몇 이들도 등장한다. 

 책에 대한 비판만으로 서평을 남겨보는 것은 처음인데 그만큼 실망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책을 재밌게 읽는 분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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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우주와 환경에 대한 책 모두에 관심이 많다. 우주에 대한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한 없이 나를 작게하며 이 좁은 창백한 점에서 분투하는 모든 노력이 허사 같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워낙 스케일이 크서 압도적이고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우주의 시작과 끝, 그리고 허무한 질문인 '우주가 대체 왜 생겼고 그 전엔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인간이 알수 없는 부분이다. 너무나도 크긴 하지만 우리 은하도 태양계도 지구도 우주의 법칙을 적용받는 우주의 일부이기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환경 분야는 실존의 문제다. 2022년 4월 초는 무척 더웠다. 우리가 뿜어낸 열에너지 덕분인데 이 지경에도 에너지 위기로 서구를 포함한 선진사회는 다시금 온실가스 배출 정지에 합의에 실패했다. 다시 원전을 돌리고 가스 사용을 허가하는 쪽으로 회귀하는 분위기다. 

 하여튼 둘은 접점이 별로 없어보였는데 이번에 읽은 책 제러미 러프킨의 '엔트로피'는 나에게 양자를 연결시켜줬다. 책 내용을 간단히 언급하면 엔트로피라는 우주의 법칙 아래 인간이 생존을 위해 발달시켜온 자연 활용 및 분석능력인 과학과 기술이 결국 환경을 파괴하여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행위라는 설명이다. 우리가 이용가능한 지구의 유용한 환경은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이고 그것의 이용 후 나타나는 환경파괴는 무질서를 높이는 상황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한 상태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된 책 3권이 떠올랐다. 엔드 오브 타임은 우주의 역사를 엔트로피로 본 책이다. 우주가 에너지 덩어리인 매우 작은 점에서 끝없이 팽창하며 이 에너지와 그것으로 이뤄진 물질이 퍼져나가는 과정인 만큼 그 끝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책은 엔트로피를 자세히 서술하고 인간의 역사도 다루며 우주의 끝엔 사고조차 남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은 최근에 읽은 책으로 엔트로피와 시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시간은 엔트로피와 매우 관련하는데 우주의 시작과 끝이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에서 매우 높은 상태로 향하는 것이라면 시간은 그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트로피가 없는 우주의 시작 전과 끝은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그 구매가격은 매우 싸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임을 알려준 책이다. 음식의 가격이 싼 이유는 이것이 가격이 저렴한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대량생산된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 효용은 매우 낮다. 화석연료 기반으로 재배된 농산물이나 축산물을 내가 소비하여 얻는 칼로리는 그것을 키우는 과정, 그리고 추수, 도축, 수송과 유통, 판매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칼로리에 비해 현저히 적다. 거기에 이들은 생산과정에서 경제학에서 잘 측정하지 않는 상당한 환경오염 비용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가격 경쟁력 유지를 위해 소비자가 내는 세금으로 구성된 정부의 보조금으로 낮은 가격을 유지한다. 결국 싸다고 생각한 식품이 사실은 매우 비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인데 책 엔트로피도 비슷한 점을 지적한다.

 본격적으로 책 '엔트로피'에 대해 언급하면 이 책은 우선 유명한 제레미 리프킨이 썼고 상당하긴 하지만 논의된지는 좀 오래된 저자라는 점이다. 그는 20년 정도 전에 상당히 유명했는데 책 엔트로피도 알고보니 그가 무려 1980년 초반에 저술한 책이었다. 그래서 책 뒷 부분에 경제와 인구, 식량, 에너지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에서 참고한 자료들이 대개 1960-70년대의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부분에 엔트로피의 증가와 인간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 연결지어 서술한 부분은 시대를 관통하여 인류가 역사내내 새겨야할 부분을 관통했다는 느낌이다.

 엔트로피는 두 가지 법칙을 갖고 있다. 제 1법칙은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한다는 것이다. 빅뱅 이후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모든 에너지 물질은 그 형태와 밀도를 달리할 뿐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주가 계속 무한히 팽창해나가면 모든 에너지와 물질의 밀도가 거의 제로에 가깝게 흩어져 버릴 것을 암시한다. 물질이 퍼져나갈 공간은 거의 무한히 팽창하는데 반해 물질과 에너지를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제 2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이다. 이 방향은 안타깝게도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 획득 가능한 상태에서 획득이 불가능한 상태로의 방향이다. 이는 어쩌면 우주가 계속 팽창하기에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물질과 에너지는 모여 있어야 유용하지 공간의 팽창으로 흩어지면 유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마 우주가 쪼그라든다면 엔트로피는 그 방향이 바뀔 것이다. 이 법칙이 의미하는 것은 무서운데 결국 우주에 모든 생명체나 그들이 거주하고 진화하는 별들이 모두 사라져 흩어져 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엔트로피란 어떤 시스템 안에 존재하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형태로 바뀌는 정도를 재는 척도를 의미한다. 이 법칙이 온 우주에 적용된다면 사실 인간 같은 생명의 탄생이나 별이나 은하의 탄생 같은 고도의 질서는 엔트로피 법칙을 위배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국소적 질서의 탄생은 역으로 다른 바깥 부분의 엔트로피를 더욱 크게 증가시키기에 전체적으로는 법칙을 위배하지 않는다. 이게 책의 핵심인데 하나의 작은 질서인 인간이 과학 기술문명을 발전시켜 그 질서를 인간 생존을 위해 정교하게 하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큰 엔트로피 증가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생존을 위해 발전해나갈수록 인간 자신 및 우주의 멸망을 앞당긴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명백한 엔트로피 법칙에도 인간은 우주가 무한할 것이고 인간이 영원히 제약 없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설적인 근대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인간이 이런 세계관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서구는 근대적 세계관 이전에 그리스 세계관 및 기독교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두 세계관은 엔트로피 법칙에 부합한다. 

 그리스인은 역사를 지속적인 쇠락의 과정으로 보았는데 총 다섯단계로 역사를 나누었다. 황금 - 은- 청동 -영웅 - 철의 시대로 뒤로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지고 쇄락한다. 이 후퇴는 마지막 단계를 지나면 신에의해 다시 반복되는데 이에 따르면 역사는 발전이 아닌 질서와 혼돈을 반복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삶은 다음 생을 향해가는 중간과정으로 본다. 그리스와 다른 것은 인간 역사가 순환이 아닌 일직선으로 향한다고 파악한 것인데 이 과정은 발전이 아닌 힘의 충동과 해체의 씨앗을 지상에 뿌리는 것으로 인식된다. 때문에 사회에서 어떤 개인적 목표나 진보의지, 열망을 갖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되며 그저 인간과 사회는 신이 이끄는 일종의 도덕적 생물체로 그 안에서 신에 의해 주어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양 세계관은 지금 듣기엔 터무니 없는 면이 많지만 적어도 인간 사회의 발전이 쇠락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엔트로피 법칙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적 세계관은 1750년 튀르고가 역사의 순환과 지속적인 쇠락을 부정하며 바뀌기 시작한다. 튀르고는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이며 각 단계는 앞선 단계보다 진보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며 근대적 세계관의 문을 열었다. 이후 등장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세명의 공동작품이다. 이들은 우주에는 정밀한 수학적 질서가 있고 이 질서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구상에 대부분의 것들은 원시 상태에 있고 그래서 충돌과 혼란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잘 배열하여 우주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것과 같은 질서를 지구상에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연의 것들을 잘 배열하여 우주의 질서와 같은 질서를 창출하느냐였는데 그 답은 역학의 자연적 법칙을 이용하여 인간의 물질적 자기 이득이 증대되도록 가장 적합하게 자연을 배열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물질적 부가 축적될 수 있도록 세계는 더욱 질서화하며 진보는 물질적 풍요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이며 이 물질적 풍요는 결국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인간의 과학과 기술은 바로 이를 실현하는 도구가 된다. 

 이런 기계론적 세계관은 지금도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 가장 큰 특징은 진보다. 덜 질서 있는 자연적 세계가 인간에 의해 이동되어 더 질서 있는 물질적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목적은 자연과정의 일부를 더 큰 가치, 더 큰 도구, 더 큰 질서의 형태로 바꾸어 당초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계관에 입각한 인간의 과학과 기술에 의한 발전은 결국 재생 재활용 가능한 유용한 에너지 원을 희생하고 전체 환경의 엔트로피 총량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에너지가 높은 수준의 집중도에서 낮은 수준의 집중도로 이동할 때이다. 자연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일정량의 에너지가 무용한 에너지로 전환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유용한 에너지는 결국 오염된다. 사람들은 오염이 생산활동의 부산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오염은 흩어진 무용한 에너지의 증가, 즉 흩어진 에너지의 형태다. 그리고 지구는 하나의 폐쇄계이기에 지구의 엔트로피는 언젠간 극대점에 도달한다. 물론 태양에너지가 꾸준히 공급되긴 하지만 그것이 지구라는 폐쇄계의 엔트로피를 낮춰주는건 일정량이고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미 인간의 과학기술은 매년 태양에너지가 낮춰주는 마이너스 엔트로피 이상의 플러스 엔트로피를 발생시키고 있다. 곧 한계에 다다를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엔트로피는 시간과도 관련한다. 우주가 생긴 이래로 시간은 항상 앞으로만 흘렀는데 이는 엔트로피가 커지는 방향으로 항상 일정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항상 총량은 일정하지만 우주가 팽창하기에 항상 쓸모있는 상태에서 쓸모없는 상태로만 움직인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극대화되어 에너지와 물질이 모두 고갈되면 더 이상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즉,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즉, 시간은 일을 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남아있을 때만 유용하며 뭔가가 일어난다는 것 역시 같은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생명체는 주변환경에서 자유 에너지를 흡수하여 엔트로피를 흡수하여 엔트로피 과정의 반대방향으로 움직여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지구에서 이런 자유 에너지의 원천은 태양이다. 모든 생물은 주변환경에서 마이너스 엔트로피를 지속적으로 흡수하여 살아간다. 생명체는 개방계로 폐쇄계와는 다르게 주변 환경과 물질 및 에너지를 교환한다. 그리고 주변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여 자기 몸에 흡수하여 살아가게 된다. 생명체가 자신의 엔트로피를 낮춰가며 주변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과정은 놀랍기 그지 없다. 1년에 인간은 생존을 위해 송어 300마리가 필요하다. 송어 300마리는 9만 마리의 개구리를, 9만 마리의 개구리는 2700만 마리의 메뚜기를, 그리고 이 메뚜기들은 1천톤의 풀을 요구한다. 

 생명체는 일종의 에너지 변환자인 셈인데 생물의 눈과 귀, 코, 입, 미뢰, 손등의 감각 기관과 머리, 입 사이의 긴밀한 관걔는 생명체가 에너지의 흡수자이자 변화자임을 보이는 명백한 증거다. 생명체의 생존은 이런 변환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렸는데 진화 초기 경쟁이 치열해지기전에는 주변의 물질과 에너지 흐름을 극대화, 즉, 마구잡이로 흡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 에너지 흐름의 극대화보다는 효율화가 유리해진다. 이런 에너지 흐름의 극대화를 저자는 식민화 단계, 그리고 효율을 중시하는 극소화를 절정 단계라 칭한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는 당연히 절정 단계이지만 우리의 과학기술 문명은 식민화 단계라 볼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감각 기관 외에 에너지 변환을 위해 신체 외적 도구를 사용한다. 이는 단순한 도구에서 지금은 로봇, 인공지능 같은 걸로도 확장되어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변환한다. 인간의 삶, 문화, 사회는 결국 원재료에서 출발해 이런 외적 도구를 통해 무용한 폐기물을 양산한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상 기술 발전에 의한 잉여로 인해 계속 더 큰 잉여를 낳는 식으로 경제발전을 하고 인구를 증가시키며 발전해 왔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지구라는 한계를 명확히 갖고 있는 폐쇄계에 있는 마이너스 엔트로피를 소모한 과정에 불과하며 과거 태양에 의해 축적된 마이너스 엔트로피까지 써버리는 방법을 알아낸 것에 불과하다. 즉, 엄밀히 말해 한정된 에너지나 자원을 더 많이 써버리는 도구를 찾은 것인 셈이다.

 인간 사회는 사실 발전이라기 보다는 결핍, 위기, 실험의 과정을 거친다. 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일정한 에너지가 무용화한다. 이런 축적된 엔트로피로 인해 사회가 에너지 원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이 역사적 분수령이다.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이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방식의 기술이 태어나며 이것이 사회, 경제, 정치 체제 전반으로 퍼져 새로운 체제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는 엔트로피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사회가 이전 사회보다 에너지 환경면에서 더 열악해 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새로운 분수령을 맞이 했을 때 이전보다 에너지 획득을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하는 것을 의미하며 고전적으로는 더 힘든 육체적 노동을 해야함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과거 수렵사회에서 인간은 채취와 사냥으로 주변에서 쉽게 식물,동물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구증가와 역사의 지속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주변 자원이 부족해지자 농경과 축산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역시 오래 지속되어 한계를 맞이하자 오래전에 축적된 마이너스 엔트로피인 화석 연료의 사용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역시 최근 한계를 향해 치닫고 있다. 각각의 단계는 인류역사상 큰 발전처럼 보이지만 같은 에너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하므로 엔트로피 측면에서 명백한 퇴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일전에 읽은 책 '문명과 식량' 도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를 이와 매우 비슷하게 서술한다. 인간이 발전을 통해 새로운 자원을 얻으면 그 한계에 가깝게 인구가 성장하고 위기가 오면 다시 새로운 자원을 얻는 방법을 개발해 내어 다시 성장하고 위기를 맞는다는 식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과학 기술이라는 것은 자연의 창고에서 꺼낸 에너지의 형태를 바꾸는 변환자 역할 이외의 것이 아니게 된다. 기술은 결코 새로운 에너지를 창조하지 못한다. 열역학 1법칙 때문이다. 다만 쉽게 쓸수 있던 유용한 에너지의 고갈로 기존엔 쓸수 없었던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이 기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계를 거칠수록 갈수록 어렵고 고난이도가 될 수 밖에 없다. 즉, 인간 과학기술의 발전은 엔트로피 증가라는 근원적 문제의 해결책은 영원히 될 수 없으다. 그저 엔트로피 증가와 쌍으로 그 난이도와 수준을 꾸준히 높여나갈수 밖에 없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행위가 계속될 수록 엔트로피의 증가는 지수함수적으로 커진다. 인간이 수렵사회에서 증가시킨 엔트로피와 농경사회의 엔트로피, 그리고 산업사회의 엔트로피의 증가폭은 그 수준이 다르다.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 경제 기구등도 인간의 신체외적도구 기계처럼 에너지 변환자다. 이들의 일은 문명 전체를 통과하는 에너지 흐름을 원활히 하는 것이다. 역사의 분수령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기술이 등장하면 초기엔 이 기구들이 매우 융통성이 있다. 초기에는 새로운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술 창조와 확보에 집중하기에 이 기구들은 조정자와 설계자의 역할을 한다.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에너지원의 흐름에서 박탈당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그 변환을 위한 기반 건설에 주로 투입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지난 단계에서의 에너지 결핍으로 인한 고통의 기억으로 초기의 박탈을 희망을 갖고 잘 참아낸다. 

 다음 단계는 보다 많은 에너지가 사회 전반으로 흘러드는 단계다. 그리고 이 시기 엔트로피가 급격히 증가한다. 에너지는 다양한 제품이나 서비스로 변환하며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개인과 집단간 에너지 교환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그리고 에너지 폐기물이 대량으로 발생해 엔트로피가 증가하게 된다. 이렇게 2단계에서는 무질서가 크게 증가해 급기야는 이것이 에너지 흐름의 진행을 방해하게 된다. 기구들은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무질서를 청소해야하며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유지보수를 하기 시작한다. 위기 때마다 관료제라는 것이 비대화하는 것이다. 기구들은 더욱 중앙집권화하며 국소적으로는 한 질서가 무너질때마다 새로운 중앙집권 기구가 나타나 이를 정리하여 질서를 잡는 순환이 이뤄진다. 농경사회에서 생산력이 무너질때마다 왕조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나타나 질서를 잡는 식의 순환이 이뤄졌던 것을 상기하면 된다. 하여튼 동시에 국가는 고갈되는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영토확장을추구하며 정복을 위해 국가 기구들은 더욱 비대해진다. 이 때 제도가 와해되고 외부침략이나 내부반란에 매우 취약한 시기가 도래한다. 엔트로피의 분수령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후 단계의 해결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에너지원을 사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개발로 다시 한번 쳇바퀴를 돌리는 것이다. 다만 새로운 고도의 기술이 엔트로피 증가를 더욱 가속화하기에 쳇바퀴가 도는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다른 해결책은 에너지 흐름을 극대화하는 식민화상태대신 절정상태로 돌아가 복잡성과 중앙집중화를 늦춰 쳇바퀴가 도는 속도 자체를 느리게 하는 것이다. 즉, 저엔트로피 사회로 전환하는 것이다.

 저자는 1980년의 상황에서도 태양에너지 같은 재생에너지의 사용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해법으로 생각한 듯 하다. 하지만 태양에너지는 연료의 채취, 유통, 발전, 사용, 소비의 모든 단계가 중앙집권적인 화석연료와는 다르게 분산형 시스템이다. 태양에너지를 태양전지판에서 얻고 이것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 설치되어 소유와 사용이 분산될 수 밖에 없는 만큼 분산시스템이 될수 밖에 없다. 저자는 그로인해 지금의 시스템과 태양에너지에 의존한 체계가 충돌하수 밖에 없다고 본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의 고엔트로피 지향의 정치, 사회, 문화체계를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엔트로피 문명에서는 최소한의 통치 정부가 좋은 정부가 된다. 대중 민주제, 직장과 공동체에서의 평등한 투표권과 의사발언권이 그것이다. 세계관도 변화가 필요한데 기존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자연을 착취의 대상이 아닌 총체적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새로운 세계관이 요구된다. 인간이 자연과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모든 인간활동에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는 새로운 윤리적 기반도 마련된다. 저엔트로피 사회는 다음과 같은 생산 기준을 갖는다. 우선 탈집중화와 지역화다.그리고 기업은 노동자가 관리하는 민주적 조직이 되며, 생산과정에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소비를 최소화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저엔트로피 사회의 건설을 통해 사회의 에너지 흐름을 최소화 하여 자연적으로 잘생하는 에너지 흐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인간과 다른 생물 및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주장하지만 모든 부분에 동의가 되진 않는다. 이 책에 나온 시점은 1980년대 초반으로 당시는 산유국의 담합으로 서방사회가 오일쇼크를 여러차례 겪고 이를 통한 경제위기와 물가상승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금리를 유지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곧 재생불가능한 자원은 한계를 맞이할 것처럼 보이는 반면 이를 대체할 재생에너지를 활용할 과학기술은 매우 미흡하였고, 자원 부족으로 인플레이션은 지속될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낳은 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이 주장하는 논리는 그러한 시점에서 상당히 상황이 달라진 오늘날에도 기본적으로 유효하다. 자원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인간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자원을 소모하여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은 영원한 굴레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이 지구라는 하나의 폐쇄계를 벗어날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았다. 인간이 태양계, 그리고 다른 천체에 접근하여 마이너스 엔트로피를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저자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문명단계에 접어들어 굳이 저엔트로피 사회로의 전환 없이도 새로운 고 엔트로피 사회가 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 시점에서는 상당히 가능해 보인다. 

 나는 비교적 저자가 책에서 싫어하고 비판한 낙관론자나 실용주의자에 가까워 인간이 엔트로피 위기를 겪을 때마다 새로운 해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실제 부침은 있지만 역사적 경험도 그러하다. 하지만 저엔트로피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고엔트로피의 문제점과 그것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인간이 새로운 역사적 분수령을 지나기 위한 충분한 간격을 벌어줄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엔트로피 위기란 저자의 논의는 지구수준에서는 충분하지만 언급한것 처럼 인간이 지구를 넘어설 능력이 생긴다면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인간이 우주의 엔트로피를 높여 우주의 마지막을 가속화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아주 먼 미래에 윤리적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본다. 우주에 다른 여러 생명체들이 있고 서로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속도가 매우 다르다면 한 생명체종의 행위는 다른 생명체종에게 매우 비윤리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지금 지구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여튼 많은 깨달음과 시각을 넓혀준 책이었다. 발간 후 4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를 알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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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5-07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2-05-07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닷슈 2022-05-07 21: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얄라알라 2022-05-08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축하드립니다

닷슈 2022-05-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얄라님.
 
언론 혐오 사회 - 팩트도 정의도 기자도 없다
정상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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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언론은 많이 망가졌다. 기레기라는 용어가 난무하고, 이번 대선에선 명백히 잘못된 사태에 대해 기계적 중립을 취해 잘못된 쪽을 사실상 옹호하는 행태를 하는가 하면, 그 기계적 중립마저 지키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사람들은 언론에 대한 신뢰를 잃어 더 이상 신문이나 뉴스를 보지 않으며 SNS와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얻는다. 물론 그 결과는 확증편향뿐이다. 그리고 신문기사나 뉴스를 굳이 보는 경우에도 그 홈페이지를 방문하기보다는 대부분 포털을 통해서 소비한다. 언론은 선정성경쟁과 자극적 기사로 속도경쟁을 하며 기본적인 크로스체크도 하지 않고 그를 통한 수익만 얻을 뿐 양산한 피해자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에 여당은 작년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법을 발의했다. 물론 언론은 전가의 보도 '언론의 자유'를 압세워 야당과 합세해 저항했다. 그리고 상당수 국민들은 이 법에 찬성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한국언론이 망가진 첫 번째 이유로는 우선 수익구조의 붕괴를 들 수 있다. 인터넷 포털이 등장하기전 신문이나 방송사는 일종의 독점을 하고 있었고 확실한 소비처를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신문은 실제로 판매될 수 있었고, 지상파와 신문 모두 고액의 광고를 독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체 환경이 변화했다. 인터넷이 등장했고 포털이 생겨났다. SNS에 유튜브 그리고 포털이 뉴스진입장벽을 크게 낮추어 매우 많은 인터넷 언론이 등장했다. 그 전엔 언론사하려면 상당한 자본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지금의 대부분 언론사들은 수익구조가 사실상 포털 이외에는 없다. 광고 수익은 모두 쪼개져서 나눠가졌고, 공짜 언론 콘텐츠에 익숙한 한국의 독자들은 더 이상 뉴스를 돈을 주고 소비하지 않는다. 주요 포털들이 뉴스 제공의 대가로 수익을 제공하는데 대부분의 언론사가 이에 의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부작용을 낳았다. 포털에 종속된 언론사는 페이지뷰 경쟁을 들어갔다. 대부분의 언론사 사주들은 긴 안목과 리더십을 부재하며 수익구조도 창출할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에 기자들은 페이지 뷰를 올리기 위해 자극적 제목과, 선정성 경쟁, 제목만 바꾸어 다른 기사 베끼기, 연예인 인스타그램 뒤지기, 예능 프로그램 내용 요약하기 등으로 기사를 공장식으로 양산한다. 

 한국 언론이 망가진 두 번째 이유는 기자들이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한 사건은 상당히 입체적인 측면을 갖고 있으며 여러 이해당사자가 사회문화, 경제, 정치적 배경을 각각 앉고 얽혀있다. 이를 모두 이해하고 기자가 방향을 정하여 분석하고 기사화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포털에서 자본과 시간에 종속된 기자들은 이런 시간을 들여 기사를 작성할 시간이 없다. 기자들은 속도경쟁을 통해 1-2시간만에 하나의 기사를 써내기 일쑤며, 심한 경우 하루 10개의 기사를 작성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사는 데스크가 있는 언론에서도 게이티 키핑에 의한 검증이 불가능하다. 데스크들이 어느 정도 소화하려면 하루 50개 미만의 기사가 적당하다. 이렇다 보니 조선일보 같은데서도 조국과 관련해 잘못된 성적 이미지를 넣는 실수가 벌어진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한국과 일본에만 거의 남아 있는 출입처제도다. 출입처란 정부, 법원, 국회등 권력 3부와 여타 중요 대기업들에 대한 취재를 위해 해당기관이 기자들에게 제공한 공식 출입장소다. 이곳을 통해 과거 많은 언론들이 해당기관 관계자를 직접 만나 쉽게 접할 수 없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권위주의 정권만 해도 상당히 유용한 정보 통로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대부분의 주요 공직자에게 접근하는 전화 번호 및 SNS가 모두 공개되어 있어 누구나 이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출입처 제도는 다른 문제를 낳는다. 바로 기사의 동질화 현상이다. 각 언론사의 기자들은 자신이 출입하는 기관의 관계자들과 비슷한 입장을 갖기 시작한다. 여당이면 여당, 야당이면 야당의 시각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만 한 것이 매일 출근하며 이들과 이야기하고 부딪히고 밥을 같이 먹고 서로 경조사를 챙겨나가는 과정을 통해 동질화 되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또한 출입처 기자들 간에는 묘한 동질감이 형성된다. A라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한 기자는 '가'의 관점으로 기사를 쓸 수 있으며, 다른 기자는 '나'의 관점으로 기사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하지만 향후 '가'의 관점이 비교적 옳은 것으로 밝혀진다면 '나'로 작성한 기자와 언론사는 타격을 입게된다. 때문에 기자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같은 출입처기자끼리 같은 정보과 같은 시각마저 공유하며 상당히 비슷한 류의 차별성없는 기사를 작성하게 된다. 

 출입처의 마지막 문제는 언론의 자유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보호나 국가의 이익, 혹은 민감한 사안때문에 출입처에선 사전에 언론에 정보를 제공하고 엠바고를 거는 경우가 있다. 이는 대부분 지켜지지만 간혹 엠바고가 깨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출입처의 다른 기자단이 해당 언론에 대해 출입처 접근을 제한하는 징계를 내린다. 이는 매우 어처구니 없는 경우인데 해당 기관도 아닌 언론사가 다른 언론사의 취재할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의 네 번째 문제점은 폐쇄적 편향적 의사결정 구조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게이트 키퍼 구조를 갖는다. 일선 기자 - 팀장 - 부장 - 국장으로 올라가며 기사를 검증받는 식이다. 이는 기사의 크로스 체크 기능 및 각종 오탈자 검증, 논리 보완을 통해 어느 정도 기사의 질을 보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구조가 수직적이고 윗선 일인에 의해 검증되다 보니 상당한 편향성을 가질 역할도 한다. 실제 언론사는 위로 갈수록 나이가 고령화 하고 소득이 매우 높으며 오랜 기자 생활로 정재계 주요 유력 인사들과 친분 관계를 쌓고 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 서민 계층과 약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사를 공감하고 옹호할 수 있을가. 그리고 반대로 유력 계층을 공격하는 기사를 과감히 기재하는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또한 언론사의 구조는 남여 편향적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전 세계 언론들은 상당히 남성 중심의 문화를 갖고 있으며 미국조차도 2021년에 로이터 통신이 170년만에 처음으로 여성 국장이 생겼을 정도다. 한국은 2020년 언론인 중 남성 기자가 69.4%, 여성 기자가 30.6%로 상당한 수적 차이를 보였다. 이는 언론사 상층으로 갈수록 심해져 게이트 키퍼 층은 주요 보직으로 올라가면 104명중 여성은 겨우 6명에 불과할 정도로 적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시각이나 여성 중심의 기사가 나올리 만무하다. 

 한국 언론이 마지막 문제는 무책임하게 기사를 양산할 뿐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생겨난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2008년 SBS의 '긴급출동SOS24' 라는 프로그램은 한 휴게소에서 찐빵을 파는 소녀에 대한 보도를 한다. 프로그램은 악의적으로 동영상을 촬영 및 편집하여 휴게소 사장이 강제로 소녀를 착취하고 폭행까지 당하는 것처럼 꾸며졌다.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어찌된 일인지 휴게소 사장은 6개월 가량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영상이 제작진에 의해 촬영되고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소녀의 상처 역시 대상포진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SBS가 배상한 금액은 고작 3억원이 전부이며 놀랍게도 이는 한국 언론이 배상한 역사상 최고 금액이다. 300억도 아니고 겨우 3억이다. 거기에 제작진 중 누구 하나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법원이 언론의 자유를 상당히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반면 피해자인 휴게소 사장은 억울한 감옥살이에 생계인 휴게소를 폐업해야 했다. 이뿐 아니다 2013년 당시 이명박 국정원에 의한 유우성 간첩 조작사건도 있다. 동아일보가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이 사건이 조작으로 밝혀지자 동아일보는 고작 1000만원 손해배상에 무려 12명 최하단에 7줄의 정정기사만을 게재했을 뿐이다. 유우성 사건은 아마 일면 보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적어도 정정이라면 잘못된 보도 만큼 같은 비중으로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책은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언론이 나가야 할 길도 제시한다. 미국엔 프로퍼블리카라는 언론이 있다. 독립언론인데 월스트리트 저널의 전설적 편집장 폴 스타이거와 뉴욕타임즈의 전문기사 스티븐 엔젤버그의 합작품이다. 그들의 시도에 감동해 캘리포니아의 거부 샌들러 부부가 무슨 짓이든 해보라고 연간 무려 천만달러의 자금 지원을 한다. 그래서 독립이 가능한 셈이다. 이들은 창간 이후 허리케인 카트리나때 뉴올리언스의 한 병원이 환자를 안락사 시킨 사건과, 금융회사가 부동산 거품을 키워 투자자에게 거액의 손해를 입힌 사건을 보도했다. 결과는 두 차례의 퓰리처 상 수상이었다. 

 한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뉴스 타파다. 뉴스타파는 출입처를 사용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타사 기자와 정보 교환 및 의견조율이 없다. 뉴스타파는 구조적으로 기자에게 상당한 재량권과 양질의 기사를 생성할 충분한 시간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상당히 양질의 기사를 한국 사회에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역시 재정적 독립에서 가능했다. 뉴스 타파는 후원 제도를 통해 운영되고 있는데 미국처럼 갑부가 아니고 언론 자유를 바라는 여러 사람의 후원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이런 후원은 한계가 있다. 후원을 하는 사람은 한국에서는 매우 소수로 대개 정치 고관여 층이다. 때문에 충분한 숫자를 확보하기 힘들다. 거기에 이들은 정치에 고관여하기에 후원하는 언론사가 자신의 정치적 방향과 일치 하지 않는 기사를 작성할 경우 후원을 끊거나 마찰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정답은 과거처럼 뉴스를 팔아 생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포털을 통해 뉴스는 공짜란 인식을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은 필요하다면 양질의 콘텐츠에 돈을 사용한다. 넷플릭스가 대표적 예인데 한달 일정의 구독료를 내는 넷플릭스 회원이 국내에 무려 380만이나 된다. 언론사도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있다면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오락거리와 고도의 정치사회문화적 상품이 사람들의 지갑을 똑같이 열수 있는지 개인적 의문이 있긴 하지만 마땅한 대안도 없고 의외로 한국인의 뉴스 소비는 상당히 많다는 걸 감안한다면 설득력이 없지도 않다. 다만 책은 언론 컨텐츠가 유료화할 경우 이중 시장과 이중 여론이 조성될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중장년층의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갖고 오랜 시간의 습관을 통해 일본 언론이 판매하는 양질의 컨텐츠를 소비한다. 하지만 젊은 층은 일본 야후를 중심으로 제공되는 저렴하고 저열한 뉴스를 소비하는 형태를 보인다. 때문에 일본은 같은 사안에 대해 이중, 혹은 삼중의 여론이 형성되는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 한국도 그럴 우려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책은 오늘날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저자가 기자이기에 누구보다 잘 짚어내고 지적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포털에만 의존하지 말고 개개인의 뉴스 소비자도 직접 언론사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언론사엔 후원도 해나가며 눈높이를 키워나가는게 개인이 할 수 있는 언론 개혁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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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4-15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공감 합니다. 그래서 장강명 작가에게 왜 그만두었는지 묻고 싶어요. 저는 장작가의 작품은 르포밖에 안 읽었지만 이 사람이 엄청 기자가 되고 싶어했더라구요. 결국 관두고 소설을 썼는데.. 지금 작가로서 언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묻고 싶더라구요

닷슈 2022-04-15 20:32   좋아요 0 | URL
장강명 작가가 동아일보 기자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장작가의 작품을 볼 때 그 정도 인식을 가진 사람이 동아일보에서 동화되긴 힘들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추측합니다. 어렸을적 지인 중 언론인이 된 사람이 몇 있습니다. 다들 생업인지 날카롭던 사람들이 정말 현실 기자처럼 되더군요. 안타깝고 애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