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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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를 열심히 이야기 한 사람에게 다음은 무엇일까? 당연히 미래에 대해 논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과거에 대해서 말할때는 우리는 여러가지 역사적 정황을 독수리의 눈으로 꿰뚫고 이리저리 퍼즐조각을 맞추며 하나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물론 그것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다 내다본 미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서구가 지배하게 됐어. 이래서 한국이 분단되었어. 이래서 일본 제국이 망했어 등등. 이런 걸 정말 잘쓴 책이 총균쇠이고 사피엔스이며,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역사학자인 유발하라리는(사실 역사학자란 감도 별로없다. 워낙 총방위적이어서, 경력 찾아보고서야 알았다.)과거의 퍼즐에서 미래의 동향을 보고 쭉 이어지는 퍼즐을 이 책에서 맞춰냈다. 영화계엔 전작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솔직히 사피엔스보다 인상적이었다. 사피엔스도 물론 대단했지만 그게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자기만의 관점으로 잘 종합한 느낌이었다면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의 관점에 있지만 미래의 동향을 살펴 과거와 이어지는 인간의 미래를 설득력있게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더욱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전공인 역사학은 물론, 진화론, 4차산업혁명의 사물인터넷, 컴퓨터 과학, 심리학, 경제학 등등 여러 학문을 이용해 녹여냈다.

 이 책의 제목은 호모데우스인데 저자들이 워낙 인간의 특성을 하나하나 이야기할때마다 자꾸 호모에 미사여구를 붙이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는지라 썩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잘쓴 책이니 그만큼 인상적이고 재밌었다. 게다가 제목인 이 표현은 무려 책의 말미인 500페이지 가량이나 되어서 간신히 나오며 언급횟수도 5회 미만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하라리가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이 책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체험하고 알고 있는 전제가 있다. 바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진화상 생존과 번식을 위해 설계되었지 행복하자고 설계되진 않았다. 그것은 아마 생존과 번식이 성공적일때 아주 한시적으로 주어지는 보상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생존과 번식의 일시적 성공으로 행복이 오래 지속된다면 인간존재는 더나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펜사우어는 행복을 불행의 한시적 그림자로만 보았고, 불교에서는 벗어나야할 덧없는 것중 하나라 보았을지 모른다. 하여튼 하라리는 이 행복에는 두가지 기둥이 있다고 보았는데 하나는 생물학적 기둥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인 기둥이다. 생물학적인 기둥의 종점은 아마도 드래곤볼의 프리더가 그리 갈망하던 불노불사일 것이고, 심리적인 기둥의 끝은 완벽하고 지속적인 정신적 행복 일 것이다. 

 인간역사는 이러한 행복을 향한 여정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인류는 그때그때마다 자신들의 한계범위내에서 이를 나름대로 이룩하려고 노력해왔다. 수렵시대에 인간이 사용한 방법은 애니미즘이었다. 이시기 인간에게 먹이가 되고 때론 숭배와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동물들은 인간과 대화하는 존재였으며 때론 신이기도 했다.

 그랬던 인간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게 농업혁명이다. 이 농업혁명에서 인간에게 정신적 버팀목이 된 것이 바로 유신론적 종교이다. 유신론적 종교가 번성한 시점과 농업혁명간에 어느 정도의 시기적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수도 있다. 하라리는 농업과 유신론적 종교간에 농업계약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하라리는 초기 유신론적 종교를 농업사업으로 보는데 이 종교들의 초기신학이론, 신화, 전례들이 재배 식물 및 가축들과 인간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했기 때문이다. 즉, 유신론적 종교는 달라진 물적 상황에 대해 인간이 쓸만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여 정당화 한 셈이다. 

 하라리는 유신론적 종교가 겉보기와는 달리 신뿐만이 아니라 인간도 신성시 했음을 통찰한다. 실제로 초기 유신론적 종교들은 인간에게만 다른 동물과는 차별적인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으며(기독교에서는 지배 및 관리의 지위를 부여하고, 가장 마지막 창조, 불교에서는 윤회의 하나이지만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이를 통해 인간은 사실상 창조의 정점이 되었다. 이 계약에서는 인간은 자연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신의 중재(비, 높은 생산량, 적절한 기후)가 필요해졌으면 그 대가로 인간은 제사의 형태로 신과 수확물을 공유하는 상상의 체계를 완성한다. 사람들은 어찌보면 애니미즘에서 매우 급진적인 변화형태인 농업계약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였는데 이는 농업계약이 농업사회와 그 일상을 잘 반영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상호주관적 연결망을 확대하고 강화하는데 필수적인 물질적인 기초를 제공했으며 초아기 농부들은 집단의 신화를 보전하고 대규모 협력을 조직하기 위해 인간 뇌의 데이터 처리능력에 의존했으나 이의 한계는 분명했다. 이로 인해 농업혁명 이후 수천년이 지나도 인간협력망의 확대는 미약했는데 돈과 문자의 발명으로 인간은 이 한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협력망이 점차 확대되고 발전해나가면서 과학혁명이 일어난다. 과학혁명은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라는 쌍두마차와 결합하여 인간의 힘을 더욱 극대화시키며 나아갔는데 이런 변화한 인간에게서 더 이상 유신론적 신은 필요치 않았다. 인간은 농업혁명을 통해 애니미즘 시대의 말하던 동식물을 침묵시킨데 이어 신마저 침묵시키고 1인극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던 존재였기에 근대 이후의 삶은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는 과정이었지만 존재론적으로 역시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과학혁명의 시대에 유신론적 종교의 자리를 대체한 새로운 종교가 인본주의이다. 인본주의는 인간 삶을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무지에서 계몽이라는 점진적인 내적 변화의 과정으로 보며, 삶의 최종목표는 광범위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경험을 통해 지식을 온전히 발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즉, 인간의 경험이 의미와 권위의 최종원천인것이며 이로 인해 인간 개개인은 소중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인본주의는 3가지로 곧 분리되는데,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우리나라가 믿고 있는 자유인본주의와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가고 있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그리고 나치들이 신봉한 진화론적 민주주의가 그것들이다. 

 자유인본주의는 인간 개개인이 유일무이하다고 보며 이로 인해 모든 개인이 세계를 경험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이를 위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주요 의사결정은 개개인 혹은 민의에 의한 그대표들이 하게된다. 하지만 이는 개개인의 상충되는 경험에서 나오는 충돌(부자와 빈자, 그리고 제1세계와 제3세계 시민의 경험은 너무나도 다르다)을 어떻게 해결할것인가라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이며 이들의 세력은 몇십년전만해도 북서부유럽과 북아메리카와 극동아시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세계를 석권하다 시피했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나와 내 감정에 대한 집착보다는 타인들이 어떻게 느끼고 내 행동이 그들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주 관심사이다. 때문에 개인의 자아탐구보다는 세계를 판독하는 강력한 공동기구인 당이나 노조의 창설이 중심이며 의사결정은 이들이 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진화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개인간 갈등은 분쟁의 씨앗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을 발전시켜나가는 진화의 추동력으로 본다. 때문에 인간을 평등하게 하고자하는 일련의 시대는 오히려 인간의 진화를 저해시키는 요인이 되며 우월한 인간에 의한 진화로 인간이 초인간에 이를수 있다는 것이다. 나치는 다윈의 진화론과 신에서 벗어난 니체의 초인간을 이에 활용했으며 그 결과는 끔찍했다. 하지만 하라리는 의외로 이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주목하는데 이는  하라리가 보는 앞으로의 세계가 진화한 인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현재의 승자는 자유인본주의의며 하라리는 오늘날의 세계는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등 과학혁명과 인본주의의 계약이 낳은 산물들이 지배하는 세계로 보고 있으며 이들이 가장 힘을 발휘한 20세기에 인간은 역대 어느 정권과 인물도 감히 시도도 못해본 기아와 역벽, 전쟁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내었으며 이로인한 혜택은 인본주의의 이념처럼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하라리는 21세기에 인간은 더 나아가 불멸과 정신적 행복, 신성을 향해 나아갈 것으로 보며 이로 인한 혜택은 모든 인간이 아닌 초인간에게 집중될 것으로 예상한다. 

 지속적인 과학혁명의 결과 인간은 더욱 많은 것을 알아내었으며 이로 인해 손잡았던 종교였던 인본주의에 생각치 못한 치명적 결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자유인본주의에는 몇가지 전제가 있는데 인간이 단일한 자아로 구성되어 있고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에서는 인간을 분리할수 없는 존재(그래서 정치와 경제, 군사의 최소단위)로 보며 진정한 나는 자유롭다고 본다(그래서 선거권이 주어지고 범죄에 책임을 물음) 그리고 그러므로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에 대해 내가 가장 잘안다(그래서 합리적 판단과 합리적 소비를 한다고 생각)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최근 생명과학의 성과는 이를 주요 전제를 모두 뒷받침하지 않는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이에 따라 인간은 알고리즘으로 집합으로 판단되며 결국 분리할 수 있다라는 것이며 이로 인해 단일한 자아가 부정된다. 그리고 인간을 구성하는 알고리즘 자체가 자유롭지 않고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 및 무작위적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되므로 결국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이 둘로 인해 인간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알고리즘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과학에서는 인간의 자아를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로 나누고 있으며 자유의지는 없는 것으로 본다. 자기공명영상장치를 활용한 연구에서는 인간은 이미 무언가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마음을 갖기전에 이미 모든것을 결정한 뇌부위가 활성화된다. 즉 내가 짜장면과 짬뽕중 고민을 하다 무엇을 먹기로 결정하고 주문하기도 얼마전에 자기공명장치만 있다면 그 점원은 이미 나의 의도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내가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자유의지는 사실상 허상이며 의식의 흐름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지속된 과학혁명은 더 이상 자유인본주의와 같은 배를 타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런 가까운 미래에 하라리는 새로운 파트너 종교로 기술인본주의와 데이터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실 데이터교보다는 아직 호모사피엔스인 우리에게는 기술인본주의가 더 희망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기술인본주의에 의해 탄생하는 새로운 인간이 인간 행복의 두 기둥인 생물학적 문제와 심리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한 존재인 호모데우스인 것이다. 

 기술 인본주의는 여전히 자유인본주의의 끈을 붙든다. 아직 인간을 창조의 정점으로 보며 전통적 인본주의의 여러 가치를고수한다. 호모사피엔스가 한계에 도달한 것은 인정하나 그때문에 우리가 그 한계를 돌파한 호모데우스를 만들자는 것이다. 하지만 하라리는 사실상 호모데우스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앞으로의 데이터 위주의 새로운 시스템은 개개인의 독자적 마음이 시스템의 속도를 떨어뜨린다고 보고 호모데우스가 될 인간의 마음기능을 오히려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자율주행차를 도입하는데 있어 개개인의 운전에 대한 재미를 강조하는 마음, 의학 발전을 위해 인간 데이터를 무제한 수집하는데 있어 개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 등등은 시스템의 속도를 상당히 떨어뜨릴수 밖에 없다. 때문에 하라리는 미래 인간이 성능이 다소 향상된 지금의 침팬지 위치에서 시스템에 매몰된 특대형 개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기술인본주의에는 하나의 문제가 더 잠복하고 있는데 인본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문제는 현대과학의 성과로 인간의 자신의 의지를 정확히 모른다는 점이다. 데이터교와 기술인본주의는 빅데이터와 딥러닝등으로 나를 관찰하고 나의 알고리즘을 나보다 정확히 파악하여 나의 정확한 의지를 제어하고 재설계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이 의지가 과연 나의 의지인것인가라는 철학적 문제, 그리고 의지 자체가 또 하나의 맞춤 제품이되어 결국 인간 스스로가 무엇을 하게 되는지 모르는 존재가 되는 문제가 있다. 결국 호모데우스는 어렵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에 대한 희망을 품긴 하지만 결국 데이터교의 방향으로 갈것으로 보는 듯하다. 데이터교는 컴퓨터 과학과 생물학에 뿌리는 두는데 우주는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현상이나 실체들이 모두 데이터로 구성되고 그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얼마나 기여하는지에 따라 결정한다.

 하라리는 호모사피엔스 입장에서 보기엔 정말 암울한 미래를 제시해놓고도 미래는 여전히 알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피하기 어려운 다음의 3가지 발생 문제를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1. 과학은 모든 것을 아우러는 하나의 교리로 수렴하고 있고, 이 교리에 따르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생명은 데이터의 처리과정이다.

2. 지능이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다.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들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들을 더 잘알게 될 것이다.

  

궁금하다. 이렇게 되면 행복을 향한 우리의 영원한 항해가 과연 마무리될까?

아니면 유기체를 벗어서 행복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재설계될까?

하여튼 그리된다면 어쨌든 하라리처럼 인간을 더 이상 사피엔스라고 부르기엔 무리일것 같다.

상상하기가 어렵다. 유인원이 인간의 세계와 관점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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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1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7-08-01 22:26   좋아요 0 | URL
저도 이래저래 미뤘는데 막상보니 볼만했습니다

qualia 2017-08-01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판단에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다》라는 말 자체는 어불성설입니다. 왜냐면 유기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생명체를 가리키는 것인 반면에 알고리즘은 그런 생명체의 생물학적·물리적 속성과는 원칙적으로 무관한 독립적인 것으로서 어떤 특정 작용이나 행동의 절차를 기술해놓은 일종의 법칙의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유기체는 물리적 실체인 반면 알고리즘은 추상적인 기능적 절차나 프로그램 체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해서 유기체와 알고리즘을 동일 범주 차원에서 비교하거나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저런 식으로 말했다면 그는 개념 착종 오류에 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데이터”라는 개념 사용도 상당히 자의적이고 철학적으로 엄밀하지 못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제 생각엔 “정보(information)”라는 개념을 유발 하라리가 자기식으로 “데이터”로 각색한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유발 하라리의 데이터 개념과 데이터교 얘기는 그닥 새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 1911-2008)의 ‘It from Bit’이라는 정보이론적 우주론과 세스 로이드(Seth Lloyd, 1960-)의 양자 컴퓨터 우주론, 데이비드 차머스(David John Chalmers, 1966-)의 정보이론적 의식 이론 등등에 기본적인 생각의 끈이 연결돼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정보를 우주의 기본적 요소로 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데이터교 얘기도 결국은 정보를 (우주의) 기본 요소로 전제하고 끌어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해서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는 몇몇 측면에서 데자뷔 현상을 느끼게 합니다.

닷슈 2017-08-02 00:06   좋아요 0 | URL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많은 공부가 되는군요.
유기체도 알고리즘이다라는 말에는 저도 완전동의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비롯한 유기체의 행동이나 의식을 알고리즘으로 어느정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이 프로그램 순서대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으며 그것은 알고리즘에 의한게 아니고 뭔가 다른거다라고 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인간에겐 뭔가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믿고 싶은 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것들이 사실 알고리즘인데 그게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는 편입니다. 알고리즘은 순차적이지만 상당히 복잡해 질수 있어 복잡한 행동도 알고리즘으로 표현한다면 어느정도 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라리가 워낙 광범위하게 여러 학문을 갖다 자신의 논리에 붙이다보니 여러 개념들을 좀 불명확하게 쓴다는 느낌은 저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피엔스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하라리가 새롭운 것을 창안한다기 보다는 기존의 것을 자신의 논리로 잘 종합한다는 느낌을 받는 편이고 그것도 그것대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쿤 & 포퍼 :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지식인마을 25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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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를 읽고 과학철학에 많은 관심이 생겼다. 개인적 부족함으로 다른 책을 찾다 포퍼와 쿤에 대해 쓴 이 책을 찾았다. 다행히 직장내 전시리즈가 완비된 지식인 마을 시리즈였다. 게다가 저자가 장대익 교수다. 쉽게 책을 잘 쓰는 분이다. 진화론 부분만 저술한줄 알았더니 이 사람 과학철학에도 조예가 있는 것 같다. 

 과학철학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한다. 일반 과학철학과 개별과학 철학인데 일반 과학철학은 과학의 합리성은 어떻게 보장하는가? 관측되는 외부 대상은 정말 실재하는가? 경험으로 어떻게 과학이론을 지지하는가? 같은 과학 전반의 전제같은 것들에 대한 질문들을 다룬다. 개별과학 철학은 글자 그대로 개별 과학에서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들. 즉 이기적 유전자에서 어떻게 이타성이? 종교는 유전자에서 비롯되었는지? 인공지능은 가능한지? 등을 다룬다. 이 책은 일반 과학철학을 다룬다. 

 일반적으로 과학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이론으로 세우는 방법으로 처음 제시된 것은 귀납주의다. 귀납주의는 자료수집, 일반화, 가설의 정당화 단계로 이론을 세워나간다. 초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철떡같이 믿던 이 귀납주의에는 소위' 귀납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자료 수집시 편견이 개입될 수 있다는 점과 자료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모든 자료 수집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유럽내의 모든 백조가 흰색이었지만 호주에서 발견된 한마리의 검은 백조는 이런 귀납의 문제를 잘 지적하는 사례다.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검은 백조는 서구사회에서 뭔가 상당히 놀라운 예상밖의 일을 상징하는 듯하다. 실제로 몇년전 블랙 스완이란 책이 있기도 했다.

 이런 귀납주의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가설 연역주의다. 가설 연역주의에서는 귀납과는 다르게 우선 온갖 방법을 통해 가설을 세우는 것이 먼저다. 그 다음 가설로부터 새로운 관찰과 실험결과들을 연역적으로 이끌어내 이를 경험에 비추어 시험해 보는 형태로 이론을 만들어 나간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귀납과 마찬가지로 순서만 바뀌었을 뿐 결국 사례를 통한 이론의 확립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설 연역주의는 매우 꼼수같긴하지만 모든 걸 다 다룰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다 시험해야 하는 증명이 검증의 개념을 버리고 다소 약한 입증 정도로 이론을 세우려고 한다. 하지만 입증역시 결국 그 수의 한계로 이론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입증된수/무한대의 전체사례는 결국 설득력 0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귀납을 통한 즉, 개별 사례의 실험을 통한 이론의 정립에서 벗어나고자 한것이 '쿤의 반증주의'다. 반증주의에서도 역시 우선 가설을 제시한다. 두번째 단계가 다른데. 정말 역발상이다. 이를 어설픈 수의 사례로 불가능한 입증을 하려기 보다는 가설을 부정하는 반증을 통해 이론을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즉 어떤 가설을 이론으로 만드는 것은 그걸 증명하는 사례를 일일이 불가능하게 찾는게 아니라 가설을 부정하는 사례가 나오기 전까진 그걸 이론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가설을 부정하는 사례가 바로 반증이다. 쿤은 모든 진술이 다 반증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며 바로 경험적으로 반증할수 있는 가설을 다루는 학문을 과학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쿤의 반증주의도 문제에 봉착하니 하나는 과학자들이 실제 과학을 함에 있어 매우 성공적인 경우에도 이런 엄격한 반증주의 식으로 일을 하지 않는 다는 실제적인 점이며 다른 하나는 성공적인 과학에서도 반증불가능한 명제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과학에선 이미 인정하는 블랙홀의 존재나, 꽤 공론화 되고 있는 암흑에너지나 암흑물질 같은 것들은 사용하지만 반증을 거의 불가능하다. 현시점에서는

 반증주의에 더욱 치명타를 날린 것은 바로 '반증 불가능성'이다. 반증이라는 것이 애초에 철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에 대해서 반증을 한다면 단순히 검지 않은 까마귀 하나를 찾으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의 반증을 위해 많은 명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까마귀를 정확하게 인간이 정의하고 구분할수 있다. 혹은 검은 색이 어떤것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고 구분할수 있고, 이를 인간의 눈이든 측정도구든 하여튼 명확하게 할만한 측정기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 등등. 이처럼 명제 하나는 단독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무수한 명제와 함께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이 콰인의 경험적 전체론이며 이론 인해 반증이란 것을 철학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린다. 

 이 때쯤 형태주의 심리학이 등장하는데 이는 과학하기에 더욱 치명타를 날린다. 형태주의는 그 유명한 마녀-젊은 여자 그림, 토끼-오리 그림처럼 인간의 관찰의 합리성과 객관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기본적으로 귀납, 가설연역주의, 반증주의 모두 인간의 합리성을 전제로 깐 것이기에 이는 매우 결정적 위기였다.

 이 때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이다. 쿤에게 과학은 패러다임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되는데 패러다임은 과학자나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을 망라한 총 집합체이며 문제해결을 위한 성공적인 범례를 갖고 있는 것이다. 즉, 이론적 정합성과 실제 문제해결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쿤에 의하면 과학은 정상적으로 운영되다가 어느 날 기존 이론으로 설명이 안되는 변칙적인 사례들을 맞이하게 되며 이 사례가 증가하기 시작하며 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 사례들을 잘 해결하는 새 대안 이론이 등장하며 기존의 과학자들은 이 새 이론으로 쏠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어리석게도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하던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면 패러다임의 교체는 완성된다. 이 일련의 과정이 과학 혁명이다. 

 이런 쿤의 의견은 포퍼와 상당한 충돌을 일으켰는데 이 둘을 종합하고자 한 것이 라카토슈이다. 라카토슈는 이론에 대한 반례를 다룸에 있어 포퍼는 반증주의에 따라 즉각 기존의 이론을 폐기하고 쿤은 패러다임의 위기 전까지는 정상과학에서 이런 반례를 어떻게든 기존 이론내에서 설명하려는 양 극단을 벗어나고자 했다. 라카토슈가 제시한 것은 연구프로그램 방법론인데 내가 보기엔 쿤의 패러다임과 거의 유사하다. 라카토슈에 의하면 연구프로그램에는 건드릴 수 없는 가장 핵심이론인 견고한 핵부분이 있고, 이를 뒷받침하는 보조가설로 한 이론이 이루어진다. 반례가 등장할 경우 견고한 핵부분은 건드리지 않고 보조가설을 확대수정하는 방법으로 연구프로그램이 진화해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책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과학철학자는 파이어아벤트이다. 그는 반규칙론을 제시하며 사실적이지 않은 이론까지 개발하고 수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과학에서의 창의성 및 발전이 말살될 것이라 지적하였다. 그의 이론 생각은 이론 다원주의로 어떤 이론이든 지식시장에 자유롭게 나올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특정한 방법론으로 막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가히 과학계의 아나키스트라 할만하다.

 이처럼 과학하기는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흔들리고 있는데, 거기에 구성주의로 무장한 사회구성주의자들까지 합세한다. 이들은 과학에서 피할 수 없는 관찰엔 반드시 사람의 주관과 이론의 영향을 받는다는 관찰의 이론 적재성, 경험자료만 가지고서는 이론 같의 우위를 정할 수 없다는 이론 미결정성, 서로 다른 경합 이론간에는 같은 현상에 대해 다른 용어와 기준을 사용함으로써 결국은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공약볼가능성을 든다. 

 사실 이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어렵지만 저자인 장대익 교수는 이런 사회구성자들의 예시가 지나치게 극단적임을 지적한다. 철학 논리적으로는 그러하나 실제의 대부분 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백조가 모두 희다라는 이론은 잘못된 것이지만 검은 백조는 사실 거의 없는 극단의 사례다. 과학하기에서도 위와 같은 극단은 드물다는 것이다. 거기에 언제나 객관적으로 외부에 실재하는 자연의 존재가 과학자들이 판단을 결국은 바른 방향으로 제약하며 과학하기에는 엄격한 인식적 규범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과학은 상대주의 과학관을 벗어나는 것은 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매우 어려워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과학의 토대가 철학적으로 빈약함에도 현대과학의 성과는 매우 성공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철학적으로 학문의 토대를 털고나면 과연 어떤 학문이 그 정당성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을지도 의문이다. 과학이 여기에 매우 민감하게 구는 것은 과학이 절대적 진리나 법칙, 원리의 발견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전작에서 읽었던 장하석 교수의 책처럼 목표를 단순히 진상찾기 정도로 낮춘다면 해결된다. 

 거기에 과학자들은 과학철학을 좀처럼 신경쓰지도 않는다. 빅뱅이전을 고민하는물리학자나 진화론을 연구하는 학자가 과연 위 4명의 과학철학자들의 엄정한 과학하기를 신경쓰거나 자신의 연구의 논리적 철학적 빈약함을 생각하며 연구를 수행할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런걸 신경안써도 과학은 사실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장대익 교수는 이른 문학 비평가와 소설가의 예로 들었는데, 성공적인 소설가임에도 문학 비평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물론 문학 비평에 신경쓰는 소설가는 다른 형태로 소설을 바라 보는 혜안을 갖긴하겠지만 그것이 또한 성공적 소설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과학철학자는 여기서 문학비평가에 과학자는 소설가에 해당한다. 즉, 과학철학적 시각을 갖춘 과학자는 성공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단순히 과학에만 빠져 있는 것 이상의 혜안을 얻고 과학을 전혀 생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과학철학의 과학에 대한 의미를 긍정적으로 부여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당연히 결핍된 인간이 하는 인문학의 일종이기에 그냥 한계를 인정하고 그 범위내에서 해 나가야할까? 아니면 과감히 신에 도전하는 것을 멈추고 원리나 우주의 진리 같은 것에서 진상을 밝히는 수준으로 내려가야할까? 아니면 성공적이니 이런 논리적 문제를 신경쓰지 말고 단순히 과학하기만을 해야할까?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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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플러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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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과학의 성과는 눈부시다. 생물의 변화와 종의 탄생 및 분화에 대한 거의 완벽한 설명인 진화론, 시공간에 대한 설명인 상대성이론과 미시세계에 대한 양자역학, 우주의 5가지 힘을 통합하고자 노력중인 통일이론(힉스입자의 발견으로 가속화되고 있는듯.) 등등 나열하고자 하면 끝이 없다. 이렇듯 과학은 세상에 숨겨진 진리를 하나하나 발견해나가며 어쩌면 인간 궁극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며 아직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면도 있다. 빅뱅이론에 대한 합의는 어느정도 있지만 빅뱅 이전에 대한 논의는 거의 소설수준이며, 거시세계의 이론인 상대성이론과 미시세계의 이론인 양자역학은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책은 이러한 과학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우선 과학의 한계를 명확히 짚는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외부실재에 대한 관측을 기본으로 하여 지식을 쌓아나가고 그 작동원리를 밝히는 것인데 여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관측을 위한 측정의 기준을 만들기가 사실상 블가능하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개념을 수량화하고 있는데 이를 이해서는 측정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뭔가를 측정하기 위해선 당연히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명확한 기준을 확립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가령 온도의 기준으로 끓는 점인 100도와 어는 점인 0도가 있지만 이 수치는 물질의 외적 조건에 따라서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길이인 1미터는 광속의 초속인 299,792,458미터/s를 299,792,458로 나눈 것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엔 대체 1초를 또 어떻게 정확히 측정할 것인지에 대한 순환논법에 빠진다.

결국 이론은 상당히 엄정한데 비해  그 기반이자 단위들은 측정의 엄정성이 부실한 것이다.

 다음은 관측의 이론적재성이다. 관측은 그 기준과 관련하여 위와같은 문제점들이 있는데 이를 차치하더라도 관측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이는 관측자가 인간이기에 발생하는 문제로 사람이 관측을 함에 있어 이론의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관측시, 선입관이 영향을 주거나 똑같이 감지한 것을 서로 다른 입장에서 이론적으로 다르게 해석하고(천동설과 지동설이 그렇다. 관측은 같았다.) 관측을 행하는 실험기구 자체에 이미 이론적 해석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론에 맞지 않으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잘못된 것으로 거부하는 부작용들이 나타난다.

 마지막은 귀납의 문제이다. 기준의 문제와 관측의 이론적재성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쳐도 문제는 남는다. 과학자는 관측된 결과를 가지고 귀납적인 추론을 한다. 관측된 결과가 쌓여나갈수록 이는 강력한 증거가 되며 이론은 그렇게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귀납이라는 것이 결국 모든 자료를 통해 이루이지는 것이 아닌 만큼 귀납으로 성립된 이론은 언제든지 다른 결과로 인해 뒤집힐 수 있는 반증가능성을 같고 있다. 또한 귀납자체가 적당한 관측자료로 이론을 세운만큼 잘못된 이론을 세울수도 있다. 가령 2,4,6,8,10으로 이루어지는 관측 결과를 얻었을때 6번째 결과는 12라는 법칙을 도출할 수 있겠지만 다음 다섯가지의 결과는 의외로 14, 18, 22, 26, 30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엔 부족한 자료로 인해 법칙결과를 잘못세운 격이 된다.

 이처럼 과학에는 관측을 위한 기준의 문제, 관측의 이론적재성문제, 귀납의 문제가 있다. 이런 결과는 과학이 마치 더이상 아무것도 할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 우선 과학이 진리가 아닌 진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진리는 영원불변의 법칙이지만 과학에는 한계가 명확한 만큼 외부 실재에 대한 사실 만을 다루는 진상을 추구목표로 삼는 것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다음은 실재주의로서의 과학이다. 실재론은 과학의 목표를 진리 추구로 보고 있으며 반실재론은 과학의 임무를 경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지식민 추구하는 것으로 본다. 실재주의는 이 둘을 벗어나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실재에 대해 최대한을 배워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과학적 한계와 인간의 한계를 명확히 하면서도 실재에 대한 진상을 계속 추구하고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각각의 한계를 교묘히 벗어난 셈이다.

 또한 토대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당부한다. 토대주의는 연구를 행함에 있어 앞의 이론들을 계속 기반으로 삼아나가는 것인데, 필연적으로 가장 앞선 명제가 다른 명제들에 의해 서로 증명하는 순환논법에 빠지거나 최초 명제를 그냥 자명한 것으로 해버리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과학 역시 이러한데 저자는 이런 토대를 지구에 비유하여 해결하고자 한다. 지구는 당연히 절대적 기초가 되지 못하지만 인간에게 충분히 넓고 딱딱하며 방향성도 있는 적당한 토대이다. 즉, 절대적 기초란 없으니 지구정도로 적당한 토대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 밖에 없고, 그러해도 어느정도는 무방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주장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다원주의다. 과학은 토마스쿤의 주장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서 승리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를 대체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은 해체되고 사멸된다. 저자는 책에서 과거의 과학적 이론에 대해서 꽤 많은 분량을 다루고 있는데, 과거에 대체된 구 패러다임이 모조리 쓸모 없는 것들은 아니었다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저자가 보기에 과거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비해 설득력을 약할지언정 만약 남아 있었다면 과학의 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상보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때문에 과학에는 일방적 일원주의보다는 그 발전에나 창의성의 발현을 위해서 다원주의가 더 낫다고 보는 것이다.

 책은 전체적으로 나의 예상밖이 었다. 과학이 철학의 발전과 논의에 줄 수 있는 시사점 같은 것을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과학의 약점과 토대의 형편없음을 보여주고, 그럼에도 과학을 해나가는 방법과 철학을 제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책을 사실상 처음 접했다는 점에서 인상깊었다. 일독할 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저자 이름이 장하석으로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싶었는데 경제학자 장하준과 형제사이였다. 닮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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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넘어 인문학 - 미운 오리 새끼도 행복한 어른을 꿈꾼다
조정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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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서문에서 어릴 적 어머님이 사주신 동화전집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 말한다. 그리고 저자의 어머니는 동화전집을 보고 눈이 빛나던 작가를 보고 그걸 사준걸 후회하신다. 그토록 힘든 글쟁이의 길을 가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외에도 누구나 동화 전집이나 위인 전집, 혹은 백과사전 한질씩은 갖고 있던 어린시절이 있었다. 딱히 놀것도 없던 시절이고 마냥 밖에서 놀수 만은 없는 경우도 있으니 그럴때는 이런 책과 함께 했을 것이고 몇번이고 계속 읽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어릴때의 뇌는 책이든 영화든 만화든 두세번 보는것을 이상스레 지겨워하지 않았다.

 지금 아이들은 매우 다르다. 간혹 이런 동화를 당연히 읽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의외로 읽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매우 당연시 되었던 동화교육에 대해서도 과거와는 달리 말이 많다. 어려서부터 선과 악이 분명한 일방적 도덕을 주입한다는 비판, 남여 관계가 너무 전통적이고 불평등하다는 비판, 과거의 가치관을 너무 주입한다는 비판등등.

 하지만 아직도 아이들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동화를보고 있으며 그 교육적 효과를 옹호하는 측도 만만치 않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런 동화를 가지고 인문학을 이야기한다. 서문에서 인문학을 어렵다 하셨는데, 지나친 겸양이셨다. 동화 하나와 인문학 서적 하나를 엮어 재밌고 다양한 주제로 생각보다 깊이 있게 책을 엮었다.

 이솝의 당나귀와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주체적 사유 없이 이사람 저사람의 말에 휩쓸리는 어리석은 인간 군상이 나오며 여기서 사유없이 자본의 힘이 휩쓸려 이리저리 소모되며 사는 현대 사회의 사람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를 한병철의 피로사회와 엮어낸다. 그리고 인어공주의 사랑에서는 축복받은 조건에서도 모든 걸버리고 달려나가는 사랑의 무모함과, 더불어 자신의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모습에서 사랑의 숭고함과 다른 이를 위한 보편적 희생을 찾아내기도 한다.

 책은 전체적으로 이런 식으로 짜여져 있으며 중간중간 저자의 고민과 성찰이 담긴 통찰력 있는 매력적인 문장들도 있었다. 몇 개 뽑아 봤다.

 

p58

삶은 영위하는 생명이란 외부로부터 흡수한 것을 다시 외부로 배출하는 존재입니다.

 

p74

사실 행복이란 아무 사건도 없는 평범하고 심심한 삶이다.

 

p78

우리는 대부분이 자기 중심적이라 상대에게 잘해주고 싶을 때 조차 자기 기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나와 우리 마누라는 서로를 기쁘게 해주는 선물을 좀처럼 하지 못한다.)

 

p82

개선장군은 모름지기 상례(喪禮)로 맞이 해야 한다. -노자

(개선장군을 위해 개선문을 세우고 잔치를 하지만 사실 개선장군은 수많은 적과 민간인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묻고 온 사람이다. 역사상 이런 배려를 한 재상이나 왕, 관리가 있었을까?)

 

p107

사랑은 원래 불가능이라는 연료로 인해 존재를 태워버리는 것이다

 

p128

사랑의 근본적인 모순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서로 다른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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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한국사 : 전근대편 쟁점 한국사
한명기 외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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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의 여러 한국사 전공자들이 우리나라 역사중 아마 자신의 전문분야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시대별로 엮은 책이다. 이것은 전근대편으로 고조선부터 조선일부까지를 다룬다. 전근대편이라 고조선이나 삼국, 남북국, 가야, 부여등을 기대했지만 대부분의 글이 고려에 집중되어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특히, 송호정 교수가 쓴 부여부분이 아쉬웠는데, 담담하게 담아내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해 축소적으로 보는 느낌이 많았다. 글도 부여가 제목이지만 부여보다는 고조선부터 시작해 부여로 이어지는 글을 썼고, 그 부분에서도 그런 느낌을 적잖게 드러내고 있다. 지도가 가장 적나라했는데, 3세기 부여전성기 영역지도였다. 부여는 뭐 그렇다 쳐도 삼국과 가야가 완전히 정립한 시기임에도 신라, 백제, 가야의 명칭은 없고 마한, 변한, 진한으로 짙게 표시해 사실상 삼국이 막 세워진 듯한 느낌을 주는 지도였다. 

 국사교과서에서는 삼국을 세운 시기를 그보다 이 삼백년 정도 전으로 보고 있으며 3세기 정도면 삼국이 고대국가로서의 틀을 제대로 정립한 시기로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사실상 건국시기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은데, 아무래도 송호정 교수는 그 견해를 따르는 것 같다. 역사는 물론 해석이 필요한 학문이고, 사료도 워낙 없는 시대라 그렇다. 나 역시 비전문가로 서로 상충되는 주장의 글을 볼때마다 널 뛰기를 늘 달리하는 편이라 항상 아쉬운 부분이다. 

 이 책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은 선덕여왕 즉위와 관련하여 성골이 무엇인지 해석한 부분이다. 나는 성골을 항상 양부모가 모두 성골인 경우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에서는 그럴 경우 성골이 갑작스레 선덕여왕 즉위즈음에 씨가 마른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근친혼이 아무리 많았더라도 오랫동안 소중히 관리되어 왔으며 신라 왕족의 성씨가 3개나 되는 만큼 사실 근친혼에 의한 사멸도 좀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책은 그래서 성골의 개념이 선덕여왕 즉위 즈음으로부터 상당히 최근에 생긴 개념이며 그 범위도 더욱 좁았을 것이라고 본다. 당시 신라는 삼국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이고 왕권강화를 위해 적극이용하였는데, 법흥왕의 그 시초이며 이차돈 사건은 관련한 유명한 사건이다. 법흥왕의 아들 진흥왕은 아버지 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자식들을 불교신화에 등장하는 4가지 유명한 왕들로 이름붙였다. 불교 신화에는 철륜, 동륜, 은륜, 금륜의 왕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뒤로 갈수록 전세계의 지배가 완성되어 간다. 그래서 책은 진흥왕 자신을 철륜으로 삼고, 첫째 왕자를 동륜, 막내인 진지왕을 금륜으로 이름붙였다고 보고 있다. 막내인 진지왕이 금륜인 것으로 볼때, 역사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둘째 은륜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 역시 만만치 않다. 진평왕은 스스로의 이름을 백정, 즉 석가모니의 아버지로 자칭하였고, 당연히 부인도 석가모니의 부인인 마야부인으로 명명한다. 아들은 당연히 석가모니가 되어야 하는데, 불교의 계율상 해탈한 석가모니의 인간으로의 재탄생은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진평왕에겐 아들이 없고 다행히 딸만 있었는데, 그 딸의 이름이 덕만으로 선덕여왕이다. 덕만은 본디 남자로 태어났어야 한나 중생의 구제를 위해 여자로 태어나게도니 불교의 인물이다.

 이런 양상으로 보았을 때 신라의 성골은 사실상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고 진흥왕을 그 시작으로 하며, 진흥왕과 동륜태자, 진평왕, 선덕여왕의 적장자 직계 왕족라인 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게 책의 해석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왜 그렇게 쉽게 성골이 사멸했고, 여성인 선덕여왕이 여자임에도 어떻게 왕위 죽위가 가능했는지 설명이 된다. 사실 선덕여왕 이전에는 아들이 없는 경우 공주의 남편, 즉 왕의 사위인 갈문왕에게 즉위를 물려주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이다. 

 즉, 성골은 글자 그대로 왕권강화를 위해 불교라는 종교를 이용하여 성스러움을 부여한 진흥왕 적장자 라인의 협소한 개념이며 이 강한 파워로 선덕여왕의 무리한 즉위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대동법이다. 대동법은 조선의 수취체계 중 가장 문제가 컸던 공납으로 인한 비리와 백성들의 고충을 막고자 공납을 쌀로 대신하는 제도다. 대동법의 발상은 오래되었지만 전국적인 실시에는 거의 100여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흔히 이를 두고 양반계층의 기득권보호를 위한 강한 반발을 그 주원인으로 보는게 통념이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책은 조선의 양반계층은 상당히 도덕성이 높은 계층이었고, 고려와는 달리 음서를 통한 보장이 적어 한번 세도가가 되어도 자손 대대로의 권력 유지가 어려웠음을 지적한다. 아버지의 끝발로 어찌 관리가 된다하더라도 결국 실적이 필요했고, 그 자손의 자손은 결국 과거를 붙어야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 그래서 책은 대동법을 반발한 집단은 양반계층이 아니라 백성의 고혈에서 이익을 누리고 있는 집단 때문으로 보고 있다. 

 대동법 실시전에 백성들은 무려 60말을 공납용으로 사용하였는데 대동법 시행이후에는 12말 수준으로 줄었다 그렇다면 중간에서 48말을 착취한 집단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책에서는 그 집단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공납을 대행하는 상인 집단들과 그들과 결탁한 지방 아전들이 그 집단이 아닐까 싶다. 고을 수령 역시 양반으로 교체되는 사람이기 때문. 

 어쨌든 책은 대동법으로 인한 세금제도의 개선으로 조선왕조의 수명이 100년 이상 늘었다고 보며 망국을 앞둔 19세기에 이르러 세도정치로 대동법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부담이 다시 대동법 이전 시기로 회귀하였음을 보인다. 

 책은 가볍고 잘 읽힌다. 여러 저자의 견해를 엮에 체계성은 없고, 중첩되는 부분도 적지 않지만 일독할만하독 생각된다. 독서력이 높고 한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3-4시간이면 독파가 가능하다. 다음 근대편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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