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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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각 출판사 별로 책회원을 운영하는 경우가 있단다. 아빠도 처음으로 문학동네라는 출판사의 북회원에 가입해 보았단다. 연회비가 있긴 했지만, 북회원에 주는 여러 가지 혜택이 있어 가입해 보았단다. 북회원에게 주는 혜택 중에 생일을 즈음하여 책을 선물해 준단다. 리스트 중에 마음에 확 와 닿는 책이 없어서, 신간이고 저자가 유명한 사람이라서 이 책을 골랐단다. 살란 루슈디. 이 사람은 <악마의 시>라는 작품의 저자로 이 책으로 한때 도피 생활을 하고 자신의 모국인 인도에서 입국 금지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본 적이 있단다. 그리고 대표작으로는 <악마의 시> 이외에 <한밤의 아이들>이란 작품이 있는 것까지만 아빠가 알고 있단다. 그의 책을 읽어 본 적도 없어. 한 번 읽어보겠다고 이 책을 선택했단다.

며칠 뒤 생일 축하 메시지와 함께 책이 도착을 했고, 이제서야 읽었단다. 책 제목 <2 8개월 28일 밤>. 이 기간을 날수로 하면 1001일이 된다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1001일의 밤. 어디선가 익숙하지? 그래, 바로 그 유명한 천일야화에서 모티브를 따 온 책 제목이란다. 천일야화라고 해서 어떤 이들은 1000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천일은 1001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천일야화는 천 하룻밤의 이야기라는 뜻이 된단다.

그런데 아빠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2 8개월 28일에서, 2년에는 윤년이 끼지 않은 365일짜리 2년이라고 쳐도 8개월은 시작하는 날짜에 따라서 날 수가 달라진다고 말이야. 1 1일부터 시작한 2 8개월 28일하고, 3 1일부터 시작한 2 8개월 28일이 날 수가 다르다는 거지아빠가 더해보니까 1 1일부터 시작한 2 8개월 28일(윤년이 끼면 안됨)은 1001일이지만, 3 1일부터 시작한 2 8개월 28일은 1003일이구나. 아빠가 딴지를 걸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직업병인 것 같구나. 별거 아닌 것을 의심하는 병. 제목을 보고 1001일을 저렇게도 쓸 수 있구나, 작은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아빠는 굳이…’ 이런 생각이 들었어. 아마도 책이라도 아빠의 취향에 맞아 재미있게 읽었다면, 제목 가지고 딴지를 안 걸었을 텐데, 책도 아빠의 취향에도 맞지 않았단다.

읽기도 힘들었어. 아빠의 독서 능력이 뛰어나지 못해서 작가의 의도가 잘 모르겠더구나. 그 유명하다고 하는 위에서 이야기한 그의 대표작들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도 확 줄어들었단다. 이 책을 재미있게 잘 읽은 이들도 많이 있더구나. 그 분들이 읽고 쓴 리뷰를 읽어보면서, 아빠가 파악하지 못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 보기도 했단다.

 

1.

이 책의 이야기는 1195년에서 시작한단다. 이븐 루시드라는 위대한 철학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나중에 어떤 분의 리뷰를 보니, 이븐 루시드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라고 하더구나. 이븐 루시드가 원래는 나랏일을 했는데, 뭔가 잘못을 해서 유배 생활 같은 것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열 여섯 살의 소녀 두니아가 찾아왔단다. 사실 이 두니아의 정체는 사람이 아니었어. 마계라고 부르는 상계에서 사는 마족(魔族)이었어. 그들에게 있어 지구는 아랫세상, 하계였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두니아는 마족의 공주였단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둘은 사랑을 했고, 2 8개월 28일 동안 아이들을 참 많이 낳았단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많아야 3번 임신할 수 있는 기간이지만, 두니아는 마족이기 때문에 인간과는 달랐어. 아무튼 많이 낳았다고 했어. 이슬람 국가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칼리프가 루시드에게 사면복권을 해주어 그는 두니아를 버리고 다시 왕궁으로 떠났단다. 그리고 그 후 일 년 뒤 이븐 루시드는 죽고 말았지. 하지만, 두니아는 인간이 아니고 마족이니, 영생의 몸을 가지고 있어 쭉 살았단다.

세월은 흘러 흘러 현재까지 흘렀어. 두니아와 그의 후손들이 세계 곳곳에 살고 있었어. 그 후손들은 자신의 조상이 마족이라는 것을 몰랐어. 그들에게 신체적 특징이 있는데, 귓불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단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책 전반부에 간단히 요약되어 설명이 되어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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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 책은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던 어느 여마신, 벼락을 마음대로 부려 번개공주라 불리며 오래전에, 우리가 12세기라고 부르는 시대에 한 인간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녀의 수많은 후손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이 세상에 돌아와 잠시나마 다시 사랑에 빠졌다 전쟁에 나서는 이야기다. 또한 여러 마족, 남성이든 여성이든, 날아다니든 기어다니든, 선하든 악하든 도덕 따위에는 무관심이든, 아무튼 온갖 마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2 8개월 28일 밤, 다시 말해서 천 날 밤 하고도 하룻밤에 걸쳐 이어졌던 위기의 시대, 혼란의 시대, 우리가 괴사(怪事)의 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 시대가 끝난 후 이미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시대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우리의 미래가 말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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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이제 그럼 두니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현재 세상의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전 세계에 엄청나게 큰 홍수가 일어나서 곳곳에서 피해를 많이 입고, 사람들도 많이 죽었어. 60대 노인 정원사 제로니모가 있었어. 그런데 대홍수가 지나간 다음, 제로니모의 몸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단다. 지표면에서 아주 살짝 떠 있는 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떠 있는 높이가 높아졌단다. 이게 사는 데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어. 10센티미터를 떠서 다닌다고 생각해보렴.. 화장실에서 큰일을 볼 때도 얼마나 불편하겠니상상만 해도

대홍수 다음에 이상한 능력이 생긴 건 제로니모뿐만이 아니야. 지미라는 나트리지 히어로의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실제 형상이 되어 나타나곤 했어. 그리고 어느날 자신의 방에 웜홀이 생겨서 그곳을 통해 두니아가 찾아왔어. 그리고 지미에게 그의 정체를 알려주었지. 위대한 철학자 이븐 루시드와 마족의 후예라고제로니모, 지미를 비롯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앞서 이야기한 마족 공주 두니아의 후손들인 것이란다. 그런데 이 웜홀이라는 것을 통해 두니아만 온 것이 아니고, 마계의 다른 마족들도 지구로 몰려 들었단다. 지미가 살고 있는 곳이 뉴욕인데, 뉴욕 한복판에 웜홀을 통해 마족들이 온 것이었어. 그 마족들이 그런데 착한 애들이 아니야. 마계에서 못된 짓만 하는 흑마족들이었어. 그 흑마족들은 웜홀을 통해 지구, 그러니까 하계에 와서 전쟁을 선포했단다. 마계(상계)와 지구(하계)의 전쟁. 일명 이계 전쟁.

이 부분을 읽다 보면 어떤 영상이 하나 떠오르더구나. 너희들도 아빠랑 비슷한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은데, 어떠니? 그래, 영화 <어벤져스>가 떠오르더구나. 티노스의 후예들이 뉴욕 하늘에 만들어진 구멍을 통해 물밀듯이 내려왔잖아. 어벤져스 맴버들이 온갖 노력으로 무찔렀지. 그것처럼 이 소설에서도 흑마족들이 지구를 점령하려 온 것이야. 그러면서 그들은 온갖 자연 재해를 만들어냈고, 사건 사고를 일으켰고, 미스터리한 사건을 만들었단다. 어쩌면 지금 온 세계를 일 년 넘게 휩쓸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그들의 짓일지 몰라.

두니아는 마족의 공주라고 했잖아. 그리고 두니아는 마족의 착한 쪽인 백마족이었단다. 이후 소설은 흑마족과 두니아를 비롯한 백마족과 두니아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흑마족과 전쟁을 겨루는 이야기가 펼쳐진단다. 그 와중에 두니아와 정원사 제로니모는 사랑에 빠지고 말이야.. 그리고 이 전쟁의 승리는 두니아가 이끄는 백마족의 승리로 끝나지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아빠는 크게 감명 받지 못했던지라, 아주 간단히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로 독서 편지를 마치마. 한 작품으로 작가를 평가하면 안 되겠지? 다시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을 검색해 보니, 평점이 무려 9.4로구나.. , 아빠가 뭘 잘못 읽은 것인가독서 내공이 아직 너무 부족한 것인가. 저 평점에 공감을 못하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jinn), 즉 마족(魔族)의 본성에 대란 기록은 허다하지만 정작 알려진 사실은 매우 적다.

책의 끝 문장 : 그리고 괴팍한 일면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못했기에 때로는 악몽이라도 꾸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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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15 0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일야화가 1000일이 아니라 1001이었군요. ㅋ 오늘도 하나 배우고 갑니다^^

bookholic 2021-04-15 22:00   좋아요 2 | URL
그런데 아라비안 나이트는 왜 1001일이었을까요?^^

mini74 2021-04-15 18: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1003일. 은근히 그런게 신경에 거슬리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bookholic 2021-04-15 22:04   좋아요 3 | URL
ㅎㅎ 많이 거슬립니다...

오거서 2021-04-21 1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흑마족이 지구를 점령하기 위해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뜨린 것일 수 있다면 마족의 본성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ㅋㅋㅋ

bookholic 2021-04-21 23:02   좋아요 0 | URL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작과 정체가 정말 궁금해요... 어디서 이런 못된 것이 나왔을까요..ㅠㅠ
빨리 사라지길 얼마나 빌어야 하는지....
코로나 잘 피하시고 즐거운 봄날 되시길 바랍니다.^^
 














(40)

가깝다면 가까운 곳에 운석이 떨어졌는데 십 년이 지나서도 기행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연해주의 시골 마을에 불덩어리 같은 운석이 떨어질 무렵, 그는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이끌던 고당 선생을 모시고 있었다. 고당 선생과는 인연이 깊었다. 선생은 오산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기행의 집에서 하숙을 했고, 몇 년 뒤 그가 오산고보에 입학했을 때는 교장을 맡고 있었다. 해방이 되어 소련인들을 상대할 일이 많아지자 고당 선생은 고향 정주에 머물던 기행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통역 겸 비서로 삼았다. 그때만 해도 기행은 고당 선생이 곧 남쪽의 인사들과 함께 민주공화국을 만들면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하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돌이켜보면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그땐 다들 그랬다. 모두가 모두의 선의를 믿었다.


(81)

시대의 눈보라 앞에 시는 그저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눈보라는 산문이며, 산문은 교시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의 말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산문이다. 준엄하고 매섭고 치밀하다. 하지만 시는 말하지 않는다. 시의 할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붙는다.


(85)

그 때에도 보름이면 이 세상은 달빛으로 가득차지 않겠나? 달이야 거기 사람이 있든 없든 찼다가 이지러지는 그 자연의 법칙을 반복하겠지. 그런 무심한 것이 자연이라는 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거기게 정을 둔단 말이지. 마치 해와 달이 자기 인생을 구원해주기라도 하듯이 말이야. 오로, 우리의 태양이시여, 영원한 달님이시여, 라고 찬양하면서. 하지만 해와 달은 그 누구의 인생도 구원하지 않아. 우리도 그런 자연을 닮아 노래는 들리는 대로 들으면 되고, 춤은 보이는 대로 보면 되는 거지, 좋으니 나쁘니 마음을 쏟았다 뺏었다 할 필요는 없었던 거야.


(85)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를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117)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이렇게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


(164)

숲이 비어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고, 폐허가 꽉 차 있는 것을 보는 사람도 시인이지요. 저는 모든 폐허에서 한때의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씁니다. 괴링이 이끄는 독일 폭격기가 육백 대나 날아와 포탄을 쏟아부었을 때, 스탈린그라드는 영원히 불타는 줄 알았어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죠. 밤은 낮처럼, 낮은 밤처럼. 물은 불처럼, 불은 물처럼. 악은 선이 되고, 선은 악이 됐죠. 그게 바로 전쟁, 지옥의 풍경이에요. 그렇게 몇 달 뒤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불이 꺼졌을 때, 도시는 완전한 폐허가 됐죠. 그 폐허를 응시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164-165)

전쟁은 인류가 행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일이지만, 그 대가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189-190)

이 날짜만 그대로 두고 책에 실린 자음과 모음을 해체해 다시 조립한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누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행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자신만의 그 세계를.


(190-191)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228-229)

아무리 준비해도 모자란 겨울나기에 비하자면, 봄 준비는 마냥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봄은 아기 걸음이고, 먼빛이고, 올동말동이니까. 4월 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사흘이 지나면 강에서는 쩍쩍 소리 내며 버그러지는 얼음장 위로 흙탕물이 넘실거렸다. 새벽이면 골짜기 안으로 안개가 부잇하게 감돌아 돈사(豚舍) 네모 등의 가스불빛이 까물거렸고 아침햇살이 빗살처럼 번져나면 새들의 노랫소리가 흥겨웠다. 겨우내 얼어 있던 흙으로 틈이 생겨 봄볕이 스며들면 오랑캐꽃과 살구꽃과 진달래가 피어나 단조롭던 흑백의 구릉을 환한 빛으로 물들였다. 마을에 물레방아가 내걸리고 소달구지가 지나갈 즈음이면 개울가로는 처녀들이 바구니를 들고 둥글레며 쑥 따위를 캐러 다녔다. 그렇게 삶은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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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를 위한 나의 첫 고전읽기 수업 나의 첫 수업 시리즈
박균호 지음 / 다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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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다행히 너희들이 책읽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구나. 아직 어리니까 동화책을 주로 읽곤 하잖아. 최근에 나온 창작 동화도 읽고,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읽어 온 명작동화도 읽고 말이야. 그 명작동화들을 보면, 고전들을 아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각색한 경우가 많아. 아빠는 어렸을 때 그런 명작동화를 많이 읽지 않았어. 기회도 별로 없었고, 책읽기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고 말이야.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야, 책읽기에 재미를 느끼고, 뒤늦게 고전들도 하나 둘 읽었지.

아빠는 고전이라고 하면 먼저 어렵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어. 왜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나 생각해 보니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었어. 아빠가 중학교 때 학교 숙제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 있었어. 정말 힘들게 읽었던 생각이 나는구나. 그래서 그 이후에 책, 특히 고전에는 담을 쌓았던 것 같구나. 나중에 커서 조심스럽게 다시 고전을 하나 둘 읽다 보니, 재미있는 고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젠 고전을 읽을 때 기대를 잔뜩 하고 책을 펴곤 한단다.

그리고 너희들이 커가면서, 너희들에게 아빠와 같은 고전 트라우마를 갖지 않도록, 재미있는 고전을 위주로 가이드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 그런데 아무래도 아빠는 아마추어다 보니, 어린이들에게 고전을 소개해 시켜주는 책들을 관심을 두기도 했어. 그러다가 이번에 박균호 님의 <10대를 위한 나의 첫 고전읽기 수업>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단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 블로그에서도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박균호 님은 <독서만담> 등 책에 관련된 책들을 쓰신 분이야. 이 책이 좋은 인문학 길잡이가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책을 아빠는 아주 특별한 분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단다. 책은 선물할 때도 기분이 좋지만, 선물 받을 때는 더 좋은 것 같구나.^^ 책이나 알라딘 서재에서 보면 박균호 님의 글에는 늘 따뜻함과 진솔함이 담겨 있는데, 이 책에서도 그런 따뜻함과 진솔함이 담겨 있었단다.


1.

이 책에서는 고전 스무 편을 소개하고 있단다. 그 중에 아빠가 읽은 건 몇 권이나 될까, 헤아려봤단다. , 세지 말아야겠구나. 가장 첫 번째 소개한 것은 그 유명한 <레 미제라블>이란다. 아빠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었어. 엄마는 오래 전에 오리지널 팀 공연으로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아 며칠 안 지나 또 봤다고 하더구나. 아빠는 뮤지컬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얼마나 재미있길래? 싶었지. 뮤지컬 영화로 제작된 <레 미제라블>도 안 봤었어.

그러다가 작년에 영화로 영어 공부 좀 하겠다고 영화를 찾다가 영어 공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게 되었어. 영어 공부용으로 보다 보니, 구간 반복하면서 스크립트 보면서 봤는데, 노래들도 다 좋고, 영화도 너무 좋더구나. 그 긴 소설을 전부 담아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영화로도 좋았어. , 이런 영화를 그 동안 안 보고 있었더니그러면서 무대에서 펼쳐지는 뮤지컬도 보고 싶더구나. 왜 진작 안 봤을까? 하고 말이야. 가끔씩 유튜브로 영화 <레 미제라블>의 클립 영상을 보고 했는데, 옆에서 따라 보던 너희들이 이제는 <one day more>를 어설프지만 따라 부르게 되었잖니이런 작품을 쓰다니 지은이 빅토르 위고는 참 대단한 분이시구나.

그의 또다른 대표작 <파리의 노트르담>… 이것도 뮤지컬이 있단다. 이건 책도 읽어보지 못했고, 뮤지컬도 본 적이 없단다. 이 뮤지컬도 <레 미제라블>만큼 마음에 들면 어쩌나?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ㅎㅎ 지은이 빅토르 위고가 당시에 책을 위험하다고 했다는 점이 의외구나. 책을 쓰는 작가가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으면 좋아할 것 같은데, 책이라는 것이 무분별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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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1)

위고는 우후죽순처럼 세상에 나오는 책을 바벨탑에 비유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완성해 가는 건축물과는 달리 너무나 쉽고 빠르게 생산해 내는 책의 위험성을 경계한 것이다. 21세기에 와서 책의 바벨탑은 더욱 거대해졌다. 책을 넘어서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도구도 생겨났다.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속도, 그리고 그 양까지 15세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다. 중세 시대에 노트르담 대성당이라는 돌로 된 책을 향유한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지금은 정보 앞에서 만인이 평등해졌다. 하지만 온갖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사유할 힘을 잃어 가고 있다. 가짜 정보와 가짜 뉴스라는 독버섯에 야금야금 희생당하고 있다. 어쩌면 위고는 이러한 오늘날의 병폐를 화려한 퇴보라고 우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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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책에서 소개한 스무 편을 일일이 너희들에게 모두 이야기하기는 아빠의 시간이 부족하고, 몇 편만 소개를 해줄게. <모비 딕>이라는 작품이 있어. 이건 읽지 않고, 읽으려고 사 두긴 했단다. 언젠가는 읽겠지,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있잖니, 이 책의 제목이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백경>으로 출간이 되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백경>이라는 책도 언젠가 읽겠지 하고 사 두었거든 그러니까 우리 집에 <모비 딕>도 있고 <백경>도 있고…. 둘 다 책에 고래가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다른 작품인 줄 알았단다. 이렇게 무지할 수가….ㅠㅠ <모비 딕>에 스타벅이라는 일등 항해사가 나오는데,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명한 커피전문점 스타벅스를 따 왔다고 하는구나. 재미있는 상식 하나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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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모비 딕>에는 스타벅이라는 이름의 일등 항해사가 등장한다. 유명한 커피 전문점 이름인 스타벅스가 바로 <모비 딕>스타벅에서 따온 것이다. 스타벅스는 우리에게 매우 대중적인 장소가 되었지만, 스타벅이 등장하는 <모비 딕>은 우리나라 독자들이 그리 많이 찾는 고전은 아니다. 그러나 영미권에서 이 소설이 누리는 위상은 대단하다. 미국에서도 작가가 숨질 때까지 이 소설의 존재감은 미미했는데, 작가 사후 재평가를 통해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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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의 <내기>라는 낯선 고전을 이야기하면서, 체호프의 총 이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주었어. 체호프는 책을 쓸 때 딱 필요한 문장들로만 썼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1장에서 총이 등장하면 그 총은 꼭 발사를 했대. 그것이 체호프의 총이론이라고 하는데, 작가들도 재미있는 에피소들들과 사연들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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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19새기 장편 소설가들은 주요한 이야기 전개와 관련 없는 부분까지 장황히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단편 소설과 희곡을 즐겨 쓴 체호프는 군더더기 같은 문장이나 불필요한 장치를 결코 끌어오는 법이 없었다. 체호프가 제시한 다음의 총 이론을 보자.

이야기와 직접 상관이 없는 것들은 단호히 없앤다. 1장에서 총이 등장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총을 꼭 발사해야 하고, 발사하지 못했다면 과감히 없애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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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소개된 고전들은 대부분 읽고 싶지만,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루소의 <에밀>이라는 책이란다. 사실 <에밀>이라는 책이 어떤 내용의 책인지도 몰랐어. 그 책은 교육에 관해 루소가 적은 것이라고 하는구나. 루소의 교육관에 따르면 너희들은 아직 책을 읽으면 안 되는 나이란다. 책 읽지 말고 자연 속에서 뛰어 놀아야 하는 나이라고 했어. 어렸을 때는 감각이 성장하는 시기이지, 책을 볼 시기가 아니라고 말이야.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루소의 <에밀>의 교육관대로 가르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의 개혁적인 교육관이 더 궁금해져서 이 책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앞서 너희들이 책읽기를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했는데, 루소의 말대로라면 다행이 아니구나. 그렇다고 우리 주거 환경이 자연 속에서 뛰어 놀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너희들에게 감각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마련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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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루소는 열두 살 미만의 아동기를 감각이 성장하는 시기로 보았다. 이 시기의 아이는 전원 환경에 둘러싸여 지내야 하며, 책을 통한 교육은 금물이라고 했다. 책을 읽힌답시고 오랫동안 앉혀 두는 것은 감각이 성장하는 데 방해되며, 심지어 재앙이라고도 표현했다. 이는 루소의 교육론 중에서 오늘날 우리나라 학부모들에게 가장 극렬한 반대에 부딪힐 내용이다. 열한 살이 되도록 책 한 번 펼쳐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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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소개된 스무 편의 고전을 아빠가 읽은 걸 세려다가 말았는데, 언젠가는 읽겠지, 사 둔 책 기준으로 여럿 있구나. 아빠가 읽은 책과 언젠가는 읽겠지 하면서 사 둔 책을 모두 더해보니 아홉 권이로구나 먼저 이 책들을 가끔씩 읽어봐야겠구나. 그러고 이 책에서 소개된 스무 권을 모두 읽기를…. 너희들이 좀 더 커서 명작동화가 아니라 각색되지 않은 고전을 읽을 만한 나이가 되면, 아빠의 중학교 시절처럼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도록 재미있는 고전 위주로 추천을 해주어야겠구나.

아빠가 먼저 이 책의 스무 권을 읽고, 너희들 취향에 맞고 재미있는 책을 다시 한번 선별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이 책에 소개하지 않은 아빠만의 리스트도 한번 만들어 보고 말이야


PS:

책의 첫 문장 : 여러분은 지금까지 몇 권의 고전을 읽어 보았나요?

책의 끝 문장 : 현대의 모든 연애 소설은 이 작품의 그늘 아래에 있다고 평가 받을 정도다


빅토르 위고는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빈곤’ 때문이며, 그 빈곤의 책임은 바로 사회에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범죄는 사회의 부조리와 무관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범죄를 저지른 자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빈곤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인 ‘여성, 어린이, 하인, 저교육층’이 불평등 속에 살아가는 것도 ‘남편, 아버지, 주인, 고소득층, 고교육층’ 같은 기득권층의 책임이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의 저작권은 위고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 P17

빅토르 위고는 건축물이란 건축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역량과 상상력이 아니라 그 사회 민중의 삶과 정신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올린 퇴적물이 바로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건축물은 민초의 삶이 그대로 반영된 ‘돌로 만든 책’이며, 수백 년에 걸쳐 민중이 힘을 모아 쓴 역사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P58

존재 지향형 학생은 교사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머릿속에 주입하지 않고 이해하는 데 집중한다. 노트에는 주요 내용만 필기하되,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자기만의 문장으로 풀어 쓴다. 이런 학생은 그날 배울 내용과 관련해 사건에 배경 지식을 찾아보고 교과서에서 왜 이렇게 설명했을까 생각해 본다. 수업 시간에는 자신의 의견을 내놓으며 교사에게 질문을 던지고, 다른 학생들의 의견에도 귀 기울이며 자기만의 지식을 쌓아 간다. 이렇게 쌓은 지식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만, 단순 암기로 쌓은 지식은 쉽게 사라져 버린다. 학습에 대한 흥미도는 단연 존재 지향형 학생이 높다. - P123

루소는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1762년 연달아 발표했다. 그때 프랑스 정부는 루소의 책을 태워 버리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루소에게 치욕을 안겨 주었다. 루소가 책 속에서 강조한 자유와 평등에 대한 논리가 왕과 귀족들의 세상이었던 당시 프랑스 사회를 비판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의 든든한 밑거름이자 버팀목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독립을 하는 데 사상적인 토대가 되었고, 미국은 실제로 ‘사회 계약’의 과정을 통해 민주 국가를 세웠다. 그런 한편 <에밀>은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여야 한다는 교육론의 뿌리가 되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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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13 00: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무편이 뭔지 궁긍하네요. 읽은게 한권이라도 있을려나 ㅎㅎ

bookholic 2021-04-13 07:39   좋아요 5 | URL
《레 미제라블》《모비 딕》《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악령》《파리의 노트르담》
〈내기〉《닐스의 신기한 여행》《섬》《종의 기원》《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소유냐 존재냐》《에밀》《걸리버 여행기》《오셀로》《스케치북》
〈애서광 이야기〉《이반 일리치의 죽음》《히포크라테스 선집》《달과 6펜스》《오만과 편견》
이렇습니다~~^^

새파랑 2021-04-13 07:50   좋아요 3 | URL
와우 이렇게 긴 댓글까지~! 전 6개밖에 안되네요 ㅎㅎ

2021-04-13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3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33)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북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쨩쨩 쇳스럽게 울어대고

밤이면 무엇이 기화골에 무리돌을 던지고 뒤우란 배나무에 쩨듯하니 줄등을 헤여달고 부뚜막의 큰솥 적은솥을 모조리 뽑아놓고 재통에 간 사람의 목덜미를 그냥그냥 나려 눌러선 잿다리 아래로 처박고

그리고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바닥에 넘너른히 널리는 집이다.

   --<외갓집>


(38)

황토 마루 수무나무에 얼럭웅 덜럭궁 색동헝겊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삼은 엄신 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고개를 몇 번이고 튀튀 춤을 뱉고 넘어가면 골안에 아늑히 묵은 영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넘언집 범 같은 노큰머니> 中에서


(48-49)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가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수라(修羅)>


(59)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 나의 조상은 현재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北方)에서> 中에서


(93)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은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 <선우사(膳友辭)> 中에서


(117)

빨간 물 짙게 얼굴이 아름답지 않으뇨

빨간 정() 무르녹은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줄댄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十月)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실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十月)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깨웃듬이 외로히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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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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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유현준님의 책 두 권을 읽고 이야기해주었잖아. 그리고 그의 대표작 3권 중 나머지 한 권 <어디서 살 것인가>로 읽었단다. 이 책을 읽은 것은 최근 아빠가 집 짓기에 대한 관심이 좀 있었기 때문이야. 물론 직접 집을 짓겠다는 것은 아니고, 가능성 낮은 바램이라고 할까?^^ 그래서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유튜브에서 직접 집 지은 사람들의 영상들을 자꾸만 클릭하게 되네. 물론 이번에 읽은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는 우리가 사는 집에 국한된 내용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건축에 관련된 책이니까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겠지, 하면서 책을 펼쳐 들었단다.

책 제목 <어디서 살 것인가>를 보고 문득 아빠가 그 동안 어디서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단다. 아빠는 태어나서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시골의 작은 집에서 살았단다. 작고 불편한 점도 많지만, 그래도 많은 추억이 만들어진 곳이고요즘도 아주 간혹 꿈에서 나오기도 한단다. 조그마한 마당도 있고, 텃밭도 있는요즘 아빠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집의 형태가 아빠가 이미 어렸을 때 살아봤던 집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고등학교 3학년 때 아파트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지. 대학 1~2학년은 집에서 왔다 갔다 하기도 했지만, 한동안 학교 근처 선배네 집에서 얹혀 살기도 했는데, 그 작은 원룸도 아빠가 머물던 집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군대 생활할 때는 나라에서 지어준 집에서 지냈구나. 2년 여 군 생활 동안 3군데 거처를 옮겼던 기억이 있구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도 아빠가 살았던 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복학하고 나서는공부 좀 하겠다고 학교 근처에 친구랑 원룸에서 같이 지냈어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학기 중 아빠의 집이었지. 그리고 회사 들어 가서는 고등학교 친구 셋이 원룸에 2년 정도 기거하다가 회사 초근접 지역에 원룸을 잡고 지냈지.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야 다시 아파트로 들어갔고,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세 군데서 살았구나. 이렇게 생각해 보니,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여럿 집에서 지냈구나. 아빠의 기억력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각각 집에서 있었던 기억들, 추억들이라고 해야겠지? 하나 둘 떠오르는 것이 좋은 것들이 많구나. 그리고 세월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도 들었어그것도 아주 빠르게앞으로는 또 어떤 집에서 살게 될까?


1.

유현준님의 어디서 살 것인가는 한 개인이 또는 한 가족이 어디서 살 것인가는 가이드 해주는 것은 아니고, 우리 사회가 우리 나라가, 그러니까 좀더 큰 공동체가 더불어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까?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 바로 학교야. 너희들도 앞으로도 한창 다녀야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곳이 학교이니 아빠도 관심 있게 읽어보았단다. 그리고 지은이가 지적한 것처럼, 학교 건물이 교도소를 닮았다는 내용에 인정할 수밖에 없고, 교육 관계자들이 오히려 그런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에 씁쓸해지는구나. 동선을 최대한 줄이고, 관리를 위한 구조로 만들어진 학교 건물은 창의력을 없애는 구조라고 이야기하더구나. 학교 건물은 낮게 지어야 하고, 밖에 쉽게 나갈 수 있는 동선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했어. 그래야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이야.

===========================

(51)

다양한 형태와 높이의 천장과 다양한 모양의 교실 평면도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대형 건물보다는 스머프 마을 같은 느낌이 나야 한다. 운동장 주변의 담장을 허물고 가까이에 가게를 두어 주변의 감시를 통해 안전한 운동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방과 후 시민들이 운동장을 광장처럼 사용하고 마을 주민 전체가 아이들을 키우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학교 건축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의 학교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도전 정신이 없고 전체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국민만 양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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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몇몇 지은이가 구상한 학교의 도면을 책에 싣기도 했는데, 우리나라 공무원들께서는 그런 구조에 오케이를 해 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런 건물의 구조는 회사들의 건물인 사옥에도 영향을 준다고 했어. 직원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회사라고 하면, 넓고 낮은 구조가 좋다고 했단다. 그것이 어렵다고 하면, 건물 안에서도 자연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했어. 아빠의 회사를 생각해 봤는데, 뭐 학교 건물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2.

점점 1인 가구가 늘어가고 있단다. 그게 그저 사회현상인지 사회문제인지 아빠는 잘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그들을 위한 건축 양식도 많이 바뀌고 있다고 했어. 그것은 단지 건축 양식만 바뀌면 되는 것이 아니고, 도시는 그런 이들을 위한 도시계획을 세워야 도시가 활성화가 되는 거야. 그런 것이 잘 되어 있는 도시로 뉴욕이 있다고 했어. 뉴욕에는 1인 가구가 많고 집이 좁아도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쉽게 공원 같은 자연을 만날 수 있고, 문화적인 혜택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어.

그에 반해 서울도 1인 가구가 늘면서 집에 좁아지고 있는데, 갑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접근성이 좋은 공원이 적다는 거야. 대부분 공원이 차를 타고 가야 하고, 이 공원에서 저 공원으로 갈 때도 모두 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것이 뉴욕과 서울의 차이라고 하는데, 이미 기반시설이 다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런 구조를 만드는 것은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좁은 집만 그런 건 아니란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잖아. 그렇다 보니 자기만의 공간이 만들기 쉽지 않다고 했어. 그래서 편의점, 카페, PC, 자동차 등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주는 산업이 발달했다고 했어. 그것도 코로나19 때문에 많이 줄어들었지만 말이야. 문득 이런 코로나19 시대에는 어떤 건축의 형태가 필요할까?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작년에 세컨드 주택 붐이 불기도 했다는데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아파트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19를 좀더 잘 극복하기 위해서 아파트 내부를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


3.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아파트가 많은 걸까?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라는 이유도 있고, 아파트 생활이 편해서라는 이유도 있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고층 아파트가 가능하게 된 이유가, 지은이는 보일러 보급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흔하디 흔한 보일러가 아파트 붐의 시작이라고 하다니, 지은이의 설명을 들어보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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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303)

이처럼 2층 양옥집은 보일러의 보급과 함께 생겨났다. 얼마 후 철근콘크리트와 보일러를 합쳐서 만든 아파트가 나타났다. 당시 아파트는 12층까지도 지어졌다. 고층 아파트가 부동산의 빅뱅을 일으킨 것이다. 역사 이래 하늘 아래 빈 공간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건축 업자가 고층 건물을 지으면서 공중에다가 없던 부동산 자산을 만든 것이다. 조선 시대 경제 계급은 극소수의 지주와 대다수의 소작농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한된 땅덩어리에 살던 우리에게 부동산은 일부 부유층의 소유였을 뿐이다. 그런데 아파트로 인해 부동산이 늘어났고 직장에서 일해서 아파트를 사면 누구나 부동산을 소유한 지주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경제의 파이가 커지고 중산층이라는 계층이 생겼고, 근대화가 시작됐다. 모든 것은 보일러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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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님의 책을 읽다 보면 그가 공간을 중요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이 책에서도 결론은 공간이었어. 건축의 핵심은 공간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 공간을 잘 만들어야.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화목하게 잘 살아간다고 했어. 우리도 앞으로 이 집에서, 이 공간에서 화목하게 잘 살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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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

제대로 설계된 공간은 갈등을 줄이고 그 안의 사람들을 더 화목하게 하고, 건물 안의 사람과 건물 주변의 사람 사이도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자연 사이도 더 화목하게 한다. 좋은 건축은 화목하게 하는 건축이다. 물론 건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갈등을 조금이라도 더 해소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는 화목하게 만드는 건축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건축은 건축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하나의 건축물이 완성될 수 있다. 세상을 더 화목하게 하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건축을 조금씩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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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 사람들은 건축물을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끝 문장 : 우리를 화목하게 만드는 도시를 함께 만들어 보자.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이런 시설에서 12년을 보낸다면 그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똑 같은 옷, 똑 같은 식판, 똑 같은 음식, 똑 같은 교실에 익숙한 채로 자라다 보니 자신과 조금과 달라도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왕따를 시킨다. 이런 공간에서 자라난 사람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평생 양계장에서 키워 놓고는 닭을 어느 날 갑자기 닭장에서 꺼내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 보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양계장 같은 학교에서 12년 동안 커 온 아이들에게 졸업한 다음에 창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닭으로 키우고 독수리처럼 날라고 하는 격이다. - P28

건축 리모델링은 재즈와 같다. 이름 모르는 과거의 어떤 건축가가 수십 년 전에 디자인한 건물 위해 현재의 건축가가 이어서 연주하는 것이 리모델링이다. 앞선 사람이 펼쳐 놓은 기본 멜로디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음을 펼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과거의 것을 따라만 가서도 안 된다. 제약 가운데서 자신의 개성을 펼쳐야 한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리모델링한 건축가는 백 년 전에 지어진 기차역의 구조에 덧대어 아름다운 미술관을 건축했다. 기차가 다니는 곳은 조각품 전시장으로 거듭났다. 군데군데 무거운 쇠로 만들어진 철길에서 모티브를 따온 디테일들도 보인다. 이 공간을 보면 두 명의 건축가의 연주하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재즈 음악이 들리는 듯하다. - P158

영화 <블랙 팬서>는 겉으로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이지만 스토리를 들여다보면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도시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이야기와 사회의 잠재적 위험이 만들어지는 방식 등 현재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자성하는 목소리가 담긴 영화다. 그중에서도 건축가인 필자의 마음에 가장 남는 이야기는 "벽과 다리"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속 주인공은 마지막에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쌓는다"라고 말한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벽을 세우고 있는 트럼프한테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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