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2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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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조정래 님의 <아리랑> 2권을 이야기해줄게. 아리랑의 초판이 1994년이더구나. 아빠가 처음 읽은 것이 2001년이니 아빠도 일찍 읽은 편은 아니구나. 하기야 아빠가 2000년 이전에는 책에 무관심한 사람이었으니…. 다행히 늦게나마 책읽기의 재미에 빠진 것이 다행이구나.

, 그럼 오늘도 부지런히 이야기를 해줄게.

을사늑약이 발표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 활동이 일어났단다. 충청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경상도에서도 뒤이어 일어났단다. 전라도에서도 최익현과 임병찬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단다. 송수익도 친구 신세호가 소개해 준 임병서와 함께 의병 일으킬 준비를 했단다.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된 무기가 없다는 적이야. 한편, 일본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병에 맞설 준비를 했어. 일본은 그 전에 만든 친일단체 일진회를 의병을 막는데 이용했단다. 그래서 일진회 회원들은 무장을 하고 훈련 연습을 했어. 이에 일진회 회원들은 불만이 커졌단다. 일진회 회원들이 들고 다니는 무기는 무기 없이 의병 준비를 하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단다. 지삼출과 손판석은 그런 일진회 회원들을 몰래 꾀어내어 죽이고 총을 빼앗았단다. 하지만 그런 일은 드문 일로 의병들의 무기는 초라했단다. 그렇다 보니 무기로 무장한 일본 헌병대에 맞서 싸우다 보면 희생자도 많고 생포되는 사람들도 많았어. 잡힌 이들은 자신의 동네로 끌려가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총상을 당하고,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어.

의병 조직이 하나로 똘똘 뭉친 것은 아니었어. 의병 조직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의병 조직 내에서도 양반과 상민이 따로 있다는 거야. 양반 유생들이 아직 신분을 따지고, 천한 신분이라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어.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익현의 경우도 황제의 명령이 더 중요하다면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해산명령을 받고 산에서 내려오는 우를 범했단다. 양반이라면 황제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이유였어. 결국 쓰시마 섬까지 끌려가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게 되었지. 그의 뜻은 알겠으나, 그의 성급한 결정으로 전라도 의병의 줄기가 사라지고 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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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4)

지난번의 최익현의 처사가 그 고질병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황제인 고종도 고종이었고, 의병장이라는 최익현도 최익현이었다. 풍전등화인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나선 의병들에게 국왕이 해산명령을 내리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이름 좋은 황칙을 받았다고 하여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일으킨 의병을 일순간에 해산시키고 포박당하는 의병장의 처사는 또 무엇인가. 그 결과 불쌍한 평민들만 왜놈들에게 무참히 살육당했다.

최익현은 <황칙>이라는 것의 진의를 면밀히 파악했어야 했다. 을사보호조약이 상감의 뜻이 아니었듯이 그 황칙이라는 것도 상감의 진의가 아닐 수 있었다. 그것이 만약 마지못해 작성된 것이었다면 최익현은 그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불충을 저지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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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해지면서, 송수익 부대에서도 몇몇 유생들이 의병을 떠났단다. 전라도 의병 조직이 와해되어 노선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단다. 이런 현상은 전라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단다.

을사늑약 이후 나라에서 있었던 일들을 좀더 살펴보면 나라의 빚을 백성들이 직접 갚겠다고 하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단다.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고, 그 일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황제를 세웠어.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것도 이 즈음인데,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으로 많이 유입되어 의병 활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도 했지만, 여전히 양반유생 의병들이 자기 권리를 찾으려고 하여 제대로 단합이 되지 않았단다. 그런 양반유생들이 의병을 떠나고 나중에 평민 출신 의병장들 위주로 의병의 색깔이 바뀌었단다.

 

1.

하와이에 노동자로 끌려간 방영근은 하와이에 온지 어느덧 4년이 되었어. 하와이에 도착하고 2년동안은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계약기간인 2년이 지나고 나서는 그나마 생활이 조금 수월해졌어. 그리고 하와이 조선인 노동자들은 농장주들에게 인기가 좋았단다.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에 비해 성실하고 성과도 좋았거든. 조선인들 중에는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본토를 가는 이들도 생겼어. 방영근도 샌프란시스코로 가려고 했지만, 하필 그때 법이 생겨서 미국 본토 이동이 제한되었단다.

하와이에 있는 노동자들은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소식도 듣고 했단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을 인정한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슨이 조선인의 손에 죽었다는 기분 좋은 소식도 전해졌어. 아빠가 작년에 읽은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에서도 나왔던 내용이라 그때도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잖아. 그때 마치 처음 알게 된 사실처럼 이야기를 했는데, 소설 <아리랑>에도 나왔던 내용이구나. 그렇다면 아빠가 이미 20년 전에 읽고 잠시나마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을 텐데아빠의 기억력을 탓해야지그래도 이렇게 여러 번 읽다 보면 기억에 조금 더 오래가겠지? 아무튼 그 나쁜 놈 스티븐슨을 죽인 장인환 님, 전명운 님의 이름을 오래 기억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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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08)

같은 날 <뉴욕 타임스> <조선민족은 아직도 살았다>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었다. 그전에 이미 사건을 보도한 것은 물론이었다.

<스티븐슨를 저격한 것은 어느 정도 능력을 가진 조선인들 중에서 자기들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의사표시였고, 자기 민족의 운명을 자기들 힘으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형벌에 상관없이 그 젊은 청년들은 그들의 판단으로 치밀하고 용감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일본을 돕고 조선을 배신한 사람을 공격했다. 물론 그 행동은 그리 바람직하거나 현명한 처사는 못된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생각할 때 그 행동에는 상당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사설은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조선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서 손가락 하나 쳐들지 못하는 민족이다>라고 하면서 조선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편 것과는 정반대 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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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평소보다 더 말이 없어진 방영근은 날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장인환, 전명훈…… 장인환은 누구고, 전명운은 어떤 사람일까…… 그 사람들은 보통사람들하고 어떻게 다를까. 특별나게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센 것일까. 글쎄, 씨름꾼이 아닌데 그럴 리가 있을까. 사람이 꼭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다고 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 하나뿐인 목숨을 내걸고 죽기를 작정하고 나선 것이 아닌가. 죽기를 작정하자면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건 마음이 강단지지 않고서는 될 일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마음이 얼마나 강단지기에 죽기를 작정하고 나서서 그런 장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그들은 나이가 스물네다섯이다. 그러면 나와 같은 나이들이다. 그들도 고향에는 부모형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목숨을 내걸고 나섰다. 나는…… 나는 그럴 수 있는가…… 내가 만약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갈 수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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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미국 교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단다. 장인환 님과 전명운 님을 변호하기 위해 필요한 돈도 모금해서 미국인 변호사를 선임했단다. 그리고 제대로 된 번역을 위해 문학석사 과정중인 이승만을 데리고 왔어. 교포들은 서로 이승만을 자기 집에서 묵게 하려고 했지만, 이승만은 교포들이 모금한 돈으로 호텔에서 묵었단다. 재판이 계속 연기되자, 이승만은 자기 공부해야 한다고 떠나버렸단다. 그리고 자신은 기독교도이기 때문에 살인사건의 연루될 수 없다는 말도 남겼대. 대단한 위인인세. 이런 사람이 나중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니, 우리나라는 이렇게 지지리 인복이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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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13)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승만이 8 25일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버린 것이다.

한인동포 여러분들께 매우 미안합니다. 그러나 재판일이 언제 될지도 모르고 또 나 역시 논문을 써야 되니 시간관계로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인이니까 살인관계 재판 통역은 원하지 않습니다. 살인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거역되는 죄악입니다.”

이승만이 남기고 간 말이었다.

이승만의 행동이나 그 말은 동포들에게 크나큰 충격이 되었다. 그 소문은 사람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졌고, 이승만은 실망과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피나는 돈만 축내고 갔구먼.”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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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와이 노동자들의 문제는 대부분 남자들이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들이 정착하기 쉽지 않았지. 그래서 미국 한인 모임인 국민회는 사진결혼을 추진했단다. 하와이에 사는 남자들의 사진을 국내로 보내서, 그 사진을 보고 여자들이 하와이로 와서 결혼을 하는 것이지. 이것도 작년에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읽고 이야기했던 것 같구나. 1910년 첫 사진결혼이 성사되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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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사진결혼의 소문이 농장마다 퍼져나가면서 나이든 총각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고, 잊을 수 없는 고향병을 더욱 도지게 했다. 그런데 여자들의 비자없는 입국은 조선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혜가 아니었다. 농장주들은 그 방법을 일본 중국 필리핀 사람들에게도 확대 실시하게 했던 것이다.

사진관의 문턱이 닳아질 지경이 되는 가운데 최초의 조선 신부감이 하와이에 도착하게 되었다. 국민회 회장 이대수가 시범을 보이듯 신부감을 맞아들인 것이다. 전라도 처녀 최사라가 일본배 지양환을 타고 호놀룰루 항구에 닿은 것은 1910 12 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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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는 의병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남한대토벌 작전을 펼쳤단다. 무기가 변변치 못한 의병들은 일제의 이 만행에 속수무책이었어. 많은 의병들이 죽고, 의병들을 도와준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어. 의병장들은 현상금이 붙기도 했는데,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현상금에 눈이 먼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했다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송수익이 이끄는 의병대도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었어. 송수익은 다리에 총상까지 입어서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지 절에 숨어 지냈단다. 이때 승려 출신 의병인 공허 스님이 도움을 주었단다. 이렇게 힘든 시절 멀리 만주 땅에서 좋은 소식이 하나 들려왔단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었어. 백성들은 모두 기뻐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했단다.

그런 의병들의 끈질긴 항일운동이 계속 되었지만, 1910 8 29일 경술국치, 한일합방조약이 맺어졌단다. 이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말았어. 친일파 단체 일진회도 해산되었는데, 군산 일진회 회장을 맡고 있던 백종두는 당황했어. 자신의 권세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말이야. 백종두는 다시 권세를 잡기 위해 일본인들을 찾아가 굽실거렸고, 죽산면의 면장이 되었단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조선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했는데, 많은 일본인들이 이때 강제로 조선인들의 땅을 빼앗아 땅부자가 된단다. 그 중에 죽산면의 땅을 노리고 있는 하시모토라는 사람도 있었단다.

….

송수익은 임병서와 함께 몰래 신세호를 찾아왔단다. 신세호에게 함께 의병활동을 하자고 했으나, 신세호는 의견 차이를 보였어. 송수익은 상감(고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그의 무능함을 지적했는데, 골수 유생이었던 신세호는 상감을 비판하는 송수익을 비판했단다. 그래도 상감은 상감이라면서송수익은 상감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감의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단다. 아빠는 송수익의 비판이 맞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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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205)

그러고 말일세, 나라가 망하는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상감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더 큰 것인가, 아니면 신하고 백성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더 큰 것인가.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신하들이 줄줄이 자결하고,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켰네. 그때 상감은 무엇을 했는가. 구중궁궐에서 비통 통분해했는가. 그것으로 상감의 책무가 다 되는 것인가? 또 그와 반대로 매국노 중신놈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의병해산령에 옥새를 찍어 윤허하는 것이 상감의 책임인가?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것을 자네는 상감이 수행할 수 있는 최상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네만, 그거야말로 한 나라 상감으로서 얼마나 비굴하고 무책임한 처사인가. 무기를 들고 쳐들어온 놈들을 수만리 밖에 있는 딴 나라 사람들에게 물러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다니, 그런 답답한 노릇이 어디 또 있겠는가. 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때 실기를 했으면 그다음 강제 양위를 당했을 때 상감은 만백성을 향해서 외쳤어야 하네. 백성들이여, 나와 더불어 왜적들과 싸우자 하고 말이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앞장섰어야 했네. 그러면 왜놈들이 곧 죽이고 말았을 거라고? 죽이면 죽어야지. 그게 나라 뺏긴 상감이 책무를 다하는 길이네 상감이 해산령을 내려도 나라를 구하겠다고 의병으로 나서서 수만명씩 죽어가는 백성들인데 만약 상감이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왜놈들의 총칼에 죽었다면 백성들은 어찌 했겠나. 이 땅에 합방이란 없었네. 상감은 그 책무를 피한 덕에 지금 연명은 하고 있으나 진작에 죽은 목숨이고, 그 초라한 몸에 걸쳐진 것은 백성을 버려 나라를 망친 죄, 치정을 그르쳐 사직을 망친 죄가 있을 뿐이네.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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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수익이 떠나고 나서 신세호는 송수익이 이야기한 것을 생각했어. 그리고 길은 다르지만 자신도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신세호는 서당을 열어서 몰래 아이들에게 항일 정신을 가르쳤단다. 하지만 105인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신민회 사건에 연루되어 주재소에 체포되었어. 그가 가르치는 책 중에 신채호의 <이순신>, <을지문덕> 등의 책이 문제가 되었거든한편 송수익은 국내에서 의병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만주행을 결심했단다. 함께 했던 의병대원들에게는 당분간 해산하고 기다리라고 했어. 자신이 먼저 만주에 가서 정착한 후 연락하겠다고 말이야. 그렇게 송수익은 만주로 떠났단다.

여기까지가 2권의 대략적인 내용이란다.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들녘에 봄기운이 아련하게 어렸다.

책의 끝 문장: 풀꾹새는 석양빛 속에서 지칠 줄 모르고 울고 있었다.

"최익현 선생님께서 왜놈들이 주는 음식을 마다하시고 끝내 굶어서 돌아가신 것은 실로 큰 뜻을 이루신 것이고, 우리에게 높은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후일을 기약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도 합당한 것인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대마도에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은 어찌 되었거나 살아서 조선땅으로 돌아오는 것일 테지만, 우리의 처지에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꼭 산을 내려가 왜놈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산에서 목숨을 보존해 가며 후일을 기다리며 기회를 잡아 무장을 튼튼히 해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중대한 문제는 전과를 책하지 않겠다는 조정의 조칙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 P70

이승만은 7월 16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하버드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을 만큼 잘하는 영어로 죽음을 눈앞에 둔 애국자 둘을 살려내리라는 기대로 동포들은 이승만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몇몇 유지들은 서로 다투어 이승만을 자기에들 집에서 묵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들의 성의를 냉정히 거절하고 비싼 호텔에 투숙하고 말았다. - P112

그들은 두 달 동안에 벌어진 수많은 죽음의 끔찍스러움에 마음병이 들어 있었고, 의병의 기세가 불 꺼지듯 잦아들어 버린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속마음으로 의지하고 믿은 건 의병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번에도 갑오년 때와 다를 것 없는 감정의 엇갈림을 겪고 있었다. 그때 가슴속에 품었던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 밀려든 것은 허망감이었다. 그 막막하고 두려운 허망감에서 그들은 헤어날 길이 없었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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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페이지터너스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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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이사벨 아옌데 님의 신작 소설을 읽었단다. 이 책은 2022 1월 코로나 펜데믹이 한창일 때 외국에서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작년 말에 출간되었단다. 우리나라에서는 출판사 빛소굴의 페이지터너스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되었구나. 페이지터너스 시리즈 중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번에 읽은 이사벨 아옌데의 <비올레타>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단다. 슈테판 츠바이크와 이사벨 아옌데는 아빠가 전부터 좋아하는 작가라서 그럴 수 있겠지만, 페이지터너스 시리즈 두 작품이 모두 재미있었으니 페이지터너스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도 한번 살펴봐야겠구나.

이 책이 코로나 펜데믹 시절에 출간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의 내용과도 연관성이 있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1920년에 태어나서, 2020년에 삶을 마치게 되는데, 1920년은 전세계적으로 스페인 독감으로 펜데믹을 겪던 시절이었고, 2020년은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로 펜데믹을 겪던 시절이었단다. 100년을 산 한 여인의 이야기가 이 소설 속에서 펼쳐진단다.

이사벨 아옌데의 다른 소설들처럼 이 소설의 주무대는 칠레이고, 한 사람이 일생을 들여다 보면서 삶 속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음과 삶이 얼마나 짧은지도 다시 한번 새삼 깨닫게 되었단다. 또한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역사이고, 소설이 아닌 실제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역사는 사람의 수만큼 있다는 말이 있단다. 아빠의 역사, 너희들의 역사도 같을 수가 없단다. , 그럼 지금부터 비올레타의 역사를 이야기해줄게.

 

1.

이 소설은 황혼의 끝자락에서 손자 카밀로에게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해주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단다. 주인공 비올레타는 스페인 독감이 창궐하던 1920년 칠레에서 태어났단다. 스페인 독감은 역사적으로 가장 무서운 독감 중에 하나였는데, 아빠는 스페인에서 시작하거나 가장 큰 피해를 입어서 스페인 독감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구나. 1차 세계대전 때 유행하기 시작한 정체 모를 독감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어졌는데,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1차 세계 대전의 피해로 독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스페인에서 먼저 이 독감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어서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구나.

아무튼, 비올레타의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는 방역을 철저하게 해서 집안 식구들은 아무도 스페인 독감에 걸리지 않았단다. 비올레타의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중간 이름과 성()은 익숙하지 않니? 델 바예. 아빠만 익숙하니?^^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세피아빛 초상>의 주인공의 집안이 델 바예 집안이었잖니. 비올레타의 아버지 아르세니오 델 바예도 이 집안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아빠는 확신했단다.^^ 왜냐하면 지은이 이사벨 아옌데는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다른 소설 속 인물들과 관련이 짓곤 했거든. 그리고 이 소설 속에서 아는 이름을 발견했단다. 아르세니오 델 바예의 어머니 이름이 니베아라고 했어. <세피아빛 초상> <영혼의 집>에서 나왔던 세레로 델 바예와 니베아 부부가 있었어. 그 부부는 열다섯 명을 낳았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아르세니오 델 바예는 그들의 아이 중에 한 명인 거야. 이것은 분명 지은이가 의도를 한 것이었겠지?

다시 소설의 이야기를 하자꾸나. 비올레타의 엄마는 마리아 그라시아라는 사람이고, 오빠들이 다섯 명 있었는데, 가장 큰 오빠인 호세 안토니오와 가장 친했단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이모들인 피아, 필가르와 함께 살고 있었단다. 비올레타는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여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났단다. 비올레타는 어렸을 때 조세핀 테일러라는 아일랜드 출산 가정교사로부터 공부를 배웠어. 조세핀 테일러는 고아로 힘들게 살았는데, 비올레타의 집에 와서 처음으로 가족 같은 사람들을 만났어. 비올레타의 집에 와서 지낸 지 2년 뒤에 종양으로 큰 수술을 할 때도 비올레타의 가족들이 잘 보살펴주어 회복할 수 있었단다. 특히 비올레타의 큰 오빠 호세 안토니오가 지극히 간호해 주었었어. 사실 호세 안토니오가 조세핀을 짝사랑하고 있었거든. 조세핀이 다 회복하고 나서, 호세는 청혼을 했는데 조세핀은 거절했단다. 어렸을 때 일하던 집에서 집주인으로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 트라우마로 남자를 멀리하게 되었거든.

조세핀은 어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바지입은 여자 테레사 리바스를 만나게 되는데 둘이 말도 잘 통하고 금방 친해져서 우정을 쌓아간단다. 당시 칠레에서 여자들이 바지를 입는 것은 반항의 의미까지 있을 정도로 진취적인 여성의 상징이었어. 그만큼 테레사 리바스는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여성으로 페미니스트였단다. 조세핀과 테레사는 처음에는 우정으로 친하게 지냈지만,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단다. 호세만 가슴 아프겠구나. 호세는 조세핀과 테레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도 모르고 10번도 넘게 조세핀에게 청혼을 했다는구나.

 

2.

시간은 빠르게 흘러 1930년 세계 대공황의 시대가 왔어. 미국에 시작한 대공황은 칠레에도 영향을 주어 아버지의 사업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단다. 아버지가 동분서주하여 회사를 살리려고 했지만, 끝내 파산은 막을 수 없었고, 집까지 빼앗기게 되었어. 그리고 아버지는 하지 말아야 할 결정을 했단다.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했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된 비올레타의 식구들은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단다. 조세핀이 테레사에게 부탁을 해서, 테레사의 부모님인 아벨과 루신다가 살고 계신 칠레 남부의 나우엘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단다. 그곳은 조용한 시골이고 테레사의 부모님은 모두 선생님으로 아이들이 있는 곳을 직접 방문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단다. 그곳이 아무리 멀어도 마다하지 않으셨어. 그런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서 테레사가 진취적인 사람이 되었나 보구나. 테레사의 부모님인 아벨과 루신다는 비올레타의 식구들을 모두 받아주셔서 그곳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단다. 비올레타는 테레사의 부모님과 함께 다니면서 교육을 받았단다.

그 시골에 파비안이라는 젊은이가 수의사 실습을 하기 위해서 왔는데, 비올레타는 파비안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비올레타의 오빠 호세 안토니오는 이제 청년이 되어 사크라멘토에서 목공건축사업을 시작하여 재기에 성공하게 된단다. 성인이 된 비올레타도 오빠의 일을 돕겠다고 사크라멘토로 가게 되는데, 남자 친구 파비안은 나무엘에 남아 있어야 했단다. 잠시 헤어져야 했지. 어느날은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나우엘로 돌아갔고, 어머니는 오랜만에 모두 모인 6남매를 뒤로 하고 돌아가셨단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어. 칠레는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워낙 큰 전쟁이다 보니 칠레도 혼란을 겪게 된단다. 혼란의 시간이 지나고 1945년 전쟁이 끝나게 되고, 드디어 비올레타는 파비안과 결혼을 했단다. 그런데 사실 비올레타는 결혼 전에 이 결혼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어. 어렸을 때 풋사랑으로 만나 계속 그 관계를 유지를 해왔는데, 자신이 파비안을 진정 사랑하고 있는지 잘 몰랐거든. 그래서 조세핀 선생님한테 상담도 했는데, 조세핀 선생님은 하지 말라고 조언했었단다. 하지만,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 없어서 파비안과 결혼을 하게 되었단다.

파비안은 수의사로 크게 성공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수의사가 되었어. 그리고 비올레타는 자신의 의심을 결혼하고 나서 확신을 하게 되었단다. 자신이 파비안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거지. 그저 유명한 수의사의 아내 연기를 하고 있는 거였어. 그러면서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파비안의 아내상은 너무나 달랐어. 집에서 살림 잘하고 아이를 낳아주는 아내를 필요로 했어. 결국 그들의 위태위태한 사랑은 덴마크왕족의 방문 파티에서 깨지고 말았단다. 이 파티에 초대받은 파비안과 비올레타도 참석했는데, 비올레타는 그곳에서 덴마크 왕족을 태우고 온 비행사 훌리안 브라보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그래서 파비안과 헤어지기로 했어. 당시 칠레는 이혼이 불법이었다는구나. 그래서 꼼수로 혼인무효라는 것을 많이들 했는데, 파비안은 절대로 혼인무효를 해줄 수 없다면서 비올레타에게 돌아오라고 했어.

한편, 홀리안은 비행조종사로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지냈어. 비올레타와 사랑에 빠진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단다. 사실 훌리안은 바람둥이에 나쁜 남자 스타일이었단다. 비올레타는 훌리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훌리안은 이것을 문제로 인식하게 된단다. 더 문제는 그들이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거야. 파비안이 혼인 무효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비올레타는 아직 법적으로 파비안의 아내이니까 말이야. 비올레타는 첫째 아들 후안 마르틴을 낳고, 둘째는 딸 니에베스를 낳았단다. 첫째 후안은 비올레타를 닮았고, 둘째 니에베스는 아빠 훌리안을 닮았는데, 니에베스는 자라면서 아빠하고만 다녔단다. 10대일 때는 아빠 따라서 세계곳곳을 여행했단다. 비올레타는 아들 후안과 둘이 주로 지냈단다.

 

3.

나우엘에 사시던 테레사의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 그 집은 비올레타가 관리를 하였단다. 테레사는 여성 운동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조세핀은 여전히 이런 테레사를 뒷바라지하고 있었단다. 테레사가 폐암에 걸려 나우엘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얼마 안 있다가 죽고 말았단다. 조세핀은 상심하여 자신의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돌아오고 말았단다. 조세핀을 잊지 못하고 여전히 혼자 살고 있는 호세 안토니오는 또 청혼을 하였고 조세핀은 이제서야 승낙을 했단다. 조세핀의 나이 62세였고, 호세의 나이 57세였단다. 비록 많이 늦었지만 호세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어 아빠도 기쁘더구나.

그리도 파비안으로부터 드디어 결혼 무효 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사실 오빠 호세 안토니오가 뒤에서 힘을 쓴 것이란다. 하지만 비올레타는 지금 와서 훌리안과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훌리안과 니에베스는 미국 마이애미라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훌리안은 비올레타에게 이제 함께 살자고 계속 졸랐어. 비올레타는 훌리안 때문이 아닌 니에베스 때문에 마이애미로 가기로 했단다. 그동안 소원했던 딸과 친해지고 싶어서 말이야. 하지만 니에베스는 많이 타락해 있었단다. 불량 아빠인 훌리안과 둘이 살다 보니 니에베스에게 제대로 된 길로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었어. 히피족이 되어 집에서 가출하고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어. 훌리안이 사설 탐정 로이를 고용하여 딸을 감시해 달라고 했어. 훌리안은 비올레타한테 함께 살자고 했지만, 그에게는 소라이다 아브레우라는 애인도 있었고, 비올레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단다. 비올레타는 훌리안을 더 이상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았거든. 비올레타는 마이애미에 계속 머물 수 없어서 칠레 사크라멘토와 미국 마이애미를 오가는 생활을 했단다.

1960년 칠레는 처음으로 좌파 대통령이 당선되었어. 아빠가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이 소설의 지은이 이사벨 아옌데의 삼촌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란다. 후안과 조세핀도 이 좌파 대통령을 적극 지지했단다. 하지만 좌파 대통령이 되고 나서 반대파와 미국의 모략으로 사회는 큰 혼란을 가져왔단다. 이것은 나중에 비올레타 식구들에게도 영향을 주는데, 그건 조금 있다가 또 이야기를 해주고, 다시 딸 니에베스의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사설 탐정 로이는 거의 죽기 직전의 니에베스를 구출하여 병원에 입원시켰단다. 하지만 니에베스는 그 병원을 탈출하여 다시 사라졌어. 비올레타는 니에베스를 찾으러 다녔단다. 히피족이 다시는 곳, 마약 소굴이라고 부르는 곳들을 다녔어. 로이가 다시 니에베스를 찾았는데, 훌리안은 이번에는 니에베스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단다. 니에베스는 이번에도 병원을 탈출하여 사라졌어.

비올레타는 사크라멘토로 돌아왔는데 몇 달 뒤 로이로부터 연락이 왔어. 니에베스를 찾았다고다시 미국으로 날아간 비올레타는 니에베스를 만났는데, 여전이 약물중독이었고 임신까지 했단다. 비올레타는 니에베스를 진심으로 보살펴 주었단다. 니에베스가 어렸을 때 이후 둘은 가장 친하게 지냈단다. 니에베스도 뱃속 아기를 위해서 약도 끊고 건강을 되찾으려고 많이 노력했단다. 하지만 이미 몸은 무척 안 좋은 상태여서 임신중독까지 걸리게 되었단다. 결국 출산 중에 그만 니에베스는 죽고 말았단다. 건강한 아들 카밀로만 남긴 채 말이야. 비올레타는 딸을 잃은 슬픔도 잠시, 엄마 잃은 손자를 보살펴야 했지. 다행히 로이의 도움으로 비올레타는 카밀로를 로이의 멕시코 여자 사람 친구인 리타의 집에 머물게 되었어. 리타도 무척 착한 사람으로 비올레타와 카밀로를 잘 보살펴 주었단다. 카밀로가 태어난 지 6개월이 되었을 때 칠레 사크라멘토로 돌아왔단다.

 

4.

칠레로 돌아온 지 11개월 후 우익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인해 좌파 대통령은 죽고 말았어. 그리고 좌파 대통령을 지지했던 좌파 인사들은 모두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비올레타의 아들 후안도 쫓기는 신세였단다. 일단 나우엘로 도망갔지만 그곳도 안전한 곳이 못되어, 후안은 국경을 넘어 도망갔단다. 후안은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가서 기자생활을 했는데, 얼마 후 아르헨티나도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안전하지 못했어. 후안은 노르웨이로 망명을 갔고 그곳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정착을 했단다. 카밀로가 좀 큰 다음에 비올레타는 카밀로를 데리고 노르웨이로 가서 아들 후안을 만날 수 있었단다. 카밀로는 이제 노르웨이 사람이 다 되었고, 나중에 칠레가 다시 민주주의를 되찾은 이후에도 칠레도 돌아오지 않고 노르웨이에 계속 살았어. 가끔씩 식구들 만나기 위해 방문할 뿐이었단다.

후안의 망명을 도와준 노르웨이 외교관 하랄드 피스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나우엘 시골까지 찾아왔단다. 외교관을 은퇴하고 왔다는데 비올레타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거야. 둘은 결혼을 했어. 비올레타 나이 65세였단다. 비록 많은 나이였지만, 비올레타는 가장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단다. 카밀로는 자라면서 사제의 길을 선택했단다. 비올레타가 반대하기도 했지만 손자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지. 그리고 세월은 빠르게 흘러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갈 수 없는 길을 떠났단다. 그리고 비올레타도 니에베스가 찾아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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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477)

한 세기를 살다 보니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백 년은 어디로 갔을까?

너에게 고해성사를 할 수가 없구나, 카밀로. 너는 내 손자지만 네가 원한다면 내 죄를 사해 줄 수 있겠지. 그러면 에텔비나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거다. 죄 없는 영혼들은 우주 공간을 가볍게 떠다니며 별 가루로 변한다.

안녕, 카밀로, 니에베스가 나를 데리러 왔다. 하늘이 예쁘구나……

=================

….

이번 편지도 아빠의 기억력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단다. 한 사람의 삶을 읽다 보니, 아빠의 삶이 비록 지루하고 평범한 삶이지만,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구나. 지금부터라도 일기를 좀더 열심히 써야겠구나. 늘 재미있고 깊이 있는 이사벨 아옌데의 또 다른 소설을 찾아 나서야겠구나.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사랑하는 카밀로에게

책의 끝 문장: 하늘이 예쁘구나.


역병에 걸렸다는 느낌은 무덤 저편에서 건너온 듯 그 무엇으로도 완화되지 않는 오한, 늪에 빠지는 듯한 열병, 몽둥이질을 당한 듯한 두통, 눈과 목이 타는 듯한 열기, 바로 눈앞에서 사신이 찾아온 듯 끔찍한 섬망으로 시작되었다. 감염자의 살갗은 청보라 빛을 띠며 점차 시커메지고 손발은 검은색으로 변했고, 숨을 못 쉴 정도로 기침이 터져 나오고 폐가 부글거리는 피거품으로 가득찬 채 고통으로 신음하다가 결국 숨이 막혔다. 제아무리 운 좋은 사람도 몇 시간 안 걸려 목숨을 잃었다. - P20

인생의 여정은 한 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 충격적인 일 하나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지만, 그 여정에서 일어난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기억에 새겨진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나처럼 오래 산 존재 안에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이 깃들어 있다. 내 가엾은 몸은 닳아버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정신은 아직 흐트러지지 않았다. 잊지 모하는 것은 내게 있어 저주란다. - P179

나는 딸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애가 살았을 때 해주지 않은 말을 마침내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너를 사랑했다고, 여러 해 동안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고. 나는 그렇게 내 딸과 헤어질 수 있었고 안녕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 애에게 키스하며 무심하고 소홀했던 내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내 딸로 와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있었다. 내 마음과 아들의 마음속에 네가 언제나 살아 있을 거라는 약속도 했다. 그리고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꿈속에서 나를 찾아와 달라고, 신호와 암호를 보내달라고, 거리의 모든 아름다운 아가씨의 화신으로 나타나 달라고, 가장 깊은 밤이면 영혼으로 나타나 주고 한낮에는 퍼져나가는 햇살로 나타나 달라고 부탁을 했다. - P316

우리는 오늘날까지 30년 동안 민주주의를 유지해 왔고, 강제 수용소, 고문, 살인, 수많은 사람이 겪은 탄압이라는 최악의 과거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어느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실제 상황이었지만, 당시에는 알지 못했고 정보도 없었고 소문만 무성했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독재가 나라에 질서를 부여하고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데 필요한 조치였다며 정당화하곤 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독재가 있었다. 그때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였다. 우리는 미국인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훌리안 브라보가 10년 전부터 경고한 대로 그들은 우리 대륙에 좌파 사상을 허용하지 않고자 했다. 러시아인들 또한 자기 통제권 안에 있는 나라들에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했다. - P345

1980년대 말에는 세계도 우리나라도 우리의 삶도 많이 변화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28년 동안 독일을 갈라놓는 장벽을 하룻밤에 망치로 부수는 베를린 사람들의 행복감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과 소비에트 사이의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어떤 나라는 평화를 희망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그 시간은 너무 짧았다. 항상 어딘가에는 전쟁이 존재한다. 몇 가지 슬픈 예외를 제외하고, 오래 고통을 겪어온 온 우리 대륙은 최근에 와서 과거의 족벌, 혁명, 게릴라, 군사쿠데타, 폭정, 암살, 고문, 대량 학살의 역병으로부터 치유되기 시작했다. - P423

살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그 둘 사이에는 기억을 떠올려야 할 시간이 있다. 나는 이 며칠간 침묵 속에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 시간 동안 물질적인 문제보다 감정에 관한 것이기도 한 이 유언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세세한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다. 나는 손으로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지 몇 년 되었다. 글씨도 알아보기 어려워지고 어릴 적 미스 테일러에게 배운 우아한 글쓰체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관절염도 내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걸 막지는 못한다. 컴퓨터는 마비되다시피 한 내 몸에서 가장 유용한 수족이다. 카밀로 너는 나를 놀리고 있지. 내가 죽어가는 백 세 노인 중에 기도보다 컴퓨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단 한 사람일 거라고 말이다. - 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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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3-26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표지가 인상적이라 강하게 자리잡는 책이네요.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지네요.

bookholic 2024-03-28 23:36   좋아요 0 | URL
북플과 알라딘 서재에서 가장 조심할 부분이죠..
장바구니에 책이 쌓이는 것... ^^
늘 즐거운 책읽기 하시길 바랍니다...
 















(9)

ISIS(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2003sus 국제 테러 조직 알 케에다의 이라크 하부 조직에서 출발해, 2011년 시리아 내전 이후 시리아로 거점을 옮겨 활동하였으며 세력을 넓혔다. 급진 수니파 무장 단체로, 집단 학살과 잔인한 테러를 일삼았다. ISIS IS(Islamic State)가 그들 스스로 국가 수립을 선언하기 이전의 이름이다. 2019년 현재 IS는 대부분 와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6-27)

삶은 흘러간다. 이라크인, 특히 야지디족 같은 소수 부족들은 새로운 위협에 잘 적응했다. 무너지는 나라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그래야 한다. 적응이라 하면 때론 아주 소소한 일들을 뜻한다. 우리는 꿈의 크기를 줄였다. 학교를 졸업하는 것, 농사일을 그만두고 덜 힘든 일을 하는 것, 제때 결혼식을 하는 것 같은 바람들 말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꿈은 이룰 수 없었다고 쉽사리 자신을 설득했다. 이따금 적응은 아무도 모르게 차츰 이루어졌다. 학교에서 무슬림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을 멈추었고, 낯선 이가 마을을 지나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또 공격과 관련된 TV 뉴스를 보면서 정세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혹은 입 다물고 지내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고 아예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기도 했다. 매번 공격이 있을 때마다 남자들은 시리아에 면한 서쪽에서 시작해 코초 외곽 장벽을 연장했다. 어느 날 깨어 보니 성벽이 마을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남자들은 마을 주변에 참호를 팠다.


(49)

어린 시절 나는 내 나라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제재와 전쟁, 극악한 정치, 점령 등이 일어나는 행성 같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이웃들은 서로 등을 돌려 버렸다. 이라크 북단은 쿠르드족이 독립을 원하는 지역이었다. 남쪽은 주로 시아파 무슬림들의 본거지였는데, 이들이 종교와 정치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중부에는 수니파 아랍족이 있다. 이들은 한때 수니파 대통령 사담 후세인과 함께 주()를 지배했던 적도 있었으나, 이라크 침공 이후 지금은 시아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라크에 저항하는 세력이 되었다.


(50)

코초의 북동쪽, 쿠르드 자치구의 남쪽 경계에는 아랍인과 쿠르드 인에 이어 제3의 민족인 투르크멘족이 산다. 무슬림은 투르크멘족 역시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뉜다. 기독교인들은-그중 아시리아인, 칼데아인, 아르메니아인-나라 전역, 특히 니네베 평원을 흩어져 산다. 기타 지역에는 아프리카인과 같은 마쉬 아랍족을 비롯해 카카이, 샤박, 로마니, 만다야 같은 소수 집단이 산다. 바그다드 인근 어딘가에는 아직도 이라크의 유대인 집단이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고 들었다. 이라크의 종교와 민족을 두고서는 다양한 구분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쿠르드족은 수니파 무슬림이지만, 그들은 쿠르드족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야지디의 경우는 종교를 믿는 이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이라크 아랍족은 시아파나 수니파 무슬림이다. 이러한 복잡한 구분들이 오랜 세월 수많은 분쟁을 야기해 왔다. 이런 세세한 이야기는 이라크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다.


(102)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ISIS의 눈에 뛸까 봐 집 안에만 있었고, 그렇게 코초의 삶은 정지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떨어져서 지내니 이상했다. 코초는 밤늦도록 남의 집에서 친구들과 식사하고, 옥상에서 이웃끼리 떠들다 자는 일이 일상인 동네였다. 그러나 ISIS가 포위한 뒤로는 잠에 바로 옆에 누운 사람과 소곤대는 것과 위험해 보였다. 우린 최대한 눈에 안 띄려 했다. 그러면 ISIS가 우리를 잊기라도 할 것처럼. 점점 뼈만 남게 말라 가는 것도 자기를 보호하려는 방법 같았다. 곡기를 끊으면 결국 투명인간이라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친척들은 살피러 가거나, 물품을 가지러 가거나, 아픈 사람을 도우러 갈 때만 집을 나섰다. 그때도 빗자루를 피해 달아나는 벌레들처럼 늘 피할 곳이 있는 쪽으로 잽싸게 걸었다.


(148)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부분이다. 이 때문에 야지디에서는 종교 지도자층의 일원을 종교적인 의미의 형제자매로 삼는다. 그들은 종교를 가르치고 내세에서 우릴 도와준다. 나의 자매는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고 아름다웠으며 야지디 교리를 매우 잘 알았다. 그녀는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을 했고, 친정에 돌아와 살면서 신과 종교에 자신을 바쳤다. 나의 자매는 ISIS가 집 가까이 오기 전에 탈출하여, 독일에서 안전하게 지냈다. 이런 형제나 자매의 가장 중요한 소임은 우리가 죽은 뒤 신과 타우시 멜렉 곁에 앉아 우리를 변호하는 일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자는 제가 생전에 알던 사람입니다. 영혼이 지상으로 돌아갈 자격이 있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177-178)

IS 소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비야는 재산에 불과하므로소유자 뜻대로 선물로 주거나 팔 수 있다. 여인들을 자녀와 떼어 놓으면 안 되지만-그 이유 때문에 디말과 아드키는 솔라에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다-말릭처럼 다 자란 자녀는 데려가도 무방하다. 사비야가 임신하거나 주인이 죽으면 사비야는 유산의 일부로 분배되었다. 또 주인은 노예가 성교에 접합하면 사춘기 이전이어도 성교할 수 있으며, 적합하지 않으면 성교 없이 즐기는 것이로 족하다라고 되어 있다.


(206)

지난 3년간 야지디 여자들이 ISIS에게 잡혀 성 노예가 된 사연을 많이 들었다. 대부분 같은 폭력을 겪은 피해자들이었다. 우린 시장에서 판매되거나, 신병 혹은 고위 지휘관에게 선물로 건네졌다. 그러면 그의 집으로 끌려가서 강간당하고 모욕을 받았으며, 대부분 폭행당했다. 그런 뒤에는 다시 팔리거나 선물로 건네져서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또다시 팔리거나 선물로 건네져 강간과 폭행을 당했다. 쓸모가 다하고 죽기 전까지 이런 식이었다. 탈출을 시도하면 지독한 벌을 받았다. 하지 살만의 경고처럼 ISIS는 검문소에 우리 사진을 붙였고, 모술 주민들은 노예를 가까운 IS 센터에 신고하라고 지시받았다. 그러면 5,000달러를 보상금으로 받는다고 했다.


(345)

왜 나세르는 선량한데 모술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리 잔인했는지 모르겠다. 마음 깊이 선량한 사람이라면 IS 근거지에서 나고 자라도 여전히 선량한 것 같다. 강제 개종을 당해도 내가 그 종교를 믿지 않고 여전히 야지디인 것처럼. 그런 인품은 내면에 달려 있다. 내가 나세르에게 말했다. “조심해요. 몸을 잘 챙기고, 가능한 범죄자들과 멀리 지내요. , 헤즈니의 전화번호를 받아요.” 나는 헤즈니의 휴대폰 번호를 적은 쪽지와 그의 가족이 내준 택시비를 내밀었다. “언제라도 헤즈니에게 전해도 돼요. 내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당신은 제 목숨을 구해줬어요.”

그가 말했다. “행복하게 살기 바라요, 나디아. 지금부터 쭉 멋진 인생을 살아요. 우리 가족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쓸 거예요. 모술에서 탈출하려는 여자들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 전화해요. 우리가 도와주려고 노력할게요.”


(383)

난 떨면서 연설문을 낭독했다. 어떻게 코초가 점령당하고 나 같은 여자들이 사비야로 끌려갔는지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어떻게 반복해서 강간과 폭행을 당하다 결국 탈출했는지 설명했다. 오빠들이 살해당한 이야기도 전했다. 청중은 조용히 경청했다. 연설이 끝나고 나서, 나중에 한 터키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 오빠 알리도 살해됐어요. 그 일로 온 가족이 충격에 빠졌어요. 어떻게 한꺼번에 오빠 여섯을 잃고 버틸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힘들어요. 하지만 우리보다 더 많은 가족을 잃은 집도 있어요.” 내가 말했다.


(388)

막상 코초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헤어졌던 곳, 내 오빠들이 살해된 곳 말이다. 디말, 무라드(이즈음 무라드를 비롯한 야즈다 활동가들은 가족과 다름없었다)를 비롯해 일부 가족과 함께 있다가, 이제 코초에 가도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자 함께 이동했다. 우리는 전투를 피해 먼 길을 돌아갔다. 마을은 썰렁했다. 학교의 창문은 깨지고 안에는 일부 시신이 남아 있었다. 지붕의 나무까지 빼앗겼을 정도로 우리 집은 약탈당했고, 남은 것은 뭐든 소각되었다. 신부 사진이 담긴 사진첩은 잿더미로 변했다. 우리는 대성통곡하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파괴된 곳이라고 해도 대문을 들어선 순간 그곳이 내 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순간 ISIS가 들이닥치기 전에 느낀 감정이 되살아났다. 일행이 떠날 시간이라고 일러 주었지만, 나는 한 시간만 더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야지디가 신과 타우시 멜렉에게 더 가까워지려고 금식하는 12월에는 코초에 있겠다고 맹세했다.


(389)

나는 간단히 연설했다. 내 사연을 말한 다음 계속 이야기했다. 나는 연설을 잘하는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든 야지디는 ISIS가 집단 학살 죄로 기소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청중들은 세계의 약한 자들이 보호받도록 도울 만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난 우릴 유린한 남자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그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나 같은 사연을 가진 마지막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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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2001 6 26.

이 날이 무슨 날이냐고? ^^ 조정래 님의 대하소설 아리랑 1권을 읽기 시작한 날이란다. 아빠가 책을 읽을 때 읽기 시작한 날을 책의 앞면지에 적어두어서 그 날짜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거란다. 2001 6, 아빠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기를 썼으면 좋았겠는데, 그 당시에는 일기나 다이어리 정리를 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정확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잘 모르겠구나. 2001 6월이면 회사 들어간 지 얼마 안된 시점이고, 친구들과 함께 자취를 하던 시절이구나. 그렇다면 그 친구들과 술 한 잔 걸치고 있을 확률이 높겠구나. ^^

그때 읽고 나서 한번도 펼쳐보지 않은 조정래 님의 <아리랑>. 이번에 책을 다시 펴보니 책이 누렇게 다 바래 있구나. 하기여 20년의 세월이 어디라고책날개에 있는 사진 속 조정래 님도 참 젊으시구나. 작가도 늙으시고, 독자도 늙고, 책도 늙고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는구나. 작년에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산책( 10)>을 읽고 나서, 그 시절을 소설로 이야기한 조정래 님의 <아리랑( 12)>이 생각나서 읽어보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찾아 꺼내든 것인데, 만감이 교차하고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구나. 이것도 책의 힘이 아닐까 싶구나.

아빠가 <태백산맥>은 두 번 읽고, 필사하면서 한 번 더 읽어서 세 번을 읽었는데, <아리랑>은 이번이 두 번째 읽는 것이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20여 년 전에 읽어서 굵직한 이야기만 대충 생각이 난단다. 그 당시에는 메모를 안 하고 읽었는데, 이번에는 메모도 하고 줄거리도 잘 적어놓아야겠구나. <아리랑> 1권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인데, 조정래 님의 <아리랑>은 정말 훌륭한 소설이자 역사서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당시의 사건 사고와 인물 구성을 어찌 이렇게 잘 구성을 하셨는지

, 그럼 아리랑 1권의 이야기를 해줄게.


1

아리랑은 모두 12권이고 4부로 되어 있단다. 1, 2, 3권은 제 1 , 한반도라는 제목이란다. 1권은  1904년 김제 죽산면이라는 마을에서 시작한단다. 감골댁의 남편은 동학혁명에 참여했다가 병이 들었고 그 병을 고치려고 빚까지 지면서 약을 먹었지만 그만 죽고 말았어. 그 빚을 갚기 위해 맏아들 방영근은 하와이로 이민을 가게 되었어. 하와이에 가면 20원을 준다고 해서 빚 18원을 갚고, 남은 2원으로는 동생 보름이를 시집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말이 이민이지, 하와이로 가는 것은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단다. 하와이에 도착을 했더니, 노예보다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어. 1년 먼저 온 사람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들은 돈에 팔려 하와이에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 그들은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했고, 조금만 잘못하거나 실수를 하면 감독관이 채찍질을 해댔어.

그들이 하는 일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것인데, 방영근의 동료 주만상은 사탕수수 가시에 찔렸다가 치료는커녕 제대로 쉬지도 못해서 상처가 덧나서 죽고 말았단다. 그렇다고 탈출을 할 수도 없었어. 외딴섬 하와이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지. 하와이 이민은 불법 노동력 착취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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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하와이 이민은 노동력 충당을 위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협회에서 주한미국공사 알렌을 통해 교섭하게 한 것이었다. 고종은 1902 11월에 수민원(綏民院)을 설치하게 하고, 12 22일 인천항에서 121명을 떠나 보냈다. 그러나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뜻인 수민원은 처음부터 그 직무를 유기하고 있었다. 이민자 121명 중 반 이상이 미국 선교사 존스의 <대한사람이 인간의 천국인 미국에 이민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설교에 회유된 영동교회 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도 여러 선교사들이 각 개항장을 중신으로 사람들을 모집하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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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로 팔려가면서 돈 20원을 받았고, 18원은 빚 갖는데 쓰고 2원은 동생 결혼 비용으로 쓰려고 했잖아. 그런데 그 2원을 대륙회사에 다지는 장칠문이라는 자가 중간에서 꿀꺽했단다. 감골댁의 이웃 지삼출이 이를 따지러 갔다가 장칠문과 주먹다짐을 하게 되었고, 그 일로 지삼출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철창 신세가 되었어. 통변이 와서 감옥 말고 철도 공사을 하는 게 낫지 않냐고 꼬셔서 지삼출은 철도 공사하는 곳에 끌려가서 일하게 되었단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자원을 일본에 빼돌리려고 철도를 개설하고 있었거든.. 철도 공사를 한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지삼출처럼 끌려와서 일을 했단다.


2.

<아리랑>의 주요 배경은 김제와 군산이란다. 호남평야에서 걷어들인 쌀과 곡식을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해 군산항을 이용하면서 일본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었단다. 지은이 조정래 님께서 군산을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 군산을 제대로 가본 적은 없지만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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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포구에 바닷물이 가득 실려 있을 때 군산 쪽에서 바라다보면 건너편의 낮춤한 산줄기는 바닷물에 그대로 비쳐드는 듯한 정취를 자아냈다. 섬들을 품고 서쪽으로 펼쳐진 바다, 아슴하게 멀고 긴 수평선, 그리고 그 산줄기는 서로 어우러져 그지없이 아담하고 고운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그 풍광은 어느 때나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겨 머물게 하는 힘을 지녔지만 특히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치장할 때는 따로 있었다. 물안개가 잠포록이 끼었을 때, 노을이 자욱하게 피어나는 이른 아침이면 그 풍광은 한없이 신비스러웠고, 노을이 황금빛 현란함으로 타오를 때면 그 풍광은 더없이 황홀했으며, 빛이 사위어가는 달이 적막 속에 기울어져 가고 있을 즈음이면 그 풍광은 그지없이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은 비가 내리는 대로 애상적이었고, 눈이 내리는 날은 눈이 내리는 대로 허무적이었다.

그리고 산줄기는 끊긴 듯 이어진 듯하며 동쪽으로 어미줄기를 찾아 뻗어가고 있었는데, 그 오른쪽으로 들판이 널따랗게 펼쳐져 나갔다. 바다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그 벌판 가운데로 기다란 몸짓을 지으며 유유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금강이었다. 몇백리인지 모르게 굽이굽이 흘러내린 금강이 제 몸을 바다에 풀어 맡기는 지점에서 오른쪽 포구에 장항이 자리잡았고 왼쪽 포구로 군산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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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자리 잡은 일본 사람들과 일제 앞잡이들이 논을 야금야금 사 모으기 시작했어. 일본인들은 만경과 김제의 논을 시세보다 비싸게 주다 보니 잘 모르는 농민들은 그 돈을 팔고 소작 짓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덥석 팔곤 했단다.

그런 와중에 고문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제1차한일협약이 맺어졌단다. 이 협약으로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직접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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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그들이 기쁨에 넘치는 고문정치의 시작이란 제1차 한일협약이었다.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재빨리 군대를 한양에 진입시킨 다음 무력의 위협 아래 한일의정서를 조인하여 조선 안에 군사기지를 확보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것이 2월의 일이었다. 그 뒤로 러시아군을 계속 궁지로 몰아넣으며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게 되자 그들은 그 기세를 조선정부로 확대시켰다.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초빙하라는 강요였다. 결국 정부는 그 강압에 굴복하여 협정서 체결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1904 8 22일이었다. 그 협정에 따라 재정고문에 일본인 메가다가, 외교고문에는 미국인 스티븐스가 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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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협약 이후 전국 각지에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만들어졌고, 군산에도 일진회 군산지부가 생겼는데, 군산지부의 회장을 백종두라는 친일파가 맡았단다. 백종두는 아전관리 출신으로 양반이 되고 싶어 안달인 사람이고, 일제가 조선에 들어온 것을 기회라고 생각했단다.  일진회의 조직은 점점 확대되었고, 앞서 이야기했던 장칠문도 일진회 간부가 되었어. 이런 친일 단체 일진회를 대항하기 위해 이준이라는 사람이 헌정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는구나.


3.

친일파만 있는 것은 아니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선 지식인들도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송수익이라는 사람이란다. 송수익은 지역 주민들이 궁금한 점을 물어보면 답변해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같이 해결해 주려고 노력했단다. 얼마 전까지 집에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쳐서 송수익 선생님이라고들 불렀단다. 그런데 학교는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어. 송수식은 농민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땅을 팔려는 것을 알고 만류하기도 했단다. 그런데 이 일로 송수익은 일본 헌병대에게 끌려가고 말았단다. 다행히 송씨 문중의 힘으로 풀려나게 되었단다. 말 한마디 했다고 헌병대 끌려가는 세상이 되었단다. 이 때가 을사늑약이 맺어지기 전인데, 벌써 이렇게 일본 헌병이 판치는 세상이었으니, 우리나라가 일제에 점령당한 것은 36년이 아니라 40년이 훌쩍 넘은 긴 세월이구나..

….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군대가 군산으로 쏟아져 들어왔대. 더 많은 일본 사람들이 불법으로 우리나라에 정착을 하고 있는 것이지.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결국 일은 벌어졌단다. 을사오적에 의해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우리나라 외교권은 완전히 일본에 넘어갔어. 그런데 을사늑약이 맺어진 것도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었단다. 나중에 장지연이 <황성신문> <시일야방성대곡>을 써서 백성들도 알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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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그런데 마침내 을사보호조약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것이다.

비분에 찬 그 글을 먼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의 가슴을 쳤고, 그런 사람들의 입을 통해 글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동양 삼국의 평화를 솔선주선하기로 나선 이토가 천만 꿈밖에 어찌 오조약을 내놓았는가. 개가죽을 쓴 우리 대신들은 일신의 영달만 위해 황제폐하와 2천만 동포를 배반하고 4천년 강토를 외인에게 주었도다. 슬프도다! 우리 2천만 동포여, 살아야 할거나 죽어야 할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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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민영환, 조병세, 이명재 등은 자결을 하였고, 최익현, 임병찬 등은 의병을 일으켰단다. 송수익도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친구 신세호를 찾아갔단다. 그리고 의병 활동을 도모하려고 했는데, 신세호는 의병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러면서 임병서라는 사람을 소개해 주었단다. 송수익은 임병서와 함께 의병을 조직하기로 했어. 지삼출 등 많은 농민들도 의병을 하겠다고 자진했단다. 을사늑약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많이 생겨났단다. 썩어빠진 관리들이 외교권을 넘겨주었지만, 우리 백성들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어. 저항으로 그것을 보여준 것이란다.

여기까지 1권의 대략적인 이야기란다. 두 번째 읽는 것이지만, 거의 처음 읽는 기분이구나. 이 시절의 책을 읽다 보면 분노지수가 올라가는데, 좀 진정하면서 하면서 읽어야겠구나. 조정래 님의 <아리랑>은 쭉 12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주말마다 한 권씩 읽으려고 한단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겠지만, 두 번째 읽는 거니까그리고 주말에 읽어야 좀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녘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책의 끝 문장: 구성지고 눈물겹고 서럽고 사무치고 한스러운 가락을 이끌며 상여는 붉은 벌판끝으로 느리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지삼출이나 감골댁이 보부상에 대해 똑같이 거부감을 나타내는 데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그때 갑오년에 수많은 농민들이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해서 들고일어났고, 공주까지 쳐올라간 농민군들이 신식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싸우다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농민군들은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섬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먼저 산으로 들어간 농민군들로부터 뒤쫓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해서 수없이 많은 농민군들을 죽이게 한 것이 바로 보부상들이었다.
등짐을 하고 산길을 따라 이쪽 지방과 저쪽 지방을 문지방 넘듯 넘나드는 보부상들은 산길을 샅샅이 아는데다가, 산속의 정보 또한 신속하게 잘 탐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산을 타는 발까지 포수 뺨치게 빨라서 그런 길잡이로는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 P18

"재산을 더 모을라고 허지 마라. 땅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은 결국 농부들의 살을 깎고 피를 빠는 일이다. 세상에 그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느냐. 재산을 탐하면 마음이 썩는다. 마음이 썩으면 죄짓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죄짓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가 어찌 바르게 살 수 있겠느냐. 내가 남기는 전답을 주색잡기 하지 않고 간수만 제대로 하면 네 권속 입고 먹는 것은 족하다. 재산을 탐하지 말고 바르게 살도록 마음을 가꾸기에 게을리 하지 마라. 그것이 바른 사람의 길이고, 옳은 양반의 길이다."
그 탄식을 꾸짖기라도 하듯 쟁쟁히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 P225

임금을 호위하던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할복자결을 했다.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가 자결했다. 전 참판 이명재가 자결했다.
그 연이은 자결의 소문은 겨울바람을 타고 산지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배를 갈라 붉은 피 쏟으며 죽었다는 그 소문들은 그전의 어떤 소문들보다도 뜨겁고 거센 파도가 되어 사람이 사는 곳이면 퍼지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 소문들은 단순히 나라 잃은 비분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민영환이 흘린 피는 방을 넘치고 마루를 흘러 토방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그 자리에 푸르른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했고, 조병세가 목숨을 끊자 그가 기르던 난초들이 일제히 꽃을 피웠다고 하는가 하면, 이명재가 숨을 거두면서 뜰의 매화나무가 사흘 밤을 통곡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충절을 상징하는 매난국죽에 근거를 둔 이야기들이었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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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

화가 이우환은 어릴 적 어머니와의 대화를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한다. 소년 시절 그는 쌀을 씻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매일 똑 같은 쌀 씻기를 하면서 어떻게 즐거우실 수 있냐고.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똑 같은 쌀 씻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그 일을 할 때마다 매일 다르게 느낀다고. 어떤 때는 시원한 물이 생기를 주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흥이 오르기도 한다고. 쌀과 물과 손이 하나가 되어 잘 움직일 때가 있고, 아닐 때도 있어 매일 쌀 씻는 것이 항상 새롭다고. 어린 후환의 눈에 매일같이 반복되는 어머니의 쌀 씻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쌀 씻기는 매일, 매 순간 전혀 새롭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행위였다. 이를 우리는 예술적 행위라고 부른다.


(31)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 있다. 평생에 이뤄지는 단 한 번의 만남, 단 한 번뿐인 일. 이 말은 차 마시는 행위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다도(茶道)에서 쓰인다. 어제도 차를 마셨고 엊그제 역시 차를 마셨지만, 차를 마시는 지금 이 순간은 평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일임을 가슴에 새겨 차 한 모금을 아주 새롭게 음미한다는 마음의 자세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한 인간이 지닌 지성의 문제로, 누군가가 가르쳐주고 알려준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이 내면에 지닌 지성으로 해내는 일이다. 우리의 일상이, 삶이 아무리 매일 반복되더라도 매 순간은 진실로 새로운 순간이다. 우리가 지성을 발휘해 그 진실을 매일 매 순간 의식하려 노력한다면, 무미건조하게 여기던 것들 것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의미로,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의 평범한 삶 속에 듣도 보도 못한 색과 형과 향을 지닌 꽃이 피어날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 예술이 피어날지 모른다.


(51)

삶과 예술, 예술과 삶. 이 둘은 너무나도 닮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술은 우주 어딘가에 지구로 떨어진 출처가 불분명한 운석 같은 것이 아니다. 예술은 분명히 인간의 삶 속에서 나온 것이다. 엄마의 배 속에서 나온 아기가 엄마를 빼닮듯, 인간의 삶 속에서 나온 예술이 인간과 삶을 쏙 빼닮지 않을 수는 없다. 아이가 엄마의 정수를 담고 있듯, 예술은 인간과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


(62)

그래서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정말 <모나리자>를 봤는지, <모나리자>를 누가 언제 그렸는지, 그림을 그린 화가는 어떻게 살았는지, 화가가 살던 시대상은 어땠는지, 그를 후원해 준 사람은 누구이고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 ‘<모나리자>라는 작품에서 파생되는 나오는지식을 알고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다. <모나리자>라는 그림 자체, 그 이미지 자체, 그 물리적 대상 자체를 진심으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기 위해 노력했는지 묻는 것이다. 예술작품 하나를 몸으로 만나 충분한 시간을 들여 진심을 다해 보고 듣고 감각하며 생각하고 느끼는 체험을 했는가 묻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 체험의 과정 속에서 당신만의 독창적인 의미가 내면에서 샘솟듯, 꽃피듯 생성되었다면, 그 작품은 평생 당신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당신 스스로 창조한 의미와 함께 생생히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은 당신의 기억 속에 생생히, 또렷이 남아 있는 본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의 정신을,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구성할 것이다.


(70)

50대에 그의 내면을 물감으로 물질화한 이 자화상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한껏 찌푸린 미간과 꼿꼿이 당겨 세운 하관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삶의 난관에 당당히 맞서겠다는 의지가 엿보임과 동시에, 검고 큰 눈동자에서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감지되어 때문이다. 중년이 되어 맞닥뜨린 어떤 난관의 거친 파도 앞에서 렘브란트는 전의를 불태우려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그는 그런 내면의 심정을 숨김없이 마주했고, 속속들이 자화상에 밝히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50여 년을 산 한 화가의 자아 성찰의 힘과 진정성을 발견한다.


(94)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무지한 백지상태로 태어난다. 누군가는 삶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영영 자신에 대해 정확히 모를 수도 있다. 다른 누군가는 내가 누구인지알기 위해 스스로 번데기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 번데기 속에서 누군가는 자기만의 해답을 발견해 찢고 나와 나비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실패하기도 한다. 물론, 거듭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는다면 끝내 나비가 될 수도 있다. 애벌레가 번데기 껍질을 까고 나와 나비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이는 온전히 애벌레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다. 지금 우리는 그 과정 어디쯤에 있을까?


(112)

그렇다. 이 모든 행위는 사회적으로 비생산적이고 쓸모없이 보이는 것이다. 나태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적으로 비생산적이고 쓸모없이 보이는 행위에 골몰할 힘을 얻게 된다. 내 눈을 넘어 오감을 강렬하게 사로잡으며 뒤흔드는 작품을 만났을 때, 거대한 나태함으로 그것을 영혼이 흠뻑 젖을 때까지 감각하고 생각하고 느낄 한없는 시간의 여유를 창조할 수 있다. 그 작품과 대화를 나눈 뒤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 나태해지는 시간의 공터를 습관처럼 만들어놓을 수 있다면, 당신을 흔들었던 그 작품은 당신의 삶과 맞물리며 어느 날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나태함으로 그 작품을 마음속으로 붙잡아 한껏 곱씹어 보며 진정 내 영혼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나태한 시간이 모여 당신의 기억을 구성하고, 나아가 당신의 내면, 당신만의 독창적인 정체성을 구성할 것이다.


(148)

예술가가 예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언가에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부터 예술이라는 삶의 꽃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우리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겐 무언가에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하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대량생산된 물감으로 오밀조밀 칠해진 화면을 보며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를 느낄 수 있고, 버려진 나뭇조각을 이리저리 그러모아 만든 독특한 구조물을 보며 색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162)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라는 평범한 이가 바다를 매 순간 낯설게 보고자 노력하며 그것의 숨겨진 미를 매 순간 새롭게 발견하고 감동하는 일상. 그 낯설게 보는 눈으로 미술관에 가 작품의 숨겨진 미를 새롭게 발견하며 미적, 지적 쾌감을 느끼는 일상. 그 눈으로 내 곁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미를 새록새록 발견하는 기쁨. 그 눈으로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새롭게 보고 항상 감사히 여기는 풍요. 그 눈으로 세상에 놓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며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놀라운 마법.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마법 같은 일상과 삶이 먼 곳에 있는 것 같지 않다. 낯설게 보고자 하면, 모든 것에서 그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샘솟아 나는 마법이, 예술이 펼쳐지니 말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돌을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237)

예술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이 예술가가 아닌 이에게 무슨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건 오직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체험뿐이라고. 내가 하는 체험만이 지금과 내일의 나를 빚는 재료가 되는 것이라고.


(251)

미술작품에는 정답이 없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작품이 어떤 것도 말해주기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품 스스로 이 작품은 이런저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술작품이 지닌 이런 특징을 일상의 관성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것은 말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이고, 저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 준다.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면 되는지 즉각적으로 알려준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느끼면 되는지까지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런 의사소통 방식은 참 쉽고 편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스스로 정신적 활동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고, 누군가가 알려준 대로 생각하고 느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거나 혹은 떠먹여 주기까지 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먹는 것과 같다.


(261)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그런 예술을 창안해 낸 우리 인간의 삶 역시 정답이 없다. 예술을 즐기기 위해 나에게 예술이 무엇인지를 먼저 스스로 정의해야 하듯, 삶을 즐기기 위해 나에게 삶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해야 한다. 당연히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가르쳐둔다 한들 자신이 몸소 체험을 통해 깨닫지 않는 이상 삶에 깊이 스며들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만의 삶의 정의를 체험하고 감각하며, 그 속에서 숱한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영감을 얻고 깨닫는 과정을 반복해 가며 삶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의를 찾아나가야 한다. 예술가를 자기 나름의 예술의 정의를 정립해 자기만의 독창적인 예술작품을 창조하듯, 삶을 사는 우리도 자기 나름의 삶의 정의를 정립해 자기만의 독창적인 을 창조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삶은 예술과 하나가 된다. 인간은 삶과 다르지 않은 예술을 삶 속에서 낳았다.


(267)

삶에서 하는 일 자체를 예술로 만든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서 자신만의 수단과 통찰로 진진하고 순수한 나만의 작품을 시도했다고 말하는 세잔의 정신을 본다. 내가 미술관에 가서 만난 어떤 작품. 그 작품만이 지닌 고유한 형식과 재료, 그만의 독특한 색채와 형태, 그만의 오묘한 에너지와 개성, 그만의 비범한 철학과 주장을 내 몸과 정신으로 직접 파헤쳐 마주했을 때 느끼는 희열. 그러니까 세상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그 작가만의 독창적인 미학과 감각을 외부로 표현해 낸 작품을 만났을 때 맞이하는 찬란한 기쁨. 그 감정과 동일한 것을 나는 일상에, 도처에 있는 이들에게서도 본다. 그 감정과 동일한 것을 나는 일상에, 도처에 있는 이들에게서도 본다. 그러니까 그들 모두 예술가다.


(304)

한 차례 자발적 일탈을 감행했음에도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여전히 흐릿하다면, 두 번째 자발적 일탈을 감행하면 된다. 그 후에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여전히 불투명하다면, 세 번째 자발적 일탈을 감행하면 된다. 화랑에서 일을 하다, 불쑥 기숙학교에서 선생을 하다, 불쑥 광산으로 간 빈센트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그 모든 불확실한 일탈의 감행이 모여 건강한 방황으로 정의되리라 믿는다. 그 일탈의 체험과 기억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신의 정체가 점점 밝고 분명해지리라. 수많은 시도 끝에 점점 초점이 또렷해지는 피사체처럼.


(321)

예술인가 무엇인가?” 그래서 이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삶에서 행한 어떤 행위가 행위자에게 정신적 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작업. 그것이 예술이다.” 겉으로 예술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가 실제로 정신적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정말 그 행위를 왜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정신적 만족을 충성하게 누리는 예술이 되기 위한 해답은 결코 우리 바깥에 있지 않다. 우리 안에 있다. 자기 내면에서 울리는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행하는 삶을 창조해 가야 한다. 그 어떤 외부의 압력과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 자기 내면에서부터 끝없이 선명하게 울려오는 나만의 그림 그리기를 평생 흔들림 없이 행한 세잔처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진정으로 행하는 삶. 이런 삶은 필연적으로 정신적 만족을 동반한다. 그렇게 정신적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사는 이를 두고 우리는 예술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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