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통권 148호 - 2016년 5월~6월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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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또 한번의 선거와 정치혁명]

0.76%.

지난 4월에 있었던 20대 국회의원 녹색당 정당 지지율이다. 내심 3%의 득표율로 원내 진출을 기대했으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성 정당의 높고 높은 벽이 엄청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3%까지는 어렵더라도 1%는 쉽게 넘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벽이다. 여소야대라는 보기 드문 선거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의 예상 외의 적은 득표율과 녹색당의 원내 진출 실패로 인해 그리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다. 기성 정당들은 더욱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선거가 아닐까 생각했다. 대인배처럼 작은 정당의 권리를 알아주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있을까? 다른 나라처럼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원 자리를 주는 제도가 과연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을까? 이번 호에는 녹색당으로 종로에 출마했던 하승수 녹색당 대표가 쓴 정치혁명에 대한이 글이 있었다. 현재 다른 나라의 선거제도를 봤을 때, 그나마 대의제 민주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제도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생각한다.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석을 차지하는 것... 지역구 의원으로 국회의석을 일부 차지하고, 각 정당은 정당 지지율에서 부족한 만큼 비례대표제의 수를 받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정당지지율과 국회의석 수 비율을 맞추는 그런 제도다. 만일 지역구로 당선된 인원수가 정당지지율보다 많게 되면, 그만큼은 보상해 주는 제도. 그래서 간혹 전체 국회의원수가 의원 좌석 수보다 많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상당히 합리적인 제도이지만우리나라에는 그것을 도입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 되면 손해를 보는 거대 정당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깝다. 그렇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되면, 작은 정당들의 원내 진입하는데 더 쉬워질 텐데

그러면 작은 정당들이 원내 진입하면 뭐가 달라질까? 그것은 뉴질랜드의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처럼 소선거구제를 가지고 있다가 제법 최근인 1990년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했다고 하고, 그 이후 두번째 선거에서 벌써 많은 좋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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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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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화를 보니, 부러우면서도 우리나라도 희망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게 된다. 일부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도 있고, 시민들의 여론이 형성이 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또 쉽게 희망을 품는다. 그렇기 위해서는 이런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정당에 힘을 실어주고, 표를 주어 연동형 비례대표 제도를 대세로 만들면, 결국 바꿀 수밖에 없지 않을까? 희망고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의 붕괴]

이번 녹색평론의 부제는 '대학의 붕괴'. 언제부터인가 대학은 취업을 위한 학원 같은 곳으로 되어버렸다. 대학의 추구하는 가치관은 무엇일까? 대학의 평가에 취업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우리나라 대학은 취업을 위한 곳으로 바뀌었고, 그것에 필요 없는 학과는 없어지고, 그것에 필요 없는 강좌는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무한 경쟁을 표방하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이외의 가치는 중요시 하지 않는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대학들은 대학평가 순위의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보다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그렇다고 대학이나 학생들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그 시스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대학의 문제가 우리나라에만 해당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다른 나라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녹색평론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맹주가 된 미국과 일본의 대학 문제점을 적은 글들도 실렸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유명 대학은 강의를 영어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영어로 강의를 하면 대학평가를 좋게 받기 때문이란다. 대학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로 위해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에 대한 단점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실력은 우수하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으로 교수 자격을 제한하게 되면, 그만큼 인력풀이 축소되는 것이다. 정말 이 한심한 제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음이 답답하다.

그런데, 자존심이 세다고 하는 일본에서도 그렇게 대학 강의를 영어를 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약간은 예상치 못했던 사실이다.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일본의 두 지식인이 토론을 하는데그들도 영어로 대학 강의를 하는 것은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 발췌글처럼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에 대한 부작용을 이야기하는데, 공감이 갔다. 아래 글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일본’을 ‘우리나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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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가 학문연구라는 고도의 의론의 장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일본어도 최첨단의 용어를 갖지 못하고 뒤떨어진 언어로 전락합니다일본어가 그렇게 열화된다면 그것이 또 일본 국민의 우민화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한편으로, 표면상으로 영어를 매끄럽게 말하는 엘리트들도 모어(母語)에 입각한 깊은 사고력이라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우수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결국, 일본 전체가 우민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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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에 오늘날 대학의 문제점에 대한 글이 많이 실려 있었다. 많은 글들에 공감이 갔다. 아래 발췌글들은 곧 나의 생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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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대학은 운영하는 대학본부는 대학의 운영 목표를 학문 탐구와 지적 성숙을 이끄는 교육에 두지 않는다그들의 관심은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관리하는 것이다따라서 대학의 관리체제는 기업의 관리체제와 같다기업의 경영 결과가 재무제표라는 숫자로 나타나듯이 대학의 운영 결과는 대학의 순위로 나타난다가령 순위평가에서 7위인 대학은 6위인 대학에 비해 좋지 않은 대학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대학의 모든 노력은 순위를 올리기 위한 것이 되고순위평가에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부문은 대학 운영진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정부 역시 대학을 숫자로 관리하며, 그 숫자에 의해 재정지원 여부와 그 규모를 결정한다대학정보공시라는 제도는 겉으로는 각 대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이지만이 정보 공시에 나와 있는 정보는 그 학교에서 무슨 연구를 하며 어떤 교육을 받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대학에 대한 정보든 숫자이다학생의 수, 교수의 수, 논문 편수, 예산 규모, 유학생 수 등이 공시의 내용이며이러한 숫자를 나열하면 대학의 면모를 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숫자가 지배하는 대학, 돈이 지배하는 대학에 대학의 본령인 학문과 교육은 없다대학은 이미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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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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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이 급진적 변화란 무엇인가사실상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초,중등교육은 물론 대학에서도 인문학과 예술 교육이 축소되고 있다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붙들린 정책결정자들의 눈에는 인문학이나 예술은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한 것으로 비쳐지고 있을 뿐이다그리하고 그것들은 학교의 교과과정에서그리고 부모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빠른 속도로 설 자리를 잃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과학과 사회과학이 갖고 있는 인문학적 측면-상상력과 창조성에 관계된 요소 및 엄격한 비판적 사고-도 단기적인 이익추구에 혈안이 된 국가정책 때문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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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세계시민이 되자면 정말 인문학이 필요한가세계시민이 되자면 우선 많은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지만그러한 지식은 인문적 교육 없이도 획득할 수 있다그러나 책임 있는 시민이 되자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즉 역사적 증거를 평가하고, 경제적 논리들을 사용하고그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며사회적 공정성 여부를 평가하고, 외국어를 말하며세계의 주요 분쟁지역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사실적 부분들에 관한 지식만을 얻는 데는 인문학과 연관된 지적 기술이 없이도 가능하다그러나 그 연관관계들의 어떻게 되는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실적 지식만을 갖는 것은 거의 무지만큼 나쁜 것이다왜냐하면 그런 경우학생들은 정치가들이나 문화적 선도자들이 제공하는 상투적인 것과 진실한 것 사이를진짜와 가짜 사이를 구분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세계 역사나 경제에 관한 이해가 지적으로 총명한 세계시민의 육성에 쓸모 있는 것이 되려면 인문적, 비판적 능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따라서 종교나 정의에 관한 철학적 이론에 대한 학습과 나란히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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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도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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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글쓰기]

녹색평론 몇 호 전부터 글쓰기에 대한 글이 연재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서인지, 녹색평론에서도 그것을 기획했던 것 같다. 그 연재가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시인이자 경희대 교수인 이문재라는 분이 쓰신 글인데,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으로 어르신 분들의 글쓰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가면 갈수록 세대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그런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로 글쓰기를 제안하고 있었다. 어르신들이 노년에 글쓰기를 많이 하고, 그 글들을 젊은 세대와 공유하면 세대간 양극화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글쓰기는 모든 세대 많은 사람들이 하면 좋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글들을 공유하고 그런 글들이 여론을 만들어내고그렇게 되면 오늘날 정치가 유권자를 무시하는 행태도 글쓰기를 통해서 여러 사람과 공유하게 되면 그들도 무시 못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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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우리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회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의 저자로 거듭난다면 현실정치가 지금과 같은 파행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현실정치가 유권자를 이토록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자율적 인간, 그리고 자율적 인간이 형성하는 공동체가 가져야 할 기본 능력이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다재차 강조하지만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글쓰기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분노와 절망을 글로 써내고, 꿈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위에 인용한 글의 저자가 말했듯이 소망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그라민은행을 설립하고 '소셜픽션'을 창안한 무하마드 유누스가 말했다. "꿈은 함께 꿀 때 더 빨리, 더 크게 이뤄진다." 사회적 글쓰기는 함께 꾸는 꿈이다. 집단지성이고 소셜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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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에 실렸던 글쓰기에 대한 연재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된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 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 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 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 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 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 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 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 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도, 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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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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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참고] 스포일러 포함/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법은 정의인가?]

이번에 읽은 책은 여행 길에 읽으려고 집어 든 책이다. 여행길에는 재미있는 소설이 제격이니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은 늘 재미는 보장하니까 말이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이 소설 또한 재미있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 나서는 생각거리를 받았다. 일본의 사회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우리나라에도 똑같은 상황이다. 요즘 밤거리를 다니질 못할 정도로 잔인한 범죄가 많이 일어난다. 특히 묻지마 범죄와 같은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사건들. 더욱이 어린아이나 여자들, , 약자를 노리는 범죄들... 뉴스 보기가 두려울 정도다. 이 잔인한 범죄에 여론은 가해자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지만, 여론의 기대와 달리 법은 너무나 가볍게 판결이 나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은 또다시 격분하게 된다. 특히 미성년자가 가해자인 경우는 더욱 형벌은 가벼워진다. 이런 판결에 과연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은 고려된 것인가? 사람들은 판사의 가족이 피해자가 되어봐야 한다는 격한 말도 쏟아낸다. 이번에 읽은 <방황하는 칼날>이라는 소설은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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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법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미성년인 경우,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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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피해자는 고려하지 않는 법. 그럼, 그 법은 정의인가? 항상 옳은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법은 늘 바뀌기 때문이다. 그럼, 경찰은? 절대진리가 아닌 늘 변하는 법을 수호하고 있다. 경찰은 법을 지키는 것이 맞는가경찰은 선량한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 복수의 시작]

아내와 사별하고 고등학생인 딸 에마와 단둘이 살아가는 나가미네. 그에게 에마의 살아가는 이유였고, 행복의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날 에마가 친구들과 불꽃축제를 갔다가 집에 오지 않았다. 실종. 앞이 캄캄해진... 나가미네... 그런데, 며칠 뒤 인근 강에서 에마가 시신을 발견되었다. 분노... 돌이킬 수 없는...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고,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딸의 전화로 그에게 누군가 전화를 했다. 목소리를 변조되어 있었지만자신의 딸을 죽인 이는 아쓰야와 가이지라는 10대 소년들이라고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아쓰야의 집에 가면 증거를 찾을 수 있다면서, 집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나가미네는 경찰에 이야기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혼자 가보았다. 전화 속 목소리가 알려준 곳에 가니 정말 원룸이 있었고, 그가 이야기한대로 숨겨진 열쇠를 찾을 수 있어 그곳을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충격 그 자체. 수많은 성폭행 동영상 속에 에마가 성폭행 당하는 장면이 그대로 녹화되어 있었다. 범인들이 에마에게 마약을 투여하는 장면도 있고그 이후 에마가 정신을 잃는 장면들이 그대로 녹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마의 옷도 발견하였다. 충격보다 분노가 앞섰고, 그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

그때 아쓰야가 집에 들어왔다. 그 비디오 속 소년이 현실 속에 나타난 거다. 나가미네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아닌 어떤 사람이라도 그랬을 거다. 그는 칼로 아쓰야를 마구 찔렀다. 그리고 아쓰야는 죽기 전에 가이지가 나가노에 있는 별장에 갔다고 이야기했다. 아쓰야를 죽여도 그는 아직 분노를 삭힐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가야지 마저 죽이기로 했다. 그 후에 자수할 계획이었다. 그것만이 이유 없이 죽은 에마의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경찰에게 이야기하면 가이지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는 못하지...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나가미네를 옹호하게 되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예전에 취미 때문에 구입했던 사냥총을 가지고 나가노로 향했다. 아쓰야는 친구에 의해 발견되었고, 아쓰야의 집에는 나가미네의 지문이 잔득 묻어 있어서 경찰은 곧 아쓰야를 죽인 범인 나가미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보자]

나가미네에게 전화를 해서 범인을 알려준 사람은 마코토라는 소년으로 범인들의 친구였다. 그는 아쓰야, 가이지가 에마를 납치하는 현장에 같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코토의 아버지의 차를 이용해서 에마를 납치했었다. 마코토는 그들과 어울리긴 했지만그들이 사람들을 납치하고 성폭행하는 것에 대해 껄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도 아빠의 전화를 받고,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며칠 뒤 아쓰야가 당황한 얼굴로 찾아와서 마코토의 아버지의 차를 다시 빌려달라고 했고,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날, 자신들이 납치한 여자애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충격. 마코토는 자신도 공범으로 몰릴까 걱정했지만, 아쓰야가 그에게 협박을 해서 경찰에게 알리지도 못했다.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이 주운 죽은 여자애의 핸드폰에 저장된 그의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그 일이 있고 아쓰야가 죽은 채 발견이 되었고, 그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자신의 아빠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마코토의 아빠는 그를 숨기면서도 자신의 아들이 감방에 가지 않게 하려고, 마코토에게 있었던 일을 그에게 유리하게 윤색시킨 다음 경찰에 자수하도록 시켰다.

이제 경찰은 사전의 내막을 모두 알게 되었다. 아쓰야, 가이지가 아무런 죄 없는 에마를 납치해서 성폭행을 하고마약주사를 투여했는데, 그 약물반응으로 에마가 죽은 것이고, 에마의 아빠 나가미네가 어찌저찌 해서 범인을 알게 되어 아쓰야를 죽였다는 것. 나가미네는 이젠 피해자에서 살인용의자의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경찰 내부에서도 나가미네의 그런 복수극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그리고 법이 미성년자의 가해자에게 어떤 판결을 할 것인지 예상을 하니까이 사건은 큰 이슈가 되어 방송을 타고, 나가미네 얼굴은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범죄에 대한 가벼운 형벌에 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도와야하나, 신고해야 하나]

나가노에 그렇게 팬션이 많은 줄 몰랐다. 나가미네는 가발도 쓰고 수염도 기르고 선글라스를 쓰고, 변장한 상태로 나가노의 팬션들을 돌아다녔다. 그도 그곳에 한 팬션을 얻어서 생활했다. 그곳은 와카코라는 여자와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팬션이었다. 와카코라는 여인도 아픈 과거가 있었다. 자신의 방심으로 세 살 짜리 아들을 사고로 잃었고, 그로 인해 남편과 이혼까지 하게 된 아픈 과거가 있었다. 와카코가 죽은 아들의 사진 보정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나가미네는 자신이 잘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와카코는 나가미네가 바로 뉴스에서 봤던 딸을 죽인 범인을 살해한 용의자란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가 외출했을 때, 그의 방에서 그의 노트북에서 그의 딸이 어떻게 폭행당했는지 생생하게 보았다. 그 이후, 와카코는 갈등에 빠졌다. 신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그녀를 도와주고, 그의 모습을 보면 심성이 착한 사람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식이 죽었을 때의 심정이 어떤지 와카코 또한 잘 아니까 말이다. 와카코는 나가미네와 단둘이 있을 때 이야기했다. 당신이 뉴스에서 본 그 사람이란 걸 안다고.... 하지만 도와주고 싶다고. 나가미네는 와카코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녀를 믿기로 했다. 펜션을 떠난 그에게 은신처도 제공했고, 인근의 펜션의 손님의 사진들을 찍어서 그에게 주기도 하는 등 그를 도와주었다. 나가미네... 좌절을 느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가이지를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의문의 전화가 또 왔다. 가이지가 묵고 있는 펜션을 알려준 것이다. 망하고 폐허가 된 펜션에 묵고 있다고 했다. 나가미네는 준비를 하고 그곳을 향하기로 했다. 근처까지 와카코가 태워주기로 했고사실 와카코는 그곳에 가서 나가미네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만 멈추고, 자수를 하라고... 왠지 자신이 이야기하면 들어줄 것 같았다.

 

[경찰은 법을 지키는가? 시민을 지키는가?] 

경찰도 가이지가 나가노에 숨어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마코토는 더 급해졌다. 가이지가 경찰에 잡히고 나면, 얼마 안 있다 풀려나게 되고... 그러면 자신은 배신당했다고 그에게 어떤 짓을 당할지 몰랐다. 이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나가미네가 가이지를 죽이는 것 뿐이다. 가이지가 마코토에게 전화를 걸어 왔기 때문에 마코토는 가이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마코토는 다시 나가미네에게 전화를 해서 가이지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경찰은 가이지가 묵고 있는 펜션을 알아내고 그곳에 도착했지만, 가이지는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 가이지의 협박으로 같이 있던 소녀만 있었다. 경찰은 마코토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이지의 행적을 알 수 있었다. 가이지는 또 마코토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마코토는 가이지와 지하철 역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경찰은 그곳으로 총출동을 했다. 마코토는 이제 더 시급해졌다. 빨리 나가미네에게 연락을 주어야 하는데, 경찰들이 그의 주변을 계속 감시하고 있어서 방법이 없었다...

한편, 나가미네는 또다시 목소리를 변장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가이지가 나타나는 장소와 시각을 알려줬다. 가이지는 마코토와 약속한 정확한 시간에 나타났다. 그때 총을 꺼내든 나가미네도 출현. 가이지를 향해 조준. 그때…. 나가미네 씨를 부르는 목소리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와카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나가미네는 마지막 순간 흔들렸다. 그때 들린 총성... 경찰이 쏜 총. 나가미네는 그 총을 맞고 죽었고, 가이지는 경찰에 잡혔다. . 또 하나의 살인이 막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나가미네가 딸의 복수를 하지 못해 억울하다고 해야 하나. 어떤 생각을 가져야 맞는가? 혼란스럽다.

아참, 마코토가 어떻게 나가미네에게 가이지의 마지막 약속 장소를 알려주었을까? 사실 그 약속 장소를 알려준 것은 마코토가 아니다. 경찰이었다. 경찰 중에서도 현재의 법이 잘못되었고, 나가미네가 가이지를 죽였으면 바랬던 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경찰은 경찰이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짓밟아도 되느냐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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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절대적으로 옳다면 왜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을까? 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네.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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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 법의 가벼움을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무서운 세상이다. 무엇인가 잘못된 시스템… 누군가는 이 시스템을 고치려고 노력을 하고 있을까?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절대적으로 옳다면 왜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을까? 법은 결코 완벽하지 않네.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오히려 법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미성년인 경우,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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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김병준 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공부하는 대통령]

또 오월이다. 어느덧 노무현 대통령님이 가신지도 7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 속의 유일한 대통령이신 노무현 대통령님. 전부터 올해는 그분이 가신 즈음 주말에 봉하 마을 다시 찾아보려고 했었는데, 요즘 갑자기 바빠진 회사 일이 발목을 잡았다. 오월이 아니더라도 쫌 한가해지면 다시 찾아가보고 싶다. 페이스북에서 자주 사진과 영상으로 만나서 그런지, 아직도 노무현 대통령님이 우리들 곁에 계신다는 느낌이 든다. 오월이면 나 나름대로 노무현 대통령님을 기린다. 그 중에 한가지로 노무현 대통령님에 관한 책을 읽곤 한다. 이번에 읽은 책은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라는 책이다. 이 책은 2010년에 출간된 책으로 구입한 지는 꽤 된 책인데, 책 소개를 잠깐 읽어봤을 때 쉽지 않은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책 들기를 몇 번을 망설였던 책이다. 누군가로부터 책을 추천 받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책에서는 무려 10권을 책을 소개해주고 있다. 그것도 모두 노무현 대통령님이 추천하는 책들이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님이 TV에 출현하시면서노무현 대통령님 책상 위에 있는 책들을 보고 사서 읽은 적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님, 늘 공부하는 대통령이셨다. 그리고 책으로부터 답을 찾으시려고 노력을 했고... 대통령을 그만두시고 나서도,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공부를 하셨다. 그래서 여러 참모들과 모여서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책에 대한 내용으로 토론도 하셨다. 그런데, 열등감으로 가득 찬 다음 권력이 그를 못살게 굴어서 그 좋아하시는 책도 읽지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하는 상태까지 되셨다가 그만.... 정말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그를 그렇게 만든 이들은 그 밖에도 엄청난 잘못을 했는데, 잘 살고 있다는 것에, 분노를 느낄 때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님이 서거하시고 나서, 2009년에 오마이뉴스에서 ‘노무현 대통령님이 읽은 책들’이라는 강독회를 연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총 10권에 대해 강독회를 했고각각의 책들에 대해서 노무현 대통령님의 참모들과 전문가들이 강의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 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이 이 책이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사회자, 강사, 청중 등의 말을 그대로 구어체로 실려 있었다. 생각보다 책은 어렵지는 않았다. 예전에 다른 책의 독서일기를 쓰면서 노무현 대통령님의 책상을 챕쳐한 사진을 같이 첨부한 적이 있었다. 그 사진을 찾아보니, 책상에 이 책에서 소개한 책도 있다. 다시 보니 또 반갑다.

 



 

 

[진보주의자]

그 사람이 읽는 책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들 한다. 나도 이 말에 동감한다. 나도 내가 지금껏 읽은 책들이 오늘날 나의 생각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님을 처음 좋아하게 된 것도 책을 통해서였으니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님이 생전에 읽었던 책들그 책들에 대한 강사들의 강의를 읽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님이 정말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셨다는 알 수 있었다. 전세계의 흐름으로 굳어진 신자유의주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셨고, 진정한 진보라 함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셨고, 양극화, 성장과 분배에 관한 문제도 고민을 하셨다. 뿐만 아니라, 환경에 대한 고민도 하셨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가진 것은 진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진보의 미래>라는 책도 직접 집필하고 계셨고 말이다. 그 책을 결국 마무리하지 못하셨지만 말이다. 마무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간한 <진보의 미래>를 예전에 읽었다. 이번에 읽은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라는 책 속에 <진보의 미래>라는 책이 많이 언급되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따라 읽기]

이 책에서 소개한 10권의 책들은 내가 읽기에는 쉽지 않은 책들인 것 같다. 강사들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책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고그래서 노무현 대통령님도 생전이 이 책들을 가지고 참모들과 모여서 토론하고 그러셨겠지. 그래도 나중에 두어 권 정도는 도전해 보고 싶다. 이 책에서 각각의 책에 대한 강의가 잘 나와 있으니까, 이 강의의 도움을 받으면서 말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10권의 책에 대한 내용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소개에 간단하게 잘 정리해 주어서, 그것을 인용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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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국가의 역할》

노무현 대통령은 장하준 교수의 저술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다. 국가와 시장, 그리고 공동체 간의 관계 등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국가의 역할》은 물론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쾌도난마 한국경제》 등도 읽었다. 그러나 시종일관 ‘무릎을 쳐가며’ 재미있게 읽은 것 같지는 않다.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에 대해서는 의문과 질문을 던지고, 신자유주의와 시장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어느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는지, 또 어느 부분에 

서 고개를 저었을지 생각하며 이 책을 읽으면 더욱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_김병준 

 

2강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2008 12월 봉하마을을 방문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근본 프레임을 바꾸는 진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교과서를 꼭 쓰고 싶다”면서 바로 이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에서 그 작업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미 이 책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공부한 흔적이 역력했다. 봉하마을에 찾아갈 때마다 노 대통령의 책상 위에는 이 책이 놓여 있었다. “진보의 시대를 예비하고 보수주의 시대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미래 담론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처럼 노 대통령은 이 책을 통해 ‘진보의 시대, 보수의 시대’라는 화두를 고민했다. _김창호

 

3강 《슈퍼자본주의》 

2009 1월 말 한국금융연구원장에서 물러난 직후 노무현 대통령 쪽에서 연락이 왔다. 노 대통령이 책을 쓰려고 구상하고 계신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흔쾌히 승락했다. 도와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컸지만, 여쭤보고 싶은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계획했던 미팅은 검찰 수사 때문에 몇 차례 연기됐다가 끝내 노 대통령을 뵙지 못하게 됐다. 노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나서 가졌을 복잡한 심사는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자본주의적 이해가 민주주의의 시민적 요구를 압도하는 슈퍼자본주의에서 양극화의 근본 원인을 보았을 것이다. _이동걸 

 

4강 《더 플랜》 

한국 정치에서 ‘모든 시민의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뜻하는 공화주의적 감수성이 가장 뛰어난 정치인은 누구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퇴임 후 그의 문제의식은 한국의 어느 정치인보다 뛰어났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라는 엄청난 두 시대적 과제를 한 정치인이 모두 선도적으로 고민했다는 점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노 대통령은 “《더 플랜》이 평이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미국의 민주당과 진보진영의 철학과 비전, 원리와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진보의 미래》에 대한 책을 구상할 때도 《더 플랜》의 내용과 방식을 숙고할 필요가 있음을 피력했다. _안병진 

 

5강 《빈곤의 종말》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혹독하게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빈곤이 얼마나 개인을 억압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빈곤층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이들을 보호하고자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부단히 노력했다. 빈곤층을 돕는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국정과제회의도 여러 차례 열었다. 그러던 가운데 빈곤층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정밀한 현상 진단과 체계적인 개선 대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을 접하게 됐다. _박능후

 

6강 《유러피언 드림》

“요즘 《유러피언 드림》을 읽고 있는데, 정말 잘 쓴 책입니다. 내가 두 번을 읽었는데…… 밑줄을 치면서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꼭 한 번 읽어보세요. 2009 3월 《진보의 미래》 집필을 도우러 봉하마을에 내려갔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노 대통령은 이 책의 요약문을 처음 접한 뒤, ‘유러피언 드림을 진보적 관점에서 한국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해보라’고 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이 책을 읽으며 ‘삶의 질이 높은 진보의 나라’를 소망했다. _김성환

 

7강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임기 말인 2007년이 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고민이 깊어졌다. 자신이 추진했던 중요한 정책들이 계승되기를 원했다. 모든 정책들을 정책 소비자의 관점에서 정리하라고 했다. 정책 소비자가 이 정책으로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면 그것을 지켜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시민 권력의 개념과 맥을 같이 한다. 2007년 가을에 출간된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을 읽고서 노 대통령은 몹시 부러워했다. 청와대 수석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국에서는 정치에 대해 지식인 사회가 이렇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새로 선출될 총리를 위해 학자가 책까지 만들어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 아닌가? 그런 풍토가 부럽다”고 말했다. _ 김용익 

 

8강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노무현 전 대통령은 리더십에 관심이 많았는데,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의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에 특히 주목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노 대통령 자신이 역사를 바꾸는 리더가 되고 싶어했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국민이기 때문에 국민을 학습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째, 노 대통령은 보수정치인과 기득권에 둘러싸인 시장 만능 국가에서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리더십에 관심이 많았다. 노 대통령은 ‘역사를 바꾸는 것은 인민’이라는 번스의 주장을 철저히 믿고 실천했던 분이다. _조기숙

 

9강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노무현 대통령이 유기농에 보인 관심은 ‘사람 사는 세상’에 소개된 영농법인 봉하마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노 대통령은 봉하마을에 내려간 첫 해에 이미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여기서 수확한 쌀을 참모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을 읽은 게 유기농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봉하마을의 공동체 운동을 함께 생각했을 것이다. 마을 만들기는 원래 노 대통령이 집권 중반 이후 구상하고 집행한 사업이다. 아바나의 유기농 역시 공동체 운동의 성격이 강하다. 봉하마을의 유기농에는 자연과 인간의 건강을 뛰어넘는 더 큰 정신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농업•자연•인간을 함께 살릴 방안을 추구했다. _고철환 

 

10강 《생각의 오류》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겨울에 《생각의 오류》를 처음 손에 잡았으나 퇴임 준비로 분주하던 터라 그때는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 같다. 2008년 봄 봉하마을에 갔을 때 이 책을 언급했는데 지식들이 보수언론들의 근거가 희박하고 사실과 다른 보도에 쉽게 빠져드는 까닭을 굉장히 궁금해했다. 노 대통령은 무엇보다 토머스 키다가 강조한 ‘회의주의자가 돼라’는 말에 호감을 가진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진정한 회의주의자는 미묘한 균형 유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회의적 사고를 기피하는 이유는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라는 대목에 크게 공감했다. _윤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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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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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참고] 스포일러 포함 /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한강의 대표작]

이번에 읽은 책은 한강의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이다.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세 편이 쭉 이어지는 소설. 몇 달 전에 한강의 <소년이 온다>라는 단 한 편의 소설을 읽고, 한강이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다른 작품도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한강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전에 읽은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도 제목으로 예측하지 못했던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채식주의자>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으로 놀라게 했다. 장면들 중에 다소 불편한 장면들도 있었지만, 소설은 군더더기 없는 빠른 전개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여성 작가 특유의 감수성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한강의 대표작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몽고반점>은 그 작품만으로 이상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우연찮게 이 책을 읽고 난 며칠 뒤, 한강이 이 소설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젠 누가 뭐라 해도 이 소설은 한강의 완벽한 대표작이 되었다. 맨부커상의 이 소설에 대한 심사평은 이랬다.

"다양하면서도 탁월한 작품들 사이에서 우리는 6개의 작품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초벌 번역본으로 본 진정으로 탁월한 6개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채식주의자>를 수상작으로 결정했습니다. 3명의 목소리로 서사되고, 3명의 다른 관점에서 쓰여진 이 소설은 간결하면서도 불안정하고, 아름답게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소설은 평범한 한 여성이 그녀를 가정에, 그리고 가족과 사회에 옭아매는 모든 관습과 추측을 거부하는 궤적을 따라갑니다. 서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날카로운 문체로 소설은 여주인공의 거부가 여주인공 스스로와 그녀를 둘러싼 주변인들에게 미치는 충격을 그려냅니다. 짧으면서도, 격렬하고, 충격적인 이 책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각인돼, 아마도 꿈에까지 남을 겁니다. 번역자인 데보라 스미스 씨는 완벽한 번역을 통해 소설 매 순간 순간의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러운 기묘한 혼합을 전달했습니다."

이 심사평이 이 소설을 가장 잘 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이 소설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 심사평을 읽고 나니 조금이나마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강의 맨부커 수상을 계기로 더 많은 우리나라 소설들이 다른 나라에 번역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엇다. 개인적으로는 <채식주의자>보다는 전에 읽은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이 훨씬 좋았다.

 

[채식주의자]

이 연작소설은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3편으로 되어 있고, 각각 다른 사람의 한 사람, 영혜를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영혜의 남편. 평범한 아내인 영혜. 결혼 5년차. 아내는 그동안 식성도 좋고, 내조도 잘하고, 남편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는, 아주 평범한 아내였다. 비록 뜨거운 사랑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들은 원만한 보통 부부였다. 그런데, 어느날 영혜는 무서운 꿈을 꾸고 난 이후, 아내 영혜는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악몽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못 먹고 못 자고, 영혜는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혼자 채식하는 것이 아니라, 식탁 위에 고기 반찬은커녕, 달걀, 우유도 올라오지 않아서 남편도 집에서는 고기는 냄새도 맡지 못했다. 영혜는 남편에게서 고기냄새가 난다면서 잠도 같이 자지 않았다. 남편의 회사 상사들과의 부부동반 식사 모임에서도 영혜로 하여금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남편은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서, 처가 식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처형의 집들이 때 모여 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사단이 일어났다. 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를 보고 장인어른 호통을 치며 먹으라고 했고, 그래도 먹지 않자 손찌검도 했지만, 요지부동... 강제로 먹이려다가 영혜는 그것을 뿌리치며, 부엌에서 칼을 들고 와서 울부짖으며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영혜에게 고기는 죽음보다 더 싫었던 것이다. 놀란 식구들을 영혜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몽고반점]

이번에는 영혜의 형부 이야기다. 형부의 직업은 비디오 아티스트다. 영혜는 손목에 그은 사고 이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다시 상태가 좋아져서 퇴원을 했지만, 여전히 고기는 먹지 않았다. 남편은 더 이상 이런 생활을 못한다며 영혜를 떠났다. 그 이후 영혜는 한동안 언니의 집에서 생활하다가 이젠 혼자 살고 있었다.

어쩌다가 아내와 몽고반점 이야기를 하다가 처제가 아직도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이상한 충동이 생겨났다. 그런 자신에 대해 책망을 하기도 했지만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처제의 몽고반점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처제에게 제안을 했는데, 처제는 스스럼없이 허락을 했다. 그래서 벌거벗은 영혜의 몸에 몽고반점을 하나의 꽃으로 하는 그림을 그렸다. 바디페인팅. 그리고 그런 처제의 모습을 빛과 어울리도록 비디오로 찍었다. 작품을 동료 작가들에게 보여주었더니 좋은 작품이라고 그를 칭찬했다. 영혜는 영혜 나름대로 자신의 몸에 그려진 꽃 그림이 불면증을 없애주었다고 좋아했다. 그 그림을 지우지도 않았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닌 실제 식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처제의 바디페인팅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는 아직 성에 차지 않았다.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바로 꽃의 결합이다. 남녀간의 결합 말이다. 후배한테 모델이 되어달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가 왔다. 바디페인팅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하자, 불편해 하면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응해주었다. 하지만, 형부가 진짜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자, 후배는 거절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는 결국 자신이 직접 하기로 했다. 자신의 몸에 그림을 그리고, 처제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서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다. 그리고 다음날. 동생의 반찬을 갖다 주러 온 언니가 벌거벗고 잠들어 있는 그들을 발견하였다.

술술 읽히지만, 읽는 내내 불편했다. 형부는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을 위해서라면 어떤 벽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영혜의 입장에서는 식물이 되고자 하니, 사람들의 윤리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혜의 언니, 인혜는 지극히 정상인 윤리적인 사람이다. 어떻게 이 장면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영혜의 언니, 인혜는 그들을 정신병원에 집어 넣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조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무불꽃]

이번에는 영혜의 언니, 인혜의 이야기다. 남편이 동생과 그런 짓을 하고 둘 다 정신병원에 넣었지만, 남편은 정신감정을 받고 퇴원을 했다. 인혜는 그런 남편과 살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 남편과 헤어지고, 자신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리고 영혜를 보살피는 일도 인혜의 몫이었다. 어느날 영혜가 머무르고 있는 정신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영혜가 식음을 전폐하고 있어서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영혜를 본 인혜는 가슴이 아팠다. 아무것도 먹지를 않아서 점점 말라가는 동생을 보는 것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영혜는 자신이 식물이 될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왜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냐고... 인혜는 어린 시절부터 동생 영혜와 추억도 되살려보고 그랬다. 그리고 아직도 왜 영혜가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옛기억을 그리다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일. 아버지가 개를 잔인하게 죽인 장면... 그때 영혜는 그것을 견뎌내기 힘들어했다. 트라우마. 그것이 영혜의 내면에 남아있다가 꿈에서 그 트라우마가 깨어난 것이고, 그것으로 영혜를 어느날 갑자기 채식주의자로 만든 것이다. 인혜는 영혜가 식물이 되고 싶은 마음을 정상으로 보지 않았다. 영혜는 식물이 아니고 당연히 사람이 아닌가? 그럼 먹고 살아야지. 그것을 나중에 영혜가 정상으로 돌아오면 이해할 거야. 인혜는 사람인 영혜를 살려야 했다. 그것이 언니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의료진들이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것에 허락을 하고, 의료진들이 영혜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고 했다. 하지만 어디서 힘이 생겨났는지 강한 거부를 했다. 결국 인혜는 영혜를 큰 병원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

이렇게 소설은 끝났다. 소설이 무겁다. 책을 덮고 한동안 농담을 던질 수 없없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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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억압이나 슬픔이 아니라 평안한 기쁨, 보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의식할 새도 없이

우리에게서 삶의 자유와 기쁨을 앗아가버립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매우 교묘하게 작동합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꼼꼼히 살펴보세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란 '소비의 자유'일 뿐이고

자본주의에서 얻는 기쁨이란 '자기 파괴적인 욕망의 충족'일 뿐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욕망의 집어등에 걸려

허우적거리며 깊이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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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모든 것을 고백하며,

기독교도들에게는 평화와 안식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수중에 많이 넣을수록 현대인의 마음에도

여유와 안정이 찾아들지요.

독실한 신자는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 찾아올 때 신의 은총을 느낍니다.

또는 로또 복권에 당첨되거나 주식 투자로 주가가 오르면

우리는 돈이라는 신이 강림한 데 대해 엄청난 황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우리 지배력은 돈을 쓰지 않고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을 꿈꾸는 동안에만 작동합니다.

현실적으로 돈을 사용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버립니다.

이 순간은 마치 신이 떠나버린 듯한 무서운 효과를 낳습니다.

신의 은총을 찾아 다시 교회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돈이 떠나려는 순간,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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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 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해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세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얼마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가 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은 돈의 자유이지 우리 삶의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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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드에게 파리는 악의 꽃, 다시 말해 '악'이며 동시에 '꽃'이었습니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악'은 19세기 파리를 장악하던 산업자본의 힘,

다시 말해 '화페'의 신적 역량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꽃'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상품'이나 '여성'을 상징합니다.

산업자본이란 '악'이 있기 때문에 상품이라는 '꽃'도 가능했겠지요.

보들레르가 파리에 대해 애정과 증오라는 이중 감정을 보인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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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그나마 위안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였습니다.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사랑이란 감정은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소망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본주의는 늘 인간의 무한한 진보와 번영을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곧바로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가의 노쇠함과 그에 이어지는 필연적 죽음입니다.

육체적 노쇠함은 인간을 탐욕과 축재로부터 벗어나게 하지요.

물론 노쇠해져 죽음이 가까이 왔는데도 자본주의적 탐욕의 갈등이 꺼지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인 유하에게는 이 두 가지 희망이 어렴풋하게나마 그 빛을 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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