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단편집 - 스켈레톤 크루 - 상 밀리언셀러 클럽 42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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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유명하다고 해서 처음으로 책을 사봤다. 필사를 할 생각 이었다. 나에게 글쓰기와 생계의 길은 다르지 않아, 하나로 포개져 있으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의 책을 베껴 문장의 힘을 키우고 나아가 생활의 방편을 마련해 볼까 해서였다.

서문을 읽었다. 기가 막히더라.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읽던 책을 관두고 이것부터 집어 들어야 하나? 하고 생각했지만 꾹 참았다. 맛있는 음식은 제일 나중에 먹어야 희열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을 읽고는 실망했다.  

스티븐 킹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 - 상'은 489 페이지의 두꺼운 책이다.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이기 때문일까? 단편집 치고는 다소 묵직한 감이 있다. 그러나 책의 재미는 두께에 반비례한다는 명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으로 떠올리고 이 책으로 증명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을 읽어도 남은 페이지 수가 줄지 않아 자주 뒤 쪽을 들쑤셨다. 왜 이야기가 끝나지 않지? 책을 읽는 동안 솟아오르는 질문과 싸우느라 문장을 파헤치고 재미를 분석할 여력이 없었다. 장바구니에서 '하'권을 삭제했다.

이 책엔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안개'처럼 200 페이지가 넘는 대작도 있고 '카인의 부활', '호랑이가 있다'처럼 아주 짧은 소품도 있다. 특이하게는 '편집증에 관한 노래'같은 긴 시도 있지만 사실 다 고만고만한 중편들이다.

우선 '안개'에 대해 말하자면, 작품이 너무 길다. 특히 도입부는 대하 역사 소설을 뺨칠 정도로 길다. 정체 불명의 안개가 마을을 뒤덮어 사람들을 잡아 먹는다는 내용인데 이 안개가 아주 기어온다. 마을을 뒤덮기 까지 수십 시간이 걸리는 듯 하다. 당연히 안개가 조장하는 불길한 서스펜스가 아주 천천히 전해진다. 주인공 일행이 대형 마트에 고립되고 난 뒤부터는 다행히 긴장이 돌아오지만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이 또 엉성하다.   

 

<B급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 스티븐 킹의 소설들> 

 

'토드 부인의 지름길'이나 '뗏목'같은 경우는 소재에 있어서는 참신한 맛이 있지만 긴장과 서스펜스, 염통이 쫄깃해지는 박력과는 거리가 멀다.

'원숭이'는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법한 진부한 소재를 택하고 있고 '카인의 부활'도 컬럼바인이나 버지아텍 총기 난사 사건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오늘날에는 쇼킹한 맛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나머지 소설도 마찬가지, 느슨한 플롯의 연속으로 지루함이 범람하고 졸음이 몰아친다. 

머리 끝까지 빨려 들 것 같은 정체불명의 흡입력. 독자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환각제. 킹의 소설에선 이런걸 기대하는게 아닐까?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나 M.나이트 샤말란의 '식스 센스'같은 치밀함이 이 소설엔 없었다.

킹의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어 보니 그 해답이 나온다. 이 소설가는 플롯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상황에서 출발하는데 특정한 상황 속에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몰아 넣고 스스로 행동하기를 기다렸다가 그것을 받아 적는 것이 쓰기의 전부라고 한다. 스티븐 킹은 애초에 완벽한 사기를 설계해 놓고 독자를 감쪽같이 속여 넘기는 구라꾼이 아니라 입심 좋은  허풍쟁이였던 것이다.  


 <출처: Flickr.com, geoftheref>
 

소설에 대한 판단은 직접 읽어보고 내려야할 일이지만 꼭 집어 추천하자면 글쎄, 그럴만한 작품은 없다. 혹자는 일 방문자 8명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남자가 3억부의 사나이를 평가하는 것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찰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의 마음이 그런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냉철한 논리라도 아무리 높은 이름값이라도 '어쩔 수 없는 건'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이' 바로 대중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지구 위에 어쩔 수 없어 하는 또다른 인간들이 3억권이 넘는 소설을 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웬지모를 안심이 된다. 나 같은 사람만 있었다면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훌륭한 소설가 한 명이 어두운 다락방 위에서 쥐와 거미를 위해 글을 써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혹평만 쏟아냈으니 다른 얘기를 몇 개 더 해야겠다. 킹은 성공한 소설가지만 에세이를 썼더라도 크게 성공했을 사람이다. '유혹하는 글쓰기'나 그의 서문을 읽어 보면 이 사람이 글쓰기에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 알 수 있다.

킹은 기본적으로 센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유머 감각도 풍부할 거고 아마 말도 엄청 잘할 거다. 그건 대화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소설가는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독특한 소재와 그로테스크한 상황이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온다.

그런데 이 소재와 상황들은 명왕성의 당근이나 마그마 속의 우동처럼 인위적인 독특함이 아니다. 그의 공포는 우리 삶의 아주 익숙한 것으로부터 나온다. 낡은 인형, 매일 아침 보는 안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락 날락하는 화장실. 그것들이 순간 낯선 것으로 변하며 그 안에서 공포가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 이 사람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덧 나의 집이 그리고 나의 장난감이 스믈스믈 본모습을 드러내며 그 섬뜩한 입김을 무방비의 살갗위로 뿜어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실 대중 소설의 시비는 판매 부수가 내려주는 것이다. 대중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문학성과 주제와 플롯에 앞서 '대중을 거스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스티븐 킹이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소설은 길이 길이 인세를 벌어 들여 출판사와 후손들과 어딘가에서 꿈을 키우고 있을 어린 소설가를 살 찌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남자,

역시 만만히 볼 사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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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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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은 3억 부 이상의 책을 팔았다. 빗자루를 타고 나타나 코끼리가 건초를 먹어 치우듯 팔아치운 '해리포터'만 없었다면 스티븐 킹은 말 그대로 '킹'이 됐을 거다. 비록 일등의 자리는 호그와트의 마법사 도련님에게 빼앗겼지만 공포, 스릴러 분야에선 역시 이 남자가 '킹'이다. 피와 시체가 꽃처럼 장식되고 으깨진 두개골이 카펫으로 깔리는 세상에선 이 남자가 먹어준다는 말이다.  

킹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어린 시절 부터였다. 재밌게 본 만화책을 베껴 최초의 소설을 썼다. 엄마가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전말을 알게 되자 다음 부터는 창작 소설을 쓰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킹은 그 후로 꼬박 꼬박 자기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글을 읽었고, 환호했고, 지갑에서 푼돈을 꺼내 킹에게 주었다. 칭찬이 킹을 춤추게 했다.   

 

 

미국의 하류층으로 태어나 홀 어머니 밑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킹은 영리했다. 주립대 영문과에 입학했고 그 곳에서 아내를 만난다. 공부도 했겠지만 건진건 사랑이었다. -  글을 쓰는 사람에게 둘 중에 뭐가 나은지는 나중에 가 봐야 안다. - 졸업하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고 세탁소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썩은 식탁보와 음식물 쓰레기, 피와 병균이 우글거리는 병원 빨래와 싸웠다. 기진맥진한 몸을 임대용 트레일러 위에 뉘였고 그 안 구석, 작은 세탁실에 쭈구려 앉아 소설을 썼다. 삶의 무게가 감당키 힘들어 교직을 구했다. 

형편은 조금 나아졌지만 시간은 반대였다. 수업을 하고 시험을 보고 집으로 시험지를 들고와 빨간펜으로 이리 저리 채점을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여전히 소설을 쓴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날 땐 TV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서랍 속에는 쓰다 만 원고가 너댓개 있었으나 완성은 무지개 너머 머나먼 정글이다.

글쓰기는 시간이다. 멋진 글을 쓰고 싶으면 일단 엉덩이를 붙이는 방법부터 익혀야 한다. 3억부의 사나이 킹도 그걸 깨달았다. 그는 정해놓은 시간에 적합한 장소에 앉아 - 그게 변기 위가 됐든 한적한 커피숍이 됐든 - 정해진 분량을 쓰고야 마는 인내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야 편집자가 보내오는 '거절 편지'에 친필 메모가 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꿈 꾸는 자가 태어나면 다른 곳에는 비웃는 자가 태어난다. 이것 저것 지어낸 이야기를 신이나 떠들고 있으면 '참 기발한 생각이네'라고 적당히 대꾸한 뒤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어렵게 꺼낸 말 속에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밝히면 '열심히 해보라'는 말과 함께 '언제 철들래'하는 표정이 기습을 한다.

주변 사람들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꼬깃 꼬깃 접어온 종이에 개발새발 그려 놓은 글을 보고 있으면 그 곳에 정말 길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읽기와 쓰기는 정말 더디게 성장한다. 싹이 돋는걸 봐서는 도무지 언제 꽃이 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글쟁이에게는 믿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킹의 아내 태비처럼, 구겨 버린 초고 속에서도 글을 이어갈 희망을 찾아내는 사람말이다.   

"나는 폰드 스트리트의 셋집 현관이나 허먼의 클래트 로드에 있던 임대용 트레일러의 세탁실에서 소설을 썼는데, 만약 아내가 그것을 시간 낭비라고 말했다면 나는 용기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비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놓고 당연시할 수 있는 요소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에 그녀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격려해 주었다. (중략)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굳이 믿는다고 떠들지 않아도 좋다. 대개는 그냥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p89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소설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시 받는 사람이다. 믿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꿈은 이어진다.

킹은 이 밖에도 단어를 연마하고, 초고에서 10%를 삭제하고, 대화문을 생생하게 쓰고, 부사를 쓰지 말고, 창작 잡지를 구독하고, 저작권 대리인을 알아보고, 출판 시장을 조사하여 자신에게 어울리는 출판사에 투고할 것을 충고하지만 중요한 얘기는 이미 앞에서 다했다.

사람들은 쓰기 전에 뭔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유명 소설가의 작법서는 언제나 베스트셀러가 된다. 나도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글을 쓰기 전이었고 한 번은 쓰기 시작한 뒤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런 책은 쓰기 전에 읽는게 아니다. 쓰고 난 뒤에 읽어야 한다. 행동이 나가지 않으면 생각은 구름 위에 노닐뿐 종이 위로 내려와 글이 되지 않는다. 몸이 움직이면 머리는 필사적으로 따라온다.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면서 나는 그걸 깨달았다. 

  
 
   
<출처: Flickr.com, joshjanssen> 
 
 
글을 쓴다는 건 외로운 일이다. 나는 안다. 나와 당신이 유명한 소설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꿈을 향해 전력을 다하고 싶어도 우리의 인생은 좀처럼 여유를 내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내가 특별히 뭔가를 잘못했거나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 굳은 결심을 하고 달려드는 사람일 수록 고통과 좌절, 멸시와 비난의 철벽에 겹겹이 둘러 쌓여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기어이 그 꿈을 포기하게 만든다.

1973년 스티븐 킹은 연봉 6,400달러의 고등학교 영어 교사였다. 그 해 장편 '캐리'를 2,500달러의 선인세로 계약했다. 몇달 뒤 '캐리'의 보급판 판권이 40만 달러에 팔리자 킹은 할 말을 잃었고 태비는 낡아빠진 트레일러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캐리의 성공엔 분명 운이 따랐다. 그러나 그 운은 캐리 이전에 소멸한 수 많은 원고를 밟고 왔다. 그걸 모른다면, 우리는 작가가 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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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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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토기조시(옛 이야기)는 이례적인 작품이다. 다자이의 필모그라피에 있어서 이 소설만큼 밝고 경쾌한 분위기가 흐르는 작품은 없다. 실패와 우울의 물결로 과잉된 문장들은 이 책에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옛 이야기는 번안 소설이다. 일본에 전해내려오는 옛날 이야기들을 다자이 식으로 옮겨 썼다. 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 동경에 쏟아지는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앉아 있으면서, '옷차림도 초라하고 용모도 어리숙하게 생겼으나, 원래 허투루 볼 수 없는 사람인' 아버지(다자이)는 불안에 떠는 딸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 그러나 아비의 마음 속에선 자꾸만 자꾸만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와 참을 수 없었다.

다자이의 삶은 어긋나 버렸지만 글쎄, 이 남자도 따뜻한 햇볕 아래서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면 작가가 평생을 흠모했던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나 일본의 국민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조차 뛰어 넘어 백편이고 이백편이고 재미있는 소설을 줄줄이 써내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다자이 소설의 중기에 해당하는 이 작품엔(비교적 안정된 생활 속에서 작품 활동을 유지한 시기) 작가가 지닌 진정한 능력, 소재를 재해석하는 기발한 착상과 문장을 비트는 천재적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혹부리 영감


혹부리 영감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혹부리 영감이 맞다. 노래 실력이 혹에서 나온다는 깜찍한 할아버지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할아버지는 술꾼이다. '고독해서 술을 마시는지, 술을 마시니까 식구들이 싫어하여 자연스레 고독해지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유머 없는 아들과 타박만 하는 아내가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쓸쓸해진 할아버지는 집을 나섰고 거나하게 술에 취해 밤늦도록 춤을 췄다. 그러다가 도깨비를 만났다. 그 후의 이야기는 아시는바와 같네. 

 




그런데 문제는 다른 할아버지다. 혹부리 영감이 도깨비에게 혹을 떼주고 왔다는 말을 듣자 이 할아버지도 욕심, 아니 희망이 생겼다. 그리하여 밤 깊은 숲 속 오묘한 달빛이 비추는 나무 사이로 들어가 도깨비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깨비들이 모여 술판을 벌였다. 할아버지는 성큼성큼 무대 위에 올라 철부채를 펼쳐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춤을 췄다. 그리고는 시키지도 않은 노래까지 연달아 열창했다. 도깨비들은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아 이 사람은 귀신일지도 몰라.'

그 말은 물론 할아버지의 춤과 노래가 끔찍했다는 얘기겠지.

'아아 지금 가시면 안됩니다. 이 혹이라고요 이 혹에서 춤과 노래가 나옵니다.'

'아아 난 또 뭐라고 그 혹이라면 일전에 맡아둔 게 하나 있지. 그 사람에겐 꽤나 소중한 물건인듯 하지만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자 가져가게나. 대신 그 춤만은 추질 말어. 술기운이 싹 가신다니까 혹은 내어줄테니 부탁이야 제발 놔 줘.'

참으로 엉뚱한 도깨비다. 그러나 그 엉뚱함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삶에 짐 하나가 늘어 버렸다.

옛날 이야기란 보통 권선징악, 나쁜 사람이 벌을 받기 마련인데 이 이야기에는 나쁜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웃집 할아버지의 삶은 비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런게 바로 '삶의 희비극' 이랄까?

할아버지는 잘못한 것이 없다. 예의 절박한 사람이 그러듯, 긴장한 탓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한 춤과 갈라진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정말로, 그것 뿐이다. 



우라시마 이야기


우라시마 이야기는 - 주인공은 우라시마 타로 - 거북이를 살려준 은혜로 용궁에 놀러갔다 왔더니 세상은 이미 몇 백년이 흐른 뒤여서 가족도 집도 모두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다는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다. 단지 우라시마 타로라는 이름만이 생소한 거겠지. 그러나 이 우라시마 타로는 거북이를 구해줄 만큼 정이 많으며 양 볼엔 쑥쓰러운 웃음이, 이마엔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찼던 따뜻한 남자가 아니다. 다자이의 손에 붙들리자 그는 쩨쩨하고 소심한 남자로 변해 버렸다. 

  


 


우라시마는 동네 아이들에게 푼돈을 쥐어주고는 거북이를 구해냈다. 거북이는 우라시마를 타박한다.

"겨우 5푼이라니. 너무했어 자네의 쩨쩨함엔 두 손 다 들었어. 하지만 그때의 상대가 거북이와 아이가 아니고, 이를테면 우락부락한 어부가 병든 거지를 괴롭히고 있었다면 당신은 5푼은커녕 단 한 푼도 내지 않고, 그냥 낯을 찡그리며 서둘러 스쳐 지나갔을 게 틀림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북이는 은혜를 갚으러 올라왔다. 쩨쩨한 인간과는 다르니까. 아무쪼록 믿어 주시게. 그러나 우라시마는 믿지 못한다.  

거북이가 용궁으로 끌고가 인신매매라도 할거라고 생각한 걸까? 호쾌한 선의에 혹하면서도 이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 - 그나마 다행이지 - 나에게 이로운가 아닌가를 따져보아야 하는 - 이건 참 추악해 - 인간의 슬픈 숙명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이 소설에서 거북이의 힘은 대단하다. 거북이는, 본능보다 체면을 중시하고 대범한척 하지만 쉽게 남을 믿지 못하는 인간의 허위와 가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카치카치산


카치카치산은 너구리가 주인공이다. 심했다. 너구리라니. 더군다나 이 못생긴 너구리가 앙증맞은 토끼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참으로 역겹군. 손사래를 치며 책을 덮어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어디 한 번 끝까지 읽어 보자.

언젠가 너구리가 산 기슭에 살고 있는 늙은 부부의 손에 잡힌 적이 있었다. 할멈은 너구리탕을 끓여 먹을 생각이었다. 너구리는 가마솥으로 끌고 가는 할머니의 손을 카칵 할켜 버리곤 도망쳤다. 너구리로선 당연한 일 아닌가. 상대가 할머니고 부처고 지저스 크라이스트고 자신을 해치려는 자로부터 온 힘을 다해 탈출하지 않는 다면 그걸 제대로된 너구리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토끼의 생각은 달랐다. 공교롭게도 토끼는 할머니의 친구였다.

토끼가 너구리를 증오할 이유는 이것 말고도 많았다. 우선 냄새가났다. '족제비 똥으로 버무린 지렁이 마카로니'를 먹었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 또 어지간히 못난 얼굴이었다. 팔짱을 끼고 동네 마트를 다니는 건 꿈도 꿀 수 없어. 생긴것도 어지간해야 참고 살아보지. 게다가 결정적으로, 너구리는 가진게 없었다. 천애고아. 무일푼.  

안타깝다, 못생기고 배 나온 위인이라도 번쩍 번쩍 금화 한 자루라면 토끼 아니라 그 이상가는 미인이라도 문제 없을 텐데. 그러나 너구리는 세상 물정을 몰랐다. 답답할 정도로 둔했다. 그러니 미움을 받을 수 밖에.  



 

<너구리야 이렇게 웃고 있으면 곤란해>  

그리하여 토끼는 너구리의 몸에 불을 질러 보기도 하고 화상으로 드러난 맨살에 고춧가루를 발라 보았다. 그래도 너구리는 죽지 않았다. 손을 휘둘러 쫓아낼 수록 더욱 집요하게 달라 붙는 파리떼처럼 토끼를 좋아했다. 마지막으로 토끼는 호수로 놀러가자고 너구리를 꾀어 낸 뒤 진흙배에 태워 너구리를 침몰 시킨다. 그제서야 눈치챈 우리의 너구리.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발악해 보지만 토끼의 노가 너구리의 머리를 때린다. 따악, 따악! '그러더니 쏘옥 가라앉아 잠잠.'

잘못한건 너구리야. 적어도 아파트와 자동차 정도는 있어야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어. 못됐다. 양심이 있어야지. 야야 이러지 말자, 당신이 인간 세상에 환생한 너구리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거야? 너구리를 그렇게 몰아 세운다면 젠장...

'반한것도 잘못이냐?'

 

혀 잘린 참새


참새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였다. - 이 책엔 할아버지가 참 많이도 나와. 어쨌든 이 참새는 당돌하고 사랑스러운 아기 참새. 할아버지가 책을 보고 있으면 책상 위로 폴짝, 겁도 없이 뛰어 올라 고독한 할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 준다.

그런데 부부가 문제다. 남자는 책만 보고 사는 한량. 여자는 '할아버지의 생가에서 부리던 몸종이었으나, 병든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떠 맡았다가 어느 틈에 그 생애를 떠맡게 되고 말았다. 배우지 못했다'.

글 깨나 읽는 남자는 예상 외로 무능력하다. 그런 주제에 거드름은 빼놓지 않는다.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한다. 할머니는 처음엔 약간 경외하는 마음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깍듯이 모셨을 거다. 그러나 10년, 20년 초가집은 스러져 가고 젊은 여자는 생활에 시들어 이제 할머니가 됐는데도 남자는 여전히 공자~왈이다.

이 할아버지, 사는 동안 할머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걸어줬을리 만무하다. 그런 할아버지가 묘령의 여인(참새)과 희희낙락 수작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어찌 눈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도대체 누구랑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냐! 여자가 분명하다. 어디다 숨겨 뒀느냐.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할머니의 신세한탄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데도
이 할아버지, 누구긴 누구야. 이 참새와 얘기 중이라네 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 뿐이다. 드디어 할머니의 뚜껑이 열렸다. 할머니는 성큼성큼 다가가 참새의 입을 열고 혀를 뽑아 버렸다. 아기 참새는 깜짝 놀라 대나무 숲으로 날아갔다. 

 
 


다음 날 부터 할아버지는 참새를 찾아 눈 덮인 대나무 숲을 헤맨다. 하루는 나뭇 가지에서 떨어진 눈 덩이에 맞아 잠깐 실신했는데 눈을 떠보니 참새의 나라였다. 그 곳에서 아기 참새와 애닳은 재회를 한다. 참새는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남자, 짐짓 모른채 하고 값 비싼 물건 한 두개 가지고 나왔음 할머니도 그리고 자기도 형편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을텐데 기어이 빈 손으로 돌아오고자 한다. 보다 못한 참새가 비녀를 뽑아 할아버지에게 건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할아버지는 눈 밭에 누워 있었다. 손에는 벼이삭이 쥐어져 있다. 이 겨울에 벼이삭이라니. 할아버지는 기이하게 여겨 붓꽂이에 꽂아 두었다.  

이 벼이삭이 할머니의 눈에 띄었다.

불쌍한 할머니 또 다시 남자를 추궁하네. 하지만 참새 나라 그리고 새의 선물, 기가막혀 말도 나오지 않아.

"그렇담 내가 직접 대나무 숲으로 가보겠어요."

"아무래도 선물이 탐나는 모양이군."

할아버지가 비수를 꽂는다. 말이 나온 김에 할머니는 눈 덮인 대나무 숲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뒤의 이야기는 갑작스레 쓸쓸한 엔딩이다. 코 끝이 쌩해지는, 어딘지 모르게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 듯한... 아니아니 집어치자 이런 얘기 먹혀들지 않아. 나로선 도저히 이 느낌을 표현할 능력이 없어. 그러니 바로 여기에 본문을 옮겨 본다.

'해질녘, 무겁고 큼직한 옷고리짝을 짊어지고 눈 위에 엎드린 채, 할머니는 싸늘해져 있었다. 옷고리짝이 하도 무거워 몸을 일으키지 못해, 그대로 얼어죽은 듯하다.

옷고리짝 속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한다. 이 금화 덕분인지 어떤지, 할아버지는 그 후 머잖아 관리가 되어 이윽고 한 나라의 재상자리에까지 올랐다 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참새 의원님이라 부르고, 이 출세 또한 그가 예전에 참새한테 보여 준 애정의 결실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퍼뜨렸는데,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어렴풋이 쓴웃음 지으며,

"아니, 마누라 덕분입니다. 그 사람한테는, 고생만 무지 시켰습니다." 이렇게 말했다 한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딘가 모자라고 서투른, 아무래도 '사랑받는다'는 기대와는 거리가 먼 아웃사이더 들이다. 내가 만약 이 리뷰의 끝, 바로 이 문장에 '혹부리 영감과 우라시마 타로와 너구리와 그리고 눈 밭에 쓰러져 죽은 할머니가 누구냐,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라고 쓴다면, 아... 참으로 재미없는 리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끝.

*이 글에서 색깔을 달리한 부분은 모두 소설의 문구를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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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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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이 찬바람이 부는 계절에는 웬지 모르게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이 읽고 싶어진다.  

 

 

5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40년, 짧은 생을 마감한 고독한 남자. 평생 수 많은 인간과 부대껴 살아갔지만 끝내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는 약한 남자였다. 아주 답답할 정도로 약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랑조차 편안히 받아 챙길 줄 몰랐다. 상대방의 사랑이 커질수록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심각한 자책에 빠져 결국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파멸로 이끌었다. 그에게 인간은 대단한 공포이자 부담이었다.

다자이는 죽기 몇 개월 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소설 하나를 완성한다. 바로 '인간 실격'. 이것이 자신을 향한 최후의 비평이었던걸까? 그 후로 한 달, 어깨위로 쏟아지는 인간의 굴레를 가지런히 벗어놓고 다자이는 축복같은 강물 위로 몸을 던졌다. 

 




 인간 실격은 액자 소설이다. 작중 화자인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바의 마담으로부터 '요조'라는 인물의 일기를 받아 들게 되는데 '나'는 이 '요조'의 일기를 출판하기로 마음 먹는다.

요조로 말할 것 같으면 불한당이다. 대단한 폐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거지'하고 넘어갈 문제에도 쉽사리 마음을 놓지 못했다. 요조는 도깨비였다. 도저히 인간 세상에서는 살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익살을 부렸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헤헤, 호호' 인간의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줬다. 속도 없는 사람들은 요조를 '참 재미있고 귀여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또 요조를 괴롭혔다. 자신을 대단한 사기꾼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좌경 사상에 심취했다. 그러나 요조는 대지주의 도련님이었다. 그는 자신을 순백의 천 위에  떨어진 더러운 터럭 이라고 생각했다. 가난의 세계에서 부는 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요조를 끌어들인 친구는 사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한낱 유행. 멋있어 보이길래 한번 해봤지. 뻔뻔함은 인간의 의무이고 괴로워하는 건 요조의 몫. 좌경이고 진보고 평등이고 부조리고 다 집어 치워. 나는 그저 너희 집에서 보내 주는 돈을 바랄 뿐이야. 그걸로 술이나 한 잔하고 다 잊어 버리자 친구. 요조의 순수했던 꿈은 이렇게 박살나 버린다. 
 


 
더럽혀지고 싶지 않은 열망을 지키면서 인간 세상에 적응하고자 하는 요조의 노력은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힘차게 헤엄을 쳐 보지만 뒤돌아 보면 어김없이 제자리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떠한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심한 무력감. 돌파구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요조는 우연히 만난 술집의 여급과 함께 정사(情死)를 기도한다. 여자는 죽고 남자는 살아 남았다.

자살은 요조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용기였고 유일한 속죄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 더군다나 여자를 죽여버렸다는 죄책감은 요조를 평생 동안 십자가위에 매달았다. 살아남은 삶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가문으로부터는 의절을 당했다. 그 후로는 여기저기 여자들의 정부 노릇을 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알콜에 중독됐다. 간신히 술을 끊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마음을 다 잡고 살아 가는데 이런, 아내 요시키가 더럽혀 지고 만다.

범인은 요조에게 '만화를 그리게 하고는 몇 푼 안되는 돈을 거드름을 피우며 놓고 가는, 삼십 세 전후의 무지하고 몸집이 작은 상인'이었다. 요시키는 신뢰의 화신이었다. 파멸하는 요조마저 믿어 주었다. 그러나 그 신뢰가 오히려 그 자신을 궁지로 몰아 넣고 만 아이러니에 요조의 삶은 알쏭 달쏭 도무지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제 그 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다. 요조는 다시 술을 들었다. 술을 끊기 위해 약물에 손을 댔다.

이 심약한 남자는 그 후로 알콜과 약물에 중독되어 수면제로 자살 기도, 그러나 어김 없이 살아 남아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곤 고향으로 보내진다. 그 곳에서, 하녀인지 부인인지 모르겠는 늙어 빠진 여자에게 강간 아닌 강간을 당하며 여생을 보낸다.

'나'는 이 요조의 일기를 받아들어 아무런 가감도 하지 않고 소설로 펴낸다. 

 



 

다자이의 소설을 흔히 '청춘의 한 시기에 통과 의례처럼 거쳐야 하는 문학'이라고 말한다. 열심히 전진할 수록 거침없이 후퇴하고 마는 인생의 비애는 비단 다자이만이 경험했던 일은 아닐 것이다. 젊은 시절, 마음처럼 되지 않는 세상과 싸우며 느껴야 했던 심각한 좌절감은 우리 모두를 다자이와 같은 파멸로 몰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기에 혹은 세상과 타협을 했기에 지금 이 곳에 서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별거 아니었다고, 단 한 순간도 고민할 가치가 없었다고, 고급 트렌치 코트의 깃을 세우며 비릿한 웃음을 날릴 수 있다면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때로는 무지가 행복을 보장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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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 아도르노 :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 지식인마을 30
신혜경 지음 / 김영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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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된 예술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머리가 콩코드르 광장 위를 구르고 있을 때 장전된 길로틴의 밑에선 예술의 머리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 시민 혁명은 절대왕정을 붕괴시키고 귀족 중심 사회를 해체시켰다. 그동안 귀족과 왕궁의 후원을 받던 예술 또한 따뜻한 안식처를 강탈당한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부모를 잃은 예술은 이제 거리로 몰려나 정어리, 곡괭이, 밀 등과 경쟁하는 시장 경제의 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예술의 고객은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른바 졸부, 머저리, 교양 없는 인간들. 심지어 보들레르는 이런 부르주아 계급의 저급한 미적 취향을 일컬어 '개는 냄새나는 더러운 똥 통조림을 보면 꼬리를 흔들며 좋아라 달려들지만, 정작 향기로운 향수를 주면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냉담하게 돌아설 뿐이다'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상품인 주제에 고객을 경멸한다면 과연 누구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예술은 자유를 선언한다. 절대왕정에도 귀족에도 부르주아에도 봉사할 필요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도도한 선언. 그리하여 예술은 그 의미를 꽁꽁 감춘채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으며 그 무대 위에선 모호한 의미와 추상적 이미지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기 마련이고 말라버린 우물은 언젠가 빗물로 가득차기 마련이다. 예술이 떠나간 자리는 대중 문화가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20세기. 대량 복제 기술과 매스 미디어로 무장한 대중 문화는 예술을 영원히 유배시키기에 이른다.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 

변화는 언제나 새로운 이론과 설명을 낳는다. 20세기, 100년에 걸쳐 변할 것이 불과 10년만에 이루어진다는 이 격변의 시기에 대중 문화를 해부할 집도의로 점지된 것은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였다. 그러나 동시대에 살았고 같은 유대인이었으며 평생 학문적 교류를 그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이 대중 문화를 이해하는 방식은 너무나 달랐다.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아도르노는 대중 문화를 경멸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천박한 대중 문화를 경멸했다. 그는 이 천박한 대중 문화를 건전한 대중 문화와 구분하기 위해 '문화 산업'이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대충 다음과 같다.

첫째, 대중 문화의 형성에 있어 그 수용자인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는가.
둘째, 대중 문화는 대중을 억압하는 체제 및 사유에 저항하는가.

따라서 문화 산업이란 이 두 가지 조건이 결여되어 있는 대중 문화를 뜻한다. 또 '산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대량 생산된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게 생산된 문화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규모로 유통되는 것인데 똑같은 모양, 똑같은 맛에 자극적인 양념을 추가하여 보급되는 대중 문화는 결국 사람들의 미각을 마비시키고 만다.

미각이 마비된 대중의 틈에서 까탈스러운 입맛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당신이 예민한 미각을 유지하는 한 이마트에도 GS25에도 심지어 결혼식 뷔페집에서도 당신이 먹을 음식은 없다. 이 말은 남들이 입 안 가득 음식을 집어 넣으며 신나게 떠들고 있는 순간에도 당신은 주린 배를 움켜쥐며 지옥같은 허기를 달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고자 한다면 엄청난 노력을 들이거나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까탈스럽게 굴지마 주는대로 먹으면 돼. 남들도 그렇게 하잖아.' 

귓가에 바짝 다가온 끈적한 목소리는 농염한 손짓이 되어 당신을 유혹한다. 그리고 유혹은 언제나 승리한다. 이제 모든 대중은 문화 산업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 그 시스템을 비판하고 극복할 잠재력을 영영 상실해 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대중의 좀비화다. 이 때부터 시장과 각종 이데올로기는 사악한 양치기가 되어 뒤에서, 이 좀비 무리를, 막대기로, 이렇게 저렇게 쑤시며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간다.   

 <저항할 것인가, 모른척 살아갈 것인가>



그러나 좀비 무리 속에서도 언제나 제정신을 잃지 않는 괴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의 음모를 간파하고 시장의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찾아낸다. 이들은 빨간약과 파란약을 들고 다니며 '매트릭스'의 거짓을 까발리는 모피우스다. 덕분에 사람들은 대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 속에서 우러나는 상큼하고 깊은 맛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섬뜩한 촌철의 묘를 보여준다.   

아도르노는 이 세상에 다양한 대안들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란 없다'고 말한다. 덧붙여 차이란 '어느 누구도 문화 산업의 손아귀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통제하려는 생산자들의 의도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예를들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혐오하는 당신에게도 시장은 무엇인가를 팔아야 한다. 그리하여 헐리웃에서는 체 게바라의 전기 영화가 만들어지고 대형 출판사는 두꺼운 양장본을 출간해 쇼윈도에 비치한다. 한편 Pop Music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MIC를 잡은 랩퍼들이다. 반항의 icon이자 대안의 상징인 이들의 앨범은 메이저 배급사에 의해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우리가 'MIC만 잡으면 나도 랩퍼'와 'Put your hands up'을 백만번 리피트 하는 동안 랩퍼들의 엉덩이 밑에선 수천만 달러가 수북히 쌓여 간다.   



<힙합은 무죄인가?> 

 

따라서 획일화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화 산업은 오히려 차이를 강조하고 부각시킨다. '혁명', '신개념', '새로운', '확 바뀐' 같은 형용사가 유난히 판을 치는 오늘날의 광고 문구들이 생각나지 않는가?  

결국 문화 산업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이란 그 누구도 시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함정일 뿐이다. 그들은 대중의 취향을 촘촘히 분류하고 조직한뒤 그것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사악한 양치기들은 결코 무식하지 않다. 그들의 양몰이는 세련되고 우아하며 스리슬쩍 파고드는 소매치기의 손처럼 날렵하고 은밀하다.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 작품 

반면 발터 벤야민은 대중 문화의 긍정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모색한 최초의 미학자였다. 그는 마르크스 주의자 답게 예술의 생산 수단의 변화에 집중했는데 여기서 그의 대표작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특히 벤야민은 '아우라(Aura)'라는 신비주의적 관점을 도입하여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을 설명하려 했다.

발터 벤야민과 미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우라'라는 말은 한번 쯤 들어봤을것이다. 판타지 문학에서는 오오라라고 말 하기도 하는데 퇴마록에서 박신부가 사용하던 기술이 바로 이 오오라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 설명하는 '아우라(Aura)'가 박신부의 '오오라(Aura)'와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다. 세상엔 비유 혹은 그것을 체험했던 감상을 통해서만 설명 가능한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아우라 또한 이런 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아우라는 결코 언어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 해보자.

우리는 지금부터 모나리자의 작업이 막 끝나갈 무렵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공방으로 날아 간다. 모나리자는 오늘날 당신에게 어떤 미학적 충격도 주지 못하는 광고 속의 그림일 뿐이지만 이건 상황이 다르다. 이 모나리자는 진짜기 때문이다! 자 이제 과감히 캔버스 앞으로 다가가 모나리자를 들여다보자.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오로지 '단 하나의' 모나리자가 예의 그 신비한 미소를 흘리며 당신의 눈을 바라 보고있다. 어떤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인 숭고의 물결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것이 느껴지지 않은가?

이처럼 아우라란 그 예술이 진품이거나, 일회적이거나 혹은 원본이라는데서 나오는 독특하고 신비한 분위기다. 그런데 이 아우라는 기술 복제 시대에 이르러 처참히 무너져 버리고 만다. 구글은 모나리자라는 검색어로 0.32초 만에 152만개의 복제된 이미지를 검색해 주고 집 앞 이발소의 달력에는 모나리자가 예의 그 오묘한 미소를 띄우며 낡아 빠진 면도날을 쳐다보고 있다. 모나리자는 도처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현대 예술의 종말을 이렇게 표현했다. 

예술은 없어졌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요즘말로는 간지. 영화 용어로는 포스> 

 

예술은 이대로 영영 끝나버린 걸까? 그러나 벤야민은 바로 여기다 예술의 새로운 출발선을 긋는다.

아우라가 충만했던 시절의 예술은 종교적, 제의적 도구로 사용됐다. 예술 작품의 유일성과 숭고미는 종교와 제의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우라가 붕괴된 이후 예술은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이 예술을 다시 고용한 것이 바로 정치다.

벤야민은 특히 러시아 민중 영화의 틈새에서 대중 예술의 정치화를 가늠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으로 대변되는 이 영화들에는 Continuity Editing으로 불리는 매끈한 숏(shot)전환이 없다. 오히려 숏과 숏을 과감히 충돌시켜 정서적 충격을 줘야한다는게 에이젠슈타인의 기본 생각이었다. 이런 충격을 통해 대중은 쉴새 없이 몰아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도 넋을 놓지 않고 언제까지나 깨어 있을 수 있다.

극장에 앉아 '전함 포템킨'을 보는 관객들은 오뎃사 계단을 줄지어 내려오는 짜르 군대의 흉폭함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지배 계급의 잔인성을 목격한다. 군중을 향해 떨어지는 총알과 불뿜는 대포들은 단지 영화 속 등장 인물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상의 충격은 곧 관객의 분노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분노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깨닫는다.   



<사자 석상을 담은 3개의 Shot은 차례대로 이어지며 거칠게 충돌한다. 잠들어 있던 사자는 기립하고 이것은 민중의 혁명, 프롤레타리아의 자각을 의미한다> 

 

예술의 정치화는 이처럼 대중을 계몽하고 그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다. 도대체 어느 시대의 예술이 이런 일을 담당했었던가? 대중 예술은 결코 싸구려 유희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끊임 없이 독려하는 자극제다.  


벤야민의 헛수고 

그렇담 누가 옳은 것일까?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차 대중 문화를 쓰레기 취급했던 아도르노일까? 아니면 그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잠재력을 발견한 벤야민일까? 오늘날을 두고 보면 확실히 벤야민 보다는 아도르노의 음울한 예언이 적중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술의 정치화가 대중을 계몽할 수 있다지만 계몽에 앞서 시도된 것은 파시즘의 세뇌와 선동이었다. 오늘날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TV에서 양산되는 드라마는 언제나 막장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질주하지만 시청률은 끊임없이 고공행진을 한다. 영화 예술의 진짜 가치? 그건 컨텐츠의 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멀티플렉스의 배급망에서 나온다. 인터넷? 그곳은 가면을 쓴 괴물들이 모여 흉계를 꾸미는 음침한 쓰레기장이다. 그곳에선 근거없는 소문이 숭배되고 진실은 항상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 버린다.

사람들은 여기서 와 하면 따라서 와하고 저기서 우 하면 따라서 우 한다. 생각하는건 피곤하다. 헛소리는 집어치는 것이 좋다. '좋은게 좋은거'라는 미덕은 오늘날의 세상을 지배하는 암묵적 동의이자 대중이 유일하게 만장일치를 이룬 사회적 계약이다.

도대체 어디에 희망이 있다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벤야민은 분투했지만 헛수고였다. 아도르노가 옳았다. 우리는 천박하다. 이제와서 바꾸기엔 세상이 너무 단단하다.
 

에필로그 

광우병 사태가 벌어졌을 때 온 국민을 촛불 시위에 투신하게 만든 것은 대중 문화의 힘이었다. 특히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이 YouTube에 공개되고 디지털 카메라로 실시간 중계가 시작되자 시위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 미친듯이 타올랐다. 이 와중에 누구보다도 즐거워하며 이 사태를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했던 중년 남자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발터 벤야민을 전공한 진중권이었다.

시위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그의 모습에선 100분 토론에서 볼 수 있었던 재수없는 표독스러움이 없었다. 그는 있는대로 흥분해 사태를 완전히 즐기고 있었다. 지극히 대중적인, 천박한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번져가는 진보의 물결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믿어왔던 발터 벤야민의 생생한 재림을 떠올렸으리라.    

                                                     <르네 마그리뜨>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권력은 언제나 고개를 숙이며 굽신댄다. 그러나 깜빡 잠이 든 순간 그것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어느의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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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2011-04-01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도르노가 맞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예술이 천박하게 되는 시대사조 때문만이 아니라, 정치체제 자체가, 특히 대기업 등의 시장권력을 가진 체제결정자들(칼 슈미트 말대로라면 비상시국을 선포할 권리를 가진 자들)의 목적과 부합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쉽게말해 70년대에 타비스톡 연구소, 스탠퍼드 연구소 등에서 반문화 운동을 계획하여 비틀즈를 탄생시키고, 젊은이들을 정치에서 도외시키는 동시에 마약과 문화주의를 지향하게 만듭니다. 그 문화의 흐름이 지금까지와서, 대중들은 천박함을 띄는 문화를 숭상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되었지,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지금과 같은 문화는 당시의 저급한 대중들에게서도 저급한 것으로 판정받았을 것입니다. 그럼 왜 정치권력은 이렇게 의도적으로 반문화운동을 일으켰는가, 하는 것은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므로 여기서 생략합니다.

하지만 저는 또 다르게봅니다. 중요한건 아도르노도 아니고 발터 벤야민도 아닙니다. 그들 모두가 옳고, 틀려질 수 있는 것은 사회시스템에 기인합니다. 앞으로 현재의 경쟁주의적, 황금만능주의적 세계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여 무너지게된다면, 그 이후에 과거에 파시스트 체제가, 독재 체제가,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졌듯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난 다음 새로운 예술체제가, 어쩌면 발터 벤야민식의 긍정적 대중산업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토플러도 예언한 바 있고, 현재 각국의 부채율이 200%에 달하는 것만봐도 자본주의는 얼마 못갑니다. 결국 예술 자체는 이들의 개인적 지적과는 다르게, 항상 자체적으로 변증법적으로 흐를 것입니다.

언젠가는 발터 벤야민의 시대가. 언젠가는 아도르노의 시대가. 언젠가는 이 둘의 장점을 취합한 시대가 오겠죠.

한깨짱 2011-04-01 20:45   좋아요 0 | URL
네 결국 역사가 종결되는 시대가, 언젠가는 그런 시대가 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깊이있는 의견 감사 드립니다.

sunday 2014-04-06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도르노와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을 찾는 중에 읽게 된 리뷰가 책의 내용을 넘어 벤야민과 아도르노 읽기를 주저없이 권하는 느낌으로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한깨짱 2014-04-07 14:58   좋아요 0 | URL
이 길고 두서 없는 글을 좋게 봐주시니 제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