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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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를 정벌한 건 동이족이었다. 동쪽의 활을 쏘는 오랑캐라는 뜻의 동이. 중국의 역사는 삼황오제라는 신화에서 시작하여 요, 순, 우, 탕이라는 전설의 시대로 접어드는데, '우'가 세운 나라가 '하', '탕'이 세운 나라가 '상'이다. 탕은 동이족이었고, 동이는 주로 수로를 이용한 무역으로 먹고살았다. 동이는 중국 땅에 최초의 왕조를 세운 사람들이자 상인으로 기록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요, 순은 그 존재가 의심스러운 인물이고 우는 긴가민가하지만 탕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우는 요순시대에 대홍수를 관리한 곤의 아들이다. 이른바 '치수'라 부르는 그 사업에서 곤이 크게 실패하자 아들 우가 이어받아 대업을 완성한다. 순은 요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자신에게 제위를 양보한 것처럼 당시에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던 우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준다. 이것이 바로 전설과 사실이 묘하게 섞인 '하나라'의 시작이다.


모든 왕조가 그렇듯 무려 '대우'로 불렸던 반신의 왕이 세운 나라에도 시간이 갈수록 망조가 들기 시작한다. 이른바 백성을 괴롭히는 나쁜 왕이 나타나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의의 사도가 역성혁명을 시도한다는 이야기. 모든 역사 기술이 하나같이 똑같아서 어쩌면 이는 현 정권의 승리자들이 전 정권을 무너뜨린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낸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망한 하나라도 그 전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상탕'이라는 성군이 나타나 포악한 하나라의 군주 '걸'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세운다.


하나라에는 청동기 문명의 씨앗이 내재되어 있었고 국가의 권력을 두고 이 청동기 제작자들과 왕가가 대립했던 것 같다. 저자는 이 청동기 제작 집단이 탕이 이끄는 외래 부족을 끌어들여 하나라를 멸망시켰다고 가정한다. 하나라 시절 청동기는 아주 극비리에 지엽적으로 제작되었다. 돌을 갈아 썼던 당시로선 거의 전설의 무기급으로 취급되었을 청동기가 백성에 손에 자유롭게 들어갔을 때 느낄 왕가의 우려를 생각해 보면 이는 꽤 타당한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동 기술자들의 마음이 어찌 같을 수 있었을까? 상나라 시대에 청동기가 완전히 위세를 떨친 것을 보면 저자의 가정에는 타당한 면이 있어 보인다.


상나라는 청동기를 적극 활용했다. 그들의 역사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데 이 무기를 들고 주변 부족들을 점령해 나간다. 최초의 식민지라 볼 수 있는 제후국을 설치하여 영향권을 넓혔고 대규모의 왕궁을 세웠으며 용도를 파악하기 어려운 초대규모 창고가 지어졌다. 이는 상나라의 힘과 통제력을 보여주는 예시다. 이러한 정복 사업은 훗날 개발되는 마차에 의해 유지, 가속된다.


하, 상이라는 고대 국가와 이후 중국 국가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인신공양제사라 볼 수 있다. 그들은 중요한 건물을 짓거나 누군가의 무덤을 만들 때 많은 수의 사람을 죽여 제사에 바치거나 순장을 했다. 그 유적지들이 대량으로 발굴된 곳을 '은허'라 부르는데 은나라의 터, 은나라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는 상나라의 반경이라는 왕이 천도한 곳으로 여기서 출토된 유적에서 처음으로 '은'이라는 이름이 등장해 사람들이 '은나라'로 불렀으나, 이후 상왕조의 유적들이 차례대로 발굴되면서 '은'이 사실은 '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는 중국의 고대 국가를 일컬을 때 하, 은, 주라 했지 하, 상, 주는 없었다. 근래에는 하, 은상, 주로 많이 칭하는 듯하다.


청동 위에 건립한 이 패국도 결국에는 하나라 '걸'의 운명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은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여 '제신'이라 부를 정도였으나 쿠데타에 성공한 주나라 사람들이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위해 그에게 '주'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주란, '의를 해치고 선을 덜어낸 자'라는 뜻이다. 주왕의 포악함을 대표하는 말이 바로 저 유명한 '주지육림'이다. 그리고 이 악독한 왕을 무찌른 이야기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온 적 있는 '봉신연의'다.


주족의 우두머리였던 주발은 상나라를 멸한 뒤 주나라를 세운다. 주발의 시호는 무왕이다. 상나라 정벌의 씨앗은 무왕이 아닌 그의 아버지 문왕 때 시작되는데 이 문왕이 팔괘를 해석하는 법칙을 세운 '역경'의 저자다. 주나라는 끔찍한 인신공양제사를 폐지하기 위해 상나라의 귀족들을 여러 땅으로 흩어 보내고 은허를 폐허로 만든다. 이로써 중화문명은 완전히 새로운 지평으로 접어들었으며 이후 '공자'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일컬어지면서 주나라는 '유학'의 이상향이 된다.


<상나라 정벌>은 이 주나라가 상나라의 제사에 쓰일 인간을 대신 사냥하는 부족에 불과했으며, 상나라의 역사를 그토록 철저하게 파괴한 이유도 '인도적 차원' 뿐만이 아니라 자기들의 어두운 역사를 숨기기 위해서 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나라 무왕에게는 주읍이라는(백읍고) 형이 있었다. 주읍은 문왕이 당시 제후 중 하나였던 숭후호의 탄핵을 받아 몇 년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로비를 벌였던 인물로 이 과정에서 주왕의 눈에 들어 그의 마차를 모는 측근이 된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주왕의 패악을 드러내기 위해 그가 주읍을 죽여 탕으로 끓인 뒤 이를 문왕에게 먹였다는 '역사'를 쓰는데, 저자는 이를 전형적인 유교적 '소설'로 치부한다.


문왕과 무왕이, 아들과 형의 살점을 뜯어먹은 것은 상나라의 정상적 제의 과정 중 하나였다. 이 의례는 주족이 완전히 상나라에 받아들여졌으며, 그 체계 안에서 존속을 보장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공적 서사와는 별개로, 두 사람에게 이는 끔찍한 경험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주나라가 벼른 복수의 칼날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생사가 보장되어 완전한 안정을 찾았을 때, 비로소 벼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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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11 : 위진풍도 이중톈 중국사 11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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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을 대하는 이중톈 선생의 태도에는 다소 모호한 점이 있다. 중화 문명의 최암흑기라서 그런 건지, 이 시대엔 그다지 논할 게 없어서인지, 그동안 선생이 새로운 시각으로 시간을 꿰뚫어 허를 찌르는 해석을 내놓았던 것과는 달리, 오직 인물에 집중하여 최대한 그 시대로부터 고개를 돌리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왜 그럴까?


위진 시대란 후한이 멸망하여 위, 촉, 오의 짧은 삼국시대가 끝난 뒤 조 씨의 위나라서 들어서고, 이후 사마씨의 쿠데타로 진나라가 세워진 시대를 일컫는다. 나라들이 워낙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져 하나의 왕조가 진득하니 제 땅을 지켰던 적이 없다. <삼국시대>에도 말한 바 있듯 조조의 위나라는 법가를 통치 이념으로 서족 관리들이 살림을 꾸려나가는 나라였다. 조조가 만고의 간웅이니 뭐니 당대의 정치적 몰매를 맞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명문세가의 사족 지주 계급은 고작 환관의 양자에 불과한 조조 따위가 달가웠을 리 없다.


그래서 서진은 달랐는가? 달랐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사마씨는 조조와는 달리 명문세가에 속하는 가문이다. 조조가 '관도대전'을 통해 원소의 정치노선을 격파한 것과 완전히 반대로 진나라는 원소의 노선을 다시 불러들인다. 과거로의 회귀. 옛것의 복원. 그런데 힘 조절이 잘못됐는지 진나라는 여기서 더 나아가 봉건시대로 회귀한다. 나라를 여러 개로 쪼개 사마씨를 가진 왕을 봉했고, 당연히 정국은 대혼란에 빠져든다. 진나라는 결국 각지에 봉한 왕들이 이른바 '팔왕의 난'을 일으켜 내전에 빠져들고 이때를 노려 북방의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아 망해버린다. 남은 정치세력은 남쪽으로 내려가 '동진'이 되고 이른바 중원이라 부르는 중국 문명의 알짜에선 5호 16국이라는 오랑캐들의 잔치가 벌어진다.


중화가 중원을 빼앗긴 건 큰 일이었다. 온갖 모순에도 불구하고 충이니 의니 하는 것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그 이념을 믿는 이들이 중원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이 있는 자는 중원을 갖고 세계를 지배할 이념을 통제한다. 이 공식이 무너지면 중화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현실과 이상이 큰 괴리를 보일 때면 늘 형이상학이 발달하는 것 같다. 육체는 패했으니 정신으로 승리를 이루는 것이다. 송나라 때 주자학이 탄생했다면 위진 시대에는 현학이 등장했다. 그 유명한 죽림칠현이 바로 이 시대의 결과였다.


진나라는 유교적 이념을 숭상했지만 골육상잔을 벌이는 등 그 모순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당시 지식인들에게 이른바 '현타'가 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게 무슨 충이고, 이게 무슨 의인가. 나아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현학의 삼경은 주역, 노자, 장자였다. 무위의 철학. 속세를 등지고 자연으로 돌아가 술을 빚고 거문고를 치며 청담을 주고받는다. 권력은 허무하고 세상은 무상하다. 위진시대의 인재들은 최대한 국가 권력과 멀리하는 것이 자기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였다. 그들은 높이 오른 이들을 모욕하기를 즐겼고, 병적으로 자유를 추구했다.


이중톈 선생은 이 시대를 '앓아야 할 병'으로 정의한다. 


"실제로 중국 문명이 3700년간 중단 없이 이어져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지금까지 존속된 초기 문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민족이 대혼란을 통해 통합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진남북조가 바로 그런 대혼란이었다."(p.208~209)


위진남북조라는 병균은 중화 문명에 항체를 만들어 수와 당이라는 대제국의 모태가 된다. 그렇다면 먼저 무엇을 살펴봐야 하나?


위진은 이제 남북조로 흘러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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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10 : 삼국시대 이중톈 중국사 10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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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선생은 삼국시대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하, 은상, 주부터 시작하여 현대 중국까지 거의 8천 년을 이어온 대 중화의 역사에서 위, 촉, 오가 갈라져 소동을 벌인 건 후한 말기까지 쳐도 채 100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땐 거의 해프닝에 가까운 이 시대가 이토록 많은 조명을 받는 게 가당한 일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중은 역사가 아니라 영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영웅이 잘 짜인 허구 속에서 조미료를 듬뿍 묻힌 채 탄생했다면, 애초에 사실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유비는 그렇게 성인군자가 아니었고, 제갈량은 군사적으로 무능했으며, 관우는 오만방자했고, 주유가 제갈량에게 자격지심을 느낀 적은 없으며, 천하를 세 개로 나눠 '정립'하자는 의견은 '연의'에서 바보 멍청이로 나오는 노숙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승자는 역사를 쓰고, 패자는 소설을 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 헛소리에 이끌리는가? 그것은 소설이 꿈을 이루어주기 때문이다.


전통사회의 중국인들에게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부락시대로 돌아가려는 '대동의 꿈'. 두 번째는 신화와 사실이 뒤엉켜 지낸 하, 은상, 주의 고대로 돌아가려는 꿈이었다. 그런데 이 두 꿈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자 비로소 '태평성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태평성대의 꿈도 세 가지 내용으로 나뉜다. 우선 인자하고 지혜로운 황제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성군의 꿈'이 있고 관리들이 청렴하기를 바라는 '청관의 꿈'이 있다. 그리고 성군과 청관의 출현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면 누군가 불의에 맞서 의협심을 발휘해 주길 바라는데 이것이 바로 '협객의 꿈'이다.


성군, 청관, 협객은 중국인이 천년에 걸쳐 꿔온 꿈이다."

(p.226)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사람들이 이 세 꿈을 꿀 수 있게 도와주었다. 성군이 등장하면 자신이 협객이나 청관이 되어 천하를 평정하고 백성을 이롭게 한다. 그러니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이 여타 다른 영웅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삼국시대는 원래 원소와 조조의 노선투쟁이 주요 쟁점이었다. 사족이라 불리는 명문세가 지주계급이 유가를 바탕으로 통치하는 국가와 선발된 서족 관리들이 법가를 바탕으로 다스리는 나라. 조조는 승리한 듯 보였지만 아주 아주 짧았고 역사는 다시 사족 지주의 손에 넘어가 사마씨의 진이 건국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법가가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 철학으로는 적합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진시황이 그랬고 조조도 그랬으며 조조를 쏙 빼닮은 제갈량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유가는 어땠을까? 전한과 후한을 합쳐 400년을 이었으니 정답은 유가였을까? 사마씨가 유가를 들고 법가의 조조를 내쫓았으니 역시 정답은 유가인 걸까? 하지만 이후 사마씨의 진나라가 보인 추태를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정답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중국인들은 위진남북조라는 369년의 대혼란을 겪고 나서야 겨우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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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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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이름을 불러본다. 부족하다. 다시 한번 불러본다.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벵하민 라바투트.


적어도 10년은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가 될 것 같은 이 남자는 항상 마법과 같은 이야기로 내 마음을 짓이겨 녹인다. 웃긴 건 이 사람의 마법이 과학에서 도출된다는 점이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을 이야기로 조각하는 작가. 정신없이 빠져들어 내 정신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스며들고, 또 위로 아래로, 좌우로 흐르며 하나가 되는 경험은 산만함이 호흡이 된 요즘 세상에 진정한 몰입의 황홀이란 무엇인지 알려준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매니악>은 연작 소설이다. 위대한 과학이 탄생하는 순간, 또는 지금은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들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해 상식의 안과 밖을 뒤집어버린 지점을 파고들어 소설을 구성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이야기인지 구분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이 소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가늠할 길이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과학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라면, 진실과 진리의 차이를 알려주고 싶은 거라면,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소설은 <파울 또는 비이성의 말로>, <존 또는 이성의 광기 어린 꿈>, <세돌 또는 인공지능의 명성>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파울은 물리학이 수학으로 환원되기 시작한 시대에, 천재들과 함께하면서도 그 천재들만큼은 계산 능력이 없어 실의에 빠진 물리학자다. 만약에 그에게 계산기가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컴퓨터라 부르는 기계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이제 지구 역사상 가장 똑똑했던 남자, 지성의 한계를 가늠할 길이 없어 외계인으로 불렸던 남자, 암에 걸려 죽어가는 동안 행여나 혼수상태에 빠져 국가의 기밀을 누설할까 두려워,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그 입에서 나올 위대한 진리의 조각들을 하나라도 더 주워 담기 위해 무장 경비 둘이 지켰고, 국방부의 허락 없이는 면회도 불가능했던 천재 '존 폰 노이만'으로 이어진다.


그는 우리가 '컴퓨터'라고 부르는 기계의 구조를 처음으로 설계한 사람이다. 우리의 컴퓨터는 아직도 그 구조로 동작한다. '폰 노이만 아키텍처'라는 이름으로.


다른 계산을 하기 위해선 전기 배선 자체를 바꿔야 했던 시절을 지나 컴퓨터는 이제 지능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 딥블루가 불세출의 체스 마스터 카스파로스를 꺾었을 때 서양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흑백의 돌 둘을 쥐고 불가사의와 무한의 수 읽기를 펼치던 동양의 신들에게 그 사건은 관심을 가질 이유조차 없는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바둑으로 도전한다. 둘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우주의 시간을 다 써도 셀 수 없다는 그 심오한 기예를.


우리는 그때 받았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기계가 드디어 절대 넘볼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을, 그것도 압도했다는 사실을.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겸손해본 적이 없던 그 이세돌을 갓 바둑을 배운 초보자처럼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는 또 기억한다. 무기력하게 3판을 내줬던 이세돌이 제 4국에서 둔 신의 78수, 바보처럼 보였던 이세돌이, 사실은 인공지능을 이긴 '유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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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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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chatGPT 3.5-Turbo로 작성되었습니다.


앤드류 포터의 단편 소설 <사라진 것들>은 삶에 깃든 상실과 공허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우울해지는 시간의 단면을 감성적으로 표현해 이른바 중년을 지나는 사람들의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앤드류 포터의 소설에서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은 대개 이렇다.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춰진 가을 아침의 식탁. 향긋한 과일이 탐스럽게 담겨 있고 아름다운 식기가 짝을 맞춰 놓여 있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은은하게 주방을 감싼다. 그 순간 기다렸던 방문객이 초인종을 누른다. 옷매를 가다듬고 나가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연다. 그리고는 그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손을 맞잡고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것이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일들이 불현듯 찾아오는 것. 예상치 못한 시간의 방문. 그 쓸쓸한 감정의 잠수를 이 소설은 완벽하게 그려낸다.


<사라진 것들>은 젊음과 함께 사라진 것들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무수히 많은 가지로 뻗어나가던 삶의 가능성.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던 낙관주의. 그렇게 되리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꿈들. 화자의 내면에 박힌 시간의 조각들은 지난날의 아름다움과 함께 사라져 가는 시간의 숨결을 부드럽게 전한다. 삶이 흘러가면서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실망과 함께,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계속될 수밖에 없고, 심지어 꽤 오래 계속될 거라는, 희망과 체념이 교차하는 순간을 담담하게 발견한다.


포터의 문체는 반쯤 열린 커튼 사이를 비추는 가을의 햇살 같다. 그의 문장은 시적 울림을 갖고 있으며, 우리를 감정의 깊은 곳으로 인도한다. 중년의 쓸쓸함과 함께 느껴지는 고독과 단절, 그러나 그 안에서 발견되는 위로는 결코 이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앤드류 포터는 삶의 변화와 상실을 다루면서도 희망과 성장을 이야기한다. 어떤 이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어떤 이는 여전히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또는 외면하기 위해 과장된 제스처를 남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아니 그들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일부는 이미 수용했음을 알고 있다. 상실은 곧 성장으로 이어진다.


젊음의 끝이 삶의 끝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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