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은 보는게 아니라 읽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림이 처음부터 읽기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는 미술도, 그저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화가들의 지위는 'Ego'와 'Creative'의 화신인양 거드름을 피우는 오늘날의 Artist와는 달랐다. 그들은 돈을 받고 그림을 그렸고 자신을 후원하는 귀족이나 왕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에 불과했다. 이런 직업이라도 갖고 싶은 사람은 공방에 들어가 도제 수업을 받아야 했는데, 그곳에서 가르치는건 예술이 아니라 물감을 섞고 소실점을 찾는법 즉, '기술'이었다.  

 

 

상황을 어렵게 만든건 비평가들이다. 비평가들은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그림들을 꺼내 그것들이 드러내는 일관된 형식을 발견해 냈다. 그들은 이것에 사조라는 이름을 붙여 줄을 세우고 다시금 역사로 돌아가 그것을 탄생시킨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찾아내는데, 바로 그 순간 이 세상에 '미술사'라는 새로운 형식이 태어나게 된다. 

인간이 무언가로부터 비평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먼저 그것을 대상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상화란 곧 내가 아닌 무엇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술사가 아직은 역사의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을 때 그것은 역사와 하나였고 따라서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그림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술사가 역사로부터 독립하는 순간 그림은 인간에게 대상이 되었고 보라, 우리는 마침내 그림을 보지 않고 읽게 되었다.

이쯤에서 한가지 고백을 해야겠다. 미안하지만 지금까지 한 얘기는 진중권이 아니라, 모두 내가 하는 얘기다. 하는 김에 한 마디만 더하자.

미술이 비평의 대상이 되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하는 동물. 인간의 생각엔 언제나 편견과 주관이 존재한다. 간단한 사실 하나를 두고도 얼마나 많은 관점이 존재하는가? 게다가 시대의 변화는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기까지 한다. 불과 수 십년 전까지만 해도 진실로 여겨지던 것들이 오늘날에 이르러 그 지위를 박탈당해 거리로 내동댕이 쳐지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그리하여 어제의 명화는 오늘의 쓰레기가 되고 오늘의 쓰레기는 미래의 명작이 된다. 축적된 시간에 비례하여 쓰레기와 명작의 자리바꿈은 빈번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뿌옇게 아침을 가리는 안개처럼, 단 하나의 진실을 찾아 떠나는 우리의 여정에 얄궂은 훼방꾼이 된다. 

 

 

진중권의 그림 읽기는 이 짙은 안개 속에서 벌이는 고의적 길잃기다. 그의 작품 해석은 '정합적으로 완결된 체계'를 갖추지 않고 일부러 표류한다. 새로운 해석이 널리 알려진 해석을 덮치고 이전의 관점은 새로운 관점에 습격당한다.

이 책은 서두에 자신의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미술에 관한 어떤 책들은 마치 작품 속에 누구나 읽어내야 할 무슨 보편적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전제한다. (중략) 대중을 예술적 문맹으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작품을 읽어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독자로 하여금 작품을 스스로 읽도록 자극하는 것이리라."

다시한번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라. 아직도 안개가 햇빛을 가리고 있다고 믿는가? 미안하지만 해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햇님은 그저 이 세상을 이해하는 여러가지 방법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림 읽기가 괴로운 노동이 아니라 신나는 놀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무한히 허용되는 자유, 끊임없이 생산되는 해석의 다양성에 있다. 그러니 무엇이 맞고 틀렸는지 따지는건 바보같은 똑똑이들의 소관으로 맡겨두자. 그들이 있지도 않은 진실을 찾아 햇빛에 눈이 멀때, 캄캄한 안개 속에서 열심히 춤추는 것만이 이 놀이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임퀘이크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 '뇌'라고 불리는 3.5파운드의 피묻은 해면체에 재치 넘치고 웃음끼 가득한 소설의 생산 공장을 차려놓은 커트 보네거트는 바로 이 소설 '타임 퀘이크'를 마지막으로 그의 기나긴 필모그래피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커트 보네거트 자신 혹은 그의 팬들이라면 거의 예외없이 이 모든 상황과 감정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한 마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는거지.(So it goes)
 

 

 

들어보라. 커트 보네거트 Jr, 흔히 커트 보네거트라 불리는 이 사내는 1922년 11월 11일, 지구가 얼마나 잔인해질지 예상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두 남녀의 종족보존욕구에 따라 10개월의 생산 과정을 거친 뒤 이 세상에 태어났다. 더 들어보라. 그는 대학 생활 중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정찰병으로 적의 척후를 살피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고 드레스덴 폭격의 신나는 불놀이를 체험했다.

그 참혹한 현장을 뚫고 '운 나쁘게 살아남은' 커트 보네거트는 언젠가 이 경험을 소설로 옮길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24년이 지나기까지 커트 보네거트는 무명 소설가로 살아가게 된다. 1969년, 마침내 그때의 경험을 배경으로한 대작 소설 제5 도살장이 나왔을 땐 그의 나이 이미 불혹을 넘긴 47세 였다.  

타임퀘이크는 47년간 무명으로 살아온 소설가가 75세가 되었을 때 생산한 책이다. 보네거트의 이름을 단 소설은 여기서 대가 끊긴다. 작가 스스로도 그것을 예감했는지 소설은 이 위대한 작가가 살아온 일평생을 한 바구니에 담아 놓은 것처럼 푸짐하고 밀도 높으며 또 총체적이다.
 

 

 

들어보라. 이 세상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우주적 경련에 의해 시공간이 10년의 시간만큼 수축한 뒤 다시 팽창하기 시작했다. 예외없이, 전 지구의 모든 인간들에게 다시 주어진 이 10년의 시간은 그러나 후회와 반성으로 점철된 사람들의 과거를 바꾼다거나 하는 긍정적 의미의 사태가 결코 아니었다. 보네거트에 따르면 타임퀘이크, 삼류 SF 작가 킬고어 트라우트에 의하면 '자동항법에 맡긴 10년'에 해당하는 이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996년 3월 21일에 사소한 말 다툼으로 아내를 쏴 죽인 남자가 있다면 그는 다시 한번 돌아온 1996년 3월 21일에 어김없이 아내를 쏴 죽이고 감옥에 갇혀 종신형을 수행해내야 했다. 버튼 하나로 수 만명을 살해했던 남자는 다시금 버튼을 눌러 수 만명을 살해해야 했다. 끊어진 다리를 눈치채지 못하고 절벽 밑으로 떨어진 고속 열차는 끊어진 다리 끝에서 다시 한번 다이빙 해야 했으며 가난과 싸우다 지쳐 강물 위로 몸을 날린 여자는 어김없이 다가온 그 시간에 차가운 강물과 재회해야 했다. 

그러니까 다시 주어진 10년은 기회가 아니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되풀이되는 기계적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종의 데쟈뷰를 느끼며 이 시간을 보냈는데 그들이 자기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들은 실제로 자동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존 레논을 죽이라'는 악마의 음성을 듣고 그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행위와 타임퀘이크 이후에 회사에 출근하고 맥주와 야구를 즐기고 잔디를 깍으며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행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 둘 모두 꼭두각시 노릇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타임퀘이크가 일어난 지 정확히 10년 뒤,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되찾는다. 그러나 그 순간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진다. 오랜기간 사고가 마비되었던 탓에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잊어 버렸다. 그래서 길을 걷던 사람들은 다음 순간 어느 발을 내딛어야 할지 몰라 넘어졌고 달리던 자동차들은 갈 곳을 잃고 보도와 건물로 뛰어들었으며 비행기는 추락했다.

이 와중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평소의 삶을 유지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노숙자들이었다. 그들의 삶에는 애초에 아무런 목적도 없었기에 갑자기 찾아온 자유의지 앞에서도 삶의 방향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단지 누워있었을 뿐이며 앞으로의 10년도 계속해서 누워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무용함이야 말로 타임퀘이크 이후에 가장 유용한 덕목이 될 수 있었을줄은 누가 알았으랴?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노숙자들 중엔 삼류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도 속해 있었다. 그는 인간들에게 자유의지가 돌아왔음을 알아챘다. 그는 잠들어 있던 노숙자를 깨우고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을 흔들며 이렇게 외쳤다. 

'자유의지야!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돌아왔다고!'

이렇게 해서 지구의 인간들은 다시금 자유의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세상은 난장판이 됐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할 일은 무척 많았다.
 

 

 

타임퀘이크는 '되돌린 시간'이라는 SF 소재를 품고 있지만 사실 내용 자체는 전혀 SF적이지 않다. 그저 75세 노작가가 살아온 다양한 삶의 파편들이 아무렇게나 꿰어진 구슬처럼 그로테스크하게 이어질 뿐이다. 타임퀘이크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우주적 스펙타클이 벌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에 그런건 없다. 타임퀘이크는 멍청할 정도로 잘못을 반복하는 인간 역사의 상징일 뿐이다.  

커트 보네거트가 '타임퀘이크'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른바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인간들이 현실 세계에서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약탈과 전쟁에 대한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볼 수 있는 인간 역사를 돌이켜 보라. 인간은 지난 수천년 동안 엄청난 진보를 한 것처럼 뽐내지만 이라크를 침공하는 미국의 모습에선 여전히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는 기독교 강도들의 모습이 연상될 뿐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거의 예외없이 인간의 역사가 반복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도 인간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출처는 기억 나지 않지만, 커트 보네거트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만약 인간이 1차 세계대전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다면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거대한 불자지 두 마리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강간한 사실을 우리 모두는 기억한다. 아마도 다음 차례는 당신이 잠들어 있는 침대 위가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는 역시, 

타임퀘이크! 

애초에 핵폭탄 같은게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로켓, 아니 엔진, 아니 아니 차라리 도구라는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대가족을 이루고, 벌거벗은 남녀가 벌판을 뛰어다니며 물에서는 물고기를 땅에서는 짐승의 고기를 얻던 시절을 지켰더라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는 순결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러고보니 어떤 시인이 이런 말도 했던 것 같다. 

혀나 펜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슬픈 말 중에서 가장 슬픈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건 바로,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는데!'라는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okii 2011-03-25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가 읽은 것중에 최고 수준의 서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딩동댕이네요.

한깨짱 2011-03-25 21:18   좋아요 0 | URL
헛! 다시 읽어 보니 문장들이 너무 길고 어려운 것 같네요. 그래도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창피하네요 ㅋ

jinny1734 2011-08-3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찮게 댓글을 읽고 펑펑 울었네요 스쳐가는 이런 작은 인연들이 있어 전 숨을 쉴 수 있는 거 같아요..
가끔 이런 멋진 내공이 느껴지는 글 앞을 접하게 되면 한없이 작아지면서도 가슴 저 곳에서 밀려오는 감탄이 저를 한동안 행복하게 한답니다.. 처음으로 글 한 줄 남기고 싶어,,아니 실천에 옮겨보는 거 같네요,, 전 늘 모든 일에 항상 생각만 하다 지나치고 마는 별 쓸모없는 습관 탓에 소중한 경험을 할 수있는 걸 스스로 차단하며 산 것 같아요.. 물론 꼭 자의적인 건 아니라해도 ... 후회가 밀려와 당장 이것만 해결되면 다시는 미루지 않고 다 해보리라 함서도 결국엔 다시 .... 참 어리석네요...
암튼 글 한 줄로 가슴에 엉킨 답답한 그 무언가가 조금 풀렸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한깨짱 2011-08-31 19:22   좋아요 0 | URL
오늘 생각만 하시던 일을 드디어 실천에 옮기셨다니 축하 드립니다. 오늘을 발판 삼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하나씩 하나씩 조그만 실천을 해나가셨으면 좋겠네요. 부족한 글을 칭찬해 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저도 많은 힘을 얻습니다. 제 글을 읽고 힘을 얻으신 것처럼 저 또한 가슴 찡한 기쁨에 춤을 추게 됩니다.

앞으로 맞이할 시간들이 더욱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로 가득하길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 외 지음, 정재곤 옮김 / 세상사람들의책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방글라데시라고 아는가? 나는 어릴 적,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라고 배웠다. 그리고 당시 선생님께선, 대한민국의 사람 수도 너무 많아 언젠가 방글라데시처럼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곁들였던 것 같다.

아마도 선생님은, 그래도 아시아에선 꽤 잘나가는 나라의 초등학교 교사로서, 암울했던 60-70년대의 절대 빈곤을 떠올리며,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나갈 어린이들에게 국제 정세의 이해를 통한 반면교사의 진리를 깨우쳐줘야 한다는 의무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수업 지도 참고서에 이런 말을 곁들이면 좋다고 나와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아무렴 어때.
 

 

 

어쨌든 수 십 년이 지난 오늘 방글라데시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최빈국 이고 한국은 여전히, 아시아에서 꽤 잘나가는 나라로 군림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 같은건 한국이 아닌 방글라데시에서 나오는게 당연하다. 정말?
정말인지 아닌지는 각자가 생각해보도록 하고 일단은 사실에 입각한, 과장과 거짓이 전혀 덧붙여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겠다.

들어보라. 무하마드 유누스는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영국에서 독립한 인도에서 독립한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동파키스탄 사람이다. 인도에서 독립한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1971년 내전을 통해 감동의 독립을 쟁취하면서 자신의 국호를 바꾸는데, 그 이름을 방글라데시라 하였다.

더 들어보라. 이 방글라데시가 아직은 파키스탄은 커녕 인도로 불리던 1940년, 무하마드 유누스는 태어났다. 그는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가 된 5년 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 대출을 해주기 시작했는데, 이를 살펴보던 북유럽의 한 사설 단체는 그의 행동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기타 등등의 인간들과 매우 구분된다 하여 2006년, 상장과 일정의 상금을 전달했다. 나는 이 상금이 다이너마이트를 판 돈으로 만든 것이라고 알고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가 외친다. 

'인간이 달에까지 도달하는 세상에 왜 아직도 가난은 존재하는가?'

내가 대답한다.

'짹짹?'

요새 실감하는 일인데,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 질 수 밖에 없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는다 누가 나한테 전세집 하나만 준다면, 아니 전세 대출을 신용등급에 상관 없이 저리로 빌려준다면 나는 하나님과 알라와 부처에게 각각 10만원 씩, 국가와 민족을 위해 10만원 씩, 심지어 한나라당과 민주당에까지 10만원 씩 기부를 하고도 우리은행 대출계에 따박따박 원금과 이자를 상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앞으로도 가난할 예정이다.

스케일은 작지만 방글라데시 사람들도 다를 바 없다. 물론 상황은 더 끔찍하다. 이 사람들은 150달러가 없어 고통 받는다. 그 돈이 있으면 집을 짓고 가축을 사서 이자와 원금을 갚고 나아가 저축을 만들어 가축 한 마리를 더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돈이 없어서 초고리의 사금융으로 대나무를 사온다. 그 대나무로 하루종일 의자를 만든다. 사채업자에게 의자를 갖다주면 하루 200원을 받는다. 하루종일 일해도 먹고 살기가 빠듯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두 발로 서서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일을 해야 한다. 학교에는 가지 못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죄로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 죄로 초고리의 대나무 재료를 사온다. 가난이 대물림 된다.

돈을 빌리지 말고 직접 재료를 사서 시장에 내다 팔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텐데하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지 마라. 아무렴 이 사람들이 그 정도로 멍청할까. 딱 한번, 대나무 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평생 저렇게 산다. 차라리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다.  

 

 

1976년 방글라데시에 최악의 기근이 덮쳤을 때, 치타공 대학의 경제학 교수 무하마드 유누스는 대학의 문을 열고 마을로 내려왔다. 그리고 초고리의 대나무 재료를 구입하는 그 사람들을 봤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열어 마흔 두 사람에게 첫 번째 대출을 제공했다. 대출을 받은 주민들은 목숨을 구원 받았다. 이때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무려' 27달러였다.

그 해 무하마드 유누스는 직접 은행을 설립한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복잡한 대출 신청 서류를 요구하고 대나무 재료를 살 돈이 없는 사람에게 담보를 요구하는 은행들을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은행을 '그라민 은행'(마을 은행)이라 불렀다.
그라민 은행이 유니세프, 사랑의 열매, 사랑의 빵, 사랑의 떡볶이, 사랑의 짜장면, 사랑의 탕수육 기타 등등 빈민 구제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바로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무능력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편견과 맞서 싸웠다. 또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오히려 그 누구보다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 원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그들을 영원한 가난 속으로 쳐 넣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하마드 유누스는 자선 단체가 아닌 은행을 세웠고 적선이 아닌 대출을 시작했다. 그것도 결코 낮지 않은 이자를 받아가면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나무 재료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이자를 내고 원금을 갚겠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액 대출은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탈출구였다. 그라민 은행의 채무자들은 집을 짓고 소를 샀으며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느리지만 꾸준히 대출금을 갚았고 가난의 그림자를 무지개 색으로 칠해 나갔다. 아이들은 다시금 학교에 나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Wikipedia에 따르면 현재 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 전국에 1,175개의 지점을 갖고 있으며 총 3조 6천억원의 대출을 해줬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원금 상환율은, 현재 98%에 달한다.
 

 

 

대한민국은 잘 사는 나라니까 가난같은거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눈을 돌려보라. 가난은 도처에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선이 아니라 '평등한 기회'라고 말했다. 가난은 분명 구조의 문제다. 그러므로 당신 주위에 가난이 존재한다면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당신 자신 또한 가난의 가해자다. 거창한 일을 벌여보자는 게 아니다. 그저 잘못된 문제를 바로잡아 보자는 얘기다. 나는 적어도 50년 동안은 우리 지구인들이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주는 가난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eige 2011-02-11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읊조리듯한 담백한 글투가 좋네요 :D

한깨짱 2011-02-11 21:30   좋아요 0 | URL
제가 약간 자폐 성향이 있습니다. 혼잣말을 많이하고 멍하니 있을 땐 머리 속의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를 합니다. 그런 성향이 문장에 드러나나 보네요. 참 신기합니다.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장하준 지음, 지승호 인터뷰 / 시대의창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하준은 워낙 글을 쉽게 쓰는 사람이라 인터뷰 같은 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책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쌍방향 소통. 묻고 답하기. 때때로 말대꾸와 반박. 이런건 일반 저술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다. 저자와 직접 이메일을 주고 받을 수도 있지만 좋은 답변에는 언제나 좋은 질문이 선행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말대꾸와 질문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지승호다.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전문 인터뷰어라고 한다. 여기다가 장하준의 후배 윤미선 박사와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빈재익 박사가 더해졌다. 네 사람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담소하듯, 신자유주의와 주주자본주의를 깐다. 뒷담화만큼 재밌는 일은 참 드물다. 

 

 

 

신자유주의의 나쁜 점이라면 수 백만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특히 우리 나라 재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건 '자본 시장의 전면 개방'이다. 그럼 자본 시장이 전면 개방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외국의 거대 자본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우리 자본 시장에 드나들 수 있게 된다.

얼핏보면 자본의 유동성이란 당연한거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 시장의 개방은 바람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나라같은 빈국이(貧國) 자본 시장을 개방하게 되면 곧바로 막대한 규모의 다국적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된다. 쉽게 말해 SK와 삼성전자의 주인이 외국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국내 재벌 꼴보기 싫으니까 외국 자본이 혼내주면 쌤통 아니냐고? 하지만 천만에, 이런 사람들이 주인이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 된다.

우선 투기자본의 유일한 목적은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인재 육성이나 장기 투자 같은건 절대 악이다.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팔든 당장의 이익만 뽑아내면 그만인데 뭐하러 골치 아픈 미래 비전을 구상하겠는가?

게다가 이 사람들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국익과 사회 기여에 대한 의무가 전혀 없다. 그래서 기업을 인수 한 뒤 임금 동결, 대규모 구조 조정, 미래 사업 정리 등으로 단기 이익을 극대화한다. 이익금은 바로 배당금으로 직행한다. 거기다 플러스 알파로, '사상 최대 이익'이라는 달콤한 함정에 빠진 주가가 상한가를 칠 때 막대한 시세 차익을 실현하고 빠져버린다. 흔히 말하는 먹튀가 바로 이거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오히려 투기 자본이 일정 비율의 지분을 차지한 뒤 재벌들의 경영권을 압박할 때 발생한다. 이런 일은 IMF 시절 주주자본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일련의 제도적 장치들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런 제도들은 국내 기업의 지배 구조를 개선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의 대다수가 외국 자본에 의해 잠식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당시 도입된 제도를 살펴보면, 소수(소액)주주의 권한 강화, M&A 규정 완하 등이다. 투기 자본은 이러한 제도를 이용해 공략 기업의 주식을 일정 지분 확보, 강화된 소수(소액)주주의 권한을 이용해 이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이사를 선임하거나 CEO의 퇴진을 요구) 막대한 배당을 요구 또는 M&A 의사를 밝히는 등 본격적으로 회사의 경영권을 압박하게 된다.
이때 기업의 주가가 떨어지게 되면 그만큼 투기 자본의 공략이 더 쉬워지기 때문에 경영진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막대한 배당금을 지급해 주가를 방어한다. 

 

 

 

그럼 배당금이나 자사주 매입금은 재벌의 주머니에서 나오느냐? 아니다. 그 돈은 전부 기업 활동을 통해 얻은 영업 이익이다. 영업이익이란 기업이 순수하게 생산 활동을 통해 얻은 잉여금으로 미래 사업에 투자하거나 직원들 복리후생 챙겨주고 오갈데 없는 졸업자들 일자리를 마련해줄때 가장 빛나는 돈이다. 이런 돈이 엄한데 가서 힘을 빼고 있으니 그 폐해를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더 처참한건 이 뒤 부터다. 기업이 투자를 못했으니 장기적으로 영업 이익이 줄어드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업 이익이 줄다 보니 주식 시장에 불안감 조성되고 배당이 줄어드니까 주주들이 난리가 난다. 생산성, 기술 발전 속도는 일정하니 갑자기 이익이 늘어날 수는 없는거고 그러다 보니 남은 방법은 임금 깍고 하청업체 쥐어짜서 영업 이익 만드는 거다.

외국놈들이 이런다면야 언론이고 여론이고 다 들고 일어나 난리를 치겠지만 대한민국 재벌들이 이런짓을 하면 어디가서 하소연 할데도 없다. 언론과 재벌은 일치단결. 임금 좀 올려보겠다고 파업하면 조중동 3사에서 '고액 연봉자 염치 없는 파업 러쉬', '파업에 멍드는 우리 기업, 외국 자본의 먹잇감 된다' 한 마디씩 해주면 사람들은 다 그런가 보다 하며 애꿎은 놈한테 손가락질이다. 자기 자식이 배를 곯아도 정신 못차릴 사람들이다. 

 

 

 

장하준은 언제나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 치우침없는 중용을 주장하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간결함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못해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세가지 특성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완벽함은 결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 아님에도 나는 그를 읽을 때 마다 언제나 이 말을 떠올리게 된다. 게다가 1963년생 아직 마흔 일곱. 그야말로 귀추가 주목되는 요주의 인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eige 2011-02-11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때는 몇 권의 책들보다 잘 짜여진 인터뷰집이 좋지요 ㅎㅎ

한깨짱 2011-02-11 21:29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장하준님의 신간도 읽어봐야 하는데 원래 신간은 묵혀뒀다 보는 성미인지라 내리 1년은 기다려야 할 것 같네요.
 
고양이 요람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백하건대, 코맥 매카시 이후로 이렇게 빠져든 소설가는 처음이다. 반전과 평화를 주장하고 재벌과 국가 지도층을 강도높게 풍자하는, 이른바 진보 주의적 사상이 나의 코드와 높은 싱크로율을 이룬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소설이 아주 웃기고 또 짧다는 사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애써 숨기고 싶지는 않다.

그리하여 나는 '제 5도살장'을 거쳐 '마더 나이트'로,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를 경유한 뒤 마침내 이 소설 '고양이 요람'에 다다르게 되었다.  

 

 

 

'고양이 요람'은 커트 보네거트의 전매특허인 허무를 메인 디너로, 반전과 반기독교를 사이드 디쉬로 한 블랙 코미디다. 그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언제나 극단적인 인격 장애를 가진 캐릭터들인데,  

보라, 여기에도 어김 없이 정신병자가 등장한다.

펠릭스 호니커 박사. 원자 폭탄의 아버지가 되어 2차 세계 대전을 종결지은 이 천재 과학자는 원폭 실험을 지켜보던 동료가 '이제 드디어 과학이 죄를 알게 되었군'이라고 하자 '죄가 뭐죠?'라고 묻는 천진난만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펠릭스 호니커에게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이 전혀 없는 셈인데 이것은 '마더 나이트'에 등장한, 유대인 600만명을 살해하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아이히만'을 연상케 한다.

펠릭스 호니커는 전쟁이 끝난 뒤 2만 6천 달러의 연봉을 받는 제네럴 단주조회사의 연구원으로 돌아간다.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그의 손에는 노벨 물리학상이 들려 있었다. 가스실이나 시체 매립장 따위의 시설 투자 없이도 수 십만의 사람들을 눈 깜짝할 새에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었다.

이제 과학계의 전설이 된 물리학자는 차기 연구 과제로 '아이스 나인(아이스-9)'을 발명하게 된다. 아이스-9은 수분과 반응할 경우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 버릴 수 있는 가공할 만한 물체였는데 펠릭스 호니커는 이것을 제조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빙결되고 이를 발견한 천재 과학자의 세 자식들은 아이스-9을 나눠 가진 뒤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난다.  

 

 

 

이들이 다시 모인 곳은 산 로렌조 공화국. 그곳은 세상에 대한 지독한 허무와 냉소를 표현하며 자기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거짓말이라고 가르치는 보코논교의 원산지였다.

보코논의 가르침에 따라 서로의 발바닥을 문질러 정신적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일이 없는 산 로렌조 공화국의 국민들은, 펠릭스 호니커가 낳은 악마의 씨앗들이 자신의 땅을 밟는 것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철저한 보코논식 환영법이었는데 보코논교에 따르면 그들의 방문은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지도록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 형제 - 큰 누나와 남동생 둘 -의 실수로 아이스-9이 바다에 빠지고 이로인해 온 지구가 얼어 붙게 되었을 때도 그들은 당연히 올 것이 온 것처럼 행동했고, 자연스레 아이스-9 한 조각을 각자의 입속에 넣었다. 

 

 

 

커트 보네거트가 자신의 문학을 통해 줄기차게 던지고 있는 문제 의식 즉, 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이라는 통찰은 '고양이 요람'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원자탄으로 14만명을 소멸시킨 펠릭스 호니커와 유대인 600만명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의 공통점은 그들이 타인의 고통에 철저히 무관심했다는 사실이다. 이 무관심은 결코 악의적인 무관심이 아니다. 마치 전전두엽이 손상된 환자처럼 그들은 선악을 구분할 줄 몰랐고 심지어 선과 악이 무엇인지 조차 몰랐다. 핵폭탄의 트림으로 불타오를 14만의 영혼 앞에서, 펠릭스 호니커는 이렇게 묻는다. '죄가 뭐죠?'

'짹짹?'

버튼 하나로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절단된 사지와 불에 타는 아이들을 보지 못한다. 전쟁은 모니터에만 존재할 뿐 그 고통과 비명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말을 바꿔서 해볼까?

말 한마디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절단된 시민의 꿈과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을 보지 못한다. 정치는 선거 기간에만 존재할 뿐 국민의 고통과 비명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국회의원 정몽준이 서민 물가가 치솟는 것에 무관심했던 이유는 그가 특별히 나쁜 정치인이거나 새디스트였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버스요금이 70원 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보코논은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한 말을 이렇게 바꾼다.

'카이사르는 신경 쓸 것 없다. 카이사르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내일도 어김없이 무관심과 무지로 이 세상을 다스릴 모든 통치자들과 그 부하들에게 고양이 요람 100권 씩을 택배로 보내려 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wired.husky@gmail.com으로 연락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