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장하준 지음, 지승호 인터뷰 / 시대의창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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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은 워낙 글을 쉽게 쓰는 사람이라 인터뷰 같은 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책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쌍방향 소통. 묻고 답하기. 때때로 말대꾸와 반박. 이런건 일반 저술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다. 저자와 직접 이메일을 주고 받을 수도 있지만 좋은 답변에는 언제나 좋은 질문이 선행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말대꾸와 질문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지승호다.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전문 인터뷰어라고 한다. 여기다가 장하준의 후배 윤미선 박사와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빈재익 박사가 더해졌다. 네 사람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담소하듯, 신자유주의와 주주자본주의를 깐다. 뒷담화만큼 재밌는 일은 참 드물다. 

 

 

 

신자유주의의 나쁜 점이라면 수 백만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특히 우리 나라 재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건 '자본 시장의 전면 개방'이다. 그럼 자본 시장이 전면 개방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외국의 거대 자본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우리 자본 시장에 드나들 수 있게 된다.

얼핏보면 자본의 유동성이란 당연한거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 시장의 개방은 바람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나라같은 빈국이(貧國) 자본 시장을 개방하게 되면 곧바로 막대한 규모의 다국적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된다. 쉽게 말해 SK와 삼성전자의 주인이 외국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국내 재벌 꼴보기 싫으니까 외국 자본이 혼내주면 쌤통 아니냐고? 하지만 천만에, 이런 사람들이 주인이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 된다.

우선 투기자본의 유일한 목적은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인재 육성이나 장기 투자 같은건 절대 악이다.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팔든 당장의 이익만 뽑아내면 그만인데 뭐하러 골치 아픈 미래 비전을 구상하겠는가?

게다가 이 사람들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국익과 사회 기여에 대한 의무가 전혀 없다. 그래서 기업을 인수 한 뒤 임금 동결, 대규모 구조 조정, 미래 사업 정리 등으로 단기 이익을 극대화한다. 이익금은 바로 배당금으로 직행한다. 거기다 플러스 알파로, '사상 최대 이익'이라는 달콤한 함정에 빠진 주가가 상한가를 칠 때 막대한 시세 차익을 실현하고 빠져버린다. 흔히 말하는 먹튀가 바로 이거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오히려 투기 자본이 일정 비율의 지분을 차지한 뒤 재벌들의 경영권을 압박할 때 발생한다. 이런 일은 IMF 시절 주주자본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일련의 제도적 장치들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런 제도들은 국내 기업의 지배 구조를 개선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의 대다수가 외국 자본에 의해 잠식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당시 도입된 제도를 살펴보면, 소수(소액)주주의 권한 강화, M&A 규정 완하 등이다. 투기 자본은 이러한 제도를 이용해 공략 기업의 주식을 일정 지분 확보, 강화된 소수(소액)주주의 권한을 이용해 이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이사를 선임하거나 CEO의 퇴진을 요구) 막대한 배당을 요구 또는 M&A 의사를 밝히는 등 본격적으로 회사의 경영권을 압박하게 된다.
이때 기업의 주가가 떨어지게 되면 그만큼 투기 자본의 공략이 더 쉬워지기 때문에 경영진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막대한 배당금을 지급해 주가를 방어한다. 

 

 

 

그럼 배당금이나 자사주 매입금은 재벌의 주머니에서 나오느냐? 아니다. 그 돈은 전부 기업 활동을 통해 얻은 영업 이익이다. 영업이익이란 기업이 순수하게 생산 활동을 통해 얻은 잉여금으로 미래 사업에 투자하거나 직원들 복리후생 챙겨주고 오갈데 없는 졸업자들 일자리를 마련해줄때 가장 빛나는 돈이다. 이런 돈이 엄한데 가서 힘을 빼고 있으니 그 폐해를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더 처참한건 이 뒤 부터다. 기업이 투자를 못했으니 장기적으로 영업 이익이 줄어드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업 이익이 줄다 보니 주식 시장에 불안감 조성되고 배당이 줄어드니까 주주들이 난리가 난다. 생산성, 기술 발전 속도는 일정하니 갑자기 이익이 늘어날 수는 없는거고 그러다 보니 남은 방법은 임금 깍고 하청업체 쥐어짜서 영업 이익 만드는 거다.

외국놈들이 이런다면야 언론이고 여론이고 다 들고 일어나 난리를 치겠지만 대한민국 재벌들이 이런짓을 하면 어디가서 하소연 할데도 없다. 언론과 재벌은 일치단결. 임금 좀 올려보겠다고 파업하면 조중동 3사에서 '고액 연봉자 염치 없는 파업 러쉬', '파업에 멍드는 우리 기업, 외국 자본의 먹잇감 된다' 한 마디씩 해주면 사람들은 다 그런가 보다 하며 애꿎은 놈한테 손가락질이다. 자기 자식이 배를 곯아도 정신 못차릴 사람들이다. 

 

 

 

장하준은 언제나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 치우침없는 중용을 주장하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간결함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못해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세가지 특성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완벽함은 결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 아님에도 나는 그를 읽을 때 마다 언제나 이 말을 떠올리게 된다. 게다가 1963년생 아직 마흔 일곱. 그야말로 귀추가 주목되는 요주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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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ge 2011-02-11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때는 몇 권의 책들보다 잘 짜여진 인터뷰집이 좋지요 ㅎㅎ

한깨짱 2011-02-11 21:29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장하준님의 신간도 읽어봐야 하는데 원래 신간은 묵혀뒀다 보는 성미인지라 내리 1년은 기다려야 할 것 같네요.
 
고양이 요람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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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코맥 매카시 이후로 이렇게 빠져든 소설가는 처음이다. 반전과 평화를 주장하고 재벌과 국가 지도층을 강도높게 풍자하는, 이른바 진보 주의적 사상이 나의 코드와 높은 싱크로율을 이룬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소설이 아주 웃기고 또 짧다는 사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애써 숨기고 싶지는 않다.

그리하여 나는 '제 5도살장'을 거쳐 '마더 나이트'로,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를 경유한 뒤 마침내 이 소설 '고양이 요람'에 다다르게 되었다.  

 

 

 

'고양이 요람'은 커트 보네거트의 전매특허인 허무를 메인 디너로, 반전과 반기독교를 사이드 디쉬로 한 블랙 코미디다. 그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언제나 극단적인 인격 장애를 가진 캐릭터들인데,  

보라, 여기에도 어김 없이 정신병자가 등장한다.

펠릭스 호니커 박사. 원자 폭탄의 아버지가 되어 2차 세계 대전을 종결지은 이 천재 과학자는 원폭 실험을 지켜보던 동료가 '이제 드디어 과학이 죄를 알게 되었군'이라고 하자 '죄가 뭐죠?'라고 묻는 천진난만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펠릭스 호니커에게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이 전혀 없는 셈인데 이것은 '마더 나이트'에 등장한, 유대인 600만명을 살해하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아이히만'을 연상케 한다.

펠릭스 호니커는 전쟁이 끝난 뒤 2만 6천 달러의 연봉을 받는 제네럴 단주조회사의 연구원으로 돌아간다.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그의 손에는 노벨 물리학상이 들려 있었다. 가스실이나 시체 매립장 따위의 시설 투자 없이도 수 십만의 사람들을 눈 깜짝할 새에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었다.

이제 과학계의 전설이 된 물리학자는 차기 연구 과제로 '아이스 나인(아이스-9)'을 발명하게 된다. 아이스-9은 수분과 반응할 경우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 버릴 수 있는 가공할 만한 물체였는데 펠릭스 호니커는 이것을 제조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빙결되고 이를 발견한 천재 과학자의 세 자식들은 아이스-9을 나눠 가진 뒤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난다.  

 

 

 

이들이 다시 모인 곳은 산 로렌조 공화국. 그곳은 세상에 대한 지독한 허무와 냉소를 표현하며 자기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거짓말이라고 가르치는 보코논교의 원산지였다.

보코논의 가르침에 따라 서로의 발바닥을 문질러 정신적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일이 없는 산 로렌조 공화국의 국민들은, 펠릭스 호니커가 낳은 악마의 씨앗들이 자신의 땅을 밟는 것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철저한 보코논식 환영법이었는데 보코논교에 따르면 그들의 방문은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지도록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 형제 - 큰 누나와 남동생 둘 -의 실수로 아이스-9이 바다에 빠지고 이로인해 온 지구가 얼어 붙게 되었을 때도 그들은 당연히 올 것이 온 것처럼 행동했고, 자연스레 아이스-9 한 조각을 각자의 입속에 넣었다. 

 

 

 

커트 보네거트가 자신의 문학을 통해 줄기차게 던지고 있는 문제 의식 즉, 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악한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이라는 통찰은 '고양이 요람'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원자탄으로 14만명을 소멸시킨 펠릭스 호니커와 유대인 600만명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의 공통점은 그들이 타인의 고통에 철저히 무관심했다는 사실이다. 이 무관심은 결코 악의적인 무관심이 아니다. 마치 전전두엽이 손상된 환자처럼 그들은 선악을 구분할 줄 몰랐고 심지어 선과 악이 무엇인지 조차 몰랐다. 핵폭탄의 트림으로 불타오를 14만의 영혼 앞에서, 펠릭스 호니커는 이렇게 묻는다. '죄가 뭐죠?'

'짹짹?'

버튼 하나로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절단된 사지와 불에 타는 아이들을 보지 못한다. 전쟁은 모니터에만 존재할 뿐 그 고통과 비명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말을 바꿔서 해볼까?

말 한마디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절단된 시민의 꿈과 굶주림에 지친 아이들을 보지 못한다. 정치는 선거 기간에만 존재할 뿐 국민의 고통과 비명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국회의원 정몽준이 서민 물가가 치솟는 것에 무관심했던 이유는 그가 특별히 나쁜 정치인이거나 새디스트였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버스요금이 70원 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보코논은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한 말을 이렇게 바꾼다.

'카이사르는 신경 쓸 것 없다. 카이사르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내일도 어김없이 무관심과 무지로 이 세상을 다스릴 모든 통치자들과 그 부하들에게 고양이 요람 100권 씩을 택배로 보내려 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wired.husky@gmail.com으로 연락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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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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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말은 언제나 사람들을 광분케 한다. 광분하는 사람들은 흔히 세 종류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류는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온건파 기독교인이고 두 번째는 한국 기독교의 난잡한 번식을 비웃고 그 거대화를 맹렬히 비난하는 반기독교파이며 세 번째 부류는 종교적 체험은 오로지 주관적 경험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으므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둘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믿는 중도파다.

만약 술자리라면 주로 반기독교파 친구가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이고 온건파 기독교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으며 마지막으로 중도파가 과열된 분위기를 식히며 건배를 제안하는 장면이 목격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는 대단히 점잖은 케이스고 좀 더 흔하게는 고성이 욕설로, 욕설이 주먹다짐으로 번지고 마는 아비규환의 사태가 벌어지고야 만다. 완전히 달라보이는 두 케이스가 갖고 있는 유일한 공통점은 둘 모두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버틀란드 러셀의 글 모음이다. 책 자체는 기독교를 비롯하여 아동, 대학 교육, 성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제목은 이 책의 첫 꼭지에 해당하는 기고문의 제목을 차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반 기독교 정서를 이용하려는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러셀이 기독교 교리를 위와 같은 사회 문제의 근본적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러셀은 니체 이후 가장 확고한 안티 크리스트 철학자이며 철저한 합리주의로 이 세상의 모든 비이성에 - 권력과 종교 그리고 둘의 결합 - 철퇴를 날린 자유주의 사상가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라 고백하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장로님께서 대통령이 되는 판국에 무슨 얘기냐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실제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기독교는 부패와 독선의 상징이 된지 오래다. 왜 교회를 다니냐는 말에는 애매모호한 대답이 돌아오지만 왜 교회를 증오하느냐는 질문에는 수 백만개의 논리적 답변이 돌아오는 것만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건 우리가 기독교를 부정하는 수 백만개의 이유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이 존재하느냐 안하느냐에 대한 근거는 될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자가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 사형을 언도 받았다고 치자. 우리는 그의 행위를 조목 조목 밝혀 죗값을 치르게 할 수는 있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범죄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의 행위는, 그 잊혀지지 않는 악행들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날카롭게 박혀 심지어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그 행위를 유발한 존재를 강력히 증거하는 사실일뿐 결코 행위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논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러셀의 기독교 비판도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실제로 신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밝히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고대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온 제1원인론, 자연 법칙론, 목적론을 차례로 반박하는 것으로 그 포문을 연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러셀의 철학적 논증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철학자들은 직업상의 이유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말로 증명하려 하는데 이런 태도는 그것이 이론적으로 규명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말로 설명될 수 있고 언어로 증명되야만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거라면 우리가 명백히 느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 즉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정서적, 심리적, 초자연적 경험들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러셀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시한 단 한 가지 이유만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이 전지전능한 존재였다면 결코 이 세상을 폭력과 전쟁, 강간과 살인이 만연하는 곳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 이라는 주장이다.

이 말은 논리적이진 않지만 - 신은 선이며 질서를 추구한다는, 증명할 수 없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 대단히 쉽다. 신이라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예상할 수 있고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절대자라면 왜 세상이 이렇게 악해지도록 놔두는 걸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신은 이 지구와 인간을 살려 두는 걸까?

누군가는 세상에 만연하는 이 모든 악들이 사실은 심판의 징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가 핵전쟁으로 멸망하든 기상이변으로 멸망하든 그건 지나친 군비 확장과 무분별한 환경 파괴로 인한 결과일 뿐이다.

설령 지구가 아주 뜬금없이 행성 충돌에 의해 폭멸한다 할지라도 그걸 신의 심판이라고 믿을만한 근거는 없다. 오늘날의 과학은 그것이 지구와 운석의 만유인력이 일으킨 얄궂은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여전히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유효한 증거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아뿔싸, 그는 당신만큼 악하다! 

 

 

 

나는 신에대한 논쟁을 복잡하게 만드는 원인이 사실은 '우연'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신학적 집착에서 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우리의 삶을 예비해 둔 것이라 믿는가? 이 세상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의 탄생은 필연이라고 믿고 싶은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바다에 떨어진 벼락 한 줄기가 이 모든 것이 시작이었을 지도 모른다.

우연을 믿으면 이 세상은 훨씬 쉽다. 그래서 고백하자면,

우린 그저 우연히 태어났고 그래, 결국 땅에 묻혀 똥이 되는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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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ge 2011-02-11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결론이 최고ㅋㅋㅋ

한깨짱 2011-02-11 21:28   좋아요 0 | URL
하하하 감사합니다. 댓글을 이리 많이 달아주시니 힘이 됩니다.

hiskin 2012-01-1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한깨짱 2012-01-15 14:49   좋아요 0 | URL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
 
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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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는 좀 편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에세이를 읽고 나니 김훈의 문장, 그 어렵고 낯설은 말들의 기원을 어렴풋이 깨달을 뿐 파도처럼 덮쳐오는 말들의 무게에 나는 기어이 탈진하고야 말았다.

에세이가 이렇게 어려워도 되는건가? 그의 말을 빌리면, 문장의 탄생은 처절한 육체 노동의 결과다. 그의 단어는 짓이기고 으깨진 삶이 찔끔 뱉어내는 진주같은 것이고 망가지고 부서진 폐허 속에서 품어낸 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고통 속에서 뽑아낸 삶의 기록이기에, 읽는 이에게는 쓴자의 아픔이 절절이 전해져 온다. 그러므로 김훈의 문장을 읽고 탈진해버렸다는 고백은 그의 글을 제대로 읽었다는 반증이 된다.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 마다 한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남한 산성과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거기서 느껴지는 묵직한 대사들이 실제 김훈의 삶과 막대한 괴리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말이다. 만약 김훈이 깐죽대는 말투에 매일매일 술에 쩔어있고 안 한만 못한 말들을 습관적으로 내뱉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다시는 그의 소설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마치 팬티만 입고 글러브를 낀 브록 레스너가 상대를 향해 짐승같이 달려들며 '나 사실은 게이야'하고 고백할 때와 마찬가지의 충격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소설과 다르지 않았다. 김훈은 젊은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 지내며, 울부짖는 여동생들을 향해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고 외친다. 나는 이 '설화적 대사'를 보자마자 그 진지한 상황에는 아랑곳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대사를 곱씹어 읽으며, 이 사람도 '자신의 문학을 오롯이 살아내는' 사람이구나 하는 안도가 생겼다. 

 

 

 

나는 김훈 소설들의 그 숨죽여 우는 듯한 처연함을 좋아했다. 그의 인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말 못할 사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처럼 담담한 표정 뒤에 슬픈 울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감정을 토하지 못하고 여러차례 곱씹어 안으로 울었다. 나는 나라를 배신하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우륵을 이해했고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선을 깨뜨리면서도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순신을 좋아했다.

그런데 에세이에 나타나는 김훈의 모습에서 나는 이순신을 보았고 우륵을 보았다. 그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해야 하는 소설가였다. 그는 이 무참한 운명이 답답해 질 때면 무심히 흐르는 시간을 따라 자전거를 탔고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강의 하류에 멈춰서 주저 앉았다. 그곳에서 말들은 이지러지듯 피어났다 먼지처럼 사라졌다. 왜놈의 죽음을 딛고 삶으로 나아가는 이순신과 동족의 시체를 밟고 생으로 도망가는 우륵의 모습처럼, 김훈의 문장은 수 없이 명멸하는 생각의 무덤 위에서 살아있는 언어의 춤을 추었다. 

 

 

 

나는 소설이 모를 심어 벼로 바꾸는 한 해의 농사라면 에세이는 모판에 씨를 심어 모를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좋은 에세이라면 작가의 문제 의식이 소설의 언어로 발화하기 이전의 생생한 감정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바다의 기별'은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 안에서 인간 김훈을 보고, 인간 김훈이 느끼는 삶의 고뇌를 알며, 삶의 고뇌에서 꿈틀대며 터져나오는 고통의 문장을 읽었다면,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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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ge 2011-02-11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훈님이 '나는 자전거 레이서다' 하실 때가 제일 좋던데

칼의 노래 서문에서부터 느껴지는 그 처연함과 결연함이란 ...

한깨짱 2011-02-11 21:28   좋아요 0 | URL
김훈님은 정말 문장력이 대단하신 분이죠. 문체도 확실하고 주제도 일관성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해요.
 
셜록 홈즈가 틀렸다 패러독스 4
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여름언덕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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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바야르는 문학 속의 인물들이 공간과 시간을 점유하고 살아가는, 명백한 실재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허구와 실재 사이에는 높은 투과성'이 있어 우리가 책을 읽는 동안 소설 속에 깊이 빠져들듯이 허구 속에 살고 있는 등장 인물들 또한 때때로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로 넘어와 산다고까지 말한다.

허무맹랑한, 지극히 소설가다운 상상이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이런 현상을 현실 세계에서 보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깝게,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죽는다는 소식때문에 방송국에 빗발치는 항의 전화를 생각해 보자. 그들에게 있어 극중 인물의 죽음은 실재하는 죽음과 다름 아니다. 정신나간 소수의 집단 환각이라고 생각하는건 당신의 자유지만, 이러한 현상이 이야기가 존재해왔던 지난 수 천년동안 있어왔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할 일이 아니다.
 

 

 

1893년 셜록 홈즈가 죽었을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있어 셜록 홈즈의 죽음은 더 이상 잡지에서 탐정 이야기를 읽을 수 없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홈즈의 죽음은 명백히 실재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여졌고 독자들은 마치 자신의 혈육이 죽은 것처럼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정작 홈즈를 만들어낸 아서 코난 도일은 슬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 셜록 홈즈를 언제 부턴가 증오하기 시작했고 호시탐탐 그를 죽일 기회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코난 도일의 홈즈 살해 계획을 알아챈 어머니가 소설의 플롯을 제공하면서까지 홈즈의 생명을 연장한 전력이 있을 정도였으니, 피에르 바야르가 1893년에 일어난 '라이헨바흐 폭포의 추락사'(홈즈는 이 폭포에서 떨어져 죽는다)를 계획된 살인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피에르 바야르의 관심은 자연스레 이 작품, 작가의 단호한 결의로 죽었던 홈즈가 별안간 살아나 유례없는 유명세를 누렸던 '바스커빌가의 개'로 향한다. 명탕점의 부활은 셜록 홈즈와 아서 코난 도일의 화해를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밀어 뜨리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던 아서 코난 도일이 더욱 큰 고통으로 그를 죽이기 위해 다시 살려냈던 걸까?
 

 

 

'셜록 홈즈가 틀렸다'는 이처럼 현실 세계의 코난 도일과 허구 속의 셜록 홈즈 사이에 존재하는 애증을 전제로, 그것이 바스커빌가의 개라는 소설 속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를 찾으려는 책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이 코난 도일의 증오를 밝히는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런 논란 자체를 '허구와 실재 사이의 투과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증거로 제시하며 동시에 텍스트, 그러니까 수십 혹은 수백년 동안 오로지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되어왔던 이 견고한 바위 덩어리에 사실은 다양한 의미와 사실이 숨겨져 있음을 폭로하려 한다.

그래서 이 폭로 작업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피에르 바야르는 소설의 텍스트를 완전히 해체한 뒤 이 해체된 텍스트를 데번셔의 황무지 위에 흩어 놓고 유유자적 그 위를 거닐면서 코난 도일의 증오가 새겨넣은 크고 작은 흠집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렇게 솎아낸 텍스트들이 하나로 이어졌을 때 마침내 살인 사건의 진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지난 100년 동안 완벽하게 그 사실을 숨겨온 냉혹한 살인마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 책의 목표가 추리 소설의 논리를 부수면서 느끼는 새디즘적 지적 유희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저자의 태도가 너무나 겸손하고 또 열정적이다.
저자는 역겨운 거만을 떨며 아서 코난 도일의 플롯을 비웃거나 셜록 홈즈를 조롱하지 않는다. 대신 책을 읽는 것과 읽은 책을 해석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며 우리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온 절대적 존재들이 사실은 얼마나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지 신선한 지적 충격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 책은 홈즈의 팬이냐 아니냐와는 상관 없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셜록 홈즈가 틀렸다'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알아두자, 이 책은 그렇게 건방진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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