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본색 - 가려진 진실, 드러난 욕망
양상우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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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요즘 언론, 미디어를 보면 상당히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다. 뉴스에서 내가 얻고자하는 주요 뉴스기사에 대해서, 꼼꼼히 살펴보지만, 진실이나 사실에 대해서, 디테일한 핵심 정보나 미디어 요소를 찾기 힘든 상황이다. 여가부 장관 후보로 강선우 의원을 내정하고, 국회 청문회를 진행하는 모습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에서, 언론이 보여주고 있는 민낯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책 『언론 본색』은 언론의 이상과 현실을 비교하고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가짜 뉴스와 사실에 근거한 뉴스의 차이,이상적인 기사는 어떤 기사이며, 현실에 주로 드러나는 기사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읽을 수 있다.언론은 사실과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사와 관련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한다.하지만 정파적인 기사,정략적인 기사들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모 정당에 유리한 기사를 쓰거나, 부리한 기사를 싸야 하는 상황에서 언론이 보여주는 이중성을 느낄 수 있으며,왜곡된 언론, 확증편향된 기사를 간간히 보고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와 불교의 가치에 위배되는 기사를 쓰는 것은 쉽지 않다. 가톨릭교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기사도 마찬가지다.단 이슬람교에 대해 경계하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으며,신천지와 같은 이단교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점은 디테일한 것까지 언급하고 있다.자극적이면서, 선정적이며 왜곡된 기사를 독자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언론은 연성 뉴스가 있고, 경성 뉴스가 있다. 연예이슈와 엔터테인먼트의 맞춤형 기사는 연성 뉴스에 해당된다.하지만, 연성 뉴스(soft news)가 경성 뉴스(hard news) 가 되는 경우가 있다. 뉴스의 주제나 가치, 미디어 조직의 특징에 따라서 달라지고 있으며,그것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서, 뉴스의 질은 달라질 수 있다.특히 언론 지형은 상황에 따라서,정치 현황이나 사회 이슈,국제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과거의 뉴스의 특징과 지금의 뉴스의 특징이 다른 이유, 국민의 눈높이, 문화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뉴스에 나오는 것이 전부 사실은 아니다. 빌 클린턴과 르윈스키 간의 성추문이 거짓으로 판명된  것도, 언론이 보여주는 윤리적인 문제점, 절차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성찰해 나가야 함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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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이야기 - 첨단 기술의 원점을 찾아서
정진오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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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무기, 첨단 기술이라고 할 때의 '첨(尖)'이라는 글자는 뾰족하다는 뜻으로도, 날카롭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뾰족하면서도 단단한 창, 날카로우면서도 무르지 않은 칼을 만드는 부류가 대장장이이다. 그들의 일터인 대장간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금속 소재 산업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대장간은 생동하는 기술 박물관이다. (-9-)



송종화 장인의 엿가위가 전국에 소문이 난 것은 겉모양도 겉모양이지만 소리가 특별해서라고 한다.가위가 좋은 소리를 낼 수 있게 하려면 쇠를 잘 때려서 풀어낼 줄 알아야 한다고 송 장인은 강조한다.엿가위는 낫처럼 굳이 단단할 필요가 없다보니 야키를 넣지 않는다. (-30-)



신라 제4대 임금 탕해왕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담은 설화에 '대장장이'가 등장한다. 탈해왕은 일본보다도 더 먼 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사람으로 난 게 아니라, 알로 태어났다. 그 나라 임금이던 부친은 불길하다 하여 나무 궤짝에 그 알을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는데 어찌어찌하여 신라에까지 닿았다. 그 궤작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탈해왕이다. 어린 탈해는 '대장장이를 이용해 좋은 터에 지은 남의 집을 빼앗았는데,이는 곧바로 임금의 사위로 올라서는 통로가 되었다. (-74-)



성경에는 또 대장간의 필수 장비인 풀무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국내 기독교 박물관 같은 곳에서 이스라엘의 옛 풀무와 우리나라의 전통 손풀무를 함께 전시할 정도로 기독교에서는 대장간이 풀무를 중요시한다. (-123-)



백범의 부친에게서 삼릉창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고 그 창을 만든 인천의 대장장이가 무엇을 표본으로 해서 만들었는지도 궁금하다. 백범의 말만 듣고서 부친과 대장장이가 그 생김새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면 당시까지만 해도 삼릉창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176-)



어디를 가나 대장간의 단골손님 중에는 무속인이 있다.무속인과 대장간 철물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은데,굿을 할 때 쓰는 도구 주에 대장간이 아니고서는 구하기 어려운 게 제법 있다. 삼지창, 작두, 칼이 대표적이다. 웬만한 대장간이 제품 진열대에는 커다란 삼지창 한두 자루씩은 보이게 마련이다. 무인들이나 쓸 것 같은 이 무시무시해 보이는 강철 창이 무속인용이다. (-219-)



조총 개발 과정에 참여한 대장장이가 원래는 칼 제작 전문가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군대의 주요 무기가 칼에서 조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대장장이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인데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된 일본의 조총 개발에도 사무라이용 칼을 만들던 대장장이들이 참여했다. 일본 남쪽의 섬 다네가시마에서는 1543년 포르투갈 조총을 넘겨받아 1년여의 고투 끝에 새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242-)



요증에도 잘 팔리는 개업 선물 주에 편자가 있다.편자는 말발굽에 u자형으로 대어 붙이는 쇳조각인데, 대장간에서 만들던 물건이다. 말뿐만 아니라 소발굽에도 편자를 끼웠다. 편자의 쓰임새를 실제로 구경하려면 경마장에나 가야겠지만, 옛날 말 타고 다니던 시절이나 소를 이용해 물건을 실어나르던 때에는 편자가 생활필수품이었다. (-290-)



대장장이가 일하는 공간을 대장간이라 한다. 대장간에서, 농기구를 만들고, 호미,낫, 식칼을 대장간에서 만들어 간다. 10대 어린 나이에 대장간에서 알하게 되고, 하나하나 기술을 익히면서,가난을 이겨내고, 뜨거운 공간에서의 인내심을 배웠다. 농업이 밥줄이었던 1950년대~1970년대 우리의 삶에서  시골 읍내 어디든 대장간이 있었다. 바닷가에도 대장장이가 필요하였고, 갯벌에서, 갯벌 생명체를 낚기 위해서 주꾸미를 잡기 위해서, 대장간에서 만든 도구가 필요하다.말편자도 대장간에서 만들어진다. 



책 『대장간 이야기』은 신문기자가 쓰는 대장간 이야기다. 점점 더 잊혀지고 있으며,사라지고 있는 대장간 이야기는 농업 뿐만 아니라,전쟁에서, 무기를 만드는데 꼭 필요했고, 이동형 간이 대장간도 존재한다. 창을 만들고, 백범 김구가 감옥에서 탈출하는데 쓰여졌던, 삼릉창 도 대장간에서 만들어진다. 무속인이 대장간 단골 손님이라는 것이 의외다.하지만, 무속인의 삶 속에 자주 쓰여지고 있는 삼지창, 작두, 칼 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대장간이 아니면 쉽지 않았다.엿장ㅅ수에게 밥줄이나 다른 없는 칼이 댑장간에서 만들어진다.엿장수의 엿가위는 엿을 잘 썰고, 소리가 잘 나는 칼이어야 했다.  대장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었고, 농경 사회에서, 시골 읍내 어디에서나 존재했던,대장간과 대장장이, 그들의 손에 쥐어졌던 호미,낫을 빼놓고 그 시대상을 그때 당시의 우리의 생활을 이해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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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 - 안재창의 가족 생애사로 본 아메리카 디아스포라
안형주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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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하와이 군도는 1819년부터 매년 500척의 포경선들의 휴식을 취하고 물자를 보급받는 태평양 포경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인과 미국인의 첫 만남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인과 미국인은 1853년 1월 28일(철종 4년 음력 12월 21일), 용당포로 온 포경선 사우스아메리카 호에서 처음 만났다. (-18-)



안재창 형제가 탄 첫 이민선은 파도가 심한 겨울에 태평양을 건너 1903년 1월 13일 새벽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당시 모든 이민자들은 호놀룰루 에 도착하면 우선 부두 앞 검역섬으로 보내져 검역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한인 이민 제1진의 경우 하와이사탕수수농장주협회가 추진했던 것이기 때문에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 피어선 목사의 도움으로 검역섬에 보내지지 않았다. (-45-)



안재창은 한구 유학생들을 명절이나 방학 때에 집에 데려와 한국음식을 해 먹이고 함께 향수를 달랬다. 마음이 습습한 그는 어려운 학생들을 곧잘 도와 주었다. 한 예로 오마하에서 식당을 경영하면서 공부하던 방사겸이 약혼자가 만주에서 상해를 거쳐 오므로 샌프란시스코로 마중을 가야겠다고 돈을 꿔 달라고 했을 때 안재창은 100달러를 선듯 내준 일이 있었는데, 방사겸은 평생 그를 고맙게 여겼다. (-98-)



3.1독립선언 이후 북미 대한인국민민회 중앙총회는 조국 광복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를 실천하고자 우선 한인들을 파악하고 그들을 설득하고 조직해 나갔다. 하와이로 건너 갔다가 다시 본토로 이주한 1천 명이 채 안되었던 1919년 3월 당시 한인들은 탄광, 동광, 수은광, 사탕무 농장에서 일하거나 작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내고 있었다. (-133-)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재미 한인학생회가 미국 전역에 조직되었을 대, 디트로이트에도 지부를 설치할 만큼의 학생들이 있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20여 명의 한국 학생들이 있었으며,그들은 실업학교나 주립공대를 다녔다. 학생들 주에는 유일한 ,이기붕, 조규섭,한백선, 그리고 시베리아와 영국을 거쳐서 온 민병기 등이 있었다. (-152-)



정안회사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하 1층과 지상 1층로 된 건물이었다. 건물 뒤에는 정안회사의 용달 트럭 8대와 2인용 배달차 들을 주차할 수 있는 차고가 있었다. 건물 정면에는 700달러를 들여 크게 제작한 네온 사인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간판 중앙에는 'Jhung & Co'라는 큰 글자가 있었고 그 밑에 'Fine Chop Suey'라고 쓰인 글자가 있었다. 또한 간판 가장자리에 붉은색과 푸른색 줄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새로 지은 정안회사 건물 사진은 <신한민보> 1면에 실렸다. (-187-)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총생산량은 1929년 의 530만대에서 1932에는 4분의 1인 130만대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세계 경제공황의 초기였던 1932년, 디트로이트 시는 실직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디트로이트 시의 은행, 시청, 모든 공공기관들 그리고 사립자선단체들은 모두 파산했다. 따라서 시교육청의 지원을 받는 공립학교들은 학생들에게 급식을 못 주게 되었다. (-232-)



재미한족 연합회가 생긴 후 미국 본토에서는 연합회를 창설한 북미대한인국민회가 전시 재미한인들을 대표하는 단체로 다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반면 하와이에서는 전시 계엄령이 내려져서 하와이 한인 단체들은 군정부의 감시를 받아서 전처럼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다. (-272-)



세 명은 대학에서 만난 이공계통을 전공한 중국인 2세들과 결혼했고 2년만 한인 2세와 결혼했다. 로잘리 박사는 은퇴하기 전부터 한국은 여러 번 방문했다. 1989년에는 이화여대 100주년 기념식에 이화동창의 딸로서, 1994년에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와서 아버지의 고향인 청주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고 하동 정씨 직계 조상의 족보까지 복사하며 열성을 보였다. 그녀는 아버지 정양필에 관한 글도 남겼다. (-306-)



'찹수이'는 미국인들에게는 이색적 문화의 산물로 1920년대 비서 구식 하류 사회 음악인 재즈와 함께 유행하기 시작하여 상류층으로,그리고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찹수이' 장사는 노동집약적이고, 이윤이 낮고 , 값에 비해 양이 많고, 미국인의 주식이 아니라서 기호와 취향이 변하면 사라질 수도 있는 모험적 사업이었다. (-315-)



독림운동하면 떠오르는 인물 도산 안청호가 있다. 그 도산 안창호의 삼촌 안재창이었다.그는 조카 안창호 복사의 권유에 따라서, 하와이 이민을 1902년에 하였다. 사탕수수 노동자가 필요했던 하와이 원주민에게, 일본인보다, 중국인보다 성실한 조선인이 제격이었다.그렇게 안재창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고, 1907년 미국 유타주에 도착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던 그 때,안재창은 미국 본토에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안재창은, '찹수이'가공제품을 만들어서 팔았고, 정안회사를 주식회사로 키우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였고, 미국을 도와주기 위해서, 미국 국채를 사들였다. 미국이 전쟁에서 주도하고 이겨야만, 일본이 무너지고, 조선이 해방된다는 계산이 있었다. 미국은 경제가 호황 국면이었으나, 1929년 당시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덩달아 , 정안회사도 허리띠를 졸라 매야했다. 10년간의 경제 대공황이 지났고, 1945년 한반도는 해방이 되었다.그가 걸어온 미국 에서,독립운동의 산 역사, 한인 이주자들을 뒤에서 도와주고, 협력하였다.그 과정에서,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이기붕 부총리와의 만남도 가지게 된다. 미국에서, 외로움,, 조선에 대한 향수를 견디며 살아온 안재창은 1963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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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한 죽음 - 두려움을 넘어 평온한 마지막을 준비하는 지혜
구사카베 요 지음, 조지현 옮김, 박광우 감수 / 생각의닻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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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연명치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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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한 죽음 - 두려움을 넘어 평온한 마지막을 준비하는 지혜
구사카베 요 지음, 조지현 옮김, 박광우 감수 / 생각의닻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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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의료 전문가인 저자는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다. 살리기 위한 의학의 결정이 때로는 죽음보다 더 잔인한 상황으로 환자를 밀어넣는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5-)



그러나 의사는 여러 차례 죽음을 경험하면서 점차 적응한다.'죽음에 적응한다'는 말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 의사들은 죽음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점차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없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256-)



내가 경험한 첫 임종은 다른 수련의에게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가족이 없어'의식'도 없이 사망선고를 했고, 그것을 듣는 사람도 간호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족이나 친지도 없이 호로 , 생면부지의 젊은 의사에게 사망선언을 듣게되는 환자의 삶은 어땠을까. (-48-)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예전에는 가능했던 일이 문명이 더 발전한 지금, 불가능해졌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78-)



'치료할 여지가 없단 이유로 환자를 포기하고 병원에서 내쫒아버린다니까요.일본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죠." 참사관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집으로 돌려 보낸 후에는 통증이 있을 때만 의사가 모르핀주사를 놓으러 간다고 합니다.그런데 희한하게도 환자는 별 고통 없이 죽는 것 같아요."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109-)



대한민국은 안락사가 법으로 허요하지 않는 국가다. 스위스는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이다.그리하여,한국인은 스위스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한국에서, 연명 치료의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느니, 차라리 고통스럽더라도,타국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길, 안녕한 죽음을 선택하곤 한다.



죽음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마다 죽음을 바라보는 기준이 다를 뿐이다.죽음이 고통이 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화로 이어질 때도 있다. 우리 앞에 놓여진 미래는 일본이 될 것인가, 스위스가 될 것인가,그 두가지 선택이 있을 때,나느 두가지 선택 주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우리 몫으로 남을 수 있다. 책 『안녕한 죽음』은 완화의료 전문가로서,자신이 살아온 인생 경험을 놓치지 않는다.의사가 환자를 바라보는 '감정을 뺀 일종의 현상'을 우리는 동물들의 죽음을 통해서,느끼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게 된다. 



길에서 ,로드킬을 당하며 시체로 발견한 야생동물들(고라니,멧돼지 등) 을 보면서,기술과 과학 중심의 현대사회에서, 편리한 일상에서 느껴지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있었다.이런 현대 사회의 모순은 과거,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보다 더 우울한 기분과 감정을 느끼고 살아오고 있다. 나이가 먹어서,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소식, 부고장을 받을 때가 있다.우리는 착찹함을 느끼며, 내 앞에 놓여진 죽음, 내 가족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준비하고,대처할 것인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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