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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 - 안재창의 가족 생애사로 본 아메리카 디아스포라
안형주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하와이 군도는 1819년부터 매년 500척의 포경선들의 휴식을 취하고 물자를 보급받는 태평양 포경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인과 미국인의 첫 만남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인과 미국인은 1853년 1월 28일(철종 4년 음력 12월 21일), 용당포로 온 포경선 사우스아메리카 호에서 처음 만났다. (-18-)
안재창 형제가 탄 첫 이민선은 파도가 심한 겨울에 태평양을 건너 1903년 1월 13일 새벽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당시 모든 이민자들은 호놀룰루 에 도착하면 우선 부두 앞 검역섬으로 보내져 검역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한인 이민 제1진의 경우 하와이사탕수수농장주협회가 추진했던 것이기 때문에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 피어선 목사의 도움으로 검역섬에 보내지지 않았다. (-45-)
안재창은 한구 유학생들을 명절이나 방학 때에 집에 데려와 한국음식을 해 먹이고 함께 향수를 달랬다. 마음이 습습한 그는 어려운 학생들을 곧잘 도와 주었다. 한 예로 오마하에서 식당을 경영하면서 공부하던 방사겸이 약혼자가 만주에서 상해를 거쳐 오므로 샌프란시스코로 마중을 가야겠다고 돈을 꿔 달라고 했을 때 안재창은 100달러를 선듯 내준 일이 있었는데, 방사겸은 평생 그를 고맙게 여겼다. (-98-)
3.1독립선언 이후 북미 대한인국민민회 중앙총회는 조국 광복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를 실천하고자 우선 한인들을 파악하고 그들을 설득하고 조직해 나갔다. 하와이로 건너 갔다가 다시 본토로 이주한 1천 명이 채 안되었던 1919년 3월 당시 한인들은 탄광, 동광, 수은광, 사탕무 농장에서 일하거나 작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내고 있었다. (-133-)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재미 한인학생회가 미국 전역에 조직되었을 대, 디트로이트에도 지부를 설치할 만큼의 학생들이 있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20여 명의 한국 학생들이 있었으며,그들은 실업학교나 주립공대를 다녔다. 학생들 주에는 유일한 ,이기붕, 조규섭,한백선, 그리고 시베리아와 영국을 거쳐서 온 민병기 등이 있었다. (-152-)
정안회사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하 1층과 지상 1층로 된 건물이었다. 건물 뒤에는 정안회사의 용달 트럭 8대와 2인용 배달차 들을 주차할 수 있는 차고가 있었다. 건물 정면에는 700달러를 들여 크게 제작한 네온 사인 간판이 걸려 있었다. 간판 중앙에는 'Jhung & Co'라는 큰 글자가 있었고 그 밑에 'Fine Chop Suey'라고 쓰인 글자가 있었다. 또한 간판 가장자리에 붉은색과 푸른색 줄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새로 지은 정안회사 건물 사진은 <신한민보> 1면에 실렸다. (-187-)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총생산량은 1929년 의 530만대에서 1932에는 4분의 1인 130만대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세계 경제공황의 초기였던 1932년, 디트로이트 시는 실직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디트로이트 시의 은행, 시청, 모든 공공기관들 그리고 사립자선단체들은 모두 파산했다. 따라서 시교육청의 지원을 받는 공립학교들은 학생들에게 급식을 못 주게 되었다. (-232-)
재미한족 연합회가 생긴 후 미국 본토에서는 연합회를 창설한 북미대한인국민회가 전시 재미한인들을 대표하는 단체로 다시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반면 하와이에서는 전시 계엄령이 내려져서 하와이 한인 단체들은 군정부의 감시를 받아서 전처럼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다. (-272-)
세 명은 대학에서 만난 이공계통을 전공한 중국인 2세들과 결혼했고 2년만 한인 2세와 결혼했다. 로잘리 박사는 은퇴하기 전부터 한국은 여러 번 방문했다. 1989년에는 이화여대 100주년 기념식에 이화동창의 딸로서, 1994년에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와서 아버지의 고향인 청주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고 하동 정씨 직계 조상의 족보까지 복사하며 열성을 보였다. 그녀는 아버지 정양필에 관한 글도 남겼다. (-306-)
'찹수이'는 미국인들에게는 이색적 문화의 산물로 1920년대 비서 구식 하류 사회 음악인 재즈와 함께 유행하기 시작하여 상류층으로,그리고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찹수이' 장사는 노동집약적이고, 이윤이 낮고 , 값에 비해 양이 많고, 미국인의 주식이 아니라서 기호와 취향이 변하면 사라질 수도 있는 모험적 사업이었다. (-315-)
독림운동하면 떠오르는 인물 도산 안청호가 있다. 그 도산 안창호의 삼촌 안재창이었다.그는 조카 안창호 복사의 권유에 따라서, 하와이 이민을 1902년에 하였다. 사탕수수 노동자가 필요했던 하와이 원주민에게, 일본인보다, 중국인보다 성실한 조선인이 제격이었다.그렇게 안재창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고, 1907년 미국 유타주에 도착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던 그 때,안재창은 미국 본토에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안재창은, '찹수이'가공제품을 만들어서 팔았고, 정안회사를 주식회사로 키우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였고, 미국을 도와주기 위해서, 미국 국채를 사들였다. 미국이 전쟁에서 주도하고 이겨야만, 일본이 무너지고, 조선이 해방된다는 계산이 있었다. 미국은 경제가 호황 국면이었으나, 1929년 당시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덩달아 , 정안회사도 허리띠를 졸라 매야했다. 10년간의 경제 대공황이 지났고, 1945년 한반도는 해방이 되었다.그가 걸어온 미국 에서,독립운동의 산 역사, 한인 이주자들을 뒤에서 도와주고, 협력하였다.그 과정에서,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이기붕 부총리와의 만남도 가지게 된다. 미국에서, 외로움,, 조선에 대한 향수를 견디며 살아온 안재창은 1963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