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5 - 사자심왕 리처드의 반격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5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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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기게 연재와 출간을 이어가고 있는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 그 다섯 번째 편을 오늘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도서관에 읽을 만한 책이 없다는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나 보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도, 또 다른 작가의 생각을 빌어 읽는 것도 하나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천 년 전 서사는 다채롭게 각색되기 마련인데, 지난 천년 이슬람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살라딘의 명성은 김태권 작가의 책에서도 여전히 빛난다. 이미 전편에서 장기와 누레딘의 뒤를 이어 마침내 시리아와 이집트로 나뉜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성지 예루살렘 회복에 나선 살라딘은 히틴 전투에서 십자군 정예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그들의 오랜 숙원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물론, 이슬람군의 군사적 성공은 성지 실함이라는 서방 세계의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번에는 잉글랜드, 프랑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군주들이 직접 십자군 원정에 나서게 된다.

 

 

김태권 작가는 이번 편의 상당 부분을 살라딘의 호적수로 등장하는 사자심왕 리처드에게 할애하고 있다. 프랑스왕 루이 7세의 왕비이자 아키텐의 상속녀였던 엘레오노르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재혼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중세 기사의 전형으로 불리는 리처드였다.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인 리처드는 그 중에서도 특히 최고의 전사로 추앙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버지와의 내전도 마다하지 않는 불같은 성미로 치열한 왕위 계승 다툼 끝에 왕위에 오른 사자심왕은 바로 성지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원정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기사는 바로 리처드왕 시대에 잉글랜드에 살던 유대인에 대한 박해였다. 고대 이래 뿌리 깊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리처드 시대에 잉글랜드에서 폭발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여기까지 딱 절반으로 잡고, 다시 무대를 예루살렘으로 돌려 히틴 전투의 대승을 바탕으로 마침내 예루살렘을 프랑크 족의 손아귀에서 탈환한 살라딘이 서방인 들에게 어떻게 관용을 베풀었는지 김태권 작가는 공을 들여 기술한다. 아무리 적으로 싸우는 사이였지만,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에게는 관용을 베풀었고 샤티용의 르노 같은 파렴치한 싸움꾼에게는 그런 관용을 허용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중세 기사도의 전범을 살라딘이 보여 주었노라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그야말로 꽃미남으로 등장한 이블린의 발리앙이 40대 중반의 남자였다는 점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뛰어난 전사 발리앙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살라딘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만다. 발리앙처럼 살라딘의 앞에서는 모두가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했지만, 이교도와의 약속 따위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유권해석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한 기사들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꼬집는 것도 작가는 잊지 않는다.

 

원정길에 사이프러스에 들러 결혼식도 올린 리처드는 마침내 팔레스타인 땅에 상륙해서 서방 최고의 전사답게 자신의 싸움꾼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오죽했으면, 김태권 작가가 리처드를 일본 만화 북두신권에 등장하는 주인공 켄시로에 대입했을까. 이슬람 수비대가 지키던 아크레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리처드는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항복한 무슬림을 모두 학살하는, 살라딘의 관용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슬림을 충격으로 몰아 넣는다.

 

아무래도 3차 십자군 원정의 주인공이 리처드이다 보니 다른 두 명의 지휘관인 필리프 2세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느낌이다. 3장 <예루살렘의 장> 초반에 나오는 십자권 원정로를 보면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은 바닷길로 진격한 반면, 프리드리히는 육로로 통해 동로마제국을 거쳐 소아시아로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도 앙숙이긴 하지만, 필리프 2세와 잘만 협상을 하면 프랑스 영토를 거쳐 손쉽게 진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필리프 2세는 중무장한 잉글랜드 군대를 자신의 영지에 들여 놓는 그런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겠지. 리처드가 잉글랜드에서 아버지 헨리 2세를 상대로 치른 내전을 생각해보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김태권 작가는 기존의 십자군 원정의 기술에 비대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자세가 돋보였다. 뒤에 실린 도움을 받은 책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나도 읽은 아민 말루프의 책이 눈길을 끌었다. 타리크 알리의 <술탄 살라딘>은 나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역사 기술과 연구가 서양에 치중되다 보니 십자군 원정을 보는 시각 역시, 그네들의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단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점이 마음에 든다. 고문서와 문헌을 참조해서 무기와 복식 등등의 세밀한 점까지 신경 쓴 점도 멋지다. 당대에 그렇게 기록을 남기고 그림을 그렸던 중세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이 천년 뒤에 이런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될 줄 알았을까 궁금하다.

 

오래 기간 연재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가 이제 6권을 마지막으로 완간된다고 한다. 한 때 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작가의 다음 번 창작 오딧세이는 무엇이 될지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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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계곡 모중석 스릴러 클럽 35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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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손과 발이 얼어붙는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독일 출신의 작가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지옥계곡>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되기 전에 다양한 직업군을 체험했다는 빙켈만의 다양한 직업 중에서도 특히 택시운전을 하며 영수증에 필사를 했다는 소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품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빙켈만은 숱한 퇴고와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현지답사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손과 머리로만 글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의 발로 밟은 체험을 바탕으로 글쓰는 작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결과가 이 빼어난 추리소설 <지옥계곡>의 탄생이었다.

 

<지옥계곡>의 원본 소설의 구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지옥계곡>에는 주인공 로만 예거의 활동을 추적하는 백색 페이지와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프간 참전군인(아마도 미군으로 추정되는)의 독백이 담긴 잿빛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역시 시작은 강렬한 충격 요법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 지대에 위치한 험준한 추크슈피체 등반에 나선 무모한 산악인을 구조하러 나선 산악구조대원 로만 예거는 우연하게 지옥계곡 밑으로 투신하려는 젊은 여성과 조우하게 된다. 그녀를 구하려는 예거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려는 의지가 없었던 그녀는 그의 구원의 손길을 거부한다.

 

베테랑 산악구조요원 로만 예거는 지옥계곡으로 투신한 젊은 여성의 이름이 라우라 바이더로 아우크스부르크에 사는 최첨단 의료기기 재벌 바이더 집안의 외동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차례차례 라우라의 친구들이 등장하면서 지난 여름 있었던 과거사에 대한 희미한 조명이 비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빙켈만은 두 가지 전략을 취한다. 하나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라우라가 무엇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가를 캐내는 작업과 분명히 그녀의 죽음에 관련된 독백하는 참전 병사의 정체에 초점을 맞춘다. 전자가 관계와 소통에 대한 복잡한 통찰을 요구하고 있다면, 반면에 후자는 다분히 개연적인 사건발생에 방점을 찍는다. 개인적으로 전자를 높이 평가하지만, 후자의 경우 책을 읽는 내내 당위성이 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잿빛 페이지를 맡은 남자의 독백을 읽는 순간, 독자는 그가 이 사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시간에 그리고 무슨 연관으로 라우라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녀의 5인조 그룹에 그가 끼어들고, 결국에 가선 되돌릴 수 없는 관계의 균열을 초래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추리소설의 공식에 충실하게 아끼는 딸의 죽음에 비통한 아버지 바이더 씨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한다. 왜 부자들은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 대신 아내에게까지 숨기며 은밀하게 사건에 접근하는 사설탐정을 애호하는 걸까? 주인공 로만 예거가 라우라의 지기 마라 란다우를 통해 사실에 접근해 가는 동안, 라우라의 다른 친구들을 겨냥한 연쇄살인이 발생하면서 소설 <지옥계곡>은 하이라이트로 치닫기 시작한다.

 

빙켈만은 <지옥계곡>에서 주인공을 위협하는 악당으로 21세기 미드가 개발한 최고의 캐릭터 싸이코패스를 채택했다. 아프간 전쟁 참전 군인으로 아프간 반군의 포로가 되어 사지에서 살아난 경험의 트라우마까지 가진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안티 히어로로써 그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눈 덮인 추크슈피체 산에서 유감없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한다. 그런 반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로만 예거 역시 베테랑 산악구조요원으로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알 수 없는 전문 산악장비를 다루며 산다람쥐 같이 산을 오르내리며 치열한 추격전을 시전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런 조건을 배경으로 해서 해발 3,000미터 고지의 알프스 산악을 오르며 수많은 퇴고를 거듭한 빙켈만은 어긋난 응답 없는 사랑이라는 마지막 흥미 요소를 가미해서 비극의 재구성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구성과 전개에 있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의 전개에 온전하게 몰입할 수 있었고, 결말의 이중 반전과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마무리는 기대 이상이었다.

 

빙켈만이 그리는 관계상실의 연쇄반응 연대기는 인상적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사업가의 이미지를 가진 완벽해 보이는 아버지는 실상은 아내와 딸과의 소통에는 실패한 가장이었고, 평생을 함께 하리라고 생각한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라우라의 마지막 선택은 비극이었다. 바이더 씨의 막대한 재산도 결국 그들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에 충실해 보이는 로만 예거 역시 자신의 산에 대한 사랑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전 여자 친구와의 불통 그리고 자신이 구하지 못한 라우라의 죽음이 가져온 상실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사건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변인들마저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물론 점증하는 공포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작가의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처음 만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지옥계곡>은 확실히 새로운 종류의 스릴러 체험이었다. 설원을 무대로 해서 펼쳐지는 백색의 공포는 그야말로 손발을 얼어붙게 할 정도였으니까. 과연 빙켈만이 선사하는 공포의 연쇄반응이 그의 다음 작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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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트로츠키
타리크 알리 지음, 정연복 옮김, 필 에반스 그림 / 책벌레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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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자주 들르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서>를 보다가 혹시 그의 다른 저작이 있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컴퓨터 검색기가 바로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란 책을 토해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책이었는데, 역시 만화여서 그런지 금세 다 읽었다.

 

어쩌면 만화라는 장르가 주는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사실 기대한 그림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많았음에도 부담 없이 대할 수가 있었다. 만화의 주인공 트로츠키 최대 정적이었던 구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격하운동으로 영구혁명론을 주창한 트로츠키주의는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기피대상 1호였던 모양이다. 마오 쩌둥과 흐루시초프 모두 서로를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했던 걸 떠올리면 말이다.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레온 트로츠키의 본명) 짜르 체제가 막바지로 치닫던 19세기 끝자락에 당시 개발붐이 일던 우크라이나 지방의 부유한 유대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재력을 바탕으로 고등교육을 받으며 비교적 유복한 삶을 산 모양이다. 훗날 뛰어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로 활동하기 전인 이 시절만 해도 사회주의와는 담을 쌓고 산 모양이다. 오히려 다른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처럼 농노해방이 되었지만 여전히 비참한 현실 속에 살던 러시아 노동자 농민의 현실에 주목한 현실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런 현실에 대한 자각이 그를 불세출의 혁명가로 변신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트로츠키는 당시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에 눈뜬 다른 지식인들처럼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짜르의 비밀경찰에게 체포돼 트로츠키는 시베리아에서 4년간의 유형생활을 경험한다. 시베리아에서 탈출한 그는 1902, 영국 런던에 체류 중이던 레닌과 만나 비로소 자신의 특별한 재능인 선전술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엘리트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타리크 알리는 러일전쟁(피의 일요일 사건)과 제1차 세계대전(10월 혁명)의 과정에서 소비에트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을 통해 러시아 혁명가들이 앞으로 어떤 국가 체제를 수립하려고 했는가에 대한 고증을 이 만화를 통해 보여준다. 다수의 혁명가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해서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짜르 전제정 하의 장군들을 포섭하는 방법도 고려했으나 트로츠키는 이에 반대하는 선견지명을 보여주기도 했다. 부르주아와의 합종 대신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혁명 역량에 집중해야 한다는 고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면 이단시했을 역사 발전 법칙 대신 러시아 고유의 혁명론을 주창해 다른 볼셰키비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0월혁명과 연이은 백군과의 내전에서 군사인민위원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트로츠키는 혁명의 상징이었던 레닌에 버금가는 위상을 얻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가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반봉건제 폐지와 농민 해방, 공화국 건설 그리고 소수 민족의 자결권 등을 골자로 한 체제 개혁을 주창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된 혁명 세력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 혁명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 같은 후진적인 시스템으로 혁명의 완료를 희망할 수 없기에 국제적 사회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 트로츠키 영구혁명론의 요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주창한 영구혁명론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의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주의 운동의 부상으로 소멸되면서 공동전선은 유명무실화되고 만다.

 

레닌 사후, 소비에트 권력을 한 손에 쥐게된 스탈린은 자신의 정적들을 차례차례 제거하면서 민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독재권력을 수립한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트로츠키는 당내 좌익 세력을 규합해서 스탈린에 대항해 보지만, 비밀경찰을 앞세운 스탈린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같은 유력 당인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영입해서 최대 정적이자 혁명 영웅인 트로츠키 비방전에 나선다. 완벽하게 새로운 체제 하에서 관료시스템으로 정비한 스탈린의 공세 앞에 결국 트로츠키는 모든 권력을 박탈당하고, 망명길에 나서게 된다. 히틀러의 국가회주의(나치즘)와 맞수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본격적으로 맞붙기 1년 전인 1940년 트로츠키는 망명지 멕시코에서 암살자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된다.

 

이 만화를 통해 피상적이나마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삶의 궤적을 쫓을 수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 혹은 러시아혁명에 대해 공부하거나 관련된 책을 읽어보지 못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략적이나마 훑어본 것으로 만족해야지 싶다. 20세기 초의 활발했던 세계를 변혁시키고자 했던 사회주의 운동이 전쟁이란 광기 속에서 소멸하게 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적 유물론에 근거한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법칙을 모든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논쟁도 흥미를 끈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모든 분파주의는 배척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혁명가 그룹 내의 갈등 역시 인상적이었다.

 

<만화로 보는 트로츠키>를 저술한 타리크 알리는 책의 많은 부분을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삼부작에 빚지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필맥 출판사에서 출간된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를 읽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리우스가 그린 만화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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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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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대학시절에 선배형으로부터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그 책을 읽는데 무려 1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그 책을 가지고 갔었는데, 오랫동안 읽지 못하고 있다가 어렵게 어렵게 그렇게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은 기억이 난다. 아들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각성하고 부조리한 세상의 불의에 맞서게 된다는 이야기였던가. 너무 오래 전이라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갑오년 청마의 해에 러시아의 문인이자 혁명가였던 막심 고리키의 단편 소설집과 만나게 됐다.

 

처음 맞는 표제작 <마부>는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과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는 설정으로 읽힌다. 하늘 아래 독창성을 지닌 작품은 없다고 했던가. 읽으면서 왠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바로 연상됐다.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처럼 마부의 꾐에 빠져 범죄를 저지르고, 약탈한 부를 바탕으로 성공해서 시장 선거에까지 나가게 되지만 결국 자신의 양심 때문에 자신의 죄과를 고백하는 주인공. 하지만, 알고 보니 이게 다 꿈이더라는 구조다. 반동적인 짜르 체제를 지지하던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속살을 짧은 단편에서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고리키의 비판적인 시선이 예리하게 다가왔다. 러시아 지배계급이 누리고 있는 재화의 축적이 과연 정당했느냐에 대한 작가의 지적은 시대를 넘어 고전이 갖는 보편성의 체화였다.

 

짧지만 강렬했던 <아름다움>에서는 날선 혁명가의 감성과는 다른 탐미주의자의 그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연히 만나게 된 여인을 추종하게 된 절망의 시인은 화자까지 숭배에 끌어들인다. 밑도 끝도 없이 약속을 잡은 시인은 화자를 미로 같은 공간 속을 통해 어느 발코니로 인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그녀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예정된 대로 매료된다. 현대 작가들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형의 창조를 위해 외계인까지 동원하지만, 19세기 러시아 작가에게 그만한 창조적 상상력을 기대하기엔 아마 무리였으리라. 무언가 좀 더 극적인 전개를 기대하는 독자에게 고리키는 돌멩이 세례로 화답하며 멋지게 마무리짓는다. 하긴 천상의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게 아니었지.

 

<아름다움>이 그런 여인이 가진 지고의 아름다움에 방점을 찍었다면, <푸른 눈의 여인>은 나락으로 떨어진 여인에 대한 기록이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들을 봉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내몰린 여인에게 경찰서 부서장 조심 키릴로비치는 조소의 눈길을 보낸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이 와 닿는 순간, 냉정한 남자의 마음은 경의로 뒤바뀐다. 고리키는 우리가 어떤 판단에 앞서 원인과 결과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기엔 역시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쿨리나 할머니>와 맨 마지막에 실린 <이제르길 노파>의 이야기는 노년 세대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면서 동시에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경계로 나뉜다. 전자에서 구걸로 바닥에 떨어진 인생들을 거두는 거리의 아쿨리나 할머니가 마지막을 다루고 있다. 아쿨리나 할머니가 보살피는 대상은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절망에 빠진 당대 러시아 민중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소설에서 아쿨리나 할머니는 마침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느데, 그것은 어쩌면 짜르 압제에 맞서는 혁명 대의에 대한 고리키의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소설적 상상과 분석이야말로 시대 소설을 읽는 재미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그런 의도로 썼건 그렇지 않던 간에 그것은 문학을 소비하는 주체의 자유이니 말이다.

 

<아쿨리나 할머니>의 이야기가 정말 현실주의에 입각한 이야기라면, <이제르길 노파>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전설을 바탕으로 한 판타지에 가깝다. <이제르길 노파>는 첫 번 째 전설, 두 번째 자신의 삶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렁에 빠진 종족을 데리고 태양이 빛나는 스텝으로 인도하는 용감하고 당당한 단코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유대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지도자 모세의 그것과도 비교되는 불타는 심장의 주인공 단코의 모습 역시 숱한 고난 가운데 러시아 민중을 혁명으로 이끈 혁명지도자의 소설적 현현으로 보인다.

 

19세기 작가가 그린 시대상에서 여전히 바뀌지 않는 여러 부분들을 소설집 <마부>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가 있었다. 무지한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지식인 엘리트의 편견이 내비치는 장면도 있었지만, 혁명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예상할 수 없었던 시대의 르포르타주 가치만으로도 <마부>는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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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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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의 글과 이제야 만났다. 이미 책은 작년 창비 문학팟캐스트 황금시대의 책소개를 통해 알게 되었고, 차일피일 미루던 독서는 갑오년 새해에 드디어 마칠 수가 있었다. 이미 <인생>, <허삼관 매혈기> 같은 전작의 명성으로 중국 체제에 비판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위화 작가에 대한 풍문은 많이 들어왔지만, 직접 읽어 보니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하나 틀리지 않았다.

 

소설 <7>은 작년에 내한한 작가가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소설이 아무리 황당해도 중국 현실을 따라가지는 못한다는 말처럼 온갖 황당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소설은 죽었으나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양페이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소설의 서사는 기본적으로 플래시백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양페이의 전언을 바탕으로 그의 삶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농민보다는 상부 계층으로 대학교육을 마치고, 어엿한 회사의 중견 사원으로 양페이는 삶의 계단을 차곡차곡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잘 나가는 아내와의 이혼 그리고 평생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아버지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자 아들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아 가출을 하면서 원하지 않던 질곡으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자주 들르던 탄가네 식당에서 화재사고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엔딩을 의미하지만, 위화 선생의 <7>에서 영원한 이별 같은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재화의 많고 적음으로 평등이 나뉘는 사바세계로 가면 누구나 평등할 줄 알았지만, 저승에서도 불평등은 존재한다는 역설을 위화 작가는 예리하게 지적한다. 사후 돌봐줄 이 하나 없이 죽은 이들에게 수의, 상장 그리고 묘자리 등은 철저하게 타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심지어 빈의관(화장터)에서조차 생전의 지위, 계급 혹은 부의 많고 적음에 따라 플라스틱 의자에 구비된 일반석으로 가거나 아니면 가죽 소파가 놓은 VIP석으로 안내받게 마련이다. 누구나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라고 선전하는 중국의 이면을 작가는 저승세계에 빗대 일갈한다.

 

지금까지가 소설의 워밍업이었다면 이제 카론의 도움으로 스틱스를 건너기 전, 양페이가 만나게 되는 삶의 진실은 소설 <7>의 핵심이다. 우리나라 막장소설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은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화는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기차에서 태어난 양페이가 어떻게 21살난 젊은 선로 전환공 양진뱌오의 아들이 되었는지 그리고 젊은 아버지는 어떻게 양페이를 훌륭하게 키웠는지 위화 작가는 그야말로 물 흐르듯 유려하게 전개한다.

 

양페이의 연애이야기 또한 압권이다. 누구나 눈독들이던 아내 리칭을 얻게 된 과정 그리고 짧지만 행복했던 순간들과 이별이 이어진다. 양페이의 이웃 셋집에 살다가 남자친구가 진품 아이폰 대신 짝퉁 아이폰을 사주었다고 홧김에 죽은 슈메이와 그런 슈메이의 묘자리를 구해 주기 위해 장기밀매를 했다가 역시 같은 신세가 된 우차오의 희극반 비극반의 이야기들이 소설 <7>을 수놓는다. 중국 당국의 엄격한 산아제한으로 유기된 영아들을 의료 쓰레기라 부르는 장면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아기들을 저승에서 사랑으로 보살피는 리웨전 아줌마를 엄마라고 부르며 양페이가 재회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물론 빈의관에서 아버지와의 재회는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과 이웃한 우리나라도 식민지, 분단, 전쟁, 독재개발 같은 이슈가 근현대사를 장식하고 있듯 이웃도 만만치 않은 역사의 궤적을 지니고 있다. 외세의 침략, 제국시대의 종말,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등은 문인들에게 화수분 같은 글쓰기의 소재가 되는 동시에 쉽게 접근하기 쉽지 않은 그야말로 계륵 같은 존재다. 수천 년 검열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은 예전 같은 무조건적인 판금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느낌이다. 오히려 작가들을 전업작가로 채용해서 국가의 녹을 받은 시스템에 편입시켜 작가의 사회비판을 순치하는 고단수 전략을 구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였을까? 중국 지도부가 풀어야할 미래의 난제인 개혁 개방의 파고에 기인한 상상을 초월하는 빈부의 격차와 양극화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 위해 위화 작가는 작품의 무대를 사바세계에서 카론의 시간이 지배하는 저승으로 옮겼다. 그리고 중국 내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위화 작가가 짜깁기했다는 비판도 있다고 하는데, 소설보다 황당한 현실이 판치는 중국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위화 작가가 시전한 신의 한수로 보인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생각한 죽음조차 빈부의 격차에 따라 평등하지 않을 수 있다는 소설의 설정은 위화 작가가 <7>에서 보여주는 희비극의 정수다. 어쩌면 진흙탕 같은 사바세계에서 도피하기 손쉬운 방법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삶의 진실이 당면한 속수무책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고려한다면 그것조차 어쩔 수 없겠지. 그래서 소설의 결말이 모두가 평등한 안식의 세계로 향하는 적당한 타협에서 마무리된 점이 조금 불만스럽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만하다.

 

역순으로 돌아가 <허삼관 매혈기><인생>를 읽어보고 싶다. 순화되었다는 평을 듣는 <7>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그리고 내가 작년에 <7>을 읽었다면, 내가 읽은 2013년 최고의 책으로 꼽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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