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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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다니고 있지만 나에게 성경은 언제나 어렵다. 성경에 있는 어떤 내용은 믿음과 연결되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종교와 더 멀어 보여 이해가 쉽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시편에서 다윗은 절규하듯 신에게 매달리고 기도하지만, 자신의 원수들을 죽여 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인의 선민의식이 불편해 구약보다는 신약을 더 선호한다.

 

7년 동안, 연속해서 성경공부를 했다. 1년에 한편씩 성경을 집중해서 읽고 멤버들과 묵상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성경 자체가 어려웠기에, 성경 구절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거기에 따른 묵상을 하기가 매번 고역이었다. 잘 되지 않았지만 내가 하고자 한 묵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나의 삶과 연관된 것이었다. ,,전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귀결되거나, 공동체에서 그만큼 봉사했으니 은혜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성경만이 아닌 다른 것도 충분히 가져다 표현할 수 있는 묵상을 하고 싶었다.

 

백수린 작가의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으며 뜬금없이 성경 공부했던 시절이 떠오른 것은 이 책의 문장들이 내가 원했던 묵상의 내용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대단하지 않은 내 삶과 내 주변을 이런 글로 돌아보고 싶었다. 기준을 너무 높이 책정해 나의 모자람을 부각시키기보다 조금의 반성과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이 나를 다독거리며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했다.

 

일상과 세계 그 사이에서 빛나는 이야기들시리즈중 하나인 이 책은 저자가 서울의 성곽길 주변에 있는 낡고 오래된 언덕 위의 집에 살면서 느낀 것들을 담고 있다. 반려견 봉봉에 대한 사랑과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낸 과정과 슬픔에 대한 단상들, 산책, 책에 대한 얘기도 소소하게 들어있다.

 

기억의 모티프로써 장소는 언제나 각자의 추억과 공감을 가져다준다. 장소는 사람의 성질,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결정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파트에만 살다가 오래 된 단독주택에 살게 된 작가가 직접 부딪히고 해결해야 하는 불편함도 많지만, 그 장소에 있어야만 가능한 느낌들과 묵상이 가득하다.

 

[이 동네에서 집은 삶의 공간이다. 동네에서의 하루하루는 집이든 인간이든 간에 만물이 시간과 함께 서서히 마모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육체적인 노동과 시간 그리고 정성을 쏟는 돌봄을 통해서만 우리가 모든 종류의 소멸을 가까스로 지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진실을 내게 알려준다. 그리고 어떤 공간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장소가 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오감으로 각인되는 기억들의 중첩 때문이라는 사실도.

-p.14]

 

서울 동남쪽의 끝자락에 살고 있는 나는 그동안 한적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 신도시가 계속 생겨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이기 시작하고, 덩달아 우리 동네도 리모델링이나 상가 증축의 바람이 불고 있다. 어느 쪽으로 산책을 가든 답답함이 느껴진다. 집이 재테크의 수단이 되고 깨끗함과 편리함이 최고가 된 서울이 싫지만 도시 생활에 맞춰진 삶의 패턴을 쉽게 바꾸지도 못한다. 저자가 사는 성곽 주변의 언덕 위의 집이 낭만적으로 보여 질지 몰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은 변화를 원할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그곳을 떠나지 못할 사람은 재개발이 늦추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장소는 분명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하는데도 그것은 우연과 인연과도 연결되어 있다. 생각지도 않게 어떤 장소에 오래 살 수도 있고, 원하지 않아도 떠나야만 하는 경우도 생긴다.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그곳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면서도 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다른 많은 것들을 음미하며 산다. 사람과 세상을 향해 흐르는 따뜻한 마음의 길이 참 좋다. 작가의 그럼 마음을 내 마음에도 심어보고 싶다. 계속 변화되어 싫어지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렇다고 훌쩍 떠날 수도 없기에 콘크리트 높은 벽 사이를 누비며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나만의 아름다움을 찾아봐야겠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반려견과 반려묘를 키우지 않아 사실 그 사랑에 깊숙이 들어가지는 못한다. 누군가의 반려견이 저 세상에 갔어도 난 주인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나의 애도는 서툴 것이다. 백수린 작가는 자신의 반려견인 봉봉을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낸 후 사람들이 보내 준 빈껍데기 같은 말이 자신에게 더 상실감을 준다고도 했다. 난 이런 저자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무척 난감하기도 하다.

 

완벽히 공감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애도의 표현은 당사자에게 미흡하고 텅 빈 마음을 채워주기에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위로를 건네는 애도가 더 좋은 게 아닌가? 말의 내용보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받는 것이 더 우선일 것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슬픔은 개별적이고 섬세한 감정(p.131)’이기 때문에 완벽한 공감이 어려울지 모르지만 번번이 공감에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죽음은 슬픈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다.

 

내 인생에서 날 도와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요. 많았어요, 도와준 사람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네 번까지 하고 나면 다 도망가요. 나아질 기미가 없는 인생, 경멸하면서... 지들이 착한 인간들인지 알았나 부지.”

 

착한 거야. 네 번이 어디야? 한 번도 안 한 인간들이 쌔고 쌨는데.”

 

드라마 나의 아저씨’ 7화에 나오는 지안과 동훈의 대화이다. 난 이 대사가 참 좋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그것이 다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다가간다는 건 용기를 내는 것이다. 애도도 그런 것이 아닐까.

 

소설도 그렇지만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건 비슷한 경험에 대한 표현의 찬란함일 것이다. 집과 사람, 산책길에서 사색한 생각들에 대해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을 이 책에서 발견하고 감탄한다. 더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이만하면 됐다며 포기하는 나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었다.

 

[람이 불어와 나무들을 잡아 흔들고 낙엽이 떨어져내렸다. 그 많은 낙엽은 곧장 바닥으로 떨어질 듯하다가 솟구쳐올랐고 다시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추듯 허공을 맴돌았다. 마치 죽음의 군무를 추는 새떼처럼. 쓸쓸하고 찬란한 피날레를 장식하는 꽃가루처럼. 나는 살면서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수없이 보았지만 그날처럼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48]

 

몇 년 전 11월의 어느 날,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씁쓸한 마음으로 산책길에 나섰다가 내가 만났던 경험을 작가는 완벽하게 표현해주었다. 힘든 마음과 내가 바라보는 풍경에서 아름답고 기이한 것을 발견할 때의 전율은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인생은 항상 뭔가의 사이에 있고 그것들이 이율배반적 일 때도 있지만 작가의 말대로 살아 있는 것들 쪽(p.227)' 으로 돌리는 어쩔 수 없는 내 시선을 부끄러워하지는 말아야겠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우리는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자주 가질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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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3-06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꼬맹이가 얼마 전에
신약을 완독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랬던지요.

저도 어제 라즈 채스트의
부모님과의 이별 에세이
읽고 참 많이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내 삶의 태도에 생각해
보게 하는 글, 공감합니다.

페넬로페 2023-03-06 19:36   좋아요 1 | URL
몇년 전부터 레삭매냐님께서 꼬맹이라 표현하셔서 ㅎㅎ 나이를 가늠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신약성서를 완독했다니 정말 대단한데요~~

삶의 묵상과 통하는 책을 만나는 건 언제나 기쁨입니다^^
라즈 채스트의 책도 수소문 해봐야겠어요^^

바람돌이 2023-03-06 2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다보면 내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했지 할 때가 있어요. 특히 에세이에서 그런걸 발견할 때가.... 그래서 작가는 다르구나 생각하기도 하고, 또 작가의 그런 표현에 위로를 받기도 하는거 같아요. 그래서 책은 사랑입니다. ^^

페넬로페 2023-03-06 23:42   좋아요 2 | URL
정말요!
그래서 작가인가봐요.
어쩜 그렇게 깊이 아름답게 표현하는지 매번 감탄해요~~
그래서 책은 사랑, 싸랑입니다^^

희선 2023-03-07 0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 슬픔은 다 알기 어렵겠죠 그게 자기 슬픔이 됐을 때 그때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건 다르기도 해요 그래도 아주 모르는 척하는 것보다는 뭔가 말하는 게 좀 낫겠습니다 말이 아니면 가까이 있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둘레가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과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는... 없는 사람 마음을 조금 생각하면 좋겠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3-03-07 09:49   좋아요 1 | URL
뭐든지 겪어보지 않으면 완벽히 알기는 어려워요. 대충 짐작으로 알뿐이죠. 기쁨과 슬픔 다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서툴게나마 조금은 마음을 표현해주고 싶은데 요즘은 그것도 상대방을 생각하기에 잘 안될때가 있더라고요.
희선님 말씀처럼 없는 사람도 생각해야하는데 경제원리가 그렇지 않아 불편하고 아쉬워요^^

자목련 2023-03-07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수린의 에세이 참 좋았어요. 페널로페 님의 리뷰로 다시 만나니한 번 더 읽는 기분이에요^^

페넬로페 2023-03-07 09:51   좋아요 1 | URL
저는 두 번 다 백수린작가를 에세이로 만났는데 이제 소설을 읽어봐야겠어요.
소설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레이스 2023-03-09 21:29   좋아요 1 | URL
소설도 좋아요~♡
단편집 <여름의 빌라> 좋았어요^^

페넬로페 2023-03-10 12:40   좋아요 1 | URL
네, ‘여름의 빌라‘, 오래 전부터 읽어보려고 하는데 계속 밀려요 ㅠㅠ

2023-03-07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3-03-10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경공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교회에서 성경 1년 코스도 들어보고
그룹 성경공부를 8년 가까이하고,
특히 종편 기독교 채널에서도 방송해 주는데
역시 들으면 들을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해요.
페페님 이 책에서 성경공부 할 때가 생각나셨다니
궁금해지네요. 저도 읽어 봐야겠습니다.
‘나의 아저씨‘의 그 대사 저도 기억나요.^^

페넬로페 2023-03-10 20:34   좋아요 1 | URL
성경공부 정말 어려워요.
워낙 비유가 많아 그걸 해석해야하고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고요.

페페!
좋은데요.
최근에 서재에서 저와 똑같은 닉네임을 가진 분이 활동하시는거 알고 닉네임 바꿀까도 생각중이예요 ㅎㅎ

stella.K 2023-03-10 20:47   좋아요 1 | URL
아, 모르고 계셨나봐요. 저도 똑같아서 처음엔 놀랐는데 서로 잘 쓰고 계신 것 같아서 그런가 보다했어요. 저도 스텔라님이 계시더라구요. 다행히도 그분은 한글로 쓰셔서 저랑은 다르니까 신경 안 쓰기로 했죠. 페페 마음에 드시나요? 벌써 그리 불러드리고 싶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 자제하고 있었죠. ㅋ 저도 텔라로 불러주시는 분계신데 그렇게 약칭으로 불러주는 것도 좋더라구요. 애칭같고. 앞으로 페페도 사랑해 주세요.^^

희선 2023-04-08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축하합니다 비에 벚꽃이 많이 떨어졌더군요 그래도 다 떨어지지 않고 남은 것도 많아요


희선
 















딸아이를 낳고 4일 동안 병원에 있다 친정으로 산후조리를 하러 갔었다. 내가 늦은 나이에 결혼 해 그 당시 엄마의 나이도 많았지만, 엄마는 꼭 당신 손으로 나를 거두어야 한다며 산후조리원으로 간다는 나를 억지로 친정으로 데려갔다.

 

엄마는 자연산 미역을 사서 삼시세끼 나에게 미역국을 끓여 먹이고 아이를 목욕시키고 아이의 옷을 삶고 세 시간마다 나오는 우윳병을 소독하느라 정작 아이는 꼬박 내가 돌보아야만 했다. 병원에서는 잠깐 동안 신생아실 창문을 통해서만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집에 와서야 자세히 볼 수 있었던 아이는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조그만 배냇저고리가 헐렁할 정도였다.

 

친정으로 온 그 다음날은 하루 종일 봄비가 내렸다. 아이는 계속 잠만 자고 푸른똥을 쌌으며 간간이 재채기를 했다. 아이가 기침을 할 때마다 저러다 혹시 잘못되는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했다. 그날 빗소리를 들으며, 아이를 바라보며 계속 울었다. 내가 저 조그만 핏덩이를 온전한 존재로 잘 키워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무거웠고 암울했다. 아이에 대한 사랑보다 부모에게 주어진 책임이 더 우선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아이가 4학년이 되던 해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할 때까지, 나는 모든 것을 아이와 함께했다. 도서관을 다니며 같은 그림책을 읽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고 놀이공원에 가고 여행을 다녔다. 닥치는 대로 육아서를 읽고 자주 반성모드에 돌입했으나 그것은 또 쉽게 망각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든 일이었고 내가 그런 재주가 없다는 것도 실감했다. 사랑을 듬뿍 주지도 않는, 그렇다고 완벽한 기계적 엄마도 되지 못한, 늘 어정쩡한 모습으로 이 무거운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날 날만을 기다린 것 같다.

 

 

아마도 딸아이가 자라면서 내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일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말을 시원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자식의 삶도 있기에 그것이 지나친 욕심이 아닌 한 나도 포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오래 전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읽으며 그 내용보다는 공지영 작가는 어쩌자고 자식을 세 명이나, 그것도 아버지가 다 다른 아이를 낳을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했다. 아이 한 명 키우기도 이렇게 힘든데 말이다. 같은 엄마로서 그녀가 걱정되고 안쓰러웠다. 그렇지만 이 책 속의 엄마, 공지영은 씩씩하고 당당했다. ‘, 오늘도 좋은 하루!’라는 말로 한 걸음 내딛는 그 말 속에 자식에 대한 집착과 애증에 대한 하루치의 포기가 들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네가 엄마가 처녀 시절에 꿈을 꾸던 그런 딸은 분명 아니야. 엄마가 꿈꾸던 딸은 물론 늘 전교에서 1등을 해야 하고, 선생님들에게 칭찬은 도맡아 받고, 키는 크고 얼굴은 예쁘고(네 아빠와 엄마가 네게 물려준 유전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몸매는 미인대회에 나갈 정도이지만 그런 대회에는 결코 나갈 생각이 없이 늘 세계 명작을 읽고 있는 데다가, 영어는 기본으로 잘하고 거기에다가 약간의 프랑스어와 일본어를 하며(중국어도 괜찮아), 집에서는 동생들을 잘 돌보는 누나이고 엄마에게는 늘 대견하며 아빠에게는 애굣덩어리인.....(솔직히 숨이 차긴 하다.) 그런 딸이어야 했지. 웃지 말라구. 이런 생각을 할 무렵에는 엄마는 너보다도 철이 없었을 때였으니까 말이야.

 

위녕. 너는 아직 젊고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단다. 그것을 믿어라. 거기에 스며 있는 천사들의 속삭임과 세상 모든 엄마 아빠의 응원 소리와 절대자의 따뜻한 시선을 잊지 말아라.

-작가 후기 중에서]

 

이것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 아닌가!

 

 

20221231, 딸아이가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 갔다. 캐리어 두 개를 밀며 무거운 배낭을 지고 떠나는 딸이 걱정되었지만 파리 드골공항에서 학교가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는 톡을 받고 난 후부터 난 자유와 휴가를 얻었다. 하루 한 두 시간 정도 페이스톡으로 딸의 얼굴이 아닌 내 얼굴에 신경 쓰며 하는 대화가 약간 피곤하지만, 휴가를 얻은 댓가라 여기며 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공항 출발장안으로 들어가며 딸아이는 많이 울었지만 나와 남편은 울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여행지에서 딸아이는 항상 엄마와 같이 왔으면 좋았겠다고 말하고, 보고 싶다고 하지만 솔직히 난 딸아이가 많이 그립지는 않다. 그냥 22년 만에 혼자 누리는 이 시간이 너무 좋다.

 

삶이 단출하다는 것은 비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냉장고의 공간이 남아돌고 택배 상자가 도착하지 않는다. 잔소리를 하는 나의 나쁜 말이 줄어들고 그것으로 내가 나에게 집중할 시간을 얻는다. 몇 달 후에 돌아오고 결혼하기 전까진 절대 독립하지 않을 거라는 딸아이가 잠시 비운 이 집의 적막이 평화롭다.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게 아쉬울 정도로 나의 휴가는 나에게 행복을 주고 있다. 딸에게는 나의 감정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친정 엄마와 전화할 때마다 엄마는 내가 보고 싶고 다녀가라고 하는데 난 엄마의 자격이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31일에 남편과 여행을 다녀왔다. 둘만의 여행을 떠난 건 아이가 태어난 후 아마 처음인 것 같다. 내가 운전을 하지 못해 여행을 가면 온종일 남편이 운전을 해야만 한다. 하루 종일 운전하는 사람도 힘들지만 혹시나 운전을 하며 졸까봐 나 역시도 편안하지는 않다. 그래서 이번엔 기차 여행을 선택했다. 바다가 보고 싶어 묵호와 정동진에 갔다. 볼 것이 많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볼 것이 한 곳에 몰려있는 묵호와 정동진이 더 좋았다. 묵호는 오래 전 소설의 제목에서 알게 된 도시다. ‘묵호를 아시나요?’라고 기억했지만 실제로는 묵호를 아는가라는 심상대의 소설이다. 묵호항을 중심으로 묵호등대, 논골담길, 도째비골 그래피티가 붙어있어 구경하기 좋았다. 논골담길을 내려올 때 계속 보이는 바다도 운치 있었다.


정동진은 언제 가도 좋다. 7번 국도변에 있는 바다와 도시를 좋아해 거의 해마다 가지만 동해바다는 절대 질리지 않는다.


정동진 바다 모래사장에서 물이 최대한 신발 가까이에 올 때 핸드폰 사진의 셔터를 누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핸드폰 화면에 머물러있어 물이 들어오는 것을 직접 체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핸드폰 화면 속으로 몇 번 들어온 물이 신발 가까이에 오지 않아 계속 기다렸다. 그러다 갑자기 들이친 파도에 신발과 바지 밑단까지 완전 젖고 말았다. 놀라고 당황스러워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파도가 우리 마음대로 오지 않으며 그러한 것을 기대한 어리석음이 웃겼다. 제대로 당했다. 그래도 계획한 사진을 건져야겠다는 열정을 불태워 젖은 채로 다시 물을 기다려 사진을 찍었다. 그때가 해질 무렵이라 바람이 많이 불기 시작했다. 정동진 바닷가 벤치에 앉아 추위에 떨면서 신발을 벗고 모래를 털어냈다. 휴지로 신발을 대충 닦고 남편이 편의점에 가서 사온 양말을 신었지만 금방 축축해졌다. 그래도 재미있었고 실컷 웃었다.


리스본을 여행 중인 딸아이가 엄빠의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보내 온 사진이다.


뭔 미래씩이나?

너의 엄빠는 현재도 가능하단다.

미션 클리어 그리고 투비 컨티뉴드.

 

기차 여행이어서 그런지 새벽에 집을 출발해 밤늦게 돌아올 때까지 찍힌 독보적 걸음수가 3만보가 넘었다. 지금까지도 다리가 뻐근하다.


이번에 내가 가져간 책은 백수린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이었다.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가볍게 읽기 좋을 것 같아 선택했는데 이 책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생각할 것이 많아 계속 읽기를 멈추어야만 했다. 내가 여행가서 보고 온 것을 난 이렇게 궁상맞고 초라한 단어로만 쓰는데 백수린 작가는 일상을 얼마나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다정하고 조곤조곤 써 내는지. 세상의 모든 작가를 존경한다.


<나의 프루스트 효과>

이제는 프루스트라는 글자만 봐도 반갑고 그를 만나러 가야 할 의무를 느낀다.

그곳이 비록 한국의 바닷가에 있는 카페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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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3-03 15: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가 페넬로페 님을 따라다니나요 하필 저기 짜잔 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3월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03-03 15:15   좋아요 2 | URL
하필 저기 정동진역 앞에 떡하니 있더라고요^^
3월도 열심히 책 읽겠습니다^^

모나리자 2023-03-03 1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두 분 만의 여행 행복한 시간 보내셨네요.^^ 여행길에 보는 풍경과 사물은 평소에 보는 것과 달리 더 아름답게 느껴지더라구요. 3월에도 화이팅입니다. 페넬로페님.^^

페넬로페 2023-03-03 16:03   좋아요 3 | URL
동해바다를 좋아해 힐링하고 왔어요. 언제나 여행은 좋고 모나리자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어요.
모나리자님께서도 행복한 3월 보내시기 바래요^^

구단씨 2023-03-03 15: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두분 나란히 앉은 모습도 아름답고요.
오랜 세월을 다정하게 함께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분위기가 풍겨요. ^^

페넬로페 2023-03-03 16:06   좋아요 1 | URL
살다보니 친구가 되더라고요.
서로 편해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것도 맘껏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구단씨님!
아름답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3-03-03 15: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년 전에 삼척에 갔다가
꼬맹이가 바닷물 피티병에 담
아 오라고 해서 근처에 갔다가
물벼락 맞은 기억이 나네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추억
이 되지 싶습니다.

겨울바다, 멋졌습니다.

페넬로페 2023-03-03 16:08   좋아요 2 | URL
네,
그런게 나중에 다 추억이 되고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바다는 겨울바다가 멋져요!

겨울호랑이 2023-03-03 16: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께서도 동해안에 다녀오셨군요! 시원하게 몸을 담그면서 놀 수 있는 여름바다도 좋지만, 멀리서 떨어져 바라보는 겨울바다는 또 다른 면에서 좋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페넬로페 2023-03-03 16:38   좋아요 2 | URL
네, 저도 반가웠어요.
이번에 경포바다는 못가봤지만 그래도 정동진도 강릉이니까요~~
저는 언제나 멀리서 바라보는 바다가 좋더라고요^^

거리의화가 2023-03-03 17: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넘 좋네요. 두분의 여행 참 좋으셨을 것 같습니다. 보기 흐뭇하고 제 마음까지 따뜻해지네요. 아이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이 같기란 불가능할테죠. 이런 시간들을 앞으로는 자주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프루스트 간판에 빵 터졌네요. 역시 프루스트 효과?ㅋㅋ 정동진 가본지 10년은 훌쩍 지난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3-03-03 19:06   좋아요 3 | URL
둘이서 하는 여행도 좋더라고요. 자식이 커가면 왠지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되는데 남편과는 그러지 않아도 되어 편하고 좋았어요.
거리의화가님께서도 요즘 잃.시.찾 읽고 계셔서 프루스트란 단어가 더 의미 있으실 것 같아요 ㅎㅎ

2023-03-03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3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3-03-03 23: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
넘 부러워요.
이번주 아이들 제주도 여행 가버리고, 혼자 집에 있는데, 그날 하루 기분이 좀 이상했어요.

페넬로페 2023-03-04 08:29   좋아요 2 | URL
어떨 땐 일하기전까지 말을 한마디도 안할때도 있더라고요 ㅎㅎ
근데 시간이 조금 여유있어도 책 읽는 양은 비슷하니 왜이런지 모르겠어요^^

희선 2023-03-04 0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프랑스에 갔군요 잠시 없어서 편하게 여기는 거 괜찮아요 엄마라고 해서 늘 아이만 생각하지 않아도... 페넬로페 님하고 남편분 둘만 바다에 갔다 오셨군요 좋은 시간이었겠네요 아주 작았던 아이가 어느새 커서 프랑스에 갔다고 생각하면 잘 자랐다는 생각이 들겠습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3-03-04 08:31   좋아요 1 | URL
네, 잠시동안만 조금 여유있어요.
그래도 좋더라고요.
제가 바다를 좋아해 여행은 산보다는 바다쪽으로 가는데 언제나 힐링하고 와요^^

자목련 2023-03-04 09: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만으로도 좋고 글과 함께 읽으니 더 좋고요.
페널로페 님의 충만한 시간의 기록 기대할게요^^

페넬로페 2023-03-04 10:33   좋아요 2 | URL
여행지에서의 사진은 언제나 좋은 것 같아요.
네, 충만한 시간 많이 갖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3-03-04 17: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다와 함께 하는 두분의 발도 뒷모습도 다 좋네요. 이 글 읽다가 우리집 딸래미들을 어떻게 내보내지 막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는 둘이라서 한꺼번에 좀 나가라 해야하는데 그게 어렵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3-03-04 19:23   좋아요 1 | URL
자매끼리는 여행도 자주 다니잖아요. 둘이서 여행을 다녀오라고 하면 어떨지요 ㅎㅎ
딸아이는 혼자라 늘 자매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해요^^

오거서 2023-03-07 2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션 클리어 앤 투비컨티뉴드. 너무너무 멋집니다!
백수린의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아직 읽지 못했지만, 페넬로페님만큼이나 행복한 느낌을 제대로 글로 사진으로 옮기지 못했을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3-03-07 20:58   좋아요 1 | URL
오거서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소박하나마 계속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거서님!
요즘 바쁘신 것 같은데
항상 건강 유의하시고
좋은 저녁 보내시길 바래요^^

오거서 2023-03-07 21: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
 















조르주 상드의 소설 사생아 프랑수아19세기 중반의 프랑스 전원소설이다. 목가적인 전원을 무대로 그곳의 생활과 정경을 내용으로 한 것이 전원소설이지만, 정작 이 소설은 약간의 막장드라마의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그런 전개로 권선징악적 형태로 끝나버리지는 않는다. ‘사생아 프랑수아에는 다른 요소도 많이 들어있다. 상드는 이 소설에서 버려지는 아이들에 대한 부유층의 무관심을 비판하고 자본에 의해 잠식되는 농부들의 고단한 삶을 묘사하기도 한다. 코르무에 방앗간 여주인인 마들렌 블랑셰에 작가 자신의 실제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그녀를 통해 당시 여성이 받는 차별을 볼 수 있다. 예술가는 무엇을 통해 자연과 사람을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담겨있다.

 

샹피(들판에 버려진 아이) 프랑수아는 그를 돌보는 자벨과 가난하게 살아간다. 이를 불쌍히 여긴 마들렌은 그를 돌봐준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을 싫어하는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녀를 구박한다. 이유 없이 고약해지고 심술을 부리는 그들에게 지고지순한 마들렌은 묵묵히 견디며 그들 모르게 계속 프랑수아를 돕는다. 열여섯에 결혼한 마들렌은 아이를 낳고 방앗간 일과 집안일을 하며 고통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남편은 그런 마들렌에게 싫증을 느끼고 바람을 피우며 노동에서도 멀어진다.

 

[하지만 여자가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면 금방 매력을 잃어버리는 법이야. 더구나 아일 모유로 키웠다면 벌서 낡은 몸이야. 그래, 여자들이란 한때뿐이지. 한창때의 포도밭 같은 거야.

 

우리네 남자들은 아내를 사랑하기에 질투심에 사로잡히지. 그래서 화를 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때론 구타까지 하지. 그것이 아내들을 슬프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 아내들은 결국 집 안에만 쳐 박혀 지내게 되고 남편을 두려워하고 권태로워하고,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거야. 그때서야 우리 남자들은 만족을 느끼지. ‘내가 주인이다라고!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엔가 아무도 자기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건 그녀가 이제는 추한 여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우여곡절 끝에 마들렌의 남편이 죽고 힘들게 살아가는 마들렌을 프랑수아가 사랑으로 구한다. 밤에 농가에서 시골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삼 재배인이 들려주는 액자소설 형식의 이 이야기에서 상드는 여성, 농부, 자본주의, 사생아에 대한 사회적 문제점을 부각시킨다. 그 당시 형편없었던 여성의 지위와 함께 사생아들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비판한다. 사생아 프랑수아는 어른의 도움으로 잘 자랐지만 누구나 다 그런 행운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똑같이 불행한 환경에서라도 어떻게 그들을 구제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것은 일종의 투기였다. 그 농부들은 그들의 손에 일단 들어왔지만 채권자가 마음 내키지 않으면 도로 회수해 갈 수 있는 그 땅뙈기를 놓치기 싫어하는 한,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이자를 꼬박꼬박 바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 소득이, 파는 사람이 요구하는 이자의 절반도 못 되는 밭을 땀 흘려 경작한다. 그런데 반평생을 힘들여 땅을 일구고 나면 쇠잔해 버리고, 땅만이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비옥해진다. 그 땅이 두 배의 가치를 지니면 그때야말로 그것을 팔 시기다. 만일 제값에 잘 판다면 우리 농부들도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대개는 이자로 쪼들리기 때문에 서둘러 싼 금액에라도 팔아 버리게 된다. 만약 이를 거역하면 법이 강제로 그것을 집행시킨다.]

 

팜므 파탈, 사랑과 정열의 화신으로 불리었던 상드였지만, 작가의 사회비평은 강렬하다.




 

 

 

 

 

 

 

 

 





상드의 소설, ‘프랑수아 르 샹피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민음사판)콩브레13되찾은 시간에 언급되고 있다. 화자는 스완의 방문으로 자신의 방에서 어머니의 키스를 받지 못해 슬픔에 빠진다. 이 에피소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관통하는 기억의지적 기억으로 대표되는 장면이다. 화자는 혼 날 각오로 잠자리에 들지 않고 복도에서 어머니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혼나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와 함께 잘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잠깐의 키스가 아닌, 온전히 하룻밤을 어머니와 보낼 수 있었는데도 정작 화자는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신경증이 병으로 인정받고 그것으로 인해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대와 이상을 처음으로 포기했다는 생각으로 고통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히려 어머니가 화를 내시는 편이 내가 어린 시절에 알지 못했던 그런 새로운 다정함보다는 덜 슬펐을 텐데. 나는 이제 막, 눈에 보이지 않는 불경한 손길로 어머니 영혼에 첫 번째 주름살을 그었고, 첫 번째 흰 머리칼을 나타나게 한 것같이 느껴졌다. 이런 생각에 내 흐느낌은 더해 갔고, 이제까지 나에 대해 어떤 동정의 기색도 보이지 않던 엄마도 갑자기 내 슬픔에 전염된 듯, 울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보였다.

-p.75~7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그런 이유로 잠 못 드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화자의 생일에 주려고 할머니가 사 놓았던 조르주 상드의 전원소설 네 권 중, ‘프랑수아 르 샹피(사생아 프랑수아)’를 가져와 읽어준다. 처음에 할머니는 상드의 앵디아나를 골랐지만, 그 책의 내용에 정념, 간통, 자살이 들어있어 다시 상드의 전원소설로 바꿔 온 것이었다. 소설가의 전형으로 알려진 조르주 상드의 소설은 화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프랑수아 르 샹피에는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미로운 것이 담겨 있다고 상상했다.....내게 새로운 책이란 그 책과 유사한 많은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 이유가 있는 유일한 사람 같았다. 그렇게도 일상적인 사건들, 그렇게도 평범한 일들, 그렇게도 흔한 말들이 내게는 특별한 어조나 낯선 억양처럼 느껴졌다.

-p.80~8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내가 이 부분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상드의 프랑수아 르 샹피가 전원소설로 분류되지만 어린 아이에게 읽히기에는 좀 과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도 그렇고, 상드는 분명 부르주아에 대해 비판도 한다. 화자의 계급은 부르주아에 속했고 그들은 굉장히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날 밤, 어머니는 잔재주나 꾸밈을 추방하고 따뜻한 억양으로 책을 읽어주셨고, 그것으로 화자의 마음의 가책은 가라앉았다.




 

 

 

 

 

 

 

 





기억이라는 키워드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한 고 김진영 선생은, 화자의 어머니가 프랑수아 르 샹피를 아들에게 읽어주는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어머니가 이 책을 읽어줄 때 내밀한 연애장면을 건너뛰며 읽지만, 마르셀은 그것을 눈치 챈다. 프루스트의 글쓰기에서 생략이 중요한데, 김진영은 이 부분이 작가에게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했다고 한다. ‘문장들에 적합한 온갖 자연스러운 다정함이나 넘쳐 흐르는 부드러움을 표현하려는어머니의 낭독은 음악적으로도 들린다.

 

[어머니 목소리에 들어있는 부드러움이 문장의 요청에 따라 문장으로 들어가면 문장이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어오는데, 어머니의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마치 그 문장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위해서 쓰인 것처럼 흘러갔다. 이게 바로 프루스트입니다. 이게 바로 문장의 음악성입니다......프루스트의 문장은 다 이런 구조입니다. 어머니의 목소리와 문자가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보여 주는 부분이죠.

-p. 142/364]

 

어머니의 책 읽기는 그가 나중에 어머니의 책 읽기 방식으로 사물에 대해 글을 써 나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화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선 이유는 결국 그가 글을 써야하는 당위를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다 화자는 비의지적 기억에 의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삶과 문학이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작가는 그것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프루스트는 기억에 의해 삶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재해석하며 문학적 상상력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사생아 프랑수아의 머리말에서 조르주 상드역시 똑같은 고민을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순수한 자연의 원초적인 것을 어떻게 예술로 나타낼 수 있을지, 그런 과정이 오히려 무의미한 건 아닌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히려 예술로 인해 이런 아름다움이 소멸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프루스트처럼 글을 써야하는 의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신 오른편에는 현대어를 쓰는 파리 사람, 왼편에는 농부가 앉아 있는 듯이 얘기해 봐요. 그 농부가 이해하지 못할 단어나 문장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파리 사람을 위해서 명확하게, 농부를 위해선 꾸밈없이 얘기해야 할 거요.-‘사생아 프랑수아’, 머리말 중에서]

 

 

어머니가 어린 마르셀에게 프랑수아 르 샹피를 읽어 준 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전쟁이 일어나고 마르셀은 건강상의 이유로 두 번이나 요양원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마르셀은 생루 부인(질베르트)의 집 서재에서 조르주 상드의 프랑수아 르 샹피를 꺼내든다. 화자는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상념에 빠진다. 예술가의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조르주 상드의 프랑수아 르 샹피였다. 지금 내가 하는 사유와는 너무도 일치하지 않는 어떤 인상으로 인해 처음에는 충격을 받고 불쾌했지만, 이내 그 인상이 내 사유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깨닫고는 깊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p.53

 

나는 본질적인 책, 유일하게 참된 책은 이미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위대한 작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발명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번역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가의 임무와 역할은 바로 번역가의 그것이다.

-p.6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프랑수아 르 샹피를 통해 작가 프루스트와 조르주 상드가 만나는 부분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재독하면서 좋은 책은 절대 한 번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두 번째이니 더 쉽게 더 빨리 읽히리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은 읽을수록 공부할 것도, 의미를 곱씹을 문장도 많아 오히려 더 천천히 읽게 된다. 특히 이 책의 1권인 콩브레가 너무 좋다. 처음 읽었을 때 느끼지 못한 것들이 다시 발견되고, 프루스트의 문장을 매번 감탄하며 읽는다. 무인도에 가져갈 10권 중 한 권은 주저 없이 잃..찾의 콩브레가 될 것이다.




<나의 마들렌 효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마들렌이 발견될 때마다 나는 마들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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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3-02-28 14: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재독하게 되면 처음과는 분명히 다른 감동을 느낄 것 같아요. 저도 페넬로페님 처럼 감동의 시간을 얼른 누려보고 싶어요. 저도 콩브레를 묘사했던 문장들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페넬로페 2023-02-28 15:37   좋아요 3 | URL
잃.시.찾은 무조건 재독해야 될 책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저 완독을 목표로 했는데 이제 천천히 음미하며 읽으려고 해요~~
콩브레 문장 넘 좋아요!

2023-02-28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28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하수 2023-02-28 15: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콩브레 부분은 저도 아직 기억이 나네요 읽은 지 얼마 안돼서 그렇겠죠 문장들 보니 다 기억나요~~
너무 좋아요^^

페넬로페 2023-02-28 19:51   좋아요 0 | URL
같은 책을 읽은 느낌이 은하수님과 연결되는 것 같아 저도 좋아요^^

바람돌이 2023-02-28 15: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르주 상드와 김진영선생과 프루스트가 만나는 글 너무 좋습니다. 아 진짜 저도 이런 글 쓰고 싶은데 저는 왜 읽은 책이 생각이 안나고, 생각하려고 메모해두면 이 메모를 왜 했는지가 생각이 안나고,,,, 책과 책을 연결지어 생각을 연결하는 이런 능력은 언제쯤 저에게 생길까요? 지금까지 안된걸 보면 불가능한지도.... 오늘 페넬로페님 글 너무 좋아서 두번씩 읽다가 부러움을 잔뜩 쌓고 갑니다. ㅠ.ㅠ

페넬로페 2023-02-28 19:54   좋아요 1 | URL
저는 매번 바람돌이님의 글에서 연결된 책을 느끼는데요^^
프루스트의 잃.시.찾이 워낙 방대해 연결되는 책들이 너무 많아요. 천천히 그것들 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은오 2023-02-28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페넬로페님의 마들렌 효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마들렌이 나올때마다 마들렌을 먹게하는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3-02-28 19:55   좋아요 1 | URL
저의 마들렌효과 좋지요?
이러다 살 찌는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책읽는나무 2023-02-28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번 읽으면 안되는 페넬로페님의 글이네요?
일단 댓글 먼저 달고, 다시 또 읽으러 올라가려구요.
이런 글은 기본적으로 사고의 폭이 남다르게 태어나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ㅋㅋ
저는 읽다가, 마들렌 사진에 그만, 읽은 리뷰 내용들마저 휘발되어 버린...ㅜㅜ
저의 사고는 여기까진가 봅니다ㅋㅋ
근데 <프랑수아 르 샹피> 이 책이 어머니가 마르셸에게 읽어준 책이었나요? 전 이제 깨달았다는요?

페넬로페 2023-02-28 20:05   좋아요 1 | URL
제 글이 아니라 잃.시.찾이 한 번 읽으면 안되는 글입니다 ㅎㅎ
마들렌은 어떤 차와도 어울려서 더 맛있어요~~

저도 책나무님 음식 사진보면 정신이 혼미해져요.
언제나 책나무님 옆집으로 이사가고 싶어요~~

네 이 책을 마르셀의 어머니가 읽어줘요^^

서니데이 2023-02-28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들렌은 프루스트만 있는 건 아닌데, 마들렌과 홍차가 있으면 프루스트가 연상되는 효과.
사진 보니까 향긋한 느낌이 날아오는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 내일부터 3월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한 시간 되세요.
좋은밤 되세요.^^

페넬로페 2023-02-28 23:29   좋아요 1 | URL
그니까요.
마들렌은 프루스트에만 있는게 아닌데도 그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어요.

서니데이님의 3월도
개나리처럼 노랗게 만발하며
따뜻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희선 2023-03-01 0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온 책에서 조르주 상드 소설을 보셨군요 마르셀한테 엄마가 읽어주는 소설이었다니... 어릴 때보다 자라서 보고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네요 그때 기억이 있어서 나중에 그 책을 봤겠지요 읽을수록 생각할 게 늘어나는 책이군요 두번 읽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3-03-01 16:44   좋아요 1 | URL
어릴 때의 추억을 책으로도 연결시킬 수 있는듯 해요.
딸아이가 어릴 때 집착하던 그림책이 있는데 책이 너덜너덜해 질때까지 책을 읽어 주었어요
그 책을 지금도 갖고 있어요.
아마 끝까지 못 버릴 것 같아요^^

자목련 2023-03-01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의 마들렌 효과, 넘 좋은 걸요. 저도 그런 효과 찾아봐야겠어요^^

페넬로페 2023-03-01 16:46   좋아요 0 | URL
마들렌이 생각보다 잘 없더라고요.
그래서 발견될 때마다 차와 먹곤 해요^^

레삭매냐 2023-03-02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라떼이와 마들렌이
먹고 싶어지는 아침입니다.

조르주 상드, 이름은 겁나게
많이 들었지만 여전히 미지
의 작가로 남아 있네요.

프랑스 전원이라 하시니 저도
땡기네요.

<시간>을 재독하신다니 고저
대단하시다는 말 밖에는.

페넬로페 2023-03-02 12:08   좋아요 1 | URL
저도 조르주 상드를 쇼팽의 연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소설가의 전형‘이라고 까지 표현했더라고요.
그 이유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어요~~

독서모임에서 올해 한 달에 1권 잃.시.찾 읽기로 해서 다시 재독중인데 좋은 것 같아요^^

초원 2023-03-03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예술로 인해 이런 아름다움이 소멸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이 구절이 좋네요.

페넬로페님 글을 읽다가 마들렌을 먹어본 듯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페넬로페 마들렌>출시 기대!

페넬로페 2023-03-03 11:36   좋아요 0 | URL
생각지도 못했는데 상드 소설 머리말에 이런 고민이 있더라고요~~
<페넬로페 마들렌>
라임이 잘 어우러지는데요^^
기회되는데로 마들렌 효과 올려 볼께요**

그레이스 2023-03-03 0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뮈셰도 읽어야 하는데,,, 암튼 읽을 것만 쌓이고 놓친 것도 많고 그럽니다.^^

페넬로페 2023-03-03 11:39   좋아요 1 | URL
그니까요.
저는 이제 포기하고 되는데로 읽기로 했어요^^

희선 2023-03-09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또 축하합니다 이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뗄 수 없는 책이군요 그러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생각나기도 하는... 여기에도 그 책 이야기 쓰셨군요 2023년에도 프루스트와 함께 하는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3-03-12 11:00   좋아요 0 | URL
희선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3-03-13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3-03-13 23:0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피아드 -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세계신화총서 2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서양문학의 뿌리이자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를 막상 읽어보면 당혹스럽거나 의아한 점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지혜의 상징으로 알려진 오디세우스가 오히려 간사하고 교활한 모습을 많이 보인다. 트로이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이끄는 두 수장인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은 전쟁의 패배로 노예로 전락한 브리세이스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운다. 브리세이스를 빼앗긴 아킬레우스는 분노로 인해 전쟁 참여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무척이나 옹졸한 영웅들이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헬레네와 페넬로페에 관련된 에피소드였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맞먹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는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바람이 나서 그를 따라 가버린다. 이것은 파리스의 사과사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결국 이로 인해 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는 10년 동안 전쟁을 치른다. 물론 전쟁의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만 호메로스는 헬레네와 파리스를 그 원인으로 내세운다.

 

그리스의 승리로 트로이가 함락되지만 헬레네에게는 어떠한 페널티도 주어지지 않는다. 헬레네로 인해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헬레네의 쟁취로 전쟁은 끝난다는 식이다. 헬레네의 경솔한 행동으로(사실 신들의 장난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여인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가지만 그녀만은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소식이 궁금해 메넬라오스를 찾아갔을 때, 밤이 되면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는 아무 거리낌 없이 부부의 침상으로 직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헬레네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은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였다. 그녀는 트로이전쟁이 일어나고 오디세우스가 돌아오기까지 20년 내내 고통을 당한다. 아들이 한 살이었을 때,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전쟁에 참가하러 집을 떠나고,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의 소식이 끊기고, 그가 돌아올 가망성이 없어지자 페넬로페에게 백 명이 넘는 구혼자가 나타난다. 그 당시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했고 젊은 귀족들은 페넬로페와 결혼해 오디세우스의 권리를 얻으려했다. 여성은 내키지 않아도 남자의 구혼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페넬로페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짓는다는 핑계를 대며 낮에는 수의를 짜고, 밤에 다시 그것을 풀어버리며 오디세우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는 그런 처지에 있는 페넬로페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애트우드는 정숙한 아내의 전형으로 표상되는 페넬로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상상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솔직하고 신랄하게, 가슴이 뻥 뚫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똑같이 오디세이아를 패러디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조이스는, 페넬로페에 해당하는 마리온을 너무 심하게 꼬고 왜곡시킨 반면 애트우드는 현실을 바탕으로 그 가운데 여성을 중심에 둔다.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애트우드가 신화나 그리스 서사시에 대해 느낀 것들이 나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 좋았다.

 

애트우드는 페넬로피아드오디세이아에서 패러디했지만 소설의 구성은 그리스 비극의 형식으로 전개했다. 페넬로페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각 장 사이에 고대 연극에서 코러스 라인에 해당하는 12시녀의 목소리를 여러 형태로 구성했다. ‘오디세이아’ 22권에서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과 간통했다는 이유로 12시녀의 목에 올가미를 휘감은 채 한 줄로 매달아 죽인다. 작가는 왕비인 페넬로페와 12시녀를 교차시키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똑같이 차별받는 여성의 세계에서도 지독한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성끼리의 연대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교수형을 당한 열두 명의 시녀와 페넬로페에게 화자의 역할을 맡겼다. 시녀들은 합창단이 되어 주로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노래하거나 낭송한다. 그것은 오디세이아를 정독하고 나면 자연히 떠오르는 의문들이다. 시녀들이 교살된 까닭은 무엇인가? 페넬로페의 진짜 속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오디세이아에 실린 이야기는 물샐틈없이 논리정연하지 않다.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다.

-p.17, 머리말에서]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불가능한 시기에 산 페넬로페는 죽어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놓을 수가 있었다. 자신의 삶과 느낌들을 명부로 내려가서야 자기 식대로 털어 놓는다. 페넬로페는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다시 환생하는 삶을 거부한다. 새로운 생 역시 자신에게는 고달프고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안다. 불행과 고통의 규모가 더 커지고 여성의 삶이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한다. 그냥 수 천년동안 자신의 기억들을 간직하며, 한 번씩 영매를 필요로 하는 현대의 저속한 인간들을 통해 세상을 구경할 뿐이다.

 

페넬로페는 평생 사촌 언니인 헬레네를 의식하며 산다. 죽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름다움을 무기로 세상을 쥐락펴락한 헬레네에 비해 자신은 모든 것이 초라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번 환생한 헬레네는 현대의 모든 문물을 받아들이며 아름다움을 유지시키려 한다. 헬레네는 남성과 사회가 원하는 여성성을 지키고 그것으로 안정과 쾌락을 보장받는 여성이다. 헬레네와 대조적으로 페넬로페는 그것을 거부한다. ‘오디세이아에서 벗어난 페넬로페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여성에게 그러한 것은 죽은 후에야 실현되는 건지도 모르지만......

 

애트우드는 12시녀를 통해 다양한 것을 시도한다. 그녀들은 자신의 불행을 노래하고, 신세를 한탄한다. 시녀들이 출연한 인류학 강의도 있다. 달을 숭배하던 모계사회가 아버지신()을 받드는 이방인들의 침략으로 결국 남자가 권력을 잡아 가부장제가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말한다. 누군가는 그러한 것이 페미니스트들의 근거 없는 헛소리라고 주장한다. 오디세우스가 겁탈당한 12시녀를 죽인 것은 그들이 허락도 없이 겁탈당했다는 것이었다.(p.211)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겁탈. 만약 오디세우스를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페넬로페가 구혼자들 중의 한 명과 결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3명의 여자들이 한 줄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경쾌하고 풍자적으로, 신랄하고도 현실에 맞게 쓴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는 단숨에 읽히는 책이다. 재미도 있다.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통해 고대의 여성을 얘기하며 현대를 사는 여성의 역할을 조명해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무엇이 달라졌고, 지금의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는가? 세월이 흐른 만큼 세상은 변화되었을까? 이 책은 요즘 읽고 있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2의 성과 최근에 본 드라마 사랑의 이해와도 연결되어 나에게 많은 의미가 있었다.

 

페넬로피아드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그리스 신화'를 읽고 난 후 읽으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교훈적 전설. 딴 여자들을 매질할 때 써먹는 회초리. 어째서 너희들은 페넬로페처럼 사려 깊고 믿음직스럽고 참을성 많은 여자가 못 되는 거냐? 그것이 정해진 대사였다. 가객들도 그랬고 이야기꾼들도 그랬다. ‘제발 나처럼 살지 마요!’ 나는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렇게 외치고 싶다. 그렇다, 바로 당신에게! 하지만 내가 소리를 지르려고 하면 번번이 올빼미 울음소리만 나온다.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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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26 22: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이 페넬로페를 읽는군요. ㅎㅎ 페넬로페님 덕분에 애트우드가 이런 책을 썼다는 것도 알게되는군요. 그리고 책소개 보러 갔다가 신화학 총서시리즈 기획도 알게 되었는데 이런 기획도 뜻있는거 같아요.

페넬로페 2023-02-26 22:38   좋아요 2 | URL
저와 저 페넬로페는 사실 출처가 다른데 이름이 같아요 ㅎㅎ
저도 서재에 올라온 글로 이 책 알게 되었어요. 책도 잘 읽히고 내용도 좋았어요.
신화학 총서 기획도 좋은 것 같아요~~
애트우드 작가님, 멋졌어요^^

바람돌이 2023-02-26 22:41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출처는 어디인지 갑자기 막 궁금합니다. ^^

페넬로페 2023-02-26 23:23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 크루즈가 아닌것은 확실합니다^^

바람돌이 2023-02-26 23:32   좋아요 3 | URL
ㅋㅋㅋ 그냥 우기세요.

꼬마요정 2023-02-27 00:18   좋아요 2 | URL
저도 그냥 우기세요에 한 표를^^

꼬마요정 2023-02-27 0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애트우드는 믿고 보는 작가죠. 또 얼마나 가슴을 찌를지 궁금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오디세우스 너무 마음에 안 들어요. 마지막까지 페넬로페 시험하는 것도 말이죠. 지는 세이렌 노래도 듣고 키르케랑 7년을 살았던가요.. 칼립소랑도 썸이 있고… 혼자 바깥세계를 경험하고 페넬로페는 갇혀 있죠. 전 그런 게 너무 싫더라구요. 좋은 책 리뷰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2023-02-27 08:47   좋아요 2 | URL
이번에는 많이 통쾌했어요.
저도 생각보다 오디세우스가 맘에 들지 않았어요. 세이렌을 지나갈 때 부하들은 밀랍으로 귀를 막아놓고 정작 자신은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어쩌면 참 인간적이다라는 생각도 했어요. 오디세우스가 아마 칼립소랑 7년을 살았을거예요, ㅎㅎ
오디세이아에 대해 잘 아시니 이 책 좋아 하실 것 같아요**

희선 2023-02-27 0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서사시도 거의 남자가 쓰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거기엔 남자가 바라는 여성이 나왔겠지요 페넬로페는 더 그러지 않았을까 싶네요 지금 생각하니 그걸로 끝나지 않고 뒷이야기 더 있기도 하군요 그걸 잘 아는 건 아니지만... 페넬로페는 죽고서야 자기 말을 하다니... 페넬로페만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3-02-27 08:53   좋아요 3 | URL
그 당시 여성의 지위가 낮았으니 문학으로 표현된 여성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지 못했으니 죽어서야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작가가 이런 것들에 대해 디테일하게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았어요. 요즘 여성들의 삶과도 많이 연관되어 있어 좋았어요^^

초원 2023-02-27 1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사한 리뷰를 읽고도 얹을 말이 궁상맞네요. ‘백 명이 넘는 구혼자‘와 ‘단숨에 읽히는 책‘이 인상깊었어요.페넬로페님 잘 놀다 갑니다요!

페넬로페 2023-02-27 14:29   좋아요 2 | URL
저의 글 읽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하죠!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미미 2023-02-27 2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겁탈당한것도 억울한데 그걸로 또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던 거군요!
애트우드의 소설이란 걸 모르고 리뷰 앞쪽을 읽으면서 헬레네 또는 페넬로페의 입장을
소설로 재해석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이 그런거였네요^^ 재밌을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3-02-27 23:28   좋아요 2 | URL
애트우드 작가가 오디세이아를 아주 세밀히 분석하고 이 작품을 쓴 듯 해요. 오디세이아를 읽고 난 후의 저의 느낌과 비슷해 좋았어요.
재미있고 신랄해서 통쾌했어요^^

서니데이 2023-02-27 23: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에트우드의 책을 읽으면 시녀이야기에서는 성경, 그리고 이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 희곡에서 소재를 가져온 것 같았어요. 서양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성경과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 안에는 이야기가 많아서 소재로 쓸 수 있을 내용이 많을 거예요.
잘읽었습니다. 페넬로페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3-02-27 23:30   좋아요 3 | URL
이 책 읽고 시녀이야기를 빨리 읽고 싶더라고요. 성경을 소재로 한 책이라니 더 흥미로운데요.
서니데이님,
오늘도 잘 지내셨죠!
좋은 밤 되시길요^^

새파랑 2023-02-28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피아드는 페넬로페님을 위한 책이군요 ^^ 저 생각해보니 애트우드 책은 딱 한권 읽어봤네요 ㅎㅎ 페넬로페님을 위해 이 책을 읽어봐야 겠습니다~!!!!!!

페넬로페 2023-02-28 15:35   좋아요 1 | URL
오늘부터 정숙한 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ㅎㅎ

희선 2023-03-09 0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축하합니다 이 페넬로페는 아니지만 어쨌든 페넬로페가 나오기도 하는 소설을 보시고 쓴 글이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3-03-12 11:02   좋아요 0 | URL
희선님, 감사해요.
어쨌든 페넬로페입니다, ㅎㅎ

서니데이 2023-03-13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3-03-13 23:0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빈틈없는 오디세우스!
그토록 덕성스러운 아내를맞이하다니. 그대는 정말 행운아요! 이카리오스의 딸, 그대의 흠잡을 데 없는 아내, 페넬로페는 얼마나 정숙했던가! 젊은 시절 보았던 지아비의 기억을 얼마나 소중히 간직했던가! 그 눈부신 미덕은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을 터, 불멸의 신들도 열녀 페넬로페를 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지어 인간들에게 두루 들려주실 거요-『오디세이아』 제24권 (191~194)

그는 배에서 쓰는 굵은 밧줄을 집어들더니 한쪽 끝을 주랑(柱廊) 현관의 기둥 꼭대기에 묶고 반대쪽 끝은 
둥근 정자 너머로 던져 여자들의 발이 땅에 닿지 못하도록 높이 비끄러맸다. 그리하여 덫에 걸린 개똥지빠귀나 비둘기처럼 그녀들은 저마다 목에 올가미를 단단히 휘감은 채 머리를 나란히 하고 한 줄로 매달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잠시 그들의 발이 움찔거렸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오디세이아』 제22권 (470~473) - P13

나는 교수형을 당한 열두 명의 시녀와 페넬로페에게
화자의 역할을 맡겼다. 시녀들은 합창단이 되어 주로 두가지 문제에 대하여 노래하거나 낭송한다. 그것은 오디세이아』를 정독하고 나면 자연히 떠오르는 의문들이다.
시녀들이 교살된 까닭은 무엇인가? 페넬로페의 진짜 속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오디세이아』에 실린 이야기는 물샐틈없이 논리정연하지 않다. - P17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물은 저항하지 않아. 물은 그냥 흐르지. 물 속에 손을담가도 그저 그 손을 쓰다듬으며 지나갈 뿐이야. 물은 딱딱한 벽이 아니라서 아무도 가로막지 못해. 그렇지만 물은 언제나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야 말지. 물을 끝까지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그리고 물은 참을성이 많아.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닳아없어지게 하지. 그걸 잊지 마라, 내 딸아, 너도 절반은 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라. 장애물을 뚫고 갈 수 없다면 에둘러가는 거야. 물이 그리하듯이." - P68

그렇다고 텔레마코스를 보살피는 일을 차마 그녀에게서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텔레마코스는 끝없는 기쁨의 샘이었다. 누가보면 친자식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오디세우스도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헬레네는 아직도 아들을 못 낳았는데 말이야."
내가 기뻐할 만한 소리였다. 물론 기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째서 아직도 어쩌면 한시도 잊지 못하고ㅡ헬레네를 생각할까? - P90

나의 목표는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불려 그가 돌아왔을 때는 떠날 때보다 더 큰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양도 더 많고, 소도 더 많고, 돼지도 더 많고, 밭도 더 많고, 노예도 더 많고.... 내 마음속에는 뚜렷하게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오디세우스가 돌아오고, 그동안내가 흔히들 남자의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을 얼마나 잘해냈는지를 그에게-여자답게 겸손한 태도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물론 그를 대신하여 한 일이라고, 오로지 그를 위해 일했다는 말도 잊지 말고 덧붙이는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기쁨에 겨워 얼마나 환하게 빛날 것인가! 나를 얼마나 흡족히 여길 것인가! ‘헬레네를 천명이나 준대도 당신과는 안 바꿀 거요. 그는 그렇게 말할것이다. 어찌 아니랴 ? 그러고는 나를 다정하게 안아줄것이다. - P116

그 수의도 곧바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이 좀처럼 끝나지 않는 일을 가리켜 ‘페넬로페의 거미줄‘ 이라고 부르곤 했다. 수의가 거미줄이라면 나는 거미인 셈이다. 그러나 내 목적은 남자들을 파리처럼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 자신이 얽혀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 P147

옳은 말이다. 나는 절대로 망각의 물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래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아니,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위험을 무릅쓰기가싫은 것이다. 내 지난 생애도 어려움이 꽤 많았지만 다음생애는 더욱더 고달플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에게는 지상세계를 엿볼 기회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그 세상이 내가 살던 시절에 못지않게 위험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수 있다. 아니, 오히려 불행과 고통의 규모가 훨씬 더 커졌을 뿐이다. 인간의 본성도 옛날과 다름없이 저속하기만하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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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2-23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마거릿 애트우드 책인데,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상품 소개란의 출간일자 보니까, 최근 책은 아니군요.
우리 나라에 시녀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이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넷플릭스로 영화화 되면서 조금더 많이 소개되는 것 같긴 합니다.
페넬로페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3-02-27 00:07   좋아요 0 | URL
2005년에 출간된 책인데 최근에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어요.
흡인력이 대단해서 주욱 읽게 되더라고요.
애트우드작가의 새로운 시도가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