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책
앤 후드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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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최고의 >

(원제: The Book that Matters Most)

후드 지음 | 권가비 옮김 | 책세상

 

 

 

     출근 이른 샤워를 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적이 있다.

소시민으로서 나의 인생을 언젠가 돌이켜볼 , 유산(legacy)라고 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유산은 어떠해야할까?’ 물론 여기서 내가 생각했던 유산은 단순한 재산의 개념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이 반영된 유무형의, 인생을 통해 형성된 무엇을 말한다. 후드의 < 인생 최고의 > 읽으면서 뜽금없이 이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소설에 나오는 북클럽에서 멤버들 각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권을 읽기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과연 내게 가장 중요한 책은 무엇이라고 말할 있을까.

 

 

     소설의 주인공인 에이바는 아들과 딸을 가진 중년 주부이다. 아들은 모범적으로 문제없이 지내지만, 딸은 마약과 섹스로 삶을 소진하는 중이다. 한편 에이바는 치매증상으로 요양원에서 나날이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두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시절 사랑하던 동생을 바로 앞에서 잃었던 기억을 평생의 아픔으로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아가 에이바는 외도를 남편으로부터 이혼통보를 받아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고통스럽지만 누구에게든 인생에서 언제든 일어날 있다. 삶의 여정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휘청거리는 에이바에게 가장 친한 친구 케이트는 북클럽에 들어올 있도록 문을 열어준다. 북클럽에 참여를 하고 멤버들의 면면을 보면 멤버들 역시 각자 나름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소설에 나오는 북클럽은 매달 번씩 도서관의 장소에서 10명의 멤머가 모인다. 각자가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선정한 권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임에서는 달에 해당하는 책에 대한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고, 각자가 책에대해 느낀 점들을 이야기하거나 특정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해나간다. 대화에 참여하는 멤버들이 책에서 느낀점들을 언급하는 부분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마다 매우 다양하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 문장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듯이, 멤머들 각자는 나름의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책을 통해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멤버들은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그리고 모임 시간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깨달음을 공유하게 된다. 아마도 책을 읽는 행위가 우리에게 어떤 치유의 힘을 전해준다면 바로 나만 불행한 것이 아님 깨닫는 일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한다. 북클럽에서는 다양한 연령, 다양한 직업의 멤버들이 소탈하게 모여 같은 책을 읽고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것과 견주어보기도 한다. 결과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해주고, 삶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해준다. 나아가 타인의 얼굴을 바라봐주고, 환대해주는 방법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북클럽 멤버들은 서로를 돌보고 위로하거나 격려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나가는 힘을 얻게된다. 북클럽을 둘러싼 이야기는 각자가 지나고 있는 여정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책은 인생의 고통과 상처로부터 회복되어가는 관한 이야기라고 수도 있겠다.

 

 

     때문에 제가 달라졌습니다.”(120)

북클럽의 멤버 루크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책으로 정하고 이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다.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혹은 어떤 책을 읽으며 독자가 크게 공명을 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 감히 말할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에 최고의 영미 소설 하나라는 <위대한 개츠비> 아직도 읽어보지 않았냐며 수업 학생들을 무시하던 영어 선생님의 말에 오기가 나서 읽어보았던 나는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했다. 사실 일말의 내용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라 검은글자들을 단순히 따라가며 스캔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소설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도 몰랐을 뿐더러 나의 인생은 모든 면에서 미숙하던 때였으므로, 나는 책과 공명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책일 있는데 반해, 다른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개개인의 인생에서 최고의 단순히 오랜 기간동안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고전이거나 베스트셀러 아니라 독자가 가장 크게 공명하고 반응한 책이라 있다. 내가 평생 권의 책이라도 내가 진정으로 공명하여 읽고 읽게되고, 힘들 나를 일으켜주며,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줄 책을 만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책을 덮으며]

     우리는 평생 타인과 관계를 맺고, 부대끼는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실수도 하고 서로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도 하고 서로 익숙해지는 습관의 시간을 살기도 한다. 배우자나 부모님, 자녀가 사망했거나 부재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과거 함께했던 순간을 함께했던 시간 속의 습관으로부터 소환해 내곤 한다. 북클럽은 단절된 인간관계, 가족해체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 하나의 가족'으로서 '동아리'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던져줄 있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각자 나름의 독서 경험과, 과거의 체험, 그리고 기억들을 통해 책과 반응하게 된다. 책에서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젊은이들의 소설이라는 말을 하지만,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인 홀든 콜필드가 맨하탄의 밤거리를 방황하던 모습이 내가 어려움을 겪을 인상에 남아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겪던 처지를 나만 겪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또한 격려를 받았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책을 인생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해 치유와 회복, 그리고 인연과 관계의 자각이라는, 책이 우리 인생에 주는 선물에 관한 이야기라 부르겠다.

 

 

 

 

 

 

(120)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위대한 개츠비> 소개하며 루크가 하는

때문에 제가 달라졌습니다.

 

(164)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문장 재인용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325) 존이 인용한 <브루클린엔 나무가 자란다> 구절

보든 마치 그걸 처음 보듯, 아니면 마지막으로 보듯 하렴. 그러면 이승의 삶이 찬란한 빛으로 가득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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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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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내가 부러워하는 이는 깊은 독서와 사유를 하고 언제나 걷는 자이다. 스스로를 고된 ‘문장노동자’로서 표현을 하는 장석주 시인이 바로 이 대상에 속한다. 언제나 읽기와 쓰기, 그리고 세상에 대한 명민한 관찰을 하며 걷는 시인이 보다 진지하게 시에 대해 논하는 글을 모았다. 이번에는 시의 ‘은유’에 대해서다. 시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답한다.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29면) 달리말하면 ‘은유’없는 시는 앙꼬없는 찐빵이란 뜻일테다. 그렇다면 ‘은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 바로 이 한 가지 물음을 붙들고 시의 은유에 대해 한 권의 책으로 생산해 내었다. 이 책은 바로 40년 간 시와 접하고, 시를 써온 시인이 생각하는 시의 은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만의 답일 것이다. 



     시인에게 ‘좋은’ 시는 보석과도 같은 은유들이 가득한 상자인 모양이다. 시인은 ‘은유란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31면)이며,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32면,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 재인용)이라고 말한다. ‘나’는 거울에 비친 상이 나인 줄 알지만, 이것이 ‘참-나’는 아닌줄도 안다. 결국 ‘내가 아닌 나’다. 이 모호함과 낭패감이 ‘은유’의 단면인 것이고, 또한 시를 더욱 매력있게 해주는 요소일 것이다. 시인의 설명은 알송달송하나 또한 그럴듯하게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시인의 문장은 그러한 모습에서 또한 ‘시의 은유화’된 양상을 닮은 것도 같다. 내가 학교를 오래 전에 졸업하고 참으로 오래간만에 ‘은유’와 ‘직유’에 대해 떠올려보게 된 시인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109-110면)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어떤 찰나, 저녁의 거무스름한 물, 생리하는 개들, 처제들의 상상임신같은 것, 이런 모호함들은 시의 자궁이다. 시를 쓸 때는 대상에서 가장 먼 이미지들을 데려와야 한다.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곧 시인이 시에서 사용하는 대상과 시인이 마음 속에 품은 이미지들에는 ‘은유’라는 코드로 맺어지게 되는데, 이 대상과 이미지들 사이에 ‘뻔한’ 관계, 진부한 상식이 깃들어서는 시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느 한 순간 ‘그럴수도 있군’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관계가 ‘은유’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지. 시에서 꽁꽁 얼어있는 우리의 무지와 사유의 나태함이라는 얼음을 깨부수는 도끼와도 같은 수단이 바로 ‘은유’라고 나에게 일러주는 듯하다. 쉽지는 않지만 다시 시인이 던져주는 실마리를 또 쫒아가보자.



(36면)

은유는 맥락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창조적 생산’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어쩌면 내가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시에서 은유는 어느 순간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나온 이미지일 것이다. 어떤 논리나 이성의 준거를 기반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달리말하면 나는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학창시절 참고서에 나온 해설서의 양식대로 ‘분석’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아닐까. “퇴색한 성교당의 언덕 위에선/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168면에서 재인용)라는 김광균 시인의 시 한구절에서 ‘청각의 이미지(시각)화’라는 단어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을 보면 내 문제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나태함’을 부수고, ‘관성적 익숙함의 전복’(190면)을 가져다줄 구원투수로서 ‘시 처방’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40여년 간의 오랜 독서의 경험과 사유가 녹아들어 직조된 시인의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집중된 시인의 의식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내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잘 따라가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는 않으나, 내가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시인 자신이 이렇게 오롯한 집중된 의식 속에서 글쓰기를 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인상은 시인의 글쓰기가 목에서 소리를 내는 발성이 아닌 배에서 소리를 내는 발성을 이야기하듯, 겉도는 이야기가 아닌 시인 내면의 사유에서 길러올린 글쓰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단, <은유의 힘>은 시와 친하지 않은 독자에겐 낯설다. 차라리 퉁명스러운 책이라 하겠다. 보다 진지하게 시에 대해 논하는 잡지에 써온 글들을 모은 책이기에 ‘시를 가까이하고 싶어 집어든’ 나같은 독자에게는 낭패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은유의 힘>은 ‘친절한 시인’의 책은 아니다. 독자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저자가 설명하는 시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폭넓은 독서가 없다면 저자의 진행과정과 맥락을 따라가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곧 이 책은 내가 보기에 다른 독서보다도 좀더 독자의 품이 더 필요한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시인은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빌어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166면)이라고 전한다. ‘욕망’은 ‘결핍’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166면)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핍의 힘으로 인하여 시인들은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에도 비로소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176면)라는 시인의 표현이 다소 막연하나마 마음에 들었다. ‘풀잎’이라는 작은 진실에 너무나도 충실한 나머지 세계를 발견해버린 월트 휘트먼의 이야기는 조그만 놀라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욕망’이라는 대상(시)을 만들어내는 ‘욕망하는 자’인 시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은유’라는 보석상자를 소유한 자들일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끊임없이 자기만의 보석상자를 틈틈이 열어보고 ‘은유’와 ‘꿈’이라는 보석이 있음에 안도하기도 하는 이들이 아닐까.   





(25면)
‘시는 은유들의 보석상자다.‘

(29면)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

(31면)
‘은유는 대상의 삼킴이다. 대상을 삼켜서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은유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이고, 신체의 현전이 아니라 언어의 현전이다.‘

(32면)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 그게 바로 은유화다.
-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에서 재인용

(36면)
‘은유는 맥락이 아니라 끊김이고, 그냥 끊김이 아니라 맥락의 찰나적 출현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창조적 생산"이다.‘
‘은유는 빛을 흩뿌리지만 윤리의 맥락에서 포획되지는 않는다. 포획되는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창조된 것"이다.‘

(109-110면)
‘시는 이런 자명함 속에서 배태되지 않는다. 시는 모호함 속에서 윤곽을 만들며 떠오른다. (...) 대상과 먼 이미지들 사이의 모호함을 타고 나가라는 뜻이다. 대상과 유사성으로 인접한 이미지들 사이에는 모호함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166면)
‘시인은 욕망하는 자고, 시는 욕망 그 자체다.‘ - 옥타비오 파스
‘시인은 세계의 가난을 산다. (...) 이들은 열등하고 패배하며 곤경에 빠진 자들을 대신하여 욕망하고, 그런 까닭에 존재의 한가운데는 항상 결핍으로 움푹 파여 있다.‘

(176면)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

(233면)
‘오늘날 가장 철학적인 시들은 오직 무지 속에서 무지를 견디며 피로 쓴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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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2017-08-22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다 보니 한번 읽어보고싶다~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중간에 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 이들에겐 친절한 책은 아니라고 하시니 좀 걱정스런 맘도 되네요~ ㅎㅎ

초란공 2017-08-22 07:21   좋아요 0 | URL
아 사실 부끄럽지만 ‘시 안읽던 공대생‘의 관점에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 인읽던 공대생과 40년 간 시를 쓴 시인과의 간극이 너무 커서일 수도 있겠고요. 아니면 시의 문제라기보다 시인이 말하는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에 익숙하지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구요. 제겐 사실 다 해당되는 얘기 같습니다. ㅜㅜ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전기, 혹은 그를 찾는 여행의 기록
프레데릭 파작 지음, 김병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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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프레데릭 파작 지음 | 김병욱 옮김 | 미래인

 

 

     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이번에 만나게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니체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에 그와 동시대인으로서 네덜란드, 프랑스와 벨기에 등을 떠돌았던 방랑자 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가련한 요절 화가의 삶을 따라가면서 떠올렸던 사람은 니체였다. 이들은 시대를 너무 앞섰다는 대가로 우울증과 간질, 발작을 자신의 앞에 지불했어야 했나하는 생각마져 들었다. 물론 역사 앞에 이런 가정과 의문은 억지스러운 나만의 상상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물들의 삶의 어느 부분을 들여다보면 유사해보이는 점들도 많이 발견된다. 목사 집안의 자녀로서 본인들도 자의로 혹은 타의로라도 목사가 되려는 과정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는 , 그리고 이들 모두 아버지와의 불화를 겪은 점도 그렇다. 가식없는 . 고흐와 니체 모두 자신의 또는 신념과 자신들의 작품들과 주인공들의 삶은 정확히 일치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언젠가 빈센트   고흐의 편지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의 귀를 자르고, 발작을 겪고, 알코올 중독 증상에 정신착란 증세 등으로 내가 고흐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던 기억이 있다. 고흐는 명민하고 매우 합리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음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양심적이었던 것인지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영혼과 육체로 감당하려다 괴로워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 고흐라는 제목의 영화에서는 빈센트의 자존심강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성마른 성격과 아버지와의 불화가 드러났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의 성격과 삶을 이루는데 영향을 주었을 법한 초기의 경험들에 대한 소개가 다소 부족했다는 것이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읽고 새롭게 느낀 점이다.

 

     고흐가 상대적으로 유복한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사회성이 부족하고 침울하게 광신적인그리고 성마른 성격의 방랑자가 되어버린 정황을 좀더 엿볼 있었다.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고흐가 11 되던 어느 가족은 빈센트를 어느 기숙학교로 보냈던 것이다. 책의 저자 프레데릭 파작이 지적하고 있듯이 기숙학교 이후의 삶은 빈센트에게 고독 의미했고, 스스로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 스스로를 바라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고흐를 소개하는 전기나 책자는 너무나 많지만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담담한 어조로 고흐가 마주대했을 법한 고뇌들의 모습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랑자로서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던 고흐의 침울하게 광신적인인물의 삶이 전보다도 , 그리고 고흐의 눈빛이 이해가 된다. 아들 빈센트에게 더러운 짐승이라고 말했던 아버지와의 불화는 고흐가 스스로 서서 고난과 절망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환대받지 못한 , 평생을 자신을 찾아 떠돌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저자인 파작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는 우울한 방랑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찾고 있다.”(89)

 

     너무나 알려져 있듯이 6 어린 남동생 테오와의 관계는 고흐의 삶에서 제외하고 생각할 없는 주제다. 고흐의 편지가 주로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가 많았던 만큼 형제의 관계와 이들이 어떤 생각을 했던가를 속속들이 아는 데는 이들이 교환했던 서신을 참고하면 것이다. 고흐는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던 테오의 지원을 받으면서 짧은 생애에 이루기 매우 힘든 업적을 남긴셈이다. 특히나 화상을 하던 테오로부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과 화가들을 만날 있었던 , 그리고 고흐의 화풍에 영향을 일본판화 작품들을 접하게 것들 모두 사실상 테오의 역할이라고 있다. 고흐도 그의 편지에서 인정하듯, ‘무조건적인 테오의 애정 대한 반대급부로서 고흐는 편으로 자신은 어쩔수 없는 실패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자괴감의 감정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고흐의 삶에서 되풀이되는 감정이 바로 자신은 실패했다는 절망, 열패감이었다. 바로 사회 속에 자리를 갖지 못한 , 앞으로도 영원히 갖지 못할자, 무능하기 짝이 없는 로서 말이다.

 

     환대받지 못하던 방랑자의 이미지를 다른 문학작품들에서 떠올려본다. 바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나오는 홀든 콜필드를 먼저 생각해낸다. 콜필드는 기숙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도 못한 , 뉴욕 맨하탄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자다. 한편 고흐는 콜필드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세속적 성공과 사회 전체를 경멸한다. 또다른 방랑자 이미지로서 고흐를 닮은 캐릭터도 있다. 바로 <좀머씨 이야기> 주인공 좀머씨이다. 물론 좀머씨는 성가신 미술 도구 대신 길다란 지팡이 하나에만 의지한 끊임없이 광야를 걸어가는 캐릭터이다.

입에 파이프를 물고, 모직 팬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성가신 미술 도구들과 보따리를 하나 짊어지고, 그는 호헤베인 역가지 걸어간다. 주민들의 욕설과 야유를 들으며, 작은 마을들을 가로지른다. 눈과 바람을 무릅쓰고, 절망으로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 쓸쓸한 광야를 시간 동안이나 걸어간다.”(116)

 

물론 콜필드든 좀머씨이든 허구의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인데 반하여, 고흐는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에 낯설어지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언급해보자면, 작가이자 화가인 저자의 그림들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들은 정방형 프레임을 갖는 중형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영화의 장면들처럼 보인다. 혹은 타인의 혹은 뒤에서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무관심해 보이는 풍경을 포착한 사진처럼 제시되고 있다. 흑백의 단색 판화같은 파작의 그림들을 책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본문의 텍스트와 매치가 되지는 않는 듯하다. 마치 영화에서 대사와 배우들의 입모양이 어긋나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모호하고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풍경의 배열은 마치 점점 환각과 정신착란을 겪게되는 고흐의 내면 풍경과 추억의 편린들을 보여주려는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프레데릭 파작의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절망과 방랑의 짧은 삶을 살다간 고흐의 삶을 치밀하게 재현해놓았다. 고흐의 슬픔과 우울은 자신이 세상을 구해야한다는 믿음 내지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이 그럴 존재가 도지 못한다는 자괴감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을 파멸시키게 원인이 것은 아닐까. 단순히 광인이라는 단어로 빈센트를 평가해버리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평생동안 가족, 특히 동생 테오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며 자신을 다그쳤을 고흐의 모습을 책을 읽어나가며 상상해볼 있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빈센트가 아버지를 죽였다 비방한 누나와 냉담하던 어머니를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이 빈센트를 좀더 환대해주고, 격려의 손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어떠면 빈센트가 술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귀를 자른 것도 환대 받지 못한 세상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행동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책은 작가이자 화가로서 프레데릭 파작이 빈센트의 그림과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고민한 흔적의 결과이다. 빈센트의 편지와 그림에 대한 수많은 해설서 등으로 다소 부족해보이는 보다 면밀한 화가에 대한 낯선 기록이기도 하다.

 

 

30년이나 떠돌아다녔기에, 내겐 갚아야 부채와 완수해야 과업이 있으며, 세상이 내게 관심을 갖는 오직 내가 감사의 표시로 추억거리를 하나 남기는 한에서인 것이다.”(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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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연대기 클래식 호러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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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연대기>

로버트 어빈 하워드 지음 | 정진영 엮고 번역 | 책세상

 

 

   <좀비 연대기> 기대이상으로 재미있다. 나는 공포소설, 스릴러 일종의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작품들은 무언가 작가의 작위적인 결과물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역자는 좀비가 대세라고 역자 후기에서 귀뜸해주지만, 그동안 나는 좀체로 좀비영화나 좀비가 나오는 소설, 심지어 오락마저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좀비 연대기> 읽어나가면서 좀비소설 역시 문장력과 이야기의 전개에 흡인력이 있다면 다른 장르 소설과 다를바가 없겠다는 점을 느꼈다. 다시말해서 소재보다 중요한 소설로서의 탄탄한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말이 .

 

   클래식호러라는 문구가 시사하듯, 책에는 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좀비를 소재로 하는 단편들이 실려있다. 사실 각각의 단편들은 나름의 개성이 있는 독특한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모두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 죽었으나 살아있는, 피와 살을 지닌 시체 좀비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SF소설 혹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환상소설과 같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도 좀비는 일차적으로 부두교와 관련이 있고 마술사를 통해 비밀스런 주술과 마법을 통해 되살아난 시체다. <좀비 연대기> 나온 소설들만을 통해 정리를 해보자면, 좀비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 열대에 준하는 지역적인 배경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흑인(크레올과 같은 혼혈인들을 포함하여) 또는 흑인노예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탄생한 개념이라고 있다. 좀비문학 속에서 좀비와 관련된 특징을 떠올리자면 항상 부두교의 마법사가 어떤 의식을 통해 죽은 자들을 되살아나게만든다는 점이다. 마법과 주술을 통해 되살아난 좀비들은 이따금 중얼거리긴 하지만 대개는 말없이, 아무런 자유 의지나 판단능력 없이 마법사의 지시를 따르는 자동인형 또는 마리오네트 인형과 같은 존재들이 된다. 따라서 여러 작품들에서 보이듯 좀비는 농장에서 월급도 받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좀비가 흑인노예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고려해볼 있다(《노예에게 소금은 금물》,《화나트에서의 마법》,《화이트 좀비》). 여러 소설에서 이러한 구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좀비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흔히 활용하던 좀비 사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드라큘라를 언급할 , 이들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 십자가, 마늘과 같은 대상이 떠오른 반면, 좀비에게 이런 대상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하다. 좀비는 마법사의 주술의 힘으로 낮에도 다니는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좀비들에게 치명적인 대상은 바로 소금으로 보인다. 이는 여러 작품을 통해 활용되고 있는데, 좀비가 소금을 먹게되면 정말로 죽는다. 소금이 생명을 가진 유기체에 매우 중요하고 귀한 물질이면서도 죽은 유기체의 부패방지에 활용된다는 양면적인 특징을 떠올려보면, 좀비 문학에서 좀비들이 소금을 먹으면 영원히죽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또한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좀비가 결국 되살아난 시체라는 이율배반적인 초자연적 존재이기에 소금이 이들을 죽인다는 발상도 아이러니하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좀비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앞쪽만 응시하기 때문이다. (…)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좀비에게는 소금 맛을 보고 나면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고 무덤이 어디에 있든 기필코 자신이 묻힌 곳을 찾아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없다!

(220) 이네즈 월리스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중에서

 

실제로 피와 살을 지닌 시체이기에 좀비들은 특이하게도 총을 맞거나 칼을 맞으면 역시나 피를 흘리는 모습도 공통적이다. 이런 점들은 좀비문학의 클래식 작품들을 수록한 책을 통해 새롭게 살펴본 좀비의 특징들이라고 있다.     

 

 

   좀비문학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준 것은 무엇보다도 책의 소설인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작품들이었다.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문장은 긴장감과 속도감을 주기에 독자로 하여금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어주었다. 1845 흑인 노예들의 폭동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검은 카난》에서 주인공 백인(커크 버크너) 사악한흑인 좀비들을 죽이는 구도는 다소 거슬리는 데가 있다. 한편 전지적 작가 시점에 준하는 1인칭 시점의 친절한 설명과 진행은 다소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커크 버크너가 어떤 주술적인 힘에 의해 카난이라는 삼각주 지역으로 끌려가는장면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나는 최면에 빠진 사람과는 달랐다. 완전히 깨어 있었고, 정신도 말짱했다. 노호하는 검은 강물이 쇄도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멍한 상태에서도 정신은 말짱했고 생각은 명료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지옥이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분명하게, 통렬하게 깨닫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무력감. 내가 고문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가고 있었다. 이성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릴 것만 같은 주술을 깨려고 기를 쓰면서도 계속 가고 있었다. 충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97)

 

   부분은 마치 과거 꿈의 일부를 써놓은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어떤 거대한 물줄기 속에 몸을 맡긴 어딘가로 가는 . 나는 너무나 자주 꾸던 유형의 꿈이었다. 분명 어딘가의 종착지는 죽음 관계할지도 모른다. 다르게 보면 이러한 무기력한 나의 꿈과 주인공 커크 버크너가 경험하는 충동의 모습은 어쩌면 비판적인 사유없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 무기력한 존재로서 따라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병치되어 다가온다. 나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나의 통제력을 능가하는 어떤 힘이 나를 고션으로, 너머로 이끌고 있었다.”(97)

 

 

 

 

 

   책에 수록된 작품들 여타 작품들과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은 단연 런던의 《천 번의 죽음》이라고 있다. 작품은 부두교나 흑인과 관련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좀비 소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SF소설에 더욱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죽은 유기체의 소생방법을 찾아내는 인물 등장하는 것으로보면 마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도 닮아있다. 마찬가지로  《천 번의 죽음》에서도 생명을 주는 아버지와 실험대상이 되는 아들과의 대립구도가 보인다. 아버지는 실험대상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것을 가져갈 권리 또한 나한테 있지 않겠냐?”(127)  이어서 아버지는 수없이 죽을 운명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물론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지만,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이란 원래 위험으로 가득 있으니까.”(127)  아버지의 말은 살아있는 존재 말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인생 끌어오는 것은 작가인 런던이 설정해둔 신랄한 유머가 아닐까. 어찌되었든 작품에서 아버지는 창조자인 신의 위치에 놓여있다. 아들을 죽이고는 다시 다양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생물학, 의학의 발달과 함께 생물체를 복제하거나 이들을 변형하는 것에 대한 원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영생이나 인간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라는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떠올리면 것이다.

 

     한편《천 번의 죽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 구도에서 흔히 빠지지 않는 친부살해 모티브가 나온다. 우리가 흔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개념은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나트에서의 마법》에서 나트섬의 마법사 바카른과 아들 보칼 울돌라와의 대립구도에서도 중심 사건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역시나 생명을 주는 존재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의 구도는 또다시 <프랑켄슈타인> 떠올리게 해준다. 아버지는 아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존재인데, 특히나 갈등을 유발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사회적 역할에 제약을 가하거나 구속하는 측면이 있다. 나아가 (생명을 주는)아버지와 대립하는 아들의 갈등 구도를 보다 폭넓게 해석해보면 농장주와 여기에서 착취당하는 노예 또는 좀비와의 갈등구도에 적용해볼 있을 것이다. 가넷 웨스턴 허터의 작품《노예에게 소금은 금물》에서 150살로 추정되는 크레올 노파가 이야기해주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본다. 농장의 노예들은 농장주가 없는 동안 농장주의 명령을 거스르며 주인의 샴페인과 소금을 약탈하고 건물을 파괴한다. 이러한 행위는 바로 친부살해모티브의 확장이라고 있을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책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을 통해 깨닫게 것은 분명 좀비라는 대상은 (흑인 혼혈인들을 포함하여)흑인 노예제도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등장했다고 있다는 점이다. 좀비 문학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프리카-아이티-미국남부라는 지리적 특징은 모두 흑인 노예들이 이동했던 지리와 일치한다.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에서 있는 좀비의 이미지와 다르게 좀비 문화는 사실 흑인노예제도라는 극도로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흑인들의 어두운 원체험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폐쇄적이고 미신적인 이들 집단 내에서 주술을 통해 자신들이 간직한 원한이나 저주를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공간을 부두교라는 미신적 행위가 제공하고 있다. 자연현상과 유사하게 사회적 스트레스 억압 속에서 쌓이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어디에서든 터져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비를 단순히 인간이 지닌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인 맥락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억압받아온 흑인들의 인간적 욕망이 어두운 컬트 문화로 표출된 존재 바로 좀비라고 보아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 호러 작품을 수록한 <좀비 연대기> 나의 편견을 보기좋게 깨도록 해준 흥미로운 시도였다.    

 

 

 

 

인상적인 문장

어디서나 밤은 상상을 공포로 물들이는 모호함과 환영을 가져온다. 그러나 열대 지방에서는 밤이 유난히 강력하고 불길한 효과를 만들어낸다.”(161)

라프카디오 헌의 《귀환자들의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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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독서 - 마음이 바닥에 떨어질 때, 곁에 다가온 문장들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절망독서>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

 

   대학재학 난치병으로 13 투병생활.

   이 문구의 기록만으로도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가 겪었을 법한 절망의 깊이를 어느정도 가늠해볼 있다. 짐작컨대 저자의 20 전체를  난치병과 함께 싸우고, 어르고 달래며 보냈을 것이다. 군복무와 같이 스케줄이 정해져있는 일들과는 달리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을 같다.  

 

   <절망독서> 절망의 전문가 우리에게 귀뜸해주는 절망의 시간을 보낸 경험을 솔직하게 소개하고 절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1부에서는 절망의 시기에는 우리에게 이야기 필요함을 말한다. 그리고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가 중요함을 전하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2부에서는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독자에게 권할 있는 , 영화, 드라마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을 덮은 잠시 인상을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저자는 자신의 절망을 피하지 않고 마주대하고 있음을 있다. 피하고 싶지만 그럴 없는 대상, 자신만이 겪어야하는 절망과 정면승부하기로 결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사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이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는다는 아이디어는 합리적이다. 당연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 합리적인 아이디어가 그럴듯해보이지 않는다 문제가 있다. 당사자에게 공감과 수용이 안될 있다는 점이다. 끝을 모르는 절망을 느껴본 사람이 깨달은 인생의 교훈 하나를 저자는 전해준다. 바로 자신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는 조급하게 절망을 극복하려고 하지말 것을 주문한다.  자신의 절망을 들여다보고, 배우고, 이를 자신의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의미로 나는 이해한다.

 

   저자는 내가 공감하는 도피성 긍정적 사고 언급한다. 우리는 보통 긍정적인 사고를 장려하지만, ‘부정적 (거의 모든) 것을 피하려한다.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현대사회를 긍정성이 제거된사회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부정성의 제거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매우 최근의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병철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에게 거슬리는 어떤 (부정성) 없애고 매끄럽게 만들기 위한 강박의 징후가 보인다고 느낄 때가 있다. <절망독서> 읽으며 가지 확신을 갖게 것은 부정성 긍정성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둘은 하나의 전체 속에서 공존해야 온전하다는 .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긍정적 것을 우리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에서 요구받는다. 하지만 부정적 태도가 일방적으로 배척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다.

 

   여기에서 나는 부정적태도와 비관적태도를 분명히 구분해야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나는 어떤 일을 해봐야 소용없다 태도는 비관적이다. 반면 이런 방식은 일을 이러한 문제가 나타날 있다. 따라서 다르게 시도해볼 있다.’라는 태도는 분명 부정성 속하는 것이지만 비관적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스맨이라고 우스개소리로 표현하는 이런 태도는 부정성이 결여된무한 긍정으로 자기를 혹사시키고 소진하는 사람이라고 봐야한다. 중요한 것은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가 <절망독서>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부정성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하는 점이다.

 

저자는 TV드라마 작가 야마다 다이치가 어느 인터뷰를 인용한다.

(214)

"지금 사회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양쪽 면으로 성립됩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도 성장한다는 사실을 다들 깨달으면 살기 편해질 겁니다."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재빨리 잊거나 극복하는 데에만 너무 열중하는 같습니다. 어두운 면을 마주보지도 않고 적당히 자신을 속인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하는 부정성 우리의 절망을 마주대하게하고, 우리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절망 또는 어떤 문제를 회피하기만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것은 단순히 기적을 바라는 일일 뿐이다. 내가 겪고 있는 절망을 제대로 바라보고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절망의 시기를 보내는 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천년 갖고 있던 삶의 기술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부정성을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씀으로써 우리의 절망을 성숙의 기회가 아닌 자기 파괴의 거대한 흐름에 우리를 내몰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진실로 절망의 바다라는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가 바닥을 쳐본저자와 같은 사람만이 이러한 깨달음을 이야기해줄 있을 것이다.

 

   <절망독서>에서는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문학 범주를 이야기할 모든 예술 장르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듯이, 저자는 절망의 시기를 보내는 방편으로 만을 권하지 않는다. 저자는 보다 넓게 우리가 우리의 절망을 마주할 공감하고 따라갈 있는 이야기구조를 갖는 모든 대상을 포함한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는 일본의 작가들을 위주로 언급하고 있기에 다자이 오사무 같은 국내에 비교적 알려진 작가들 외에는 개인적으로 생소한 동시대 작가들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적 소양의 폭이 좁은 나로서는 아무래도 이름을 들어본 세계문학의 무대 속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카프카나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나는 보다 친근함을 갖게 되었다. 중에서도 카프카를 소개하는 부분은 내가 막연히 갖고 있던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게 계기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군복무 시절 훈련소에서 처음 읽었던 책이 바로 진중문고판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훈련소가 절망의 시간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부와 차단되어 있던 나의 존재를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주인공의 모습과 견주어봤을 뿐이었다. 문학적인 어떤 메시지를 이해할 정도의 경황이나 이해도는 없었다. 당시는 그냥 기묘하고 기괴한 이야기다라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던 소설이었을 것이다. 내가 카프카의 삶에 대해 좀더 이해를 하고 삶의 보편성을 좀더 이해하고 있었다면, 다르게 공감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카프카의 소설이 주는 매력은 이야기의 모호한 진실 속에 무수히 많은 또는 삶의 진실을 읽어낼 있는 가능성 있지 않을까. 카프카의 소설은 우리가 국어시간에 객관식 문제의 해답을 찾듯이 하나의 해답을 전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카프카에 관해 저자가 이야기할 나의 눈이 한동안 머무는 문장이 있었다. 바로 저자 자신의 <절망은 나의 > 인용해둔 카프카의 말을 재인용한 부분이다.

(98)

이를테면 프란츠 카프카.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는 미래를 향해 걷는 것은 못합니다. 미래를 향해 좌절하는 , 그것은 있습니다. 가장 잘할 있는 쓰러진 채로 있는 것입니다."

 

    가장 잘할 있는 쓰러진 채로 있는 이라니.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마주하는 절망을 제거하기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좌절한 자신의 절망을 인정하고 응시하는 . 이것은 오히려 자신과의 거리두기 의미할 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통렬한 절망의 시기에 그밖에 무엇을 우리가 할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용된 문장으로 인해 나의 잃어버린 절망의 시기 되돌아 있었다. 나의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없었다. 카프카의 말처럼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나의 절망을 마주하고나서야 나는  절망의 시기를 보낼 있는 기력을 회복했다고 해야겠다.

 

    절망의 강도를 비교할 수는 없으나 나의 경우는 저자 가시라기 히로키의 경우처럼 육체적인 고난이 가져다 절망의 시기는 아니었다. 나는 정신적인, 나의 영혼의 고난 속에서 20 동안 허우적 대었다. 절망의 시기를 함께 보내는 대상으로 저자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이야기하는데, 나의 경우 모든 것을 포함하여 사진 있었다. 책을 비롯하여 사진이란 매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 되어준 동시에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저자도 , 영화, 드라마만을 제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육체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자신의 절망을 마주하는 활용할 있는 대상을 이것만 제시했을 , 사진을 비롯한 다른 활동 모두 포함할 있다고 본다.

 

책을 덮으며

   20 전체를 난치병과 싸우며 길어올린 저자의 깨달음을 <절망독서> 조심스럽게 전달해준다. 우리의 삶은 세대를 거듭하여 반복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저자가 언급했듯이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절망도 마찬가지다. <안나 카레니나> 문장이 일깨워주듯 우리의 절망, 우리의 불행은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나의 절망의 시기에 머리를 깨주던 도끼와도 같은 한마디는 빅토르 프랑클 박사의 마디이기도 했다. ‘내가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기만 것이 아니라 삶이 나로부터 기대하는지 들여다보라 한마디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절망의 시기를 보내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해주는 한마디, 구절은 모든 이에게 다를 수밖에 없다. 절망이라는 피할 없고 보편적인 현상을 마주대하고 이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경험을 통해 절망 이라고 선언하게 해주는 계기는 우리가 각자 찾아야할 것이다. <절망독서> 자신의 방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보내고 자신을 추스릴 있는 계기를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실마리를 던져준다. 책은 절망의 기간을 어떻게하면 잘보낼 있을까에 대한 조언이며 제안이다. 결국 쓰러진 다음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에. 우리는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고 가면 되는 것이다.

       

 

"고뇌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경험해야만 치유된다."

                                                            – 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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