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의 증언 - 간토대지진, 혐오와 국가폭력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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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101년 째 애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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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간토대학살이 일어난 지 101년이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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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년전 오늘 오전 11시58분... 간토(관동) 대지진이 발생했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았으나 더 큰 재앙은 곧 이어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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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일본 군부의 의도적인 도발에 일본 우익 세력이 가세했다. 이 일본인들은 군부의 묵인 하에 조선인을 색출하여 살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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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6600여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살해당해야 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었던 기준은, 단지 ‘15엔 50전’이라는 일본어 발음을 잘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외국인들, 특히 조선인들이 일본의 우익 세력과 이에 동조하는 일본인들에게 죽창과 칼에 찔려 죽어야만 했던 이유로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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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그러니까 지난 101년간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점은, 역대 어느 대한민국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일본에 공식적인 조사와 해명 및 사과를 요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느 대한민국 정부도 말이다. 이점이 가장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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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진 직후 살해당한 사람들 중에는 일본의 타지역 출신 일본인도 있었다. 그러니까 ‘15엔 50전’이라는 발음을 관동지방 사람들의 발음으로 읽지 못해 살해당해야했던 오사카 출신의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 <백년 동안의 증언>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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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일본 영화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이야기도 기억난다. 간토대지진 당시 10대 였던 구로자와 아키라는 이웃 어른들이 어린 자신에게 죽창을 쥐어주며 ‘조선인놈들을 죽이라’고 했던 상황에 충격을 받은 순간을 기록한 대목이 있다. 그가 지성인의 자질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지점은 그의 손에 들린 죽창을 보며 ‘이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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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교 교수의 <백년 동안의 증언>을 통해 간토대지진에 대해 비로소 입문할 수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내용은 무겁지만) 작고 가벼운 이 책을 입문서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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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일제 부역자들이 자신들의 매국행위나 변절한 이유를 들어보면 상당 부분은 “조선이 해방될 줄 몰랐다.”였다. 이들은 대개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일제의 영원한 통치를 굳게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결정적으로 한 가지가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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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의 결핍요소를 ‘인간애’라고 생각한다. 깉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라는 마음의 불씨가 이들에게는 꺼져 잇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애라는 마음의 불씨가 꺼진 자리에는 패배주의와 열패감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이 지킬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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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이 일어난 지 101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은 101년째 애도중이다. 홍범도가 사라지니, 지하철 안국역과 잠실역에선 독도가 사라졌다. 아마 교과서에서 이들이, 독도가 사라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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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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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계를 부단히 넓히고자 했던 삶의 여행자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민음사] (2004)

 




출근하면서 슬쩍 읽은 구절.


 

자신의 몸 주변을 바다로 둘러 싸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세계라는 개념도, 세계와 자신의 관계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위대하고도 단순한 선(, line)은 풍경 화가로서의 나에게 전혀 새로운 사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문인이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리고 필연적으로 면밀한 관찰자였던 괴테는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자들 역시 자신의 개성/고유성/취향을 발견하고 이를 고양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지 않나. 그렇다면 이런 비판자들도 괴테의 방황부단한 노력에서 배울만한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괴테를 연구하거나 특별히 좋아한다고 말하는 독자들 외에 인간으로서 괴테를 이야기하는 이는 많이 보질 못했다. 한 인간은 출신성분으로만 요약되기에는 너무나 복잡다단한 존재다. 만일 괴테가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토록 성공했다면 우리나라의 정서상 더 많은 영감을 주었을까도 싶지만, 그럼에도 이 때문에 인간 괴테로서 많이 간과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앞서 인용한 이 구절은 나폴리에 머물던 괴테가 시칠리아로 가는 길에 쓴 여행 기록의 한 구절이다. 일기를 보면 괴테가 시칠리아로 가게 된 것도 미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칠리아에서 배가 도착하는 시일 직전까지 로마로 돌아갈지, 아니면 시칠리아로 떠날지를 미처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신이 마련해놓은 섭리 속에서 신이 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합리적 이성이 자신을 길을 찾느라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폴리를 떠나기 전까지 갈까-말까를 망설이던 젊은 시절의 괴테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오래전에 쓴 <이피게니에><타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고쳐 쓰는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다. 독일의 대문호라는 이름의 (일회적) ‘아우라와 달리, 그는 평생 자신의 글이든 그림이든, 어떤 목표(destination)라는 지향점을 향해 부단히 다가가고자 노력했던 인간의 모습을 후세에게 남겨놓았다.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의 말에 따르면, <파우스트>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구절은 지향이 있는 한, 인간은 방황한다.”라는 문장이다.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가 사망하기 두 달 전까지이던가... 이 작품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낫게 다듬어 나갈 수 있을지 숙고했던 인물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대문호가 발견한 중요한 인생의 진실 하나가 이 문장이라면, 어쩐지 김이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한 문장에서 발견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가여운 인간의 모습으로 읽혔다. 그렇다. 자연의 최상위 층에 자리를 잡고, 놀라운 이성의 디딤돌 위에서 자연 세계를 군림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이 귀족 출신의 대문호는 거대한 아코디언처럼 주름잡힌 <파우스트> 속에 감추어두었던 셈이다. 이 책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회의와 삶의 덧없음,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오늘 출근하며 읽은 여행기의 한 구절에서도 세계를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시선, 움벨트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 움벨트(umwelt)는 독일어로 환경, 주변 세계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개인에게 보여 지고 지각되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결국 그의 <이탈리아 여행기>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움벨트를 확장해나간 한 인간의 발자취다. 때로는 머뭇거리기도하고, 망설이기도 하지만, 결국 어느 쪽으로든 발길을 내딛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주어진 특별한 삶의 조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조건들이 나의 조건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한 인간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폄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는 움벨트라는,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선이자 제약 조건이기도 한 이 경계를 평생 부단히 넓히고자 노력했던 여행자 괴테를 만났다.

 





 

 




































#괴테의이탈리아여행#움벨트 #세계의경계 #출근하며읽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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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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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의 사망 100주기에 새로 번역된 작품이기도하고 꼭 읽어봐야지 하고 한동안 생각만 하다가 만났습니다.
앙드레 지드의 <아프리카 콩고 여행>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듯합니다. 식민주의 시대의 기득권 속 ‘아웃사이더’(?)의 시선이 인상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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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펙트 데이스’, 의례로 충만한 하루하루 만들기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 

주연: 야쿠쇼 코지 (국내개봉 2024)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스>를 통해 이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 그의 이름은 익숙했는데, 나는 그의 사진집 <한번은, (Once)>를 통해 알게 되었던 까닭이다. 영화를 보면서 장면마다 딱 ‘그의 시선’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멀리서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그의 사진처럼 풍경을 바라볼 때 마치 그 풍경을 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혹은 감상자가 바로 풍경에 몰입되어 스며드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시선은 대상을 멀리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한 인간을 바라볼 때 화면 가득히 담기는 사람의 얼굴은, 한 단독자의 존재를 온전히 마주하고 대화하는 느낌을 주지 않은가. 이러한 시선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나오지 못할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사진집을 보고 느꼈던 감정들과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일본의 대배우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히라야마는 도쿄시에 소속된 공공화장실 청소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의 삶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서도 지루해보일 정도로 반복되는 루틴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이불을 개고, 화분을 모아둔 작은 방에 분무기로 물을 준다.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으면 출근 준비가 얼추 끝난다. 현관 옆에 놓아둔 지갑과 공공화장실의 열쇠꾸러미를 챙기고 작은 접시에 놓아둔 동전들을 챙기면 현관을 나선다. 현관을 나서면 항상 하는 작은 의식이 이어진다. 문을 열면 보이는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고 눈으로 인사를 나누는 듯하다. 그러고나면 주차장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차에서 한 모금 마시면 출근 준비가 끝나는 것. 



공공화장실에서 누가 보지 않아도 꼼꼼하게 구석구석 청소하는 모습은 인상깊다. 매일의 지루한 업무를 이토록 진지하게 반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영화의 맥락상 히라야마는 좋은 집안의 ‘도련님’으로 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마도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일찍 독립한 인물로 설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누가 봐도 인정받지 못하는 화장실 청소부라는 설정이 반복되는 일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어준다. 그럼에도 매일 같은 점심 시간에 같은 샌드위치로, 같은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면서 그가 꺼내드는 자동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매일 바라보는 대상과 마주하며 자세히 바라보고 ‘사진’으로 남기는 그만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을 따라가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다시 주인공의 삶을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하루하루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일상은 삶이 끝날 때까지 지루하게 반복될 것만 같지만 말이다. 삶의 리듬(반복)이 지속되는 가운데 여기에 미묘한 차이들이 발생하고, 삶에 침투하는 것이다. 매일 같아보이는 일상 속에 작지만 변화무쌍한 변화가 일상에 침입하고 끊임없이 교란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물론 불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를 감수하고 포용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지켜나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가 점심시간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바라보며 찍는 나무의 모습, 특히 뷰파인더를 보지 않고 찍는 모습에서 그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우연성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같아 보였다. 이런 장면은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빔 벤더스 감독이 아니면 보기 힘든 장면일 것 같다.



 똑같아 보이는 숲속의 나무를 바라보고 매일 사진을 찍는 주인공의 모습,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다양한 사건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양아치 같아 보이는 이 젊은 동료는 우리 사회의 경우로 보면 갓생을 사는 N포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으니 ‘돈이 없어서 데이트도 못한다’는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닌다. 주인공은 꿋꿋하게 자신의 일상을 반복하고 유지하고자 하지만,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이런 동료와의 헤프닝으로 일상은 언제고 궤도를 벗어나기 마련이다. 이는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는 주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이 ‘얽힘’을 환기하는 장치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안정적으로 반복하기에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과 얽혀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주인공이 양아치 같이만 보이던 젋은 동료의 선한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이 좋았다. 이 젊은 동료는 어느 정신지체 청소년이 자신의 귀를 만지는 것을 좋아한다고 활짝 웃으며, 이 청소년에게 자신의 귀를 내어주는 모습말이다. 물론 빔 벤더스의 시선과 의도일테다. 모든 사람에겐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모순적이고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의 사람이라도 그에게는 또 우리가 모르는 그만의 사정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도 여러 공간이 존재하고, 이 여러 면들이 등을 맞대고 유동하는 복잡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이런 모습들을 확인하면서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이러한 시선이 좋았다. 



주인공은 매일의 루틴이 있지만, 조금 더 긴 터울의 루틴도 있다. 일을 쉬는 주말에는 빨래방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단골 이자까야 집에 가서 익숙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익숙한 음식을 맛본다. 중고서점에 가서 신중하게 한 권을 골라온다. 한 주 동안 찍은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사진을 찾아와 이를 분류하고 골라 자신만의 상자에 모아두는 일 등이 그런 활동이다. 



이렇듯 이 영화에는 주인공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며 만날 수 있는 한 인간의 의식으로 가득차있다. AI가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의 하루 속에서도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기도 한다. 문득 슬픔을 느끼다가도 화장실의 작은 메모지를 통해 누군가와의 비밀스러운 순간을 공유하는 것처럼 기쁨과 기대감이 중첩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제2의 자연이 되어버린 도시에서 지루해보이는 일상을 사는 현대인이 일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의례/의식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영화에서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의 일상은 단 하루도 같지 않다. 하지만 이를 지루하게 보느냐 아니면 매일매일이 새로워질 수 있느냐는 자신의 일상적 의식 속에 이 미묘함을 알아차리는 시선에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의식은 삶을 지탱하는 뼈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계 인류학 및 심리학 연구자 디미트리스 지칼라타스의 책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김미선 옮김, 민음사)에서 바로 이러한 의식/의례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과학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습관’과 ‘의례’를 구분한다. 습관은 이 행위의 목적이 분명하고 즉각적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이가 그 목적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각적이라는 의미는 여기에 궤도를 이탈하거나 고민의 여지가 없다는 의미다. 반면 ‘의례’는 보편적이지 않다. 합리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행위의 목적이 뚜렷하게 곧바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특별한 주의와 집중을 요구하며 특정한 절차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히라야마가 매일 정성들여, 일정한 절차에 따라 변기를 꼼꼼하고 깨끗하게 닦는 행위는, 젊은 동료가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 대충 청소해도 검사를 통과할 수 있을 텐데말이다. 그럼에도 히라야마는 자신이 정한 규칙과 절차를 미련해보일 정도로 준수한다. 책의 저자 지칼라타스는 이런 상황을 ‘인과적으로 불투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인간 공동체의 의례 행위에 보다 주목하고 있기에,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해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의례’라는 행위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공통적으로 절차와 반복, 루틴을 함께 생각해볼만하다. 



나는 이 루틴의 힘이야말로 우연과 예기치 못한 일탈의 요소를 품고 있는 우리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성과 합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보다 심리적인 기능, 그리고 삶의 스트레스를 완충해줄 수 있는 존재론적인 도구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어쩌면 다른 동물들도) 반복에 집착하고 의례에 의지 혹은 집착하는 이유는 “삶의 스트레스와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89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흔이 이야기하는 ‘편집증’은 삶의 불확실성을 단단히 붙들고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증상은 아닐까.


 

영화 속의 인물 히라야마에게도 불안정한 삶의 조건과 가족과의 갈등이 있었다. 타인들과의 얽힘 속에서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여동생과의 서먹서먹한 관계가 한 가지 단서다. 나는 최근 “이 세상에 노예 아닌자가 누가 있는가?”라는 세네카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가 말한 이 ‘노예’의 조건에는 단순히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경우를 우선 떠올릴 수 있지만, 나아가 인간이라면 불가피한 관계, 이 ‘얽힘’이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 모든 상처와 교란의 요소들 속에서 자신의 하루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영화 속 주인공이 보여주었던 일상의 의식들이 아닐까. 개인적인 의례로서의 작은 의식은 마치 하루를 영원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안정감을 주니 말이다. 삶은 반복적인 리듬이 지속되면서도 끊임없이 미묘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존재의 장(場)이다. 이 의식/의례는 오늘 나의 하루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토대가 된다. 자신만의 작은 의식들과 더불어 그 속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눈,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버무려져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즈 싱어 니나 시몬이 부른 ‘Feeling Good’이 흐른다. 동쪽에서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하루다. 중인공 히라야마는 운전하며 미소를 짓지만, 이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우리의 삶은 단 하루도 같지 않다. 하루에도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오랜 기억이 소환되어 상처를 확인하기도 하고, 젊은 동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미소짓기도 하고, 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누구에게든 그런 모습을 보이며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타인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나뿐일까싶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이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변화의 미묘함과 존재에 대한 자각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영화 <퍼펙트 데이스>는 한 인간이라는 소우주 속의 반복되는 일상을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의례/의식으로 가득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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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8-1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퍼펙트 데이즈‘
정말 좋더라고요^^
빔 벤더스 감독의 인터뷰에
히라야마의 과거가 약간 언급되어 있어요.
결국 루틴이란 것도 많은 경험과 각성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 영화로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초란공 2024-08-15 13:46   좋아요 1 | URL
정말 좋죠~!! 빔 벤더스 감독 인터뷰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문명 - 예술 과학 철학, 그리고 인간
케네스 클라크 지음, 이연식 옮김 / 소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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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정체성 탐구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는 과정

- 문명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지음 

이연식 옮김 [소요서가] | (2024)

 




누드의 미술사,그림을 본다는 것의 저자이자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가 서구 문명을 조망하듯 정리한 문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로써 케네스 클라크의 서양 미술사 3부작이 완성된 듯하다. 특히 이 책 문명의 특징은 TV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유명한 영국의 BBC와 협력하며 직접 대본을 쓰고 엮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저자가 직접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하듯 서양의 미술작품과 역사를 함께 설명해주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원전 300여년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방대한 시기에 걸쳐 있는 서양의 회화/건축/조각 작품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저자(출판사)는 이 책의 원제목을 문명 Civilization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고려하는 문명의 범주는 매우 제한적이다. 서유럽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유럽 중에서도 문명의 정신을 대변하는 대상으로 프랑스 문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책의 시작(아마도 첫 방송분)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파리의 퐁 데 자르라는 점이 상징적이다. 이 지역은 프랑스 지성의 산실인 프랑스학술원과 문화의 산실이자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루브르 궁, 그리고 종교의 산실을 상징하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양 문화의 토대라고 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정수를 한 장소에서 잘 보여준다. 다만 50여 년 전에 제작된 방송치고는 그의 입장을 표명하는 행보는 상당히 대담하다. ‘편견어린 견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는 행보를 (아마도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관점을 선명하고도 당당하게 표명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 이 점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자신의 견해와 지식, 이해정도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옮긴 역자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저자는 문화 예술의 중심을 서유럽(그 중에서도 프랑스)이라 보고 있다고 말이다. 이 점은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새롭게 드러나게 된 주변국과 문화의 강력한 비판을 일으킬 소지가 충분하다. 새롭게 알게 된 점은, 이 책(혹은 다큐멘터리 방송)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저술이 바로 미술 비평가이자 작가인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1972)라는 것이다. 대강 이 정도의 구도만 보아도 이 책이 자리 잡고 있는 한 자리와 서술 방향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줄곧 붙들고 확인한다. 그가 생각하는 문명이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곧바로 책의 핵심을 묻는 질문일 것이다. 다만 이 질문은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정의내리기 어렵다. 책 전반에 흩어져 있는 문명의 속성을 언급하는 개념들을 모아 파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직접적으로 얻기 전에, 저자는 문명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를 밝히며 시작한다.


 

문명의 적은 무엇일까요? 그건 무엇보다 공포입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 침략에 대한 공포, 역병과 기근에 대한 공포.”(25)


TV다큐멘터리 대본으로 마련된 이 글은 1969년에 작성되었다. 저자가 연설하듯 이 말을 방송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며 말한 이 시기에 인류는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원자폭탄에 수소폭탄의 위력을 더한 위기의식을 체감했던 것이다. 특히 1962년 미국 본토의 앞바다에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두고 일어났던 쿠바 미사일 위기, 암울한 전망밖에 남지 않았던 당시의 정국을 보여준다. ·소 양국은 수소폭탄을 쌓아 놓고 힘겨루기를 했던 시기다.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인들이 목격했던 인간성의 실추와 인류 공멸의 위기의식이 최고로 치솟았을 시기였다. 무엇보다 문명이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저자의 이 반응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인간성에 대해 실망스러운 사태를, 세계 문명의 중요한 역할을 자처하는 유럽에서 겪어야 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인류 각성의 필요를 느끼게 해주었을 법하다.


이제 저자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다시 접근을 시도한다. “문명이란 활력과 의지와 창조력 이상의 무엇입니다. (...)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영속에 대한 감각입니다.”(40) 이 표현에서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큰 정체성 요소 하나가 등장한다. 문명이 영속에 대한 감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굳건함견고함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혹은 변화 없는 상태의 지속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의미일까? 그런데 조금 다른 문명의 요소를 찾을 수 있었다.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과정이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것”(158)이라는 점이다. 이건 영속이 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다만 구체적인 그림은 아직 그려지지 않아 좀 더 단서를 찾아보면, ‘문명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북유럽적 특징으로, 분별과 예의범절에 대한 조야하며 동물적인 적의’(218)를 꼽고 있다. 동물적인 적의북유럽적인 특징으로 보는 저자의 견해에는 여러 독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분명한 건,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특징적 요소에 영속’, ‘질서’, ‘분별’, ‘예의범절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명이란, 인류 집단이 어떤 체계 속에서 분별과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의 영속이라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저자가 다른 존재 혹은 그들이 남긴 유산을 파괴하는 행위를 혐오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가 문명화된 삶의 특질로서 제시하는 요건은, “모든 종류의 인간과 그들이 놓인 온갖 상황에 연민을 품으며 인간의 다양성에 대해 관대하다는 것”(274)이다. 곧 타 존재에 대한 연민관대함으로 정리 해볼 수 있겠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저자가 생각하는 문명의 정체성의 윤곽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영속에 기여하는 것, 혹은 이러한 지향에 기여하는 제반 활동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 이를 조금 달리 표현하면, 문명의 요건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신뢰에 기반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속성이든, 질서나 안정감이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이 텍스트는 1969년에 정리되었다. 어쩌면 이 책은 인간이 20세기까지 인간이 반복적으로 겪은 끔찍한 살상 기록과 파괴, 폐허를 직시하고 목격한 저자의 위기의식에서 출발했을 것 같다. 대량 파괴와 인류 공멸의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상황 속에서 실추된 인간 정신을 다시 긍정할 필요가 있었을 테다. 인간으로서 자존감의 회복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또 새로운 세대로부터 새 희망의 불씨를 찾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저자 케네스 클라크가 생각하는 문명의 윤곽을 정리해보니, 그의 견해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하게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문명개념은 남성적’, ‘굳건하고 조화로운’, ‘안정된 질서’, ‘합리적 이성과 같은 어휘를 곧바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 이성의 지속적인 발달과 함양을 믿고 있는 듯하다.


 

한편 책을 읽어가면서 저자의 주장에 곧바로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이를테면, 저자는 서유럽이 이러한 이상을 이어받았습니다.”(24)라고 말하며, 이를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범한 창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 저자의 주장은 꽤나 억지스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논의의 범주를 서유럽의 역사에 한정하고 있음에도, ‘전체 인류의 역사를 무턱대고 언급하는 방식에는 논리의 비약도 보인다.

이 책이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5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사례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역자 역시 이 책이 비판의 여지가 여러 군데 보이긴 해도, “비판적인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그 비판이 겨냥하는 쪽을 알아야 한다.”(473)고 언급한다. 견해가 다양하고 대립하는 공동체에서 건설적인 논의와 대화가 지속되려면, 우선 대화의 출발선에 함께 서야 한다. 논의의 전제에 대해, 기본 개념의 범주에 대한 공통의 이해와 기반이 마련되어야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사고의 경직성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같은 책이 될 수도 있겠다. 상상 부분 저자의 견해에 공감하면서도 종종 내 의견과 틀어지는 지점이 발생하곤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자신의 의견과 다른 목소리라고 해도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태도만 있다면 언제나 좋은 토론 상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저자의 이 자신감 속에 바로 문명의 토대가 되어온 인간의 기본 자질을 발견할 수 있다.

 


책을 덮으니 표지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디자인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여러 점들 사이를 지그재그 형태의 선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다. 내게는 이 표지 그림이, 인류사적으로 여러 변곡점 사이를 왕복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의 부단한 행보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에 나타나는 반복의 요소(‘역사는 되풀이 된다’)에 정확히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올 수 없기에 발생하는 차이가 더해져 발생하는, 일종의 리듬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더 간단히 말하자면, 이 그림은 인류 역사의 보편적인 리듬을 상징하는 그림처럼 읽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자 케네스 클라크는 이 책에서 혼란과 위기에 처한 인간의 윤리성과 신뢰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찾고 여기에 또다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질서를 다시금 부여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soyoseoga

#소요서가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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