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맑음 - 청소년과 함께 읽는 5.18 민주화 운동 이야기 창비청소년문고 33
임광호 외 지음, 박만규 감수, 5.18 기념재단 기획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 18, 맑음

임광호/배주영/이민동/정수영 지음  |  [창비]

 

 

지난 3 11 88세의 전두환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법정 앞에 섰다. 2017 4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하여 전두환은 시민단체와 유가족에 의해 고소되었고 불구속 기소로 재판받게 되었다.

(참고 기사 출처: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232160#08gq )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처럼 여전히진행중이다. 이번 재판에서 전두환은 법정에서 사과없이 5.18 당시 헬기의 기총소사는 없었다고 여전히 주장했다. 참고로 기사에 따르면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검찰 조사 등을 통해 5.18당시 헬기 사격은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기사는 나치가 집단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죽인 일이 없다고 주장했던 어용 역사가의 주장에 맞서 법정에서 진실을 두고 공방했던 실제 사건을 토대로 제작된 영화 <나는 부정한다> 떠올리게 했다. 영화는 진실을 왜곡하려는 집단에 맞서 역사를 올바른 사실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었다.

 

 

오늘은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모여 청소년을 대상으로 5.18 민주화 운동(이하 5.18)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5 18, 맑음> 만난다. 책은 크게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전반부는 5.18 전후의 국내 분위기와 5.18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간결하게 기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역사의 진실 찾기노력에 대해 국내외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며, 5.18이후 시민들이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5.18 증언하는 세세한 자료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5.18 당시의 상황에 대해 모르고 있던 일반 독자에게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시간이 모든 문제의  약은 아니다]

이번 재판 기사를 보고 역사의 사건으로 세기 가까이 지나 관련자를 법정에 세운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여전히 진실을 부정하고 있는 책임자들의 한결같은 태도 역시 대다수 시민들의 마음을 더욱 헛헛하게 만든다.  사람이 대개 괴로운 일을 겪고나면 주변에서 시간이 답이다라고 말해주곤 한다. 일면 수긍하게 되는 말이긴 하지만, 인간이 겪는 모든 괴로움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 아닌 같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의 경우, 특히 5.18 같이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경험은 경험자(생존자 혹은 유가족)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기 마련이다. 몸에 각인된 기억은 평생을 걸쳐 살아남은 이들을 괴롭히고 삶을 갉아먹을 있는 존재다.

 

 

5.18 당시 임신 8개월인 어느 부인은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배속의 아이와 함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가족 곁을 떠났다.   근처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중학생 아이들이 공수부대가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 계엄군에 직접 총을 들고 맞서 싸우지는 못해도 시민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을 했던 어느 여학생은 헌혈 귀가하다 총에 맞고 다시 병원으로 실려온 사례도 있었다. 당시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평생 얼마나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야 했을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5.18 사람 사람의 희생자로 인해 유가족들은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광주 시민,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집단에 던진 트라우마를 낳은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공권력의 정점인 국가의 군대 조직을 무방비 상태의 무고한 시민들에게 어떤 예비 조치도 취하지 않은 휘둘렀기에 더욱 충격을 준다.

 

 

많은 기성세대들은 떳떳하지 못했던 집단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당연히 예상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집단이 공유하는 트라우마는 진실을 덮는다고 하여 잊혀질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나 전두환 회고록 처럼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사람이 회고록의 주장으로 진실이 드러나거나 집단의 트라우마가 해소되길 기대하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반면 아직도 직장에서 업무로 만나게되는 어르신 중에는 아직도 5.18 빨갱이 소행으로 진압과정에서 희생자가 생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놀랄 때가 있다. 가짜뉴스에 세례를 받고, 정보가 신념 내지는 교리가 되어버리면 정말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5.18 더더욱 현재진행형인 역사라고 말할 있다. 유가족 이들의 친구 동료들에게는 시간을 약으로 삼아 과거를 덮는 것으로 개인과 집단의 트라우마가 치유되기 보다는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을 시작으로 하여 진실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

 

 

 

[우리가 있는 일이란]

책을 읽으며 평범한 시민으로서 우리가 5.18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우선 역시 5.18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체적인 이해를 갖지는 못하였지만 <5 18, 맑음> 통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처럼 막연하게 5.18 알던 사람들은 우선 5.18 대해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일반 시민으로서 있는 번째 선택일 같다.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고 손을 내밀어 맞잡아 주는 일도 있지 않을까. 책에 소개된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어머니회 광주의 오월어머니집과의 연대도 그러하고, ‘5.18엄마가 4.16엄마에게보내는 메시지 또한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의 손을 내미는 일이다. 언론은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독자 사이를 매개하는 필터의 역할도 하고 있으므로, 시민들은 언론의 기능을 이해하고,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언론의 기사를 보다 비판적인 안목으로 판단하는 시민의 태도 또한 필요하다.

 

 

책에서 저자들은 언론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하며 기자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5.18현장을 최초로 담은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막연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책에 힌츠페터에 대해 보다 자세히 소개가 되어 그가 남긴 사진 장과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알게 되었다. “우리 독일인이 2 대전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는 만큼 5.18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84)라고 언급하기도 했던 그는 기억하기 중요성을 알았던 기자였다. 책의 저자들도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언론은 진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킬 있는 존재이면서도, 시민들을 연대하게끔 해주는 도구, 매개체의 역할도 한다. 힌츠페터 이후 다른 국내외 기자들의 사명감과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의 세부사항이 전달되어 공유되지 못했을 것이다. 올바른 언론의 역할을 이해하고 의식있는 언론이 사회에 본분을 있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2부에서 특히 주목하게 부분은 일반 시민이자 탄광의 카나리아같은 역할을 하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글을 쓰는 문인들을 비롯하여 영화감독들 그리고 화가와 음악가들은 5.18민주화 운동을 모티브로 하여 각자의 재능을 발휘했다. 저자는 책에서 예술의 사명을 밝히고 있는데, 하나가 기억의 재현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사명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가의 것으로 보는 편이다. 예술가들이 담당하는 기억의 재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앞서 언론의 역할이 연대를 위한 도구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듯이, 예술가들 또한 자신의 작업을 통해 감상하는 시민들에게 다른 정서적인 연대를 촉구한다고 있겠다. 어쩌면 언론은 이성적인 연대, 예술가들은 감성적인 연대 가능하게 해주는 창문이 된다고 있다. 특히 예술가들은 사회 현상에 대해 아무런 사리없이 바라보고, 비판할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표현이 글이든, 영상이든 혹은 음악이나 그림이든 예술가들은 모두 집단의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론을 비롯하여 예술가의 역할은 개인 집단의 역사를 간직하므로써 집단의 기억을 강화해주며, 집단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존재라고 말할 있겠다.

 

 

 

[글을 나가며 - 이제 다시 시작이다]

5.18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압 작전명이었던 화려한 휴가 같은 이름의 영화 <화려한 휴가> 처음 보았을 받았던 충격, 영화 <박하사탕> 보았을 받았던 충격을 기억한다.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너무나 모른 살아왔음에 부끄러웠던 기억도 난다. 이후 나는 예술인들이 남긴 작업들을 통해 5.18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번 <5 18, 맑음> 통해 보다 많은 참고 리스트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5.18 대해 좀더 알아가는 ,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개인으로서 소박하게나마 있는 일이란 생각을 한다.

 

 

책을 읽으면서 반인륜 범죄에 공소시효란 없다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는 모리스 파퐁 재판부분이 또한 기억에 남는다. 사건 또한 내가 모르던 것이었는데, 파퐁은 비시 정부 시절 나치에 적극 협력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비시 정부 시절 당시 파퐁은 보르도 지역 유대인들 16,000 명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87세의 파퐁을 법정에 세웠다. 법정에서 그는 명령을 수행했을 공무원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나는 위에서 시키는 일을 했고, 나치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178)라며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진술은 한나 아렌트가  기록하고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진술과 너무나 흡사하다. “(아이히만) 자신이 맹세한 대로 모든 명령에 복종했고, ‘자신이 의무를 항상 완수하는데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주장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58) 아이히만도 역시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 위해 성실히일했던 공무원이었다. 파퐁이나 아이히만 역시 집단 속의 개인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말인데 논리가 이들에게 일말의 면책 사유가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례는 내게 우리가 스스로 비판적인 사유와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있는가를 또한 있기도 하다.

 

 

의식있는 사회 각계층의 노력으로 5.18 기록한 각종 기록물들이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많은 숙제가 남아있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같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한다. 5.18 사례는 우리가 살펴보아야할 과제의 출발점이 있을 것이다. 오늘 만난 <5 18, 맑음> 통해 여러 희생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들을 있었다. 나는 여러분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야겠다.

 

 

 

#5월18일맑음 #518민주화운동 #창비 #청소년도서 #한국현대사

#네이버원탁의서평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 세상의 통념을 저격하다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고등학교 시절까지 나는 책을 읽지 않는 학생이었으나 우연히 알게된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마디가 나에게는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면 대략 이렇다. “모든 가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의심하는 자유(freedom to doubt).” 파인만이 언급했던 의심 당연히 합리적 의심 말한다. 평생 미신적인 유사과학에 대한 비판을 했던 파인만에게 의심의 대상은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이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러한 사고의 자유 내지는 정신을 확장하여 적용해보는 것은 사회의 관습과 규범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교양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에 만나게된 도서는 강양구 기자의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이다. 저자는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관점을 제시한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실린 저자의 글들은 청소년 논술 잡지에 연재되었던 글을 다시 수정하여 엮은 것이다. 현직 기자로서 사회와 과학기술에 대한 당대의 현안에 주목하고 우리가 받아들이고 굳어져버린 생각들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럴까?’, ‘만약 (…) 이런 경우라면?’하고 독자에게는 다른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면 어떨지를 제안한다. 분명 인간 사회의 조건들은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람의 삶에도 여러 가지 다른 정치경제적 사안들과 무관하지 않다. 책에서는 다양한 화제에 더하여 독자로하여금 추가로 생각해볼 연관 주제나 깊이 있는 탐구를 위한 관련 서적을 제시한다. 다양한 소재를 대상으로하는 만큼 자세한 설명 보다는 관련 주제에 대한 소개 깊이 있는 주제 탐구를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미세먼지 주범찾기

 

최근 한반도는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얼마 전에 미세먼지 기단이 중국에서 서해를 거쳐 한반도로 이동하는 위성자료를 공개한 기상청 발표가 있었다. 많은 이들은 발표에 힘입어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인식이 정말 그럴까?’라고 의문을 표하고 좀더 자세한 정황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봄철만 되면 중국 내륙에서 날아오는 황사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미세먼지보다 입자가 크다. 그리고 중국 내륙의 사막지역에서 날아오고 있다는 점에 크게 이견이 없는 듯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미세먼지라고 부르는 적혈구 수준의 크기(10-20 μm)보다도 작은 입자이다. 미세먼지는 자동차, 난방 화석에너지의 연소 과정에서 발생한 질소 산화물이 공기 중에서 반응하여 생성된 질산염과 황산염의 성분을 갖는다 한다(97).

 

그렇다면 과연 미세먼지는 황사처럼 중국에서 대부분 건너오는 것일까? 최근 신문 기사를 보니 야당의 정치인은 미세먼지의 원인인 중국에 항의하나 못하고 있다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상당수의 국민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미세먼지는 중국탓이라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에 따르면 미세먼지의 상당 부분은 국내에서 만들어낸 오염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한반도의 미세 먼지가 대기 정체 경우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한반도 상공의 대기가 정체되는 시기에 미세먼지 문제가 심해지고 있으며 이는 국내에서 발생되고 있는 오염물질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지 않고 기상청의 발표(중국에서 건너오는 미세먼지) 야당의 입장과 의도를 여과없이 수긍해도 되는 것일까. 물론 기상청은 미세먼지가 전부 중국에서 건너오는 오염물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과 입장 표명에 어떤 정치적 맥락이 개재해있지는 않은지 배경에 대한 의문을 가져볼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건너오는 미세먼지를 부인할 수는 없으나 국내에서 유발되는 오염물이 상당한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미세먼지를 중국탓이라고 하는 입장과는 간극이 존재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대기의 특성에 비추어볼 ,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건너온 부분과 국내의 오염물에 의한 비율을 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미세먼지의 주범을 중국탓만 하고 있을 , 우리는 정부의 환경 관리 책임에 대해 면제부를 주거나 환경에 대해 무관심해질 있게된다. 미세먼지에 대해 과연 우리는 책임이 없는가는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세먼지와 관련하여 생각해보게된 것은 저자가 언급한 마디이다.

때로는 충남 화력발전소 굴뚝에서 나온 미세먼지가 북쪽으로 확산하면서 수도권 뿐만 아니라 서해 상공이나 강원도로 가기도 합니다.”(97)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현재 국내 여러 화력발전소의 가동률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매년 전기에너지 수요는 증가하고 있으나, 환경문제에 대한 정책 사안 결정과 관련하여 원자력 화력발전소의 확장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에너지 수급 문제가 특히 수요가 많은 여름에 비상이 걸리는 이유다. 자동차 뿐만 아니라 미세먼지에 영향을 있는 난방 전력 공급(지역 난방 시설, 화력발전 ) 시설에서는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핵발전소에 대한 축소방침을 갖고 있는 정부의 영향으로 화력발전소의 가동율과 에너지 의존율은 상당히 높은 상태이며, 이것이 특히 최근 수년 사이에 심해진 미세먼지의 원인일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금융 대출제도 차량 대여 서비스 등의 다양화로 개개인이 외제차를 비롯한 차량 소유가 대폭 증가한 것도 미세먼지 증가에 속도를 더해주었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에서 건너오는 미세먼지의 오염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발생하는 오염물 증가에 대해 분명히 주목하고 대책을 세워야하는 것이 맞다. 정치권에서 소리 높여 미세먼지가 중국탓이라고 주장하는 사이, 우리 국민들은 국내의 오염 유발 사항에 무관심한체 여러 질병의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석탄을 이용하는 화력발전소의 가동율이 높아짐에 따라 발전소의 컨베이어 벨트는 석탄을 쉼없이 나르며 가동중일 것이다. 최근 화력발전소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점검중이던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문제는 미세먼지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좀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미세먼지 문제와 화력발전소 노동자의 죽음은 화력발전소를 매개로 서로 얽혀 있는 문제이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전력 수요를 맞추기 위해 쉼없이 컨베이어벨트를 가동하는 환경에서, 미세먼지 오염물을 생산해냄과 동시에 현장 작업 노동자는 좀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안전사고에 크게 노출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학교에서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가공되거나 이송되어 우리에게 오는지 배운 기억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에너지와 환경의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사고를 확장하여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최근 고통을 주는 미세먼지 문제는 우리가 고립되어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나라를 떠나 지구 전체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해주는 사안이기도 하다. 사회의 통념에 의문을 던져보는 일은 우리의 삶이 정부의 정책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이슈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기회를 마련해주기에 중요하다.

 

 

 

과학기술과 결부된 인간의 새로운 욕망 유전자 변형 그리고 새로운 우생학

 

20세기 초반 양자물리학의 성공과 함께 20세기 중반에는 과학자들이 DNA 존재 구조를 규명해내어 미시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환원주의적 시각이 힘을 얻었다. 인류는 자연의 근본을 이해하는 일이 자연을 분할하여 이해하는 일과 다르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는 크리스퍼라고 하는 유전자 편집 기술로 원하는 유전체 부위의 염기를 잘라내고 다른 염기쌍으로 대체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성형수술로 대변되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욕망의 분출은 이제 유전자 변형을 통해 만들어진 배아를 통하여 출생한 인간, ‘GMO사피엔스까지 확장되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자신감과 욕망은 이제 생명을 조절하고 제어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맬서스의 인구론과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한 다윈주의가 결합하여 근대의 우생학이 등장했다면, DNA구조의 해명 이후 유전자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새로운 현대 우생학이 출현할 단계에 있다고 할만하다. 강양구 기자가 소개하고 있듯이, 영화 <가타카>에서 묘사한 상상력의 세계는 이제 보다 그럴듯한 핍진성을 얻게 되었다. <가타카>에서는 유전자 변형(편집)여부가 인간을 우열로 분류하는 기준이 되고 있지만, 유전자 변형을 통해 태어난 진리치(GenRich) 신분도 사고로 불구가된 이는 다시 열등한 등급으로 재분류되고 있다.

 

 과학기술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고 믿지만, 결국 과학기술을 적용하는 주체는 (현재까지는) 사람이며, 따라서 적용되고 있는 과학기술은 이미 가치중립적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평가 분류의 기준들을 제시하는 , 기준 설명이 인간의 가치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유전자 변형 인간의 등장은 과학기술의 힘을 이용해서 정상 비정상 가르는 새로운 시도”(220)라고 하였다. 나아가 유전자 변형 행위는 유전되기 때문에 성형외과 시술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안고 있다. 새로운 신분 형성과 고착화에 대한 우려는 영화 상상만은 아닌 것이다. 영화 <가타카>에서 불구가된 진리치신분의 인간은 결국 비정상으로 분류되어 도태되고 만다.  

 

지구의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온 생명체는 유사한 (species)이라면 어떤 기준에 따라 분류되더라도 대개는 (bell)’모양의 정규분포를 따를 것이다. 우리가 폭넓게 분포해있는 (species) 대해 정상 비정상’, ‘우열 나누는 행위는 분명 객관적 사실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포함된 규범적 규정에 따른 것으로 봐야만 한다. 현대의 우생학은 가치의존적 개입 활동임과 동시에 생물체의 정규분포 양단에 존재하는 개체들을 제거하려는 극단주의적인 선택으로 있다. 생명체의 다양성은 진화기작의 가장 중요한 전략이기도 한데, 우생학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메커니즘에 정면으로 반하는 인간의 가치 의존적 개입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리고 생명체 자연에 있어 정상이란 무엇인가를 반문하고 논의해 봄직하다.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매우 중요한 질문거리가 있다. 과연 정상 비정상이란 무엇일까?

 

 

 

다시, 의심하는 자유에 주목하며

 

강양구 기자의 질문하는 ,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따라 읽으며 다시금 학창시절 발견했던 의심하는 자유 생각해보았다. 책에서 저자는 상당히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있지만 우선 현재 나의 관심을 가지 사항들을 다시 추려 생각을 보태보았다. 다양한 문제들이 좀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서로 더욱 긴밀히 얽혀있음도 이야기해볼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에너지 관련 이슈에는 탈핵 정책과 관련하여 핵에너지 공급 유지 문제와 함께 화력발전소 가동 상황, 그리고 미세먼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배경 속에서 노동자, 인간은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가를 함께 생각해볼 있을 같다. 핵발전소를 짓는다는 것은 분명 정치적으로 소외된 어떤 장소, 사람들의 희생이 따르게되는 구조를 연관지어 이해를 넓힐 있다.

 

한편 효율성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설계하는 문제를 생각할 , 본문에 제시된 마강래 교수의 압축도시개념과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 등장하였다. 개념이 서로 상통함을 말할 , 우리의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칠 있는지 의문을 던지는 기회가 수도 있겠다. 과연 효율성만으로 압축도시 설계한다면, 도시 외곽에서 농사를 지어야만 하는 농민들 혹은 공장 노동자의 삶의 질은 누가, 어떻게 보살펴야하는가 등의 문제도 남게될 것이다. 사고 실험은 누구나 있으나 인간의 삶은 다양하고 수많은 변수가 내재한다. 이론과 실재의 간극을 어떠한 기준으로 보완하는가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것이다. 

 

밖에도 저자가 기부 문제와 관련하여 언급할 , 미국의 철학자 피터 싱어나 윌리엄 맥어스킬의 효율적 이타주의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기부를 전제한 돈벌이가 남을 돕는 효율적인 방법’(273)이라는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소개하는 효율적 이타주의개념에는 아직 수긍이 되지 않는다. 현실적인 윤리의 문제를 판단할 ,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주장하는 윤리적 문제 판단의 상대성에는 수긍하지만, 윤리적인 문제와 효율성 결부시키는 문제는 아직 나의 통념으로 효율적 이타주의 개념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런 나의 의심은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확장해서 읽기를 위한 도서를 이해한 다시 점검해볼 있겠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에서는 사회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이해 하려는 태도가 중요함을 다시 발견할 있다. 우리 사회는 사회 현안들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해보는 문화가 아니기에 개개인의 의견 차이가 종종 감정적인 충돌로 이어지곤 한다. 책을 읽고 개개인이 의문을 갖는 자유를 떠올리면서, 아울러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다양한 생각들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구성원들이 주체적으로 의견을 조율하고 사안을 결정하는 일이 바로 정치 개념이며, 결국 우리의 삶의 조건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상한질문위험한생각, #강양구, #북트리거, #지학사, #네이버원탁의서평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동화된 불평등 - 첨단 기술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분석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가
버지니아 유뱅크스 지음, 김영선 옮김, 홍기빈 / 북트리거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동화된 불평등

(원제: Automating Inequality: 

How High-Tech Tools Profile, Poilice, and Punish the Poor)

버지니아 유뱅크스(Virginia Eubanks) 지음 | 김영선 옮김 | [북트리거]

 

 

 

인간이란 위대한 존재다. 인간만이 위대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확인하고자하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확신과 긍정을 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인간의 근원적인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할 것이다.

 

범죄자요. 단지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지.

 

누군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느끼고, 그것도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말한다면 화자는 분명 사회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인간의 실존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증거이다. <자동화된 불평등> 읽고 빈곤 대한 나의 생각이 좀더 구체화되었다. ‘빈곤 막연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소수의 불행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탈은 더더욱 아니다. 빈곤은 우리 사회에 반드시존재하는 장치이자 사회구조라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빈곤 기본적으로 인간이 거대한 집단을 이루고 생활해나가야하는 이상 인간이 개발한 발명품이 아닐까. 인간이 부족을 이루어 사냥과 채집을 공동분배를 하던 소규모 공동체에서 빈곤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농경 생활이 시작되고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동생산-공동분배하던 공동체는 기존의 소규모 집단으로부터 분기되어 새로운 사회의 구심점과 구성원의 역할이 필요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빈곤 애초에 지배층의 사회구속력을 만들어내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고 있다.

 

<자동화된 불평등> 저자 버지니아 유뱅크스는 책에서 1662 보스턴에서 세워진 미국 최초의 구빈원으로부터 공공부조의 역사를 언급한다. 그러나 책의 주요 관심은 기술혁명 이후 급속하게 발달한 인간의 도구들, 컴퓨터의 발달과 소프트웨어, 방대한 데이터 처리 기술과 알고리즘의 구현까지 결합된 첨단기술이 빈곤에 어떻게 대처하고, 공공부조의 성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어떻게 심화시켰는지를 보다 깊숙이 들여다보는데 있다. 공공부조는 기본적으로 구성원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하지만 구성원이 누구인지 알려주어야하는 개인정보 노출 공유에 대한 동의를 전제한다. 공공부조는 지원 조사라는 공통적인 틀을 갖추고 있다. 전통적인 구빈원이 그러했고, 현대의 디지털 구빈원이 그러하다. 문제는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디지털 구빈원이 인간의 실존적인 위기를 더욱 공고히 만든다는데에 있다. 결과 빈곤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인권과 평등이 침해받을 있다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조건 위기에 처해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미국 근현대 시기의 공공부조 형성 배경 역사적 맥락

 

저자는 주로 미국 사회의 공공부조 전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근현대 시기 미국 사회의 배경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첨단기술과 접목된 여러 공공부조의 모습을 살피는데 유용할 것이다. 아울러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공공부조의 양상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 최초의 공공부조 형태로서 탄생한 구빈원은 1600년대 중반 이후로 점차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국가가 나서서 빈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가난한 이들을 공공 기관에 귀속시키는 방식은 1820년대 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분명 산업혁명의 여파로 효율성 향상를 위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한다는 공포는 오늘날 인공지능이 인간을 많은 산업영역에서 대체하고 심지어는 인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공포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는 이미 이런 대중의 공포심과 사회 구조의 중심인 중산층의 두려움(실업과 빈곤층이 되는 두려움)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사회에 도입, 정착 시켰다. 우리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에 대해 많이 알고있지만, 1800년대에도 여러 차례 대공황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해양봉쇄 정책을 계기로 발발한 영국과 미국의 1812 전쟁 이후, 미국 토지 관련된 과도한 부동산 대출과 자본 투기 그리고 대출 규제가 이어지면서 미국의 은행이 파산하고, 기업들은 도산하였으며, 자유민 성인 남성의 4분의 일에 해당하는 50만명이 실직한 사례가 있다. 나아가 번의 19세기 미국 대공황은 1873 과잉 철도 투자로 인한 시장 왜곡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서부로 나아가려는 수요, 철도 건설 사업이 붐을 이룬 이유는 1820년대 서부에서 금이 발견된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19세기 중반 부터 1920년대 까지 이어졌던 고아열차 미국사회의 철도라는 사회기반구조를 통해 고아와 집없는 취약 계층 아이들을 동부 도시로부터 중서부의 농촌 지역 가정에 위탁하던 형태의 공공부조 사업이었다.

 

사회가 대공황을 겪고나면 취약한 계층이 늘어나고, 빈민이 증가하기 마련이다. 국가 주도 하에 통제의 성격을 갖는 미국 근현대 시기 공공부조에 대한 이해는 디지털 구빈원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국가는 사회의 불안계층인 빈곤층을 통제하기 위하여 다른 타개책을 고안해 내었다. 이것이 바로 자선이다. 특히 과학적 자선 운동 이를 주도한 사회 엘리트층은 다윈 진화론의 왜곡된 형태인 우생학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생학은 과학에대한 맹목적인 신뢰와 인간의 편견이 결부되는 과정에서 변질되어 인간의 삶을 위협하게 되었다. 우생학의 기본적인 논리는 자격을 갖춘 빈민과 그렇지 못한 빈민이 유전적 차이 있다는 믿음이다. 논리가 미국적 맥락에에서 백인 우월주의와 접목이 되면서 특히 1880년대 미국사회를 휩쓸게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우생학이 인종적인 편견과 결부되면서 미국의 엘리트 계층이 가난한 노동자 계층 6 여명에 대한 강제 불임시술을 주도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우생학 연구를 통해 미국 최초의 빈민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00년대 미국사회는 공공부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20세기 미국 공공부조의 틀을 형성한 시기로 있다.  한편 미국 근대에서 나타난 구빈원의 전통은 자본가와 지배층의 이익극대화라는 욕망에 희생된 계층에 대해 이들이 갖는 불안감을 일소시키기 위한 통제 장치로 이해해볼 있다.  

 

공공부조의 관점에서 20세기는 근대의 틀을 이어받으면서도 좀더 다른 자각이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4 대공황 타개책으로 추진된 뉴딜 정책으로 빈민 구제 제도가 개개인의 도덕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저자의 평가대로 뉴딜 정책의 결과 사회보험과 공적부조가 구분됨으로서 경제 불평등의 씨앗을 뿌리고, 백인 우월주의에 굴복했으며, 빈곤층과 노동자 계층의 갈등을 조장하였으며, 여성의 노동을 평가 절하 측면이 있다. 또한 루즈벨트는 보편적 복지 혜택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여 과학적 자선의 조사와 감시, 견제를 부활하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공공부조의 기본 형식인 지원 조사라는 구도는  다시 미국 사회로 부활되어 힘을 얻게 된다. 반면 1960년대에 전미복지권단체의 탄생으로 강력한 복지권 운동이 등장하게 되면서 복지 혜택의 개념을 복지 혜택은 수급자의 개인 재산이라고 재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부양아동 가정지원의 확대에 대한 백인 중산층의 반감과 1973 1 석유 파동의 영향으로 불어닥친 경제 불황으로 1976년에는 디지털 구빈원 결국 탄생하게 되었다. 나아가 컴퓨터의 보급으로 공공부조를 받는 가정에 대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 저장, 분석할 있게 되었다. 이로서 디지털 구빈원은 1960년대 기반이 갖추어진 복지권 운동의 성공적인 결과와 복지 혜택에 대한 재정의를 70년대에 뒤집어 놓았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1996 제정된 개인의 책임 노동 기회의 조화를 위한 으로 미국사회는 이른바 복지의 종언 맞이하였고, 1996년에서 2006 사이 거의 850만명의 수혜자가 복지 명부에서 제외되었다. 저자는첨단기술과 도구의 결합으로 수혜 대상자 개개인에 대한 사생활 침해와 감시 추적이 강화되고 가혹한 기준을 요구하며 엄격한 처벌을 낳게 되었다고 경고한다.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의 유사점과 차이점

 

저자에 따르면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은 모두 공적 혜택으로부터 빈민들의 주의를 돌리고, 이들의 노동을 강제하며, 가족을 해체하고, 정치적 권리를 상실하게 한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생존을 불법화하는 측면이 있고, 실험 대상으로 이용하기도하며, 중산층과 구분하는 윤리적 거리를 만들어내며, 심지어는 인종차별적이고 계급차별적인 위계를 재생산한다’(282)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전통적 구빈원은 산업적 실업에 대한 중산층의 두려움 대응하며, 디지털 구빈원은 전문직 중산층의 추락에 대한 두려움 대응한다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공공부조의 존재는 공교롭게도 중산층의 필요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으로도 있다. 사회지도층은 사회 구속력을 획득하기 위해 중산층의 두려움 이용하여 빈민을 통제할 명분을 얻은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빈곤이란 개념이 사회지도층을 위해 고안된 그들의 발명품이라는 생각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다.

 

물론 전통적 구빈원과 디지털 구빈원에 두드러지는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전통적 구빈원에는 하나의 시설에 다양한 인종, , 출신국을 넘어 함께 수용함으로써 계층 결속의 결과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다만 제한된 시설과 사회 자본의 제한으로 규모가 확대되는 것에는 한계가 필연적이었다. 반면 디지털 구빈원은 감시와 알고리즘에 의한 사회적 분류 과정으로 기존의 공동체 구성원을 개개인으로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시말하면 디지털 구빈원은 빈곤층의 연대를 약화하고, 이들이 다양한 공격과 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방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디지털 구빈원의 성격은 전통적인 구빈원 보다는 공적인 빈민 구제 방식에 대항하여 등장한 과학적 자선 운동 계보를 잇는 것으로 있을 것이다. 과학적 자선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는 우생학 연구와 결합하여 최초의 빈민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낸 강제불임 시술에서 있다. 나아가 디지털 구빈원이 전통적인 구빈원과 달리 새롭게 갖게된 중요한 특징은 첨단기술 도구의 발달과 함께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예측 모형이 결합하여 보다 은밀한 속성을 띄며 보다 영속적이라는데 있다. 한편 감시라는 관점에서 구분되는 차이점도 존재한다. 전통적인 구빈원에서 보이는 아날로그 방식의 감시 시스템은 감시 대상을 먼저 선별하여 추적한다. 반면 디지털 감시 시스템은 감시 대상을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로부터 알고리즘이 제시한 기준에 근거하여 선별한다. ‘감시표적 특정 기준에 의해 걸러낸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감시 시스템은 가난한 사람들을 추적하는 빈곤 프로파일링으로 본질을 이해할 있다. 빈곤 프로파일링은 개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개인의 조건, 가난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가난한 개인을 추가 조사 대상으로 포함시킬 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범죄자로 표현한 노숙인 게리의 자조적이고 상실감이 담긴 진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세상이 만들어낸 무형의 감옥 그리고 고립과 추방

 

빈곤 관리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경제 불안에 대한 국가의 두려움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혐오에 의해 만들어지고, 차례로 빈곤의 정치학과 빈곤에 대한 경험을 형성한다.”(27)

 

저자는 빅테이터 활용기술과 알고리즘과 같은 기술-도구는 중립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기술과 도구 자체는 자체로 의지가 없으므로 중립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두려움과 혐오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기술 도구들을 적용하는 주체가 누구이냐에 따라 양날의 칼로 기능할 있을 것이다. 다만 수학자이자 테이터과학자로 알고리즘을 개발했던 캐시 오닐의 견해를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캐시는 내부고발자로서 역할을 자신의 책에서 (수학적) 모형들은 수학에 깊이 뿌리내린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있다.”(<대량살상 수학무기>, 45)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알고리즘 개발에는 모형을 만든이의 우선 순위에 대한 가치 판단 선입관 반영된다는 태생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아가 이러한 모형을 적용하는 단계에서 차례 인간의 의도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낳게 것이다.

 

결국 이렇게 인간의 선입관, 편견이 결부된 모형들을 통해 주요한 감시 표적이 되는 대상은 어김없이 빈곤층이다. 가난한 이들은 디지털 통제 시스템의 감시에 투명하게노출되어 있다. 이는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했던 원형감옥(파놉티콘) 역할을 디지털 알고리즘이 대신하는 형국으로 있다. 바로 감시자는 방대한 개개인의 데이터를 있으며, 심지어는 개개인들을 지속적으로 추적할 있다. 이는 디지털 세계가 만들어낸 무형의 감옥(디지털 파놉티콘)이라 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공공부조 시스템은 디지털 파놉티콘으로서 가난한 계층에 대한 감시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류과정이 더해 공동체로부터 고립 추방이라는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알고리즘에 의한 예측 모형으로 어느 가정을 고위험가정으로 분류한다면, 가정은 서비스, 지원, 공동체 등을 제공하는 네트워크로부터 물러나게 만들 있다. 이것은 첨단 디지털 시대에 사회 구성원에 대한 추방행위 이면서 새로운 형태의 정치·사회적 격리를 낳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홀로 살아갈 없는 존재임을 안다면, 정치·사회적 배제 기작(고립 추방)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위협을 안겨주는 행위다.  

 

인디애나주에서 시행된 공공부조 프로그램의 적용사례를 살펴보자. 사례는 기존에 수혜 자격 판정을 사람이 진행했던 것을 알고리즘을 통해 자동화한 인디애나주 주민들이 겪어야했던 재앙을 상세히 보여준다. 특히 자동화 과정이 민영화 과정에서 예산 절감의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 나타날 있는 문제점들과 사례들을 열거한다. 자동화된 공공부조 적격성 판정 시스템은 효율성 극대화 부정 수급 차단이라는 명분으로 실행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해볼만하다. 한편 예측 모형이 적용된 앨러게니의 알고리즘 사례를 보면 예측 모형의 근본적 한계가 이를 적용하는 인간의 부주의와 결합하면 초래할 있는 불행한 사건들을 일깨워준다. 아동청소년가족국의 지원을 받으려면 감시가 심해지고 엄격한 행동 준수 요건이 따르는데, 아이의 부모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부모가 지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먼저 다른 가정에 위탁해야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는 첨단기술과 사회제도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기능해야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모순되는 결과이다.

 

데이터과학자가 매우 성공적인 예측 모형 개발했다고 가정하자. <자동화된 불평등> 읽은 이상 우리는 진술이 의미하는 상황을 짚어보고 숙고해볼 있을 것이다. 성공적인 알고리즘의 선별 대상 개인이나 가정은 저자의 지적대로 보다 엄격한 조사와 처벌 조치의 대상이 것이다. 따라서 표적 대상 기관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엄격한 심판관 앞에 서야 한다는 의미다. 가정의 부모가 알고리즘에 의해 정밀 조사 대상이 되고, 이들이 기관의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하게되면 아이가 부모로부터 강제 분리되어 다른 가정에 위탁될 것이다. 그러나 위험예측 모형 알고리즘은 매우 성공적인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알고리즘의 예측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행복했던 가정이 알고리즘에 의한 법집행으로 아이가 부모로부터 강제분리 경우, 부모와 아이가 받을 스트레스와 정신적 외상은 누가 돌보아 있을까? 인디애나의 적격성 판정 프로그램처럼 일주일에 30분도 미치지 못하는 정신과 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개인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데는 커다란 한계가 있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복지 제도를 적용할 , 인간의 부주의와 편견으로 아이들을 가정으로부터 자동분리시키는 기계가 되지는 않을지 미리 점검해봐야 한다. 저자의 지적대로 수학적 모형에 근거한 프로파일링은 빈곤한 가정의 양육 빈곤한 양육으로 치부하고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부인’ vs. ‘잊힐 권리 대해

 

앞서 빈곤은 인간 사회에 필수적인 장치이자 발명품 같다고 언급했다. 저자의 말대로 미국에는 부와 빈곤이 공존한다. 찰스 디킨스가 소설에서 묘사한 도시’, 런던과 파리에도, 조지 오웰이 몸소 체험한 파리와 런던에도 빈곤은 부와 공존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빈곤은 부와 함께 지구촌 어디에나 공기처럼 퍼져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매체의 제한적인 보도와 사회적·개인적 무관심과 외면으로 빈곤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저자는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의 용어를 빌어 사회와 구성원이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기작을 문화적 부인(cultural denial)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외면 기작은 개별적이거나 심리적인 속성이 아니라 학교 교육이나 통치 체제, 각종 제도와 대중 매체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 과정이라고 하였다.

 

문화적 부인 다른 사례로 이해해볼 있을지 궁금해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례가 있다. 일본의 지식인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가 지구촌이 당면한 문제들(난민, 테러문제 세계화 ) 대해 나눈 대담을 담은 <위험하지 않은 몰락>에서 사례를 있다. 대담에서두 지식인은 2 대전 이후의 프랑스 사회, 특히 지식인들과 사회의 과거사 외면 사례를 이야기한다. 이들에 따르면 프랑스는 2 대전 당시 비시정부 시절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패전국이다. 여기서 패전국이라는 의미는 나치 독일과 다름없는 전범국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랑스 비시정부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한 자국인들을 탄압하고, 유대인들을 나치 독일 넘긴 활동을 하였다. 문제는 프랑스 사회와 지식인들은 어느 누구 하나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자기 반성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미군정이 들어서고 친일파 정리를 골든 타임을 놓친 것처럼, 프랑스 또한 비시 정부가 일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사회와 지식인들이 묻어둔 지금에 이르렀다. 이는 문화적 부인 적절한 사례로 생각해볼 있다. ‘문화적 부인 과거 기억을 회피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대담에서 현대 프랑스 지성사회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를 과거의 실패와 과오를 돌아보지 않는 순간 지성은 쇠퇴한다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사르트르와 카뮈 이후로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잠깐 과거사를 언급한 적은 있으나 프랑스 지식인들은 문화적 부인 사례를 보여준다.

 

<자동화된 불평등>에서 저자는 문화적 부인이 가져다주는 중요한 폐해를 정치적 공동체로서 갖는 사회적 연대 의식을 약화하기라고 덧붙인다. 문화적 부인은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들에 대해 공동체가 문제를 상대화하고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을 타자화하는 과정의 전제가 된다. 다시말하면 사회의 문제를 나와는 무관한 치부하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말이다. 기관의 조사와 감시를 받는 빈곤층의 경우 공적 자원 수급을 거부당하거나 가족이 해체되면 삶의 기본적인 조건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빈곤층의 결속을 고려할만한 여유도 이들에게는 사치일 있다. 빈곤층과 중산층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에서도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이는 가치 중립적인 첨단기술이 인간의 편견과 부주의로 부적절하게 적용되었을 야기하는 평등권의 침해와 불평등의 심화를 불러온다. 저자는 디지털 구빈원은 현재 소수 권력 집단의 손에 행정 권한을 집중시키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분류하기 위한 자동화 도구를 그대로 두면 불평등을 낳을 것이다.”(306)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문화적 부인과 관련하여 가지 주목해본다. 다시 40 여년 프랑스로 되돌아가보자. 당시 프랑스의 정보자유구가위원회가 개개인의 데이터가 공공 시스템에 무기한 저장되어서는 안된다 제안하고 확립한 잊힐권리원칙에 관해 생각해본다. 논의는 디지털 구빈원이 영구적이며 디지털 데이터가 무기한 보관되는 경우 개인 정보의 유출 위험 또한 높아질 있다는 우려에서 나왔다. 한편 사람의 과거가 전적으로 그의 미래를 제한해서는 된다 전제에서 나왔는데, 잊힐권리 나타난 배경을 <위험하지 않은 몰락> 언급된 현대 프랑스 사회의 정황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2 세계대전 프랑스 비시정부에 협력하여 일했던 프랑스 공직자들(정치인, 경찰, 군인 포함) 자신들의 과거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잊힐권리라는 우아한 원칙을 일찍이 확립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전후 어디로 갔을까? 물론 나의 추측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비시 정부에 협력했던 공직자들은 나치 세력과 유사하게 남미를 비롯한 세계로 피신했다는 기록도 보이지만, 해방된 프랑스에서 이들과 자손들이 살아가기에 사회에 남아있을 개인에 대한 기록은 껄끄럽게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잊힐권리 일견 납득할만하고 중요한 원리를 기반으로 하지만 잊힐권리 해당하는 대상이 분명 프랑스의 빈곤층 아닐 것이다. 버지니아 유뱅크스가 지적하는 미국의 사례만 보더라도 잊힐권리 빈곤층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빈곤층은 애초에 국가에 의해 잊혀진 존재이나 감시망에 붙들려 있을 뿐이다. 아니 빈곤층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디지털망에 불들려 절대 삭제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캐시 오닐이 <대량살상 수학무기>에서 수학 모형은 본질적으로 과거와 기존 패턴들이 반복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둔다라고 지적하듯, 이런 맥락에서 알고리즘에 기반한 디지털 구빈원은 우리, 특히 빈곤층을 과거의 패턴 속에 가두게 된다. 나는 프랑스 사회에서 논의된 잊힐권리 대한 논의는 맛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외면 속에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은 프랑스 지도층의 수작이며 허구라고 본다.

 

아래는 불평등 구조를 공고하게 하는 디지털 구빈원을 거미줄로 설명한 훌륭한 은유다.

 

디지털 구빙원을 시선(視線)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집이라고 생각해 보라. 거미줄은 마이크, 카메라, 지문 인식기, GPS추적기, 경보용 철망 , 수정 구슬 역할을 한다. 어떤 거미줄 가닥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페타바이트(100 기가바이트) 단위의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망을 만든다. 우리의 움직임이 망을 흔들어 놓아 우리의 위치와 방향을 노출시킨다. 이들 필라멘트는 스위치가 켜지거나 꺼질 있다. 거미줄들은 역사를 거스러 올라가고 미래로 나아간다. 이들은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관된 망에 우리를 연결한다. 우리의 사회경제 등급이 내려갈수록, 가닥들은 빽빽이 짜이고, 많은 가닥들에 스위치가 켜진다. ”(290)

 


【나가며 땅의 모든 소피 기억하기 위해

 

새로운 첨단 기술도구는 보다 정밀한 평가와 추적, 나은 정보의 공유, 표적 집단의 가시성 증대를 가능하게 한다. (…) 현재 복지 제도에서는 자동화된 의사 결정이 오래된 본능적인 형태의 처벌 통제와 아주 비슷하게 작용한다. 그것은 걸러내고 견제한다. 그것은 조력자가 아니라 문지기이다.”(131)

 

디지털 구빈원은 최전선에 있는 사회복지사의 때로 편향된 결정을, 첨단 기술 도구의 합리적인 차별로 대체한다. (…) 권력 집단의 계층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수학으로 세탁하는 것이다.”(295)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공공부조의 형태를 조사하고, 데이터과학자 고통을 겪었던 빈곤층과 폭넓은 인터뷰 자료 조사를 통해 디지털 구빈원의 본질을 통찰하고 이를 책에서 여러 강조하고 있다. 저자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이다. 다만 책은 여러 종류의 디지털 구빈원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보다 집중하여 저자가 주장하는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를 위한 보다 구체적인 대안은 부족해 보인다. 저자가 제시하는 연대 필요성은 전통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결속 수단이다. 이는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의 문화적 부인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 행위 이기도 하다. 디지털 구빈원의 해체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다만 저자가 당부하는 것은 거대한 임무가 아닌 우리가 불편해하는 점을 서로 이야기 하는 이다. 저자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특히 사회 구성원이 개별화, 원자화되어버린 현대 사회에서 구성원들을 결속시킬 있는 연대의 실마리를 어떻게 구할 있을 것인가도 만만치 않은 숙제가 것인데, 저자는 이야기 하기에서 찾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연대 이야기 하기 통해 접착력이 발생한다.   

 

저자는 디지털 구빈원 해체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보다는 개개인의 보다 근본적인 인식 변화를 촉구한다. 어쩌면 이것이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법일지 모른다. 특히 앞서 이해해 바와 같이 전통적인 구빈원이든 디지털 구빈원이든 사회지배층은 중산층의 두려움 이용하여 빈곤층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명분을 얻는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대안은 중산층과 빈곤층이 서로 간의 이해와 결속을 통해 연대하는 것이 같다. 저자는 그런 의미에서 중산층이 보이지 않는 디지털망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언급한다. 자동화된 불평등은 중산층 빈곤층 모두에게 해를 끼치며, 이를 극복하는 것이 서로에게 모두 이익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거시적으로는 디지털 구빈원의 존재가 국가가 보장하는 기본 가치인 자유, 평등, 통합의 가치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고 기업의 역할이 극대화된 현대 금융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더욱 위협적이다. 중산층이 보수화되는 것은 이들의 두려움을 이용한 지배층의 정치공학 결과일 수도, 사회 지식인들과 중산층의 문화적 부인 수도 있다. 공동체에서 살면서 불평등으로 배제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고 공감하는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 중요한 시민의 책무가 같다.

 

문득 책의 페이지를 보고 소피에게라는 저자의 헌정사를 발견한다. 아마도 소피는 책에서 메디케이드 혜택의 수혜가 거부되었다가 회복한 스타이피즈 가족의 딸일 것이다. 소피는 저자와의 마지막 인터뷰를 끝낸 8 심장마비로 사망한 소녀이다. 사회에 존재하는 불편함과 우리 삶을 위협하는 조건들에 보다 민감하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다른 소피를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맞이하는 출발점이 같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없는 존재다. 인간의 편견과 부주의로 마련된 기준으로 누군가 공동체로부터 배제가 된다면 구성원은 곧바로 실존적인 위기에 직면한다. 다른 소피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외면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것이다.

 

책을 덮는데 문득 저자가 인터뷰를 했던 젊은 엄마와의 대화가 다시 떠오른다.

 

사람들(개별사회복지사) 대단해요. 그걸 (사회복지사업) 이외에 추적 장치로도 이용해요. (…)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좋을 거에요. 다음은 당신들 차례니까.”(27)     

 

그녀는 생활보호대상자였으며, 디지털 구빈원의 도움과 감시를 동시에 받았다. 우리 사회가 다른 소피 잃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가 기억해둘만한 경고다










#네이버원탁의서평단

(https://cafe.naver.com/bookknight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해의 말일인 어제 가족 모임을 다녀와서 일찍 잠들었더니

새해를 맞이했네요.

 

새벽에 잠이 깼는데, 최근에 접해본 시들에 대한 해묵은(?) 감상이

남아있더랍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세 명의 시 몇 가지를 읽고

이들로부터 남겨진 이미지를 떠올려보니 '슬픔'이란 녀석이 남아있었습니다.

 

 

 

 

 

 

 

 

 

 

 

 

 

 

 

유금은 제게 생소한 이름이나 박지원이 중심이 된 북학파 모임의 멤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이름을 '유연'에서 '유금(柳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일명 책바보라 불리는 간서치 이덕무는 이제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유금과 같이 북학파 일원이었으며, 유금과 같이 서얼출신으로 관직에 진출하는데 차별과 한계를 안고 있던 인물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설명이 더 필요없는 분이지만, 단순히 경세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폭넓은 저술과 훌륭한 시들을 남긴 분인 것 같습니다. 상업과 기술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북학파와 달리, 민생 경제와 농업에 주된 관심을 갖고 뜻을 펼치려 했던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고전100선은 들고다니기 가벼운 책들이지만, 연구자/번역자들이 저같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각 인물들이 남긴 시와 산문 중에서 선정하여 작품의 맛을 보여주는 큰 프로젝트의 결과물로서 현재 진행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세 권에 나온 저자들의 시 몇 소절만으로 일반화를 하거나 몇 단어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만, 유금과 이덕무, 정약용 선생의 삶과 이들의 시 몇 구절에서 보이는 '슬픔'의 감정이 주는, 혹은 제 안에 머무는 이미지는 모두 같은 '슬픔'의 감정이 아니었네요. 이 세 사람의 시에서 보이는 '슬픔'은 그 슬픔의 결이 서로 다르더라는 겁니다.

 

 

유금의 시로부터는 시인의 맑고 정갈한 인품이 느껴지면서도, 때론 자신의 출신과 가난에 대한 힘겨움의 감정, 극복할 길 없는 '슬픔'의 감정이 가득 느껴집니다. 바닥에 주저앉기 직전의 그런 절망감 같은 것들말이죠. '깊은 절망감이 담긴 슬픔'  

 

이덕무의 시 몇 구절을 읽으면 극심한 가난과 신분이라는 벽에 부딪히는 현실에서도 '의연한 느낌의 슬픔'이란게 있습니다.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수리도 못하고 비를 맞으며 지내도 책을 읽고, 자조하면서도 때론 유머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 집안으로 바람이 들어와 <논어> 한 권을 뽑아 바람막이를 하고, <한서>로 이불을 하면서 스스로 멋진 생각이라 자화자찬하는 이가 바로 간서치 이덕무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 가지고 있던 책 <맹자>를 팔아 배부르게 밥을 지어먹고 친구 유득공에게 자랑하던 인물. 역시 오래 굶고 있던 유득공은 한 술을 더 떠 자신의 <춘추좌씨전>을 팔아 남은 돈으로 이덕무에게 술을 대접하죠. 그러면서 '맹자가 자신에게 밥을 지어 먹이고, 좌구명(左丘明)이 손수 술을 따라 권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이덕무의 시와 산문에서 받은 인상은 의연함이 함께하는 슬픔이나 여기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온기가 느껴진다는 거지요.

 

정약용의 시와 산문에서는 아무래도 20년에 가까운 유배생활에서 묻어나는 시인의 체험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목으로 집안 가족들이 참수를 당하고, 유배를 가는 극한 삶의 조건과 그로인해 가족과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시인의 '그리움과 회한,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담긴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10대 시절에 결혼하여 결혼 60주년을 맞는 바로 그 날, 가족과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한 정약용 선생의 삶에서도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비애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중년의 나이가 되다보니 산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혼자 밤에 깨어있거나, 정신없이 들어찬 퇴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슬픔의 감정이 몰려오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그래도 이덕무의 '슬픔'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는 유금이나 정약용 선생의 '슬픔'에 공감하거나 위안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떠올리는 슬픔은 삶 속에서 스스로 위안을 찾고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이덕무의 '슬픔'인 것 같습니다. 이덕무의 '슬픔'이 떠오르고, 그 슬픔이 위안도 되고 힘이 되기도 합니다.

 

 

옛 사람들의 시를 보는데 위안을 얻을지는 몰랐습니다.

 

2019년에는 또 다른 고전 시들을 만나보길 기대합니다.

옛 시인들의 시와 산문을 번역한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하세요.

네이버 서평쓰기 카페 ‘원탁의 서평단’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카페의 결성 취지는 인문사회/과학분야의 좋은 도서를 꼼꼼히 읽고,

서평 쓰기 연습과 향상을 꾀하는 모임입니다.

비공개였던 카페를 공개로 전환하여 보다 진지하게 서평 쓰기에 관심있는 분들을 모아 글쓰기하는 모임으로 만들어나가려고 합니다.

독서와 글쓰기(서평)에 관심있는 분들의 가입을 환영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서평 이벤트에 지원/참여가 가능한 출판사의 연락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https://cafe.naver.com/bookknights





#원탁의서평단 #네이버카페 #서평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