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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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민자들》

(원제: Die Ausgewanderten)

W.G. 제발트(W.G. Sebald) 지음 | 이재영 옮김 | [창비]

 



역사는 실증적인 방법에 따라 만들어진 기억이고, 신화적 시간을 폐기하는 지적인 순수 담론이다. 그리고 사진은 확실하지만 덧없는 증언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던 롤랑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펼친 《밝은 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 구절이다.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가 《이민자들》 읽은 남게된 여운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제발트가 생전에 남겼다는 4권의 소설집 권으로서 《이민자들》 접하게 되었는데, 권만으로도 나는 이미 제발트의 독자 되어버린 듯하다.

 

《이민자들》 4개의 짧은 소설을 담고있다.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제목이 암시하듯, 어떤 이유로든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인 제발트가 주목하고 있는 이민자들은 독일계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가혹한 인종말살 정책을 펼쳤던 조상의 후손으로서, 독일인 제발트가 담고 있는 주제는 매우 드문 시도라고 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갔던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어느 일본인이 이토록 절제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러한 시도가 얼마나 드문 것인지 이해가 것이다. 다만 제발트는 자신의 조상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밝히지는 않는다. 제발트는 살아남은 이들’, 특히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화자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속에서 여러 사진을 놓고 사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시도라고 했다. 이번에 읽은 소설 《이민자들》또한 제발트가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실제 사진을 통해 이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형태를 띤다. 그러므로 옮긴이가 언급한바와 같이 소설은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제발트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통해 소설로 재구성했다면, 여기에서는 많은 이들이 나의 이야기 받아들일 있는 보편성을 찾아볼 있을 것이다. ‘진실 여부 문제보다 우리는 기억들을 잊지 않고 다음 세대로 들려줄 있는지가 중요해보이는 이유다. 바르트가 사진은 확실하지만 덧없는 증언이라고 , 사진은 사람이 정말로 존재했다 놀라운 사실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보다 확실하게는 지구 멸망의 시점에) 갖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제발트는 실존 인물들 혹은 풍경을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면서 바르트가 떠올렸던 덧없음 마찬가지로 곱씹었을 것이다.

 

 

사자(死者) 귀환’,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고통】

 

소설의 단편 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주인공들은 공교롭게도 자살한 인물이다. 헨리 쎌윈 박사는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이민자로,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다 영국에 도착하여 정착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파울 베라이터는 조부모 명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3/4 아리아인, 1/4만이 유대인) 젊은 시절 공부를 마치고 교사일을 시작하자마자 쫒겨난 경험이 있다. 반면 아리아인의 피가 섞여 있었기에 6 기갑포병대에서 복무해야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야기 모두 유대인으로서 고향을 잃은이방인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 가해자도 아닌 이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했을까?

 

헨리 쎌윈 박사는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공장주의 딸과 결혼하여 평생동안 넉넉하게 살았지만, 자신의 혈통때문인지 부인과의 관계는 점점 소홀해졌다. 쎌윈 박사의 고백대로 시간이 지날 수록 향수병이 심해진다는 그는 정원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점점 고독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7살에 리투아니아의 마을에서 이민길에 오른 그였지만 봤던 풍경의 기억은 쎌윈 박사의 몸에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젊은 시절 깊은 우정을 나눴던 베른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의 돌연한 사망소식은 쎌윈 박사의 기억에서 평생 지울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방인으로서 타지에 오래 살았지만 어린 시절 각인된 환경을 그리워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인 같다. ‘기억이라는 것은 어쩌면 본래 고독한 존재인 인간이 기댈 있는 버팀목인지도 모른다. 리투아니아의 고향 마을도, 요한네스 네겔리도 결국은 쎌윈 박사의 기억으로 들어온 대상들이기에 쎌윈 박사의 고통은 단순한 고향 상실의 문제는 아닐 터이다. ‘관계의 존재 인간이 고독하게 살아갈 수는 있어도, 인간이 의지하는 무엇에 대해 인위적인 혹은 불가항력적인 단절 개입한다면 삶의 의미를 잃게될 수도 있지 않을까. 쎌윈 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불가항력의 단절로 부유하던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소울메이트와 같았던 사람이 돌연 자신의 삶에서 사라려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살아남았지만, 자신을 붙들어주는 끈이 끊어져 세상과의 모든 연결 고리가 사라진 순간 살아남은 이들은 고통스런 기억 기억의 고통 평생 마주해야하는 운명을 지닌다.  

 

쎌윈 박사의 사망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는 72 만에 빙하에서 요한네스 네겔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이에 화자는 사자(死者)들은 이렇게 되돌아 온다라고 말한다. 쎌윈 박사는 죽음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고, 반대로 네겔리는 죽음의 장소였던 빙하라는 심연으로부터 다시 올라오는 현상은 기억 매개로 해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사자(死者) 귀환모티브는 파울 베라이터에서도 찾아볼 있다. 파울은 화자의 초등학교 은사인데, 나치의 등장으로 실향민이 독일인이다. 파울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의 화자에게 전해주는 란다우 부인이 화자에게 사진 앨범을 보여주자, 사람의 기억 통해 망자들이 소환되고 있다.

 

앨범에 담긴 사진들을 보다보면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같기도 했고, 우리가 그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같기도 했다.”(61)

 

《밝은 방》에서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사망 직후 어머니의 어릴 모습이 담겨있는 온실 사진을 보며 사진의 본질을 거듭 생각했고, 자신이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느끼기도 한다. ‘카메라 앞에, 그리고 사진사 앞에 그리고 , 나의 어머니가 정말로 있었고, 어린이가 바로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 깨닫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도 란다우 부인의 앨범을 보면서 어릴 기억하던 은사의 모습과 자신이 모르던 은사의 모습을 맞춰가며 사람의 존재를 다시 회상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림 자체에 시간의 흐름을 수반하고 있는 그림과 달리 순간 포착된 사진이 오랜 시간 뒤에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힘일 터이다. 다시 말해 살아남은 들은 기억을 통해 고통 불러오고, 이를 다시 고통스럽게 기억해야하는 자들이다.  

 

 

【이민자들의 잃어버린 고향 이타카(Ithaca)

 

소설이 담고 있는 편의 소설 중에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나오는 아델바르트는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니다. 하지만 산업화되어버린 삶의 조건 속에서 실업으로 고향을 상실한 인물이다. 아델바르트는 소설 화자 어머니의 외삼촌이었다. 아델바르트는 실업 ,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유대인 은행가의 집사로 일했다. 화자가 아델바르트의 삶을 조사하고 찾아가면서 알게되는 사실 중에 아델바르트의 말년의 모습에 특히 주목해본다. 그는 집사 생활에서 은퇴한 자진해서 뉴욕 () 이타카 시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가 말년을 보내기로 한다. 특히 50년대 초에 미국에서 유행하던 전기충격 요법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과도한 충격요법으로 몸과 정신이 망가져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아델바르트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화자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은퇴한 정신과 의사인 에이브럼스키 박사였다. 에이브럼스키 박사가 기억하고 있는 아델바르트는 극심한 우울증을 비롯하여, 이와 통상적으로 함께하는 육체적인 퇴락현상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박사의 말로는 아델바르트가 거듭 세상에 작별인사를 하는 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이미 나는 아델바르트 씨의 그런 태도가 실은 자신의 사고능력과 기억능력을 가능한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말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143)

 

말하자면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달리 자신의 정신을 의도적으로 파괴 또는 정화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1950년대 정신치료를 위해 전기 요법을 사용한 목적 또한 전기충격을 통해 일종의 기억 저장장치로 보았던 뇌를 포맷하기 위함이었던 것임을 염두해 둔다면 좀더 이해가 간다. 아델바르트가 기꺼이무시무시한 정신충격 요법을 받아들였는지 소설 속에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다. 가지 짐작해본다면, 아델바르트가 유대인 은행가 코즈모의 집사로 일하던 세계 여러 곳을 함께 여행하며 보았던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산업화의 진행으로 파괴되어버린 인간다움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은 단서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어느 나라에 가든, 지구상의 어디를 가든 다를 바가 없다. 자동차와 부띠끄 상업, 그리고 온갖 방식으로 점점 확산되어가는 파괴중독증으로 인해 살아남은 곳이 없다.”(147)

 

결국 아델바르트는 실업으로 고향을 잃게된, 후기 산업사회의 디아스포라라고 있다. 상황이 유대인 가문의 집사라는 설정으로 접목이 되어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항상 함께 다니던 주인 코즈모 또한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인물은 결국 각자 타지에서 삶을 마감했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아델바르트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던 정신병원이 있던 곳이 뉴욕 () 이타카(Ithaca)라는 장소이다. 이타카는 사실 그리스에 있는 섬의 이름이면서, 호메로스의 저작 《오딧세이》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여 페넬로페와의 신혼생활을 중단하고 전쟁에 참전한다. 그는10 동안 전장에서 보내고, ‘트로이의 목마계책으로 승리한 귀향길에 올랐지만 바다의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서 다시 10 지중해를 해매는 운명을 맞는다. 이런 맥락을 고려해보면 제발트가 설정해둔 소설 속의 공간 이타카는 타지에서 떠도는 이들,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고향의 은유로서 사용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델바르트의 비망록을 해독하며 그의 자취를 따라가보는 화자는 그리스의 이타카 섬을 지나는 대목도 잠시 나오는 , 부분도 잃어버린 고향에 대해 다시금 환기시키는 장치로 이해된다.

 

아델바르트가 마지막으로 전기충격 요법을 받았던 , 진료시간을 어긴 그를 찾아간 에이브럼스키 박사에게 창밖을 바라보던 아델바르트가 해준 마디는 상당한 여운을 준다.

 

나비 잡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무심결에 잊어버린 모양입니다.(146)

 

내게 나비 잡는 사람 이미지는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서, 그리고 보호받고 지켜야될 존재 혹은 가치로 다가온다. 인간다움이 존재할 있는 고향을 암시할 같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전세계가 획일화되고, 파괴되어가는 인간의 조건 속에서 현대인들은 모두 고향을 상실한 존재와 다름 없다는 메시지이기도 같다. 그러므로 이는 상징적이긴 하지만 아델바르트가 정신병원이 있는 이타카 이유이기도 것이다.

 

 

【트라우마의 공간, 그리고 망각에 대한 저항행위들】

  

번째 소설 막스 페르버 화자는 스위스 인으로 영국에 이민가기로 하고 맨체스터에 도착한다. 여기서 우연히 만난 화가가 바로 막스 페르버였다. 페르버는 나치를 피해 실향민이 유대인으로, 페르버의 부모는 나치의 유대인 강제 이송 열차를 타고,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 페르버가 기억하기 싫어하는 고통 중에는 나치에 의해 부모님이 살해된 후에 소식을 들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페르버가 받은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는 평생을 안고 살아야하는 숙명이 되었다.

 

이따금 나를 엄습하는 단편적인 기억의 영상들은 차라리 강박관념들이라고 해야 것야. 내게 떠오르는 독일이란, 머릿속의 광상(狂想) 같은 것이네. (…) 내게 독일인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무시무시한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아야 하네.”(229)

 

페르버의 강박관념 결국 그의 몸에 반복적으로 각인되어 트라우마가 되었을 터이다. 몸에 각인되어 지울 없는 상처. 그건 페르버가 맨체스터라는 공간을 보자마자 몸이 반응했던 이유이기도 것이다. 다시 말해, 맨체스터라는 공간은 페르버라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환기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세계로 확산된 산업화의 발상지였지만 어느덧 무연탄색으로 시커멓게 덮여버린 도시, 만성적인 가난과 몰락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도시로서 맨체스터는 페르버가 앞으로 줄곧 살게 도시였다. 산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원형극장의 바닥처럼 보이는 도시는 가라앉고 있는 도시 이미지를 주면서도 다른 심연(abyss) 이미지를 암시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헨리 쎌윈 박사에서 등산안내인 요하네스 네겔리가 추락했던 빙하 이미지와 상통한다. 네겔리의 빙하도 역시 죽음을 마주하는 공간이자 사자가 귀환하는 공간로서의 이미지를 준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서도 아델바르트가 죽음을 맞이하는 이타카의 정신병원 바로 막스 페르버 맨체스터와 같이, 죽음을 맞이하고 망자를 소환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소설의 어느 주인공도 결국 자신들이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자신만의 심연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가지 주목해볼만한 부분은 파울 베라이터에서 파울이 자살하는 공간이 철로 라는 것과, ‘막스 페르버 맨체스터를 바라볼 느꼈던 장면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살행위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하나의 행위로 전달하는 메시지의 성격이 있다고 본다. 일종의 사회적 메시지인데, 파울이 누웠던 철로의 공간은 어쩌면 과거에 수많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날랐던 기차가 가던 길의 모습과 오버랩되고 있다는 말이다. 제발트에 따르면 철도에서 끝을 보다라는 의미가 원래 철도에서 평생 직업을 찾다라는 의미이긴 하지만, 독자로서 나에게는 철로가 파울에게는 돌아오지 못한 가족의 운명을 환기해주는 기호로 보인다는 점이다. 파울은 어쩌면 자신의 일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던 상처와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자신의 일부가 아리아인이라는 이유로 기갑포병대에서 나치를 위해 일했던 자신을 속죄하기 위한 행위로서 철로에 누웠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파울의 철로라는 공간 또한 헨리 쎌윈 박사 요한네스 네겔리의 빙하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서 아델바르트의 이타카 정신병원 함께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던 사람이 죽음 마주하고, ‘사자의 귀환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보아도 무방할 같다.   

 

페르버가 몰락하고 있던 맨체스터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살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밤낮없이 나오던 굴뚝의 연기는 전쟁을 경험한 페르버가 전쟁터에서 불타오르던 인간성 몰락과 문명 파괴의 모습, 유대인 수용소에서 끊임없이 시체를 태우던 굴뚝의 풍경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몰락하는 거대한 원형극장처럼 생긴 맨체스터 역시 빙하’, ‘철로그리고 이타카의 정신병원 일맥상통하는 구조를 보인다고 있겠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페르버가 폐기종으로 죽어가는 상황도 결국 밤낮없이 나오던 굴뚝의 연기로 몸에 또다른 상처에 다름 아닐 것이다.

 

독일인으로서 저자 제발트는 소설의 여러군데에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소설 인물의 입을 통해 소설 속에 개입하는 부분이 있다. 많은 독일인들이 선조가 했던 일들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게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은폐를 하려고 했는지를 지적하는 대목이다.

 

파괴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65)  

 

말은 파울 베라이터의 말년에 대해 이야기 해주던 란다우 부인의 지적이다. 평범한 독일인들도 전후 자신 또는 선조의 행위에 대해 침묵하고 은폐하려 했던 정황을 독일인의 입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살과 함께 침묵 사회적 메시지를 주는 행위로서 이해될 있다. 결국 독일인 후손들의 침묵 선조의 행위와 마찬가지인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제발트의 비판인 것이다. 이러한 제발트의 개입은 막스 페르버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화자는 페르버의 가족이 묻힌 유대인 공동묘지를 방문하는데, 대목에서 화자는 저자의 생각을 직접 개입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독일인들의 정신적 빈곤과 기억상실, 그리고 과거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린 그들의 교묘함으로 인해 머리와 신경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또렷하게 의식할 있었다.”(287)

 

화자는 유대인 공동묘지를 방문한 , 묘비에 새겨져있는 사자(死者)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읽고 있다. 행위는 보다 적극적으로 망자를 소환하는 의식이기도하고, 망각하고자 혹은 은폐하고자하는 동료 독일인들에 전하는 제발트의 메시지이자, 제발트가 요청하는 집단적인 망각에 대한 저항 행위일 것이다.

   

책을 덮어도 제발트가 담담하게 전해주는 이야기들의 여운에는 나를 위로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제발트가 실제로 관심을 갖고 만나고 사진을 수집하고,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은 모두 한때 분명히 존재했던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들 모두 죽었으며, 이들은 모두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고향을 상실한 살아갔던 사람들이었다. 이유가 나치에 의해서든, 산업사회가 소외시킨 결과였든 간에 말이다. 제발트는 실존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설 속의 화자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이런 노력 속에는 평범하지만 삶을 살았던 이들의 아픔에 주목하였기에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 허우적대며 부유하는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 모두는 이타카라는 고향을 상실한 지구의 이방인이자 이민자일 것이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의 고향은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이미 어디에도 없는 으로서의 유토피아로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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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 - 넛지부터 팃포탯까지, 심리와 세상을 꿰뚫는 행동경제학
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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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

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인간의 삶이란 인류의 등장 이래 원래부터 팍팍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도면 괜찮은 것인지 혹은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볼 때가 있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무난히 헤처나가려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부수적으로 알아야만 것만 같다. 모든 기술을 뒤늦게 접하고 언제나 따라가기 바쁜 나는 아날로그 주의자라고 변명은 하지만, 첨단 기술에 익숙한 이들의 삶을 보아도 현대인으로서의 삶은 여전히 팍팍해보인다. 인간이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거쳐야하는 통과의례를 제대로 거치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다. 학업, 취직과 결혼, 육아 등등의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과 의식주와 같은 삶의 기본 양식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작은 단위의 개개인에서부터 국가단위의 삶을 지배하는 경제활동이 자리잡고 있다. 경제는 공부하기 어렵다거나 싫다고 하여 담을 쌓고 사회를 수는 없는 분야이다. 경제는 이제 현대인이 어느 정도는 알아야할 상식과도 같은 분야가 되었다. 심지어 무인도에서 혼자 사냥을 하며 먹고 산다고 해도 결국 희소 자원 얻을 있는 보상(음식), 식량을 구하는 효율성을 따지는 이상, 그리고 최소한 사람 이상 살아가야 하는 경우, 부족한 자원의 분배와 교환 활동이 있는 이상 우리의 삶은 경제활동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서두가 이렇게 길어진 것은 현직 경제 분야 기자가 대중에게 쉽게 소개하는 경제서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다. 이완배 기자가 저술한 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은 독자들에게 주류 경제학과 다른 인간관에 기반한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를 소개한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을 이기적인 결정을 하는 존재로 보는 주류 경제학과 다른 인간관을 바탕으로 사회의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분야다. 기존의 주류 경제학에 대항하는 비교적 새로운 시도라고 이해된다. 무엇보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과의 긴밀한 연계와 학제간 연구를 통해 자리잡고 있는 분야로 보인다. 곧 인간이 언제나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가정에서 벗어나 인간은 실수도 할 수 있고, 비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주류 경제학과 다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기만한 존재가 아니라 이타적인 존재이므로 타인을 위해 손해를 보기도 하고, 집단을 위해 개인이 손해를 보면서도 협동을 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본문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여러 경제학 이론은 복잡한 수식을 배제한 심리학 이론처럼 느껴진다. 최근 생물의 진화에 대해 현대 생물학이 제시하는 다양한 담론 중에서 인간의 이타성에 대한 부분이 주목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행동경제학도 이렇게 최근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경제학과 긴밀한 학제간 연구를 통해 탄생한 경제분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다양한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 대한 경제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우선 책의 전반을 바라볼 때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인간이 정말 복잡한 존재라는 점이다. 심리학과의 학제간 연구로 자리를 잡은 행동경제학이 제시하는 연구들은 복잡해지는 인간 조건을 중심으로 반응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현상론이라는 인상을 처음 주었다. 물론 저자가 복잡한 경제학의 수식과 분석론을 걷어내고 대중을 위해 쉽게 정리한 사항만으로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무모하거나 턱없이 부족해보일 수 있겠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점은 인간에 대한 관점을 주류 경제학과 달리 좀더 유연하게 두고 있다는 점이다. 스놉 효과처럼 인간이 사치품을 구입하는 행위는 빈부격차와 계급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나오기 힘든 설명일 것이다. 차별성(또는 개성)은 오히려 자본주의적인 개념에서 발명된 인간의 욕망에 기인할 것이다. 빈부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놉 효과는 더욱 강력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아울러 동수저, 흙수저 사람들이 금수저의 소비를 욕망하는 사이 우리의 삶은 더욱 팍팍해지지 않을까. 자아 고갈 이론의 교훈이 전해주듯,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는데 물리적인 에너지가 많이 들긴 하지만 반복 훈력을 통해 통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순환오류처럼 느껴지지만, 자본주의는 계급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욕망하라는 메시지는 보낸다. 흙수저들은 자본주의 구조가 끊임없이 개개인에게 강요하는 차별성을 견뎌내기 위해 인내하고 통제력을 발위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 흙수저들의 삶이 팍팍해지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라는 관점의 연장선에서,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 복잡함에는 타고난 본성의 측면 말고도 인간이 속한 집단이나 살고 있는 환경의 영향 또한 지배적이기도 하다. 곧 인간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들도 환경만 조성이 되면 타인에게 잔인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루시퍼 이펙트의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연구처럼, 인간은 어떤 규정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현대 심리학의 연구에 힘입은 인간에 대한 충격적인 이해는 우리가 어떤 사회, 집단에서 마법의 완장을 차게 되면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 점은 불법주차한 차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있을 때 다른 결과를 줄 수 있다는 범죄의 경제학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교훈을 준다. 나아가 프리모 레비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처음 겪은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폭력, 프란츠 파농이 이야기한 수평 폭력은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일깨워 준다. 분명 심리학의 영향을 긴밀하게 주고 받아 등장한 행동경제학은 보다 단순하게 인간을 바라보았던 주류 경제학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저자의 소개대로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이타성 가진 존재이며 협동하는 존재라고 바라본다. 결국 경제학이 다른 종류로 나뉜다면 이는 각각이 갖는 인간관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이성에만 관심을 두던 주류경제학에 인간의 감성, 심리적인 요인을 추가로 고려하여 주류 경제학과의 차별성을 내세운다. 여기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지극히 복잡한 인간 개체와 인간 사회의 모습을 고려해볼 때다. 이성에 주로 주목하던 주류경제학이나 여기에 인간의 심리를 고려한 행동경제학은 크게 보아 배다른 형제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다시말하면 경제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관찰할 고려할 변수(parameter) 하나 추가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문외한이기에 용감하게(?)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나아가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심리라는 추가 변수를 도입함으로써 사회경제 현상을 관찰하고 결론을 내리기 위한 어떤 집단심리의 전형 가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당수가 입으면 다시 벗기 힘들다는 꽃보다 화려한 등산복 입고 둘레길을 걸으시는 부모님들을 떠올려보자. 행동경제학은 이런 현상에 문장으로 결론을 있는 집단의 심리를 이미 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사회현상은 분명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고 전제한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한편 행동경제학이 심리학과 긴밀한 교류를 통해 발전되는 것은 결국 기업 마케팅에 매우 유용할 같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 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에서 쓸모 누리는 주체가 팍팍하게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이 아니라 기업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분명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행동경제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좀더 넓혀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소비자의 집단심리를 관찰하고, 기업의 판매전략을 세우는데 오히려 유용한학문은 아닐런지. 인간의 심리를 고려한 게임 이론 기반한 경제학을 알면 우리는 보다 주체적으로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통상적으로 보았을 , 행동경제학자들이 분석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 내지 인간 집단의 대상 그리고 혜택을 받을 있는 대상이 빈곤층 아닐 같다는 점이다. 과연 행동경제학은 빈곤층의 삶에 무기가 되고 쓸모를 전해줄 있을까? 집단의 소비 심리에서, 명품에 집착하는 이들을 다룬 스놉효과 베블런 효과 대상으로 빈곤층 기본적으로 배제될 것이다. 이는 빈곤층과 무관한 현상일 것이다. 마시멜로 테스트처럼 개개인의 노력이 인생을 바꾸는 것보다 부모를 만나는 것이 성공에 유리하다라는 다소 허망한 결론을 알게된다고 우리의 삶에 무기로 사용할 있는 점이 있을까는 의구심을 갖게된다.  앞서 언급한 자아 고갈 이론처럼 자본주의가 개개인에게 차별성 강요하는 메시지(혹은 광고) 끊임없이 보내고 있을 ,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부단히 노오력해야만 한다. 어찌보면 행동경제학은 우리에게 팍팍한 삶을 벗어날 방도를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다. 행동경제학은 우리에게 무기를 주는 대신 현재 놓여있는 문제를 개개인이 해결하도록, ‘해결책의 개인화 맞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행동경제학은 팍팍한 삶을 벗어날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분야는 아닌 같다.  

 

 

행동경제학은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실수를 하고, 사기를 당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됨을 알려준다. 아무리 천재적인 경제학자든, 철학자든, 심리학자든 이들의 연구는 인간 개체 인간 사회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결론을 얻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들이 제시하는 각종 이론들은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인류가 쌓아온 지혜의 보고에 이미 내재하던 인간관 간단히 모형화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말로 정리한 것은 아닐까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현대인의 삶은 과거보다 복잡해지고 다양화해졌으며, 첨단기술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소재의 등장과 이를 둘러싼 인간 사회의 동력학 관찰하고 분석하지만,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그리 복잡하거나 새롭지는 않은 같다. ‘하늘 아래 새로운 없다 말처럼, 인류가 관찰하고 경험해온 지혜를 그렇게 많은 현대의 경제학자들이, 지구 역사 이래 최초로 제시하는 이론일 것인가. 그렇다고 믿기는 힘들다. 경제 이론의 결론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이미 오랜 문학작품과 철학서에서 발견할 있을 같다. 그러므로 내가 행동경제학을 좀더 알게되어 저자의 말대로 삶이 보다 나아질 있는지, 아니면 기업의 매출 증대에 더욱 도움이 있는 학문인지는 앞으로 좀더 지켜보고 판단해야할 숙제가 것이다.

 

 

 

#네이버원탁의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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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 시인, 호색한, 전쟁광 걸작 논픽션 15
루시 휴스핼릿 지음, 장문석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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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시인, 호색한, 전쟁광》

(원제: The Pike: Gabrielle D’annunzio, Poet, Seducer, and Preacher of War)

루시 휴스핼릿(Lucy Hughes-Hallett) 지음 | 장문석 옮김 | [글항아리]

 

 

 

 

 

 

[1] 단눈치오는 어떤 사람인가?

 

사람의 이면을 온전히 글로 묘사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단눈치오와 같은 인물에게 가지 키워드 만으로 인물을 특정짓는다는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한다. 단눈치오는 17 시인으로 자신을 먼저 세상에 내놓았다. 단테, 페트라르카, 레오파르디를 위대한 이탈리아의 시인으로 꼽았던 단눈치오는 16 이미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편지를 썼던 언어의 귀재이기도 했다. 반면 여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세상에 있는 모든 재화를 소비할 것처럼 게걸스럽게 가산을 탕진하며 인간으로서 누릴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한 사람이기도 했다.

 

저자는 단눈치오의 다채롭고 복잡한 명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는 성적으로 난잡한 연인이자 고급스런 탐미주의자, 호전적인 민족주의자, 이탈리아 건축물의 복원 캠페인에 나서는 호고주의자, 최초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창공으로 비상했을 뿐만 아니라 연대적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든 크고 소음이 심한 자동차를 타고 토스카나의 길들을 누빈 근대성의 찬미자였다.”(352)

 

진술에 단눈치오라는 인물의 가지 주요 특징이 간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타인의 제안에 거절을 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던 인물이 삶의 모험에는 불나방처럼 단호히 자신을 던져 넣는 모습은 자체로 매우 분열적이다. 저자는 부단하고 분열적이기까지 인물의 특징을 책에서 크게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자연과 신화를 서정적으로 노래하는안전한 단눈치오와 자신을 따르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세상을 피로 흠뻑 적시라고 요구하며 위험한 애국주의와 영광의 이상을 내세우고 강탈 행위의 서막을 열어젖힌위험한 전쟁광 단눈치오. 가지 상반된 페르소나는 분명 사람의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시기는 사람들에게 어느 노선을 취할 것인지 강요하곤 한다. 종교 전쟁에서는 신교의 편에 것인지 아니면 구교의 편에 것인지, 교황과 왕권의 대결에서는 교황의 편에 것인지 아니면 왕권을 지지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혹은 냉전의 시기에 자본주의의 편에 것인지, 공산주의의 편에 것인지를 개개인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단눈치오는 이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잠시 어느 노선을 지지한 적은 있어도, 어느 편의 선봉에 서서 이들의 명령을 받는 일은 거부했다. “내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나는 일용한 양식을 포기할 것이다.”(543) 단눈치오라는 인물은 이처럼 혼돈과 폭력의 세기에 스스로 특정 노선에 한정되지 않는 특이점으로서 끊임없이 부유했던 인물이었다. “나는 개인주의자이고 그렇게 남을 겁니다. 철저하고도 극단적으로 말이지요.”(342) 사회주의를 찬성했다가 이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 단눈치오는 본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어느 노선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단눈치오는 17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한 , 자신이 말을 타다 낙마해서 요절했다는 가짜뉴스를 익명으로 신문사에 투고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유명인사로 만드는 자기 홍보의 달인이기도 했다. 단눈치오가 피우메로 입성하여 권력을 잡은 가장 먼저 자신의 보도 부서 만든 일은 그에게 지극히 당연한 절차였다. 단눈치오에게 가장 우선하는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었다. 단눈치오의 행동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동인은 모든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구심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단눈치오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세심한 신경을 쓰거나 자신의 연인이 어떤 옷을 입는지 관여하고, 값비싼 여러 수집품들로 실내를 장식하는 행동을 이해할 있다. 나아가 단눈치오가 탐미주의자이면서 지극한 쾌락주의자였다는 저자의 평가 또한 수긍이 것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탁발승'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아. 그저 내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야."(824면)

단눈치오는 1년 남짓한 피우메 정부 시절 이후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의 마지막 은둔처 '비토리알레'에서 말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는 특히 무솔리니의 감시와 선물을 동시에 받게 된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지는 않는다. 반면 무솔리니는 단눈치오를 여러 번 방문하여 단눈치오가 무솔리니를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기위해 노력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러한 기회를 철저히 이용했다. 사실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단눈치오는 자신이 원하는 일이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유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는지 모른다. 단눈치오는 말년에 집에서 은둔한 채 44권에 달하는 전집 출간 작업을 하며 비교적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단눈치오는 비행기가 세상에 나온지 채 15년도 안된 시기에 이미 비행에 매료된 인물이기도 했다. 심지어 대공포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의 상공을 날아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선전물을 투하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일에 스스로 극적인 배역을 선택하여 맡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배역을 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어떤 욕구도 없었다. '삶이란 목표를 향해 던져져야 할 작살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오직 다음 번의 예정된 출격이었고, 그것만이 '전부'였다."(532면) 이 책의 원제 <The Pike>가 암시하듯,  '' 또는 '작살'의 이미지는 단눈치오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사 또는 궁수의 이미지)이자 본인 스스로를 창의 목표물(희생자) 곧 '순교자'(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이미지)로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 루시 휴스핼릿이 단눈치오에 대한 평전을 기획하면서 떠올린 주제 이미지가 바로 창과 순교자가 아닐까.

 

 

[2] 단눈치오의 시대

 

단눈치오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단눈치오가 태어나기 직전인 1861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공식 출범했다. 시기의 이탈리아는 통일 이탈리아에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구심점 중의 하나가 국왕을 중심으로 힘을 모을 있는 강력한 민족주의였다. 단눈치오가 젊은 시절 민족주의에 그토록 경도되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리발디의 추종자가 이탈리아가 위대한 민족으로서의 지위를 입증하려면 피의세례 필요하다 외쳤듯이 외곬수적인 민족주의는 구성원의 희생을 예비하며, 이들의 요구한다. 특히 19세기 , 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통해 이탈리아의 호전적인 민족주의가 힘을 크게 얻은 정황을 휴스핼릿은 묘사하고 있으며, 단눈치오의 시대에 나라 전체가‘거대한 전쟁’으로 향해가는 배경을 포착하여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단눈치오의 피우메 정부 시절 이후, 그리고 1 대전이 끝난 이탈리아 내부는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였다. 정부와 군대에 대한 분노와 불신으로 이탈리아는 분열 양상을 보였으며, 정치적 불안 증세가 심화되었다. 재정침체와 전쟁으로 국채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실업자가 넘쳐나던 국면이었다. 이렇게 사회가 아노미 상태에 있던 상황을 탈출할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것이 파시즘이었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할 있다. 파시즘의 지도자였던 인물 이탈로 발보의 견해에 따르면 파시즘은 전후 남은 분노를 표출할 대안적 출구를 제공하였으며, 이탈리아를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구했다”(635)라고 하며 파시즘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의 출현은 양상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파시즘과 나치즘이 공유한다. 독일의 경우도 1 대전 이후 국내 정치경제적 불안 요소가 만연해 있던 위기상황에서 국민들의 절망과 분노를 표출할 기회를 마련했다.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구현해내었듯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도 파시즘의 강령을 비롯한 많은 부분을 가져다 충실히 활용했다. 여기에서 나치와 파시스트들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단눈치오라는 사실이다.

 

책은 놀라운 초인’(비호감이긴 하지만) 일대기를 조명한 책이면서 동시에 인물이 살았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세계사의 부분도 함께 아우르고 있다. 단눈치오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세기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한 발달을 가져온 기술의 혜택을 받아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던시기였다. 기차를 타고 장거리를 여행하거나, 전신을 이용하며 대서양 너머로 소식을 전하고, 커다란 증기선을 이용하여 대서양을 건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여러 차례 미래주의 운동 주목하고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1902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는 프랑스의 < 피가로> 1면에  미래주의 선언 게재했다. 마리네티는 선언을 통해 새로운 세기를 열며 산업혁명의 성공적인 결과물, 특히  매끈한 금속, 강력한 기계,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강철 철로를 달리는 열차 속에서, 강물과 바닷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속에서, 그리고 노동과 부를 낳는 모든 기계 속에서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잉태되고 있다.(420) 미래주의자들의 이러한 표현들에서 퇴폐주의적이고 상징주의적인 움직임은 분명히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무모한 젊은이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마리네티가 단눈치오와 만날 있었던 접점 당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자동차와 비행기(모두 강력한 엔진과 빠른 속도를 상징한다) 대한 관심에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시대의 분위기와 정서는 많은 지식인들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셀 프루스트나 앙리 베르그송 등도 에어쇼를 보고 감명을 받거나 에어쇼를 보기위해 여행을 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미래주의자들의 주장을 보면 이들의 미래 산업혁명의 시대가 낳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발명-개념으로 이해된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비판은 있을지언정, 다가오지 않은 미래, 특히 인간이 이룩할 성취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느껴진다. 이러한 무모함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리네티가 피우메 시절 단눈치오 곁을 떠난 이유도 결국 사람이 생각하는 미래 접근하는 태도 또는 관점에 메워질 없는 간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눈치오는 자신의 영광 위해 오히려 지극히 철저하게 현재를 살고’, ‘현재에 집착했던인물이었다면, 마리네티는 단눈치오처럼 몽상가였지만 미래주의자들의 무모함과 산업기술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기술문명의 힘과 잠재성은 오히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보여주던 폭력성과 호전성에 부합했던 같다. 그러므로 분명 단눈치오와 마리네티 사이에 미래 보는 관점에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같다. 현실정치에 기반을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현재를 기반으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 있었다면, 단눈치오는 어쩌면 미래에 무관심한, 오로지 자신의 현재적 관심을 유지하고 현재를 향유하는데 보다 근본적인 관심이 있었던 같다. 물론 전쟁 정화 수단으로 보고 전쟁이 유럽의 위생학이라고 주장한 마리네티의 견해에 단눈치오는 분명히 공감을 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눈치오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우선 전제가 되어야하며, 이것이 마리네티의 공감을 얻지 못했을 같다.

 

19세기 후반 통일 이탈리아가 강력한 구심점을 민족주의로부터 구했다면, 20세기 들어 호전적인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평화를 지향하던 사회주의가 대척점에서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했던 같다. 저자 휴스헬릿은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라틴민족 우수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던 호전주의자들과, 신중하고 평화를 지향하던 사회주의자와의 대립이 심심치않게 존재하며 꿈틀대던 당대의 이탈리아를 세심하게 그려내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민족주의 사회주의의 대립 구도는 급속하게 균형을 잃게 된다. 파시스트 정권은 공갈협박과 폭력을 통해 통해 등장하여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제거하며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황도 분명히 확인할 있었다.

 

단눈치오가 살았던 시대는‘조국’이라는 절대 기호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하여금 개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19세기가 낳은 신낭만주의 성향의 젊은 시인이 점차 민주주의 정부에 도전하는 급진주의적 우파 반란선동가로 변모하는 모습을 묘사해내고 있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당대의 사회와 시대 속에서 만들어지기마련이다. 모든 인간은 이들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피우메 정부 시절 단눈치오가 기초했던 정치 조직의 모든 면모를 철저히 표절했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단눈치오를 예수의 등장을 알린 세례자 요한처럼 파시즘의 메시아로 만들어 놓았다. 예수의 잉태를 수태고지한 천사 가브리엘의 이름을 지닌 단눈치오는 파시즘의 잉태를 수태고지한 인물로도 이용된 셈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를 성실히 참고한 히틀러의 나치 정권 또한 단눈치오가 의도치 않게 만들어둔 문화의 착실한 수혜자였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로 통용되는 홀로코스트 사실 유대교에서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에게 바치는 번제 의미했다. 단눈치오의 문학적 상상력은 자신의 피우메 시절 피우메를 가장 아름다운 번제(holocaust) 도시 명명한 데서 정점을 찍었다. 파시즘의 성격에 인종주의가 강하게 결합한 나치즘은 분명 단눈치오의 상상력을 흡수하며 용어 홀로코스트에서도 주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파시즘의 등장이 단눈치오 사람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니다. 휴스핼릿은 파시즘이 예외적인 역사 운동의 기형적 산물이 아니라 유럽의 지적·사회적 삶에 깊이 뿌리내린 경향들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해 나온 어떤 것임을 알게 된다.(16)라고 하며 사회적 맥락을 잊지 않고 언급한다. 모든 현상은 당대의 시대와 사회가 구성원들 함께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결과물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단눈치오가 누누이 주장하던 자신의 정치 기조, ‘시학의 정치 피우메에서 꿈꾸었던 자신의 유토피아는 철학자- 국가를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더하여 단눈치오가 니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볼만 하다. 현재 신보수주의 불리는 네오콘 사상적 기반 또한 다름아닌 플라톤 니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 순수한 진리의 세계 몽상가 단눈치오가 주목했던 이상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역사이래 서양인들의 정신구조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세상에 하나의 진리 존재한다는 일원론적인 시각과 부합하며, 유일신을 상정하는 서양의 기독교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단눈치오가 매료되었던 세바스티아누스역시 황제를 섬길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받았고, 세바스티아누스는 신을 믿기로 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서양문화의 이러한 단일성 배타성 정신구조는 플라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단눈치오의 정치적 사유에 토대를 제공한 다른 인물은 니체였다. 단눈치오는 여러 철학자들의 견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를 내놓았는데, 니체로부터는 엘리트주의 니체의 저술에서 보이는 선언문의 형태, ‘초인 이미지와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정황을 저자 휴스핼릿은 기록하고 있다. 나는 신보수주의자들이 단눈치오의 사상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단눈치오의 정치적 사유와 신보수주의자들이 기반하는 사상가들이 플라톤과 니체라는 점에 주목해보고 어떤 연관성을 찾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100여년 단눈치오가 의도치 않게 뿌린 씨앗은 분명 파시즘과 나치즘에 이용된 있다. 역사 속에서 돌연변이를 거치고 구체성을 띠어 현재의 신보수주의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부분이 있으리라 충분히 예상할 있겠다.

 

 

 

[3] 저자의 균형 감각과 글쓰기

 

시대를 관통하듯 자신을 몸소 시대 속으로 던져넣으며 살았던 단눈치오. 인물의 다층적인 인물됨과 시대 상을 900페이지가 넘는 원고에 담는 , 그것도 지루하지 않게 담아내는 작업을 마주하는 일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대체로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책의 첫머리는 인물의 정치적 삶에서 정점을 이루던 시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저자는 단눈치오가 활동했던 극적인 시기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저자의 연극적 상상력으로 독자들은 단눈치오가 활동했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돈의 시대상을 함께 목격하는 것같다. 어느 순간 독자들은 단눈치오가 시인으로 등단하던 17 당시로 돌아간다. 등단한 젊은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자신이 낙마하여 사망했다는 거짓 뉴스를 퍼뜨리게 된다. 독자는 단눈치오가 만들어내는 거짓 뉴스의 생산 현장을 상상하게 된다.

 

개인의 인간적인 면모만을 살펴보았을 , 단눈치오는 단연코 호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사람들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전쟁광이면서,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던 호색한이자, 무분별한 낭비가이고, 정치 지도자로서는 현실 감각이 전무한, 신뢰하기 힘든 몽상가였다. 그러나 저자가 이러한 인물을 조명하는 방식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균형잡혀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저자는 단눈치오를“단순히 혐오스럽거나 광적인 인물로만 치부될 없으며 (…) 완전히 정상인 존재”라고 평가한다. 단눈치오를 비판하면서도 저자는 그의 문학성과 예술적 재능, 그리고 섬세한 감수성을 충분히 조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의 복잡다단한 층위를 보여주려고 의도했음을 읽을 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우선 단눈치오가 남긴 방대한 양의 수첩때문이기도 하다. 휴스핼릿의 구체적이고 섬세한 인물 묘사는 분명 메모광 단눈치오가 남긴 유산에 힘입은바 크다. 단눈치오에게는 글쓰기의 모든 원천과 글감이 결국 자신이 보고 관찰한 모든 것을 담은 수첩 안에 있었다. 저자 역시 방대하고 자세한 단눈치오의 메모를 따라가며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것이다.

 

그의 공적인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전체적인 윤곽을 가늠할 없는 모자이크 조각처럼 미세한 관계들을 포함한 사적인 삶과 공존했다.(524) 저자가 평가하는 단눈치오의 삶의 양태(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공존) 단눈치오의 삶을 담은 책의 글쓰기 방식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눈치오라는 인물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모자이크 조각처럼 번갈아가며 독자에게 제시하여, 방대한 글이 가져올 있는 지루함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책의 차례를 다시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1부는 단눈치오의 정치적 경력이 정점이던 시기부터 시작하여, 시인으로 등단하던 시절, 그리고 스스로 전설을 만들던 인물의 주요 시기를 스케치하듯 빠른 전개로 보여준다. 2부에서는 단눈치오의 다양한 면모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여러 키워드를 장의 제목으로 하여 인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니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엘리트주의 초인”,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에 대한 열망을 암시하는 생명 같은 ()  설정해놓은 부분을 있다. 혹은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한 단눈치오의 생각을 엿볼 있는 () 고향”, 단눈치오가 되고자 했던 귀족 대한 취향, 그리고 단눈치오가 유달리 관심을 보였던 혹은 페티시적인 대상을 암시하는 순교”, “질병”, “”, “속도등과 같은 장들도 인물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3부에서는 1부에서 보여주었던 정치 경력의 정점기에 전쟁 영웅으로서 활약하던 시기와 피우메 점령 시기, 그리고 물러나 말년의 은둔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끌어내며 인물의 일대기를 마무리짓고 있다. 정치 무대에서 물러난 , 단눈치오는 은둔지 비토리알레에서 자신만의 세계 속에 매몰되어 살아갔다. 코카인과 아편, 수면제 진통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무솔리니가 종종 보내주던 선물을 받거나 장군 서열로 진급되면서 자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단눈치오가 파시스트 정권에 길들여지며 잊혀져가는 말년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의 권력을 점점 장악해가는 파시즘 세력의 행보와 교차되며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정리하며

개인은 누구나 당대의 사회 속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개개인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단눈치오의 분열적이고 극단적인 이면들은 마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닮기도 했다. 특히 책은 단눈치오라는 인물이 허물어져가는 모습과 함께 1 세계 대전 이후 정치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광기로 치닫고 있는 이탈리아 사회를 묘사해내고 있다. 역사의 가운데에 스스로를 던져 세상과 긴밀하게 호흡하던 단눈치오는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만큼, 단눈치오는 점점 권력을 잠식해들어오는 파시즘 정부에 모든 것을 강탈당하듯 이용되기도 하였다. 무솔리니 파시즘의 거의 모든 현현은 단눈치오의 상상력에 기원한다. 나아가 나치 독일에도 단눈치오의 상상력은 바이러스처럼 전이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나아가 플라톤과 니체로부터 받은 사상의 관점에서 단눈치오의 상상력은 소멸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보수주의에도 이어지고 있지 않은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니체와 단눈치오에게 동시에 영향을 인물이 바로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라고 저자는 언급했다.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니체의 초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하는 점이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단눈치오의 소설 <무고한 존재>(문학과지성사, 윤병언 옮김, 7쪽에서 인용한 부분을 재인용함)에서 단눈치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정의는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세상의 어떤 법정도 나에게 판결을 내릴 없을 것이다.바로 초월한 인간’, ‘정복되지 않은 ’, ‘초인으로서의 인물상과 유사한 맥락이 증거이다.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어느 문인이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스스로를 들이밀며 시를 쓰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던가. 시인으로서 단눈치오는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걸고 처럼 세상을 향해 스스로를 밀고나가며 삶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단눈치오는 어쩌면 평생을 자신이 꿈구는 문학적 환상의 영역에서 살아간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19세기라는 시대의 무대에서 스스로 주인공을 맡아 공연하는 연극 배우이자 광대이기도 했으며, 세계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로 보아도 무방할 같다. 물론 단눈치오를 미화하거나 현재의 도덕적 기준으로 그를 소급하여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판단기준 너머에 존재했던 사람이다. 옮긴이는 단눈치오를 가리켜 초인으로서 지상의 맥락을 벗어난 기호라고 표현했다. 그는 탈맥락화된 기호-인간이었다는 말이다. 현실 정치에 뿌리는 내리고 있던 무솔리니와는 달리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무관했던 단눈치오는 어디에도 안착하여 뿌리를 내리지 않는 부유하는 기호였기에 오히려 파시즘에 도구로서 이용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눈치오는 분명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어떤 교훈이나 배움을 얻을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인간이 누릴 있는 가능성의 극한을 시도해본 사람이자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저자 루시 휴스핼릿이 단눈치오에 주목하고 오랜 시간을 책에 할애한 이유가 바로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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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가게 고양이는 삼청동 골목을 누비는 고양이었다. 문 밖에서 빼곰 고개를 빼서 갤러리 안을 들여다본다. 날 쳐다보면서 문열어달라는 모양으로 울어댄다.

문을 열자 잽싸게 들어온 녀석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그림과 사람을 구경하다 곧바로 낮잠을 자기 시작....

한동안 낮잠을 잔 후 볕이 좋은 곳에 앉아서 어슬렁거리기 시작. 햇볕 쬐며 나와 마주보기 15분...^^;;
다시 뒤돌아서 면벽수행(?) 한 15분...
갤러리에 나타난 손님은 오후의 햇살을 즐길줄 안다. ^^

갤러리 대표님이 말씀하시길, 이전에 이녀석은 계단 중간에 이렇게 앉아있거나 낮잠을 잔 적이 없었다고...

내가 만만한 것이구나 ...ㅋ

오늘 나타난 “내 눈에 예쁜 것”



#삼청동고양이 #갤러리포트폴리오 #GalleryPortfolio #내눈에예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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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전시 관련 소식입니다.

서울 3호선 안국역에서 정독 도서관 올라가는 골목길에 있는 

작은 갤러리 Gallery Portfolio에서 열리는 소소한 그림 전시 입니다.





<내 눈에 예쁜 것>

윤영주 개인전




기간: 2019.04.02 (화) - 04.08 (월)

장소: Gallery Portfolio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72번지(안국동 1901) 







 

전시 포스터 이미지









 

엽서 이미지











액자 이미지

 

 

 

 


 


 

갤러리 포트폴리오

(전시 준비 마무리된 모습)



 




갤러리 포트폴리오 오시는 길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정독도서관 가는 골목길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이니스프리 건너편, 경복궁빵집 옆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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